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퀘어의 홈리스 강제퇴거 중단 요청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

* 일시: 202473() 오전 11.

* 장소: 국가인권위원회 앞.

 

홈리스행동 기자회견 발언문(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유엔 인권이사회 56차 세션. 2024626일 발표.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 보고서를 중심으로)

 

저는 오늘 아침, 제 월세방에서 씻고 배설하고 혈압약을 먹고 나왔습니다. 이건 자기 주거가 있어야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방이 없다면, 저는 이런 행위들을 어디에서 해야 할까요? 또 저는 공공 도로를 걸었고 공공교통을 이용해 여기에 왔습니다. 저는 자산이란 게 거의 없는데, 제 통장 잔고가 비었다는 이유로 공공의 장소에 출입을 금한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가난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가난을 강요하는 시스템은 누가 벌을 줍니까?

 

오늘 제가 드리는 말은 유엔에서 최근 발표된 보고서에 근거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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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에는 특별 주제를 다루는 장치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입니다. 특별보고관이 최근 626일 발표한 문서의 제목은 홈리스와 빈곤을 범죄화하는 악순환을 끊어라입니다.

 

이 보고서의 요점은 한마디로 공공이라는 건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거 없음은 그 자체로 인간 존엄에 대한 도전이며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를 비롯한 인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국가는 홈리스 상태를 없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빈곤은 광대한 인권침해의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홈리스 상태와 빈곤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공공의 장소에서 내쫓고 박해하려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됐든 경찰이 됐든 관행이 됐든 간에 규탄받아야 합니다.

 

주거지 불명인 사람을 범죄인 취급하는 것은 모호하고 자의적인 법입니다. 홈리스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명확한 행위에 따라 처벌해야겠지요. 구체적 행위에 근거한 처벌의 원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입니다. 하지만 주거가 없어서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잠자고 먹고 물건을 보관하고 위생을 처리하는 등의 생존을 위한 행위를 자기 거소가 아닌 곳에서 행하는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생존 행위를 범죄로 취급하고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공중보건과 공공질서 등에 대한 규제는 주거 없는 사람의 모든 행위를 처벌할 권한이 될 수 없습니다.

 

쇼핑몰 등 사적 자본이 공적 영역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공적 장소가 줄어들고 사라지는 것은 홈리스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구성원의 문제입니다. 사적이고 자의적인 권력 행사에 기본적 인권을 내어줄 겁니까? 나는 그 대상이 아니라고 내버려두면, 사적 권력의 횡포와 공권력의 방임이 저절로 멈춥니까?

오늘 우리는 홈리스 당사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구성원의 문제로 자각하기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슬금슬금 공적 장소를 축소하고, 사적 권력에 시민의 권리를 양도하는 행위를 누가 허락한 적 있습니까? 사유재산이 슬금슬금 공적 공간과 공적인 권리에 침투해오고 있는데, 왜 공권력이 사적 권력을 감싸줍니까? 그것도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홈리스를 향해 사적 권력이 횡포를 부리도록 방임합니까?

 

유엔 특별보고관은 계속 지적합니다.

홈리스를 다루는 법률들의 제재와 처벌의 비례성이 적절치 않다고.

집세를 낼 수 없다는 상황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행위들을 범죄로 처벌한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유엔 특별보고관은 규탄합니다.

빈곤과 주거없는 상태를 범죄시하고 처벌하고 추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인권침해라고 말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나 처벌에 해당한다고 지적합니다. 공공장소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경찰의 개입과 사적 폭력 등에 취약합니다. 사적인 거주지에서라면 허용되지 않았을, 영장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개입에 노출돼 있습니다. 타인과의 만남을 위해 공공장소를 이용하려는 홈리스를 범죄화하는 것은 집회와 회합의 자유를 침해합니다. 소득을 얻으려고 거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법과 집행조치는 홈리스의 노동할 권리와 공정하고 안전한 노동조건을 위반합니다. 여기에는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는 노동자도 포함돼 있기에 국제노동기구(ILO)는 홈리스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홈리스에 대한 추방, 벌금, 구금과 투옥, 강제 시설입소 등은 더한 인권침해를 야기합니다. 앞서 열거한 행위들은 홈리스 상태로 인해 이미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배가합니다.

 

이에 유엔 특별보고관은 다른 식의 접근을 권고합니다.

홈리스를 범죄화하는 것은 사회문제를 다루기에 부적합하고 비효과적이며 오히려 비용이 더 드는 접근입니다. 범죄화는 공공질서와 안전에 대응하기 위한 합리적이거나 비례적인 대응이 아닙니다. 대안은 있습니다. 특별보관이 제안하는 목록은 아주 길고 다양하기에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꼽아 말씀드립니다.

 

삶을 유지하는 활동을 범죄화하는 법을 철폐해야 한다.

공공장소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증진해야 한다.

주거 먼저(하우징 퍼스트, 젤 나중이 아닌)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불평등과 홈리스를 야기하는 시스템이지, 홈리스 개인이 아닙니다.

홈리스와 빈곤을 범죄화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지위, 성별, 인종, 국적, 건강 상태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야기합니다. 홈리스와 빈곤은 적절한 주거, 존엄한 일, 돌봄 등으로 다뤄질 일이지 범죄로 다룰 일이 아닙니다.

 

불쾌하다’, ‘냄새와 위생이 우려된다’, 등등은 위생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특권을 드러내는 말일 뿐입니다. 질서와 규범이라고요? 주거 없는 이에게 주거를, 폭염에 더 취약하게 노출된 이에게 그늘을, 공공의 장소를 모든 이에게 열어젖히는 것이 더 근본적인 질서와 규범 아닌가요?

우리 몸은 기후변화, 타인의 시선과 태도, 공권력과 사적 권력의 차별과 억압 등에 취약합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특히 더 취약합니다. 그래서 그 취약성에 적절히 응답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들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약속들을 정해왔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높은 차원의 윤리와 규범을 거스르는 소위 질서와 규범의 주장을 우리는 폭력이라 부릅니다.

 

취약함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에게 박대와 추방으로 응답하는 것은 권리 주장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우리는 취약함에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을 더 근본적인 윤리로 여기고 그것을 법제도화하는 정치를 요구합니다.

2022.12.7. 국회 앞에서 노동자들이 노조법 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권단체는 이에 연대하여 '노조법 2조 3조 개정촉구 인권단체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업의 경영권과 재산권을 침해한다'에 맞서는 발--언을 요청받아 작성했던 인권연구소 '창' 의 발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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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실 시인의 시, <충주휴게소>의 한구절입니다.

...

고속도로엔 안개 자욱하고

달려도 당겨도 거리는 줄지가 않는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추월당한 것 같아 삶으로부터

그냥 절벽으로 핸들을 꺽고 싶었어

...

 

그냥 절벽으로 핸들을 꺽고 싶었어’, 이 구절에서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이 시가 표현한 것처럼, 노동 하는 사람이 절벽으로 핸들을 꺽고 싶어지게만드는 체제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여기 우리는 절벽으로 핸들을 꺽고 싶지 않기에모였습니다. 우리는 도로, 건물, 철도, 교육, 돌봄, 의료 등 우리 삶을 가능케하는 모든 것을 공동의 작업장이자 일터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동자를 둘러싼 사회환경을 감시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입법을 요구하며, 권력이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시민의 책임이자 도리로서 여기 모였습니다.

 

재산을 독점하고 배타적으로 사유하는 세력은 왜 내 맘대로 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핸들을 잡았다고 내 맘대로 운전하면 됩니까? 어린이를 비롯한 노약자가 앞에 있는지 주시해야 하지 않습니까? 신호등에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제한속도 등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재산권은 사회정의, 사회복지, 경제민주주의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대한민국헌법의 약속 아닙니까?

 

그들은 핸들을 함부로 꺽으면 안된다는 것이 재산권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합니다. 그들은 내 재산만 지켜달라말하지만, 여기 모인 우리는 상호연결과 상호의존과 공유 속에서 재산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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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란 무엇입니까? 재산은 어디까지나 사회 속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사회의 공동체의 법에 의해 소유자가 됩니다. 서로간의 재산을 규제하기 위해 국가는 법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국가는 어떤 법을 만들어야 합니까? 사회구성원의 정의로운 관계를 보장하는 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특권적인 강자가 다른 쪽을 관계에서 무시하고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법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큰 잘못입니다.

 

그 어떤 재산에 앞서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나 사회 안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생계비를 벌 수 없는 사람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도울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재산은 모든 구성원을 부양하기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 사이에서 마땅하고 정당한 것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마땅하고 정당하게 행위해야 하는 것을 입법화해온 것이 인권과 국가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고 강자의 특권을 보장하는 데 치우친 법은 비판과 저항을 받아 마땅합니다.

역사적으로 재산권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맥락에서 출발했고, 그 뿌리는 인간의 몸에 대한 권리, 생존을 도모할 권리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자랐으나, 큰 권력을 업은 재산은 타인과 사회의 생존을 위협하며 배타적으로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쉽게 변질되곤 했습니다. 재산의 타락에 대한 방부제로 등장한 것이 노동자의 권리입니다. 단속되지 않은 재산권이 엄청난 사회적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아동노동착취도 불사하고, 노동자가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고 무제한의 과로 경쟁을 벌여야만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강요하는 기업활동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신호탄으로 보편적인 교육권, 건강권, 주거권, 사회보장권 등이 함께 등장했습니다. 우리 삶에 필수적이고 공통적인 권리이자, 공유하는 재산은 노동권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을 모든 구성원의 살아갈 권리로 바꿔온 것이 노동권이고, 불리한 조건만 늘어놓고 도장찍게 만드는 강요를 계약자유의 원칙이라 우기는 체제를 노동자의 단결의 자유와 의사표현의 자유로 바꿔온 것이 입헌주의와 인권의 역사입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재산의 배타적인 사유화에 맞선 이유는 재산이란 것의 형성이 인간의 노동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노동을 멈추면 난리가 납니다. 그것을 재산상의 손해라고 날뛰기 이전에, 왜 그런 노동을 무시하고 관계를 부인하려 했는지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노동자로서의 지위 인정과 노동자의 결사와 단결의 자유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노동은 개인으로 이뤄질 수 없고, 인간의 협업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의사를 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관계와 협업을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시스템에 대해 집단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의 단체행동, 대표적으로 파업이 손해를 끼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막대한 손해를 끼칩니다. 그런 손해를 통해 민주주의 없는 시장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티내지 않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큰 사고가 날 것을 알기에 미리 경고하는 것입니다. 당장 멈춤이 불편하다 해서 큰 사고의 위험을 안고 계속 가는 것이 과연 사회구성원 모두의 권리와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요?

 

사회속의 관계는 권리에 의해 구성됩니다. 권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재산이 권리라는 것은 재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재산권은 무한정이 아니라 노동자와의 관계속에서, 전체 사회구성원과의 관계속에서 정해집니다. 노동자에게 절벽으로 핸들을 꺽고 싶게픈 만드는 관계를 조성하는, 잠못자고 허기지고 지친 노동자에게 안전을 맡기는 관계를 강요하는, 그런 재산권은 마땅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기본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노조법 개정안에 대해 한국경제인연합회 보도자료는 헌법상 평등권, 직업의 자유, 재산권 침해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평등이고, 사업자의 영업활동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직업의 자유 침해이고, 재산권 침해란 사용자의 재산과 이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 합니다.

 

말이면 다 말이 되고, 권자를 붙이면 죄다 정당한 권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의 권리 주장을 강도권이라 이름붙인 적이 있습니다. 강도권이란 이런 것입니다. 강도가 제 목에 칼을 대고 지갑을 내놓으라 합니다. 저는 제 목숨이 소중하기에 제 지갑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도는 제 지갑을 가져가서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들어있는 현금을 쓸 수 있고, 카드도 제가 정신차리고 신고하여 정지시키기 전까지는 맘대로 쓸 수 있습니다. 강도가 제 지갑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저는 강도에게 내 지갑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는 절대 말해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강도는 제 지갑을 가져간 후에도 제 목숨을 해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강도권같은 일이 힘을 발휘하는 일이 많습니다.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벌어집니다. 강도에게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불법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저항하다가 강도에게 손해를 입히면 강도권을 침해했다고 사회적으로 큰 마이크를 든 쪽이 편들어줍니다. 강도권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재산권의 주장은 배타적인 사유화입니다. 타자의 삶을 남몰라라, 사회적으로 취약함과 불리함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생존을 나몰라라, 전체 구성원의 실질적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보호될 재산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소위 재산이란 게 없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타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명령과 지휘권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 속 구성원들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매일 공공교통을 이용하고, 헤아릴 수 없는 노동자의 필수노동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분들의 존재가 저의 재산이고 인권의 역사가 말해주는 진정한 재산입니다.

 

세계노동기구, ILO의 창립선언문인 필라델피아 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에 필수적이다,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험하게 한다.

 

이 말을 기억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 76회 세계인권선언의 날 기념 인권운동 공동 기자회견

윤석열이 참칭한 주권을 회수하여 새롭게 재구성하는 힘이야말로 인권 중의 인권이다.

- 류은숙(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오늘은 세계 인권의 날로 불리는 세계인권선언 제정 76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 앞에서 흐느낍니다. 흐느끼다 못해 꺼이꺼이 통곡하게 되는 우리의 인권 감수성은 역사를 이해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4.3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의 영령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각종 재난 참사의 피해자들, 파렴치한 전쟁 범죄의 희생자가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사적으로 누적된 국가 범죄와 이어진 많은 것들이 지금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에는 물론 한계가 있고 당대 주요 정치 세력간 절충의 산물로서 갱신돼야 할 여지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긴 세월 동안 기본적 인권과 평화에 대한 존중이라는 국제질서의 최소기준으로 작동해온 것은 세계 시민들의 지속적인 투쟁에 힘입어서입니다. 그런데 그 최소 가치에 부응해온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위협받고 있습니다. 극단적 증오와 혐오폭력, 불의한 전쟁과 학살이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고 이를 제어해야 할 정치마저 이에 편승하여 각종 위기를 증폭시켜 왔습니다.

이런 위기의 연장선이자 극단적 모습이 한국에서 드러난 것이 지난 123,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정치지도자마저 극우 이념에 사로잡혀 반민주적인 폭거를 저질렀고 여전히 그를 옹호하는 특권 세력의 모습은 세계인권선언의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줍니다. 또한 윤석열의 즉각 퇴진과 구속처벌이 최소한의 필수 조치라고 말해줍니다.

인류의 보편가치에 대한 위협과 각종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가 져야 할 책임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시절에 계엄이라니요? 시민에게 총을 들이대다니요? 헌법기관을 군홧발로 짓밟다니요?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은 폭압을 일삼는 정권을 방치하는 것은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가치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인권의 약속이 맺어진 배경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인권을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국내적으로는 폭압을 대외적으로는 적대적인 국제질서와 전쟁 책동을 일삼고 기후 위기 대응에 무책임한 윤석열 정권을 해체하는 것은 한 국가공동체의 시민으로서의 의무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야 하는 마땅한 의무임을 상기합니다.

오죽하면 그렇겠느냐며 여전히 반란 패거리를 감싸는 세력이 있습니다. ‘어느 정권이라고 온전히 인권을 보장한 적 있느냐?’고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이죽거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윤석열에게 묻는 책임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입니다. 윤석열과 국민의 힘은 절대 넘어서는 안되는 문턱을 짓밟고 넘어섰습니다. ‘문턱이란 지켜야 할 최소기준을 말합니다. 시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라는 모의와 지시를 결단이라 부른다면, 이 세상에 남아날 문턱은 없을 것입니다. ‘처단이라는 흉폭한 단어는 저들을 겨냥해야 할 뿐입니다. 여러 가치들이 경합할 때 인권은 가장 우선순위를 차지하며 기본적 인권이라는 문턱에 동의해야만 그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 세계인권선언이 말하는 질서입니다.

윤석열의 인권유린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의 실책을 헤아리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하나하나의 개별적 인권침해를 합하는 것을 넘어 총체적으로 인권을 짓밟은 것입니다. 인권은 규범, 제도, 다양한 실천 양식 등이 서로 영향을 끼치는 관계 속에서 변화 발전하는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세계인권선언 28조가 말하고 있듯이 권리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속에서야 개별적 권리의 실현이 가능합니다. 또한 29조에 따르면, 어떠한 조항도 이 선언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그와 같은 행위를 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윤석열은 이 두 가지 전제를 모두 훼손했습니다.

적대적 상황을 부추기고 재난 참사를 방치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세금을 걷거나 쓰는 데서 공동의 금고를 사유화하며 불평등과 격차를 강화했고 저항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극우 이념과 폭력의 선동에 앞장섰습니다. 정부에게 제한된 행위는 무제한으로 자행하면서 정부가 지원하고 보장해야 하는 시민의 최소한의 삶에 대한 권리들은 모른척했습니다. 증거 목록은 길고 중하기만 합니다. 이태원 참사, 채상병과 박정훈 대령, 대우조선하청노동자, 전세 사기 피해자, 의료 참사···. 다 열거하지 못할 인권침해를 증언하고 저항하는 숱한 몸들이 현존합니다. 윤석열 세력은 바이든 날리면으로 뭉갤 수 있다고 착각했겠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그렇게 날릴 수 있는 게 아님을 광장을 채우고도 넘치는 우리의 목소리가 증언합니다.

이런 일들이 왜 발생했는지를 따져 묻는 게 인권에 대한 총체적 접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얄팍한 술수로 대충 메꿀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총체적 접근이기도 합니다. 원인은 윤석열 세력이 주권자를 총체적으로 무시하는 틀에서 권력이라는 것을 휘둘러왔기 때문입니다. 그 권력 자체를 당장 뺏지 않고서는 우리 중 누구도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당장 그의 권력을 회수해야 합니다.

주권자인 우리는 동등한 사람들로서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동등성을 무시하고 편 가르고 반국가세력이라 싸잡는 말로 적대시한 윤석열은 정치의 기본 토대를 무너뜨렸습니다. 윤석열은 시민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정당한 조건을 파괴했습니다. 정당한 선거에 의해 선택됐더라도 시민에 대한 책임을 계속 져야 하며 헌정 가치를 무시함으로써 그 책임을 저버리면 시민에 의해 축출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 계약을 그에게 명확히 상기시켜줘야 합니다. 또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정치인과 정당은 그 추한 모습 그대로 역사에 박제되어 두고두고 역사적 인권 감수성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제1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합니다. 주권자로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야 여타의 권리들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세력이 분수에 맞지 않게 참칭한 주권을 회수하여 새롭게 재구성하는 힘이야말로 주권이며 인권 중의 인권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헌정을 세우는 주권은 광장에서 탄핵을 외치는 시민들에게 있을 뿐임을 확인합니다.

반란 세력으로 인한 공포, 불안, 고립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윤석열과 국민의 힘이 맞이할 모든 낮과 밤을 지배할 것입니다. 저항과 연대가 우리의 것이며 꼬리 자르기와 배신이 저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회수하려는 윤석열의 권력은 불평등과 차별, 부패와 음모의 부대에 담겨 곯아 터졌습니다. 우리가 새로 박음질하는 권력은 헌정 가치인 기본적 인권을 엄호하는 새로운 부대에 담길 것입니다. 세부적인 사안 간에 당연히 이견이 존재할 것이고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로서 논쟁할 것이나 동등한 사람들로서 항쟁하며 공공선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배제와 차별로 누군가의 존재 자격이나 동등성을 침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등한 존중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로서 정치의 광장에 나왔습니다. 윤석열 탄핵의 광장에 나온 우리의 목적은 정당하며 과정도 정당할 것이며 그로 인해 더 성숙할,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습니다.

광장에 모인 우리는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상황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 힘이야말로 정당한 주권의 행사가 될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아무도 뒤에 남기지 않고 함께 움직이는 저항 정치를 펼치면서 우리는 동등한 주권자로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를 이끌 것입니다.

류은숙발언문최종(제76회인권의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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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적 언행의 장본인이 인권교육을 책임지게 둘 수 없다

반인권적 언행 일삼는 이충상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한 인권교육 전문위원 의견서 -

우리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국가인권위)의 주요 수임 사항 중 하나인 인권교육 분야의 전문위원들로서 아동·청소년·여성·노년·복지·언론·교육 등 각계에서 인권 인식의 향상과 실천을 도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권에 대한 앎과 실천은 누구나 자기를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기 위하여 필수적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인권을 알고 이를 상호의존적이고 상호호혜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때 인권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은 인권교육을 하나의 권리로 규정하고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권교육은 모든 인권의 실현을 위한 기본적 권리입니다. 한국의 국가인권위가 인권교육을 주요 수임사항으로 삼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국가인권위는 사회구조적 제도와 정부의 행태를 인권의 렌즈로 감시하며 침해의 시정과 더 나은 실현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는 독립적인 국가 기관입니다. 국내의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설치될지라도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규범을 자국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국내법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을 활동의 틀로 갖습니다. 또한 인권에는 실정법이 아우르기 힘든 영역이 존재합니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법규정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는 인권상황이 존재하기에 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최근 인권침해의 당사자가 된 이충상 위원은 앞서 말한 국가인권위 및 인권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인가요?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특히 인권교육을 책임지는 상임위원으로서 이충상 위원은 그 지위와 역할을 배반하는 혐오 표현과 행태를 일삼아왔습니다. 지난 521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 언급된 표현(‘...항문이 파열되어 대변을 자주 흘리기 때문에 기저귀를 차고 살면서도 스스로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경우에 과연 그 게이는 인권침해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은 과연 인권위원이 공론장에서 쓸 수 있는 언어인지 충격적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에이즈예방법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위헌 의견에 반대하면서 이충상 위원이 낸 의견서는 충격적인 표현들(‘에이즈 환자는...사망하지는 않는 경우에도 본인이 커다란 고통을 겪으면서 골골 살고 국민에게 큰 짐임’)로 점철됩니다. 또다른 국가인권위 결정문에서 소위 소수의견으로 표출된 인식을 보면, 헌법과 인권 원리에 대한 접근 태도 자체가 인권위원의 위치에 적합한 것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일례로 국가인권위원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한 의견표명 결정문에 나타난 이충상의 소수 의견을 보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정치나 사회문제 해결을 사법화하려는 경향이 짙게 드러납니다. 국가인권위 전원회의 산하 아동권리위원회의 책임자이면서 윤석열차그림을 그린 고등학생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은 사례, 국가인권위 직원들에 대한 모욕적 언사로 인해 국가인권위 공무원 노조에서 조사관 비하, 무시 등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직원들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등(518일자 퇴임하는 서미화 인권위원의 경향신문 인터뷰 참조) 이충상 위원은 혐오와 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충상 위원은 다양성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반인권적인 언행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반인권적 표현을 소수의견이며 다수결의 폭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분명 중요한 인권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은 성소수자,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한 것이지, 기득권이나 특권의 옹호를 기본적 인권과 병렬적으로 나란히 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혐오의견이나 표현도 병렬적으로 놓인다면, 기본적 인권에 대해 인식도 판단도 하지 못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에 흐를 뿐입니다. 다원성과 다원주의를 논할 수 있는 전제는 인권의 원칙, 즉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한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정당성 판단을 거쳐야 합니다. 극단적 상대주의의 주장으로 자신의 혐오 표현을 옹호하려 드는 것은 이충상 위원의 인권의식 결여와 무적격성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에 이충상 위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열악한 처지의 사회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검토·성찰·주장·논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종교·젠더·성적지향·인종·계급 등이 다르더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자신이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내리는 판단과 결정이 타인의 삶,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과 권리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능력이 있습니까? 지배적인 권력과 정치인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이충상 위원이 국가인권위의 각종 결정과정에서 보여준 의견과 행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인지 및 인식 능력 결여, 혐오 표현에 대한 무감수성과 소수자에 대한 증오의 선동, 국가인권위 직원들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만한) 폭력적 언사, 동료 위원들에 대한 무례와 협박 등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당신은 인권위원은 물론 인권교육을 책임질 자격이 없습니다. 더구나 전원회의 산하 아동권리위원회를 맡고 있다니요? 곧 다가올 유엔의 국가별 인권 상황 정기 검토(UPR) 회의에 참가한다고요? 당신 입에서 나올 말들이 인권의 장에 난입한 흉기가 될 것으로 염려됩니다. 혐오 표현을 일삼는 자들이 그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인권의 주인인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생태 위기, 돌봄 위기, 골이 깊어가는 불평등의 격차, 곳곳에서 번져가는 혐오와 배제, 폭력의 파고는 인권교육의 실천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시에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더욱 심해집니다. 비인간화와 인권침해는 언제나 말과 함께 시작됩니다. 모욕하고 비하하는 말, 선입견과 근거가 미약한 공격적 표현 등입니다. 그런 시작을 막지 못할 때 대규모의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합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비인간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막는 것은 지금 당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인권교육은 사회구조적 불평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역량, 협소한 자기 이해를 넘어 둘레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역량,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태도로 상상할 수 있는 역량 등을 추구합니다.

이런 인권교육을 혐오와 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인권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인권위원이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혐오 표현과 행태에 당장 사과하고 사퇴하십시오. 우리 인권교육 전문위원들은 당신이 주재하는 어떤 회의도 참가 거부할 것이며, 당신이 행사하려는 어떤 권한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반인권적 행태에 항의하고 저항하는 움직임은 우리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인권사회의 일원으로서 계속 동참하며 주시할 것입니다.

2023523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 전문위원

구정화(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은희(인권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류은숙(인권연구소 대표)

박영철(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윤여진(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이병구(양심과 인권-나무 사무처장)

이상재(대전충남 인권연대 사무국장)

허창영(전라북도교육청 교육인권센터 인권보호팀장

인권연구소 '창' 대표집필 후 연명함.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회의/기자회견 발언문(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코로나19의 복판에서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겪으신 분들, 또 지금도 겪고 있는 분들, 산불과 가습기살균제 등 각종 재난과 참사를 겪었으나 제도의 잘못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분들, 노동재해 및 각종 불평등과 차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모든 분들의 몸이 여기에 있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취약한 인간입니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취약한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인권이란 걸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든지, 서로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서,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약속이 인권입니다. 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회는 상호인정과 상호의존을 바탕에 깔고 움직입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회는 서로에게서 탐탁치 않은 요소만 콕 집어서 면박주고 무시하고 내쫓으려 합니다. 서로 인정도 존중도 하지 않는 사회에서 불안과 괴로움은 커질 뿐이고, 인권은 이름뿐일 것입니다. 잔인함과 폭력이 법과 질서의 탈을 쓰고 설쳐댑니다. 그런 사회의 구성원일수록 더더욱 취약해지고 위험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것일까요?

차별금지법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표현하는 말에 운을 떼는 것입니다. 토대가 있어야 저마다 창의적으로 더 나은 사회 만들기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권으로써 서로를 의지하고 지원하고자 합니다. 상호인정과 상호의존과 연대의 가치를 토대로 인권은 새로운 변화와 위기에 걸맞게 법과 제도를 만들고 위기를 헤쳐나갈 것을 추구합니다.

차별금지법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용기를 한 번 내 보십시오. 어떤 용기냐 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볼 용기입니다. 자기 삶의 방식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는 용기를 발휘해 보십시오. 서로 기대고 돌볼 수 있는 관계의 경험, 시민적 덕성을 체험하는 경험을 만들어 보십시오. 차별금지법과 함께 하려는 시민들의 합주에 당신이라는 악기로 참여해주시기를 초대합니다.

누군가 작디작은 조약돌을 모아 애써 쌓은 탑을 무너뜨리거나 시린 손으로 애써 만든 눈사람을 걷어차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를 인정해주지도 존중해주지도 않는 권력자들을 향해서는, 자기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나쁜 제도를 향해서는, 눈 한번 흘기지도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면서, 우연히 자기 옆을 지나가는 만만해 보이는 약자를 골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일이 즐겁고 행복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존엄과 동등한 가치를 존중하는 관계의 기쁨에 초대합니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 묻습니다.

저와 같은 인권활동가들은 각자도생의 반대말을 정치라 여깁니다. 정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한 삶의 양식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는 기본법조차 만들지 못하는 정치는 시민들에게 정치의 죽음을 고하고 있습니다. 시민사이에 위계를 나누고 인권의 가치와 명분마저 걷어치우는 이익추구와 당파적 경합은 정치의 죽음으로 가는 길일 뿐입니다. 정치의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제각기 노잣돈을 아무리 챙긴다 한들, 그 노잣돈 어디에 쓰겠습니까? 정치의 소생을 위한 길로 노정을 바꾸십시오. 그 이정표가 되는 인권의 가치는 아무리 나눠 써도 채워지고 넘쳐나는 정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세계인권의 날을 맞이하는 애도의 마음(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지금부터 74년 전인 오늘, 19481210, 인류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오늘 이 선언을 애도의 선언으로 부르려 합니다.

애도란 무엇입니까?

애도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습니까? 존엄을 무시하는 돈과 권력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고 비교불가능한 존엄성의 상실입니까?

애도는 떠나보낸 이와 남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존재들을 상실함으로써 남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빨리 쉽사리 접고 잊으며 그냥 하던대로 살아가려 합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상실을 낳은 불의한 관계를 바로잡으려 합니까?

애도는 또 같은 상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찾아내고 실현하려는 지속적인 행동입니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다짐이 아니라 계속되는 실천 속에서 가능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쟁과 압제와 결핍으로 인해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인류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며, ‘다시는 결코 다시는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은 이들이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인지를 확인하려는 약속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의 맨 앞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 전체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정의·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낳았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선언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가 폭정과 억압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비판할 자유를 행사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지시하는 바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치를 구현함에 있습니다.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애도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시민이 공포와 궁핍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절망과 궁핍에 시달리게 방치한다면, 폭력과 혐오의 선동정치를 일삼는 세력에게 비판 의식없이 휘말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에 선언은 자유의 방파제로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건강·주거 등에 대한 권리를 차별없이 누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에 쓰인 권리들은 액자에 넣어두는 용도가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현실을 활보하길 바랍니다. 인권은 구체적인 법과 제도, 사회문화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 등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인권을 현실화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나이, 성별, 국적, 출신, 장애, 성적지향 등 인간을 구별하는 각종 표지들은 인간 간 위계와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더 세심하고 각별하게 살피기 위한 것으로 다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인권의 날이라는, 달력의 어느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지금 이곳의 삶에서 재확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여기서 손과 가슴을 모읍니다.

우리에게 이 날은 어떤 의미입니까? 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홀로 일하다 죽어간 날입니다. 지금도 매일 어디선가 또다른 노동자들이 퇴근하지 못하고 각종 재해에 쓰러져 갑니다. 교통, 교육, 의료, 주거 등 사회적 인프라와 사회적 돌봄의 부재로 장애인을 비롯하여 노년, 아동, 여성, 이주민 등이 사회 속 시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상은 누가 죽고 나서야 표면에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1029, 여기서 가까운 이태원에서 숱한 생명이 쓰러져 갔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구청장이 있고, 경찰과 소방대, 병원이 코 앞에 있으며 15천억원을 들였다는 최첨단 통신시스템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전쟁도 기아도 아닌, 평시에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로에서 벌어진 참사는 재난 대응을 총괄하고 지휘할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한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참사 희생자들을 존엄하게 애도하기 위하여 세계인권선언에 쓰여진 모든 권리를 정의롭게 행사할 것입니다.

선언 제28조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인권이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집니다. 선언에 규정된 권리를 타인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의 행위를 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선언의 제30조는 못박고 있습니다. 소중한 인권을 혐오와 2차 가해에 쓰고, 공직자의 책임 회피에 동원하고, 시민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감시하고, 유가족과 사회적 취약자에 대한 지원을 칼질하는데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애도를 통해 존엄한 삶과 애도를 가능케하는 사회라야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참사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 염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속되는 애도 행위가 사회적·정치적 염치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애도와 기억의 장 세번째 추모문화제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2024.2.20.)

추도사 (류은숙, 인권연구소 ’)

제가 어렸을 때 상상 속에서 아주 무서워한 장소는 사막입니다. 물 없는 사막에 고립됐는데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상상, 목이 타 죽을 것 같은데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난 상상, 그러나 그게 신기루였고 허겁지겁 마신 물이 모래 더미여서 숨이 막히는 상상, 그런 상상은 어린 저를 꿈에서 깜짝깜짝 놀래켰습니다. 이제 나이 든 저는 현실에서 사막을 봅니다.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의료나 돌봄이 끊어진 사막, 감염자를 비롯한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에게 조리돌림을 유도하는 황폐한 언론 사막, 성차별과 인종주의 등 오래된 바이러스가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사막, 필수노동에 절대 의존하면서 필수노동을 무시하고 모 욕하는 사막, 희생양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의 극단 속에서 종사자의 과로와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막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막화를 방치하고 있는 무책임한 정치, 사회구성원들 특히 약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비열한 정치에 숨이 막힙니다. 무책임과 분열 조장에 유능한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사막화를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모였습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슬픔에 잠겨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슬픔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감염병이 오기 오래전부터 고립된 시설에 이미 고립돼 있었고 감염병으로 인해서야 비로소 폐쇄병동을 벗어나게 됐던 첫 번째 희생자 분, 그런 분들을 안전장치 없이 돌보다가 감염돼 돌아가신 돌봄노동자, 고립된 돌봄 관계에 질식해 돌봄의존자 살해 후 자살을 택한 돌봄자들, 감염병이 아니라 성차별적 해고와 절망 등으로 자살한 여성노동자들, 거리두기라는 행동백신을 맞을 수 없어 일터에서 스러져간 숱한 노동자들, 피부색과 혈통을 이유로 배제된 이주민들, 아시아인이라고 혐오범죄에 노출된 세계 곳곳의 사람들···, 우리의 기억에 새겨진 분들의 사연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적 사연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그 상황과 환경을 바꾸고자 애도를 계속합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권력자들은 애도를 금합니다. 애도를 그만두게 하라고 혐오 세력을 부추깁니다. ‘이제 지겹다’, ‘할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과거에 머물러 있느냐’,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서 새로운 이슈로 문제를 덮고, 또 그 문제를 덮을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 바쁩니다. 그들이 애도를 지우기에 분주할수록 그들의 책임 또한 희미해지고, 애도해야 할 재난과 참사는 다시 또 다시 반복되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망각, ‘설마 그런 일이 또 있을라구하는 현실 부정, ‘그 사람들이 운이 나쁜 걸 어떡하겠냐는 운명론적인 동정, ‘자기 탓인데 왜 사회나 정부 탓을 하느냐는 비방, ‘뭘 해도 바뀌지 않는데 어쩌겠느냐는 체념···, 애도를 훼방하는 것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애도를 계속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는 색출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첫째, 색출이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책임을 찾아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동선과 행위를 추적하고 모욕주고 혐오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색출을 말합니다. 필수적인 의료와 돌봄의 체계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이 끊겼고, 왜 우리는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아직껏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애도는 우리에게 시시각각 서로 다른 규모와 서로 다른 차원으로 벌어지는 문제들의 연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특정 집단의 사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분노의 분풀이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회적 연결고리를 망치는 불평등과 차별의 체계를 찾아내는 색출이 우리의 애도여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겪는 위기에는 끝이나 종식이란 없습니다.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한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이 비상사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대확산에서 바이러스가 아니라 불평등이 사람을 죽인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방역의 최대 방해물인 걸 확인했습니다. 명백한 경험을 외면하고 비상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각종 위기와 재난이 상시적이기에 더 무뎌지고 체념하는 우리의 세태에 맞서, 더 포함적이고 더 보편적인 인권 존중, 인권 존중에 기반한 기술과 재화의 사용과 배분, 이것을 위한 사회적 제도화가 요구됩니다. 불시에 벌어진 심장마비에서 사람을 소생시킨 건 전혀 모르던 낯선 타인의 심폐소생술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심폐소생술처럼 누구나를 지킬 수 있는 사회적 역량 만들기, 우리의 애도는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한 철학자는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체는 혈연이나 언어 같은 공통의 기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는 받을 것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주어야 할 것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인간적인 존중, 필수적인 치료와 돌봄, 주거·생계와 안전 보장 등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취약한 상태를 강요받은 존재들에게 당연히 최우선으로 제공해야 할 것을 나중에로 미뤘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과 주어야 할 것이 순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위기시에 믿고 의지할만한 공동체가 없습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들은 절대로 각자도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서로의 편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로나19 같은 위기시에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휘어잡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각자도생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힘없기에 우리의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붙잡고 같이 돌봐야 우리 중의 누구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습니다.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우리는 역설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을 돌보는 공동체를 위하여 애도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위기에 맞선 책임을 제도화한 공동체입니다. 책임은 희생이나 덕분에란 말로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적인 시스템과 자원 배치를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모든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필수적인 법과 제도, 사람과 자원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지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애도는 집합적으로 조직돼야 합니다.

제가 무서워하던 사막을 다르게 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 여러분도 익숙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내는 것, 아니 우물을 파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의미입니다. 코로나19 대확산의 희생자들이 웃는 별로 우리를 내려보고 우리가 웃는 별을 볼 수 있도록 애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이스라엘 규탄행동의 의의(2024년 2월 17일 팔레스타인 연대집회 발언문)

류은숙(인권연구소 활동가)

저에게는 4살 난 조카손자가 있습니다. 저는 이모할머니입니다. 제 조카손자는 코로나19 팬데믹에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그 아이를 거의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사진을 통해 볼 뿐입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울수록 가슴 한편이 쓰라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빠질수록, 즉 기후위기, 전쟁과 재난, 노동자·여성·아동·퀴어·장애인·노년·이주민 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대할 때마다 조카손자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을 사진에서 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붕대를 감고 있거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합니다. 그 아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입니다. .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제 조카손자와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비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와 다른 어떤 존재를 떠올릴 때, 자기와 가까운 존재부터 떠올리는 것은 익숙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입니다. 취약하고 애틋한 존재를 향한 마음 씀(care), 그 존재를 향해 몸과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삼아야 되는 것은 고통에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식의 위계와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왜 어떤 고통은 모두와 관계된 공통된 문제로서 공적인 장에서 논의되고, 왜 어떤 고통은 공론장에서 배제되는 걸까요? 왜 누구의 고통은 문제 삼는 것이 당연시되고, 누구의 고통은 불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걸로 얘기될까요?

우리가 여기 모여 팔레스타인 사람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저울질하고 순위를 매기는 행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관심과 책임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체제에 대해 항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요청받은 발언의 주제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얘기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입니다. 질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에 답을 하려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을 설명하려니 어렵습니다. 여기 모이는 분들은 저마다의 답을 이미 갖고 계실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 개인의 답을 간단히 나누려 합니다.

첫째,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입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마다, 춥다고 난방 온도를 높일 때마다,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매순간마다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누군가 쓰러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은 어떤 도덕 기준을 준수하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개인적으로 얼굴과 가슴이 화끈거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수치심을 통해 서로의 연결된 관계성을 느끼게 합니다.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신도 화끈거리는구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과 가슴을 옥죄는 죄책감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구나, 이어져 있구나를 확인하려 여기 모였습니다. 이 연결됨의 감각에서 우리는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만들려 합니다.

둘째,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은 우리가 이 감정을 공론화하고 집합적으로 대응하는 힘을 모을 때 열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수치심과 죄책감을 개인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감정은 절대 해소될 수 없고 변화를 요구할 뿐입니다. 집합적으로 책임지는 행동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학살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우리 정부와 기업과 여론을 붙잡고 늘어지고 추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목격자가 돼야 합니다. 제가 본 어떤 영화에서 학살자의 대사가 이랬습니다. ‘쥐 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마’, 그리고 그 대사의 영어 자막은 노 위트니스’(No Witness!)였습니다. 가해자의 의도와 달리 역사적인 학살 현장에는 언제나 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격자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방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목격자는 목격한 바를 왜곡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격자가 돼야 할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증언하고 집합적으로 항의하는 목격자가 되려 여기 모였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서로를 지키려는 목격자로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팔레스타인 사람이 겪는 불의와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해는 서로 연결된 공통토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권, 민주주의, 공동체, 인류,... 이런 말들이 거짓부렁이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토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조세력은 인류라는 것의 공통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강하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절대악,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또한 학살을 자행하는 행위 속에서 변형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적극적 목격자로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인간성, 존엄성, 인권, 이런 것들은 개별적으로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공통토대에 근거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의 존엄성과 인권이 짓밟힐 때, 우리의 발밑에서 그 공통토대가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당장 불의와 폭력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쓰고 대응하려 하지 않을 때, 고통에 대응하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삶을 우리는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 삶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연결과 이어짐도 계속되고, 고립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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