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2] 이분법과 차별의 재생산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억울해 한다. 차별에 억울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차별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차별에 대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차별이 공고화되는 역설이 벌어질 때가 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함께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인종 차별이 이 차별의 작동방식을 생각하게 해보는 좋은 예이다.

한국경제가 23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중국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귀국을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우한에서 온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가 감염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내가 그와 왜 같은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항의하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방송 이후에 중국인들이 일본 상점에서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역시 중국인들은...”하면서 혀를 찼을 것이다. 싸우는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같은 중국인 아니라 우한인과 다른 중국인으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일본인들의 눈에는 그저 같은 추한 중국인들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이탈리아의 500년이나 된 유서 깊은 음악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을 강의에서 배제한 것을 보며 억울해하겠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눈에는 같은 중국인들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흔한 착각은 차별의 구조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의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문제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흑인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 대표적이다. 서구인이 비-서구인을 차별하고, 일본인이 한국인을 차별하며, 한국인이 중국인을 차별한다. ‘차별을 다룰 때 이처럼 우리는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자차별받는 자라는 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사고한다.

이 두 범주로 사고하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게 정당한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려고 한다. ‘분리가 우리를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리의 작동방식과 그 효과를 이해하지만 차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왜 억울해하는 것이 차별을 종식시키는 게 아니라 차별을 더 공고화하는지도 말이다.

차별은 분리를 통해 차별을 은폐한다. 이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흑백분리야말로 차별적인 것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리는 차별이 작동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이다. 그런 동시에 분리는 차별이 작동하는 가장 훌륭한방식의 폭력이다. ‘훌륭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분리가 차별을 은폐하여 차별이 잘 작동하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분리되면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일이 없다. 따라서 차별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게 보인다. 분리되면 분리된 존재들은 각각 다른 field’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분리 자체가 폭력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일상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장이 달라진다는 것은 더 큰 장을 상정하지 않는 한 무관해 보인다. 버스를 타고 세상을 다니는 사람과 버스라고는 태어나서 한번도 타보지 못한 사람은 일상적인 수준에서는 무관한 사람이다. 이 둘은 만날 일도 없지만 만나서도 서로 주먹다짐을 할 일이 없다.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리가 차별의 구조적 폭력임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관해 보이는 두 을 연결하는 하나의 더 거시적인 장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장의 분리가 폭력임을 인식하며 구조가 길거리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 있다. 하나는 무관해 보이는 장들이 직접적으로 부딪칠 때다. 남미는 오랫동안 인종이 북미와 유럽처럼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연합뉴스가 200567일 보도한 것처럼 남미 볼리비아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원주민들이 수도 라파즈의 사무실에서 백인들에게 , 백인들 넥타이 풀어라고 말한 것은 부를 독점한 백인에 대한 원주민의 반감을 표출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제도화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미의 사회계급 구조가 혼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에 따르면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 그리고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그 백인들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죠,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뮬라토, 흑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삼보, 원주민, 흑인 등등이 사회 계급 구조와 층층이 얽혀있다. 미시적이고 일상적 수준에서 분리되어 무관하게 살아가는 두 장이 부딪칠 때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다.

차별의 구조가 두 그룹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진실은 장의 부딪침보다 장의 분리를 요구할 때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서 보이듯이 말이다. 분리하려는 자는 여러 개로 분리하는 게 아니라 두 개로 쪼개려고 한다. 한쪽에는 분리되어 차별받아 마땅한 자와 반대쪽에는 그들로부터 안전한 자들이다. 문제는 어느 수준에서 분리를 시도하는가에 따라 이 분리의 전체 구조는 결코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된다는 점이다. 모두가 안전을 위해 분리를 시도하는 순간 차별의 감추어진 진실, 하나의 장안에서 작동하던 위계와 차별의 구조가 단박에 드러난다.

이 때가 차별이 은폐하는 가장 중요한 차별의 특징인 차별이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이다. 차별은 저들과 나라는 이분법적인 분리를 요구하는 차별-배제가 층층이 쌓아 올려져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이 꼭대기를 제외하고는 각각의 행위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내가 차별받아 마땅한 자들(내 아래에 속한)로 인해 억울하게 나를 차별하는 사람(내 위에 속한)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분리를 요구받고 모욕당하고 차별받기 때문이다.

차별은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는 결코 이분법적이지 않다. 차별의 구조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구조적인지를 간과하며 차별의 작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꼭대기를 제외하고 모두는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되고 피해자로서 말하려고 한다. 그래야지만 내가 분리되는 끔찍한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동양인을 차별한다고 하면 내가 왜 저 더럽고 미개한중국인과 같은 동양인취급을 받아야 하냐고 항의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저항이 차별하는 와 구조를 향한다면, 차별이 만들어내는 원한은 아래로 흐른다. 그리고 이 원한이 분리를 요구하고, 이 분리를 요구하면 할수록 그가 스스로에 대해 대면하게 되는 것은 분리하는 자의 권력이 아니라 분리되는 자로의 부당함과 억울함, 즉 원한이며 이 원한은 아래로 다시 행사된다. 슬프게도, 차별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할수록 차별이 멈추는 게 아니라 더 층층이 쌓아 올려진 차별의 구조가 더 공고하게 구축되는 이유다.

이게 어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촉발된 인종 차별에만 한정된 이야기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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