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사회

A: 나, 노안 때문에 요즘 안경 두 개 쓴다.
B: 두 개?
A: 응. 가까운 거 볼 때랑, 길거리에서 먼 데 볼 때랑 바꿔 써.
B: 불편하겠다.
A: 응. 젤 불편할 때는 사람들 얼굴 보며 얘기해야 하는 데 자료도 같이 봐야 할 때야. 자료를 보려고 이 안경을 끼면 사람들 얼굴이 흐릿해 보이고. 사람들 얼굴 자세히 보려고 딴 안경을 끼면 자료가 안 보이고.
B: 늘 두 개의 시야 사이를 오가네. 나도 요즘 시야가 흐릿한 데 곧 그렇게 되겠다.
A: 두 시야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조리개가 있었으면 좋겠어.
B: 우리들 시력에만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갈수록 느끼는 건데 한국 사회에도 안경 같은 게 필요한 거 같아.
A: 무슨 안경?
B: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 말이야.
A: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엄청 달라 보이는 데, 사회에 요구되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은 뭐로 만들지?
B: 인권교육 같은 걸로?

지긋지긋한 공부

A: 맨날 공부해야 할 게 허다한데 뭘 또 배워? 공부라면 지긋지긋하다.
B: 네가 지긋해하는 그런 공부 말고.
A: 그럼 무슨 공부?
B: 넌 왜 공부가 지긋지긋한데?
A: 음… 내가 지긋지긋해 하는 공부란… 하면 할수록 남과 비교해서 내가 초라해지는 공부, 갈수록 암기하고 익혀야 할 것만 늘어나는 공부야.
B: 또 하면 할수록 전문가들을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공부지. 그래서 주눅 들고. 공부하다 보면 빚도 엄청 쌓여. 돈이 좀 많이 들어야 말이지.
A: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기력해져. 인권교육은 그런 공부와 뭐가 다를까?
B: 네가 싫어하는 공부를 뒤집는다고 생각해봐.
A: 뒤집는다? 그럼 경쟁과 비교 말고, 암기 말고, 전문가나 가르치는 쪽의 우위 말고, 전문가의 일방적 전달 말고, 무기력 말고…. 뭐 이렇게 되네.
B: 반대말을 모아 보면 협력과 공유, 비판적 사고, 위계를 지우고 서로 배우기, 힘이 생기는 배움이 되네.
A: 그런 공부가 세상에 어딨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냐. 우리가 생각해 온 공부는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 위계에서 더 높은 학교로의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거였는데.
B: 이상적이지. 근데 인권교육의 이상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배움이 할 수 있는 참다움이 아닐까? 암기와 기술만을 요구하는 교육에 이미 우린 너무 물렸잖아. 이제 그만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인권교육은 권리다

B: 무엇보다도 인권교육은 그저 하면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권리이기도 해.
A: 우리의 권리라고?
B: 그래. 권리!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권리를 지킬 수 있겠어? 또 권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겠어?
A: 우리 주변을 보면, 인권이나 평등 관련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걸.
B: 그렇게 권리를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 아닐까?
A: 권리 침해라는 생각까지는 못해봤는데… 내 경우엔 내가 받는 모욕과 무시를 ‘내가 못나서’라고 내 탓으로 여기게끔 길들여져 온 것 같아. 또 노동착취를 열정 또는 헌신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B: 우리 주변엔 차별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문제제기하는 쪽을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내모는 사람이 많아. 나도 거기에 쉽게 동조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
A: 특히, 타인에 대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무시를 자기의 자유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
B: 이상한 제목과 명칭을 씌워 피해자를 모욕스럽게 부각시키고 가해자의 존재는 지워주는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인권감수성 결핍이란 생각도 자주 하게 돼.
A: 돌이켜보니 구석구석 인권교육이 필요한 데가 많구나.
B: 지금껏 못 배웠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해 알 수 있어야지. 그 앎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해.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만든 인권교육길잡이 책<인권교육,날다>

 

인권교육을 옹호하는 근거들

A: 인권교육은 한편으론 의무이기도 한 것 아닐까? 인정받을 권리는 곧 타인을 인정할 의무이고 자유를 주창할 권리는 곧 타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할 의무이니까.
B: 그래.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전문)해야 한다고 돼 있어.
A: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강화”(제 26조)여야 한다고도 써있네.
B: 또 있어. 유엔에서는 ‘인권교육훈련선언’을 2011년에 채택했어. 그에 앞서 1994년에는 유엔인권교육을 위한 10개년 행동계획을 채택하기도 했어. 이런 행동계획의 요지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삶을 위한 학습이란 거야.
A: 그럼, 한국에서도 그에 따른 노력이 있어야 할 것 아냐?
B: 물론이지.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교육에 노력해왔어. 무엇보다도 국가는 인권교육에 대한 의무가 있어. 유엔의 ‘인권교육훈련선언’에서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 정책과 절차를 적용해 인권교육훈련을 실행하고,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 7조)고 명시했어.
A: 그러니까 인권교육훈련에 기반이 되는 법 제정 등을 해야 한다는 거네.
B: 그렇지. 가령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교육훈련을 증진하고 공공기관과 민간 활동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해. 2014년에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어.
A: 그래서 인권교육법안이 생겼어?
B: 아니. 법안 철회로 끝났어.
A: 왜?
B: 일부 단체들이 ‘인권교육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 ‘동성애 옹호 등으로 국민의 안전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식의 반대활동을 벌여서 결국 법안이 철회됐어.
A: 반대의 이유 자체가 인권과 거리가 머네. 정말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것 같은데.
B: 그러게. 인권교육의 원칙은 평등, 존엄, 화합, 반차별인데 말이야.
A: 인권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인권이라 했는데, 자기 권리를 걷어찬 것과 마찬가지야.
B: 인권을 내세우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자격조건을 다는 것, 그런 조건부 인권의 주장은 이미 ‘특권’이라 할 수 있어.

비판적 사고의 힘

A: 나는 말을 잘 듣고 지시에 복종하는 게 좋은 태도라고 배워왔는데… 비판적 사고를 가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B: 나도 비판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삐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
A: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곤 했지.
B: 비판적 사고든 창조성이든 ‘자유’를 필요로 하는데 우린 그런 자유를 방해받는 일이 더 많았지. 우리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엘리트의 언어나 표준화된 언어로만 말할 걸 요구받곤 했어.
A: 내겐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한 데, 그게 도대체 뭘까?
B: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란, 모호함을 떼어내는 훈련이 아닐까?
A: 모호함을 떼어낸다?
B: 가령 ‘성폭력’이라 명백히 지목할 일을 ‘어쩌다보니’, ‘몹쓸 손’, ‘스트레스로 인한 일탈’ 등으로 모호하게 말하는 일이 많잖아.
A: 그런 일을 ‘성폭력’이라 말할 수 있으면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거네.
B: 또 ‘노력이 부족해서’, ‘눈높이가 높아서’ 등으로 설명하는 언어들은 대규모의 실업과 열악한 노동현실을 가리는 모호한 언어야.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가령 지배엘리트의 시각으로 해석된 현실이야.
A: ‘변화란 불가능하다’,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거다’ 이런 것도 누군가,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의 시각일 뿐인데, 그걸 나의 시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 이런 것도 비판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
B: 내 삶의 구체적 문제를 드러내고 뭔가 요구하고 싶은 데, 그걸 국가안전이니 애국이니 하는 추상적인 논의와 맞불을 붙일 때가 많아. 그래서 내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몰거나 침묵시키지. 그런 것에 도전하는 것도 비판적 태도 아닐까?
A: 우리가 당연시 했던 해석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또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판적 사고란 거네.
B: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기존에 당연시되던 권력의 작동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는 변화를 찾아내야 해.
A: 그런 변화를 찾아내는 힘을 스스로 긍정하고 서로에게 격려할 수 있는 것에 비판적 사고의 힘이 있을 거야.

인권교육의 방법

A: 그런 힘을 기를 수 있는 인권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B: 일단 내용 자체가 내 삶의 내용, 내 삶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인 권리의 내용, 내 삶의 터에 존재하는 인권규범, 주요한 인권침해에 대한 지식, 인권에 대한 책임을 진 기관과 제도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
A: 또 배움의 방식이 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할 것 같아. ‘꿇어’, ‘외워’ 식으로는 안 될 거 아냐. 검열이 아닌 성찰을 요구하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를 통한 것이면 좋을 것 같아.
B: 공부할수록 날 무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해. 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구체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으면 해. 가령 ‘카더라’ 통신과 근거 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능력,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쟁점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 상호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
A: 나는 그런 교육을 통해 멋진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B: 다시 태어난다고?
A: 응. 우린 그냥 우연히 태어나 저절로 시민권이란 걸 가졌잖아. 그런 걸 누군가 “저절로 된 시민”이라고 말했어. 그런 시민이 다른 운을 갖고 태어난 동료 인간에게 거들먹거리고 배타적으로 군다면 시민성의 의미가 빛이 바래. ‘저절로 된 시민성’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민주주의적 시민성’으로 거듭나는 것, 멋지지 않아?
B: 그래. 좋은데! 아주 멋져!
A: 어느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장애를 만드는 건 환경이고 느끼게 하는 건 사람입니다.”
B: 인권교육이 세상을 전부 바꿀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떤 환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나 또는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를 성찰하는 힘을 기를 순 있을 거야.
A: 요즘 광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배우고 있어. 누군가를 배제하는 폭력이 뭔지도 느끼고 있어. 이런 배움이 비판적 성찰로 이어져 우리 삶을 꾸리는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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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국민 주권

A: 난리다. 난리.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B: 검은 돈으로 주고받는 이권의 정치, 권력의 사유화……. 넌 요즘 심정이 어때?
A: 어릴 적 꼬리잡기 놀이할 때 같아.
B: 꼬리잡기?
A: 머리에 선 대장은 팔짱끼고 버티는데 꼬리에 붙은 애들은 서로 잡고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뛰고 몸부림치던 놀이 있잖아.
B: 넌 머리였어, 꼬리였어?
A: 말해서 뭣하냐. 늘 꼬리였지.

정당성의 근거로만 이용

A: 내가 유권자이고 주권자인 것 맞냐? 나를 대리하거나 대표한다는 자들에게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배신당하기만 하는데.
B: 애초에 저들은 ‘국민’과 ‘주권’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해.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
A: 어떻게 다른데?
B: 일단 저들은 국민주권을 통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만 생각하지.
A: 우리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로 뽑아주기만 하면 ‘나는 국민을 통해 선출된 정당한 권력’이라고 써먹기만 하는 거?
B: 그런 써먹기에서 ‘국민’은 그저 같은 국적을 갖는 사람들의 덩어리에 불과해.
A: 정치의 무대에 등장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의사결정과 집행능력을 갖지 않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한 거지.
B: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은 명목상 주권자이지만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잖아. 그래서 개발된 논리가 헌법상의 권력에 위임한다는 거지.
A: 주권자의 의사라는 명목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뜻’이란 모호한 이름으로 대표자로 나선 권력자의 자유가 표명되기 십상이지.
B: 물론 헌법이 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행사된다고 하지만.
A: 우리를 매개로 했으니 정당하다? 그럼 국민주권이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인증서로 끝나는 거야?
B: 정당성의 근거만 제공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또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선거에 착실히 투표하러 가는 거…….
A: 에효. 대통령이 빈껍데기 허수아비였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우리 주권자들이 허수아비인거네.

권리로서의 국민 주권

B: 국민주권 개념 자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거야.
A: 정치적이란 건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대항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는 말일 거고
B: 역사적이란 건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구성됐다는 거지.

A: 지금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국민주권론 말고 분명 딴 게 있지 않을까? 정치적, 역사적으로 말이야.
B: 있지. 주권을 우리들 권리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구성하려는 주권론도 분명히 있어.
A: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B: 그러니까 주권을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이 진짜 누구에게 있는가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거야.
A: 우리가 주권자라는 건 우리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 권력을 어떻게 쓰지?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B: 우리가 주권자란 걸 관철시키려면 적극적 정치 참여의 권리, 권리 투쟁의 과정으로 주권행사를 생각해야 해.
A: 참정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대표를 선출할 때만 등장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의사를 확인하고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여야지 우리가 주권자라는 게 말이 되지.
B: 권리로서의 주권론과 권력을 옹호하는 주권론의 경합이 오랫동안 있어왔어. 우린 지금 그 경합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야.

국민 주권 vs 인민 주권

A: 무슨 역사적 사례 같은 걸로 얘기해 보자.
B: 근대적 의미의 헌법과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에서 그런 경합의 사례를 볼 수 있어.
A: 맞아. 의회 안의 정치세력과 의회 밖의 정치세력의 경합이 치열했지.
B: 구체제의 특권세력과 특권을 몰아내는 데는 힘을 뭉쳤지만, 중상층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 장악력을 빈농, 소농, 노동자, 소상인 등 민중에게 뺏길 것을 두려워했지.
A: 당연히 두려웠겠지. 민중들은 아주 배가 고팠고 자신들의 단결과 직접행동을 통해 배를 곯게 만드는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했으니까.
B: 그래서 민중들은 정치적 참여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어.

A: 그걸 표현한 것이 ‘국민 주권’과는 다른 주권론이었겠네.
B: 맞아. 둘을 구분 짓기 위해 ‘인민 주권’이란 말을 쓰기도 해. 한국에선 북한이 ‘인민’이란 말을 쓴다고 이 단어를 꺼리지만. ‘국민 주권’의 ‘국민’과 구분 짓기 위해 ‘인민’(people)이라 해보자.
A: 주권론에서 국민과 인민의 차이가 뭘까?
B: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국적보유자의 덩어리가 ‘국민’이라 했잖아. 반면에 ‘인민’은 직접 주권을 행사하고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유권자, 즉 주권행사에 참가한 시민의 집합이야. 이런 인민은 덩어리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은 존재야.
A: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았다면, 유권자의 의사는 유권자 전체의 1/n씩 모여 표현되는 거네.

B: 그런 표현이니까 대의 제도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일 뿐이야. 이런 유권자는 추상적 국민과 달리 의사결정 능력과 집행 능력을 갖는 존재야. 이런 인민은 주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행사하는 존재야.
A: 대의 제도 말고 달리 주권을 행사할 방법이 있을까?
B: ‘인민 주권’의 주창자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구상을 했어. 가령 의회가 법률안을 작성하면 개별 유권자들은 각 지구별로 주권자 집회를 열어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 그 결과가 의회에 전달되면 이를 집계하여 법률의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거야. 법률안을 작성하는 의원은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고, 유권자는 선출된 대리인(의원)에 대하여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책임 추궁은 소환과 형벌로 이뤄지지. 또 의원에 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도 구상했어.
A: 상층 계급이 그런 구상에 동조할 리가 없잖아.
B: 그렇지. 그들은 구시대의 특권층을 내모는 데는 민중들과 힘을 합쳤지만, 이런 급진적인 민중들의 주권론을 받아들일 순 없었어. 자기들 이익을 반영하는 주권론으로 물타기를 해야 했어.
A: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민 주권’이란 거네.

B: 맞아.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규정했지만 그 국민은 ‘대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덧댄 거지. 그러니까 선거 제도가 당연 필요한데, 의회를 장악한 세력은 돈 없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는 제한 선거를 내세웠어.
A: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법률 등의 제정에 직접 참가할 수도 없고, 선거에 나설 수도 없는 거네.
B: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책임추궁, 소환과 형벌 등은 꿈도 못 꿀 명목상의 주권자가 된 거지. 지배세력은 국민 주권론만 헌법에 새겨 넣는 데 그친 게 아냐.
A: 또 뭘 했는데? 제한선거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데.
B: 아주 촘촘한 사슬을 갖췄지.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인권에 대한 제한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법, 또 반선동법을 만들어서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
A: ‘국민 주권’론으로 정당성만 챙기고 사실상 국민의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는 거였구나.
B: 정치적 의사표현의 집회의 자유 보장, 압제에 대한 봉기권을 말한 인민 주권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거지.

주권자는 쉬지 않는다

A: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네.
B: 주권자에 대한 탄압도 다르지 않지만 저항도 다르지 않지.
A: 우리의 가까운 역사만 봐도 ‘국민 주권’에 갇힌 명목상 주권자가 아니라 실질상 주권자가 되려는 저항은 쉰 적이 없는 것 같아.
B: 오늘날 ‘국민 주권’은 그런 저항 속에서 변화된 거라고 봐야 해. 간판은 ‘국민 주권’이지만 ‘인민 주권’의 이상이 많이 침투한 국민 주권을 오늘날 우리는 구상하고 구성하려고 하고 있어.
A: 그치. 제한 선거 제도는 보통선거 제도로 바뀌었고, 건드릴 수 없던 대표에 대해서도 유권자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으로 역사는 진전해왔어.
B: 위헌 법률 심사나 정당의 민주화, 많은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국민투표, 국민발의, 소환제도 같은 것도 있잖아.
A: 도처에서 주권자들은 쉬지 않았구나.
B: 우리도 쉴 수가 없잖아.
A: 신정정치니 어쩌니 하면서 추문에 대한 꼬리잡기 놀이로 빠지지 않아야겠어. 똑바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국정 통제권을 발휘하는 거야.
B: ‘정치고 경제고 힘 있는 자들은 원래 다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체념하고 관심을 접을 때 그들은 계속 이익을 얻을 거야. 권력도 공공 재산도 맘껏 사유화하면서 말이야.
A: 나에게 딱히 지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공적 과제들을 다루는 장에서 절대 나가지는 말아야겠어. 레이더를 계속 켜두겠어.
B: 그리고 서로를 더 많이 초대했으면 해.
A: 무슨 초대?
B: 우리 삶은 갖은 고통으로 점철돼 있고 우린 그 고통으로 서로 연결돼 있어. ‘왜 지금 시국에 그 얘기를 하느냐?’ ‘‘하야’얘기에 물타지 마라.’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배척하지 말고 다양한 문제를 들고 공론의 장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서로 환영했으면 해.
A: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이 참, 겨울 바람에 스치운다.
B: 헌법 제1조 2항이잖아? 우린, 개별 유권자들은 따로 또 같이, 집합적으로 이 헌법대로 할 권리가 있어.

 

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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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503 호 [기사입력] 2016년 10월 0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죄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다

A: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알아?
B: 새삼스럽게 웬 장래희망 묻기야?
A: 한번 물어봐줄래.
B: 그래. 어색하지만 물어볼게. 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
A: 미안하단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
B: 겨우 그거였어?
A: 겨우가 아냐. 너, 제 때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인정할 줄 아는 어른 본 적 있어?
B: 어어, 생각해보니 잘 안 떠오르네. 과오를 없던 일처럼 뭉개거나 ‘그 정도 했으면 됐지’라며 자기 합리화하거나 체면 봐서 넘어갈 주길 바라거나……. 뭐 대충 그런 것 같은데.
A: 그것 봐. 그래서 내 희망은 여전히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

B: 나한테도 물어봐줘. 어떤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은지.
A: 보편적 복지 빵빵하고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국가?
B: 그건 정말 먼 희망사항이고. 적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어.
A: 야아, 국가는 지독한 인권침해의 최고 가해자야. 그런 국가에게 잘못의 인정을 기대하다니. 그건 내가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B: 그렇지. 너와 나 같은 보통 시민이 하는 사과와 국가의 사과는 달라. 너와 내가 주로 부딪치는 사과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잖아.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관계회복을 이룰 수 있는 단순한 사과에 속하는 경우일 거야. 하지만 국가의 경우는 권력 행위의 대가로서 져야할 책임이야. 명백한 과오와 범법에 대한 사죄인 것이지 도덕적 양심에 따른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A: 너와 내가 잘못을 뭉개는 것과 국가가 국가범죄에 관한 행적을 권력과 법으로 은폐하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

B: 국가는 가해자인 동시에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고 있어.
A: 국가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B: 그러니까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죄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고 실효성 있는 후속조치를 취할 의무까지 져야 돼.
A: 과연 우리는 사죄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부인을 부추기는 잔혹함

B: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게 사죄잖아. 그런데 사죄는커녕 부인을 해도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부인을 하고 있으니…….
A: 사죄할 줄 모르는 정부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는 사회에 걸맞는 정부가 아닐까?
B: 난, 나한테 걸맞는 정부가 그런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A: ‘외압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소위 전문가들, 피해자를 오히려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부인과 회피를 응원하고 있잖아.
B: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권력자의 생각과 선호에 자신을 맞춘다.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길이 성공이다. 성공하고 출세하면 불의를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게 사죄를 가로막는 삼종 세트지.
A: 참 잔인하다. 타인이 겪는 고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잔인함 또는 잔혹함이라 하는데.
B: 타인의 고통에서 잠재적인 나의 고난을 상상할 수 있고, 그렇기에 피해자와 동료감을 느끼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미안함과 동료감은 아무리 나눠가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것인데 왜 잔혹함마저 경쟁하는 걸까?

A: 저렇게 국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저런 대접을 받는구나, 우린 정의의 바깥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우린 무슨 가치를 믿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떻게 서로 의지할 수 있을까?
B: 그래서 우린 꼭 사죄를 받아야만 해. 이 사회에 어떤 멍석을 까느냐에 따라 앉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멍석을 바꾸면 설령 악마 같은 이들이라도 잔혹함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을 거야. 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에 걸맞는 정부를 가질거야.

사과 받을 권리, ‘사죄하라’는 명령문

A: 우리 예전에 인권피해자의 권리에 대해 얘기했던 것 생각나?
B: 응. 유엔에서 만든 ‘인권피해자권리장전’에 대해 얘기했었지.
A: 거기에서 최소의 출발점으로 ‘공식적인 사죄’를 꼽고 있잖아.
B: 그 권리장전은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의 구제와 피해회복의 원칙과 방법을 열거하고 있어. 그중에 ‘만족(satisfaction)’이란 항목이 있어. 만족에 포함되는 게 책임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야.
A: 권리장전 말고도 또 있어. 국제법위원회가 만든 ‘국가책임법 초안’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도 ‘만족’이란 항목에 의무위반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를 언급하고 있어.
B: ‘만족’이란 말밑에 공식적 사죄가 속해있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 같아.
A: 그치? 그 만족은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흡족할만한 사죄를 말하는 거잖아. 가해자의 자기변명이나 상황의 모면 또는 충실한 책임 이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하는 사죄는 사죄로 보지 않는 거야.
B: 솔직히 그런 기준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면 사죄부터 하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또 사죄를 했으면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뭔가를 행동으로 옮겨야지. 그래야 사죄라는 말에 걸맞지. 이것도 상식, 저것도 상식이다.
A: 그렇지. 피해자에게 사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뭐야? ‘권리’라는 건 그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는 거야.
B: 그래서 난, ‘사죄 받을 권리’를 ‘사죄하라’는 명령문으로 생각해.
A: 우린, 지금 ‘제발 사과해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게 아니라 ‘사죄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거야.

B: 난 ‘사죄 받을 권리’가 직접적인 피해자의 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물론 ‘사죄 받을 권리’는 피해자가 응당 받아야할 배상 등의 권리와 연관되지만, ‘재발 방지 조치’ 같은 건 나와도 직접 연관되는 문제야. 나뿐 아니라 잔혹함을 배제하고 공감의 멍석을 까는 인권의식이나 사회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야.
A: 그러게. 난 요즘 한국 사회가 합동위령제 사회 같아. 오래전 얘기지만, 영화 <괴물>이 개봉됐을 때 ‘합동위령제’ 장면이 참 ‘한국적’이란 말이 오갔던 게 생각나.
B: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강남역, 구의역, 지진과 태풍, 군납품비리 등으로 이어진 죽음들, 그 속에서 무책임과 무능력과 적반하장만 연출한 정부,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는 삶……. 정말 이대로 ‘합동위령제’만 지내다 끝내는 사회여야 할까?

백남기 농민을 죽게한 국가폭력을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사진출처-백남기 대책위>

 

사죄로부터 시작되는 ‘말’의 정치

A: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데, 이 정부가 망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말’을 망친 게 치명적인 것 같아. 말 같은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대화는 없고 독백만 있잖아.
B: 말을 죽이는 정부가 결국 사람까지 죽였어.
A: 그래놓고 사과는커녕 폭력시위 운운하면서 계속 말을 죽이고 있네.
B: 온 몸으로 말하는 직접행동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를 할 수가 있지?
A: 고 백남기 님을 봐봐. 정부의 책임지는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하다 말을 망친 정부의 물대포에 쓰러지셨어.
B: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왜 ‘말’로 안 하고 ‘직접행동’을 하냐는 반대자들의 비아냥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어. “사회적 쟁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직접행동을 하는 이유”라고 말이야.
A: 고 백남기 님이 계셨던 자리의 사회적 쟁점들이 어디 한두 가지야? 쉬운 해고를 비롯한 노동개악 중단, 재벌 책임 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
B: 그분은 인간성에 대한 존중을 몸으로 말해주셨어. 자기 일상을 희생하면서 용기를 다해 불의를 고발하다 쓰러지셨어.
A: 그런데 남은 자들은 그분의 죽음에 대해 사실을 증언하고 인정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다니.

사죄 없는 정부, 무력감의 직사

B: 국가범죄에 대한 사죄 없는 정부는 결코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걸 공언하고 있는 거야.
A: 우리에게 계속 직사하고 있어. 무력감을 말이야.
B: 말이 통하지 않는 정부, 시민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가 쏠 수 있는 건 무력감뿐이야.

A: 사죄는 정부가 시민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거야. 바꿔 말하면, 우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계를 부인하기 때문에 사죄하지 않는 거야.
B: 개인끼리도 사과가 제 때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관계가 일그러지잖아. 건성으로 사과하거나 사과의 말과 다른 행동을 보이면 오히려 불화만 커지잖아. 하물며 시민과 국가 사이에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사과가 없으면 정말 관계를 부인하는 거잖아.
A: 피해자의 ‘사죄 받을 권리’란 진상규명, 배상, 재발방지 보장 등의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걸 포함해.
B: ‘사죄’는 피해자의 존재와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거야. 관계를 부인하는 마당에 피해자의 참여는커녕 피해자가 오히려 표적이 되는 게 가장 악질적인 피해의 확대재생산이야.

A: 사인이 명백한 고인에 대한 부검 시도 같은 게 대표적이지. 유엔과 국제인권단체 등 국제인권사회 뿐 아니라 사죄 없는 정부의 폐해를 이래저래 숱하게 겪은 시민들이 비난하고 있는데 계속 버티기네. ‘비난의 수용’도 사죄의 구성요소란 걸 모르나봐.
B: ‘내키지 않는다’, ‘싫다’고 도리질하고 내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권침해와 국가범죄에 대한 귀결로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져야 할 책임이라는 걸 모르면 그런 직분과 직무를 가져선 안 되지.
A: 뭘 노력하다가 잘해보려다가 벌어진 실수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엄연한 범죄에 대한 사죄인데 말이야.
B: 미국의 어느 법관은 “지나치게 오래도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이다”라고 했어. 지나치게 오래 끄는 사죄는 부적절하고 실패한 사죄가 될 수 있어.
A: ‘누가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란 질문이 있지. 누군가 ‘강자에 의한 약자의 권리 침해를 막으려고 법이 있다’고 답했어. 법 앞에 권력이 먼저 꿇어야 하는 거라구. 권력이 우릴 야단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야단치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불법행위에 대해 빨리 사죄하라고 우리는 명령문을 발사하는 거야.
B: 그래. 할 일이 태산인데 얼른 사죄부터 해야지. 국가범죄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는 일회적인 표명만으로 사죄의 행동이 완결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아. 사죄에 따른 후속행위의 실천을 통해야만 사죄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다구.
A: 은폐, 부패, 악폐는 이제 그만.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로 가는 길에 이정표는 ‘사죄 먼저’야. 이제 길 좀 제발 나서보자. 출발 좀 해보자구.

 

인권오름 제 503 호 [기사입력] 2016년 10월 0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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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99 호 [기사입력] 2016년 09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비 내리고 벌써 춥다. 그 날도 비가 왔는데.
B: 그 날? 무슨 날?
A: 작년 11월, 농민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쓰러지시던 날, 그 날도 비가 왔어.
B: 그랬나? 그나저나 의식불명으로 누워 계신지 벌써 9개월이 넘어가네.
A: 의학적으론 더 이상 해볼 게 없다는데……. 정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손을 놓고 있으니…….
B: 이제서야 겨우 ‘백남기 국가폭력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기로 여야 합의했잖아. 한참 늦었지만, 청문회라도 제대로 돼야 할 텐데.
A: 비 내리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권력도 속 시원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B: 누구에겐 굼벵이고 누구에겐 속사포 같은 그 속성이 쉽게 바뀌겠어?

시민을 표적 삼는 국가폭력

A: 공권력을 일컬어 야누스의 얼굴이라 하더라.
B: 야누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성이나 집의 문을 지킨다는 신? 근데 국가폭력이 왜 두 얼굴이야?
A: 국가가 가진 권력 자체가 엄청난 거잖아. 멋대로 날뛰는 폭력을 지배하고 통제하라고 ‘공적’으로 모아준 폭력이 공권력이니까.
B: 법의 얼굴을 한 폭력이 공권력이란 말도 있지.
A: 내가 아는 인권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수단일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의 인권이 ‘목적’이고 국가권력은 그 이행을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근데, 그 힘을 정권 또는 기득권 세력을 위해서만 쓰려할 때 권력의 오남용이 발생하는 거고, 그게 국가 폭력이지.
B: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국가가 만인의 인권을 평등하게 보호하는 장치라고 미화하지만, 현실적으론 차별하고 현실 정권이 맘에 들지 않은 시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제압하려 드는 거, 그게 공권력의 ‘두 얼굴’이란 거네.
A: 그래. 국가권력이 시민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려드는 거, 시민을 표적삼고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것, 그게 국가폭력이지.

B: 누가 그러더라. 정치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고, 권력은 그 무언가를 ‘이행할 힘’이라고.
A: 국가폭력은 바로 그 정치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게 문제야. 정치의 진짜 목적은 시민의 인권보장이란 걸 왜곡해서 ‘통치자에 대한 보호’로 목적을 변질시켜.
B: 강자가 약자를 해치는 폭력을 국가권력이 방관하고 엄호하겠다는 신호를 노골적으로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
A: 국가폭력은 시민을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거잖아. 백남기 씨가 쓰러졌던 그 집회의 요구안이 뭐였는지 알아?
B: 알지. 우리가 당면한 삶의 과제들인데. 쉬운 해고를 비롯한 노동개악 중단, 재벌 책임 강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 차별금지법 제정, 대북적대정책폐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같은 거였지.
A: 농민으로서 백남기 씨가 요구한 내용은 밥쌀 수입 저지,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이었어.
B: 그런 걸 요구하는 시민은 공권력이 겨냥하는 ‘폭도’가 되는 거야?
A: 본래 정치의 의미를 저버리고 정권안보라는 정치적 의도 하에 공권력을 동원하고 조직적으로 불법적이고 위압적인 행위를 하는 국가권력은 그런 요구엔 관심조차 없어.
B: 평화적으로 저항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거, 그거야 말로 최악의 폭력 아닐까?

A: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보면 더 기가 막히지. 경찰처럼 공식적인 국가기구나 국가소속 공무원들이 자행하잖아.
B: 또는 국가의 후원을 받는 집단도 있지. 정부의 지시아래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 끈끈한 관계이지만 언제라도 관계를 부인할 수 있는 그런 세력을 통해 폭력을 저지르잖아.
A: 맞아. 백남기 씨의 경우나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처럼 경찰이 직접 사람이나 재산을 공격해서 시민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사기업이나 민간용역업체, 관변단체 등도 국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어.
B: 노동자 블랙리스트의 이용, 폭력적인 노점단속, 관제데모 같은데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지.
A: 국가폭력이 표적 삼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공권력이 내세운 명분인 국가안보, 범죄와의 전쟁, 공공의 안녕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 현실 정권의 권력 유지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행동 원리나 사고방식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잖아.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

A: 국가폭력은 국가권력이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하는 걸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해.
B: 인권침해 중에서도 너무 단순하고 분명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게 국가폭력 아닌가?
A: 맞아. 인권에는 구조적인 맥락과 조건을 성찰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이 많아. 하지만 국가폭력 같은, 특히 백남기 씨 같은 사건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이야. 고차방정식이 아니라 그냥 단답형 문제라고. 신체적 안전 보장을 유린한 부당한 폭력이고 법을 무시한 공권력의 횡포잖아.
B: 생명‧자유‧안전의 보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침해이지.
A: 범죄가 발생했으면 범인을 쫓고, 어긴 법에 따라 수사하고 재판하고 처벌하는 건 당연하잖아.
B: 그러게.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인 만큼 단답형 문제지.
A: 이런 단답형 문제에도 답하지 않는 권력이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적 인권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손댈 수 있을까?
B: 악법이나 부족한 법을 바로잡진 못할 지라도 적어도 확실한 법은 지켜야 할 것 아냐?
A: 범법자, 그것도 법을 어긴 경찰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시민들이 어떻게 법을 존중할 수 있지?
B: 폭력에 대한 면책을 권력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걸 뻔히 보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모욕 받는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법을 존중할 수 있고, 법 집행자들을 신뢰할 수 있겠어?
A: 부패와 폭력 혐의가 있는 고위층 범죄자는 예외 없이 처벌을 면하고, 승진 등 승승장구하고, 살인용의자가 활보하고 다니면서 고위직을 노리고 다닌다면?

B: 갑자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착각했다는 생각이 든다.
A: 왜?
B: 킹 목사가 이런 말을 남겼거든. “법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도 악당을 저지할 수는 있습니다. 법은 상대방이 나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A: 시민을 중태에 빠뜨린 경찰의 살인적인 과잉진압이란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에 대해서조차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킹 목사의 어록을 수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갈라치기의 폭력

A: 국가폭력은 물대포처럼 가시적이고 확실한 폭력에만 있는 게 아냐. 더 깊이 뿌리박힌 근원적 폭력의 문제도 있어.
B: 근원적 폭력? 예를 들면?
A: 시민을 갈라치기 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국가폭력, 국가폭력의 핵심이야.
B: 갈라치기라, 누구를 어떻게 가른다는 거야?
A: 아까,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요구한 집회 참가자를 공권력이 ‘폭도’로 대했다고 했잖아. 그럼, 그 집회에 안 나오거나 그런 요구안에 찬성 안하는 이들은 ‘선민’인가? 어떤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 이외의 사람을 외부로 배제하는 일, 권력이 이분법적으로 만든 틀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사람들을 가두는 것 자체가 중대한 폭력이야.
B: 정권에 저항하는 목소리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지. 평소에도 젠더, 민족, 인종 등등의 축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사람들을 달리 대하잖아. 똑같이 범죄를 저질러도 누가 하면 ‘앞길이 창창한 사람의 실수’ 정도로 넘어가려 하고, 누가 하면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식으로 난리가 나지. 또 같은 범죄피해자라도 그게 누구냐에 따라 ‘의심’하거나 ‘공감’하고. 가령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에 대해서는 미적거리거나 되려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 많잖아.

A: 시민들의 집회시위를 과잉 통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야. 어떤 시위는 권력이 직접 부추기고 심지어 돈으로까지 지원하면서, 어떤 시위는 위험시하고 참가자를 ‘적’으로 대하는 것은 시민을 철저히 갈라치기 하는 거지.
B: 누구에 대한 기소는 신속하고 가혹하게 처리하고 누구에 대한 고발은 수사조차 안하거나 기소할 생각 없이 굼뜬 것, 선택적 수사와 기소, 이런 게 시민을 갈라치기 하는 거야.
A: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복수의 가치와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서로의 존재를 관용으로 대하면서 ‘적’이 아니라 서로 논쟁하고 경합하는 상대로 대해야 하는 거잖아.
B: 그치. 그런데 국가권력이 정권의 권위와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시민을 ‘적’ 또는 ‘비인간’으로 갈라서 분류하고 처우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야.
A: 평화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을 일단 제압하고 본다는 데 골몰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야. 비판적 세력 또는 이질적 집단을 적으로 상정한 공권력은 언제든지 인권침해를 일삼을 수 있어.

식민주의의 유산

B: 우리 어렸을 때, 떼쓰고 우는 아이에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던 얘기 기억나?
A: 기억나. “계속 울면, 순사더러 잡아가라고 한다”던 말?
B: 그래, 정작 우리는 ‘순사’라는 말조차 모르는데 말이야.
A: 그러게. 순사라니?
B: 일제시대 경찰을 말하는 거야. 공권력, 특히 경찰의 폭력은 식민지 유산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식민지 종주국들은 본국과는 다른 경찰상과 제도를 식민지에서 써먹었지. 대표적으로, 식민 경찰제도의 목적은 폭력에서 시민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식민 통치자들을 보호하는 거였어.

A: 그럼, 독립 후에는?
B: 엘리트들은 철통같이 보호하되, 시민, 특히 가난한 시민은 보호하지 않는 거였지. 권력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지배자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 반체제 인사 처리, 사회악에 저항하는 시민을 제압하는 게 공권력의 필수 활동이고, 식민 경찰과 식민지 유산을 간직한 경찰의 모습이야.
A: 에고. 옛 일만은 아니다. 자신의 임무가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임명권을 가진 정치 세력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가 공권력의 수장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나 울고 싶어졌어.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누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누가 통제할 것인가?

A: 아까, 공권력의 속성이 쉽게 바뀌겠냐고 했지?
B: 그 버릇, 속성이 하도 오래된 거라…….
A: 그럴수록 우린 국가폭력에 대해 더 많이 더 세게 말해야만 돼.
B: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시민에게 봉사하는 선의의 경찰관도 많지 않냐고.
A: 맞아. 바로 그런 경찰들을 위해서 더욱더 폭력 경찰을 잘라내야 해. 정권 해바라기인 공권력의 수장들은 내부의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자기 업적을 위해 몰아붙이기 마련이라구.
B: 맞아. 공익을 위해 시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승진하고 조직문화에 영향력을 갖는지를 지켜보는 것과 위법한 공권력을 행사한 간부가 승진하고 포상 받는 것을 지켜보는 건 아주 다를 거야. 냉혹하고 부패한 자들이 보상체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조직 문화를 쥐락펴락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괜찮은’ 내부인들이 어떤 태도를 지향하게 될까? 백남기 씨 같은 일조차 예사로 넘기면 국가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거잖아.

A: “우리가 사실을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처리한다.”는 말이 있어.
B: “우리가 사실을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처리한다?”
A: 공권력의 폭력에 의한 시민 생명의 위기, 이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정권의 잘못과 공권력의 오남용에 저항하는 시민은 저렇게 되더라. 우리는 보호받지 못할 거고 납작 엎드리는 게 살길이란 자괴감‧무력감만 남겠지.
B: 그건 안 되지. 반대로 우리가 사실을 처리해야만 해.
A: 맞아. 우리가 사실을 처리해야 해. 백남기 씨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그 결과에 따른 국가의 책임 인정과 배상, 책임자 처벌, 피해자의 명예 회복, 재발방지를 위한 법제도 정비 등이 이뤄져야 해.
B: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국가가 시민을 죽이게끔 내버려두는 건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인권오름 제 499 호 [기사입력] 2016년 09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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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조난 신호 읽기

A: 덥다 더워.
B: 그러게. 이런 날씨에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해. 마음까지 펄펄 끓는 것 같아.
A: 날씨만 더운 게 아니라 요즘 나라 안팎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 끔찍해.
B: 가까운 사람을 잃는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큰 고통일 텐데, 그것도 증오에 찬 폭력 속에서 일어난 상실이라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A: 자기를 망치고 타인을 해치는 폭력이 모두 늘어나고 있어. 그런 인권침해를 법 제정이나 규범 준수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B: 사람들 마음 밭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면 권리 목록을 읊어대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어느 때보다 인권규범과 제도가 넘치는 시대인데, 사람들 마음은 팍팍하기만 한 것 같아.
A: 그 팍팍함을 오히려 조난신호로 읽으면 어떨까?
B: 조난신호?
A: 사람은 누구나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워. 게다가 지금처럼 좌절과 실패가 강요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버텨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조난신호를 보내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고대하는 게 아닐까?

B: 그런데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가마솥더위라는 날씨 예보 보다 무반응의 결과가 더 무섭다. 더위에 반응하는 감각처럼 우리에겐 고통의 신호에 반응하는 감각이 있지 않을까?
A: 그러게. 타인의 고통과 비참에 영향 받고 상처받는 감각. 뭔가 남 일 같지 않고 나도 연루돼 있다고 느끼는 감각.
B: 원하는 만큼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조난신호를 주고받고 거기에 서로 반응하는 역량도 있고.
A: 타인의 고통에 초연할 수 없고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심란한 것. 그게 우리가 가진 인간성의 징표일지 몰라.

안으로 굽는 팔

B: 하지만 그런 고통에 대한 반응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덕스럽기 그지없어. 가만 앉아서 그런 반응을 기다릴 게 아니라 뭔가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A: 맞아. 인권에서의 관계는 인권을 옹호하는 쪽과 반인권 세력과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아.
B: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적대만큼 심각한 것이 내 쪽을 편애하는 차별이지.
A: 내편, 우리 편으로 동일시하기 쉬운 쪽으로 기울기 쉽지.
B: 누구에겐 펄쩍 뛰며 반응할 일을 누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원래 그런 거야’라고 체념시키거나 쉽게 수용해버려. 내 편에 관련된 일이면 책임을 묻지 않고 ‘유감이다’란 표명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엔 피해자를 비난해. 네 탓인데 누굴 원망 하냐고 말이야.
A: 부끄러워 할 쪽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수치심을 뒤집어씌우기도 하지.

B: 자원의 불평등만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 관계 맺는 방식 자체의 불평등에도 주목해야 해. 누구에겐 쉽게 공감하고 역지사지를 하고 그 처지를 헤아리려 들어. 반면 누구에겐 야멸차게 굴거나 멸시하고 문제를 경시하고 빨리 잊으려 하고 불행마저도 경쟁의 목록으로 놓고 싸우려 들어.
A: 그러다 보면, 우리 편 또는 끼리끼리 사이에선 불평등하고 불의하다고 느끼는 일을 공적으로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게 돼. 고통의 선별작업과 취사선택이 이뤄지게 돼.

B: 공분을 느낄 수 있어야 사회적으로 영향 받는 고통, 보이는 고통이 될 수 있는 데……. 그런 공분을 형성하는 과정은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안 보이고 안 들리던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고 평소 별 불편을 모르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조용히 점잖게 하자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
A: 다급해서 당장 무엇이든 가능한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관망할 여유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정의란 어느 한쪽이 독점할 수 없으니까 이 과정을 시끌벅적 통과하면서 공분을 만들어내야 해.
B: 그 시끌벅적함을 기꺼이 같이 경험하려 하는 게 인권 감수성 아닐까? 공분이 무르익기 전에 단순히 눈에 띄는 제도 변화만을 선호하거나 단순한 취사선택으로 결정짓는 건 뜸을 덜 들이고 설익는 밥을 급하게 먹는 건 아닐까 싶어.

A: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동일시할 때도 있지만, 자기의 인권에 해로운 질서의 보존을 자기 안전과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야.
B: 권력은 국가권력이든 가부장제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우리의 감정도 통제하려 들어. 권력에 좋은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지. 누군가의 인권을 반대하고 실천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비극은 없을 거야.

A: 또 착각 중에는 고통을 평준화시키는 것도 있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 받는다는 게 고통의 맥락 없음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누구나 저마다의 문제로 아파한다고 해서 ‘고통은 다 똑같다’인 건 아니지. 부당한 고통을 강요하는 불의한 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그런 식의 생각 또한 공분을 훼방하는 것 같아.
B: 내 편하고의 동일시만이 아니라 은근히 강요된 동일시로부터의 냉정한 거리유지의 균형감각, 그게 인권의 감수성인 것 같아. 단순한 동일시에 쉽게 빠지는 게 아니라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인식하는 만남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공분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권이 자극하는 감수성

A: 우리에게 뭔가 느끼게 하고 뭔가를 지향하게 만드는 것들, 즉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많아. 인권이 특별히 자극하는 감수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B: 난, 무엇보다도 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말하고 싶어. 같은 사람인데 차별적 취급을 받으면 그냥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주눅 들고 내 인간성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 같아.
A: 그럴 때 ‘법으론 평등하다’란 말을 들으면 약 올리는 것 같고 더 화가 나더라.
B: 차별적 취급이란 게 형식적인 법의 문제만이 아닌 데, ‘법으로 보장돼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하면, ‘더 이상 기대하지 마라’,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

A: 반대로 실질적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차별적인 법이나 제도를 일부러 더 만드는 경우도 있어.
B: 사람간의 위계와 등급을 나눈 대우를 능력에 대한 대우인 것처럼 위장하는 기술만 늘어가지.

A: 그런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게 자유에 대한 감수성인 것 같아. 남의 눈의 기준에 따라 남의 눈에 들려고 하다보면, 나의 자율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없고 타인의 잣대에 좌지우지되거든. 그렇게 좌지우지되다보면, 차별적 취급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는 눈에 들지 못했으니까’, ‘내가 못나서’, 이런 식의 자격지심에 빠지게 돼.
B: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과 타인을 존중하는 건 다르잖아. 대칭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 속에서 느끼는 친밀감, 나를 깎아내리거나 주눅 들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소망과 감정을 인정하고 반영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어.
A: 자유를 침해당한다는 건 ‘나에겐 힘이 없다’에 지배당하는 상태인 것 같아. 무력한 인간은 책임감이 아니라 ‘강자의 결정을 따라야 할 의무’만 강요받아. 책임감은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할 것과 좋은 정치공동체를 일구기 위한 참여를 요구해. 무력한 개인들의 사회에서의 ‘쿨(cool)함’을 유지하는 게 과연 책임 있는 자세일까?
B: 인권감수성은 내가 져야 할 책임의 속성을 숙고하고 판단하게 하는 지침인 것 같아.

인권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감수성으로 돌아보는 인권교육인 '나를 둘러싼 인권꽃잎'. 각자 꽃잎에 소중한 것을 적고 누군가 그것을 함부로 대할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나눈다. 사진은 2007년 동자동에서 주민들과 함께 했던 교육장면

 

상상력의 힘

A: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존중할 수 없다. 날 한번 이해시켜 봐라’ 타인의 인권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인 것 같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데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야.
B: 그럴수록 인정과 겸손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타인 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불가능성,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겸손 말이야.

A: 불가능한 게 뻔해도 추구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있지.
B: 그게 뭔데?
A: 상상력의 발휘지. 내 관점이나 내가 속한 집단의 관점을 넘어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말이야.
B: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깨비감투 같은 것처럼 말하네.
A: 상상력은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면서 다양한 감정의 배치와 영향력을 바꿀 수 있어. 혐오의 모래톱을 쌓기도 하고 편견의 희생양으로 몰아붙이기도 해. 편애와 선호로 암묵적 윗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고정관념으로 상시적 아랫자리를 만들기도 해.
B: 하긴, 원래부터 부정적이기만 하고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은 없는 거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야. 우리가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변형되고 변화하는 거니까.
A: 좋은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자기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공감의 표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불리함에 대한 공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불의에 대한 억울함을 그것의 원인을 겨냥해 표출하고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 그런데 나쁜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시나리오 속에서 누구는 있지도 않은 소득으로 과소비를 하고, 있지도 않은 사회적 지원에 기생하고, 있지도 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힘을 남용하는 존재가 돼버려. 상황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란 걸 거부하니까 그들에 대한 감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어.
B: 상상력을 잣대로 ‘판 깨기’를 해보잔 말이네. 하긴 인권의 역사란 건 기존의 ‘판’을 그대로 두고 누구를 끼워주거나 끼어드는 게 아니라 새 판을 짜는 일이었지. 이 일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힘이 주효했어. 상상력은 타인에게 다가가고 접촉하여 연합할 수 있는 힘이 되니까.
A: 또 상상력은 ‘아직 현재가 아닌 것’의 상태를 그려보게 만들잖아. 인권은 단지 좋은 원칙과 규범의 준수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움직여서 아직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다양한 느낌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해.
B: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걸 통해 무언가를 지향하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 인권감수성은 그런 움직임, 행동을 내포하고 있는 걸 거야.

 

 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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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91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애도마저 훔쳐간다

A: 벌써 6월 말이네. 한 해의 절반이 갔어.
B: 더위는 길고 시간은 빠르고. 둘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더위는 빨리 가고 시간은 더디 가고. 하루가 일 년처럼 길어졌으면 좋겠다.
A: 왜, 나이 먹기 싫어서?
B: 그건 늘 그런 거고. 정부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6월 30일자로 강제 종료시키려 한다네.

A: 정말? 언론에선 조사 기간 연장해야 한다고 얘기들 하던데.
B: 정부가 법에 보장된 기간도 안 지키고 중단시키려는 건데 연장이란 단어를 쓰는 게 경우에 맞는 걸까? 본 게임도 안 마쳤는데, 연장전 얘기하는 거야? 법에 1년 6개월의 조사기간이 보장 돼 있는데, 10개월 만에 ‘조사기간 끝났으니 짐 싸라’고 정부가 떠밀고 있어. 우격다짐도 정도껏 해야지.

A: 세월호 특별법도 미적거리다 만들고, 조사 위원들도 늑장 임명하고, 예산도 인력도 안주고 훼방 놨잖아? 그런데 이젠 집달리처럼 들이닥쳐서 방 빼라고 행패부리는 거네.
B: 국회 앞에서 유가족들이 ‘진상 조사 보장하라’고 얘기하는 데 경찰이 피켓 뺐고 유가족을 패대기치더라. 뙤약볕 아래서 눈물을 흘리시는데 내 속에선 땀인지 눈물인지 뭔지 모를 것이 범벅이 돼서 울화가 치솟는 것 같았어.

A: 애도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구나.
B: 그러게. 경찰 방송차가 ‘국회 앞에서 정치적인 행동은 금지돼있다’고 고래고래 윽박지르더라. 자기들은 애도를 금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 유족 등에겐 정치적 행위를 하지 말라니. 국회 안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이 더 이상 조사활동 안된다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뻗대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것에 관계된 얘기를 하지 말라니. 뭔가 강도 만난 느낌이 들더라.
A: 강도가 위협해서 훔쳐갈 때는 뭔가 노릴만한 것이니까 노리는 거겠지. 우리에게서 도대체 뭘 노리는 걸까?
B: 애도 그 자체인 것 같아.

A: 애도가 뭐라고. 그간의 숱한 참사 피해자들, 이 시스템의 억울한 희생양들을 애도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걸 훔치려 들까?
B: 애도와 관련된 어떤 미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아. 그런 힘을 느끼는 게 싫고 두려워서 아닐까? 혼자 슬퍼하는 것 말고 정치적‧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의 죽음을 애도할 때는 서로 연결되려 하잖아.
A: 그치. 각자의 골방에서 나와 애도하는 서로의 얼굴과 느낌을 나누고 싶어 하지.
B: 그런 연결된 느낌을 방해하고 싶고 분리된 느낌을 안고 살아가라는 것이 저들의 바람일거야.
A: 그럴수록 이 힘의 불씨를 지켜야 할 텐데. 서로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던 사람들이 애도를 통해 우리 삶을 짓누르는 폭력에 대항할 힘을 찾으려는 데 애도의 힘이 있는 걸 거야.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며 세월호가족협의회는 6월 25일부터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사진출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내 마음의 진상 조사

B: 왜, 너나 나나 그냥저냥 살다가 누군가의 장례식에 갈 때면 마음이 복잡해질까?
A: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취약함을 절감하게 되잖아.
B: 영화 <대부>에서 딸을 잃은 알 파치노가 절규하는 장면 기억나? 그 냉혹한 마피아의 대부조차 상실 앞에서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이면 누구나 얼마나 취약한지를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딸이라는 깊은 관계 때문에 그러는 거지. 모든 사람에게 그런 상실의 슬픔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
A: 맞아. 친밀함에 따라 아주 다른 강도의 슬픔을 느끼게 되지.

B: 그런데 사회적‧정치적 참사로 인한 죽음에는 그런 개인적 애착과 관계없는 다른 차원이 있는 것 같아.
A: 다른 차원?
B: 나는 그런 죽음들을 접할 때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뭘 잃은 것인지 두리번거리게 돼. 내 마음의 진상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할까.
A: 나도 그래. 그냥 슬프기도 하지만 계속 찜찜한 게 있잖아. 죽은 이들이 나에게 뭔가 요구하는 것 같은데 내게도 어떤 책임을 묻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잡히지 않는 찜찜함.
B: 뭔지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의 진상조사를 계속 하는 게 애도가 아닐까 싶어. 나는 도대체 그 사람들과 무슨 끈으로 연결돼 있는 걸까, 그걸 찾아보는 진상조사…….

A: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 데 받을지 말지 망설일 때 느낌 같아. 전화를 받고 안 받고는 내 의지인 것 같지만, 타전과 발신은 어디선가 이미 오고 있어.
B: 나도 모르게 죽은 이와의 관계, 연결된 끈을 찾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뭔가 그 죽음에 대해 드러내어 말할 것을 찾고 싶은 그런 맘이 도대체 뭘까?
A: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그게 슬픔을 느끼더라도 나와 다른 점일 거야. 하지만 나도 뭔가 잃은 게 있거든.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왜 이리 허전하고 뭔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고 자주 울컥하게 되는지.
B: 잘 모르겠으니까 겸손해지고,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게 되고, 드러난 잘못에 대해선 비판하게 되고, 뭔가 바꾸자고 요구하게 되는 게 애도를 공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걸 거야. 그러니까 그런 사건을 만들기 싫어하는 권력자는 우리가 애도하는 걸 싫어하고 훔쳐가려는 거겠지.

삶의 박탈, 애도의 박탈

A: 우리가 살아온 질서가, 또 그 질서를 쥐고 있는 권력이 문제라는 걸 우리가 얘기하기 시작하는 게 싫어서? 근데 우리도 그 질서의 일부잖아. 그 질서 속에서 먹고 살아왔고.
B: 그래. 아프지만 나도 그 질서의 구성요소지. 그런데 참사의 피해자를 애도하면서 내가 그 질서의 일부인 걸 회의하게 돼. 뾰족한 길이 없더라도 말이야.
A: 뾰족한 길이 하루아침에 보이겠니? 그러니 애도를 대충 빨리 끝낼 수 없는 거지.

B: 그런데 왜 빨리 해소하라고 몰아대는 걸까? 충분히 들어보지도 않고 소모적이라고 격하하거나 애도의 요구를 무시하려고만 들까?
A: 존중이 아니라 무시라는 점에서 산 자들이 처한 정치나 죽은 자들이 처한 정치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B: 올 상반기만 해도 진짜 가슴 아픈 죽음들이 이어졌잖아. 죽어서도 이름을 불리우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이름들. 살아서는 존중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애도 받지 못하고…….
A: 세월호 피해자 중에는 기간제 교사였다고 순직조차 인정 안 되는 분도 있고, 피해자를 도운 일로 몸도 맘도 다친 분들이 많잖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도 계시고.
B: 노동자들도 소속의 인정을 거부당했어. 하청노동자라고 또 파견노동자라고 원청에선 관계 없다고 손을 내저어. 여성 피해자는 피해자임에도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묘사되고. 그건 사후의 차별이기에 앞서 이미 삶에서 벌어진 문제잖아. 존중하지 않는 삶, 인정하지 않는 삶, 비인간화가 먼저 있었기에 그렇게밖에 죽음을 표시하고 대우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A: 잘못 표시한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식별이 있었다는 것, 그걸 바로잡지 않고서야 죽음의 비극성을 잠시 강조하다가 무뎌지는 반복밖에 없는 것 같아.
B: 피해자가 무구한 약자이고 사연이 비극적이어서 애도해야 한다는 게 아니야. 무구함과 비극성의 아우라가 없더라도 애도는 필요해. 피해자에 대한 게으른 고정관념을 갖지 않는 것도 애도의 윤리일거야.

애도는 부인의 반대말

A: 난 인연이란 노래 참 좋아해.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특히 그 부분.
B: 인연! 나도 좋아해. 애도란 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과의 끈, 인연을 발견하는 것 같아. 그 타인이 물리적으로 사라졌음에도 사라졌다고 할 수 없는 것, 그걸 부인하지 않는 것 아닐까?

A: 내가 정말 부인하고 싶은 건, 빨리 부인하고 벗어나라는 강요야.
B: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독촉은 어떻고.
A: 뭐가 일상일까?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입시 공부를 하고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지하철을 운행하고 빨리 치우고 같은 방식으로 기계를 돌리는 게 일상으로의 복귀일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산다고 해서 그 일상이 예전 그대로의 일상일 수 있을까?
B: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는 일상이어야겠지. 사람의 인격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존중된다는 신뢰가 있어야 일상을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니?
A: 내가 바뀌었다. 우리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게 애도가 아닐까? 죽은 이의 부재 속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분명 모두 바뀌었어. 각자도 바뀌었고 서로의 관계도 달라졌지. 죽은 이는 그런 우리 속에 같이 앉아서 우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B: 죽은 이들이 신성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과연 잘 살 가치가 있을까를 묻게 돼. 우리가 자주 앉았다 실수하던 긴 의자 있잖아. 모두가 자리를 잘 잡고 앉아야만 균형이 잡히는 의자. 누군가 갑자기 일어서버리면 기우뚱 넘어가던 의자,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우린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권리와 애도

A: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말은 죽은 이를 떼어내야 살 수 있다는 것 같은데. 죽은 이의 억울함을 들어주지 않고서 산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산 사람의 권리와 죽은 이의 권리가 상관없는 것일까?
B: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권리를 갖는다’는 말이 점점 더 별로야. 갖는다는 게 ‘내 것, 네 것’ ‘내 자리, 네 자리’에 선을 긋는 것처럼 들리거든. 오히려 서로간의 연결 속에서 관계로 엮인다는 것이 권리에 어울리는 것 같아.

A: 애도조차 방해받는 삶에는 이미 그 삶을 파괴한 폭력이 있었어. 그 삶을 공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폭력과 매 한가지의 폭력이야.
B: 그러니까 내 권리라는 게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지키고 생명을 보존해야 돼. 근데 나의 보존이 누군가에 대한 폭력과 박탈, 아무개의 위험과 죽음에 연관돼 있어. 내가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내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면 누군가를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해.

A: 사는 건 어차피 그런 거라는 속삭임이 나의 의무를 면제해주진 않아. 때론 내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란 게 내 속 편하자고 갖는 자기애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B: 내 개인적 가책이 내 맘 편해지자는 데 머무르지 않고 뭔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게 애도의 정치일 텐데. 이 사회에서 과연 누가 취약함을 강요받고 있는가, 그걸 고려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우리의 애도는 어디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491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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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87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할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들었더라면

A: 너무 속상하다. 뉴스를 보지 않고 살 수도 없고, 내가 안 본다고 그런 일이 안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B: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그 청년 노동자의 죽음 때문이지?
A: 내가 그 나이 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으며 펑펑 울었는데,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다니.
B: 나중에 <전태일 평전>으로 바뀐 그 책 말이지?
A: 한 사람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했고 한 사람은 ‘갓 졸업한 공고생 자르는 게 청년 일자리 정책인가’라는 피켓을 들었고…….
B: 빤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목숨을 위협받아.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일이 너무 자주 벌어져. 말할 수 없기에 사람이 너무 쉽게 죽고 다치는데, 뭐가 ‘첨단’을 달린다는 거지? 사람대접이 구석기 시대인데 첨단의 시대엔 도대체 누가 살고 있는 거야?

A: 그놈의 일자리의 위계만 날로 심해지고 있지. 일을 하면 다 같은 노동자인데, 거기에 등급을 매겨 신분제도처럼 만들어버렸어. 첨단시대가 아니라 거꾸로 신분제 시대야.
B: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선 작업할 수 없다’고 ‘말을 할 권리’가 왜 일하는 사람에게 존중되지 않을까?
A: 그러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임금 보장이 물질적 존중이라면 노동자의 목소리 존중도 중요해.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존중받아야지. 노동자가 자기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말이야.
B: 그분들이나 숱한 노동자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않는 것 아닐까? 위험을 외주화하지 말라고, 필수적인 노동을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지 말라고, 나 홀로 근무를 방치하지 말라고 오래전부터 말해온 것 같은데…….

인격 살해의 목격자

A: 부인을 못하겠네. 나부터 말을 안 할 뿐 아니라 듣지도 않으려고 했어. 나부터가 입을 열 상황이 못 돼. 나는 요즘 인격 살해의 현장에서 늘 목격자이고 방관자인 것 같아.
B: 인격 살해? 뭔 무시무시한 말이야?

A: 요즘 내 직장 상황이 그래.
B: 그래도 너는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잖아.
A: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이라지만, 속으론 곪는다 곪아.
B: 왜 그러는데? 일이 너무 많아 지쳐서 그래?
A: 단지 ‘지친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 뭐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랄까.
B: 무력감?
A: 맞아. 무력감! 딱 그 단어다.

B: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무력감이라니?
A: 최근 사무계약직을 몽땅 자르는 거야. 근데 대부분이 숙련도가 높고 이곳을 아끼는 분들이야. 나도 일하면서 이분들에게 많이 의지해왔거든. 그분들 일은 원래 정규직이었는데 비용 절감한다고 몇 년 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더니 이번엔 아예 물갈이한다고 단기계약직으로 바꾼다는 거야.
B: 해고는 아니네.
A: 명목상 그렇지. 하지만 사실상 제 발로 나가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다들 굴욕감과 배신감에 떨면서 짐 싸고 있으니까.
B: 비용절감이니 경영합리화니 그런 말로 그러는 거지?
A: 그러게. 사람을 비용취급밖에 안하니. 내 방에 계신 한 분은 평생직장이라 생각하고 헌신해왔는데 먹고 살 걱정보다 배신감이 더 크다고 우시더라구.

B: 속상하겠다. 근데 네가 왜 무력감을 느껴?
A: 그런 부당한 일의 한복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안 그래도 내가 평소에 따박따박 따진다고 관리자 눈치가 장난이 아니거든. 요즘은 쓸 데 없는 것들로 괴롭혀. 괜한 절차와 서류를 만들어서 자기한테 부러 결재 받으라고 하고. 안 해도 되는 일 만들어 시키고. 그 사람과 실랑이하면서 진이 빠져. 그 와중에 동료들이 짐 싸는 걸 멍하니 지켜보자니 사는 맛이 없다.
B: 나는 괴롭힘이 사회적으로 나쁜 일자리라 불리는 직종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너처럼 번듯한 직장에서도 그렇구나.
A: 하는 일과 역할이 다를 뿐인데 신분에 의한 위계질서가 있는 양 굴면서 힘으로 찍어 누르는 상황에서 일해야 하잖아. 나야 직급과 권한이 있으니 막 대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힘들게 해. 그런데 다른 업무를 보는 사람들에겐 정말 막 나가. 쥐꼬리만한 월급, 과다한 업무도 힘들겠지만 그런 인격모독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아. 그걸 지켜보는 나는 인격살해의 현장에 서있는 거고. 결국 목격자이면서 방관자인 거지.
B: 말도 해 본 사람이 하고 말을 하는 걸 당연시하는 환경이어야 할 수 있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 온 걸 생각해봐. 그냥 묵묵히 착실히 따르라고만 하잖아. 그게 우리에게 모욕과 경멸을 가르치더라도 말이야.

일터란

A: 이 답답한 상황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부당해고, 성폭력, 노동 재해……, 노동 문제로 말할 문제야 넘치고 넘치지. 그런데 지금껏 써온 이런 말로는 콕 짚을 수 없는 미묘한 갈굼이 있어.
B: 미묘한 갈굼?
A: 예전 같으면 그냥 잘랐을 거야. 그러면 부당해고라고 따져볼 수라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너는 하찮은 존재다’, ‘얼마든지 싼 값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꾸 주는 거야. 아주 모욕적으로 들들 볶아. 그래서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 내 동료들이 처한 상황처럼 말이야. 이런 걸 짚는 말은 없는 걸까?

B: 뭐, 요즘 언론에선 ‘직장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이란 말이 많이 나오잖아.
A: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직장이란 말로는 성이 안차.
B: 왜?
A: 시도 때도 없는 전화, 카톡, 이동 중이건 뭐건 어디서건 늘 접속해서 응답해야 돼. 퇴근해도 퇴근이 아니야. 교육이나 연수, 팀워크 훈련이란 이름으로 필참 해야 하는 행사도 넘치고 말이야.
B: 하긴 요즘 일이란 걸 옛날 연속극에서나 나오는 사무실, 매장, 공장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일터 아닌 곳이 없지. 또 다른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직장’이라고 하면 거기 소속된 사람만의 문제 같은데, 직장 있는 네 문제가 직장 없는 나 같은 사람의 문제와 별개라고 하기가 좀 그렇네. 취업준비생, 실습생, 인턴, 실업자, 자영업자, 소비자 등이 모두 일터와 관계가 있어. 근데 직장이라고 하면 직장 안 사람들만의 문제로 보일 수 있겠네.

A: 또 다른 문제도 있어. 고용주 갑질 뿐 아니라 소비자 갑질도 문제지. 자기 직장에서 깨진 노동자가 딴 곳에 가서는 다른 노동자에게 진상을 부리기도 하지. 저임금에 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을 감내하는 노동자가 많을수록 알량한 일자리도 줄어들지. 싸고 고분고분하게 쓸 수 있는 한 명이 있으면 고용주는 두 명을 쓸 일이 없지.
B: 그럼 직장 말고 일터라고 하는 건 어떨까?
A: 일터? 야, 이렇게 괴로운 공간을 일터라고 하면 왠지 오글거리지 않냐?
B: 일과 관련된 위험의 원천이 되는 모든 장소와 시간, 그리고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공동의 터인 만큼 같이 살아가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일터’라고 하는 거야.
A: 그럼, 너도 일터의 주인공이네.
B: 그렇지. 나처럼 공식적인 직장이 없는 사람도 엄연히 일이란 걸 엄청 많이 하고 있거든. 그런데 사람들은 고용된 노동이 아니면 일한다고 취급해주질 않아.
A: 그러게. 너나 나나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B: 그래도 돈 번다고 밥은 네가 늘 사잖아? 후후.
A: 고용된 직장에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갈 때야. 그런 의미로다 너와 나는 ‘일터’로 연결되는 거네.

문제는 권력격차, 권력 불평등이다

B: 그럼, 같이 괴로운 건가?
A: 하지만 나는 층층시하, 겹겹의 위계 속에서 일하는데 너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만 하잖아.
B: 하하, 내가 부러울 때도 있구나. 그런데 일터에서의 괴롭힘이란 걸 뭘까? 네가 말한 미묘한 갈굼이란 것 말야. ‘괴롭힘’이란 말의 어감이 좀 그래. 그냥 자기가 불쾌하고 불편하면 죄다 괴롭힘이라고 할 것 같아.

A: 너랑 나랑 티격태격하는 걸 갖고 괴롭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사실 엄청 괴롭긴 하지만.
B: 뭐?
A: 농담이야 농담. 너와 나처럼 대등한 관계에서 다툼과 갈등이 있는 건 당연지사야. 티격태격할 수도 있고 장난을 칠 수도 있지.
B: 그거랑 괴롭힘은 뭐가 다를까? 경계가 너무 희미한 것 같아. 사소한 갈등이 사생결단 낼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웃자고 한 장난이 모욕이 될 수도 있고.

A: 핵심은 권력격차, 권력의 불평등이지.
B: 권력 격차?
A: 우리 어렸을 때 시소놀이 많이 했잖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 타듯이 아웅다웅하며 지금까지 왔지. 괴롭힘의 관계는 전혀 달라. 괴롭힘의 가해자와 표적에게는 권력 차가 있어.
B: 권력 구조는 아주 복잡하잖아.
A: 그렇지. 공식적인 권력 구조에서 위계나 지위가 낮은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기 쉬워.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작용하는 권력도 무시 못해. 실력자의 친인척이라거나 낙하산 인사이거나 등등. 그러니까 괴롭힘은 그냥 성격이 나빠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런 게 아니라 일터에서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걸 지목하는 거야.
B: 흔히 피해자더러 용기를 내서 저항하라고 하잖아?
A: 그게 말이 쉽지. 일터에서의 권력 불균형이 얼마나 심한 줄 알아? 권력 격차를 문제 삼지 않고 괴롭힘 당한 사람의 개인 성향 탓으로 돌리는 게 젤 속상하고 억울해. 사실 괴롭힘 당하는 사람 중엔 나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복종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많을 걸.

갖은 방식으로

B: 도대체 어떤 식으로 괴롭혀?
A: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은 다 동원된다고 볼 수 있어. 경영전략으로다 대놓고 생산성 향상전략으로 포장된 괴롭힘 정책을 쓰기도 하고,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업무와 관련된 괴롭힘이 많아. 그리고 업무는 사람이랑 하는 거니까 대인간 괴롭힘이 당연히 붙어 다니지. 저질 중의 저질은 뭘 집어 던지거나 부수고 때리고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심리적‧정서적으로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괴롭히기도 해.

B: 딴 건 쉽게 예상이 가는데 은밀한 방식은 뭐야? 예를 들면?
A: 내 상사 같은 경우엔 필수적인 정보를 전해주지 않거나 단 둘이 부딪칠 때는 인사를 안 하고 무시해. 딴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로 인사하면서. 또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내곤 해. 나랑 친하게 지내면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은근히 만들고.
B: 아이고. 관두라고도 못하겠고 버티라고도 못하겠고. 정말 힘들겠다.
A: 아까 말한 것처럼 무력감이 밀려들 때가 젤 힘들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뜨리는 게 그쪽의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아서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거야.

B: 너에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란 말은 절대 안할 게. 먹고사니즘을 강조하는 게 저쪽을 돕는 것 같아.
A: 맞아. 내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 하면 저쪽이 되려 그걸 이용해먹는다니까. 명백한 가해자에 대해서도 ‘먹고 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느냐, 조용히 지나가자’ 식으로 먹고사니즘을 들고 나와.
B: 먹고사니즘 말고도 일터괴롭힘을 방조하는 통념들이 많을 거야. 그런 것들부터 허투루 보아 넘기지 말아야겠어.
A: 나는 지금 내 직장에서 일터괴롭힘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해. 또 어디 가서는 가해자일지도 모르지. 겪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뭔지 이 괴롭힘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겠어.
B: 어떤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개념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뭘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더라. 일터괴롭힘의 개념 정의도 따져봐야겠지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넘쳐나는지 뭘 해야 할지 궁리해보자.
A: 아플 때 병명과 증세라도 알면 위안이 되잖아. 또 병에 대해 사람들이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면 힘이 되잖아. 일터괴롭힘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뭐가 뭔지 모를 이 고통에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고 통증에 공감해준다면 좋겠어. 적어도 ‘왜 아프냐?’, ‘그까짓 것 같고 그러냐?’, ‘더 힘든 사람들이 천지다’는 식으로 타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B: 나부터 이름을 불러줄게. 또 뭘 할까? 우리 뭘 같이 할 수 있을까?

 

인권오름 제 487 호 [기사입력] 2016년 06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83 호 [기사입력] 2016년 05월 0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밥 먹었니?
B: 응. 대충
A: 왜 대충 먹어? 잘 먹어야지.
B: 요즘 세상에 잘 먹기가 쉽니? 사 먹어도 해 먹어도 잘 먹기가 얼마나 힘든데.
A: 하긴 숱한 끼니를 때우고 살지만, 시간‧돈‧같이 먹는 사람, 하나하나 따져보면 잘 먹었다고 할 때가 찾기 힘드네.
B: 허접하게 먹더라도 안전한 음식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불안 중에 식품에 대한 불안은 얼마나 큰데. ‘모르고 먹어야지, 알고선 못 먹는다’는 말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어.

A: 밥 한 끼에 온갖 시름이 담겨있구나.
B: 내 밥만이 아니라 밥 때문에 기운 빠질 때가 많아. 먼지 풀풀 날리는 거리에서 급식 받는 노인들을 볼 때 울컥해. 보편적인 학교급식을 둘러싸고 야박한 소리 오갈 때, 계단참이나 심지어 화장실에서 끼니를 때워야 한다는 노동자 기사를 볼 때, 식사시간도 없이 일한다며 쫓기는 친구들을 볼 때…….

A: 밥보다 시름을 더 자주 먹는 것 같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인권은 없는 거야?
B: 왜 없어? 사회권이란 버젓한 인권이 있지.
A: 사회권? 그거 마이크 잡은 사람이 자기한테 집중하라고 소리 지를 때 하는 소리 아냐? 사회자를 존중해서 주목해 달라고.

결연한 사람들의 권리

B: 후후. 그런 것 아냐.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 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말은 들어봤지? 세계인권선언 제22조에 나오는 말이야.
A: 사회보장‧사회복지, 그거야 흔한 말이지. 근데 사회권은 뭐 별다른 거야?

B: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란 말에 주목해 봐. 사회권은 ‘사회적 권리’ 또는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줄임말이야. 여기서 ‘사회적’이란 말의 어원을 따져보면 ‘결연했다’는 뜻이래.
A: 결연? 인연을 맺었다?

B: 그래. 사회권을 풀이하면, 사회 속에서 결연한 모든 사람은 그 사회공동체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는 뜻이야.
A: 그럼, 누구도 제외되거나 배제돼선 안 된다는 말이네.
B: 그렇지. ‘무엇’을 누리느냐의 문제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누리느냐가 중요해. 어떤 밥을 먹을 것이냐 만이 아니라 누구랑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야.

A: 무엇을 누구랑 어떻게? 이 셋을 다 고려하는 게 사회권이란 말이구나.
B: 이를테면, 콩 한쪽을 나눠먹어도 누구나 같이 밥상에 앉아 같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 그건 시혜가 아니라 누구나의 권리라는 거야.
A: 그런 권리라면 그냥 앉아서 누가 떠먹여주는 것을 받아먹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밥상의 참여자가 되는 거잖아. 그럼 사회권은 밥에 대한 권리만이 아니라 밥상에서 목소리를 낼 권리라고도 할 수 있겠네.
B: 그렇지. 그러니까 사회권은 물질적 분배만이 아니라 누구를 구성원으로 대접하고 어떻게 밥을 지을 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권리와 떼놓을 수 없어.

제공한다고 사회권인 건 아니다

A: 권리라면 당당하고 떳떳해야 하는 거 아냐?
B: 맞아. 권리란 그 상대방에게 존중할 의무가 발생하는 정당한 요구야. 우리에게 사회권이 있다는 건 국가가 그 권리를 존중하려는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는 거야.

A: 하지만 번듯한 사회보장제도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누리는 거지. 실직자나 가난한 사람들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다루잖아. 난, 솔직히 복지라는 이름 붙은 게 권리로 안 다가올 때가 더 많던데.
B: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준다고 해서 모두 사회권인 건 아니지.

A: 나, 어렸을 때 생활보호대상자였는데. 매달 동사무소에서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았어. 매일 수제비만 끓여먹었지. 수제비에도 질렸지만, 그걸 받을 때마다 창피했어. 그래도 받아야만 했으니까. 뭔가 눈총 받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받는 게 권리일 수 있을까?
B: 우리 사회의 복지도 많이 달라지고 좋아졌다는 데 네가 말한 눈총 받는 느낌은 여전한 것 같아. 며칠 전 슈퍼에 갔더니 아저씨들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 장애인 차량 혜택이 문제라고 말이야. 장애인들이 어려우니 도와주기는 해야 하지만 자기들 같은 영세자영업자한테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자기들은 세금만 내고 억울하다고 하더라.

A: 나도 비슷한 말 들었어. 의료보호제도 이용하는 사람 중에 가난한 환자가 아니라 꾀병이 많다고, 거의 공짜라고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서 문제라는 얘기도 하던데. 자기들처럼 꼬박꼬박 건강보험료 내는 사람들만 손해라고.
B: 다들 살기 어려운데 누구만 특별대우 받는다는 눈총, 경제도 어려운데 저 사람들은 과분한 혜택을 받고 있다는 비난 같은 거 진짜 많아.
A: 무시하고 낙인찍는 거 그런 것 없이 나누면 안 되는 걸까? 네 말대로 재화나 서비스가 제공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것 같아.

B: 사회권의 짝퉁은 많아.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하면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고 최소의 복지를 관리와 감시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것, 또는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라는 식으로 수단시하는 것 등 말야. 사람의 삶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A: 기브앤드테이크(give and take)라고 기여한 만큼, 노력한 만큼, 낸 만큼 가져가라는 것도 그렇지 않나? 일을 가질 수 없어서 힘들고 그래서 소위 기여를 할 수 없는 건데, 기여 안했으니 자격 없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억울해.
B: 흔히 각 사람이 기여한대로 배분하고 나서 부족하거나 배제된 사람에게 재분배해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사회권은 그런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는 거야.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걸 경제사회적 분배와 재분배로 표현하는 거야.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하기에,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게 사회권이야.

A: 내가 찜찜해하던 성격의 시혜나 혜택과는 구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이 사회의 일원이란 이유만으로 자격이 있다는 거잖아.
B: 그래. 사회권은 모든 사람이 동료로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적 배치를 바꾸는 거야. 분배 구조를 바로잡고 무시나 경멸 같은 몰인정을 존중으로 바꾸는 것, 둘 다를 말하는 거야.
A: 어디선가 ‘사회적 시민권’이란 말을 들어본 것 같아. 네 말대로 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구나 갖는 공통된 지위란 뜻이구나.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

A: 근데, 아무리 공통된 지위에서 권리로 보장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받았던 밀가루 한 포대처럼 수준이 형편없으면 좀 그렇지 않나? 나, 그때 학교에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거든. 집에서 수제비를 끓여먹을 순 있지만, 그걸 도시락으로 싸갈 수는 없었으니까.
B: 사회권에는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이란 게 있어.
A: 최저선? 그거 인터넷에서 본 씁쓸한 농담 같은 데. 임금 중에 젤 초라한 임금은 최저임금이란 말처럼.
B: ‘최저’를 고만큼만 줘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최소한 이것만은 마지노선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달라. 당장의 긴급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장과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를 합한 게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의 개념이야. 우린 단지 목숨을 연명하는 게 아니라 존엄성을 갖춘 생존을 추구하는 거잖아.

A: 하지만 ‘적절한 생활수준’을 무슨 무슨 선진국 수준으로 소비를 끌어올리는 그런 거로 생각하면 답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려면 지구가 수십 개라도 모자랄 거야.
B: 맞아. ‘적절한’을 양의 문제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 무엇보다도 모든 구성원을 우리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진 존재로 대접하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A: 예를 들자면?
B: 가령 사회권 중에서 노동권을 생각해보자구.
A: 노동권이면 일단 수입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거 아냐?
B: 그렇지. 근데 너부터 임금노동만 일로 생각하고 있잖아.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 같은 노동을 돈을 받는 소위 ‘생산적’ 노동과 구분하는 원리부터 문제 삼을 수 있어.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것이 일차적이고 그 나머지에 대해선 별도의 혜택의 문제가 돼버리잖아. 이런 것부터 다시 생각하는 게 사회권에서 말하는 ‘적절한’이 아닐까?

A: 맞아. 그러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관계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B: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뿌리는 그대로 놔둔 채, 표면적으로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만 늘린다고 ‘적절’한 사회권 보장이 되는 건 아니야. ‘최저선’을 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근본 틀의 문제로도 봐야할 것 같아.

사회권 침해를 인권 문제로

A: 근데 내 주변에 보면, 나처럼 사회권이란 말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야. 이런 상황에서 사회권의 침해를 인권침해 혹은 인권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B: 사회권이 억울한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인권문제로 잘 여기지 않는다는 거지.
A: 그저 경제 사정이 나빠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난은 사회현상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자연현상 같은 거다, 뭐 이런 체념과 수용, 묵인이 많은 것 같아.

B: 그보다 더 나쁜 건, 개인적 결함과 무능력으로 몰아 비난하는 거야. ‘그러게, 좀 더 노력하지 그랬어’란 말이 그렇지.
A: 나도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해서 그렇다고 나를 늘 채근하는데.
B: 자기 성찰과 자기 학대는 다른 것 같아. 그런데 생활이 어려울수록 우린 비난의 화살을 자기에게 쏘거나 나보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쏘는 것 같아.

A: 나는 사회권이란 말을 듣기 전에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가해만 인권침해로 생각했어. 또 국가권력이 폭력적으로 행하는 일만 인권침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가만 보니 손 놓고 방임하는 것, 경제사회적 강자에게 유리하게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게 근본적 인권침해 같아.
B: 사회권의 침해는 문제를 회피하고 부인하고 방임하는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게 맞아. 우린 그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의 작동을 돕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

A: 사회권을 침해받으면서 내가 그 작동을 돕는다? 참 무섭다.
B: 나도 그래. 내가 누리는 소비의 몫을 늘리려는 데만 몰두하며 사는 게 싫으면서도 무력하고. 삶의 조건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까?
A: 네가 나에게 사회권이란 말을 알려줬잖아. 우린 당장 유토피아를 열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말에 맞춰 생각을 바꾸면서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게 모든 인권이 걸어온 길이잖아. 노동, 교육, 건강, 주거 등을 다 내 돈 주고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같이 차리고 같이 먹는 밥상처럼 생각해야겠어.
B: 사회권을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사회권 침해를 인권에 대한 구조적 침해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말이구나. 문제를 받아들였으니 풀려고 애써야겠네.

 

인권오름 제 483 호 [기사입력] 2016년 05월 0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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