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3] 자격과 인종정치

엄기호(인권연구소 '' 연구활동가)

20여년 전이다. 제법 오래 유럽에 체류하던 중 로마에 갈 일이 있었다. 숙소를 구하다 한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당시 청년들의 배낭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들이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기웃거려볼 심산이었다.

한 숙소와 연락이 되었고 로마역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남성분이 다가와서 숙소 구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네 집이 한인 숙소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분인가 싶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아니란다. 어느 집에 묵냐고 해서 묵기로 한 숙소 전화번호를 보여주니 실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거긴 한인숙소 아니에요. 조선족이 하는 곳입니다.”

당시 그 말은 대단히 신기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인을 한국인과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난 분들이며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재중 교포라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고생하고 불쌍한사람들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 강한 듯 보였다.

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 영국에서 유학하며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선배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영국의 교포 사회에서 이미 슬금슬금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과거에는 조선족분들의 숫자가 별로 없었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단다.

그런데 점차 미등록 이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한인 민박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하면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들이 하는 민박은 가격은 약간 저렴한 반면, 밥이나 반찬은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내가 묵었던 로마의 숙소도 그랬다. 로마역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거기 진짜 한국 음식 아니에요. 조선족식이지. 우린 김치를 먹어도 진짜 한국 김치를 먹어야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금 한국 정부는 후베이성에 지난 14일간 머물렀던 모든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모든 중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더 강경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자국민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들 사이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금지한다면 사실 국적이나 인종적 정체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후베이성에 머물렀는가, 아닌가만 따지면 된다. 더 확장하면 중국에 체류했는가, 안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이 점 때문에 입국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과 상관없이 비시민권자는 입국 금지, 자국 시민권자는 입국 후 14일간 격리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데 그 격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드시 조선족을 끼워서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족은 조선족이지 재중동포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족은 조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족 역시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샌가 조선족은 더는 한국 시민권자와 같은 동포,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동포라고 하면 같은 민족을 의미한다. 동일성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와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재중동포로서의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하게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권리에 대한 언술이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은 건강보험과 무료 치료 등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을 같은 민족도 아닌 주제에건강보험에 구멍을 내고 한국 시민권자들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임승차당하고 있는 한국 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한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중국 눈치나 보는 무능한 국가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 문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문화적 언술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에 관한 정치적 언술이다.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민족과 인종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같은 권리를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권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같은 민족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과 인종은 삶을 위한 자격이 된다.

국가는 자격 있는 사람만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 이 말은 생명 통치로서의 근대 국가인 한국이 지금 내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푸코는 권력을 생명 권력이라고 불렀다. 중세까지의 권력은 광장에서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을 통해 권력의 실존을 보여줬다. 대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이것을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근대 권력은 병원을 짓고 공중보건을 돌본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다.”

이 구분을 고려해 본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다는 조선족 혐오의 목소리는 근대 국가를 이중화할 것에 대한 요구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근대 국가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세 국가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자격은 존재의 안전이며 나아가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는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전자만 돌보아야 한다. 자격 없는 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설령 그 자격심사가 자격과 상관없이 돌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통치는 경제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를 분할하고 위계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럼 시민권자라고 하여 다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족을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고 주장하는 내부의 압력은 시민권자의 자격도 따진다. 그가 과연 그런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확진되어 격리되어 있는 분들 중에서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세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선량한시민권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금으로 치료받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시민권자이지만 도덕적으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금을 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들이야말로 극도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종 정치의 핵심은 자격의 문제다. 백인들은 유색인들이 인간의 자격이 없다고 봤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정확하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은 공공재를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자격으로부터 배제하고, 자격을 위계화하는 것이 인종 정치다.

나치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진짜아리안족을 선별하는 것. 조금이라도 아리안족에 흠결을 가하는 존재는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만 자격 없음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ss친위대였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는 배제되었고,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인종에는 인종이라는 계보학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완벽함, 성적 정체성에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완벽함 등 모든 생물학적 완벽함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도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총통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처럼 자격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다. 자격은 완벽함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모두 잠재적으로 탈락이고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내가 탈락하지 않기 위해 남의 흠결을 따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시민과 시민 사이에 자격을 둘러싼 처절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자격심사관으로 완장을 차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가 제한적이라는 공포가 엄습할 때 이 아귀다툼은 격화된다.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는 무임승차자이며 민폐이기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격심사관 완장을 찬다. 완장을 차고 타자에게 선빵을 날리며 심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물론 내 완장에 대해 다시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곧 나타나 나를 또 심사하겠지만 말이다. 이게 어디 지금 국민의 자격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내가 혐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장에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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