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3] 자격과 인종정치

엄기호(인권연구소 '' 연구활동가)

20여년 전이다. 제법 오래 유럽에 체류하던 중 로마에 갈 일이 있었다. 숙소를 구하다 한인 숙소에 묵기로 했다. 당시 청년들의 배낭여행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들이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기웃거려볼 심산이었다.

한 숙소와 연락이 되었고 로마역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 남성분이 다가와서 숙소 구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네 집이 한인 숙소라고 했다. 내가 예약한 분인가 싶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니 아니란다. 어느 집에 묵냐고 해서 묵기로 한 숙소 전화번호를 보여주니 실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이. 거긴 한인숙소 아니에요. 조선족이 하는 곳입니다.”

당시 그 말은 대단히 신기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한국에서 조선인을 한국인과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을 받고 고향을 떠난 분들이며 중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재중 교포라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고생하고 불쌍한사람들에게 잘 대해 줘야 한다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더 강한 듯 보였다.

여행이 끝나고 난 다음 영국에서 유학하며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던 선배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선배는 영국의 교포 사회에서 이미 슬금슬금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영국에서도 과거에는 조선족분들의 숫자가 별로 없었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단다.

그런데 점차 미등록 이주로 건너온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한인 민박을 여기저기서 하기 시작하면서 마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족들이 하는 민박은 가격은 약간 저렴한 반면, 밥이나 반찬은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내가 묵었던 로마의 숙소도 그랬다. 로마역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거기 진짜 한국 음식 아니에요. 조선족식이지. 우린 김치를 먹어도 진짜 한국 김치를 먹어야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지금 한국 정부는 후베이성에 지난 14일간 머물렀던 모든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모든 중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더 강경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자국민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목소리들 사이에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금지한다면 사실 국적이나 인종적 정체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후베이성에 머물렀는가, 아닌가만 따지면 된다. 더 확장하면 중국에 체류했는가, 안했는가만 따지면 된다. 이 점 때문에 입국을 통제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적과 상관없이 비시민권자는 입국 금지, 자국 시민권자는 입국 후 14일간 격리하는 정책을 편다.

그런데 그 격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드시 조선족을 끼워서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족은 조선족이지 재중동포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족은 조선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조선족 역시 모두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샌가 조선족은 더는 한국 시민권자와 같은 동포,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동포라고 하면 같은 민족을 의미한다. 동일성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와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와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재중동포로서의 조선족은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하게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시민권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권리에 대한 언술이기 때문에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은 건강보험과 무료 치료 등등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을 같은 민족도 아닌 주제에건강보험에 구멍을 내고 한국 시민권자들의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라고 격렬히 비난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무임승차당하고 있는 한국 시민권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한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중국 눈치나 보는 무능한 국가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 문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문화적 언술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에 관한 정치적 언술이다.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 민족과 인종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같은 권리를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권리를 줄 수 없기 때문에 같은 민족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과 인종은 삶을 위한 자격이 된다.

국가는 자격 있는 사람만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둬야 한다.” 이 말은 생명 통치로서의 근대 국가인 한국이 지금 내부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푸코는 권력을 생명 권력이라고 불렀다. 중세까지의 권력은 광장에서 반역자를 처형하는 것을 통해 권력의 실존을 보여줬다. 대신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었다. 이것을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라고 부른다. 반면 근대 권력은 병원을 짓고 공중보건을 돌본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다.”

이 구분을 고려해 본다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니다는 조선족 혐오의 목소리는 근대 국가를 이중화할 것에 대한 요구이다.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근대 국가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세 국가의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자격은 존재의 안전이며 나아가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는 생존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전자만 돌보아야 한다. 자격 없는 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다. 설령 그 자격심사가 자격과 상관없이 돌보는 것보다 더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통치는 경제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를 분할하고 위계화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럼 시민권자라고 하여 다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족을 죽게 내버려 둬야한다고 주장하는 내부의 압력은 시민권자의 자격도 따진다. 그가 과연 그런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확진되어 격리되어 있는 분들 중에서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를 돌아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세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다른 선량한시민권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금으로 치료받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시민권자이지만 도덕적으로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세금을 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준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을 축내는 무임승차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이들이야말로 극도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종 정치의 핵심은 자격의 문제다. 백인들은 유색인들이 인간의 자격이 없다고 봤다.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은 도덕적으로 정확하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은 공공재를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자격으로부터 배제하고, 자격을 위계화하는 것이 인종 정치다.

나치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진짜아리안족을 선별하는 것. 조금이라도 아리안족에 흠결을 가하는 존재는 독일제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만 자격 없음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충성스런 ss친위대였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는 배제되었고, 장애인은 배제되었다. 인종에는 인종이라는 계보학적인 완벽함뿐만 아니라 정상인이라는 완벽함, 성적 정체성에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완벽함 등 모든 생물학적 완벽함을 갖추어야 비로소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완벽함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도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도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총통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처럼 자격은 결코 느슨한 것이 아니다. 자격은 완벽함을 요구한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는 모두 잠재적으로 탈락이고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내가 탈락하지 않기 위해 남의 흠결을 따지게 된다. 인간과 인간, 시민과 시민 사이에 자격을 둘러싼 처절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이 아귀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자격심사관으로 완장을 차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가 제한적이라는 공포가 엄습할 때 이 아귀다툼은 격화된다. 모두가 나를 제외하고는 무임승차자이며 민폐이기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자격심사관 완장을 찬다. 완장을 차고 타자에게 선빵을 날리며 심사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물론 내 완장에 대해 다시 완장을 찬 사람들이 곧 나타나 나를 또 심사하겠지만 말이다. 이게 어디 지금 국민의 자격에만 국한된 이야기인가?

 

그러므로 내가 혐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장에 저항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엘리베이터에서 맨 끝에 탈 때마다 조마조마하지 않니?
B: 너도 나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야?
A: 내가 널 놀릴 형편이냐? 피차 마찬가진데. 그냥 내가 조마조마하단 소리야. 저번에도 ‘삐’ 소리가 나서 얼마나 무안했는지.
B: 그건 사람이 많이 타서였겠지. 네가 우연히 마지막에 탄 거고. 날씬한 사람만 엘리베이터 타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린 이렇게 몸무게에 민감한 걸까? 이게 무슨 천형이냐?
A: 그러게 말이야. ‘삐’ 소리에 얼른 내리는 데 뒤통수에 비웃는 화살이 꽂히는 것 같았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괜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고 나면 힘이 쫙 빠져.
B: 몸무게를 달 저울은 있어도 내 삶의 무게를 잴 저울은 없어. 왜 외모를 가지고 내 삶을 잴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A: 외모뿐만이야? 그냥 다른 걸 다르게 냅두지 않아. 굳이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게 한둘이어야지.
B: 그러게. 구실도 다양하셔라! 학벌, 성, 외모, 장애, 출신, 결혼 유무, 피부색, 나이, 재산 ….
A: 차별은 그런 구실들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잴 수 있다고 뻐기는 저울이나 줄자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저울이나 줄자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차별의 구축 과정

B: 거다 러너라는 유명한 역사학자 말로는 그게 과정이 있더라구.
첫 단계, 일단 무수한 다름 중에서 일단 자기네가 원하는 걸 골라잡아. 골라 잡히면 표적이 되는 거야.
A: 하긴, 모든 차이가 차별이 되는 건 아니지. 겉으로는 다양성을 떠들지만, 차이들이 나란히 다양한 게 아니라 차이들 속에 분명히 위계와 서열이 있거든.
B: 맞아. 특정 표적을 골라잡는 이유는 권력이 많거나 센 쪽이 그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거든. 그런 동기를 은폐하기 위해서 두 번째 단계가 필요해. 골라잡은 표적에게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부정적인 색칠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색깔이 표적의 원래 색깔인 양 뒤집어씌워. 이유를 만들어놓고 거기다 표적을 꿰어 맞추는 거야.
A: 편견, 고정관념 같은 걸 만드는 거구나.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부당하다고 안 받아들이면 되잖아?
B: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게, 그 색깔을 이유로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이 이뤄지거든. 사회적 기회나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 자기 삶과 사회에 미치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묵살하는 거야. 그렇게 실제적으로 상당 기간 박탈이 계속되면 어찌 될까? 물론 부정의하다고 느끼고 저항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겠지. 슬프게도 차별의 표적이 된 사람은 좌절과 열등감으로 자기에게 씌워진 색깔대로 살게 될 수 있어. 주입된 열등감이 지배세력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대개 사람들은 주입된 부정성에 동의하고 그걸 통념으로 갖게 돼.
A: 경쟁 때문일까? 부족한 기회나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누군가를 떨꿔낼 수 있으니까 그런 과정에 협조하는 게 아닐까?
B: 그러게. 차별로 이득을 보는 쪽에서 그런 경쟁과 분열을 노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차이에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하게 만들어낸 차이를 구실로 박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거야.

‘나머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

A: 우리 학교 다닐 때 ‘나머지 반’ 얘기를 하는 것 같다.
B: 나머지 반?
A: 왜 성적도 별로, 특기도 별로, 집안도 별로인 얘들끼리 묶어서 ‘나머지 반’이라 하고, 아주 소수정예만 뽑아서 ‘특별 반’이라 했잖아.
B: 맞아. 그 때 ‘나머지’라서 겪었던 설움이 장난 아니었지.
A: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나머지로 취급했을까?
B: 특별반이 학교생활에서 정상이고 표준이었으니까 그렇지.
A: 우리가 그 정상의 기준에 대들었다면 우리 삶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고 좀 세게 나갔으면 말이야.
B: 그러게. 하지만 우린 오히려 특별 반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지. 나머지 반을 떠나 특별 반으로 옮기는 애를 아주 부러워하고, 나머지 반과 그 속의 아이들을 창피해 했어.
A: 나는 남고 너는 잠깐 특별 반에 간 적 있잖아? 그때 그랬던 거지?
B: 창피하지만, 옛날 얘기니까 고백하자면 그랬어. 나머지 반 애들 갖고 킥킥거리고 얕잡아보는데 더 열심히 꼈지. 처음부터 특별 반이었던 게 아니라 나머지 반 출신이란 거 지적할까봐.
A: 아, 세월이 가도 남는 건 상처구나. 그때 나를 멀리하고 무시한 게 특별 반 애들이랑 잘 어울리기 위한 거였구나.
B: 옛날 얘기라니까! 부당한 구별에 올라타서 잘난 척 했던 게 쑥스러워. 그때 기억이 나한테도 상처로 남아있어. 결국, 지금 우리는 ‘나머지’란 말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공유하고 있잖아.
A: 그래. 그때의 구별이 우리 삶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으니까. 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를 보면, 살아서만 아니라 죽어서도 차별하잖아. ‘나머지’가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는커녕 왜 우리 삶에 더 들러붙는 걸까?
B: 눈에 보이는 공식적·제도적 차별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게 토양이라서 그럴 거야. 그런 토양에선 형식적으론 차별이 금지돼도 실제론 모욕과 무시와 차별이 비온 날 풀처럼 거침없이 자랄 거야.
A: ‘요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대놓고 사람 무시하지. 자기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다는 걸 다른 사람도 당연하게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친구야, 제도화된 차별이 문제란 건 잘 알고 그것 땜에 화도 많이 나지만, 우리 그걸 방패로 숨지 말자.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은근한 신호들을 무시하지 말자구.
B: 문득 최근 들은 말이 생각난다. <차별론>을 쓴 사토 유이란 학자가 이런 말을 했대. “차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다”고.
A: 왜 세 명일까? 차별받는 표적이 된 한 사람, 그 표적을 대상으로 서로 짬짜미해서 한통속이 되는 두 사람을 말하는 거야?
B: 하하, 너 말이 적나라하다. 다른 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라네.
A: 네가 특별 반에서 했던 것처럼?
B: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
A: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큼 차별은 위험하다는 거야.

차별의 해악

B: 차별의 해악이야 잘 알려져 있지. 희생양 만들기, 제거하기, 식민 지배, 아파르트헤이트, 제노사이드 등 역사적 증거들이 넘치잖아.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나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치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비난하잖아.
A: 차별 정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체제가 자국민의 인권뿐 아니라 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침해했다는 증거가 넘칠뿐더러, 멀고 남 얘기 같으니까 동조하는 걸 거야. 하지만 가까운 내 얘기에서는 얼마든지 태도를 뒤집잖아. 이로울 때는 글로벌스탠다드를 부르짖다가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할 때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지.
B: 굳이 역사적 증거들로 차별의 해악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간 이하나 비-인간으로 대하는 모욕과 배제가 주는 고통이 인권침해란 걸 부인할 수는 없어. 까놓고 말해 무시나 모욕을 받으면 당장 잠도 안 오고 우울해. 어쩔 땐 심장이 조이고 속을 칼로 긁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난 평소 둔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데, 무시당하고 주눅 드는 상황에선 그게 말짱 거짓말이더라.
A: 한편에선 인권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말하던데, 한편에선 차별에서 파생되는 인권침해가 날로 드세지는 것 같아. 이건 뭔 조화지?
B: 대놓고 차별하는 쪽의 문제야 지적하자면 끝도 없지. 그런데 나는 가끔 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에서도 불편함을 느껴.
A: 무슨 소리야? 우리끼리 목청껏 차별을 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고정된 선 지우기

B: 음, 정확하게 말하긴 어려운데, 가끔은 불평등해지기 위해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놓고 시합을 벌이면서, 그 시합의 규칙에 국한해서만 차별반대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해서 더 많이 갖게 되면 평등이 성취되고 차별은 사라지는 걸까?
A: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방식이잖아.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별하는 방식이 경쟁의 공정함과 능력에 따른 대우인 거고. 너 무슨 유토피아를 꿈꾸냐?
B: 재능과 장점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걸 아예 부인하자는 게 아냐. 난 그저 그런 분배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거지. 정당한 것과 유일하게 정당한 건 다르잖아. 나는 정당한 분배에 앞서 사람으로서 같이 누리는 기본값이 커졌으면 좋겠어. 특성과 조건을 따지기 전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는 기본적인 대접이 동등했으면 좋겠고, 그 동등함의 범위가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반차별과 평등의 관심이 기회의 균등이나 공정한 분배에 너무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A: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찜찜한 게 있었어. 내가 차별을 반대하지만, 내가 피해자라는 점을 너무 의식하고 강조하는 건 아닌지, 피해자임을 강조하다 보니 피해에 늪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난 늘 약자니까 특별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사정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사정하는 게 아니라 난 당당하고 싶거든. 사정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원하는 건데, 왜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낙인 찍혀야 하지? 왜 자주 되풀이해서 피해를 말해야 하지?
B: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말이 내 입에 안 맞을 때가 많아. 무슨 무슨 차별의 피해자라고 누군가 날 묘사할 때면 성질이 날 때가 있어. 왜 자기 말로 나를 묘사할까 싶어서.
A: 그런데 내가 나와 다른 범주의 차별 피해자를 묘사할 때는 늘 내 말로, 내 방식으로 설명틀을 만들어내지?
B: 아까 왜 특정 차이가 차별로 만들어지는지 얘기했잖아. 차별을 엮어내는 고리 자체를 바꾸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없을까?
A: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선 긋기 자체를 바꾸는 것? 우리, 몇 해 전에 회 먹으러 갔던 해변 기억나?
B: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대단했지. 저 멀리 있던 바다가 순식간에 코앞에 해안선을 그려서 깜짝 놀랐잖아.
A: 그치.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졌지. 간밤에 보았던 해안선과 아침에 보았던 해안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어.
B: 그뿐이야? 파도는 늘 넘실거리면서 우리가 그리거나 새긴 것들을 지웠잖아. 우린 또 다시 그리고 또 지워지고.
A: 차별을 만들어내는 범주와 경계에 고정되지 말고 우리도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B: 날은 덥고 바다는 생각나고, 비·회·술·벗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나머지 반’끼리 번개 해볼까?
A: ‘나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정정하면, 생각해볼게.

 

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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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11. 1. 20

작성자 : 류은숙

* 이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5)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차별(류은숙)

엄마, 내가 도라지 무침만 보면 울컥하는 것 알아? 어릴 때 나한테는 김치만 달랑 든 도시락을 싸주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둘째에게만 새콤달콤하게 도라지와 오이를 버무려 싸주었쟎아. 집에서도 그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게 했어. “넌, 아무거나 잘 먹지만 네 동생은 아니잖니. 이건 동생만 줘라.”라고 하면서 말이야. “아무거나 잘 먹는 게 죄지” 구시렁거리며 난 밥만 씹어댔어. 어느 책에서 봤는데 원숭이들도 먹을 것으로 차별하면 음식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대. 부모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 어느 부모나 ‘열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있나?’란 대사를 내뱉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도라지 무침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있어. 맘껏 맛있는 것 못해주는 게 속상한데 거기에 밥도 잘 안 먹는 둘째가 더 맘에 걸려서 엄마가 그랬다는 걸 알면서 내가 괜히 투정부려본 거야.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문제는 내 반찬투정과는 좀 달라.

여느 엄마들처럼 엄마는 자식들 성적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어. 엄마가 고생고생해서 학교에 보냈으니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모두가 일등을 하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쟎아. 꼴찌에서 두 번째도 아니고 정말 꼴찌를 했던 막내, 그리고 재수, 삼수도 아니고 오수를 해야 했던 남동생이 엄마한테는 늘 한숨거리였지. 나와 둘째의 성적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엄마는 공부를 못할수도 있더란 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속상해서였겠지만 “내가 저걸 아들이라고 낳고 미역국을 먹었지”란 말을 남동생에게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해. 공부 때문에 주눅이 들어 인문계 고교에 안가겠다는 막내에게 “내 자식인게 창피하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어느 날 청소하다가 막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 게 됐는데, 정말 가슴 아픈 말들이 적혀있었어. 엄마한테는 그때 차마 말 못했지만, 그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살기 넘치는 저주와 원망의 말을 공책 가득 적어놓고 있었어.

엄마한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야.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식구인데’라고 감싸며 그런 일 없는 척 아닌척하지만 사실 서로 비교하고 상처주는 일이 없었던 집은 드물거야. 형제자매끼리 친척들끼리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어서 명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한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엄마만 우리를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한 것도 아냐. 나도 엄마 아빠를 다른 집 부모와 비교하곤 했어. 심할 때는 ‘내 부모는 따로 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날 이 집에 맡긴 거다. 어느 날 진짜 부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날 데리러 올 거다’란 상상놀이를 하기도 했어.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해 이 세상에는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일이 천지야. 문제는 누가 무엇을 가지고 비교할 힘을 갖고 있느냐는 거야. 가령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심하다고 느끼는 게 학벌차별이래. 학벌은 학교에 들어갈 때 한번 결정 나는 일인데 그것으로 평생의 사람대접이 좌우되니까 너무 심하잖아. 부당하다 해도 그게 평생의 사람성적표가 되니까, 엄마도 늘 성적타령을 했겠지. 그럼 그런 학벌을 가지고 비교하길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겠어? 좋은 대학 나와서 그걸로 꽤나 행세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지. 우리 막내 같은 사람이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잖아?

그래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비교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준으로 해서 남을 판단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지배하는 쪽과 지배받아야 할 쪽을 결정해. 그러니 비교 기준 자체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자기들의 색안경인거야. 허구한 날 중에서 택일을 하는 것처럼 하고많은 사람의 특성 중에서 힘센 쪽이 찍어서 이용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 그렇게 골라낸 특성에 대해서는 온갖 흉을 보고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갖다 붙여. 오랜 시간 그런 흉을 듣다보면 대개 사람들은 ‘정말인가보다’하고 믿게 돼. 그렇게 되면 추문의 주인공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리게 돼.

나 어렸을 때 엄마가 살림에 보태려고 우리도 세로 살던 집 방 두 개 중에 하나를 세놓았던 일 기억나? 어떤 부부가 계약금 5만원을 들고 와서 다음날 이사하기로 했어. 그런데 다음날 와서 무슨 사정이 생겨 이사를 못하게 됐다고 계약금만 떼이고 갔지. 그때 이웃들은 “◯◯도 출신이라 찜찜했는데 잘된 일”이라고 했어. 엄마도 거들면서 “남자 인상은 그래도 괜찮은데 그 부인 인상이 맘에 걸렸다”고 “◯◯도 여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어.

난 ◯◯도 출신인 게 뭐가 문제인지 궁금했어. 커서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도 출신이어서 그 반대편의 도 사람들을 경제로나 정치로나 못살게 굴었던 거였어. 그래서 ◯◯도 출신들에게는 ‘뒷통수를 잘 친다’, ‘음흉하다’는 등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어. 대학에서도 지배층 들과 출신이 같은 도 아이들은 그 지역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쓰는데, 억압받는 지방 아이들은 또박또박 서울말을 썼어. 자기 출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지금이야 옛일이 돼버렸지만, 나는 “◯◯도 출신이라 찜찜했다”는 사람들 말이 잊히지 않아. 정치로나 경제로나 힘센 쪽은 ‘◯◯도 출신’이란 기준을 빼들었고, ◯◯도 출신에게 근거 없는 추문을 갖다붙이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믿게 됐고, 그래서 ◯◯도 출신이 직장을 구하고 셋방을 구하고 공직에 진출하고 결혼을 할 때마다 걸러져서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어.

이게 ‘지역차별’이라면 다른 차별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일제시대 일본인과 조선인, 지금의 한국인과 동남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 앞의 것은 좋은 쪽이고 뒤의 것은 나쁜 쪽이라고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거야.

 

사실 ‘다르다’는 것으로는 할 말이 없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같은 게 없듯이 사람은 모두 다르거든. 그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야. 입 아프게 두 번 세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매순간 달라지고 있잖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 사람은 전부 다른 게 당연하니까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도 우스운 말이야.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혹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차이가 당연하다고 해서 사람마다 갖는 특징이 ‘원래 정해져있다’는 뜻은 아니야. 흑인은 ‘원래 게을러’라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원래 게으른 특징을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오늘날 잘 사는 나라들은 흑인들을 끌어다가 노예노동을 시켜서 잘 살게 됐는데, 왜 하필이면 ‘게으름뱅이’들을 일꾼으로 부렸을까?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뚱뚱한 걸 엄청 싫어하잖아. 그래서 늘 잔소리가 “난 널 예쁘게 낳아줬는데 네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리 됐다”고 하잖아. 만약에 누가 엄마보고 엄마 딸은 “원래 그렇다”고 하면 어쩌겠어?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야.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 차이를 가지고 사람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야. 어떤 차이를 가지면 유난한 대우를 하고 어떤 차이로는 모욕과 무시를 하는 걸 문제 삼아야지, 차이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차이를 무시하는 건 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거야. 나만의 특성, 나를 드러내 주는 차이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있다는 건, 타인과의 차이 덕분인건데, 타인의 차이를 지워버리면 나도 같이 지워지는 거야. 타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홀대하면, 내가 가진 차이가 제대로 대접받길 바랄 수 있을까?

 

차이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어.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특성 탓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의 결과야. 곧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대접하고 누구를 홀대할지를 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야. 트집을 잡고 얕잡아 보고 괴롭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잘못인 것이지,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탓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문제야.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어. 먼저 ‘참아준다’는 부류가 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차이를 참아주겠다고 하면서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어떨까? ‘넌 한국 사람이 아니지만, 한국사람 취급해줄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사람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차이를 지워버리라는 강요쟎아. 네가 입는 그 옷을 입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널 받아줄게. 그럼 그건 받아주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거지.

두 번째는 ‘불쌍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어. 차이를 동정하는 거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봐라’, ‘노숙인을 봐라’, ‘넌 그보다 낫잖니’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어. 자신보다 힘든 환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내 행복을 저울질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행복 자체가 비참한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사람이 가진 장애나 어려움을 그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이라 보고 사회 환경을 뜯어고치려 노력하는 거야. 장애인을 보고 혀를 차고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인이 사회에서 생활할 때 장애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개인적 운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인 거니까,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장애인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만들면 되는 거지.

세 번째로 ‘혐오하고 못살게 구는’ 부류가 있어. 올해 한국 사회가 들썩인 일이 있었어. 남성간의 사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됐어.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본 어떤 사람들이 무지 화를 내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까지 실었어. ‘이 드라마보고 게이(남성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야)된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으면 그 드라마를 방송한 방송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게이인 사람들이나 그 친구, 가족, 또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것이었지. 엄마가 당뇨병을 관리하고 살듯이 에이즈라는 질병도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병일 뿐인데, 그걸 무슨 죄 값인 것처럼 취급하면 아픈 사람의 고통이 배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동성애자가 에이즈의 근원이란 건 일찌감치 엉터리로 밝혀진 사실이야.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불쾌감과 혐오감을 진리라고 여긴 광고였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부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싸움으로 여기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한국에선 요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있거든.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이 법 자체에 물 타기를 하는 거야. 설령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별반 힘을 못쓰는 법이 되도록 하려는 거지. 그런데 동성애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은근히 관심이 사라진 부분이 ‘학력 차별’을 금지하는 거였어.

차별금지법을 제일 반대하는 것은 기업들이야. 사람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고 해고하는 데는 많은 차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것은 간섭이라며 기업들이 아주 싫어해. 정부도 마찬가지야. 정부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명분을 갖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은 부자인 시민과 서민인 시민을 구별해서 아주 달리 취급할 때가 많아.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을 분류하고 선별대우를 하면서 안 그런 척 하려 하거든. 그런데 정부나 기업이나 대놓고 차별을 말하면 명분이 깍일 뿐더러 많은 비판과 저항을 받을 수 있어. 그런 판국에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립이 부각되면 저절로 차별금지법의 힘이 줄어드니까 정부와 기업은 뒤돌아서 웃을 수 있는 거야. 겉으로는 기독교인과 동성애자의 싸움, 군필자인 남성과 여성의 싸움, 명문대와 기타대의 싸움처럼 보이는 일들 뒤에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힘센 세력이 있는 거야.

 

대표적으로 매를 맞고 있는 건 동성애자들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을 숨죽이며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있어. 만약에 자신을 드러내면 동성애자들이 받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어. 공개적인 모욕, 멸시, 공격, 폭력이 예상되기 때문에 주눅이 들고 국가에게 당당히 보호를 요구할 수가 없게 돼. 눈에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이 있는 사람들, 그런 탓에 하나의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는 게 더 힘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이 대표적으로 당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동성애자들만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야.

 

가령 여성들은 차별받는다는 이유로 ‘여성’임을 드러내고 뭉칠 수라도 있어. 그런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병을 드러내고 뭉치기 어렵고, 학력차별의 경우처럼 오랜 정치경제적 고질병인 경우엔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뭉치기가 어려워. 그래서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결이란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우리 사회가 은근히 차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돼.

 

차별받는 사람들은 ‘화’를 낼 권리가 있어. 비슷하게 싸잡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다른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어. 그런데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과 차이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야. 모욕과 폭력을 당해 화를 내는 건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차이를 이유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야. 가령 장애인이라고 감금하는 일, 동성애자라고 직업을 뺏는 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자기 취향이고 자기 자유라고 말하는데, 그런 취향과 자유는 차이가 아니라 범죄인 거야. 살인을 취향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야.

 

차별이 가져오는 제일 무서운 결과는 분열과 애꿎은 사람들끼리의 싸움박질이야. 사회적 불운을 겪는 사람들끼리 창피를 주고 서로를 미워하면 사회적 불운을 고치는데 힘을 합칠 수가 없게 돼. 가령 학력이 낮아서 일하는 만큼 대우를 못 받는 남성이 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의 절반임금밖에 못 받는 여성이 있다고 해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할 때, 남성이 ‘난 여자가 나와 똑같은 임금 받는 꼴은 못 본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여자보다는 많이 받아야겠다’고 여성을 차별한다면, 이 남성이 얻게 되는 건 뭘까? 그래서 자기 자존심이 올라갈까? 자기 월급이 올라갈까? 결국 좋아할 건 사장밖에 없어. 일하는 남성이랑 여성이랑 힘을 합쳐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일을 사장은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성차별을 은근히 좋아할 거야. 차별을 통해 타인을 낮춤으로써 내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동반추락일 뿐이야.

 

차별받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을 싫어해. 가령 장애인, 동성애자, 비정규직, 혼혈인, 동남아인, 이런 식의 이름들인데,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이름들이 필요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이걸 ‘깔때기’처럼 사용하는 게 싫은거야.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점을 살려서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해. 가령 엄마를 ‘노인’, ‘저학력여성’ 이란 깔때기로 싸잡아 부르면 화가 나겠지? 이런 식의 싸잡는 이름에는 엄마가 자식 넷과 손주들을 키워냈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하고, 정직하고 알뜰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차별을 극복하려면, 깔때기같은 한두 가지 성격으로 싸잡아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중요해.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란 양희은의 노래가사가 있어. 이 노래가사를 들으면 푸근한 맘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어.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사건 속의 사람을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사람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돼.

난 어렸을 때 내가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어. 내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은 외교이고, 내가 문밖에 나가 구멍가게에서 뭘 사는 것은 무역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회가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 그것도 좋은 뜻으로가 아니라 구별해서 대우를 달리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싸잡는 이름을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로 다루는 게 필요해. 그래야 ‘너는 장애인이고 나는 비장애인인데’, ‘너는 남성이고 나는 여성인데’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회적 불운을 제거하고 더 평등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뭉칠 수 있는거야. 그렇지 않고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들끼리만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잘 될 수가 없을 거야. 이름 붙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이름을 대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가 없잖아. 싸잡아서 다수인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서만 싸우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다수가 되기 전에는 권리를 누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가진다는 걸 위해 같이 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을 벗어던져야 하는 거야.

 

차별하는 쪽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말이야.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누군가에게 창피를 주고 모욕을 주는데 부러 힘을 써. 그래서 온갖 불쾌하고 낮춰보는 말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해. 게이인 한 남학생이 직접 겪은 일인데, 같은 반 친구들이 졸업사진을 찍으면서 그 학생 어깨위로 올라서 밟았다는 거야. ‘너는 호모(남성 동성애자를 혐오해서 부르는 말이야)니까 짓밟아줘야 한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상대방이 모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상처받을 자존심이 있고 모욕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란 걸 인정하는 거야.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망치겠다고 덤벼들었다는 얘긴데, 그럼 오히려 그렇게 모욕하고 괴롭히는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상대방을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우습지 않아? 자신들이 모욕하려 하면서 사실은 그런 상대방의 존엄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서 자신들이 괴롭힌 상대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건 뭘까? 남을 괴롭혀서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은 정말 못난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걸 통해 ‘나는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건 누가 봐도 한심한 짓이야.

 

결국 차별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사람들한테 싸움 붙여놓고 잇속을 챙기는 ‘남’들, 그런 ‘남’들에게 속고 지배받고 빼앗기는 사람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지지고 볶는 일이 차별이야. 엄마가 “남 좋은 일만 시키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뭔가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혀를 차지. 그렇게 엄마가 한심하게 여기는 짓, 그중에 제일이 차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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