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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인권활동가들의 고민>
인권으로 전환하자 - 방역의 정치 넘어 인권의 정치로

첫 번째 주제 : 코로나19와 인권의 원칙 발제문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2020.11.3)

<들어가며>

위기는 늘 약한 고리를 더 취약하게 만들어왔다. 코로나19 위기가 몰고 온 한파는 더욱 시린 한편 인권운동의 대응은 그만큼 날카로웠을까? 전전긍긍해온 우리 인권활동가들이 서로를 토닥이며 우리의 가쁜 숨을 고르고 깊은 호흡을 해보고자 이야기마당을 만들었다.
일단 제안하는 것은 인권의 원칙들의 지도를 그려보자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인권운동은 구체적인 인권침해 현장을 드러내왔다. 다양한 맥락과 처지에서의 구체적인 고통들, 그리고 쉽사리 일반화할 수 없는 특수한 차이들과 그런 특수성에 기초한 취약함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일상적’이고 ‘정상적’으로 치부돼왔던 것들의 정당성을 문제 삼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소위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목표 자체가 문제이며, 새로운 대안은 소위 ‘일상’으로 삼아온 것들의 해체이자 비판적인 재구성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기본 규범으로 삼을 공통의 언어를 충분히 가다듬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위기를 둘러싼 숱한 논의에서 ‘인권의 원칙’이란 말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정작 그 ‘인권의 원칙’이란 것은 몇 몇의 대표 격인 권리 이름(가령 개인의 프라이버시, 집회의 자유 등)의 나열에 그치곤 한다. 그리고 그런 권리들은 어김없이 공익, 안전 등과 대립 항으로 설정되고 방역조치의 거추장스러운 훼방꾼으로 공격받곤 했다. 배제와 혐오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태도들이 증상이라면, 그 원인이라 할 근본적인 정치경제적 구조를 충분히 들춰내지는 못했다. 주로 두들겨 맞는 표적과 이슈들 뒤에서, 정작 중요한 의무주체인 정치경제적 권력은 위기를 기회삼아 면책을 누리고 민주적 제약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에게는 당장 보이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리의 차원을 구별하고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의 차원에서는 지금 공백이지만, 권리의 차원에서는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상 ‘OO만큼의 수준을 당장 실현할 수 없다’는 말과 ‘OO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말은 구별돼야 한다. 또한 만만한 개인이나 집단을 표적삼아 지탄하고 부당한 전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운동이 날카롭게 가다듬어야 할 인권의 언어를 점검해보자는 게 이 토론회의 취지이다.

왜 인권의 원칙을 말하는가? 원칙에 기반한 접근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

인권운동은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바뀌어야 할 체계를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일을 해왔다. 코로나19 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는 새로운 고통을 가져 왔다 기보단, 이미 있던 취약함 속에서 고통을 가중시켰다. 장애인, 여성, 아동, 노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취약한 고리에 속한 개인들은 기존의 불평등위에 얹혀진 팬데믹에 휘청거렸고, 그런 상황에서 나온 갈급한 요구들을 시민사회의 여러 부문이 드러내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고통을 ‘나열’하는 것이, 자칫 ‘불행 경쟁’이 되고 ‘불쌍한’ 이미지를 반복재현 하는 건 아닐까? 권리 요구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함’에 대한 동정과 시혜를 강화하는 건 아닐까? 그럼으로써 취약하고 무력한 사회적 위치를 더 공고히 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이 힘든 상황이다. 불안하고 무기력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호황기에는 노동시장에 가장 나중에 진입하고 불황기에는 가장 먼저 퇴출되는 취약 계층, 교차되고 중층적인 불평등에 퇴행하는 젠더 문제 등 기존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서사에 빠져들고, 심지어 자기가 당한 고통의 경험을 근거로 타인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유혹도 크다. 그럴수록 인권이 파이다툼이 되어선 안 된다. 구별과 배제의 증상들이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명확히 지목해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약세자의 고통을 정확히 표현하고 이해하기 위한 원칙이 요구된다. 인권의 원칙에 기반한 접근은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권리에 대한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권리언어의 오남용과 인권의 원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이전에도 권리언어는 대결의 문제, 소유를 늘리는 것, 기득권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으로 오남용 돼왔다. 위기 속에서 그런 담론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본적 인권 대 여타의 이익을 대결 구도로 만드는 것,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에 몰두하는 것, 위기니까 ‘참아라, 복종하라’는 통제가 강화되는 속에서 기득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강자의 자유’(약자의 부자유를 전제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개인적 소유로서의 몸과 재산 논리는 감염이 온전히 개인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인 양 위험을 개별화·사유화시킨다. 이는 알아서 감염되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지며 경제적 생산성을 유지하라는 불가능한 요구가 될 수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한’ 낙오자, 심지어 범죄자가 되고, 펜데믹 시대에 필요한 스펙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된다.

‘아파도 일해야 한다’는 기준을 ‘아프면 쉬어야 한다’로, ‘아프면 민폐다’를 ‘폐 좀 끼치며 살 수 있다’로 바꾸는 것은 개인에게 전가되는 책임이 아니라 연대의 원칙이 돼야 한다.
박탈, 배제, 고립 등으로 규정되는 이들의 불안정한 사회 내 위치는 권리를 요구하고 주장할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고 해서, 저절로 단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들끼리 서로 연대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간의 위계를 설정하고 빈약한 자원을 두고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취약성을 서로 연결하여 연대성으로 전환하는 것이 모두가 할 일이다. 이런 연결을 위해 인권의 원칙이 요구된다. 고통에 대한 공감의 호소는 구구절절함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이 지켜나가야 할 공통된 권리의 언어로 매개될 필요가 있다. 취약함은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적 상태이다. 그런 상태가 공통의 권리 주장으로 연결돼야 한다. ‘서로가 OO 되기’를 통해 연결돼야 한다. 인권의 원칙을 정확히 말함으로써 권리의 언어가 인간 존엄성 훼손에 대한 분노와 연대감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기본적 인권으로 요약되는 원칙이 위기 속에서 취해야하는 다양한 행위 속에서 집합적인 의지의 나침반이 돼야 한다.

팬데믹 이후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로 결정돼있는 ‘이미 온 미래’이다. 기존의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이 더 공고화되고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 지금을 삶에 대한 존중과 연대감을 취할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연대의 원칙은 가장 취약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을 먼저 보호하는 것이다. 사회적 배제와 고립이라는 인위적인 바이러스를 변화시켜야 감염병에 대처할 수 있다. 서로가 연루돼있고 경계를 정할 수 없이 얽혀있다는 의존성에 대한 인정 속에서 권리언어는 구분이 아닌 연결의 교통이 돼야 한다.

아래에서 각 원칙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 글에서 기존의 ‘다수자, 소수자’라는 표현보다 ‘강세자, 약세자’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권력 불평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국가권력, 자본, 사회, 타자 등 다양하고 행사하는 권력의 성격도 그러하다. 흔히 소수자는 ‘사회적 약자, 하층민, 배제된 집단, 피지배계급, 불리함을 강요받는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종속된 사람들’ 등 다양하게 불려왔다. 이름의 변주는 권력 관계 속에서 약자를 파악하고, 그들이 사회를 바꿀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권력, 소위 표준과 정상을 구성하는 권력을 누리는 쪽이 강세자라면, 약세자는 그 표준에 의해 규정받는 한편 표준을 변주하면서 새롭게 생성하는 사람일 수 있다.

<세부원칙에 대한 설명>

I. 존엄성 존중의 원칙

1. 사회적 존엄의 실현과 보장
인간 존엄성은 모든 인권의 토대이자 목적이다. 인권은 존엄성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존엄해질 수 있는 사회적 관계와 조건을 인권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어떤 자격이나 속성, 본질을 따져서 선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부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 존엄성은 사회적 존엄으로서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존엄성이다. 어떤 상태의 인간이든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겠다는 인간 사이의 인정(recognition)이자 실천의 약속이다. 무슨 속성이 존엄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존엄해지기 위해 어떤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야 하느냐에 존엄성을 말하는 의의가 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우리는 숱한 존엄성의 훼손을 목격한다. 가령, 그 누구도 숫자로 헤아려지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를 익숙한 통계와 함께 시작한다.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번호로 표시된 존재들, 그리고 팬데믹의 여러 영향 속에서도 유독 경제적 효과를 강조하는 숫자들 속에서 살아간다. 숫자가 아니라 고유한 존엄성을 갖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발견하고 존중하고, 숫자로의 죽음이 아닌 고유성에 대한 애도가 요구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존중된다는 것은 개인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인간들의 존중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존엄의 추구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자원과 기회의 제공이라는 기본적 필요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2. 기본적 필요의 원칙
위기 시에는 긴급성과 갈급성에 대한 사회적 응답 책임이 있다. 평상시에 지배적으로 작동하던 배분원칙이 비-기본적 필요와 선호, 시장주의나 기여에 대한 보상 등이라면, 인권은 기본적 필요의 원칙을 강조해왔다. 위기 시에는 더욱더 기본적 필요의 원칙이 필수적이다. 긴급하다는 것이 즉흥적이고 임시적인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당장 살고 보자’는 초단기 대책과 접근은 자칫하면 존중을 빠뜨리기 쉽다. 긴급지원을 물질적인 것에 국한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일자리를 잃는 사람은 소득도 잃지만 존중감도 잃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고유성과 특이성을 고려한 거리두기나 방역대책이 필요하다. 사회적 고립 속에서 생계지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최소한의 사회적 활동과 교류가 없으면 발달장애인이나 노인들의 경우처럼 삶이 무너진다.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기본적 필요에는 긴급생계지원 뿐 아니라 이 아니라 ‘기본적 필요’를 원칙으로 고려해야 한다. 필수적인 기본적 필요는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오해돼서는 안된다. 존엄성을 존중하는 기본적 필요는 사회에서 ‘잊혀지고 안 보이는 상태’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원으로서 인정받는 것, 자기결정을 존중받는 것, 정체성에 대한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것 등이 포함된다.

기본적 필요의 원칙에는 보건의료, 의식주, 이동 등의 기본적 필요들이 공공서비스로 제공되어야 하고, 노인과 감염 취약계층을 우선 지원해야 하며, 필수적 업무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 지원이 포함된다. 가장 열악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시하고 재난 불평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기본적 필요 원칙은 인간다운 삶을 향한 약세자들의 열망에 초점을 맞추고, 약세자들이 일방적 수혜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적 역량을 같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충족돼야 한다.

3. 의존과 취약함에 대한 존중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근원적 의존성과 취약함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 인간은 타자 뿐 아니라 인간 외의 온갖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의존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자체이자 생존방식이다. 각자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이러한 의존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이고,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자주 인용된 문구 중에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폐 좀 끼치며 살 수 있다”가 있다. 또한 팬데믹에 대응하는 유엔과 국제인권기구들의 원칙에선 “모두가 안전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의존과 취약함은 열등한 것이 아니며, 위기를 명분으로 희생양이 되거나 나중으로 밀릴 대상이거나, 다수를 위해 감수해야 할 소수의 피해 같은 것으로 다뤄져선 안 된다. 의존과 취약함에 대한 존중은 구체적인 돌봄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 돌봄은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고쳐나가는 모든 활동”(조안 트론토)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활동의 부차적 영역으로 밀쳐지고, 가정과 여성에게 전가되든가, 그게 아니면 저임금 노동의 영역으로 일부 흡수하여 착취하는 돌봄 시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의존과 취약함에 대한 존중은 돌봄 활동의 필수성을 말하는 것이며, 연관된 모든 이들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아에 대한 존중감 속에서의 삶을 말한다. 이것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최일선에서 돌봄에 나서고 있는 돌봄자들(의료인, 돌봄노동자, 청소노동자 등)에게도 절실하다. 돌봄자에 대한 존중은 구체적인 노동환경의 보장과 지속적인 제도적 개선으로 증명돼야 한다. 돌봄자들에게 사회구성원들이 이것을 보장하지 못하면, 위기관리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

II. 기본적 자유 존중의 원칙

4. 자유 제한의 정당화 요건: 존엄성 침해 금지의 원칙
기본적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데 근본적이고 중요한 자유들을 말한다. 자유로운 사회는 뭐든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회가 아니라 존엄성 존중과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위해 합당한 규제를 필요로 한다. 필요한 규제를 할 때, 판단 기준은 그 제한으로 인해 더 근본적인 존엄성과 자유의 관계를 지키고 강화하기 위한 것인지 여부다. 자유의 제한이 강세자를 이롭게 하고 약세자를 더 불리하게 만든다거나,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능력을 제약하는 것이어서는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다.

감염병 예방이라는 명분의 비상조치에도 이 판단기준은 유효하다. 방역을 위한 결정과 조치들이 기본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많이 벌어졌다. 모호한 기준, 관련된 위협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총체적 제한, 약세자에게 불리한 예외적 조치 등이 문제였다. 모욕적인 방식이라고 간주되는 처우를 관련 당사자들이 받게 되는 문제, 방역을 위해 필수적인 정보가 아니라 여론재판을 부르는 정보의 노출과 공유, 필수적이고 예외적으로 운영돼야 할 공공시설이 제일 먼저 가장 오래 폐쇄되는 문제, 특정 개인과 집단을 차별하는 조치 등(누구는 집단 격리되고, 누구는 영업의 자유를 누리는...)이 문제됐다. ‘위기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타자에 대한 배제와 권리 유예를 허용하거나, 그 가운데 집단적 두려움과 분노, 보복과 응보의 감정을 자유 제한의 명분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인권에 대한 크나큰 위협이다.

공익이란 막연한 논리가 아니라 ‘헌법적 권리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방역을 위한 결정과 조치들은 절차적 요건만이 아니라 내용적 요건을 같이 충족시켜야 한다. 법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으면, 그냥 법을 만들어버리는 식이 되어선 안 된다. 법이라는 요건만이 아니라 법의 내용이 존엄성과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5. 참여할 자유
자유는 자급자족이 아니다. 자유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고 타자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하다. 자유는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유지된다. 팬데믹 상황에서 생산되는 자유는 무엇인가? 한편으론 특권이자 권력이 되는 자유와 다른 한편으론 저항할 수 없는 통제를 받는 부자유가 사회적 관계와 조건의 비대칭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자유 제한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방역을 위한 제한조치들의 차별과 배제의 효과를 방지해야 한다. 약세자의 권리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긴급행동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무조건 제한이 능사가 아니라 결사와 행동이 가능한 원칙도 마련해야 한다. 정치적 참여가 지속되어야 자유의 편차를 방지할 수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차별적인 정책들이 추진되는 데 방역을 위해 ‘가만 있으라’는 압박과 경제를 살려야 하니 ‘풀어 주는’ 압박이 불균등하다. 흔히 자유의 대립으로 기술되는 상황은 서로가 대등한 조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강세자가 압도하는 권력관계에서 강세자가 다른 쪽과 타협하거나 다른 쪽의 자유를 옹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위기 때문에 더욱 위축된 약세자의 부자유가 강세자에게는 유리한 기회가 되는 자유의 편차가 불평등 구조의 심화와 악화를 부를 것이 우려된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할 자유는 서로의 기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사하는 정당한 자유이자 힘이다. 참여할 자유는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뿐 아니라 타자, 특히 약세자의 권리를 옹호할 자유의 행사이다.

6. 평등한 자유
평등하게 봉쇄되는 것이 좋은가? 평등하게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좋은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평등하게 부자유하게 되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당장의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방역에 필수적인 행위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한조치 가운데서, 아동의 교육, 노인의 돌봄, 여성의 경제활동 유지, 필수노동자의 안전 등을 위한 조치 등을 우선순위로 꼽는 것은 그것이 자유의 전체 체계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자유는 강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고, 자유 없는 평등은 약세자의 시민으로서의 평등한 지위를 위협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특히 불리하고 취약한 이들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자유의 전체체계를 강화하는 것이고, 약세자의 평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평등한 자유를 지키는 길이다.

III. 존중의 평등 원칙

7. 심층적 차원의 평등
표층적 평등과 구별되는 심층적 평등이 요구된다. 그냥 겉보기에 똑같은 기계적인 평등은 사실상 불평등이다. 사회적 관계를 고려한 심층적 차원의 평등은 펜데믹 같은 위기 시에는 더욱 정당화된다. 모든 학교를 균일하게 닫고, 비대면 학습을 하는 것의 문제에서 보듯 돌봄과의 연계, 장애아동의 특별한 요구에 대한 부응, 가정상황의 불리함 등에서의 합당한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심층적 차원의 평등일 것이다.

거리두기 속에서도 생산 현장은 돌아가는 데 돌봄 현장은 그렇지 못했고, 돌봄 책임은 젠더 불평등을 심화했다. 똑같은 거리두기는 기존의 젠더 차별을 심화하고 불균등하게 부담을 전가했다. 분배되는 자원과 기회의 고유한 특성을 살필 뿐 아니라 그 자원과 기회가 요구되는 특별한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8. 동등한 존중의 평등
심층적 차원의 평등은 동등한 존중을 요구한다. 어떤 재분배 조치가 겉으로는 평등해보이나 동등한 존중을 표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보호 조치가 기존 가족체계와 성별분업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취약함을 고려한 차등 분배를 한다 할지라도, 젠더차별은 더 심화될 수 있다. 가족 안에서 또 지역 사회 안에서 ‘은폐돼온 온 차별’로 인해 배제를 심화할 수 있다.

세대주를 통한 재난 지원금 지급이 한 사례이다. 세대주를 통해 수혜 받도록 연결하는 장치들은 가족 성원에 대한 동등한 존중의 평등을 침해하지만, 중립적인 것으로 가장된다. 또한 돌봄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와 책임의 할당에서의 불평등, 경제 불안에 가장 먼저 퇴출되는 불안정 저임금 여성노동, 중립성을 가장한 경제 중심 관점에서의 지원은 젠더·계급·인종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임금을 버는 건 일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일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더욱 주변화 시키고, 여성의 참여를 배제하는 남성 위주의 노동문화를 강화한다. 가정, 사회, 일터, 정치에서 여성의 인격과 여성의 일을 인정하는 것이 동등한 존중의 평등이다.

9. 관계적 평등
물질적 불평등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약세자는 경제적 불평등만이 아니라 이등 시민, 삼등 시민 또는 열외자로 취급받는 사회적 불평등,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는 정치적 불평등의 중층적인 위협을 받는다.

사회관계에서의 상호 존중이라는 관계적 평등이 중요하다. 이미 존재하던 차별적 시선과 대우에다가 ‘감염(위험)자’이고 ‘감염요인’이라는 편견과 혐오까지 덧붙여진 개인과 집단들이 있다. 서로를 평등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태도를 표출하는 관계의 확립이 요구된다.

IV. 연대성의 원칙

10. 불안을 방역하는 연대, 협력과 회복의 동력이 되는 연대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 될까봐 두려움에서 따르는 방역 행동과 나와 타자를 위해서 취하는 방역행동은 다를 것이다. 불안은 타자와 함께 가치 있는 바를 도모할 의지와 여지를 빼앗으려 노리고 있다. 불안은 혐오와 희생양을 부르며 믿을만하고 지속적인 협력을 방해한다. 우리의 실존은 불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미약하지만, 같이 무릅쓰고 헤쳐 갈 용기를 내보자고 서로를 초대하는 길이 있다. 설령 감염이 되더라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지와 지원을 받고 회복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개인들의 행동은 다를 것이다. 그럴 믿음이 없다면, 숨어들 뿐 아니라 생계위협과 혐오를 피하려는 개별적이고 사적인 방도를 꾀할 수밖에 없다. 회복탄력성이 불안을 방역할 수 있다. ‘감염병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불안에 맞서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인권이 곧 최상의 방역’이라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11. 돌봄 연대, 관계적 능력을 발휘하는 연대
돌봄은 팬데믹 이전에도 늘 위기였다. 위기에서 더 큰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메울 체계를 세우는 것이 전환의 과제이다. 돌봄은 당장의 보육과 간병 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태와의 관계, 교육과 의료 등의 기본적 필요의 충족 체계, 노년 세대와 ‘미래’가 아닌 ‘현재’인 세대 모두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인권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관계적 측면에서 논의돼야 한다. 연대는 인간의 관계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인권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율성, 사적 자치능력, 개인적 선호만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교통하고 협력하면서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과 협동의 규칙들을 논의하고 수립하며 그 규칙들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관계적 능력이 인권에는 필수적이다.

12. 권리로 매개되는 연대
우리들 각자에겐 저마다의 고통이 있다. 사회적 약세자들의 처지 또한 다양하고, 취약하고 고통받는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연대하는 사람은 없다. 경제적 형편이나 비슷한 처지가 당연스레 연대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자선과 시혜와 달리 연대는 평등한 자유의 주체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상호교통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는 성원권이 확실하고 그에 따른 권리도 명확하며 참여할 역량이 있는 시민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비시민, 이등 또는 삼등 시민들이 ‘사실로’ 존재한다. 이들 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매개되는 연대에는 한계가 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감수성은 인식의 노동과 함께 해야 하고, 평등한 자유의 권리를 매개로 한 관계성의 추구가 인식의 노동이다. 약세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곧 연대이다.
약세자의 권리를 인정하려면, 약세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려면, 비판적 정신과 함께 해야 한다. 지금의 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약세자가 약세자의 자리를 강요받는 억압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적 관계를 달리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가 아닌, 알던 대로 하던 대로가 아닌 다른 관계와 다른 삶을 그려볼 수 있다.

앞서간 인권교육활동가인 파올로 프레이리는 <연대의 페다고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세계에 적응시키기 위해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다. 변화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변화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변화시킬 수 있고 그런 시도를 해 봐야 한다는 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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