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3] 자격과 인종정치

엄기호(인권연구소 '' 연구활동가)

20여년 전이다. 제법 오래 유럽에 체류하던 중 로마에 갈 일이 있었다. 숙소를 구하다 한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당시 청년들의 배낭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들이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기웃거려볼 심산이었다.

한 숙소와 연락이 되었고 로마역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남성분이 다가와서 숙소 구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네 집이 한인 숙소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분인가 싶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아니란다. 어느 집에 묵냐고 해서 묵기로 한 숙소 전화번호를 보여주니 실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거긴 한인숙소 아니에요. 조선족이 하는 곳입니다.”

당시 그 말은 대단히 신기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인을 한국인과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난 분들이며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재중 교포라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고생하고 불쌍한사람들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 강한 듯 보였다.

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 영국에서 유학하며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선배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영국의 교포 사회에서 이미 슬금슬금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과거에는 조선족분들의 숫자가 별로 없었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단다.

그런데 점차 미등록 이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한인 민박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하면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들이 하는 민박은 가격은 약간 저렴한 반면, 밥이나 반찬은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내가 묵었던 로마의 숙소도 그랬다. 로마역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거기 진짜 한국 음식 아니에요. 조선족식이지. 우린 김치를 먹어도 진짜 한국 김치를 먹어야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금 한국 정부는 후베이성에 지난 14일간 머물렀던 모든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모든 중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더 강경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자국민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들 사이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금지한다면 사실 국적이나 인종적 정체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후베이성에 머물렀는가, 아닌가만 따지면 된다. 더 확장하면 중국에 체류했는가, 안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이 점 때문에 입국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과 상관없이 비시민권자는 입국 금지, 자국 시민권자는 입국 후 14일간 격리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데 그 격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드시 조선족을 끼워서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족은 조선족이지 재중동포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족은 조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족 역시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샌가 조선족은 더는 한국 시민권자와 같은 동포,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동포라고 하면 같은 민족을 의미한다. 동일성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와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재중동포로서의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하게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권리에 대한 언술이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은 건강보험과 무료 치료 등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을 같은 민족도 아닌 주제에건강보험에 구멍을 내고 한국 시민권자들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임승차당하고 있는 한국 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한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중국 눈치나 보는 무능한 국가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 문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문화적 언술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에 관한 정치적 언술이다.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민족과 인종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같은 권리를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권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같은 민족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과 인종은 삶을 위한 자격이 된다.

국가는 자격 있는 사람만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 이 말은 생명 통치로서의 근대 국가인 한국이 지금 내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푸코는 권력을 생명 권력이라고 불렀다. 중세까지의 권력은 광장에서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을 통해 권력의 실존을 보여줬다. 대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이것을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근대 권력은 병원을 짓고 공중보건을 돌본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다.”

이 구분을 고려해 본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다는 조선족 혐오의 목소리는 근대 국가를 이중화할 것에 대한 요구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근대 국가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세 국가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자격은 존재의 안전이며 나아가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는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전자만 돌보아야 한다. 자격 없는 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설령 그 자격심사가 자격과 상관없이 돌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통치는 경제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를 분할하고 위계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럼 시민권자라고 하여 다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족을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고 주장하는 내부의 압력은 시민권자의 자격도 따진다. 그가 과연 그런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확진되어 격리되어 있는 분들 중에서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세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선량한시민권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금으로 치료받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시민권자이지만 도덕적으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금을 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들이야말로 극도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종 정치의 핵심은 자격의 문제다. 백인들은 유색인들이 인간의 자격이 없다고 봤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정확하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은 공공재를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자격으로부터 배제하고, 자격을 위계화하는 것이 인종 정치다.

나치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진짜아리안족을 선별하는 것. 조금이라도 아리안족에 흠결을 가하는 존재는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만 자격 없음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ss친위대였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는 배제되었고,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인종에는 인종이라는 계보학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완벽함, 성적 정체성에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완벽함 등 모든 생물학적 완벽함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도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총통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처럼 자격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다. 자격은 완벽함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모두 잠재적으로 탈락이고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내가 탈락하지 않기 위해 남의 흠결을 따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시민과 시민 사이에 자격을 둘러싼 처절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자격심사관으로 완장을 차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가 제한적이라는 공포가 엄습할 때 이 아귀다툼은 격화된다.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는 무임승차자이며 민폐이기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격심사관 완장을 찬다. 완장을 차고 타자에게 선빵을 날리며 심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물론 내 완장에 대해 다시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곧 나타나 나를 또 심사하겠지만 말이다. 이게 어디 지금 국민의 자격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내가 혐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장에 저항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151 호  [기사입력]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름은 알아도 흑인 민권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흑인 민권운동을 알아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명연설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킹 목사의 명연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무수한 이름 없는 시민들의 고민과 결단, 행동과 희생이 있었다. 오늘 만나볼 목소리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의 중요한 국면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의 것이다. 인용할만한 명문장도 아니고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왜 인간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는지를 담담하게 읽을 수 있다.

1955년 12월 1일, 왜 로자 파크가 버스에서 자리를 내주기를 거절했는지는 그녀의 담담한 회상에 드러나 있다. 로자 파크에게 그날 벌어진 일은 우연이 아니었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돼온 차별 관행이었다. 로자 파크가 그날 자리를 내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누가 그러라고 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시민권 투쟁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회원이었고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로자 파크 이전에도 같은 사건으로 여성들이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로자 파크의 체포가 버스 보이콧의 기폭제가 된 데는 그녀의 석방을 헌신적으로 도운 지역 활동가들이 있었고, 그녀에게 그 사건을 흑백분리에 대한 도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 배경이 있다. 로자 파크는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 디 닉슨이 그런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글은 로자 파크의 체포 후에 닉슨이 그녀를 처음 만난 후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로자 파크 사건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26살의 무명의 인물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이콧 조직을 맡을 것을 요청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성정치위원회의 조안 깁슨 로빈슨은 1949년에 몽고메리에 일자리를 얻어 이주했다. 그녀 또한 몽고메리로 와서 얼마 후 버스에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받았다. 분노한 로빈슨은 흑백분리법을 깨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버스 회사와 시 위원들이 흑백분리를 불법화하거나 적어도 당시의 버스 규율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버스 보이콧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고된 일이 요구됐는데 로빈슨과 여성정치위원회가 상당 몫의 일을 감당했다. 세 번째 글은 로빈슨의 버스 보이콧 첫날의 기억이다.

춥고 비도 올 것 같은데 버스를 안타는 투쟁이라니, 단 하루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얼마나 떨리는 약속이었을까. 하지만 버스 보이콧은 하루가 아니라 381일 동안 이어지게 된다. 하루 보이콧은 어느 누구의 예상보다도 성공적이어서 계속해야겠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사람들은 존엄함으로 사회가 자신들을 대해줄 것을 요구할 기회라는 걸 직접적으로 느꼈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넘어 버스를 거부한 그들은 아침마다 일터나 학교로 가야할 사람들이었다. 에피소드 하나, 출근해야 할 사람들 중엔 수많은 흑인 가정부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버스 보이콧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백인 여성들이 차로 데려다 주는 일을 했다. 몽고메리 시장은 흑인 가정부를 태우는 일을 중단하라는 포고를 냈다. 백인 여성들이 차 태워주는 일을 중단하거나 흑인 가정부를 해고한다면 보이콧을 깰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은 흑인을 태운 백인 여성 운전자를 보면 신호위반을 빌미로 단속했다. 백인 여성들은 내 가정부가 버스를 타면 불량배가 있을까봐 안탈 뿐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흑인 가정부는 자신은 보이콧과 관계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로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이콧 기간 동안 거짓말은 계속됐다. 보이콧을 모른다고 잡아뗀 흑인 가정부들은 버스를 안탈 뿐 아니라 자신들이 받는 보잘것없는 임금으로 보이콧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카풀조직, 택시 요금 인하, 그도 아니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불편함 속에 협력과 연대의 싹을 키운 그들은 일 년이 지나 차별 없는 버스에 자유로운 시민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다.

2008년 촛불시위를 기억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된 서리를 맞았다. 시민을 위해 어디든지 빠르게 달려오겠다는 경찰은 정말 모든 거리며 지하도에서 시민들을 빠르게 막고 쏜살같이 몰아서 경찰버스로 또 경찰서 유치장으로 날랐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천막도 부서졌다. 살아서도 철거당하고 죽어서 또 철거당했다. 시민 노릇하기 정말 힘드네, 우리에게 인권은 도대체 뭔가라는 탄식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정치도 경제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그것의 기본이나 근본과는 거리가 먼 요즘, 우리는 열이 나있고 부루퉁하고 말해서 뭐해 하며 침묵과 무기력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노래 부르고, 누군가 촛불을 켜고, 누군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손을 잡고 모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 소개한 문헌집의 다른 장에 등장하는 노랫말이 있다.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이라 말하죠. 오! 주여, 우린 너무 오래 투쟁했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증언들

로자 파크의 “회상; 내 영혼은 평안하다”

… 버스를 타서 단 한자리가 빈 걸 보고 걸어 들어갔죠. 그 자리는 백인 전용좌석 바로 뒤였어요. 내가 앉은 자리는 바로 통로 옆이었고 내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맞은 편 통로 옆에는 두 여자가 앉아있었죠. 백인 전용석이라 불리는 버스 앞부분에는 이때까진 자리가 몇 개 남아 있었어요. …세 정거장 가서 사람들이 더 탔고, 앞좌석 전부가 찼어요. … 한 남자가 서 있었고, 운전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사람이 서있는 걸 보고 우리들(로자 파크스와 주위에 앉아있던) 네 사람에게 자리를 그 사람에게 내주라고 했어요.

처음 요구에 우리들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그러자 그가 여러 번 말했어요, “너네들 자신을 알고 좌석을 내놓는 게 좋을껄”. 이럴 때 자리에 앉았던 승객이라면 당연히 말문이 막힐 겁니다. 사실, 그의 말은 납득이 되지 않았죠. 내 옆자리의 남자와 건너편 좌석의 두 여자가 일어나 통로로 움직였을 때, 나는 내 자리에 그냥 있었어요. 운전사가 내가 여전히 앉아있는 걸 보더니 일어설 거냐고 묻더군요. 나는 말했죠. 아니라고, 안 일어설 거라고. 운전사가 말했어요. “음, 일어서지 않겠다면 체포하도록 해야겠군”. 나는 그렇게 하라고 체포하라고 했어요.

운전사는 버스에서 내리더니 금방 돌아왔어요. 몇 분 후 두 명의 경찰이 버스에 타서 내게 다가오더니 운전사에게 일어서라는 요구를 받았는지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죠. 경찰들은 내가 왜 일어서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 하더군요. 나는 말했죠. 내가 일어서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요금을 내고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를 내놔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경찰은 날 체포해서 경찰차에 태우고 감옥으로 데려갔어요. 용의자 명단에도 올렸겠죠. 심문을 했어요. 수인이나 체포된 사람들에게 묻는 의례적인 질문이었죠. 경찰은 운전사가 기소 또는 구속영장 발부를 원하는지를 결정해야 했고, 운전사는 그러기를 바랬죠. 그리고 나서 감방에 데려가 나를 가두었죠. 잠시 후에 감방에서 나와 내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했어요.…

이 디 닉슨 “모든 게 어떻게 시작됐나”

1955년 12월 1일 밤, 난 침대가에 오래 앉아있었죠. 한참 후 아내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죠. “여보, 로자 파크 부인의 체포에 항의해 시내에 있는 모든 흑인이 하루 동안 버스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아내가 날 정신이 나갔다는 듯이 쳐다봤죠. 그때 난 아내에게 물었죠. “당신 생각은 어때?” “난 당신이 잠꼬대 집어치우고 불 끄고 자야 한다고 생각해”

버스에서 짐 크로우 법(미국 남부의 흑인분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10개월 동안 구속됐던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30년 전으로 돌아갔어요. 내가 차량 짐꾼으로 처음으로 남부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를 벗어나 여행했던 나날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북부의 흑인들이 전차와 기차에서 맘대로 어디에나 앉는 걸 봤어요. 흑인이 공직을 갖고 있다니, 남부 앨라배마 주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부인당한 자유를 그들은 어떻게 가졌을까. 얼마나 더 오래 우리는 당하는 걸 견뎌야만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물었던 게 기억났어요. “앨라배마 주의 흑인에게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한 사람만으로는 깊게 뿌리박힌 전통을 바꿀 수 없을 거야. 하지만 한 사람이 불꽃을 일으킬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빛을 보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침대가에 앉아있던 내게 갑자기 생각이 몰려왔어요. 몽고메리의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강력하게 싸울 걸 요구하면 왜 안 되는데? 로자 파크스 부인을 위한 항의에 나서면 안 되나? 버스를 안타면 어때서? 몽고메리 개선 조직을 시작하면 안 되나? 아내의 시큰둥함에도 불구하고 대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나는 결심했어요. 몽고메리의 흑인들이 드디어 행동하길 갈망하고 희생할 준비가 돼있고 무슨 일이 생기건 견뎌낼 준비가 돼 있다고 느꼈어요. …난 뒤척이다가 잠 들었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와 그것을 시작한 여성들: 조 안 깁슨 로빈슨의 기억

1955년 12월 5일, 월요일이었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살던 12만 명의 흑인과 백인들에게 똑같이 휴일 뒤의 일하는 날은 이른 아침의 부산함으로 시작됐죠. 날씨로 말하자면, 그 날은 남부의 다른 겨울날과 다르지 않았어요. 춥고 비가 내리려 했죠. 이 날은 보통의 날과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무관심한 구경꾼들, 다소 무관심하거나 일부 재밌어하는 구경꾼이었던 백인들 대부분에겐 평범한 날이었죠. 아마 몽고메리 버스 회사 사람은 다소 걱정했겠죠. 하루만이라도 버스 요금 수입에 심각한 손해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몽고메리의 5만여 흑인 시민에겐 춥고 흐린 12월의 그 날이 달랐어요. 전날 밤 그들 중 아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죠. “하루 버스 보이콧”에 사람들이 정말로 협력할지를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춥고 비까지 오려하니 어느 것도 그들에게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죠. 졸립고, 대단한 기대로 긴장되고, 희망을 품고, 그들 모두가 하루를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한 그들이었어요. 그들이 두려웠던 건 잘 계획한 몽고메리 시내버스에 대한 하루 투쟁이 실패하면, 다수의 흑인들이 버스를 탄다면, 보이콧 운동의 자랑스런 흑인 지도자들이 시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거였죠. …시는 흑인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흑인들은 조명을 받고 있었어요.

아침 5시 30분, 몽고메리 시에 동이 텄어요. 노동자들이 거리 모퉁이에 모여 있었죠. 계획에 따르면, 그들을 태울 것은 버스가 아니라 흑인 운전사가 모는 택시(1인당 10센티씩 요금을 내려서) 또는 이날 월요일만 공짜로 제공하기로 돼있던 200여대의 자가용이었어요.
의심이 장난이 아니었죠. 택시 운전사들이 약속을 지킬까, 자가용 소유자들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태우려 할까, 흑인 버스 이용자들이 버스를 타지나 않을까, 게다가 춥고 비까지 오려하는데!

흑인여성정치위원회(WPC)는 수개월동안 버스 보이콧을 계획해왔지만, 계획이 홍보된 것은 불과 3일이었어요. 보이콧에 대한 생각은 여러 해 동안 했죠. 거의 날마다 흑인 남성, 여성, 아이들이 버스에서 불쾌한 경험을 하고 저녁 먹으면서 식구들에게 그런 얘길 해왔던 거죠. 이런 얘기들은 이웃들에게 반복됐고, 클럽 모임이나 큰 교회 모임의 목사들에게도 전해졌죠.…

로자 파크의 체포 소식이 모든 흑인 가정에 들불처럼 퍼졌어요. 전화통에 불이 났죠. 거리모퉁이와 집에 모인 사람들은 얘기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죠. 멍한 무기력이 모두를 마비시킨 것 같았어요. 아주 소수만이 그날(로자 파크가 체포된 날) 또는 다음날 버스를 타지 않았죠. 공포와 불만과 의심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이 누군가 뭔가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그날과 반나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예전처럼 흑인 미국인들은 버스를 탔어요. 그들은 부루퉁하고 말을 하지 않으려 했죠. 긴장으로 팽팽한 침묵의 기다림이 있었죠. 흑인들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말하지 않았어요. 조용하고 부루퉁하고 기다리고 있었죠. 그냥 기다림!

…로자 파크의 체포 소식에 프레드 그레이(몽고메리 시의 흑인 검사)는 충격을 받았어요. 난 이미 내가 생각한 바를 그에게 알렸죠. 흑인여성정치위원회(WPC)가 로자 파크스의 재판이 있는 날인 월요일에 버스를 타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전단을 수천 장 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준비 됐나요?” 그가 물었죠. 주저함 없이 우린 준비됐다고 확신했어요. 전화를 끊고 나는 행동을 시작했어요.

흑인여성정치위원회, ‘전단’

또 흑인 여성이 체포돼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백인이 앉도록 버스 좌석을 내주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로 흑인이 체포됐던 클로데트 콜빈 사건 이후 두 번째입니다. 이런 일이 중단돼야 합니다. 흑인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면 버스는 운영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승객의 사분의 삼이 흑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체포당하거나 빈 좌석을 두고도 서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체포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뭔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될 겁니다. 다음 차례는 당신일 수도 당신 딸일 수도 당신 어머니 일수도 있습니다. 이 여성의 재판이 월요일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흑인에게 체포와 재판에 대한 항의로 월요일에 버스를 타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직장이나 시내에나 학교에나 어디에 가든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십시오. 버스 말고는 다른 방도가 전혀 없다면 하루는 학교를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는 시내에 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하러 가야 한다면 택시를 타거나 걸으세요. 하지만 부디 아이나 어른이나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마세요. 월요일에는 모든 버스를 멀리 하세요.

인권오름 제 151 호  [기사입력]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 호  [기사입력] 2006년 10월 31일 17:23:49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어렵게 가을이 찾아왔다. 끈질긴 더위와 폭우의 꼬리를 길게 달고 온 가을 추위는 가난한 삶에 한숨을 불어넣는다. 사치스런 소리일지 모르지만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시 한 편이 간절히 생각났다. 우리네 답답한 속내를 뚫어주는 시, 이리 저리 짓밟힌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시, 숨죽여 있는 힘을 북돋아 주고 끌어 올려주는 그런 시를 말이다.

짧게만 뒤돌아봐도 어두운 시절마다 우리에겐 시인이 있고 시가 있었다. 그 어떤 자유와 평등론 보다도 명쾌하고 절절하게 그 말의 의미를 토해내던 시들은 지금 어느 헌책방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고 하중근 씨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라는 건설노조원들의 외침도, 장애인의 교육권과 활동보조인을 보장하라는 장애인들의 장기 거리 농성도, 치솟는 물가와 추락하는 일자리에 허리 굽는 사람들도 시를 필요로 하고, 한미 FTA에 반대하며 바닷물로 뛰어든 절박함에도, 전쟁과 핵에 반대하는 다급한 발걸음에도 시가 깃들어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 문헌은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다. [이 글에 나오는 시는 199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자유와 구원의 절규, 검은 영혼의 시인 랭스턴 휴즈』에서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옮긴이는 소설가 박태순.]

억압하는 자와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시인이 아닌 ‘흑인’ 시인이 요구됐고, 인간의 삶이 아닌 ‘흑인’의 삶이 얘기돼야 할 이유가 거기 있었다. 랭스턴 휴즈는 1967년 65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수많은 시와 소설, 희곡 등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시원스레 ‘까발리고’ 위로하고 힘을 북돋았다.

흑백의 구분이 분명한 사회에 검은 얼굴로 태어난 운명, 평생 막노동일을 하는 어머니와 흑인의 삶을 증오하고 자학하며 일찍이 멕시코로 도망가 버린 아버지, 그 자신 먹고살고 공부하기 위해 분투해야 할 뿐 아니라 어머니의 수차례 결혼을 통해 갖게 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그의 팍팍했던 삶 이야기는 그의 전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쯤 해두자.

그의 전기 속에는 대조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그를 실제로 기른 외할머니이고 하나는 일찍이 도망가 버린 아버지이다.

흑인해방운동의 혁명가와 결혼했던 외할머니는 “삶이 너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결코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되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맞서 싸워라”라고 하며 그렇게 싸운 흑인 영웅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흑인은 시험을 쳐서 법률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의 벽을 저주하며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의 전기에 아버지는 “압제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압박받는 사람들을 증오하였고, 살인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피해자를 증오하고 있다. 그의 증오 속에는 흑인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묘사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편견과 차별을 등지려고 옮겨간 멕시코에서 멕시코 사람들을 ‘게을러빠지고 무식하며 퇴보적인 종자들로 미국의 흑인들과 똑같은 족속’이라고 비웃었다. 억압받는 사람이 억압받는 사람을 저주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으며 그만큼 억압에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예도 없다.

“네가 네 스스로를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너를 노예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힘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그런 힘을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랭스턴 휴즈의 시를 읽으면서 먼저 떠올린 단어는 ‘존중’이다. 그는 흑인들, 나아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존중할 것, 서로를 존중할 것을 노래했다. 

<나의 동포(My People)>

밤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얼굴도 아름답다

별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눈동자도 아름답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태양
또한 아름다운 것은 내 동포의 ‘소울(soul)’

(랭스턴 휴즈에 따르면 ‘소울’은 흑인 민중예술의 정수를 총칭하는 것)



<니그로(nigro), 강에 대해 말하다>

나는 강을 안다.
태고적부터, 인간 혈맥에 피가 흐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강을 나는 안다.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인류의 여명기에 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했으며
나는 또한 콩고 강가에 오두막 지어 물소리 자장가 삼았다.
나는 나일 강 바라보며 그 위에 피라밋 세웠고
나는 또한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스로 남행하고 있을 때 미시시피 강이 그에게 들려주었던 노랫소리를 들었으며, 저녁 노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강의 진흙 젖가슴을 줄곧 지켜보았다.

나는 강을 안다.
저 태고적부터 아슴푸레하던 강을,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이런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의 문학이었기에, 그의 예술론은 다음처럼 표현됐다.

“흑인청년 예술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무엇인가? ‘백인이었으면’ 하고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굴종하는 예술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자는 것이다. ‘왜 내가 백인이기를 원하는가? 나는 흑인이며, 그것도 위대한 흑인이다’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흑인민중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예술로 되돌려놓자는 것이다.”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통 속에 던져두거나 내버려둘 수가 없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저항한 불의는 바로 우리의 정의를 위협하는 차별과 가난, 군국주의였고, 그 운동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은 우리의 운동에서도 되새김질된다. 말 뿐인 자유와 평등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법을 평등하게 하여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만들어도 여전히 가난한 흑인은 그 식당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인권이란 신기루라는 것, 즉 빵과 자유의 불가분성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또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억압자들이 정한 윤리규범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중심에서 같이 노래한 시인의 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나의 동포(My People)>

밤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얼굴도 아름답다

별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눈동자도 아름답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태양
또한 아름다운 것은 내 동포의 ‘소울(soul)’

(랭스턴 휴즈에 따르면 ‘소울’은 흑인 민중예술의 정수를 총칭하는 것)



<니그로(nigro), 강에 대해 말하다>

나는 강을 안다.
태고적부터, 인간 혈맥에 피가 흐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강을 나는 안다.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인류의 여명기에 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했으며
나는 또한 콩고 강가에 오두막 지어 물소리 자장가 삼았다.
나는 나일 강 바라보며 그 위에 피라밋 세웠고
나는 또한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스로 남행하고 있을 때 미시시피 강이 그에게 들려주었던 노랫소리를 들었으며, 저녁 노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강의 진흙 젖가슴을 줄곧 지켜보았다.

나는 강을 안다.
저 태고적부터 아슴푸레하던 강을,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이런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의 문학이었기에, 그의 예술론은 다음처럼 표현됐다.

“흑인청년 예술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무엇인가? ‘백인이었으면’ 하고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굴종하는 예술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자는 것이다. ‘왜 내가 백인이기를 원하는가? 나는 흑인이며, 그것도 위대한 흑인이다’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흑인민중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예술로 되돌려놓자는 것이다.”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통 속에 던져두거나 내버려둘 수가 없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저항한 불의는 바로 우리의 정의를 위협하는 차별과 가난, 군국주의였고, 그 운동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은 우리의 운동에서도 되새김질된다. 말 뿐인 자유와 평등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법을 평등하게 하여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만들어도 여전히 가난한 흑인은 그 식당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인권이란 신기루라는 것, 즉 빵과 자유의 불가분성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또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억압자들이 정한 윤리규범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중심에서 같이 노래한 시인의 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인권오름 제 27 호  [기사입력] 2006년 10월 31일 17:23:49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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