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6년 2월 24일 인권하루소식 제2998호>

원칙과 현실 사이

19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아동권리협약은 34, 35, 36조에 걸쳐 아동에게 해로운 모든 측면·모든 형태의 착취로부터의 아동 보호를 말하고 있다. 특히 34조는 '성착취'와 '성학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말만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아동에게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됐다. 그만큼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새로운 말이 '상업적 아동 성착취'로서 여기에는 아동 성매매, 아동 포르노그라피, 아동 인신매매, 아동섹스관광 등이 포함된다. 199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상업적 아동 성착취' 문제를 전면에 대두시켰다. 이 흐름을 이어받아 2000년 5월 유엔총회는 아동권리협약에 관한 의정서를 채택했는데, 이것이 '아동매매, 아동 성매매 및 아동포르노그라피에 관한 선택의정서'이다. 이 의정서는 아동권리협약 34조를 보다 실질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04년 9월에 이 의정서를 비준하여 가입국이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원칙들이 있지만 사실상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간단한 상식을 되새김질 하는 것일 뿐이다. 아동이 성학대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어디서건 뛰어놀 수 있고, 가족과 이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받고 훈련받으며, 합당한 보상과 치료와 회복을 도모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원칙과는 다른 현실이 잔인하게 펼쳐지고 있다. 아동인권단체들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계속하고 있다:

인권침해는 우선 드러나야 하는데, 아동에 대한 성학대는 감춰지고 보고되지 않는 형태의 폭력이다.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낙인과 수치심 때문에 많은 아동은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과 친밀한 가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학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성학대에 대해 말한 아동은 흔히 비난받거나 아이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어른에게 무시되거나 학대자에게 위협받거나 매수당한다. 아동에 대한 성학대는 학교, 가정, 지역사회, 쉼터, 종교 및 기타의 시설, 작업장, 경찰서, 감옥 등을 가리지 않고 평화시에나 전쟁시에나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학대자들은 사회 계층과 집단을 불문하고 나타나며 통계적으로는 남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학대자의 대다수는 아동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18세 미만의 아동이 가해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피해자인 아동은 심리적, 신체적 상처를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나 어른들에 의해서 그리고 적절한 지원이 제공되지 않음으로 인해 또다시 더 깊게 상처받는다.

이에 대해 국제인권기준들이 권고하는 바는 아동 성학대 문제를 뿌리부터 다루라는 것이다. 뿌리라 함은 성폭력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고 수용하는 분위기,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인 구조, 어른과 아동간의 불평등한 관계, 이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런 구조들이 학대자를 대담하게 만들고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성학대에 대한 개입은 철저하게 아동에게 귀 기울이고 아동에게 맞는 친근한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책임자가 분명해야 한다.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만 정부가 1차적인 책임을 지고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내용들은 아래와 같이 선택의정서에 상세히 나와 있는 대로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요즘 뜨겁게 지펴지는 대책과 그에 따른 반응들은 범인을 확실히 잡아놓고 족치는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만연된 성폭력의 범인을 잡을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범인은 성별과 나이로 사람대접을 달리하는 우리 체제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수치심의 돌을 던지는 수많은 공범들과 함께 하고 있으며, 입으론 대책을 마련해도 실현할 인력이나 시설도 갖고 있지 못하고, 피해자들의 치료와 회복을 도모하는데는 거의 자원을 투여하고 있지 않는 인색함 속에 있다. 어떤 법학자는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형벌 보다는 사법제도라고 한 적이 있다.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두려워하는 사법제도나 기타의 환경 속에서 범인이 제대로 보고 되거나 잡히기 어렵다. 따라서 제대로 처벌하기도 어렵다. 인권침해는 처벌돼야 한다. 그러나 제대로 처벌하는 것과 인권의 보루가 되는 원칙들을 훼손하면서 엄벌과 특단의 조치를 남발하는 것은 다르다. 또한 인권보장은 형벌로 실현되지도 않는다. 아동을 잘 이해하여 대처하는 사람들도 양성하고 시설도 만들고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당장 눈길을 끄는 충격요법이나 만병통치약에 대한 선전은 병에 대한 치료노력을 부실하게 할 뿐이다. 정부가 책임져야 할 많은 일들을 그것으로 면피하게 해줄 위험성도 다분하다. 그간 성폭력전문단체 등이 꾸준히 제기해왔으나 외면돼왔던 것들을 다 끄집어 내놓고 총체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따로따로 경쟁적으로 급조한 대책을 내놓지 말고 아동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모든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길 바란다.

유엔아동권리협약(1989) 제34조 성적 착취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성적 착취와 성적 학대로부터 아동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사국은 특히 다음의 사항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적절한 국내적, 양국간, 다국간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가. 아동을 여하한 위법한 성적 활동에 종사하도록 유인하거나 강제하는 행위
나. 아동을 성매매나 기타 위법한 성적 활동에 착취적으로 이용하는 행위
다. 아동을 외설스러운 공연 및 자료에 착취적으로 이용하는 행위


아동의 상업적인 성적 착취에 반대하는 제1차 스톡홀름 세계회의 선언문과 행동과제(1996)

3. 모든 아동은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아동 성착취나 성학대로부터 온전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국가는 아동을 아동 성착취나 성학대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피해아동에 대해서는 정신적, 육체적 회복과 사회로의 복귀를 장려할 의무가 있다.
7. …부패와 결탁, 법의 부재 또는 부적절한 법률들, 느슨한 법 집행, 그리고 아동에게 미치는 해로운 충격에 대한 법집행자들의 인식부족, 이 모두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아동에 대한 상업적 성착취를 유도하는 요인들이다. 이는 개인의 행위나 소규모(예컨대 가족이나 안면있는 자들) 또는 대규모(예컨대 범죄망)로 조직된 행위를 수반한다.
8. 사회 모든 계층의 광범위한 개인 및 집단들이 이러한 착취 실행에 기여하고 있다. 착취자의 부류에는 중개인들, 가족구성원들, 비즈니스 부문, 서비스 공급자, 수요자, 지역사회의 지도자, 공무원이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가 무관심과 피해 아동이 겪는 해로운 결과에 대한 무지, 혹은 아동을 경제적 상품으로 간주하는 태도와 가치판단의 영속화를 통하여 착취에 기여할 수 있다.


아동매매, 아동성매매 및 아동포르노그라피에 관한 선택의정서(2000)

제8조 1. 당사국은 형사절차의 모든 단계에서 이 의정서에 의하여 금지된 행위의 피해자인 아동의 권리 및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조치에 의한다.
(a) 아동 피해자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아동증인에 대한 특별조치를 포함하여 이들의 특별한 필요를 인정하는 조치를 채택한다.
(b) 아동 피해자에게 그의 권리, 역할과 그 범위, 절차의 개시기간, 진행 및 그 사건의 처분을 통지한다.
(c) 아동 피해자의 개인적 이해가 영향받는 절차에서는 국내법의 절차규칙에 일치되는 방식으로 그의 견해, 필요 및 관심사항이 제시되고 고려되도록 허용한다.
(d) 법절차 전반을 통하여 아동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e) 아동 피해자의 사생활 및 신원을 적절히 보호하고, 아동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질 수 있는 정보의 부적절한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국내법에 따라 취한다.
(f) 필요한 경우 아동 피해자는 물론 그의 가족 및 이들을 위한 증인에 대한 위협 및 보복으로부터 안전조치를 제공한다.
(g) 사건의 처리 및 아동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부여하는 명령이나 결정의 집행에 있어서 불필요한 지연을 막는다.

3. 당사국은 이 의정서에 기술된 범죄의 피해자인 아동을 형사사법제도를 통하여 다룰 때 아동의 최선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4. 당사국은 이 의정서상 금지된 범죄의 피해자들과 함께 작업하는 이들에 대하여는 적절한 훈련, 특히 법률적 및 심리적 훈련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5. 당사국은 필요한 경우 이러한 범죄의 피해자들의 예방 및 또는 보호와 재활에 관여하는 자 및 또는 조직의 안전과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채택하여야 한다.
6. 이 조의 어떠한 내용도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재판을 받을 피고인의 권리를 해하거나 이와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제9조 1. 당사국은 이 의정서에 규정된 범죄들을 예방하기 위한 법률, 행정조치, 사회정책 및 계획을 채택 내지 강화, 시행 및 보급하여야 한다. 이러한 조치에 특히 취약한 아동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이 기울여져야 한다.
2. 당사국은 모든 적절한 수단에 의한 정보제공, 교육 및 훈련을 통하여 이 의정서에 규정된 범죄의 예방조치 및 그 악영향에 대하여 아동을 포함한 일반대중의 인식을 제고시켜야 한다. 이 조의 의무를 이행할 때 당사국은 국제적 차원의 것을 포함하여 정보제공, 교육 및 훈련 계획에 대한 공동체, 특히 아동 및 아동피해자들의 참여를 장려하여야 한다.
3. 당사국은 이러한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이들의 사회로의 완전한 재통합 및 완전한 육체적 및 심리적 회복을 포함하여 모든 적절한 지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제10조 1. 당사국은 아동매매, 아동성매매, 아동포르노그라피 및 아동 섹스관광과 관련된 행위에 책임 있는 자들을 예방, 적발, 조사, 소추 및 처벌을 위하여 다자간, 지역적 및 양자간 협정을 통한 국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당사국은 또한 당국, 국내 및 국제적 비정부기구 그리고 국제기구 사이의 국제적 협력 및 조정을 증진시켜야 한다.

 

[류은숙] <2006년 2월 24일 인권하루소식 제2998호> 

[류은숙] <2006년 2월 9일 인권하루소식 제2988호>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원정을 위해 산을 넘자며 힘들게 산꼭대기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 나폴레옹이 "이 산이 아닌가벼", "저 산이여" 라는 말을 반복하여 허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무리 중의 한 명이 "저이는 나폴레옹이 아닌가벼"라고 하는 것이 이 우스갯소리의 절정이다. 글로 쓰니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런 얘기를 늘어 놓은 이유는 만약 "이 산이 아닌가벼", "저이는 나폴레옹이 아닌가벼"라는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아예 갈 수 없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을 그 목적지로 착각하거나 그런 것으로 속을 것이다.

일정한 결과를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탐구하라 하는 건 자유일 수 없다. 목적지가 '자유'라면 거기에 가는 길도 수도 없이 끝도 없이 '아닌가봐'를 생각하고 내뱉을 수 있는 자유여야 한다. '아닌가봐'라는 생각을 감히 꿈이라도 꾸거나 입도 벙긋해서는 안된다고 하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갖고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인권 중의 인권이요, 인권의 초석이다.

이런 인권과 가장 흔하고 강력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국가안보이다. 정부들이란 내외적으로 욕먹는 걸 싫어하고 자신만의 행동과 그에 대한 정보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법을 잘 지키는 시민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어한다. 악질적인 인권침해 행위의 상당수가 이런 명분으로 저질러져 왔다. 하지만 인권이 무조건 국가안보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안보란 오히려 자유를 통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당한 국가안보를 추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정부에 대한 감시를 제대로 하려면 사상·양심·표현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가짜 국가안보에 맞서 진짜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것 자체가 여타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국가안보의 외피를 입은 쪽이 '불순'하다고 두들겨대는 생각과 행동에 '정수'가 있을 가능성을 봉쇄한 사회는 스스로 안전판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안보는 그 단어를 꺼내드는 것으로 만사형통인 카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만져보고 두드려봐야 할 탐구 대상이다. 그리고 아무 때나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 엄밀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서 신중하게 꺼내들어야 할 카드라야 한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런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95년 10월 1일, '19조'(Article 19;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세계인권선언 19조를 말함)라는 국제단체가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위트와터라란드(Witwaterarand) 법학연구센터의 협조로 마련한 자리에 유엔, 유럽연합, 미주 및 아프리카 연합기구 등의 국가안보와 인권에 관한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국제인권법, 지역법, 각국의 법원의 판결에 반영된 기준, 국제사회에서 승인된 일반원칙들에 기초하여 이 원칙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한 최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절한' 규정을 담았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준이다.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많은 국가들에서 '현실'의 법적 원칙으로 자리 잡은 기준이다.

여기서 기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금기시 여기는 '정부를 바꾸자는 표현, 국가나 국기를 모욕하는 표현, 징병반대, 전쟁반대' 등의 표현(원칙 7)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이다. 이런 걸 다 제하고도 제약할 의사표현이 있다할 경우라도 정부가 지켜야 할 전제조건과 정부가 져야 할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원칙 10에 따르면 제3자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국가의 의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국가안보론을 주축으로 주류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권력과 돈이 단합하여 국가안보를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의 탄압에 이용한다고 하자. 아무리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지위라 할지라도 교수 연구자는 타인이 설치한 연구 교육기관에 급여를 받고 고용된 사람이다. 연구자의 사상·견해 등이 고용주인 대학이사회나 관리기관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해고된다면 진리 탐구에 종사할 수 없다. 연구가 나홀로 공부가 아니라 엄청난 자원이 요구되는 오늘날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일이다. 권력과 재력에 의해 압박을 받아 대학에서의 진리탐구가 답답한 상태에 빠지면, 사회에서의 일반 시민이 갖는 비판의 자유, 기성관념에 도전할 자유 또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대학은 특권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일반시민의 자유의 존립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위해 투쟁할 의무를 져야 하는 곳이다. 대학은 이미 권력과 부로 가는 길이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걸 개선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지금, 오히려 구시대적인 통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행사한다면 인류의 소중한 인권옹호라는 대의에서 대학이 수행할 의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일반적인 정서에 기초하여 국가안보는 현실에서 힘센 쪽을 정의로 둔갑시킨다. 싫어할 자유조차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모르는 것일까? 내가 싫어하는 생각과 표현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안보가 설쳐대는 것을 방치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것도 동시에 억압받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걸까?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

(THE JOHANNESBURG PRINCIPLES ON NATIONAL SECURITY FREEDOM OF EXPRESSION AND ACCESS TO INFORMATION)

(전략)

Ⅰ. 총칙(General Principles)


원칙 1:

⒜ 모든 사람은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권리를 보유한다.

⒝ 모든 사람은 모든 종류의 정보와 생각을 각자의 선택에 따라 말, 문서, 인쇄물, 예술형식 또는 어떠한 매체의 형식으로든지 국경을 넘어 추구하고 수용하고 전달할 표현의 자유를 가진다.

⒞ ⒝항에 제시된 권리의 실현은 국제법에 확립된 바와 같이 국가안전보장을 포함한 특별한 근거에 기해 규제될 수 있다.

⒟ 국가안보를 이유로 하는 표현과 정보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정부가 그 규제가 실정법에 명문화되어 있고 민주사회에서 정당한 국가안보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가해질 수 없다. 규제의 유효성에 대한 입증책임은 정부에 있다.


원칙 1.1 : 법적 명문화(Prescribed by law)

⒜ 표현과 정보에 관한 모든 규제는 법에 명문화되어 있어야 한다.

⒝ 규제의 타당성에 대한 독립된 법원 또는 심판기관에 의한 신속하고 전면적이며 효과적인 사법적 심사를 포함하여 규제의 남용에 대한 충분한 법적 방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원칙 1.2 정당한 국가안보이익의 보장(Protection of Legitimate National Security Interest)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표현과 정보에 대한 모든 규제는 정당한 국가안보이익보장에의 순수한 의도와 명시적 효과가 있어야 한다.



원칙 1.3 민주사회에서의 필요성(Necessary in a democratic society)

표현 또는 정보의 자유에 대해 정당한 국가안보이익보장에 필요한 규제를 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다음을 제시해야 한다:

⒜ 특정사안에 대한 표현이나 정보가 정당한 국가안보에 심각한 침해를 가져올 것;

⒝ 부과된 규제가 국가안보이익보장을 위해 가능한 최소한의 제한수단일 것; 그리고

⒞ 규제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될 것,


원칙 2: 정당한 국가안보이익(Legitimate National Security Interest)

⒜ 국가안보를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규제는 그 순수한 의도와 명시적 효과가 무력사용 또는 위협에 맞서 국가의 존립과 영역적 통합성을 보장하기 위함이거나, 외적으로는 군사적 위협이나 내부적으로는 폭력적 정부전복에의 선동과 같은 위협 또는 무력사용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 외에는 정당화되지 아니한다.

⒝ 특히 국가안보를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규제는 그 순수한 의도와 명시적 효과가, 예컨대 정치적 위기나 부정에 대한 폭로로부터 정부를 두둔하려거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거나, 국가공공기관의 기능에 대한 정보를 은폐하려거나,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과 같이 국가안보와 무관한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일 경우에는 정당화되지 아니한다.


원칙3: 비상사태(States of Emergency)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비상사태에, 국제법과 지역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경우, 국가는 엄격하게 상황의 긴급성이 요하는 정도까지, 정부의 여타 국제법상 의무와 충돌하지 않고, 또 않는 한에서 표현과 정보의 자유에 대해 규제를 가할 수 있다.


원칙4: 차별의 금지(Prohibition of Discrimination)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안보에 근거한 표현과 정보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태생, 국적, 재산, 출생 여타 지위에 근거한 차별과 관련되어서는 아니된다.


Ⅱ.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Restrictions on freedom of expression)

원칙5: 의견의 보장(Protection of Opinion)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아니된다.


원칙6: 폭력선동(Incitement to violence)

원칙 15와 16에 따라 다음의 경우임을 명시할 수 있을 때 정부는 표현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서 처벌할 수 있다. 즉

⒜ 표현이 급박한 폭력을 선동할 의도인 경우

⒝ 그와 같은 폭력을 유발하리라 여겨지는 경우

⒞ 그와 같은 폭력의 발생 또는 발생조짐과 표현사이에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


원칙7: 보장되는 표현(Protected Expression)

⒜ 원칙 15와 16에 따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된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은 다음의 예를 포함하며 이에 한정되지 아니한다.

(ⅰ) 정부정책 또는 정부자체의 비폭력적 교체를 옹호하는 표현

(ⅱ) 국가, 국가의 상징, 국민, 정부, 정부기관 내지 공무원(Public Officials) 또는 외국, 외국의 상징, 국민, 정부, 정부기관 내지 공무원에 대한 비판 또는 모욕적 표현

(ⅲ) 종교, 양심 또는 신념에 따른 징병, 특정분쟁, 국제분쟁해결을 위한 무력사용 또는 무력위협에 대한 반대표현 또는 반대에 대한 옹호적 표현

(ⅳ) 국제적 인권기준 내지 국제인권법에 대한 침해주장사실의 개인청원(communicating information)에 관련된 표현

⒝ 누구도 비판이나 모욕이 폭력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아닌 한, 국민, 국가 내지 국가의 상징, 정부, 정부기관이나 공무원 또는 외국국민, 외국 또는 국가의 상징, 정부, 정부기관 내지 공무원을 비판하거나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벌되지 아니한다.


원칙8: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행동의 단순한 선전(Mere Publicity of Activities that may threaten National Security)

단지 정부가 국가안보 기타 이익을 위협한 것으로 선언한 단체에 관해서 또는 그 단체에 의해 발표된 정보를 전달했다는 이유만으로 표현이 금지되거나 처벌되어서는 아니된다.


원칙9: 소수언어 내지 기타언어의 사용(Use of Minority or Other Language)

문서에 의한 표현 내지 말에 의한 표현이 결코 특정언어, 특히 소수민족언어라는 이유만으로 금지되어서는 아니된다.


원칙10: 표현에 대한 제삼자의 부당한 침해(Unlawful Interference with Expression by third Parties)

정부는 정부나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표현일지라도 사적 단체나 개인이 표현의 자유의 평화적인 행사를 불법적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합리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 특히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부인하기 위한 불법적 행동을 규제하고 이에 책임있는 자를 수사하고 사법처리할 의무가 있다.

(후략)

 

 

[류은숙] <2006년 2월 9일 인권하루소식 제2988호> 

[류은숙] <2006년 1월 20일 인권하루소식 제2976호>

 

이 원칙은 일명 '파리 원칙'(Paris principles)으로 알려져 있는데 1991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가인권기구 국제 워크숍에서 제정되고 1993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원칙이다. 유엔이 국가인권기구라는 제도를 얘기한 것은 일찌감치 1946년의 일이었다.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 등이 기본적인 문서 역할을 하다가, 여러 나라 국가인권기구들의 경험 축적을 기반으로 다시 집대성한 것이 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11월에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설치 과정에서 국가인권위를 일부 국가기관의 부속물로 만들거나 그 권한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인권단체들은 4년여 동안 이에 맞서면서 두 차례의 폭염과 혹한 속에서의 단식농성으로 국가인권위의 제대로 된 설치를 요구했다. 국제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아쉬움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비빌 언덕이 되라는 기대를 갖고 국가인권위의 출범을 환영했다. 그리고 국가기관을 감시·견제하는 국가인권위의 활동을 감시·견제해온 것이 인권단체들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란 걸 내놓은 요즘 비난의 폭죽놀이가 벌어지고 있다. 세금을 축낸다느니, 무국적 기관이라느니, 헌정질서를 무시한다느니, 산업현장에 갈등과 혼란을 부추긴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행동이 아니라 단지 입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부 언론과 정치인, 재계의 면박을 받기 일쑤인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처지이다. 더 적극적인 국가인권위의 행동에 목말라하는 인권피해자들의 편에서 보면 국가인권위의 존재, 아니 인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한때 유행하던 우스갯소리로 약국에 가서 당근을 달라고 하는 토끼 이야기가 있다. 국가인권위에 대한 공격에 핏대를 올리는 이들을 보면 그 토끼가 떠오른다. 국가인권위가 뭔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역할을 바꾸고 호통을 치고 있다. 핏대를 올리는 자신들을 지켜보기 위한 감시견으로서 국가인권위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감시견이 자기 바지자락을 물었다고 항의하는 꼴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에 따라 하나씩 살펴보자.

국가인권위는 국가 내부의 '반성문' 쓰는 장치이다.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이 실제로는 인권의 주요 가해자인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기관을 잘 살펴보고 반성문 쓰게 하고 대안을 만들라고 하는 장치이다. 민간 인권단체들이 분명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인권보장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민간이 할 역할은 역할이고, 국가 자신의 임무인 인권보장의 일을 똑바로 하라고 국가기구를 만들 것을 국제사회가 합의한 것이다. 자기 내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국가인권위를 국가기구로 만들더라도 다른 어떤 국가기구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예산을 깎겠다느니 없애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짓이다.

국내의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설치될지라도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규범을 자국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국내법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을 활동의 틀로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권위에게 국내법을 무시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권에는 실정법이 아우르기 힘든 회색영역이 존재한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법규정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는 인권상황이 존재한다. 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런 국가인권위에 법질서 훼손을 운운하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다.

진보단체 쪽의 의견만 반영해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 문제라 하는데, 그럼 국가인권위가 대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과 친해야 할까? 인권피해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인권단체와 가까워야 할까? 민간 인권단체와의 협력은 국가인권위가 지켜가야 할 기본적인 행동양식이다. 인권단체와의 협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국가인권위의 타락을 방치하는 꼴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구를 내부에서 감시·견제하는 장치이고, 인권단체들은 여타 국가기구들과 국가인권위를 감시·견제한다. 인권단체들이야말로 국가인권위를 향해 항상 따가운 회초리를 준비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입만 열면 '선진국' 수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인권을 빼놓고 달리겠다 하니 그 차에 승차할 수는 없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을 기업이미지 광고의 화려한 영상이 악몽으로 보이고, 화려한 정부 정책의 청사진이 누렇게 보이는 것은 새로 떠오르는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오래전에 인정되고 확인·재확인돼온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인들은 인권 감시견을 인권가해자가 걷어차는 현실을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Principles relating to the status of national institutions, 유엔총회 결의안 48/134, 주요내용 요약)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는 필요한 광범위한 권한을 확보해야 하며, 이러한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의 보호 및 향상을 위한 자문, 인권을 위한 교육과 홍보, 국제협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및 구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사안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으려면, 헌법이나 법률을 통해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위와 권한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정부나 여타 공공기관, 사적 단체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한과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가인권기구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설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업무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절차규칙에 따라 일상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제공 요청 등 다른 기관, 특히 정부기관의 협조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 독립성
-국가인권기구는 활동의 물적 기반이 되는 재정을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안정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직접 국회에 제출, 승인을 요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정부부처의 예산에 연계되어서는 안된다.

[운영방식]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관한 모든 사안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회의체계의 구성이나 소집 등 운영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의견이나 권고사항을 직접 또는 언론기관을 통하여 널리 알리고 여론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특히 취약집단이나 특정 지역의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데 헌신하고 있는 민간단체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준사법적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개별적인 인권침해에 관한 진정을 접수받아 신속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구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행위로 보기 힘든 이른바 '회색영역'의 인권침해문제를 조사하고 구제할 수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보장받아야 한다. 조사에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청문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모든 정보나 문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조사결과 인권침해가 확인되었을 때에는 피해자에게 적절한 구제조치를 제공할 수 있는 결정의 효력을 보장받아야 한다.

 

[류은숙] <2006년 1월 20일 인권하루소식 제2976호> 

[류은숙] <2005년 12월 25일 제2964호>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이 돌아가신 잔인한 겨울이다. 두 분 다 지난달 15일에 열린 농민대회에 참석했다 경찰폭력에 변을 당했다. '뇌손상', '전신마비 후 사경을 헤매다 운명'이라는 짧디 짧은 사망경과에 담기지 못한 폭력의 실상을 밝히는 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 등이 꽁꽁 얼어붙어있다. 현장 지휘자 정도 갈아 치우고 끝내려는 당국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평생 갈던 땅과 같은 골이 패인 두 분의 영정은 이런 사태를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을 뿐이다.

멀리는 일제시대 가깝게는 군사독재 시대에 권력의 하수인으로 지탄받아온 경찰은 '인권경찰'을 표방하는 오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달라진 바가 없냐하면 합법이 아닌 공권력의 행사는 곧 범죄이며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돼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생명을 빼앗았는데, 즉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법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장례도 치르고 있지 못한 두 분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소위 인권경찰을 표방한다는 우리 경찰을 독려하기 위함인지 유엔에서는 '경찰이 지켜야 할 인권 기준과 실천'이라는 지침서를 2004년 발간했다.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20여개의 국제인권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지침서에는 경찰이 존중해야 할 인권과 그것을 위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등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60여 쪽에 달하는 내용 중에서 경찰의 폭력 사용에 대한 부분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생명권에 대하여는 어떠한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다" 했는데 두 명이나 생명을 잃었다. 경찰 자신의 방어를 위해 사용돼야 할 방패가 "보증되지 않은 상해, 손상 또는 위험을 야기하는 무기"로 돌변했다. "불법적인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에겐 면책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농민 때려잡는 일에 동원돼야했던 경찰은 알고 있었을까? "상급자는 자신들의 명령 하에 있는 경찰의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하고 "모든 경찰은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책임지는 경찰이 없다. 문제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 특정 시기마다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노동자, 농민 등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에 이미 폭력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경찰 폭력은 물리적 상처일 뿐 아니라 이들이 응당 보장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권침해이다.

경찰 폭력이 문제될 때마다 '과도한 물리력 행사'에 대한 '유감'표시로 넘어가면서 한편에선 현장경찰관의 고충을 헤아려달라고 읍소한다. 경찰 처우의 개선을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경찰이 안전한 상황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전체 시민의 안정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표시로 자기 잘못을 넘기려는 경찰의 존재는 시민에겐 위험하고 경찰 자신에겐 독이 된다. 처벌 받을 건 받고 대우 받을 건 대우 받아라.

이 지침서 앞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법 집행 공무원은 항상 그들에게 법으로 부과된 의무에 충실해야"하며 "그 직업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책임성으로 일관해야"한다고 말이다. △허준영 경찰청장 파면 △현장지휘 책임자와 가해자의 구속 처벌 △서울경찰청 1기동단 해체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사과로 경찰의 충실함과 책임성을 확인하고 싶다.

경찰이 지켜야 할 인권 기준과 실천-일부발췌(유엔, 2004)

○ 모든 경찰관은 "상부 명령에 대한 복종"이 불법적 살해나 고문 같은 심각한 인권침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 고문이나 여타의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는 절대적으로 금지돼있다.
○ 현직 연수 또는 사회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갈등해결 기술을 공부하라.
○ 비폭력적 수단이 우선적으로 시도돼야 한다.
○ 폭력은 오직 엄격하게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돼야 한다.
○ 폭력은 적법한 법 집행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 불법적인 폭력 사용에는 어떠한 예외나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 폭력의 사용은 언제나 적법한 목적에 비례하는 것이어야 한다.
○ 폭력 사용에는 억제력이 행사돼야 한다.
○ 손상과 상해는 최소화돼야 한다.
○ 모든 경찰관은 차별화된 폭력 사용을 위한 다양한 수단의 이용을 훈련받아야 한다.
○ 모든 경찰관은 비폭력적 수단의 이용을 훈련받아야 한다.
○ 폭력 또는 무기를 사용한 모든 사건은 상부에 보고돼야 하고 조사돼야 한다.
○ 상급자가 폭력 남용을 알았거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음에도 구체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상급자는 자신들의 명령 하에 있는 경찰의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 불법적인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에겐 면책이 주어져야 한다.
○ 이러한 규범을 침해한 경찰관은 상급자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 생명권(기타 나열된 권리 생략)에 대하여는 어떠한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다.
○ 자유로운 표현, 집회, 결사 또는 이동의 권리에 대해서는 어떠한 불필요한 제한도 부과될 수 없다.
○ 의견의 자유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한도 부과될 수 없다.
○ 다치고 충격을 입은 모든 사람은 즉각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 상황이 불필요하게 격화되지 않게끔 불법적이라 하더라도 평화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은 집회들을 관용하라.
○ 군중을 해산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항상 명확한 탈출통로를 남겨둬라.
○ 군중을 한마음의 대중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개인들의 집단으로 다뤄라.
○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전술을 피하라.
○ 평화롭고 자유로운 집회에 대한 존중에 분명히 입각한 명령을 내려라.
○ 보증되지 않은 상해, 손상 또는 위험을 야기하는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라.

 

 

[류은숙] <2005년 12월 25일 제2964호>

[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다가오는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1948년 이날의 세계인권선언 채택을 기념하며 거기 담긴 약속의 실현을 온 인류가 다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권의 날을 눈앞에 둔 지금, 서울의 거리에는 스산한 바람만 몰아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선 소위 '북한인권대회'라는 것이 열리고 있고 이라크파병재연장동의안의 국회통과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보장의 필수조건인 평화와 정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연일 죽어나가고 있고 매서운 바람이 가난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할퀴고 있다. 이들을 위한 인권대회는 어디에 있고 언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참담한 물음 속에 우리보다 앞서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임을 절감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킹 목사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갈채를 보냈던 사람들이 그의 생애 말년에는 그를 외면한다. 그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 백인 자유주의자들, 유명 흑인 인사들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그는 "자신의 양심이 다른 선택을 허락지 않기 때문에" 발언하기 시작한다.

1967년 4월 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의 "베트남 너머"라는 연설을 통해 그는 미국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며 미국이 자국내의 불공정을 외면하고 세계 평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신의 저주와 분노가 떨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이 있은 지 꼭 1년 후인 1968년 4월 4일에 그는 암살당했다. 의문에 싸인 죽음이지만 그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싫어한 자들의 소행이라 여겨지고 있다.

양심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범죄의 증거가 속속 들어났는데도 파병연장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한반도 한복판에서 대북적대선동행위가 벌어지도록 좌시하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다. 인권을 빙자하여 무고한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을 학살한 이라크 침략전쟁의 당사자가 북한을 상대로 한반도 한복판에 와서 소위 인권대회를 갖는 것은 위선이다.

북한과 이라크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둘 다 인권을 빌미로 한 미국의 전쟁책동의 희생물이고, 그에 동조하는 세력은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이러한 선동에 동원하고 있다. 북한인권대회와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이 출현하고 있는 이 현상을 눈앞에 보는 듯이 킹 목사는 말하고 있다. 왜 우리가 이 둘에 대해 반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우리가 미국에서 전개해 오고 있는 시민권 투쟁 사이에는 아주 명백하면서도 알기 쉬운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의 시민권 투쟁은 빛나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그때는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통해서, 흑인과 백인을 불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 군대가 파병되면서, 저는 이 빈곤퇴치 프로그램이 마치 전쟁에 미쳐버린 사회의 정치적 노리개마냥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모험들이 일종의 마력을 지닌 파괴적인 흡혈귀처럼 사람들과 기술과 돈을 계속적으로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재활에 필요한 자금이나 에너지를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이 전쟁을 가난한 사람들의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에 반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인구의 나머지 집단들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비율이 맞지 않게 턱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싸우다 죽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을 8천 마일이나 떨어진 동남아시아로 보내, 그들에게 남서부 조지아나 동부 할렘 지역에서도 찾지 못했던 자유를 수호하라고 하고 있습니다.…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조종당하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인권을 송두리째 날려버린다. 경제제재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과 노인과 시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에너지를 비롯한 필수자원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총성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런 책동에 동원당하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북한인권대회를 위해 안락한 신라호텔에 머물고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했고 동시에 인권을 사랑했던 킹 목사의 말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대들이 북한적대정책을 선동하려고 쳐들이는 돈은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미국 시민들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다. 그대들이 외치는 북인권을 진정 위한다면 미국 정부의 반평화 공세를 중단시키는 일이 먼저이다. 당신 정부의 정책 때문에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다. 그대들이 주입시키고 싶은 자유는 '주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결권 존중과 안전보장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이라크에 침략군을 계속 두면서 재건을 말하지 말고 차라리 그 비용을 이라크인들이 재건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큰 폭력의 행사자인 바로 우리 정부를 향해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는, 흑인 거주 지역에서 억압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비판하는 저의 목소리를 결코 높일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들을 위해서, 이 정부를 위해서, 우리의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전 세계인들의 가장 깊은 희망을 파멸시키는 한, 미국의 영혼은 구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미국이 되리라'라고 결심한 우리는 저항과 반대의 길을 감으로써, 이 나라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힘없는 이들, 발언권이 없는 이들, 우리 나라에 의해 희생된 이들, 이 나라가 '적'이라고 부르는 이들, 인간이 기록한 어떠한 문서에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말하고자 저는 이곳에 온 것입니다."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스스로 선언한 것은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도 '자결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예속 하에서 참된 인권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 베트남의 자결권을 부인했듯이 오늘날 이라크와 북한의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베트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자신들의 선언에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식민지를 다시 정복하려는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베트남인들이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고,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 세계의 정서에 치명적인 독을 입혀왔던 서구의 오만함의 희생자로 또다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베트남인들에게 그들이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했습니다.…재식민지화하려는 이러한 비극적 시도에 따르는 거의 모든 비용을 우리는 머지않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진실한 인권 기준은 상대방에게 적용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약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선'으로 주장하는 것은 지배와 다를 바 없다. 공동선의 관점에서 자신을 먼저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의 주장이다. 상대방의 차이에 대해서 '존중' 수준까지는 못가더라도 적어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 인권대화와 인권증진노력의 출발점이다.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지 않는 인권은 힘의 횡포요, 강자의 위선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비폭력적 공존이냐? 폭력적 공멸이냐? 우리는 과거의 우유부단함을 떨치고 행동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평화와 함께,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개발도상국들에 있어서의 정의의 확립을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힘, 도덕성이 결여된 힘,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힘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길고 어둡고 수치스러운 시간의 복도를 따라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불협화음들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바꿔 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미국과 전 세계에서 정의가 홍수처럼 흐르고 공의가 힘찬 물살로 흐르는 그날을, 우리는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 ◎ 이 연설의 전문은 http://www.stanford.edu/group/King/publications/speeches/Beyond_Vietnam.pdf (영어)에서 볼 수 있다. 한국어판은 위드북스에서 출판된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에 실려있다.

 

[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류은숙] <2005년 11월 25일 인권하루소식 제2944호> 

 

'식량주권'이란 말이 절실하게 겨울 공기를 가르고 있다. 주권 없는 식민지 주민마냥 내몰리던 농민들이 하나 둘씩 생명을 잃고 있다.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이란 것이 로마에서 열렸다. 명목상 '만인을 위한 식량안보 달성'과 '2015년까지 영양부족인구 반감'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농산물 시장 개방을 염두에 둔 식량수출국들과 시장가격으로 평가될 수 없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도국들간의 갈등은 어정쩡하게 봉합됐다.

5년 후인 2002년, 또 한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계정상들은 그동안 뭘 했나를 점검했다. 원래 세웠던 목표대로라면 2015년까지 세계 8억 기아인구를 절반인 4억으로 줄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매년 2천2백만 명씩 기아인구가 감소돼야 했다. 하지만 상황을 평가하니 진전은 형편없어서 이대로 나가다간 45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됐다. 세계 전체 식량공급은 충분한데 나라간의 이동과 분배가 자유롭지 못하니 자유무역을 하면 된다던 정책이 엉터리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릴 때 전 세계 농민들과 식량권을 옹호하는 민간단체들도 한데 모였다. 이들은 세계정상들과는 다른 것을 꿈꾸었다. 여기서 논의된 개념이 '식량주권'이었다. 오늘 읽어볼 선언문은 농산물 자유무역에 맞선 식량주권에 대한 선포이다. '식량주권'은 우리 농민들만이 외치는 배타적 구호가 아니다. 농토와 전통적 농사방식을 빼앗기고 쫓겨나며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아에 시달리는 세계의 농민들, 초국적 기업농에게 식량권을 내맡긴 정부하의 국민들, 자기 먹거리와 고유의 풍경, 다양하다 못해 풍요한 문화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세계무역기구(WTO)가 먹으라는 것을 먹어야 하는 소비자들의 공통구호인 것이다.

이 선언문에 나타난 대로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다. 자유무역이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자살하는 농민들이 속출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자기 이익을 가장 잘 판단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며 개인의 자유에 모든 걸 내맡기자던 자유주의자들은 왜 자기 이익을 가장 잘 판단하고 있는 농민자신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선택의 자유를 그리도 강조하던 자들이 우리 땅에서 유전자 조작되지 않은 종자로 안전하게 가꾼 음식을 먹고 싶은 우리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일까? 몇몇 초국적 기업농의 손에 우리의 식량권을 내맡기고 싶지 않은데 왜 무역자유화라는 유령선에 강제 승선해야 하는가?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수출하려면 농사는 짓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은 누가 누굴 위해 만든 것인가? 그런 게임의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게임에 참가해야만 한다는 법이 법이라면 거부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돈'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가치이고 국가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틀 속에서 농민들을 비난하지 마라. 농민들은 '돈'이 아닌 '생명'을 가치로 생각하는 틀 속에서 싸우고 있다.

평생 생명을 심고 가꾸는 일을 한 탓에 자신의 생명을 잃은 농민들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식량주권: 모두의 권리-식량주권을 지지하는 민간/시민사회단체 포럼 성명(2002.6.14)-(Food Sovereignty: A Right For All-Political Statement of the NGO/CSO Forum for Food Sovereignty-)


1996년 행동계획(세계식량정상회의가 채택한 '로마선언문과 행동계획'을 말함)의 실패는 정치적 의지나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실패한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기아를 초래하는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 정책이란 남반구에 대한 경제자유화와 문화적 동질화의 추구이며 그것은 규정한대로의 행동이 실패하면 군사력으로 뒷받침됐다. 오직 근본적으로 다른 정책만이, 지역사회들의 존엄성과 생존에 기반한 정책만이 기아를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이 일이 가능하며 긴급하게 요청된다고 확신한다.

1996년 이후로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기아와 영양실조의 구조적 원인을 강화하는 지구화와 자유화를 지휘해왔다. 이는 농업생산물 덤핑에 대한 시장 개방,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지원기구들의 민영화, 공공의 토지·물·어장·삼림의 사유화와 상업화를 강요했다.

식량주권이란 무엇인가? 식량주권은 자기들 자신의 농업·노동·어업·식량·토지 정책을 생태적· 사회적·경제적·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독특한 환경에 적절하게끔 정할 수 있는 인민·지역사회·나라들의 권리이다. 식량주권에는 식량에 대한 권리와 식량 생산에 대한 권리가 포함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민이 안전하고, 영양적이며, 문화적으로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며,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식량 생산 자원과 능력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식량주권은 다음을 요구한다:

다각화된 농민과 생태적 생산 체제에 기반하는 국내 및 지역 시장을 위한 식량생산에 우선성을 둔다.
농민에게 공정한 가격을 보장한다. 이는 헐값의 덤핑 수입물로부터 내부 시장을 보호할 힘을 의미한다.

식량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 및 생산 자원에 대한 여성의 동등한 접근과 관리를 인정하고 증진한다.
토지, 물, 유전자 및 기타 자원에 대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항하여 생산자원을 지역사회가 관리한다.
종자를 보호한다. 종자는 식량과 생명 그 자체의 기초이며, 농민들의 무료 교환과 이용을 위해 보호돼야 한다. 이는 생명에 대해서는 어떤 특허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며, 식물과 동물들의 중요한 유전적 다양성을 오염시키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의미한다.
권한강화, 인민과 지역시장을 위한 식량 생산 및 지역 관리를 위한 장치로서 가족들과 지역사회들의 생산 활동을 지원하는 공적 투자를 한다.

식량 주권은 무역의 관심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민과 지역사회의 식량권과 식량생산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을 위한 생산과 식량 수입보다는 지역시장과 생산자들에 대한 지원과 증진을 의미한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나온 "모두에게 맞는 한가지 사이즈"의 정책들은 "많은 세계들을 위한 여지를 품은 하나의 세계"의 비젼으로 대체돼야만 한다. 연대와 다양성의 존중을 통해 힘과 인간존엄성이 건설되는 세계에서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정할 권리를 갖는다.…

 

 

[류은숙] <2005년 11월 25일 인권하루소식 제2944호> 

[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11월 13일은 이 땅의 영원한 '노동자'가 태어난 날이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두 살의 젊은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 속에서 그의 몸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뤄졌다. 속칭 '빼빼로 데이'는 알아도 11월 13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우울함에 세 번째로 『전태일 평전』을 샀다. 우리 사회의 독보적인 인권 교과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손에 가졌을 때의 제목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런 우회적인 제목을 가졌고, 저자(고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책이었다. 나는 특정 종교재단에 속한 학교라는 이유로 강제 수강해야 했던 종교개론 시간에 맨 뒤에 앉아 시간을 때우려고 이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수업시간인지라 코와 입을 막고 울먹임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가졌을 때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책은 경찰의 압수수색에서 불온서적을 소지한 것으로 걸릴 것을 두려워한 친구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을 강제로 떠났다.

세 번째로 가지게 된 책의 표지는 깔끔하고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치 전태일이 고발했던 모든 것이 옛일인 듯 시치미 떼고 있는 사회의 뻔뻔함을 반영하듯이 말이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갖은 돈벌이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열여섯 살이 돼서야 야간학교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1년도 채 다닐 수 없었다. 윗글은 그가 짧은 학창시절에서 경험한 체육대회를 마치고 쓴 글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을 여기서 대면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엄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노예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인권의 교과서적인 선언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권 논의는 이런 선언문 아래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머물고 있다. 하지만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압제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대목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대등한 인간이다. '형식'으로는 대등한 인간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은 현실의 인간이 처한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 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권의 현실을 무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주인도 노동자도 자유롭고 평등한 대등한 시민일 뿐이다.

윗글은 전태일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처음으로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인권의 변화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변화는 인권주체의 구체화와 집단화로 나타났다. 구체적 인간은 누구인가. 자기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재단사인 노동자이고 시다인 노동자이다. 이들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들이 사회적 조건을 얘기하려면 이들의 존재를 통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구체적 인권이 '노동권'이다. 노동권의 등장으로 인해 전통적 인권이 옹호했던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깨졌다. 재산을 똑같은 재산으로 바라보지 않고 누가 어떤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보게 된 것이다. 자본가의 소유권은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소유권을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이 새로운 소유권은 '노동권'이라는 인권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자본가의 재산권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됐고,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제한 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휴일과 적절한 휴식 없이 일 시켜선 안되고, 공정한 임금을 주어야 하고, 노동자의 자기 보호를 위해 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하고 활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라는 인간집단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백 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 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빵과 자유'로 뭉쳐있지 않은 인권은 무용지물이다. 빵, 즉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인권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인권이 아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신체의 자유, 사상·언론의 자유같은 자유는 의미가 없다. 사실상 누릴 수 없는 권리를 사람들에게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식권을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이다. 한편 '빵'은 '자유'의 배척물이 아니라 자유를 기본 내용으로 한다. 전태일의 말대로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뭉칠 자유가 필요하고 뭉쳐서 행동할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빵은 자유 없이 실현불가능하다. 그래서 '빵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는 '사회권'이란 인권은 '자유'의 고양이지 자유의 무시가 결코 아니다. 대표적인 사회권인 노동의 자유가 결사의 자유, 단결의 자유, 단체행동의 자유를 외쳤고 많은 정부가 탄압하는데서 보여지듯 자유없이 사회권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권을 흔히 국가가 위로부터 베푸는 혜택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사회권은 노동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를 통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사회적 책임을 추구한 것이다. 사회권은 노동자를 비롯한 당사자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일차적으로 도모되는 것이고 국가의 역할은 그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에는 '노동자'라는 이름도 아까워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붙여서 노동자를 반토막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고 또 읽어야 되는 이유이다.

[인용글의 출처] 전태일 평전, 도서출판 돌베개, 조영래 지음

 

 

[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188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이 팜플렛은 세상을 경악케 하고 빈곤을 '발견'케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발견'되어야만 했을까?

사회권이란 인권이 인식되기 이전에 빈곤은 죄악이었다. 승승장구하는 경제적 성장과 번영으로 인해 눈에 띄는 곤란은 감소된 것으로 여겨졌고, 보다 숙련된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보게 됐다. 많은 중산층들은 빈곤이 성공적으로 퇴치되었다고 여겼다. 이 번영의 시기에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건 인간말짜인 것으로 게으르고, 나쁜 습관을 못 고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탓이라 여겼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인간말짜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지근성 등 빈민의 성격결함과 행동을 고치는 것이 빈곤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그렇게 빈곤문제를 바라본 세력에게 빈곤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고 따라서 '발견'돼야 했다. 원래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던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빈민은 사라지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전례 없는 국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박탈과 불행이 일반화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찰스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도 런던 동부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이다. 일련의 사회활동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빈민들의 실상을 고발했고 빈곤문제에 대한 논쟁을 펼치게 됐다. 그런데 이런 빈민에 대한 묘사는 이방의 세계, 딴 세계를 그리는 듯한 것이었고, 그것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 내용, 연애소설을 들고 있는 독자들이 읽을 수 없는 참혹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은 소설이 아닌 사실이었고, 선정적이라 할지라도 빈곤이라는 최악의 사회문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계절노동이나 아주 불안정한 경제 부문에 임시 고용될 뿐이고, 15시간에서 17시간에 이르는 착취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일자리 말고도 아주 과밀한 주거, 부적절한 위생, 높은 아동사망률, 성매매의 만연, 폭력적 범죄와 질병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런던동부에서 빈곤율은 40%에 육박했다. 사적자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빈민의 수가 많다는 것, 빈곤의 원인이 성격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유로운 시장에 내버려 두면 되고, 국부가 증진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았던 논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것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권의 도전을 받게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빈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서울 부랑인의 절규'같은 고발이 더 이상 필요할까? 700만, 800만에 이른다는 빈곤층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개인의 모자람으로 취급하고 여전히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별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면 발견될 것은 빈곤이 아니고 치유될 것은 빈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이고 구조일 것이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The Bitter Cry of Outcast London): 비참한 빈민의 상황에 대한 조사(Andrew Mearns, 1883)

(일부발췌)

…최근까지 기독교회는 빈민구제를 일부 외곽조직으로 만족해왔거나 더 나쁘게는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조직도 없는 소수의 기독교인에게 맡겨왔다. 나머지들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지역 방문과 다소 무차별적인 물질적 자선의 배포와 극빈자들이 모이는 몇 개의 방을 여기저기에 개설하는 것에 만족해왔고 그런 일들로는 소수가 구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그 방식에서 선하며 선한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는 가난과 비참함, 더러움과 부도덕으로 아주 음울한 지역의 가장자리만을 건드렸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한다. 사실을 통해 끔찍한 죄악과 비참함의 홍수가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 수위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이 문건은 극빈자의 실제 상태와 가장 효과적인 대책을 찾기 위한 오랫동안의 끈기 있고 진실한 조사의 결과이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기서 주어진 정보는 선별한 사례가 아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거리마다에서 보이는 상태를 단지 드러낸 것이다. 둘째, 절대로 과장하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을 꾸밈없이 서술한 것이다. …


빈민이 사는 곳의 조건

그들의 '집'(home)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들짐승이 사는 굴과 비교할 때 동물이 사는 굴이 더 안락하고 건강한 곳으로 여겨질 그런 곳을 어떻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이들 치명적인 인간의 빈민굴이 무엇이며, 노예선의 복도에서 듣는 것을 연상시키는 공포에 둘러싸여 수만 명이 어디에서 한데 우굴 거리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려면, 사방에서 던져지고 당신 발밑을 흐르는 오수와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유독한 고약한 냄새로 쩔은 골목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골목들 상당수에는 햇볕이 전혀 들지 않고, 신선한 공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으며, 한 방울 청소물의 효능을 알지 못한다.

썩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매 계단마다 빠질 위험이 있고,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려, 방심하면 팔다리나 생명을 잃을 구멍을 남기고 있다. 해충이 기어오르는 어둡고 더러운 복도를 더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악취로 물러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대속한 인종에 속하는 수천 명의 존재들이 무리져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철로 문 아래나 짐수레나 큰 통속에서, 또는 야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잠자리에서건 잠을 자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을 동정한 적이 있는가? 이곳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있는 이들의 운명과 비교할 때 거리의 그들을 더 부러울 정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평방 8 피트가 이 많은 방들의 평균 크기다. 벽과 천장은 오랜 세월 방치돼온 때가 뭉쳐 검은색이다. 머리 위 판자의 깨친 틈 사이로 오물이 스며 나오고, 벽을 따라 떨어지고 있고 어디에나 있다. 창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절반이 넝마나 판자로 막혀있다. 나머지 부분도 아주 더럽고 희미해서 빛이 거의 들어올 수 없거나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열려있거나 깨진 창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그래도 좀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고 다락에 올라간다면 낮은 집들의 지붕과 선반을 보게 되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메스꺼운 공기가 죽은 고양이나 새들의 시체 더미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들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썩고 악취나는 주택의 각 방에는 한 가족 때론 두가족이 살고 있다. 한 위생감독관은 한 지하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 명의 아이, 그리고 4마리의 돼지를 발견했다. 또다른 방에서 한 선교사는 천연두를 앓고 있는 남자와 8번째 해산을 하고 막 몸을 추스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반은 벌거벗은 채 먼지로 뒤덮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한 개의 지하 부엌에는 7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같은 방안에 죽은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또다른 곳에는 가난한 과부와 3명의 아이, 그리고 죽은 지 13일이 된 아이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마부였는데 얼마 전에 자살했다. …초저녁에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어머니가 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부도덕한 목적으로 방을 세놨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어린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시간이 돼서야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침대가 있는 곳은 단지 더러운 넝마와 대팻밥이나 짚단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불쌍한 아이들이 휴식할 수 있는 부분은 더러운 판자 위일 뿐이다. 이 방의 소유자인 과부는 침대만을 차지하고 바닥은 결혼한 부부에게 임대했다. …


빈곤

…우리가 의미하는 빈곤은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빈곤이다.…트위드 바지를 만드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하루에 얼마를 버냐고 했더니 1실링이라 한다. 그런데 하루가 이 가련한 영혼에게 뭘 의미하는가? 17시간이다!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녀는 일한다. 식사할 짬도 없다. 일하면서 빵껍질을 먹고 약간의 차를 마신다.…이들은 가족 소득의 절반을 이런 끔찍한 동네의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고, 일용할 음식과 옷과 연료를 위해 남겨지는 돈은 4다임에서 6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빈민의 고통스런 얼굴은 노예제와 악명 높은 억압의 땅에 비할 바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이러한 빈곤과 타락의 심연에까지 교육법이 미치고 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육법으로 인해 우리가 설명한 이 계급은 잔인한 짐을 걸머져야 한다. 이들에게 서넛의 아이 각각에 대한 일주일에 2펜스나 1페니의 수업료는 그만큼의 먹을 것의 부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빈곤과 지저분함 속에서 사람이 지속적으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의 광경을 대면해야 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해야 할 일

…우리는 국가의 개입 없이는 어떤 효과적인 것도 대규모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일거리가 있는 중심가 근처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기차나 전차로 교외로 나갈 여유가 없다. 어떻게 그들의 야위고 굶주린 몸으로 1실링 또는 그 이하를 벌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는 것도 모자라 편도 3∼4마일을 걸을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노동자 주거법(the Artizans' Dwellings Act)은 빈민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기준에 맞는 주거를 건설한다고 대규모 구역에서 빈민들을 몰아냈지만, 이들 주거의 임대료는 극빈자들의 수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빈민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거의 없다시피한 숨막힐 듯한 곳에 더욱 밀집해 살도록 내몰렸다. 빈민은 비록 그것이 살아있는 무덤 같은 주거라 할지라도 어딘가에 주거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에 부자는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된 부동산을 사들여 그것을 금광으로 바꿔놓으면서 그렇게 빈민의 고통으로부터 더 풍요로운 수확을 거둔다.
국가는 이런 사악한 매매를 빨리 없애야만 하고, 극빈자에게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열병의 소굴보다는 더 나은 곳에 살 권리, 가장 지저분한 야수보다는 더 나은 존재로서 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

 

[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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