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지금까지 세계인권선언의 탄생 배경과 한계, 재산권 등 논쟁조항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차별조항을 둘러싼 논쟁과 식민지, 여성의 문제와 관련된 선언의 미진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차별은 안돼

유엔헌장은 인권에 대해 다루면서 ‘인종, 성별, 언어 또는 종교’에 기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세계인권선언 2조는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및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라는 긴 목록에 걸쳐 차별을 금지한다. 또한 ‘법 앞에 평등’을 규정한 7조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확인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인권선언을 위반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하여도 ‘어떠한 차별의 선동’에 대하여도 반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차별금지 조항을 둘러싼 견해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만하면 됐다’와 ‘불충분하다. 더 세게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강경입장은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권 국가들이었고, 소극적 입장은 영·미 쪽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다. 이 대립은 감정대립으로 치닫기도 했다.

소련 대표는 미국의 흑인차별, 남아공의 소수민인 인도인 차별,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를 예로 들며 세계인권선언이 차별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국가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선언하길 바랐다. 이에 대한 반론은 개인의 권리를 주로 위협하는 것이 국가인데 국가 수중에 너무 많은 권력을 주려한다는 문제제기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차별행위를 금지하려는 조항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흑인에게 린치(폭력적인 사적 제재)를 가하는 관행이 계속된다는 걸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바로 이때는 미국에서 흑인의 시민권 지위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가 설립되어 흑인에게 가해지는 각종 폭력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직후인지라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대표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차별문제에 대한 강조를 회피하려 했다. 모든 ‘구별’이 나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라면서 ‘자의적’인 차별만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차별’이란 단어보다는 ‘구별’이란 단어를 쓸 것을 주장했다.

자의적인 차별만 금지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소련은 자의적인 차별만이 문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일반적인 차별이 문제라며, 소위 자의적인 차별만을 비난하는 것은 법에 근거한 차별을 봐주고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국가의 대표들도 차별에는 악의적인 구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의적’이란 표현이 필요없다면서 소련의 의견을 지지했다. 결국 ‘자의적’ 이라는 표현은 삭제됐다. 또한 ‘차별’이란 단어가 아닌 ‘구별’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거기에 담긴 내용이 아예 바뀌는 걸 의미한다는 이유로 ‘차별’이란 단어가 유지됐다.

차별에 대한 언급을 줄이려는 또다른 제안은 2조의 차별금지규정과 7조의 ‘법 앞에 평등’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명료한 차별금지 조항이 따로 있어야 하고 따라서 두개의 조항이 필요하다고 방어에 나섰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 예로 든 것은 미국의 흑인차별에 덧붙여 영국이 식민지들에서 자행하는 엄청난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영국 의회의 640명 의원 중에 여성은 단지 24명이며, 미국 하원에서는 겨우 9명이라고 비판했다. 또 유럽과 아메리카의 30여 개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소련의 비판에 대해 표적 공격을 한다는 비난이 있었고, 그렇게 말하는 소련은 왜 이동의 자유와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망명의 권리를 제한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느냐는 맞대응이 있었다.

어찌됐건 차별 조항의 강화를 이끌어낸 데는 소련의 완강함이 공헌을 했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특히 인정되는 것은 식민지에 대한 언급을 완강히 주장하고 관철시켰다는 점이다.

식민지를 어찌할까

2조 차별금지 조항의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삽입돼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 지역이든, 비자치 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안된다”

이 부분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어디에 살건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 하에 있건 차별받아선 안된다는 것이다.

연재를 시작할 때 말했지만, 인류의 절반 이상이 식민지에 살고 있던 때 그리고 식민체제에 지각변동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때에 선언은 탄생했다. 선언의 제정 논의는 1946년에 봄에 시작됐는데 1년 반이 지나 1947년 겨울이 될 때까지 식민지 문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식민지 종주국들은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행동도 없었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진영의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후자는 식민지 민족들은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언을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충돌이 이어졌다. 비자치 지역과 식민지에서 자국 정부에 대한 선거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식민지 종주국들은 서구의 민주주의 절차는 그런 지역의 전통과 문화에 적합하지 않으며 자신들은 그런 문제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선언의 규정에서 “모든 사람”에 식민지 사람들이 포함되느냐를 놓고 이어진 충돌 끝에 채택된 표현은 직접적인 ‘식민지’라는 표현이 아니라 위에서 본 2조 후반부에 담긴 에두른 표현이었다.

‘식민지’라는 분명한 표현이 아니라 2조의 후반부에 은밀히 감춰진 것에는 식민지 종주국들의 반발 말고도 또다른 이유도 있다. 사실상 식민지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별도의 조항을 두는 것은 식민체제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차별금지가 선언의 일반원칙이란 건 반복적으로 확인됐지만 그것이 식민지 영토들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식민지가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인류의 양심은 식민지 민족들에 대한 억압이 용인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됐다”는 인식이 용납한 것은 이 수준이었다. 또한 공산권의 당시 지도자였던 유고의 티토와 소련의 스탈린의 결별로 식민지 관련 조항을 둘러싼 공산권의 연대는 깨졌고 서로의 안을 불충분하다고 지적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표현을 희석하고 축소하려는 식민종주국의 노력이 성공하는 것을 돕게 됐다.

여성의 권리

유엔경제사회이사회는 유엔헌장의 남녀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여성지위에 관한 소위원회(여성소위)’를 구성하고 권고와 보고서를 인권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기구의 중복이 문제가 됐다. 여성소위의 의장은 여성은 타 위원회의 속도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경제사회이사회는 이를 용인했다. 그래서 여성소위는 인권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경제사회이사회에 직접 보고하게 됐다.

정작 선언을 기초하는 인권위원회가 여성의 권리를 토의하게 되자 의장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두 기구 간에 중복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여성의 지위 문제를 다른 용어로 바꿔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소련 대표는 “국제권리장전을 논의하게 됐을 때 인권위원회는 인권 영역 내에서 모든 문제를 다룰 권한이 있다”며 ‘여성의 지위’ 문제를 논의에서 삭제하는데 반대했다.

인권위원회는 여성소위와 접촉을 유지할 길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고 두 위원회는 따로 흘러갈 위험에 처하게 됐다. 그 결과 경제사회이사회는 특별 결의안을 채택해서 여성의 권리 문제가 고려될 때는 여성소위를 초대하여 투표 없이 참여하도록 할 것을 인권위원회에 요청하게 됐다. 인권위원회는 이에 따랐다.

선언의 대부분의 초안 문구는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여성소위는 역사적으로 “모든”이란 말이 여성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엄숙하게 자유를 규정했지만 여성의 권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여성을 포함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은 그렇게 흘러왔다. 따라서 선언에서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차별 없이 여성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선언 대부분의 조항은 그 시작이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되고 여기서의 사람(men)은 남성을 지칭해왔기에 많은 대표자들이 불만스러워했다. 역사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보다 분명하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희망했다. 호주 대표는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남성인류(mankind)와 여성인류(womankind)가 아닌 인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엘리너 루즈벨트는 관습적으로 인류(mankind)는 남성과 여성을 차별 없이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무마하려 했다.

여성소위는 남성의 뜻이 다분한 ‘men’이 아닌 성차별적 요소를 배제한 ‘human beings’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 대한 영어 표현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든가 이미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된 단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에 채택되지 않았다. “인류가족의 모든 구성원”, “모든 인민, 남성과 여성” 등의 제안 등이 오간 끝에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이 채택됐다. 1조 이외의 모든 조항에서는 “모든 사람”(everyone)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성차별적 단어가 선언에는 남아있다. 선언을 통틀어 남성을 지칭하는 표현은 1조의 “형제애의 정신으로”(in a spirit of brotherhood)와 23조와 25조의 “(남성 노동자)자신과 가족”(himself and his family)이 있다. 23조와 25조의 문제는 남성의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표적인 성별분업의 성차별적 사고의 예이다. 당시 주요 국가들의 헌법과 심지어 노동조합이 제출한 초고에서도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남성노동자와 그가 부양해야할 ‘그’의 가족으로 표현돼 있었다. 선언은 이들 표현 그대로를 반영했고, 여성소위는 그것을 방관했다. 이러한 간과는 선언을 기초한 당시 사람들의 진정한 태도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결혼과 무관하게” 평등한 시민권을 누릴 권리 부분은 누락됐다. ‘민법상 결혼은 선택의 자유, 아내의 존엄성, 일부일처, 결혼 해소에 대한 동등한 권리, 동등한 양육권, 자신의 국적을 유지할 권리, 계약을 맺을 권리, 재산을 가질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여성소위의 제안이었고 유급출산휴가, 교육에 대한 여성의 평등한 접근 등의 사회적 권고들도 있었다. 선언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조항 16조에는 이 중 일부만이 반영돼 있다.

결혼과 관련하여 주로 논쟁이 된 것은 여성의 권리라기보다는 타종교를 가진 사람과의 결혼이나 이혼에 관한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이었다. 타종교와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거나 종교적 이유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해소될 수 없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언에 찬성표를 던진 배경은 이렇다. 종교와 국가는 분리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인권 문제가 논의돼야 하고, 이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에서 관련 입법이 대개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점이 지적됐고 그런 여성의 불리함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혼의 성립이나 해소 시에 여/남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혼을 독자적인 권리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의 원칙에서 접근한 것이 선언기초자들의 의도였다.

16조에서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란 차별금지 규정이 한 번 더 반복되는데 이에 대해 타 종교와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 역시 이혼 문제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묵인됐다. 타종교와의 결혼 금지, 이혼 금지를 종교적 신념으로 가진 이슬람 또는 기독교나 결론적으로 선언에 찬성한 것은 인권문제가 종교적 근거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참정권, 노동권 등에서 여성의 권리를 특화하자는 주장은 모두 일반적인 표현으로 수렴됐다.

참정권에 대해 말하자면, 선언이 채택된 1948년 당시 아직도 많은 국가의 헌법들은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권리 옹호자들은 정치적 미성숙을 이유로 참정권이 보류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참정권 앞에 ‘동등한’이란 말을 넣기 원했고, ‘재산, 거주지, 사회적 출신, 종교, 인종, 정치적 신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공무에 취임할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보통, 평등, 직접, 정기적, 자유로운, 공정한 비밀’ 선거란 일반적 표현으로 정리됐다. 노동권에 대해서도 남성과 동등한 혜택 속에 일해야 하고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원칙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 대신에 여성을 특화시킨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대 이유는 두 가지 입장이었다. ‘모든 사람’에 여성이 포함되는 걸 따로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특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또다른 반대 의견은 여성을 특화시키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은 단지 여성의 지위를 약화시킬 뿐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많은 영역에 걸쳐 있는데 특정 영역을 언급하는 것도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예 여성에 대한 특수한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선언의 모든 사람에 여성이 포함된다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선언은 앞서 지적한 부분(1조, 23조, 25조)의 표현을 빼고는 모두 ‘모든 사람’, ‘어떤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모든’ 등의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세계인권선언에는 담지 못한 요소, 고의로 빼먹은 요소, 머뭇거리고 주저한 흔적들이 많다. 또한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모를 물음들도 많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선언은 선언일 뿐’이라거나 ‘별 쓸데없다’란 말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쪽은 선언에 담긴 권리들이 아쉽지 않거나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쪽일 것이다. 아쉽고 누락된 선까지 찾아 그리며 점선의 권리를 실선의 권리로 만들고자 하는 쪽에 선다면 선언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노동권에 대한 조항

제23조 1. 모든 사람은 노동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등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3. 모든 노동자는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하여 주며, 필요할 경우 다른 사회적 보호의 수단에 의하여 보완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의 23, 24조가 규정하고 있는 노동권을 잘게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은 9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일할 권리 ② 자유로운 직업 선택 ③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 ④ 실업에 대한 보호 ⑤ 차별 없이 동등한 노동에 대한 동등한 임금 ⑥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유리한 보수(필요하다면 보충되는) ⑦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⑧ 여가시간과 합리적인 노동시간을 가질 권리 ⑨ 유급 휴가를 가질 권리

이 모든 권리의 바탕에 깔린 핵심적인 생각은 인간의 노동은 착취되거나 가능한 한 가장 싼 값에 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하나를 합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권리를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소위 ‘물타기’를 하려는 시도는 계속 갈등했다.

<국가 의무의 실종>
일할 ‘권리’는 선언에 있는데 일할 ‘의무’는 없다. 사회주의 국가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모든 사람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에 종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의무’ 조항을 갖고 있었으나 선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구 선진국들은 그런 조항을 갖고 있지 않았고 노동의 의무가 특정 국가들에서 강제노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일할 의무를 선언에 넣지 않은 진짜 뜻은 다른 데 있다. 일할 의무는 곧 일할 권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일할 의무는 결과적으로 국가가 고용을 보장할 의무와 연결된다. 일할 의무의 삭제를 주장한 이들이 염려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당시 많은 국가들이 직면한 것은 세계 대전 직후의 높은 실업률이었다.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국내 노동 시장으로 돌아왔고 일하기를 원하나 일자리는 없었고, 실업이 곧 극복될 수도 없는 체제였다. 따라서 기본적 권리인 일할 권리를 언급하되 그것을 이행할 수단은 찾아봐야 하는 것이었다.

왜 일할 권리를 가진 사람에 대한 국가의 의무가 선언에는 언급되지 않느냐는 지적은 계속됐다.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비판은 거셌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특성상 완전고용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해도, “실업 방지를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무는 명시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체코 대표는 실업을 방지할 국가의무에 대한 언급 없이 실업으로부터의 “보호”를 말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자선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노조 대표자들도 ‘실업 그 자체를 방지하는 것과 실업의 결과를 경감시키는 조치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권리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새롭게 등장한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국가의 명확한 의무를 언급하길 원했다.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이에 반대한 국가들은 “선언의 임무는 개인의 권리를 정하는 것이지 사회나 국가의 의무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유지했고, “노동의 권리에 노동을 제공할 의무가 암시된 것 아니냐, 그거면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양쪽 입장을 버무린 결과물은 “실업으로부터의 보호”로 표현된다. 여기에 노동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는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국가의 의무 부분은 노동의 권리 조항에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완전히 새로운 조항(22조)을 만들어서 의무를 언급했는데 구체적이 아닌 아주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자유로운>
원래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타인에 대한 노예상태에 두어서도 안된다”는 제안이 있었으나 선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상태에 해당하는 노동이건 아니건 그런 노동을 수락하는 건 그 사람의 맘이니까 괜찮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었다. 선언의 다른 조항에서는 “그 누구도 노예나 예속상태에 놓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와 겹치기도 하거니와 상세한 규정은 국제조약을 만들 때 하자는 취지로 빠진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자유로운”이라는 표현이며, 직업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자유로운”의 의미는 사람을 자기 인생의 창조자로 바라본 것이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선언의 다른 부분에는 이미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다룬 조항(20조)이 있었다. 따라서 이 조항에서 노동조합 결사의 자유를 명시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결사의 자유의 예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노동조합 결사권을 옹호한 편에서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다른 형태의 결사들은 오랫동안 인정받아 왔지만 노동조합은 많은 반대를 겪어 왔고 결사의 자유의 형태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노동조합 인정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에 대해 구체적 언급이 돼야 한다”, “현대 경제생활에서 노동조합활동의 특별한 중요성 때문에 포함시키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 등이다.

이런 논쟁만으로 노동조합 결사권이 선언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를 세계인권선언에 넣자고 촉구하는 캠페인(“The Campaign for Trade Union Rights")을 강력히 펼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노동조합연맹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전후 노조의 곤경을 분석·보고한 장문의 비망록을 보냈다. 경제사회이사회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곤란을 느껴 국제노동기구(ILO)의 조언을 구했고, 국제노동기구는 세계인권선언에서 노동조합결사권을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했다.

선언에서 노동조합결사권을 다루기로 하면서 또 논란이 된 것은 ‘클로즈드샵’이냐 ‘오픈샵’이냐의 문제였다(‘클로즈드샵’은 고용조건으로 그 회사와 단체협약권을 갖고 있는 노조에 가입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그 조합에 가입을 거절하는 노동자는 고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고용돼 있다면 해고되거나 차별받을 수 있다. ‘오픈숍’은 앞에서 말한 조건을 이유로 인한 차별적 처우가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결론은 노동조합 결사와 가입의 권리만을 인권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클로즈드샵이냐 오픈샵이냐의 선택의 문제는 지역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고 노동자들이 결정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최상의 정책이라 보고 선언은 이 문제를 남겨두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파업권에 대해서도 선언은 무간섭주의 접근을 택했다. 파업권을 지지한 국가들은 많았지만 이 문제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선언에서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강력하게 파업권을 지지한 대표적인 국가는 스웨덴이었는데, 그 입장은 이랬다.

“파업권은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가져야 할 도구이다. 모든 사람은 기존의 또는 제공되는 경제 조건으로는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 노동을 그만둘 권리를 갖는다. 기존의 또는 제공되는 경제 조건에서 일해선 안된다고 느낄 때 개별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그만 둘 자유에 의해 완성될 때에야만 결사의 자유는 시민의 자유로서 중요하다. 노동조합의 권리가 정당한 보수와 노동시간의 권리를 이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파업권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이행하는 수단이다. 파업권 없이는 노동조합의 권리가 무의미하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은 계속 존재를 허용 받았지만 파업권이 없었다. 파업권 없이는 노동조합의 자유는 환각이었다.”

ILO가 정교화시킬 문제이며 선언에서 다루기는 어렵다는 반대에 이 제안은 철회됐고, 선언의 파업권 논의는 거기서 멈췄다.

<노동조건>

노동조건에 대해 다룬 23조 3항은 원래 “인간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됐다. 이 문구는 비록 삭제됐지만 지금 있는 조항이 전하는 메시지는 마찬가지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조항에서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노동자는”이란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조항(25조)에 있는 ‘사회보장의 권리’는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이유들(질병, 장애, 노령 등)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다루는 반면, 이 조항에서는 이미 고용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노동자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하여 주며”, “필요하다면 다른 사회적 보호의 수단에 의해 보완되는” “정당하고 우호적인 보수”가 노동조건의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한 반대표는 단 두 표였는데, 미국과 영국의 표였다. 미국의 반대 근거는 ‘임금은 노동자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진 노동을 판단하여 정해진다’는 것이었다. 노동조건에 대한 이 조항은 이후 노동권 전체에 대한 부결로까지 이어지는 수난을 겪은 후에야 살아남게 된다.

<노동 시간의 합리적인 제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을 다룬 독립적인 조항에 대한 삭제 요망이 강력했다. 그 이유는 ‘노동시간이란 계약에 의한 것인데, 사법적 가치가 없는 선언에서 그걸 제한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선언의 가치 자체를 휴지처럼 만드는 이런 주장에 대한 반발은 물론 거셌다. 하지만 이 조항은 결국 삭제됐다가 나중에 별도의 조항이 아닌 “휴식과 여가의 권리” 조항이 만들어지면서 그 첫 문장에 붙이는 식으로 살아남게 됐다.

노동자의 휴식과 여가의 권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행되느냐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선언에서 이를 모두 포함시킬 수는 없었기에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라는 말만 남게 된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건, “유급”이라는 것은 반드시 포함돼야 했다. 임금 없는 휴식의 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의미였다. 선언에 쓰여 있지는 않지만 그 배경에서 논해진 휴식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자본의 ‘강탈’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휴식, 외국인이나 사회취약계층을 배제하지 않는 휴식, 휴식이 요구될 때 사회의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여건으로 인해 왜곡되지 않는 휴식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노동권 조항이 만들어질 당시에 노동자들이 유엔에 제출했다는 비망록에는 노동조합의 기반을 파괴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성토가 가득 담겼다고 한다. ‘노조의 모임 장소를 대여할 수 없게 한다’, ‘단체협약을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에게 강요된 불의를 고칠 수단이 없다’ 등, 정말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세계인권선언의 노동권 조항은 노동자들 손아귀에 잡힐 때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 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merit)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accessible)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고,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 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할 수 있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교육의 목적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고 생각했기에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또다른 인권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라고 해서 이 한마디로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정부들은 인권의 수사를 입맛대로 조작할 수도 있고, 다양한 인권개념간의 긴장과 모순, 다양한 권리의 갈등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이다.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비차별 원칙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요건을 금지하고 있는 것인데,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또한 “평등하게 개방되어야(accessible)”한다는 표현에서 나타난 ‘접근성(accessibility)'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1998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임명한 교육권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접근성을 이렇게 해석한다:

접근성은 무엇보다도 이용가능한 공립학교에 대한 접근성이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비차별이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장애아동의 경우 (법규정이 어떻다 할지라도)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제적으로는 배제되는 것이다…초등교육은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돼선 안된다.

무상-의무교육
의무교육의 전제는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선언에서는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는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미치는 것이다. 한 정부 대표는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와 그런 조건에서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안되고, 간접적인 부과(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문제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권리의 소유자와 의무자가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은 훨씬 나중에야 등장한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까지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자명하지 않은 교육권의 열쇠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5조 ①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 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②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인권이 밥 먹여주냐? 혹은 자유가 밥 먹여주냐? 이런 물음은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묻게 되거나 혹은 자주 듣는 질문 내지 원망이다.

“인권은 아침밥과 함께 시작된다”라는 말로 인권을 옹호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서 “아침밥”으로 표현되는 인권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돈 주고 사고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여기는 세상살이 속에서 그런 상품을 살 돈이 없어서 그걸 누릴 수 없다면, 즉 ‘아침밥’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는 것이 인권일 수 없다면, 우리는 ‘인권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자유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아침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적 인권을 기본적 인권으로 주장한 어느 학자는 홈리스(the homeless)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여러 날 먹을 것 구경을 못하고, 입을 옷이 없어 쓰레기봉투를 엮어 옷을 대신하고, 당뇨병이 진행되고 있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의․식․주와 의료는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뭐라 말하는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대한 권리,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인권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 아플 때 치료받을 것 등이 인권으로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권은 ‘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생활에 ‘기본적’인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얘기다.

사회보장을 권리로 보장하기까지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대공황의 여파로 체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중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특히 경제사회적 권리의 보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인권의 존중,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는 것(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이른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해당한다)이 ‘나치즘과의 전쟁’ 수행과 전후 재건을 위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본적인 생존권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동의를 표시한 국가 대표들의 생각이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선언을 기초할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헌법에 주거권과 의료권을 보장하고 있었다면, 북대서양 국가들 중 어디도 이들 권리를 헌법에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국가들은 전통적 인권과는 분명히 다른 이들 ‘새로운’ 권리들을 인권으로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국가가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획득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길 두려워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이들 권리를 요구한 측에서는 경제사회적 권리는 19, 20세기에 인류가 성취한 사회진보의 결과이며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근본적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의의 이념과 합치된다고 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선언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또한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최소화, 간략화가 낳은 결과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 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최소한의 예시’일 뿐이다.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회경제적 권리가 무엇이며, 그걸 보장할 수 있는 경제사회체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집행할 수 있는지는 각국의 재량 사항에 남겨진 것이다.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구체화하려는 제안들은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말자’거나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제지를 받았다.

이에 선언 22조에는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에 대해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권리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에 국한한다면 다른 곳에선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는 한편에서 식량에 대한 인권 없이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협력”을 언급한 것은 사회권이 국제적 권리라는 의미이다.

‘막연한’ 용어 대 ‘구체적’ 용어의 대결은 결국 ‘막연한’ 용어의 승리로 끝났다. “싸고 접근 가능한”, “특히 빈곤층 또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는” 식으로 조항을 만들자는 주장은 지금 선언에 쓰인 용어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면 충분하다는 주장에 용해됐다. 또한 주거권, 의료권 등 구체적인 각각의 권리에 대한 조항으로 하자는 주장은 간략하게 ‘합치자’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간략화와 합치기의 폐해는 크다. 인간생활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들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로 수렴되는 듯한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사회복지․의료 등에 대한 권리들이 공적(公的) 부조를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사회보장으로 축소돼버린 것이다. 예를 들자면 주거에 대한 권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다운 주거를 누릴 권리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자선이나 구제 수준의 도움을 받을 정도의 권리가 돼버린 것이다. 인간다운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 집이 없을 경우 쉼터 등에 수용되거나 약간의 보조비를 받을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의 차이는 크다. 사회보장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달린 것이지 이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사회보장권과 구빈과의 근본적 차이

이처럼 선언에서 아무리 소극적인 의미를 띤다 할지라도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맘대로 강화하게 한다든가, 자유와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돼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자유가 밥 먹여주냐’가 아니라 ‘자유가 밥 먹여준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의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도 상부상조의 미덕을 강조하는 소극적 해석에서부터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까지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세계인권선언 17조, ‘재산권’ 조항은 읽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재산을 인권으로 인정한다고? 그러면 재산 많은 사람에게 눌리는 다른 인권은 어떡하란 말이야?” 혹은 “재산권은 세계인권선언도 보증하는 당연한 인권인데 왜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은 재산을 가지고 그리도 못마땅해 하는 거야?”, 이렇게 서로 다른 식의 이해 또는 오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계인권선언 17조는 불친절하다. ‘재산’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고 ‘재산권’을 얘기하고 있고, 재산을 ‘단독’으로 가져도 ‘공동’으로 가져도 괜찮다고 하니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말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언을 기초한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땠을까? 17조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을 크게 세 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재산의 소유는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둘째, 재산은 단독으로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 셋째,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이 세 요소를 차례로 살펴보자.

재산의 의미

재산의 소유를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선언은 재산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논쟁 중에 계속 변했다. 처음에 인권으로서 생각한 재산의 의미는 공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적(private) 소유’가 아니라 ‘개인적 (personal) 소유’였다. 즉 사는 집, 소지품, 가구,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통신 등에 대한 개인의 소유를 생각한 것이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소유자가 될 권리를 인권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선언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 다뤄진 문구는 ‘존엄한 삶과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권리’를 재산권으로 봤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개인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조항 이전에 중간 채택했던 조항의 문구는 “모든 사람은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 유지를 돕는 그러한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 이를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여러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개인적 재산의 개념이 나라마다 다른데,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필요나 최소한의 재산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의 개인 소유를 기본적 권리로 봐야 하느냐? 이런 문제 앞에서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재산으로 보는 것은 너무 막연한 표현이라 비판받았다. 인간의 존엄한 삶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정당화하는 것이 막연한 반면에 개인 재산 외의 다른 종류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선언 기초자들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해내는 경제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되자, 의견이 대립되는 건 당연했다. 재산권을 앞서 말한 개인의 소유에 국한하는 것은 협소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윤창출 기업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등의 여타의 재산권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재산권으로 인정하는 걸 반대했다. 개인의 소유가 생산방식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부 사람은 엄청나게 소유하는 반면 다수를 착취하고 굶주리게 하는 일은 나쁜 것이고, 광산․운송서비스․은행 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개인의 소유와 사적 소유는 다르다고 했다. 더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의 부에 대한 동등한 몫을 요구할 권리, 기업의 이윤에 대한 몫을 요구할 노동자의 권리를 재산권이라 주장했다.

이런 대립 속에서 선언 기초자들은 경쟁하는 경제체제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하는 곤란에 부딪쳤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인권선언이 어떤 체제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단독’으로나 ‘타인과 공동으로’

그래서 선언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가 아닌 둘 다를 허용하는 혼합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단독”이라는 말은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당시 소련은 우려를 표했다. 그래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를 덧붙이자고 주장했다. ‘단독’이냐 ‘공동’이냐의 소유형태의 선택을 국가가 할 수 있어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가능성을 불허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사회주의 체제가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단독으로”란 말은 개인적 재산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사적 소유도 포함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식 경제 방식을 배제한다고 봤다. 선언의 취지를 따져보면 ‘단독’의 소유가 사적 소유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불법화하고 사적기업소유를 금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안을 반대했다. 개인소유냐 공동소유냐를 결정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소련의 제안대로 하면 선언과 같은 보편적 문서에서의 재산권이 무의미해진다고 했다. 다른 여러 국가들도 국가 법률을 언급하면 선언의 도덕적 탁월성이 손상되고,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기존의 재산관련 법률을 승인하게 된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했다. 결론적으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란 소련안은 거부되었다.

사유형태든 공유형태든 둘의 혼합이든 어느 쪽을 선호하든지 선언 기초자들이 ‘무제한적’인 재산 소유권을 옹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산권에 대한 ‘제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 간에 중도를 유지하려 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순수자본주의 체제란 게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언 기초자 중 그 누구도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이 인간 존엄성에 요구되는 재화를 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선언 29조에 권리의 제한과 규제를 둔 이유이다.

한때 제한 요건을 17조 자체에 두느냐, 딴 조항에 별도로 두느냐도 또 하나의 논쟁거리였다. 결론은 별도의 조항인 29조에 “공동체에 대한 의무”,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란 제한에 모아졌다. 선언 29조에 있는 제한 요건이 재산권 조항만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재산권 조항이 그것의 구속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29조에 덧붙여 더 중요한 제한 요건은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재산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권리에 의해 기업의 재산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분명히 인식했다.

재산을 무엇으로 보고, 어떤 재산에 대해 얼마만큼 제한을 두어야 하느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한 예로, 세계인권선언을 모태로 한 양대 국제인권규약(약칭 자유권 규약, 사회권 규약)에는 재산권 조항이 없다. 그 이유는 재산권은 인권이 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권을 어느 정도 어떻게 제한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가들이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의적 박탈 금지

재산권에는 재산을 획득할 권리와 재산을 획득한 후에 그것을 이용하고 향유할 권리가 포함된다. ‘자의적 박탈 금지’는 획득한 재산에 대한 사후 보호를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자의적’이란 단어의 의미이다. ‘불법적’이란 단어를 더 선호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거부됐다. 선언 기초자들은 ‘자의적’이라는 것이 곧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국가는 법률로써 얼마든지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법률로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재산의 박탈은 자의적인 박탈과 법률에 의한 박탈 둘 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자의적이란 말은 불법이 아닌 오히려 불의하고 정당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이해됐다.


모아 읽기

선언에서 재산권 조항만 따로 떼어서 읽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다른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재산권 조항은 홀로 있는 ‘섬’이 아니라 다른 여러 권리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권리이고, 그것이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할 권리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권 등 경제사회적 권리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재산권 조항은 선언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되는 권리군의 중간에 놓여있다. 어떤 국가는 재산권을 자유권으로 읽고, 어떤 국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 노동, 주거, 교육, 의료 등에 관계된 권리와 같이 고려하지 않으면 재산권을 권리로 고려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그래서 국가의 자의적 개입이나 간섭을 배제하기만 하면 보장될 수 있는 권리로 재산권을 바라보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무가 요구되는 사회권으로 취급하는 국가가 있다.

유엔은 어떤 식이냐 하면, 재산권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이란 주제 속에서 다뤄왔다. 그 속에서 주된 논의는 재산권을 여타 인권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재산권에 대한 논의를 돕기 위해 90년대에 독립전문가(Mr. Uis Valencia Rodriguez)를 임명한 일이 있다. 그는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편적 인권으로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사적 소유의 이용은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의 집중을 촉진해왔을 뿐 아니라 소수가 무제한으로 부를 축적하게끔 했다. 이는 엄청난 부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 간의 계급 분화의 근본원인이다. 집단적 재산이 이런 결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왔으며 재산의 사적 이용은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 현상은 결코 없으며, 공공의 이용․안보․건강보호 등의 필요성에 법으로 제한돼왔다”고 말한다.

이처럼 선언의 기초과정에서 불거졌던 문제들은 여전한 논쟁거리이다. 눈에 보이는 명시적 문구는 없지만,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누릴 권리로서의 재산권이 17조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7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글 싣는 차례

1) 탄생의 배경과 한계, 2) 논쟁조항 살펴보기-재산권 조항, 3) 논쟁조항 살펴보기-사회보장권 조항, 4) 논쟁조항 살펴보기-교육권 조항, 5) 논쟁조항 살펴보기-노동권 조항, 6) 그 밖의 문제들

달력을 틈틈이 살펴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흔한 습관이다. 올해는 휴일이 며칠이나 되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또는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인가 알아보려는 등의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달력을 훑다보면 12월 10일에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또는 ‘인권의 날’이라 적혀있다. 한국 사회에선 오랫동안 이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인권대통령이니 인권경찰이니 국정지표니 하는 것들에 ‘인권’이 바쁘게 등장하면서 약간은 주목받는 날로 변한 것 같다.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란 걸 만든 날이어서 인권의 날로 기념한다’는 요지의 기사와 인권특집이 해마다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고, 각종 기관과 단체들의 ‘인권’자 붙은 포상과 기획행사들이 많이 열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세계인권선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인권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일에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인권을 헤쳐 나가는 길에서 세계인권선언을 맞닥뜨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인권 논의에서 가장 기초적인 문서이기 때문이다. 가보지도 못한 곳의 지명을 듣고 ‘아, 거지 좋지’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꼭 집어서 무엇이 좋은데요?’라고 물으면 얼버무리듯이 ‘세계인권선언’이 전 인류가 소중히 여겨야할 공통의 기준이라고 떠받드는 사람에게 ‘왜 무엇이 그런데요?’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세계인권선언에 대해 그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것에 대한 찬사와 반복적 인용이지 비판적 분석은 아니다. [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를 통해 우리 시대 인권의 허술하고 빈약한 부분을 찾아내고 생략된 부분을 복원하고 암시된 부분을 명확히 해보는 건 어떨까?


살육과 야만의 경험, 선언의 기초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알려진 2차 대전의 살육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인권선언 기초의 주인공이었다. 전후 국제질서의 판을 짜는 열강의 입장에서 인권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려 했든 간에, 선언을 기초할 당시의 국제 분위기는 인권을 소리 높여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유독 나치의 인권침해에 대한 비난은 강도 높았기에 ‘나치가 이런 짓을 했으니 그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대세였다. 인권의 인정이야말로 나치즘의 복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전쟁수행과 전후 재건을 위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그 일환으로서 새로 만드는 국제기구인 유엔이 강한 이빨을 가지기를 바랐다. 인권을 말로만이 아닌 이행과 실현의 장치와 결합된 것으로 요구했다. 그래서 국제권리장전을 유엔헌장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국제적 요구가 거셌다. 이런 장치가 조금만 더 일찍 있었더라면, 파시즘과 나치즘이 아직 미약했을 때 전쟁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야만적 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인권을 높이 치켜세웠다. 여기에는 인권을 부인하는 정부들에 대해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시각이 깊이 배어 있었다.


왜소해진 선언, 의외의 결과 낳아

하지만 계산된 명분과 실천은 다른 것이다. 선언을 만드는 과정 초반의 대부분은 ‘조약’을 만드느냐, ‘선언’을 만드느냐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국제권리장전이 ‘조약’이어야 한다고 느꼈고, 당시 유엔 회원국 중 소국들은 단순한 권고나 결의안이 아닌 큰 국가나 작은 국가를 똑같이 구속하는 조약을 원했다. 하지만 두 강대국, 미국과 당시 소련은 이행장치 없는 선언 또는 원칙들을 담은 성명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반대의 이유는 서로 달랐다. 미국이 권리를 갖는 것과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라고 하면서 ‘선언 먼저, 조약은 나중에’를 주장했다면, 소련은 ‘몇 개 국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언기초위원회가 국제권리장전의 이행문제까지 고려할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또한 조약을 제쳐두고 선언부터 만들게 되자 차 떼고 포 떼고 추상적 원칙만을 나열하려는 시도가 거셌다. 애초에 국제 ‘조약’이 아닌 ‘선언’이라는 형태 자체가 이행장치는 떼어놓고 논의를 시작한 것인데, 자기에게 껄끄러운 문제는 최대한 간략화하거나 독자적인 조항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실랑이가 미소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그 결과물은 아름다운 합의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언에는 8개의 기권표가 있는데 그 주요 이유는 선언이 너무 앞서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성과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행장치를 제쳐둔 선언의 채택은 결과적으로는 선언의 장점이 됐다. 부담 없이 채택된 선언은 이후 2백여 개가 되는 국제인권선언, 국제조약, 선택의정서, 헌장 등의 탄생을 자극했고 많은 나라의 헌법에 인용됐다. 이행의 부담을 떨쳐놓고 만들었기에 어찌 보면 만들 수 있었던 선언이 불러온 결과이다. 하지만 국가들 편에서 겹겹의 안전장치를 갖춘 것이 국제인권조약들의 전형적인 양상인 점을 극복하는 것, 효과적인 인권의 이행장치를 만드는 것은 선언 이후에 계속돼온 과제이다.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이었나?

한국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상은 ‘보편(universal)' 인권선언이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언을 만들기 전에도,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논쟁이다.

하지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한계점은 있다. 나치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선언을 기초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1914년 레닌의 거친 계산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식민지에 살고 있고, 이를 합하면 세계 영토의 3/4에 해당’했다. 이 계산은 1940년대 말까지도 대략 들어맞았다. 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할 당시 유엔회원국의 수는 58개국이었고, 유엔인권위에 속한 국가는 18개국, 선언기초위원회는 처음 3개국에서 나중에 8개국이었다. 회원국 58개국 중에서 아메리카의 21개국이 전체의 36%, 16개국의 유럽이 27%, 14개국의 아시아가 24%, 4개국뿐인 아프리카는 겨우 6%를 차지했을 뿐이고, 3개국의 남태평양 제도가 5%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이 아주 불충분하게 대표됐음을 보여준다. 

선언 기초 과정에서 식민지 민중의 인권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는 주장은 식민지 종주국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식민 체제하에 사는 민족들 속에 생겨난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전혀 모른다”는 비난과 그에 대한 반발 끝에 선언에는 ‘식민지’라는 표현이 아닌 ‘비자치지역,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라는 에둘린 표현이 등장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인권이 보편적인 위치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실재와 모순된다”고 비판한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유엔이 창설한 회의는 서구에 의해 지배됐고, 세계인권선언은 대부분의 3세계 국가들이 여전히 식민통치하에 있을 때 채택”됐으니 선언은 “제한된 적용성”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 되던 해에 유엔회원국 수는 채택 당시보다 3배가 늘어났다. 이들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 요구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느냐 아니냐가 오늘날 선언의 적용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또한 선언을 기초할 당시의 58개국에만 국한한다 할지라도 그들 간의 차이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37개국이 기독교전통을 배경으로 했고 11개국이 이슬람, 6개국이 사회주의, 4개국이 불교를 배경으로 했다. 서로 다른 문화․종교․경제․정치 체제 속에서 수용될 만한 답을 찾는 일은 ‘막연하지 않게, 하지만 모든 체제를 포괄할 정도로 유연하게’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 조건은 오늘날 우리가 선언을 읽을 때 써야 하는 안경일지도 모른다.


진보적 선언은 거짓 희망을 불어넣는다?

세계인권선언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다. 전후의 사회경제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권, 사회보장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반영하면서는 ‘급진’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극히 신중을 기했고, 여성이나 가족생활에 관련된 내용에서는 보수적 사회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조약기초과정을 보면 조금 ‘센’ 의견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말자’며 제지하는 의견이 강력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수정돼야 할 점이 많고 실제로 이후의 국제조약에서는 변화된 내용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성차별적 언어가 있다. 1조에는 ‘형제애의 정신으로’라는 표현이 나오고 노동자와 가족생활에 대해서는 노동자를 남성형으로만 지칭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한 가족의 임금을 남성가장이 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의 지적으로 성차별적 언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하는 초안에 대해 여기서의 사람(men)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에 관한 역사적 반영이기 때문에 고치자는 제안조차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뜸을 들여서야 “모든 사람”(human beings)이 되었다. 또한 사형제 폐지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인정 등의 새로운 제안들은 깊이 논의되지 않았다.


인권은 액자 밖으로 뛰쳐나온다

사람들은 간직하고 싶은 좋은 것은 좋은 액자에 넣어두는 습관이 있다. 그럼 인권은 어떨까? 좋은 액자에 넣어 두고 우러러볼 수 있는 그런 것일까? 물론 세계인권선언처럼 일종의 액자에 담긴 인권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인권은 그 속에 얌전히 있지 않고 뛰쳐나오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규범이 무시하고 있는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이 언제나 그 규범을 돌파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권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세계인권선언에서 주요논쟁이 벌어진 조항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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