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3] 자격과 인종정치

엄기호(인권연구소 '' 연구활동가)

20여년 전이다. 제법 오래 유럽에 체류하던 중 로마에 갈 일이 있었다. 숙소를 구하다 한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당시 청년들의 배낭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들이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기웃거려볼 심산이었다.

한 숙소와 연락이 되었고 로마역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남성분이 다가와서 숙소 구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네 집이 한인 숙소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분인가 싶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아니란다. 어느 집에 묵냐고 해서 묵기로 한 숙소 전화번호를 보여주니 실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거긴 한인숙소 아니에요. 조선족이 하는 곳입니다.”

당시 그 말은 대단히 신기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인을 한국인과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난 분들이며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재중 교포라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고생하고 불쌍한사람들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 강한 듯 보였다.

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 영국에서 유학하며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선배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영국의 교포 사회에서 이미 슬금슬금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과거에는 조선족분들의 숫자가 별로 없었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단다.

그런데 점차 미등록 이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한인 민박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하면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들이 하는 민박은 가격은 약간 저렴한 반면, 밥이나 반찬은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내가 묵었던 로마의 숙소도 그랬다. 로마역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거기 진짜 한국 음식 아니에요. 조선족식이지. 우린 김치를 먹어도 진짜 한국 김치를 먹어야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금 한국 정부는 후베이성에 지난 14일간 머물렀던 모든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모든 중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더 강경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자국민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들 사이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금지한다면 사실 국적이나 인종적 정체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후베이성에 머물렀는가, 아닌가만 따지면 된다. 더 확장하면 중국에 체류했는가, 안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이 점 때문에 입국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과 상관없이 비시민권자는 입국 금지, 자국 시민권자는 입국 후 14일간 격리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데 그 격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드시 조선족을 끼워서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족은 조선족이지 재중동포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족은 조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족 역시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샌가 조선족은 더는 한국 시민권자와 같은 동포,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동포라고 하면 같은 민족을 의미한다. 동일성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와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재중동포로서의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하게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권리에 대한 언술이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은 건강보험과 무료 치료 등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을 같은 민족도 아닌 주제에건강보험에 구멍을 내고 한국 시민권자들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임승차당하고 있는 한국 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한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중국 눈치나 보는 무능한 국가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 문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문화적 언술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에 관한 정치적 언술이다.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민족과 인종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같은 권리를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권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같은 민족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과 인종은 삶을 위한 자격이 된다.

국가는 자격 있는 사람만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 이 말은 생명 통치로서의 근대 국가인 한국이 지금 내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푸코는 권력을 생명 권력이라고 불렀다. 중세까지의 권력은 광장에서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을 통해 권력의 실존을 보여줬다. 대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이것을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근대 권력은 병원을 짓고 공중보건을 돌본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다.”

이 구분을 고려해 본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다는 조선족 혐오의 목소리는 근대 국가를 이중화할 것에 대한 요구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근대 국가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세 국가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자격은 존재의 안전이며 나아가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는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전자만 돌보아야 한다. 자격 없는 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설령 그 자격심사가 자격과 상관없이 돌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통치는 경제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를 분할하고 위계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럼 시민권자라고 하여 다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족을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고 주장하는 내부의 압력은 시민권자의 자격도 따진다. 그가 과연 그런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확진되어 격리되어 있는 분들 중에서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세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선량한시민권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금으로 치료받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시민권자이지만 도덕적으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금을 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들이야말로 극도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종 정치의 핵심은 자격의 문제다. 백인들은 유색인들이 인간의 자격이 없다고 봤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정확하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은 공공재를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자격으로부터 배제하고, 자격을 위계화하는 것이 인종 정치다.

나치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진짜아리안족을 선별하는 것. 조금이라도 아리안족에 흠결을 가하는 존재는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만 자격 없음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ss친위대였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는 배제되었고,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인종에는 인종이라는 계보학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완벽함, 성적 정체성에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완벽함 등 모든 생물학적 완벽함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도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총통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처럼 자격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다. 자격은 완벽함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모두 잠재적으로 탈락이고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내가 탈락하지 않기 위해 남의 흠결을 따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시민과 시민 사이에 자격을 둘러싼 처절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자격심사관으로 완장을 차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가 제한적이라는 공포가 엄습할 때 이 아귀다툼은 격화된다.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는 무임승차자이며 민폐이기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격심사관 완장을 찬다. 완장을 차고 타자에게 선빵을 날리며 심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물론 내 완장에 대해 다시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곧 나타나 나를 또 심사하겠지만 말이다. 이게 어디 지금 국민의 자격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내가 혐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장에 저항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363 호  [기사입력] 2013년 09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추석이 지났다. 여기저기서 기름진 명절 음식으로 찌운 살 걱정이 들려오지만 마냥 허기진 느낌이 든다. 허한 느낌이 아침저녁의 찬 기운과 함께 깊어간다. 없는 것들에 대하여 찾아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너무 허기가 진다.

추석날 아침, 서울 대한문 앞에서 장기농성장 합동차례가 있었다. 명절이라 제각기 농성장을 지킬 사람도 부족하다 하여 많이 모이진 못했다. 간단한 의식을 마친 후 상에 올렸던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단식자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맘 편히 먹으라고 덕수궁 안으로 산책을 핑계 삼아 몸을 숨겼다. 그 중 한사람은 단식에 들어가기 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 명절 기름진 음식을 정말 좋아해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제 고향에선 전을 종류별로 잔뜩 부쳐서 정말 좋아요.”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 명절에 전 한 조각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쌍용차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 단식이 보름을 지났다. 허기는 대한문 단식농성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노동을 무시 받고 단결을 부인당하고 약속을 배신당한 사업장들이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민망할 정도다. 밀양에선 은근슬쩍 한전이 공사를 다시 한다니 노인들이 관 자리를 파놓고 싸움에 나선다신다. 강정에선 안부전화에서조차 ‘우리 강정 좀 살려줍쇼’라 한다. 진주의료원 폐업 이후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은 어찌됐는지 천막농성을 이어간다는 노동자들 상황은 어떠한지 언론에 한 줄도 안 나온다. 그런데 집권자의 정치는 제 말만 하고 ‘이하 생략’과 ‘안면몰수’로 이어지고 있고 아동의 인권조차 아랑곳 않는 언론권력이 코치와 길안내를 하고 있다. 야당은 ‘저들 때문에 못한다.’는 닳고 닳은 핑계 속에 진짜 싸우는 것인지 시늉인지 애매한 행동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왜 굶느냐?’고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고 질책과 원망을 들어도 ‘이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로 답하는 심정을 이해하려 애쓸 수밖에 없다. 단식투쟁은 직접 실행하는 사람이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나 고역중의 고역이다. 생명을 거는 행위인 만큼 논란도 많다. 그 유명한 간디조차 ‘목숨을 담보로 한 자기 신념의 강요’라는 비판을 받았다. 간디가 한 여러 차례의 단식 중에서 어떤 경우는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권리요구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찜찜한 것이었다. 그런데 걱정과 비난, 논란과 강한 의지가 교차되는 그런 단식투쟁을 많은 사람들이 실행해왔다.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첫째 이유는 권리를 부인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고자 함이다. 역사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표적 사례는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단식투쟁이다. 참정권 운동가들의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은 당국은 그저 사소한 위반 행위로 취급하려 했다. 이에 운동가들은 벌금형 대신 감옥을 택했고, 수감된 후에는 형사범이 아닌 정치적 수인의 대우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했다. 처음 단식투쟁을 한 여성은 1909년의 던롭이었다. 던롭은 국회의사당 담벼락에 권리장전의 구절을 쓴 혐의로 수감됐다. 91시간의 단식 끝에 그녀는 일단 풀려났다. 당국은 던롭이 권리를 위한 ‘순교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형기를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석방했던 것이다. 이후 그녀의 뒤를 따라 다른 운동가들도 줄줄이 단식투쟁을 택하자 당국은 ‘강제급식’이란 방법을 개발했다. 사지를 붙들고 목구멍에 호스를 넣어 강제로 죽을 들이붓는 것은 사실상 고문이었다. 그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고 목숨에 위협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야 강제급식은 폐지됐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부인하는 당국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단식투쟁이었고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적 권리의 행사였다.

Marrion Wallace-Dunlop(메리온 던롭)
정치적 행위로 수감된 사람은 (형사범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수인으로서의) 일차적 구분에 따른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모든 문명국가가 인정한 권리를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원칙의 문제로서,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이 문제가 내가 만족할 만하게 해결될 때까지 지금부터 모든 음식을 거부하겠다.

두 번째는 ‘말’을 차단당한 사람들이 사회에 온 몸으로 ‘말’을 걸려는 행위가 아닐까한다. 한국에서 양심수들의 단식은 아주 많았고 감동적인 명문들이 외부로 전달되곤 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이들의 단식투쟁은 그렇지 않았다. 한 예로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이 있었다. 그 네 번째로 제일 큰 규모였던 2003년 집단단식에는 6백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처우 개선의 요구가 아니라 반인권적이고 부당한 사회보호법(형기를 마친 후에도 감호소에 수용을 강제했던 법률)을 폐지해달라는 요구였다. 이름 없는 이들이고 사회에서 격리된 이들이었기에 그 흔한 성명서나 단식 결의문 같은 것도 없다. 그 흔적은 외부에서 인권단체들이 내놓은 지지성명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다. 청소 피감호자들이 사회보호법 폐지를 요구하며 벌써 일주일째 집단단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의 악랄함을 바깥 세상에 고발하고자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돼있는 피감호자들이 택해야 했던 길이 바로 곡기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을 게다. … 국회도 국가인권위원회도 곡기를 끊은 채 인권침해를 호소하는 피감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법률안 발의는 차치하고라도,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일은 가능할 텐데, ‘표’가 되지 않으니 움직일 생각조차 않고 있다. 지금 청송의 피감호자들은 몸뚱아리 하나로 사회보호법의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정녕 이들의 절규를 외면하고자 하는가? (2003년 5월 31일 인권하루소식)

이주노동자들의 단식투쟁도 상황이 그러했다. 일제단속과 강제추방에 항의하며 단식을 하다가 외국인보호소로 끌려가고 보호소 안에서 단식을 이어가거나 단식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강제 출국된 사례가 숱하게 많다. 그들 또한 자기 언어로 단식투쟁에 대해 말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끌려가기 전에 집회 등에서 파편적으로 남긴 말이 남아있을 뿐이다. 분명 말을 했을 것이나 한국사회가 듣지 않거나 알아듣지 못한 말들이었을 것이다.

노동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당당하게 싸워왔다. … 농성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게 더 좋다. … 이주노동자가 죽어나가도 한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식을 하다가 사람들 앞에서 죽어도 좋다. 그래서라도 한국과 세계에 이 상황을 알리고 싶다. (2004년 ‘이주노동자 단식투쟁 선포대회’에서 한 단식자의 말)

세 번째로 생각되는 것은 흔히 전형적으로 제시되는 이유일 것이다. 연대에 대한 호소 그리고 지배적 악에 대한 협력거부를 비폭력불복종으로 표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단식투쟁 사례는 미국농업노동자조합을 만들었던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의 말인 것 같다. 그는 생애에 걸친 노동운동 속에서 각각 25일, 24일, 36일에 걸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했다.

Cesar Chavez(세자르 차베스)
단식은 우선은 가장 개인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단식입니다. 또한 단식은 농업 노동자 운동에서 나와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화와 강화를 위한 절실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또한 단식은 도덕적으로 권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이 옳고 정의인지를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할 수 있고 또 더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남녀 활동가들에게 고행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식은 캘리포니아 포도를 홍보하고 팔아서 이익을 얻는 대형매장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우리의 땅과 식량을 덮친 전염병과 살충제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악은 내가 그러리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그 악은 우리들 삶을 목 조르고 또한 우리 모두를 지탱하고 있는 생태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권력자들의 오만 속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연대 속에 있습니다. 나는 이 단식이 정의를 위한 다수의 간단한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심장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향한 사람들, 우리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남녀들이 수행하는 행동 말입니다. 함께라면 모든 일은 가능합니다.

세자르 차베스는 비폭력 투쟁에 대해서도 여러 말을 남겼다.

비폭력행동의 첫째 원칙은 모욕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비폭력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비폭력이 굉장히 많은 조직화로 가는 길이란 걸 이해해야만 한다.
비폭력은 행동하지 않는 게 아니다. 비폭력은 토론이 아니고 겁쟁이나 나약자에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비폭력은 고된 활동이다. 비폭력은 기꺼이 희생하려는 것이고 승리하기 위한 인내이다.
폭력은 이미 다친 사람들을 해칠 뿐이다. 폭력은 억압자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시켜준다.

마지막으로 내게 떠오르는 것은 절박함이다. 나와 경험을 같이하는 인권활동가들이 으뜸으로 공유하는 기억은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걸쳐 연말연시 혹한기에 했던 13일간의 노숙단식투쟁이다. 인권을 국정지표로 내건 정부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간을 졸이게 하더니, 국가보안법 폐지도 대표적 공약사항이었던 국가인권위원회 설치와 소위 개혁입법들도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는 공전이고 여야는 상대방 핑계만 댔다. ‘지금’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20년만의 폭설과 여론의 외면을 뚫고 단식투쟁을 강행하게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글이 인권활동가 유해정의 단식일기였다. 지금 대한문의 단식자들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한다.

유해정(인권활동가)

단식 6일째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뺨이 눈물로 젖었다는 것 이외에는 …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마음을 울린다고 말했지만, 우리 역시 울고 있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투쟁하고 있지만 이렇게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퍼, 그들을 울릴 수밖에 없는 우리가 미워 우리는 매일 눈물을 머금고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닫는다.

배고픔이 힘들지 않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주긴 할까? 단식이 일주일째 접어들다보니 위장도 지쳤는지 때때로 꼬르륵 소리를 내긴 하지만 음식을 넣어달라는 투정은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그럼 힘든 것은? 물론 추위다. …

단식 7일째
살을 에는 듯한 날씨에 자고 일어나니 물이 다 얼어버렸다. 따스한 물이라도 마셔야 몸이 조금이나 풀릴 듯 한데 온기란 찾아볼 수 없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단식단 도우미들이 서둘러 버너를 켜보지만 부탄가스도 얼어버려 부탄가스를 켜는데만 10여분이 걸렸다.
… 왜 그렇게 고행을 자처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본래부터 우리의 조건이 그러했고 절박한 것이 있었다면 설명이 될까?
… 우리는 절박하다. 1월과 2월을 넘기면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처절함이 이곳에서의 하루를 버티게 하는 것이다. 추위에서 몸을 돌보거나 내일의 내 몸을 생각하게 하는 여유를 잃게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에 나서는 것만이 지금 우리에겐 소중하게 느껴질 뿐이다.
… 오늘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농성장을 찾았다. … 그들의 방문을 받으며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이 우리가 딱하고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국보법 투쟁과 국가인권위원회 설치투쟁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 밤이 지나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 내일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 하는 의구심으로 하루의 농성을 접으며 진흙 같은 하늘에 든 별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내일 역시 모두들 일어설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투쟁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의 작동에 허기져 있다. 정치가 없다. 삶의 경제가 아니라 숫자놀음의 경제만이 우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이 조임에서 빠져나가려면 방향전환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걸 의논하고 길을 내는 것이 정치이다. 그런데 기존 정치세력은 경제를 핑계로 숨거나 도망 다니기만 한다. 인권의 가치는 공작 정치의 놀음에 팔아먹은 지 오래다. 그런 공백 때문에 거리의 정치가 더 절박하고 힘들어진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배고픔만이 아니라 이제 추위가 단식자들을 괴롭힐 것이다. 허기짐이 깊어간다. 그만큼 분노도 커간다는 것, 당신들의 정치의 공백과 횡포가 클수록 저항의 힘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신호가 온다. 몇 해 전 성명서의 문구처럼 ‘불통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절규를 언제까지 들어야할까?

기륭전자 노조

… 오늘도 신문에서는 비정규직 파견 노동을 확장하겠다는 소리만 넘쳐납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냉장고가 커지고, 티브이가 평평해져 화려할수록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일회용 휴지보다 못한 처지로, 김치마저 먹지 못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 우리는 30, 90일 넘는 단식투쟁을 통해 우리의 결의를 이미 보여준 바 있습니다. 우리 몸이 부숴지고, 많은 분들께 우려와 걱정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은 우리의 자율적 선택을 넘어 부득이한 선택입니다. … 우리의 투쟁은 가장 낮은 요구마저도 가장 높은 투쟁을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불통과 절망에 맞선 것입니다. … 기륭투쟁의 핵심은 파견법에 있습니다. 기륭문제 해결은 현대판 노예제도 파견노동 간접고용 노동을 없애는 길의 첫 단추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길을 위하여 다시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것입니다.(2010년 제 3차 단식 투쟁에 돌입하며)

인권오름 제 363 호  [기사입력] 2013년 09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75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요즘 뉴스를 접하다보면 한국에 9.11이 터졌나 하는 착각이 든다. 미국의 역사에서 이전 시대에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음모적 탄압의 사례가 많지만 9.11이후 그것은 정말 노골적이라 국제인권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9.11 이후 미국사회에서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하에 전통적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의 핵심이 도전받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반대자들을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결사에 대한 죄를 부과함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무력화시킨다. 정부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비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언론과 대중, 심지어 의회조차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걸 방해받는다. 단지 불순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비밀 정보만을 이유로 시민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된다. 비밀사찰, 이메일 등에 대한 도감청, 연설 방해, 집회방해, 시민단체의 후원자 캐기, 비시민권자(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단속과 구금․추방을 강화하기, 시민불복종 행동에 국내 테러라는 딱지 붙여 처벌하기, 인터넷 시대 정치 활동가들에 대한 전자 개인 기록 구축하기, 노벨평화상 수상경력까지 있는 시민단체에까지 “범죄를 일삼는 극단주의자”라는 딱지 붙이기, 툭하면 언론보도를 제한해 달라고 요구하며 언론 길들이기, 이에 굴하지 않는 비판적 언론인들의 밥줄 자르기, 정부가 허위정보 발표를 남발하고 의회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 등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낸시 챙 지음, 유강은 옮김, 『정치적 반대세력을 침묵시키기』, 도서출판 모색, 2006 참조)

들여다볼수록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최근 소위 ‘밥줄공안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뭔가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 권력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교단에서 쫓겨나고 마이크를 뺏기고 무식하거나 극단론자라는 식의 인물평에 오르고 검찰과 경찰의 수첩에 오르게 된다고들 느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이런 일들이 목표하는 바는 소위 ‘알아서 기게 만들기’라고. ‘알아서 기기’를 좀 더 공식적인 언어로 하면 ‘자기 검열의 강화’이다. 평생을 검열과 씨름한 체코의 한 작가는 ‘자기 검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말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검열과의 싸움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말하면 절대로 출판도 공연도 가능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에 우회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다. 자기 사회에 대한 진짜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우화나 터무니없는 얘기나 환상 같은 얘기로 위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알아들으려 하는 사람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그리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검열과의 싸움에 장점이 하나 있다면 검열을 피할 수 있다는 것과 감춰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선상에서 요즘 한국의 네티즌들은 ‘반대한다’고 쓸 말을 ‘찬성한다’는 식으로 씀으로써 검열과 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생존 또는 출세를 위한 검열이다. 이것은 다소 복잡하고 슬픈 형태의 자기검열이다.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뭔가에 반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죽거나 감옥에 가라, 또는 너의 지위를 영원히 잃어라”라고 도대체 누가 타인에게 명백하게 말하겠는가? 명백한 금지는 없었지만 용기가 부족하거나 두렵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거나 단지 불편하게 느껴지기만 할지라도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자기검열의 대가로 살아남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결성을 잃게 된다. 이런 게 슬픈 종류의 자기 검열이다.

세 번째는 표현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단계의 자기 검열이다. 표현한 사람을 내치는 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검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금지하고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심오한 해방이 될 수 있다. 금지당하고 추방당함으로써 더 이상 자기 검열을 생존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데가 없는 바닥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바닥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지점이 해방감을 경험하게 되는 이상한 지점이다. 표현하길 원하는 모든 것, 진짜로 느끼는 모든 것을 갑자기 쓰기 시작한다. 돈을 못 받더라도 어떤 지위를 얻지 못해도 출판조차 하지 못할지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는 지금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을 겪고 있는 것일까? 입만 열면 ‘좌빨’이 되고 제거돼야할 ‘불순인물’ 또는 ‘불순세력’이 돼버리는 현실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위험한 것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 인간다운 생존을 추구할 노력을 억누르는데 있다. 올 초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때 철거민을 향해 ‘도심 테러리스트’ 운운했던 게 그 생생한 증거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진짜 위험원인이 뭐고,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고 ‘헛된’ 적을 지목해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그 희생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표면에선 몇 몇 지식인과 유명인들이 유탄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희생양은 사회경제적 소외에 대해 표현하고 고칠 길이 가로막힌 사람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의 글이다. 그녀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을 7년간 지냈는데,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집단학살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은 르완다와 소말리아를 방문한 인물이다. 9.11이후 그녀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인권을 후퇴시키는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강연과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는데 오늘 읽어볼 글은 그 중 하나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벌이고 있는 ‘인권과의 전쟁’ 상황에서 곱씹어봐야 할 지적이라 여겨진다.

인권, 인간 발전, 인간안보를 연결하기

…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재판장 아더 차스칼손이 표현한 대로 “우리는 맨 처음부터 파수꾼이 돼야만 한다. 첫 단계에서 용인한다면 다음에 올 모든 단계는 훨씬 더 법의 지배를 침식하고 인간 존엄성을 무시할 것이다.”

시민의 자유를 급속히 침식하고 이민법을 오용하게 된 9.11의 여파 속에서 미국 의회와 언론은 파수꾼이 되는데 실패했다. 또한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수인 학대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인간 존엄성을 무시했다.

현재의 안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답은 확고하고 심사숙고하며 일관된 것이어야만 한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는 좋은 출발을 보여줬다. 2004년 8월 ICJ의 격년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온 160명의 국제 변호사들은 테러리즘과의 전투에서 인권과 법의 지배를 지지할 것에 대한 선언(일명 베를린 선언 Berlin Declaration)을 채택했다.

“테러리즘 억제를 위한 조치를 채택함에 있어, 국가는 형사법과 국제법의 핵심 원칙과 국제인권법, 난민법 및 인도주의 법의 구체적 기준과 의무를 포함한 법의 지배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이들 원칙과 기준과 의무는 테러리즘에 대해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행위의 허용가능성과 정당성의 경계를 정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행위가 역겨운 성질의 것이라 해도 국가가 국제적 의무, 특히 기본적 인권의 보호라는 국가의 의무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www.icj.org)

지속적으로 변하는 외교정책 환경 속에서, 소위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 부른 것으로 인한 인권의 이익과 비용에 대한 명백한 판단이 곧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9.11 공격을 위반자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국제적인 군사, 경찰, 정보의 협력을 요구하는 “반인류적 범죄”라 하지 않고,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요구한 것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중대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형성하는데 있어 언어는 결정적이다. 사건을 규정하는 언어가 대응의 성격을 결정한다. 9.11은 “반인류적 범죄”의 관할 하에 있다. …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사악한 함의를 가졌다. 이런 규정은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질서와 안보가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으뜸이라는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축소와 관련된다.

언제가 돼야 테러와의 전쟁은 승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도출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영원한 전쟁인가?

미국과 유럽에서 강조점은 국가안보와 테러와의 전쟁 행위에 있다. 그러나 적나라한 현실은 이미 폭력, 질병, 극빈에서 오는 일상적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수백만 사람들에게 9.11이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불안은 어디서 다음 끼니를 구하나, 어떻게 죽어가는 아이의 약을 구할까, 총을 가진 범죄자를 어떻게 피할까, 10살짜리 AIDS 고아로서 살림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이냐이다.

지난 6년간 전 세계에서 대략 2만5천여 명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 숫자를 같은 기간 기아, 말라리아, 그리고 기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비교해보라. 이런 질병으로 죽는 수는 하루 2만 5천여 명에 가깝다.

진정으로 안전한 세상을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해야 한다. 즉, 우선순위를 옮기는 것, 인간안보의 성취이다. 이것은 인권과 인간발전에 대한 새로운 헌신, 세계의 모든 곳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공통의 책임감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로의 변경이다. 새로운 접근은 인간과 지구의 안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넓은 이해 속에서 시작된다. 취약성이 커질수록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늘어가며 우리는 이와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정부들 모두 국가안보를 넘어서서 안보를 광의의 의미로 이해하는 생각과 정책을 확대해야만 한다.

내가 아일랜드 대통령으로서 인식하기 시작(예를 들어 소말리아와 르완다 방문으로)했고 유엔에서의 5년 임기동안 확신하게 된 것은 인간의 모든 불안의 실제적 원인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차원에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의 부족, 즉 투표나 어떤 식으로든 국가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에서 배제되는 것과 경제적․사회적 소외라는 점이다. 변화의 열쇠는 인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확보하도록 자력화하는 데 있다. 이것을 위해 인민은 지역에서나 전국적으로나 자신들의 정부가 책무성을 갖도록 할 수단을 필요로 한다.

인간안보에 대한 광의의 이해를 아마티아 센과 사다코 오가타가 공동의장인 ‘인간안보에 관한 독립위원회(independent Commission on Human Security)’가 검토했다. 이들의 보고서(Human Security Now, 2003)는 국가안보로부터 인민의 안보, 즉 인간안보로 변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인간안보의 두 개의 핵심 개념은 ‘보호’와 ‘자력화’이다. 첫 번째 ‘보호’란 국가의 책임(때로는 국제사회의 책임)으로서 … 인권을 증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집단이 대표될 수 있는 정치적 조정을 수립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자력화’란 자신을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인민의 능력이다. 자력화된 인민은 자신의 존엄성이 침해받을 때 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자력화된 인민은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창조하고 지역에서 많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안전을 위해 결집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인권 공동체와 법학자들이 함께 결합할 수 있고 혁명적인 사례를 증진할 수 있는 개념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풀뿌리 운동을 보다 가시적으로 만들고 풀뿌리 운동에 기반할 필요가 있다. 풀뿌리 운동은 부당한 지구적 거버넌스에 도전하고 자신들의 정부가 식량, 안전한 물, 건강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차별 없이 실현하는데 더욱 더 책무성을 갖도록 인권의 구조를 사용한다.

아마티아 센은 찬사 받은 그의 저작 ‘자유로서의 발전(1999)’에서 말한다.

“때때로 실질적 자유의 결핍은 경제적 빈곤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경제적 빈곤은 굶주림을 면하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으며, 치유가능한 질병에 대한 치료를 받고, 적절한 옷과 주거를 제공받고, 또한 깨끗한 물과 위생적인 시설을 누릴 자유를 박탈한다. 또 다른 경우 부자유는 공공시설과 사회 보호의 부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생태학적 프로그램, 의료보호나 교육시설을 위해 조직된 기구, 지역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한 효과적인 제도가 없는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부정하고 공동체의 사회․정치․경제적 생활에 참여할 자유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권위주의적 정권 때문에 자유에 대한 침해가 직접적으로 생긴다.”

자유와 인간안보를 이런 식으로 연결 짓는 것은 자원 할당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 발전을 위한 지원은 연간 6백억 달러, 선진국의 연간 농업보조금은 3천억 달러, 군사지출은 9천억 달러로서 여전한 불일치가 있다. 2015년까지 새천년발전목표(MDG: 2000년 유엔특별총회가 채택한 것으로 2015년까지 절대빈곤과 기아의 근절, 초등의무교육 실시 등 8개항에 걸쳐 국제사회의 달성목표를 제시했다) 실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간 5백-6백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 MDG에 대한 추가 지출이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든다면 좋은 투자가 아니겠는가?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의 인권 보편성에 대한 강조를 부각시킴으로써 결론을 지으려 한다. … “우리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간성을 해칠 뿐이다. 이런 근본적 진실을 깨뜨리지 말자. 우리가 그것을 깨뜨린다면 약자들은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인권오름 제 175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30조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인권이란 말을 우리 사회가 흔히 사용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인권이 자주 거론될수록 인권을 해치는 권리의 주장도 커졌다. 오히려 그런 판이 더 커졌다고도 볼 수 있는 위험한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인권의 주장에 힘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인권을 차용하여 사익을 주창하거나 정치적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써먹는 일이 그것이다. 시장중심적이고 시장우호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틀 속에서 기업 등이 권리의 주체임을 자임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가 기업가의 권리와 대등하게 다뤄지는 것, 자유와 안전이 거래 가능한 것처럼 다뤄지는 것, 기업의 이익 주창이 권리 언어로 포장되는 것 등은 권리 주체를 혼동한 대표적 사례이다.

아무 권리나 인권의 목록에 오르지 않는다. 어떤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뭉쳐져 온갖 희생을 치른 과정을 통해서 인권은 만들어져왔다. ‘권’자를 갖다 붙임으로써 그런 과정과 정당성이 생략된 이익의 주장을 인권과 대등한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가령 노동권은 그 자체가 기업가의 재산권이 무한정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제약을 받아야만 한다는 필요성과 정당성 속에서 인정된 인권이다. 이런 노동권에 대응하여 기업가의 재산권의 일부의 행사에 불과한 경영권이니 하는 것이 인권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노동권의 핵심요소인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에 맞서 기업주의 대항권을 얘기하는 것은 ‘권’을 막도장 새기듯이 위조하는 행위이다. 장애인의 교육권에 맞서 내세우는 재산권은 사실 ‘집값유지권’이란 건데 교육권이란 인권에 ‘집값유지권’이란 인권이 대응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도 주장되거나 인정된 바가 없다. 기업의 제약 없는 기술 실험의 권리를 사상과 언론의 자유 논리로써 설파한다거나 기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명예와 신망에 대한 프라이버시권’으로 방어한다든가, 제약과 의료산업의 연구권리가 건강권이란 인권을 위한 것이라는 둥 사회적 감시와 비판을 ‘인권’을 가장하여 벗어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인권과 물적 권리를 혼돈하고 인권의 주체를 사회경제적 권력자로 혼돈하는 일이야말로 인권에 대한 모욕이자 침해이다. 인권의 주체는 사라지고 인권을 도구삼은 자의 것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초국적 기업 등이 이런 식의 권리포장을 애용한다면 정치적 패권세력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에 ‘인권을 위한 전쟁’이란 수식을 붙이고, 뭔가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인 양 자국민과 세계인의 눈을 속이려 한다. ‘인권을 위한 전쟁’은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인권을 위한 식량지원반대’, ‘인권을 위한 의약품 봉쇄’ 같은 건 또 어떤가. 이런 일들을 우려하여 선언 30조가 있는 것이다.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특정국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없다고 했다.

선언에 보장된 모든 인권은 다른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지, ‘권’이라는 글자만 쏙 빼서 읽어서는 안된다. 선언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일 시킬 때 적절한 휴식의 권리 보장,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에 대한 의무를 자국정부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의무로 말하고 있다. 모든 인권, 특히 재산권은 이런 인권간의 관계 속에서 내재적 제약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해치는 인권은 인권의 주체들로부터 주체자격을 강탈하는 양식이다. 인권하면 흔히 혹독한 시련에 처한 피해자를 떠올린다. 피해자 또는 희생자는 구제 또는 구원받아야 한다. 메시아처럼 누군가가 인권을 주창하여 희생자를 구원하는 논리다. 이런 과정에서 인권의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인도주의적’이란 수식이 붙은 온갖 간섭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어떤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안 입는 헌옷을 싸서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진 인권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다.’ 인권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권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발신자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돌아온 인권은 발신자가 입맛대로 주무르는 것이 된다. 인권의 주체들이 스스로 권리 찾기를 하려는 데는 신경 쓰지 않고, 희생자의 구원자 노릇을 하려는 데 쓰이는 인권은 권리를 침해하는 권리일 수 있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9조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될 수 없다.

29조는 선언에서 의무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조항이다. 인권에 대해 흔히들 하는 비판은 ‘권리만 말하지 의무는 말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냥 의무라고 할 때는 인권에 상응하는 의무가 아닌 엉뚱한 번지수의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자기 의무를 말하지 말고 시민에게 법부터 지키라고 요구한다. 어린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면서 연장자에게 존대부터 하라고 요구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의 사람에게 어떤 착취가 있는지를 얘기하지 않으면서 피해 당사자에게 네 처신부터 똑바로 하라고 요구한다. 이럴 때 의무를 말한다면 그건 음모가 있는 의무론이다. 의무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청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진짜 의무자가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무,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야

권리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는 힘이다. 가령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편에 무상으로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기구와 관련 공무원이 고문이나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를 하지 않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인권이 권리라고 할 때 권리에서 나오는 의무는 이런 성격의 것이다. 교육권의 주체가 인간존엄에 반하는 학교규율을 지킬 의무, 인신의 자유의 주체가 부당한 공권력에 복종할 의무 같은 건 의무란 말이 잘못 쓰인 것이다.

또한 권리에 따른 의무는 자유재량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제력 있는 의무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요구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특정 사람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인이나 기구가 의무자로 지정돼야 의무가 성립된다. 사회보장의 권리에 따른 의무는 지자체나 정부가 져야 인권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상조회를 만들고, 아프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하고 위로하고 원조하는 것은 자유재량이다. 이 경우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복지권 주체의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는 아니다. 반면 국가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유재량이 아니라 의무이다.

권리는 소유하거나 주어지거나 상실되는 물건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고, 독재 권력이 고문을 애용한다 하여 고문 받지 않을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흔히들 비판하듯 인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인권침해를 저지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권리의 주체가 바뀌는 게 아니고, 아무리 밥 먹듯 인권을 침해한다 해도 그것으로 국가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리 주체가 지는 의무란 것이 착취에 대한 복종이고 악법에 대한 복종이겠는가. 권리주체의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빼앗기거나 왜곡된 자기 권리를 찾는 의무가 진짜 의무이다. 인권은 권리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권리이다. 법적 권리 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갖는다. 실정법으로 보장될 뿐 아니라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따라서 법적 명령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실정법과는 다른 도덕적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인권의 주체는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인권에 따른 의무주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인권의 주인인 자기 자신에겐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을 명한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돼야

앞서도 말했지만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자들 중 상당수는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언에 쓰인 구체적 권리들은 권리만을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의무를 겹쳐 입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선언 이후 의무의 구체적 내용들은 국제법전문가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 앞서 사회보장권과 관련된 조항에서 살펴본 최소핵심의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가령 국가의 보호 의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의 의무를 물을 것인지, 기업 등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 것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에 필수적인 것을 무슨 권리로 주장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에 그런 권리에 대해 국가가 또는 다른 사회경제적 강자가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령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 주장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생존과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이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에 물에 대한 권리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맞서서 그리고 수익사업으로 여기는 물 회사에 맞서 그들의 의무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연구요 실천활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9조에서 말한 ‘모든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뭘 말하는 걸까. 29조는 사회와는 단절된 이기적 개인의 권리라는 굴레에서 인권을 해방시켜 준 조항이다. 여기서 비판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세상이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개인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자기 이익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유능할 뿐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를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소중한 개인의 가치가 이런 식의 이기주의로 오해되는 걸 우려했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국가에 대한 의무’로 오독해서는 안된다. 선언 기초자들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염두에 뒀다. 한 대표자의 말처럼 “인간은 국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가 기본에 깔렸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할 위험성 때문에 ‘민주국가’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민주사회’라는 표현을 택했다. 따라서 공공질서, 일방의 복지 등 29조에 따른 권리제한의 조건규정들도 이런 전제조건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국가가 공공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한 범죄가 많았다는 것을 우려하면서 국가가 이런 문구를 이용해서 자의적 조치에 사로잡힐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29조를 봐야 한다.

선언의 목적은 이기적인 개인의 성취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라 한 것은 개인은 인격을 사회구조 속에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선언에 규정된 경제사회적 권리가 구체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연대와 상호의존성은 모든 인권의 성격이다. 모든 사람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서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모든 타인에게 존중받는다. 인권이 갖는 상호성을 인정함으로써 사회는 공동체를 이룬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만 개인은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이다.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를 현대적 화법으로는 ‘연대’라 할 수 있다. 연대의 화법은 어떤 것일까? ‘나는 000가 아니지만 당신이 탄압받는다면 그에 반대 하겠다’는 식의 화법이 소극적 관용의 수준이라면, 연대의 화법은 ‘내가 000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 운동을 지지한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인간의 존엄에 반한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연대와 상호의존성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뺄셈의식’일 것이다. 누군 이래서 안되고 누군 저래서 안되는 식으로 인권에서의 배제를 용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뺄셈의식을 버리고 가져야 할 것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공통감각이고 그 문제를 나의 것으로 느끼는 연대의식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은 나와 다른 인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반인권의식과 조치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가지는 그런 연대의식이야말로 진짜 우리편 의식이다. 우리편 의식을 설파한 연설문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 신념이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지만, 나의 종교를 논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당신의 종교를 바꾸라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차이점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같은 문제, 공통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당신이 불교도이건, 감리교도이건, 무슬림이건, 민족주의자이건 간에 당신을 지옥에 빠뜨린 문제를 우선 보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교육받았건 일자무식이건, 큰 길가에 살건 뒷골목에 살건, 여러분은 나처럼 지옥에 빠질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강등으로 고통받아왔다. 우리는 착취에 반대하고 강등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는 벽장 속에 내버려두자.”(흑인 해방 운동가 말콤 X의 연설문 중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냥개에게 쫓기는 약한 동물들처럼 인간사냥 당하는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뭔가. ‘재들은 우리 시민이 아니잖아.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같이 살아갈 수는 없잖아. 피부색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뭔가 다른게 존재하는 건 불안해.’ 한국은 동질적인 사회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서는 인권이 숨 쉴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는 시민권이 없다. 시민권은 나누고 분리하는 개념이다. 세금을 낸 시민이 정부 주식회사에서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그리고 뺄셈을 잘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인권은 포괄하고 더하는 개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처럼 확실하게 비시민인 사람들, 겉으로는 시민이지만 사실상 시민대접을 받지 못하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설계해야 하는 게 인권의 개념이다. 시민권 개념 안에서 인권을 바라보면 창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창문(window)의 어원은 ‘바람의 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이 뜻을 따르면 창문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바람의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게 된다. 시민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여다 보는 것, 즉 인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인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공동체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담은 28조는 세계인권선언 1조가 열어젖힌 문의 미닫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언 1조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므로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갈등과 분쟁이 온 세상에 퍼져있고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인간성을 유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이데올로기나 특질이 선언 1조에서 규정한 인간됨을 해칠 때가 많다.

이에 28조는 그 반대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는 2차 대전의 온갖 만행을 겪으면서 인간 개인들에게 폭력과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을 저주하기 전에, 폭력과 불의를 저지르게 하는 사회적 조건의 되풀이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체적 권리의 대상,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는 28조 같은 조항을 만든 이유가 그것이다. 인권이 말에서 현실로 바뀔 수 있는 조건을 한 사회 내에서나 국제적으로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지만

28조가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선언이 권리를 말할 뿐 이 권리를 실천할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는 점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서방국가들이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는 걸 아주 꺼려했다. 그래서 국가의 의무 없는 권리는 추상적인 목록에 그칠 것임을 우려한 쪽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안이다. 특히 선언을 만들 때 기초위원회에서 아주 소수에 불과했던 3세계 국가들에서 내놓은 제안이 28조의 토대가 됐다. 인권의 향유는 사회적 및 국제적 관계의 질에 달려있다는 일반원칙을 담은 것이 28조이고, 여기서 개인시민과 국가관계에 치중한 기존 인권 구조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와 관계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8조의 배경이 된 당시 사건들을 우선 참고할 수 있다. 1941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4가지 자유’를 선언했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이다. 특히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의 선언은 제2의 권리장전이라 일컬어졌다. 그 내용은 유익하고 유리한 직업을 가질 권리, 적절한 식량과 의복과 여가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소득에 대한 권리, 건강권, 좋은 교육에 관한 권리 등이었다.

1945년 설립된 유엔은 이러한 자유가 성취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한 기구가 될 것을 약속했다. 유엔헌장에서 밝힌 그 목적은 “경제·사회·문화적 또는 인도적 성격의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 장려함에 있어 국제적 협력을 달성한다”(유엔헌장 1조 3항)이다. 또한 그 조건이 되는 것은 “보다 높은 생활수준, 완전고용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진보와 발전의 조건, 경제·사회·보건 및 관련국제문제의 해결 그리고 문화 및 교육상의 국제협력,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관한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편적 존중과 준수”(유엔 헌장 55조)이다.

같은 시기 ILO도 필라델피아 선언(1944)을 통해 그 목적을 재확인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며,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영구적인 평화는 사회정의를 기초로 하여서만 확립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존엄성, 경제적 안정 및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조건하에서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정책의 기본목표이어야 한다. 특히 경제적 및 재정적 성격의 국가적.국제적인 모든 정책과 조치는 이러한 견지에서 적용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근본목적의 확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필라델피아 선언 I, II)

발전에 대한 권리로

28조가 태어난 배경이 이랬다면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28조를 계속 상기한다. 1966년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은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경우에만 성취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11조 2항은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다루는데, 이를 위한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사례로서 특히 토지 개혁을(국내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에 따라 세계식량공급의 공평한 분배를 확보할 것(국제질서)을 언급하고 있다.

3세계가 인권무대에 대거 등장하면서는 개인이 무슨 권리를 갖는다고 열거하기 보다는 인권의 실현을 방해하는 주요 장벽이 무엇인가가 많이 다뤄지게 됐다. 그 목록으로 제시된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무력 분쟁, 외국의 점령, 빈국과 부국의 불평등 격차였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는 양극화됐다. 지배적인 서구 자유주의의 인권 접근은 시민·정치적 권리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사회적 조건을 강조했다. 이런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합치된 것이 인권을 위한 구조 변화를 다룬 ‘발전에 대한 권리’이다.

1969년 사회진보와 발전에 관한 선언은 “정당한 사회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그 열망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군비와 갈등을 위한 자원을 평화적 활동과 사회진보를 위한 것으로 바꿀 필요성을 언급했다. 모든 형태의 차별·불평등·인종차별주의 등의 철폐, 토지소유제도 및 임차제도를 사회정의에 최대한 적합하도록 하는 토지개혁의 이행,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 보장, 국부 및 국민소득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 적절한 주거의 보장, 무상 의료서비스의 달성, 환경보호, 전면적이고 완전한 군축의 달성 등이 이 선언의 주 내용이다

1986년 유엔총회는 발전에 대한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 전문은 세계인권선언 28조를 재차 상기하며, 발전을 정의하고 있다. “발전은 포괄적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과정으로서, 발전과 그로부터 산출되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의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참여의 기초 위에서 전 인구와 모든 개인들의 복지의 부단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 내용에는 “인민들이 자유롭게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데서 그들의 자결의 권리”, “그들의 천연자원과 부에 관한 완전하고 충분한 주권을 발휘할 인민들의 권리”를 언급한다.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와 인종적 차별, 국가의 주권·국가적 통합·영토보전에 대한 외부의 지배·점유·침략·위협, 그리고 전쟁의 위협 등의 결과들로 인한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민들과 개인들의 인권에 대한 대규모의 극악한 범죄들의 제거가 인류 대다수의 발전에 합당한 환경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그 해결방법으로 “군비축소와 발전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군비축소 영역의 진보는 발전의 영역의 진보를 적지 않게 증진하게 되고, 군비축소 수단을 통해 확보되는 자원들은 모든 인민들, 그리고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인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복지에 바쳐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작성일자 : 2008. 12. 22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7조

①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② 모든 사람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창작물에서 생기는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인권에서 문화권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인권을 분류하여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권리라 할 때 흔히 맨 뒤에 오는 문화적 권리는 빼먹기 일쑤다. ‘문화’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며, 거기에다가 문화권을 정의한다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정의의 불가능성이 정의가 아예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로 인해 문화권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일 수도 없다.
문화권은 인권의 모습을 골고루 갖고 있다. 문화를 좁게 정의하면 특정 예술 활동과 관련되겠지만 넓게 정의하면 인간의 살림살이, 살아가는 양식 전체가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문화권의 개념은 예술의 생산, 매개, 수용과 관련된 권리개념에서 인간의 생활양식 전반에 대한 창조적 진보의 개념으로 확대돼 왔다고 볼 수 있다.
문화권은 기존의 권리를 더 세심하고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공교육 제도를 통해 모국어와 외국어를 습득할 기회를 갖는 것이 기존의 교육권이라면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체류국의 교육기관을 통해 체류국 언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학습할 수 있는 것은 다문화사회에서 필수적인 교육권이다. 창작자는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금기의 부재와 극복 등이 중요하다는 면에서 정신적 자유의 측면을 갖는다. 이런 점은 과거에도 강조됐다면, 오늘날 창작 활동은 자유 보장만으론 안 된다. 예술 활동으로 기초생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창작 지원 정책이나 보조금 정책 같은 사회적 권리의 의미를 가져야 상업주의와 자본의 공세 속에서 창작자의 생존이 가능하다. 자유권과 사회권의 측면, 이 둘이 맞아 떨어져야 예술 활동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나 청소년 등이 밥과 옷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창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권의 중요한 측면이다.

소수민족에게 문화는 존재 그 자체

문화적 권리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언어를 생각해보자. 언어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특정 집단이나 종족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존중받는 것은 중요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상호존중을 이루는 것, 특정 문화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억제하는 것, 인종주의적,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를 극복하는 것, 자문화 특수성을 내세워 인권침해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은 인권의 주요 문제이다. 그간 국제인권에서 주목돼온 문제는 소수민족의 생존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게 자기들만의 고유한 생존 양식, 곧 문화에 대한 위협은 곧 존재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소수민족 바자회에 간 일이 있다. 숲속 한가운데에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였다. 저지대에서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까지 사는 높이와 환경에 따라 옷도 다르고 음식도 달랐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아궁이 같은 것과 된장 비슷한 장류도 가지고 나왔다. 우리의 공깃돌 같은 것을 교환양식으로 쓰는 규칙에 따라 몇 개의 공깃돌을 구입해서 실컷 구경도 하고 이런 저런 음식도 맛보았다. 날 안내한 친구는 소수민족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활동가였는데, 그 친구가 마련한 천막에서는 무국적과 소수민족의 인권문제를 다룬 그림책을 팔고 있었다. 친구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소수민족 대개가 무국적이라 했다. 태국이란 국가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들은 여기서 살아왔다. 그러나 국가가 생긴 후 그들이 살아온 곳이 국립공원이 돼버렸다. 국립공원 안에서 그들의 경작도 여타의 활동도 불법이다. 시민권이 없는 이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다. 생계를 위해 산에서 내려와 미등록 이주노동자처럼 살아가거나 국가가 지정해준 대로 살면서 관광객들 앞에서 쇼를 할 때만 고유의상을 입고 춤을 출 수 있다고 했다. 어렵게라도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고유의 삶을 버리고 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은 문화, 민족, 종교 등의 이유로 한 국가 안에서 또는 국가 간에 지배 복속의 문제가 발생하는 곳에서 등장한다. 또한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사회하고도 관련되는 문제이다. 여기서 문화권은 개인의 권리일 뿐 아니라 집단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빼먹고는 말할 수 없는 권리이다. 흔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면서 집단정체성에 대한 인정이 없는 경우 특정 공동체에서 ‘빠져 나올’ 권리만 선택이 되지, 특정 공동체의 생활양식대로 살아갈 권리는 선택될 수가 없다면 선택의 자유는 없는 것이 된다. 이에 세계인권선언을 상세화한 여러 국제인권기준에서는 ‘소수민족에게 고유어 사용과 교육활동에 대한 자주권을 인정할 것’, ‘이주노동자의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고 이주자들의 문화적 유대의 유지를 방해하지 말 것’, ‘이주노동자 자녀의 모국어 및 출신국 문화에 대한 교육에 필요한 조치’등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다양성의 존중

집단정체성에 대한 존중은 문화다양성 존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 국가 또는 세계 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받을 권리란 자기 문화를 박탈당하거나 강제 동화되지 않을 권리,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말로만 ‘너를 인정해, 다양성을 존중하니까 알아서 해봐’라고 했을 때는 생존할 수 없다. 다양성은 둥근 접시에 똑같이 골고루 담긴 샐러드가 아니다. 주류가 있고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입는 것이 있고, 마법의 램프처럼 엄청난 수익을 눈 깜짝할 새에 가져다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 모두를 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접시 자체를 깨뜨리는 일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접시를 마련하지 않고 접시에 골고루 담긴 샐러드를 찬양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돈 되는 예술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기초예술에도 매달릴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전문가의 예술이 있으면 평범한 일상속의 예술도 있어야 다양성이 존중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권에서 다양성을 담을 접시를 마련하는 일은 문화 참여의 권리가 향유되고 촉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국가의 의무를 말한다. 유엔사회권위원회는 국가가 취해야 할 조치로서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한 바 있다. ‘입법적 및 기타의 조치, 문화발전과 대중 참여를 위해 이용 가능한 기금마련, 제도적 기본시설(예를 들어 문화센터, 박물관, 도서관, 극장, 영화관 등)의 설립 및 유지, 소수민족과 소수자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인식과 향유의 증진, 매스미디어와 통신매체의 다양성을 위한 조치, 인류문화유산의 보존과 제시, 예술적 창조와 퍼포먼스의 자유, 창조활동의 결과물을 유포할 자유의 보호, 문화와 예술 분야의 전문교육' 등이다.

문화 창조․참여․수용의 주체로서의 인간

학창시절에 총학생회에서 문화부장이란 걸 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의 포부는 무슨 초청공연 같은 걸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취향에 따라 작곡을 하거나 악기 하나쯤을 다루거나 시를 읊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거였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만났을 때 그 학창시절의 꿈을 내가 얘기하니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실적 늘리기에 찌든 생활인이 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 왕년에 문학소녀, 그룹사운드 리더, 천재 화가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다. 악기 하나쯤 맘껏 다뤄봤으면 하는 소원을 여전히 품고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문화권은 창조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생각하는 개념이다. 문화가 또 다른 산업으로서 경쟁과 시장성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문화생활에 참여하여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권리로 인식되고 그런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한 노동자는 이런 말을 했다. 3교대로 근무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환자들을 위한 무슨 문화공연을 하는데 짬짬이 연습한 무대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여가가 주어지고 문화생활에 참여할 수 있고, 전문가를 초청하여 교육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이 노동조건에서 고려된다면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직접 창조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과 감상자가 되는 것도 참여의 중요한 권리다. 많은 사람에게 특히 소외계층에게 고급문화에 대한 접근성 및 참여기회의 확보가 필요하다. 고급문화란 비싼 입장료 때문에 고급문화인 게 아니라 그 완성도를 위해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숙성된 경지의 문화를 말한다. 어떤 선생님은 오페라가 뭔지도 모르는 빈민지역 아이들에게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공짜로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다. 왜 의미가 없을까. 나는 뮤지컬과 발레를 청소년 시절에 딱 한 번씩 봤다. 당시로선 입장료가 꽤 비싼 공연들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1년에 한번 공짜에 가까운 집단관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노랫가락과 배우들의 몸짓을 기억한다. 언제 생각해도 아름답게 완성된 것의 절정을 본 벅찬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고급예술에 누구나 저렴한 비용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과 주거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나는 보통 기준으로 불효녀이다. 돈도 못 벌고 인권운동이란 것만 하고 다닌다. 그런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식은 부모님과 같이 놀기이다. 엄마 아빠도 잘 아는 인기가수 콘서트나 같이 볼만한 영화를 같이 보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는 ‘돈으로 달라. 돈이 남아돌아서 그런 걸 보러 다니느냐, TV로 보면 되지’라고 하시지만 나는 밀어붙인다. 결과는 언제나 기대이상이다. 무대에서의 진짜 열창과 가수의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것은 돈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엄마의 감성을 깨운다. 얼마나 좋아하고 흥분하시는지 느낄 수 있다. 복지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가장 보람 있었을 때는 생전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장애인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복지관에서 어떤 서비스를 해도 그런 반응을 얻지 못했었는데,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고 영화 상영을 했더니 TV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영화감상을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펑펑 울었다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모국어로 된 잡지와 책에 목말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은 못돼도 작은 문고라도 설치할 걸 제안하면 사장들이 ‘재들이 무슨 책을 읽어’라는 말을 한다는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장애인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농어촌 지역 거주민, 다문화 가정 아이들, 빈곤 청소년 등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권은 경제사회적 자원의 평등을 추구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지적재산권과 문화권은 달라

그런데 문화권에 대한 사고가 문화 ‘산업’의 수익을 올릴 권리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오해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주연한 ‘어바웃 어 보이’란 영화가 있다. 백수건달로 맨 날 소비하고 몸 가꾸고 여자 만나기에 빠져 사는 휴 그랜트가 마커스란 왕따 소년과의 우정 속에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다. 로맨틱 코미디 단골 주연인 휴 그랜트가 인간극장에 출연한 느낌을 준 영화다. 이 영화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상황에서 이 영화 얘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휴 그랜트의 자유롭고 소비를 만끽하는 백수 생활이 왜 가능했는지를 묻고 싶어서다. 휴 그랜트의 아버지는 작곡가였는데 크리스마스 때면 누구나 틀어대는 히트곡을 하나 남기고 죽었다. 그게 휴 그랜트의 밑천이다. 수십 년간 지속되는 저작권이 휴 그랜트에게 상속됐기에 그는 백수지만 잘 살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지적재산권을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창작물의 보호와 연결시키면 어쩌나하고 선언의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27조 2항이 들어갔지만, 세계인권선언에서 보호하려한 창작자의 정신적 및 물질적 이익의 보호범위는 흔히 지적재산권으로 지칭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학문적․문학적․예술적 저작을 보호받을 권리가 상품화와 시장논리와의 대결에서 보호받는 것, 산업자본과의 대결에서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으로 여겨야지, 인간의 권리를 기업과 자본의 권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존법률이 계약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과 인권으로서의 창작자의 보호는 취지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 인권으로서의 창작의 보호는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산업자본의 특허권 때문에 진짜 생산자들의 권리가 침해받는 걸 막으려는 의미로 봐야 한다.
27조의 내용에서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에 대해서는 3조 생명권에서 다룬 바와 같다. 여기서도 지적재산권의 문제는 마찬가지다. 농업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해온 농부들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이 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갖고 농부의 권리를 침해하는 걸 볼 때 인권의 논리로서 보호해야 할 권리는 어느 편이겠는가.
국제인권논의의 진전에서 한 사례를 살펴보자.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라는 게 정보사회와 관련하여 제기된 바 있다. 인간은 개인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개인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사회문화적 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데 핵심이 된다. 관계에 들어가고 공동체를 수립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따라서 음식, 옷, 주거처럼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이다.
기존의 인권 목록에 있는 표현의 자유로 충분치 않고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가 제기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 개인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접근이 엄청나게 차이나는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은 조정되고 걸러진다. 대중매체, 정부, 상업적 기업, 특수한 이해집단 등이 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유통에 영향을 끼치고 통제한다. 표현의 자유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회의 표현의 수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신문, TV, 라디오, 영화, 음악, 교육기제 등 표현수단은 그것을 작동하는 자들의 이익 속에서 통제된다. 이런 맥락에서 직접적인 정부의 개입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언론을 사수하기 위한 법이라는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제일 큰 목소리(예를 들어 사회내의 통신수단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의 지배를 방지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는 정보의 독점, 극단적 상업주의, 정보내용의 조작, 지식과 정보에 대한 통제에 대해 반대하는 의미가 있다. 문화권이 문화자본의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문화권은 일련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들 권리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성취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권의 불가분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고려는 돈벌이 문화에서 고전하는 문화권을 고려할 때 특히 빼먹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지키지 않는 약속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다.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고용최저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아동에 대한 교육은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규범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선언 보다 훨씬 이전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 철폐를 얘기했다면 오늘날의 기준은 18세 미만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약속인 교육권은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말로만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교육을 외칠 뿐 정부와 국제사회가 실제로는 교육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것도 화가 나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초등교육조차 위태로운 아이들이 늘어가는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목격되고 있다. 자국에서 교육권을 잘 보장하고 있는 국가들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교육제도와 서비스를 소위 ‘수출’하고 있는 국가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을 인권으로 보장하는 데 반대한다. 인권으로서 공교육이 강화되면 자신들이 팔아먹을 상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구실에 충실한 국제기구들도 마찬가지다. 국제무역의 규범에 충실한 상품으로서 교육을 다루고 싶어 하지, 보편적 인권으로서 교육을 고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외 원조나 부채 구제에 대한 결정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로 세계은행이 교육에 대한 컨설팅을 해준답시고 500일간 쓴 비용이 그 나라에서 5천명의 교사를 고용하는 것과 같은 비용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그런 컨설팅을 통해 나온 조언이란 게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공교육을 강화하려면 교사의 확충이 중요한데 세계은행은 공공부문의 임금이 늘어나게 될 테니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육을 빈곤을 줄이기 위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도구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빈곤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교육의 양과 질을 국제금융기구와 은행에게 결정하게 한다. 그런 교육의 양과 질은 싼 노동력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내는데 치중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이 시장의 상품, 경제의 규모와 효율성에 따라 조절되는 것, 싼 노동력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수가 없다.

인권의 존중 강화가 교육의 목적

교육권이 필수적인 인권이란 데 반대의견이 없다 했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나치는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 따라서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한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대학가기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교육 주체들이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지금에는 구시대적인 것이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인권교육의 이상 담은 교육권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교육의 목적을 정리하면 그것은 곧 인권교육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유엔은 인권교육에 대하여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며, 모든 발달 단계에 속하는 사람과 모든 사회 계급의 사람들이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존중을 보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인 전 생애 과정”이라 했다. 교육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질과 내용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교육을 흔히 ‘역량강화교육’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은행저축식 교육’이다. 은행저축식 교육개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즉 학생은 무지하고 교사는 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며 학생들이 또한 교사를 교육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한다. 또한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무효로 한다.

반면 역량강화 교육은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배운다’고 한다. 교육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식은 억압적인 사회, 정치, 경제 조직의 유형을 이해하고 의문시할 수 있는 것이고, 비판적 의식을 획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비판적 의식을 통해 역량강화된 사람들은 억압적인 관계를 변화시킨다. 억압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 조직과 활동양식을 계획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추구한다.

역량강화 교육이 되어야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건이란 없다.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특정 부문의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관심이나 소질을 말하는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국에서는 요원한 무상 교육

의무교육의 전제조건은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고, 돈 걱정 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만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부과, 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선언의 규정은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확장되는 원칙이다. 선언을 만들 때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근거는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교육에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각 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해야 했기에 최소로 합의한 것이 초등의무무상교육이었다.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초등무상교육을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소득수준은 사교육비 지출과 비례하고 또한 학업성적과 비례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치기 위한 교육이 불평등 유전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교육의 불평등을 염려하는 교육단체나 언론 은 한국이 대학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이 아니라고 얘기해왔다. 가령 GDP 대비 6%의 교육재정만 확보해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를 충당하고도 수조원이 남으며, 이것을 대학에 투자하면 무상교육의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한국이 중학교까지 달성했다는 무상교육도 진짜 의미의 무상 공교육이라 볼 수 없다. 법적으론 무상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 당사자가 사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교육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이 천문학적 수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대학만이 아니라 무상교육단계에서부터 그렇다.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이것을 “공교육의 민영화”(privatization of public education)라 비판했다. 거죽은 공교육일지 모르지만 속은 사교육비로 채워져 있기에 이런 교육을 공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가 물어봤을 때, 그게 아니라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돈 주고 사는 상품인 것이다.

교육의 자유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을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국가의무의 4요소;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적응성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로서 4가지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가용성(availability)이다. 모든 학령기 아동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아동이 공립학교에만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공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교육기관은 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최소한의 일치된 성격을 보장해야 한다. 뭐가 일치돼야 하느냐면 국내외적으로 금지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초등무상교육의 원칙이 보장돼야 한다. 정부는 모든 교육기관이 최소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보장해야 하며 차별과 배제 없는 통합교육을 보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하고 재정 지원하는 것은 국제인권법에 부응해야 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교사들의 지위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

둘째, 접근성(accessibility)이다. 선언에서는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고 표현했다. 접근성과 밀접한 문제는 교육비이다. 직·간접적인 교육비용, 통학비용 등의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의무교육 이후의 교육에서도 비차별적이고 감당할만한 수준의 교육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 교육은 결코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 가령 장애아동의 경우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셋째, 수용성(acceptability)이다. 교육은 교육 참여자들이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한의 기준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기준에는 교육의 질, 안전, 건강한 환경이 포함돼야 한다. 학교 규율과 교수방법은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교육 참여자의 평등권, 프라이버시, 인격의 발전을 침해하는 처벌과 규제는 안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동은 억압에 제대로 맞설 수가 없다. 억압과 비교될 수 있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억압이 사라져도 언제든지 억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고 실현해보는 가치여야 한다. 배우는 과정은 또한 물리적 장벽의 제거를 요구한다. 가령 교육을 방해하는 빈곤, 교육에서 채택한 주류언어로 인한 차별, 장애로 인한 교육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교육권 위협하는 상품으로서 교육

넷째, 적응성(adaptability)이다. 아동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교육내용과 과정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개념에서 특히 주목한 점은 일하는 아동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가이다. 극단적 형태의 아동노동,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래서 기초교육을 마치는 나이와 고용, 결혼, 징병, 형사책임을 묻는 나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일하는 아동에게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측면의 고려도 있어야 한다. 많은 지역과 가정의 현실은 아동이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은 무조건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방식의 접근으로는 아동의 교육도 노동도 보호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교육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하고 배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주경야독’의 접근법이 요구된다. 한 예로 고용된 아동의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제한하여 적어도 2시간 이상의 교육과 병행하도록 하고, 그 비용을 고용주에게 지불하도록 한 국가도 있다. 빈곤한 가정이 아동을 학교에 보내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시도도 있다. 교육이 적응성을 갖는다는 것은 학교 밖의 교육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유를 상실한 아동, 난민아동, 국내실향민, 일하는 아동 등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없는 범주를 위한 교육이 적극 고려돼야 한다.

또한 공식 교과과정이라는 것이 아동의 실제 삶과는 상관없이 다음단계의 상급교육과정(사실상 많은 아동이 갈 수 없는)으로 진학하기 위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이다. 직업교육을 진학교육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 내용의 적응성은 교육을 통한 인권보장을 염두에 둔다. 다른 세계와 문화, 역사, 성역할 등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불평등·편견·차별의식과 싸울 수 있는 교육이 요구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유엔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라고 했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그 열쇠가 제대로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교사 100명당 적어도 150명 정도의 군인이 있는 것이 현세계이다. 거래하고 소비하는 상품으로서의 교육이 교육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를 그런 식으로 소진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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