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범용] <2007년 2월 27일 인권오름 제43호>

최근 두발 자유화 등 청소년 인권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학교 안에서 사회적 현안에 대한 학생들의 활동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고등학생이 버마 민주화라는 문제를 부여잡고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 활동은 비록 대안학교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학교 당국의 인식만 바뀐다면 다른 학교에서도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이우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는 이주영 씨를 만났다.

고등학생의 눈으로 본 버마

이름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할께요. 버마는 일단 국제사회에서 정식적인 명칭을 미얀마라고 하고 있는데요, 지금 버마가 군부독재니까 거기에 대한 저항을 하는 의미로 실제로는 보통 버마라고 다들 많이 써요,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근데도 한글 프로그램에 ‘버마’라고 쓰면 자연적으로 ‘미얀마’라고 딱 고쳐지게 되고, 뉴스나 이런 데서 다들 “미얀마 선원 몇 명” 이렇게 하잖아요. 버마라는 이름을 좀더 많이 써주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말 그대로 (버마는) 정말 군부독재예요. 근데 저희 같은 군부독재가 아니에요. 물론 저희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겠지만, 버마 같은 경우는 소수민족이 있기 때문에 군부독재라고 하는 부분이 더 복잡해요. 원래 그 전부터 소수민족은 탄압을 받아 왔었고, 그렇게 딱 (군부독재가 들어서게) 되니까 버마인도 탄압을 받으니까, 되게 많이 복잡한데요.

커다랗게는 군부독재 때문에 많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군에 의한 강간, 노동이나 아니면 소년병, 군부독재이다 보니까 당연한 이야기고…. 그 외에는 추가적으로 소수민족들에 대한 탄압이 더 강하다든가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민주화를 원하는 거고 군부독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거고, 그러면 인권유린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될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활동의 시작: 인권영화로 받은 감명

작년에 제가 인권영화제에 가서 우연히 <책임회피>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밀레나 카네바 감독의 다큐멘터린데요. 일단 버마가 군부독재인 나라잖아요. 유노 카렛과 토탈이라는 다국적 기업이 버마에 들어가서 기업활동을 하다 보면 이게[군부독재와 연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거기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 고발을 하는 다큐멘터리예요. 다국적 기업의 행태뿐만 아니라 독재도 같이 말하는 내용인데,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나서도 죽 토론회가 열렸었어요, 그 인권 행사에서. 그래서 되게 많이 감명을 받고 충격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아! 이거를 좀더 많은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다. 버마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이런 생각이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마침 학교에서 사회참여 프로젝트라는 걸 해요. 주제를 정해서 하는 건데, 마침 잘 됐다, (그래서) 버마 민주화팀으로 계획서를 냈어요. 직접 아이들한테 이걸 설명하면서 관심있는 아이들을 모아 가지고 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일단 처음에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기 전에 저희가 토론회를 참가를 했어요. <버마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시민사회 토론회>였는데, 거기에 몇 명이서 참가를 하고, 그 후에 저희가 첫 모임을 가지면서 계속 꾸준히 정기모임을 가졌거든요. 정기모임 가지면서 어떤 게 문제고, 실제로 버마에는 어떤 현실이 이루어져 있고, 더 자세한 부분들을 알아가자 하는 식으로 정기모임 때 항상 공부를 했어요.

이우학교의 버마주간 선포

저희 팀은 한 10명 정도 같이 했거든요. 실제 활동은 (작년) 10월에 ‘버마 주간’이라고, 저희가 주간을 따로 만들었어요, 학내에서 저희끼리 팜플렛도 만들고. 그리고 실제로 어떤 활동을 하냐면, 앞쪽에서는 버마를 알리는 피켓이나 이런 걸 들면서 하고, 국제민주연대 쪽에서도 버마대사관에 보내는 엽서 같은 거를 저희한테 주셨어요, 많이. 그래서 그거를 저희 전교생이 같이 쓰는 행사 같은 거를 저희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식당 앞에서 계속 했고요.

10월 11일이랑 12일에 영상회를 했어요. 사실 처음에 제가 <책임회피>를 봐서 많이 감동을 먹었잖아요. 이 <책임회피>를 더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저 혼자 봤을 때 너무 그게 격해 가지고. <책임회피>랑 한 편 더 <불탑의 그림자>라는 버마 관련 다큐멘터리 두 편을 가져올 수 있었었어요. 좀 힘들었었는데, <불탑…>을 어렵게 구해 가지고, 그거를 학교 내에서 방과 후에 학생들한테 영상들을 통해서 보여줬고요.

그리고 토론회에서는 이상희 변호사님이랑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씨, 실제로 버마 운동을 하시는 버마인인 마웅쩌 씨나, 이렇게 되게 많이 오셨어요. 여기 NLD 한국지부에서도 몇 명이 오셨고. 그렇게 해서 학교에 남아있는 몇 분 선생님이나 학부모, 학생들과 다함께 토론회를 했어요. 어떤 게 문제이고, 어떤 질문을 하고,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그리고 좀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대우인터내셔널하고 엔지오 두 팀으로 나눠서 모의토론도 하고, 사람들한테 알려주면서 자유토론을 하고, 또 다른 주제로도 이야기해 보고, 질문도 하는 형식으로 토론회를 하고, 13일을 끝으로 버마 주간을 완전히 마쳤어요. 그 뒤에는 계속 외부에서 주최하는 활동, 예를 들어 지난 번 대우인터내셔널 본사 앞에서 항의집회가 있었거든요, 거기에도 참여하고. 

반응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반응은 정말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저같에도 방과 후에 영상회 있고 토론회 있는데 와서 한번 봐 달라, 한번 참여해 달라고 했을 때 사실 귀찮잖아요. 가뜩이나 학교 늦게 끝나는데, 6시-7시까지 남아라 그러면은. 그렇다 보니까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어요. 영상회 같은 경우엔 좀 호응이 좋아서 한 30-40명 정도 왔던 것 같구요. 토론회는 좀 소규모로 이루어졌어요, 한 15명 정도 왔던 것 같은데.

앞 부분에서 활동을 했었을 때는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모든 학생이 있으니까 이야기는 많이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아! 버마가 뭐다’ 이 정도는 알겠지만, 좀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프로젝트에 들어갔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고요.

태국 메솟의 버마난민촌 기행

저희 학교에서 고1들만 연말에 (해외로) 통합기행을 가요.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그 중에서 메솟이 있거든요. 태국에 있는 버마 난민촌에 직접 가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저희 팀으로 활동했던 학생들이랑 같이 통합기행을 통해서 태국에 있는, 버마 난민촌이 있는 메솟에 가서, 거기 학교 학생들하고 같이 교류를 하고…….

실제로 난민촌에 가서 저희는 영니우고등학교 학생들이랑 계속 교류하면서 학생들 기숙사에서 머물렀거든요. 거기에서 학생들이랑 인터뷰를 하고 직접 그 사람들하고 만나서, 그 사람들이 왜 국경을 넘었는지, 그리고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버마군이 어떻게 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됐는지, 이런 거를 이야기하다 보니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말은 잘 통하지는 않았는데, 가족이 살해당하고 죽었다라는 걸 본인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말투라든가 눈에서 보이는 그게 다르니까, 저는 사람 만나는 거에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 같고요.

“미래가 없다”는 가슴 아픈 진실

특히 영니우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태국같은 경우에는 버마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한번 인정하다 보면 계속 넘어올 테고, 그래서 난민촌에 하나로 딱 묶어 가지고 아예 못 넘어오게, 태국 쪽에서 활동을 못하게 가두어 놨다고 해야 되나, 이런 식으로 해 놓은 거예요, 난민촌을.

그래서 태국 정부가 합법적으로 그 사람들을 나가라고 그러면, (난민들이) 나갈 수밖에 없대요. 그래서 자기들한테 정말 미래가 없다고, 내일이 없고, 그리고 꿈이 없다고. 이렇게 태국에서 나가라고 그러면 당장 내일 나갈 수밖에 없고 다시 버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똑같은 말이라도 들리는 게 다르니까, 너무 현실감 느껴지고, 진실이 느껴지고…….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구상

지금 이제 기획을 하는 거는, 학교에서도 메솟에 갔다 오고 했으니까, 메솟에 갔다 온 아이들이 버마에 대해서도 좀 문제의식을 많이 느끼고, 학교에서 꾸준히 버마 엔지오 단체들을 후원하는 행사나 그런 거를 지금 생각 중이구요. 그리고 국제민주연대 쪽에서 제안을 하셨어요, 외국에 있는 버마 관련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다양한 자료들, 칼럼이나 이런 자료들을 번역해서 웹진같은 데 올리지 않겠냐고. 그래서 아직은 아니지만, (한번 해 볼까 하고) 계획을 하고 있어요.

저희 팀끼리도 이야기를 해 봤어요. 장기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아무래도 고2다 보니까 진로도 그렇고 학습도 그렇고 좀 힘들잖아요. 그래서 웹을 통해서 하는 게 시간이 덜 들고, 시간표도 다르니까 실제로 만나서 하는 것보다 온라인 상에서 웹진을 찾고, 특히 번역 같은 거는 개인이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코멘트도 온라인으로 죽 해 주면 되고, 그런 식의 활동을 하면은 그렇게 시간도 많이 안 잡아먹고 좋겠다라는 아이디어가 있어서, 그런 활동 위주로 좀 소규모지만 작게 오래갈 수 있는 활동. 그렇게 크게 활동을 하려는 생각은 안 하구요. 가끔씩 버마 항의 시위를 하니까 거기도 되는 사람은 계속 참여를 하고, 그 외에는 학교에서 제안하는 아이디어처럼 조금씩 후원을 받는다든가 그런 식으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안학교라는 특수성?!

아마 이건 제가 많이 느꼈던 건데, 일반학교에 있었더라면 정말 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워낙에 일반학교는 몇 천 명씩 되는데, 그거를 다 잡으면서 점심시간에 (홍보)하기도 힘들잖아요. 마땅히 할 만한 장소도 없고, 학교에서 당연히 지원도 안 해 줄 테고. 저희 학교 같은 경우에는 일단 이우학교 홈페이지가 많이 활성화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 홍보를 하고, 어디서 한다 저기서 한다 이렇게 공지를 올릴 수 있는데, 일반학교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게 불가능할 거고. 또 내신같은 것 때문에 다들, 특히 고등학생이 그런 걸[사회참여 활동을] 준비하기가 힘들 테고. 학교 덕을 많이 본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지원금은 나오지 않아요. 저희가 일단 자비를 털어서 다 쓰고, 지원금을 계속 건의를 드리고 있는데도, 아마도 지원되지 않을 것 같아요. 학생들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별도의 할당된 시간도) 실제로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학생들 간에 불만도 되게 많았고요. 수업 시간이나 이런 걸 빼주지 않고, 그냥 수업시간은 그대로 가되 남은 시간을 알아서 활용을 하라는 식이었으니까, 저희도 그런 게 많이 힘들었어요. 학생들도 많고, 시간 만들기도 힘들고, 정기모임 가지기도 힘들었죠. 그게 많이 애로사항이긴 했는데, 시간 어떻게든 맞춰서 하고 이랬죠. 제가 좋은 게 진짜 좋은 사람들 너무 많이 만났어요. 국제민주연대도 너무 많이 지원해 주시고, 이렇게 문제의식을 같이 느끼고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좋은 사람 많이 만나서 저는 그게 제일 득을 본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던 거, 이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서 제동을 거는) 그런 건 없었고요, 오히려 이런 게 많이 힘들었었어요.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사실 대안학교에 오게 된 이유가 뭐랄까? 사회적으로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학교에서도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래서 여기 온 학생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좀더 그런 데 관심이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실제로 버마 주간이나 이런 걸 하게 됐었을 때, 그렇다고 생각한 학생들이나 선생님이 많은 참여를 안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될까, 좀 화가 나기도 했었고. 학교 자체에서 제동이나 제약을 딱 걸면서 이걸 하지 마라 이렇게 하는 건 전혀 없었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문제의식을 많이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이런 활동을 지원하시는 분들이 왜 참여하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다른 엔지오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갔을 때 저희가 많이 느꼈던 게 뭐였냐면, 너무 자기들끼리 하는 것 같다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 결국 시민사회 토론회도 모두가 다 같이, 모르는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해야 되는데, 딱 갔었을 때 이걸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미 문제의식을 다 느끼고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계속 얘기해도 사실 그건 소용이 없잖아요.

실제 메솟 가서도 그 사람들이 원하고 우리한테 해달라고 했던 거는 더 많은 사람들한테 우리에 대해서 알려 달라, 우리의 상황을 말해 달라, 이런 거였거든요. 근데 대우인터내셔널 앞에 가서 항의 집회 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의 관심이나 이목을 많이 끌지 못했어요.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는, 물론 좀 체계적으로 아는 사람들끼리 좀더 다른 대안을 찾거나 항의집회를 하거나 이런 거는 중요하지만, 이벤트성으로라도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뭔가가 좀 필요하다고 많이 느꼈어요.

저도 같이 해야 되겠지만, 실제로 저희가 활동을 기획하다 보니까 저희끼리 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 짜지기도 하고, 많이 모으기 힘든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어쩔 수 없다는 걸. 그런데 최대한 일반인이 많이, 엔지오나 그런 단체에서 기획같은 게 일반인을 위한 기획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아는 사람만 계속 아는 게 아니라.

한국의 군부독재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더 당황하는 건 이런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다 얘기를 했어요. 문제의식을 많이 느끼고, 막 격렬해 가지고 얘기를 했는데, 이 사람한텐 결국 이런 거예요. 제가 이야기를 열심히 해도, ‘아! 그렇구나, 아! 정말 문제가 심하다’한 후, 저랑 딱 뒤돌아서면, 이제 다른 문제란 말이죠, 완전히. 왜냐면 저 같은 경우는 계속 꾸준히 이 활동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학교 활동을 통해서도 계속 해 왔으니까 (이 문제가) 저랑은 조금 가깝지만, 이 사람한테는 결국엔 일어서면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 부분이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어떻게 해야지 이 사람의 행동을 좀더 변화시킬 수 있을까? 사실 아는 것만으로는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어요. 일단은 첫 번째로 알리는 게 중요하지만. 두 번째로는 이 사람이 일어서서 어떻게 그 문제를 안 잊게 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외국의 문제니까 좀더 현실성이 안 느껴지잖아요, 그냥 말로만 해서. 예를 들어 노숙자 문제라든가 이런 거는 정말 바로 집 앞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 볼 수 있는데, 이거는 외국 문제니까 힘들죠, 아무래도.

(그리고) 저는 한국의 군부독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되고 비교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버마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 그런 거잖아요. 같은 군부독재를 경험한 것으로써 문제의식을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비교하게 돼서, 우리나라 군부독재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거는 다국적 기업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가 보게 된 영화, 다큐멘터리 자체도 다국적 기업의 인권유린을 알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다국적 기업이 정말 다국적으로 끼치는 악영향 있지요. 이런 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죠. 

 

[정리/범용] <2007년 2월 27일 인권오름 제43호> 

[정리/범용] <2007년 1월 30일 인권오름 제39호>

그동안 집회의 불모지였던 삼성 본관 앞 집회를 지난 19일 사상 최초로 성사시켜 언론의 주목을 한껏 받았지만, 정작 이들이 어떤 이유로 해고됐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해고노동자 집단으로만 인식될 뿐. 이들의 정직 명칭은 ‘전국 삼성에스원세콤 영업전문직 노동자연대’.

지난 해 8월 8일 삼성에스원은 ‘하도급 형식으로 경비업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내용의 경찰 공문을 보여주면서, 전날까지 멀쩡하게 일을 했던 영업전문직 노동자 1,700명을 하루아침에 해고해 버렸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영업행위가 경비업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경찰의 견해를 반박하고, 나아가 경찰과 삼성 측과의 드러나지 않은 밀월관계를 제기해 왔다. 이에 삼성에스원노동자연대 오세권 조직부장과 원영기 홍보실장을 만나, 삼성에스원 영업노동자들의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아래 오세권-오, 원영기-원)

 

영업 ‘사원’이 아닌 ‘전문직’

오: 에스원에서는 크게 영업직군과 기술직군, 출동을 받는 CS직군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영업을 담당했던 직군입니다. 저희들이 하는 업무는 일반 매장이나 인테리어 하는 오픈 매장이나 이런 데를 찾아다니면서 설치 권유를 해서 계약을 따오는 오다(order) 역할만 했습니다. (저희 영업전문직 말고도) 에스원에 영업하는 데가 있습니다. (근데) 영업사원만으로는 경쟁이 너무 심하니까 많은 오다를 창출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지금 현재 있는 이우희 대표가 영업력을 더 늘리기 위해서 외부에 있는 영업력을 많이 끌어들이면서 영업전문직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업사원이 있지만, 영업전문직을 별도로 만들어서 이렇게 같이 영업을 하다 보니까, 영업전문직을 만든 이후로 회사는 급성장을 하게 되었던 거죠. (그게) 2002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 일단 영업사원들은 기본급을 줘야 되고, 유지비도 줘야 되고, 그리고 필요한 물품도 대 줘야 되고. 이러한 영업사원들 1명을 데리고 있을려면은, 그냥 영업사원이 아무 일 안 하고 돌아다녀도 비용이 2백5십만 원 정도가 들어가고, (이외에) 영업사원들한테 월급을 줘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럼 이 영업사원이 회사에 벌어가지고 들고 와야 하는 돈이 1달에 5백 얼만가 그런 금액이 돼요.
근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계약을 한 건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안 줘요. 들어가는 비용이 제로입니다. 10만 원짜리 계약을 1건 해왔으면, 어, 너 고생했으니까, 35만 원을 줍니다. (회사에서 저희한테) 35만 원을 주고 3달 반 지나면 준 돈은 뽑지 않습니까? 그럼 그 다음부턴 계속 회사의 이득으로 가는 거죠. (그 이후에는 저희한테) 한 푼도 안 줘요, 백년이 가든, 천년이 가든. 그러니까 가장 싼 인력이죠.

오: 제가 저번에 계약한 물건을 다 뽑고, 중지나 해약된 물건, 미개시된 물건 다 빼 보니까, 지금까지 영업을 해서 회사에다 벌어다 주고 있는 비용이 연간 한 1억8천(만원) 정도를 벌어주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저같은 사람 10명만 하면은 연간 18억 정도를 계속 벌어다 주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쌓이면 쌓일수록 회사는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게 되지만, 저희들이 실질적으로 받는 거는 처음에 받는 거 이상 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저희들을 쓰면서 비용 지출되는 거는 거의 없다고 보셔야죠.

원: 약 2년 정도까지는 지금의 특수고용 형태가 아닌 그냥 계약직 형태로 고용을 하다가, 2003년 중순부턴가, 갑자기 사업자를 내라 종용을 해가지고, 면세사업자라는 걸 내면 세금 3%를 떼고 나머지는 다 수입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사업자를 내라고) 제시를 한 거죠. 그게 저희는 좋았다 라고 생각하지, 속였다라고 생각은 못했죠. 그런 게 특수고용직이고 언제든 자를 수 있고, 뭐 이런 얘길 들은 바가 없어요. 계약서 상에도 1년마다 항상 갱신하게 되어 있고, (그만 두려면) 한 달 전에 미리 서로 통보하게 돼 있고.

경찰공문의 진실과 거짓

오: 저희들이 회사에서 잘릴 때, 각 지방 경찰서에서 에스원 각 지사에다 공문을 다 보냈습니다. 어떤 식의 내용이냐면, 이게 [경비업을 하도급 주는 것이] 불법이라 하니 (하도급 형식의 영업전문직에 대해) 조치를 해라, 조치하지 않을 경우에 영업전문직 사원은 3천만 원 이하의 벌금과 징역 3년 그리고 회사는 영업정지 3개월에 처한다, 빨리 조치를 하라는 공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그거를 근거로, 자 봐라, 읽어 봐라, 경찰청에서 이렇게 나왔으니까 너 지금부터 영업하면은 벌금이다, 명함 다 내고 나중에 회사에서 다시 정직원을 채용할 때 우선권을 너한테 줄 테니까 (사직서에) 싸인을 해라 (라고 했던 겁니다).
이제까지 저희들이 조사해본 결과, 지금 저희가 유추해 보는 거로는, 에스원에서 치밀하게 변호사랑 다 이 내용을 가지고 문구를 만든 다음에, 질의건과 회신문건까지 (경찰청에) 같이 줬고, 경찰청에서는 다시 그거를 되돌려준 것밖엔 없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여기에 있는데요, 저희가 해지를 당했을 때 마포에 있던 영업전문직 최희준이라는 사람과 박우식이라는 사람이 너무 억울해 가지고 남대문 경찰서로 찾아가서 왜 이렇게 해고를 했는지 질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서에서) 자기는 내용을 잘 모른다, 알아본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 그게 오전이었는데, 오후에 손경식이라는 분이 최희준 씨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사람 얘기가 뭐냐면, 우리는 여러분들을 자르기 위해서 이렇게 (경비업을 하도급 주는 것이 불법이라는) 유권해석을 (먼저) 내리지 않았다, 이 질의는 에스원에서 한 것이다, 그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근데 남대문경찰서에서 담당하던 손경식이라는 그 분은 ‘자기는 처음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나 개인적인 주관으로 얘기했다’ 이렇게 또 말 바꾸기를 하거든요.
저희가 경찰청에 1인 시위를 쭉 해오면서 유권해석을 내렸다는 우정식 경위를 만나봤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유권해석을 내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내용도 몰라요. 경비업법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에스원의 현 상태가 뭔지도 모릅니다. 정작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에스원이었거든요. 근데 그 내용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저희들이 따지고 들었죠. 전혀 답변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청 생활안전과에 있던 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 경비업이라고 경비업법에 정해져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이냐면, 감지기를 설치해서 감지신호를 받고 출동을 가서 사고대처를 하고 사후에 보상하는 것이 경비업이다라고 돼있습니다. 그럼 실지로 순수 영업행위, 경비업을 하기 이전에 영업행위, 거기에 대한 최초분 수금이 끝난 상태에서 경비가 개시가 되기 때문에 그 경비업이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활동만이 저희의 활동이기 때문에, 저희는 경비업하고 상관이 없기 때문에, 경비업 위반이 아니라고 하는, 1월 5일자로 법제처의 판결까지 저희는 받은 상태입니다.

대량해고의 진짜 이유는?

오: 냄새가 좀 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이 있냐면, 경비3사에서 요 건에 대해서 대응하는 방식에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2007년도부터 특수고용직도 4대 보험을 의무적으로 나라에서 들게 해주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요 부분이 이제 자기들한테 입맛이 맞아떨어진 거죠.
예전에 저희들이 500%의 페이(pay)를 지급받았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10만 원을 계약을 하게 되면 50만 원을 줬거든요. 근데 (최근 영업전문직을 영업사원으로 전환하려는) 다른 회사의 새로운 계약직 고용 형태를 보게 되면, 4대 보험을 회사에서 줘야 되고 기본급도 줘야 되니까, 예전에 지급하던 페이의 한 300% 정도밖에 (영업사원들에게) 안 주거든요. 최대 3.9배수까지 주는데, 실질적으로 이걸 계산해 보니까 급여는 오히려 줄어들고요, 우리 비용 가지고 4대 보험을 드는 꼴이예요.
한 회사는 정규(영업)직원이 20~30%고, 저희 같은 영업전문직이 70%였거든요. 그러면 회사에서는 당장 영업을 못하게 되고 엄청난 손해를 볼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업전문직이 불법이라는 경찰 공문에 대해) 아무런 법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와가지고는 새로운 계약형태를 제시를 하니까, 저희들이 의심을 하는 겁니다. 냄새가 조금 난다. 담합하지 않았나! 저희들이 요런 부분은 언론에다 얘기를 못합니다. 그냥 생각만 추론만 할 뿐입니다. 근데 돌아가는 상황은 저희가 생각하는 부분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원: 지금 회사에서는 자르고 나서 바로 손해라고는 얘기를 하지만, 영업이란 게 계속 저희가 광고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아, 그래도 저희 거 써주십쇼, 광고를 하고서 지나간 게 그 동안 몇 년인데, (저희들을) 잘랐다고 해서 그 광고 효과까지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실질적으로 절 자르고 나서 한동안은 저희 광고 효과를 보겠죠, 그걸로 인해서 회사는 당장간은 손해볼 게 없는 거고. 몇 개월이 지나면 (수익이) 좀 떨어지겠지만, 그때까지 영업사원들이 채워 놓으면 되니까, 저희들한테 나갈 작은 비용을 아끼겠다는 거죠.

삼성에스원연대의 시작

원: 저희가, 실제 조직부장님하고 저하고 지금 이렇게 같이 다니고 얘기하고 하지만, 서로 살고 있는지도 몰랐던 사이죠. 왜냐면 각 지사에서 따로 따로 일했던 사원들이기 때문에. 지사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 외에는, 그 근처 지사나 가끔 알 수 있을까 거의 모르고 지내고 있는 사이들이니까 뭉치지 않을 거다라고 하는 아주 단순한 (회사의) 판단! 저희도 솔직히 뭉칠 생각도 못했죠. 

근데 인터넷에 까페를 한 사람이 만듦으로써, 어! 까페 만들었대, 이게 잘못됐대 라고 하는 게 뭉치면서, 서로서로 따로 알아본 사람들이 그 쪽으로 합세를 하면서, 내가 알아보니까 이게 회사가 장난친 거 같더라, 법적으로 문제가 없더라, 변호사한테 물어봤더니 이거는 눈에 뻔히 보이는 속임수다 라고 얘기를 한다더라, 아무리 이 법이 맞다고 할지라도 회사는 우리를 계약해지할 아무런 이유가 안 된다, 계약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근거들이 나오면서 저희들이 뭉치기 시작을 한 겁니다.

회유와 협박은 삼성이 초일류

원: (사직서의) 서명 형태가 그냥 내가 활동하기 싫어서 그만 두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문제를) 걸어도 본인이 그만두지 않았냐 이런 식으로 발뺌을 하려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 그런 계약[사직]서.
첫 계약[사직]서가 나왔을 때, 이딴 계약[사직]서에다가 누가 싸인을 하겠냐, 이건 완전히 우리한테 불리한 것만 나와 있지 않았냐 라고 했더니, 조금 완화를 시켰습니다. 그게 1주일도 안 돼서 바뀌었어요, 사직서 형식의 양식이. 그거 보고서도 이런 거 이런 부분이 또 잘못됐지 않았냐, 왜 너네한테 유리한 부분만 넣냐, 이런 거에 누가 싸인을 하냐 라고 했더니, 또 바꿨습니다. 어느 회사 사직서 양식이 1~2주 사이에 수시로 3번, 4번 바뀌겠습니까?

오: 협박과 회유. 쉽게 얘기해서 싸인만 해 주면 나중에 타결될 때 동일한 조건으로 해 주겠다(는 겁니다). 문구도 불리한 조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지우면서까지 자기 이름 이렇게 서명해 주면서 이렇게 회유를 하면서……. 그러니까 저희들이 받을 적립금하고, 투쟁할 때 넣었던 비용이랑, 그 다음에 약간의 향응을 제공하면서 많은 회유를 해 왔죠. 그래 지금은 저희들이 19명만 있습니다.

원: 추석이 끝나면서부터 계속 이 인원이 더 이상 줄지 않으니까 회사 측에서는 좀 뜸해졌죠. 회유 작업은 뜸해지고, 이제 협박으로 들어가는 거죠. 경찰에 고소하고 고발하고 하면서, 가족들 찾아가서 말로는 분신할 계획이 있다(고 하는 거죠). 계획은 자기들이 세운 거죠. 저희가 누구를 죽이겠습니까? 서로 살자고 지금 투쟁을 하는 사람들인데, 자기네들이 계획을 세워가지고 자기네들이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런 회사가 지금 대한민국의 초일류기업이고 대표기업이라고 하는 회사입니다.

도급 현실과 법대로 한다면?

원: 경찰청에서도, 아까 생활안전과 담당자도 말씀을 하셨는데, 그 사람도 자기 직무유기입니다. 실질적으로 자기가 관리해서 자기가 유권해석을 내릴 정도의 회산데, 그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요. 공사팀들이 정식 직원이 한 명도 없습니다, 3개 경비업체가. 도급의 하도급을 받고 있어요, 또. 그런 불법적인 형태로 계속 사용을 하고 있는데, 여태까지 그걸 몰랐다는 거예요. 그건 영업전문직이 생기기 이전부터도 있었던 건데도.
그리고 1588도 실제로 도급입니다. 오토바이 근무자, 실제로 출동을 가는, 그것도 은행에 키를 가지고 있는 이 친구들이 정식 직원이 아니예요. 도급을 받은 직원들이예요. 이런 것들을 다 무시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완전히 저희들만 잘라 내기 위한 질의였었고, 저희들을 잘라 내기 위한 회시였었다 라는 거죠.

그 답변대로라면 (지금 경비업을 하시는 분들까지도)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법제처 답변대로 해도 문제가 되는 소지들이 있습니다. 법제처 답변대로 하면 저희는 (경비업이 아니기 때문에 하도급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법제처의 새로운 답변이 나왔어도 문제가 되고, 경찰청의 질의 회시 답변으로도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고용 상태가 지금 현재 그 상태대로 가고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니까! (답변대로 하면) 정직원을 빼놓은 나머지 외부 직원들은 다 잘라야 됩니다.

법적 대응이 아닌 투쟁을 선택

오: 저희들 같은 경우 처음에는 법으로 하려고 했거든요. (투쟁과 법적 대응을) 같이 병행을 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법으로 해 가지고는 삼성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엑스파일 이상호 기자나 많은 그런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핸드폰 위치추적 사건. 그거는 증거가 명백한데도, 수사할 의지도 없고. 저희들이 아무리 법적으로 해 봐야, 이거는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저희들이 힘든 투쟁으로 가게 된 거지요. 그런데 저는 (고소가) 다섯 개 정도 걸려 있습니다. 우선 명예훼손, 업무방해, 폭력, 뭐뭐 여러 개를 걸어놓고, 저희들한테 심지어 노동자, 해고자란 표현을 할 때마다 100만 원씩 부과하는 뭐 이런 것도 다 걸고요. 악랄합니다, 악랄해.

원: 저희가 요구하는 부분이 굳이 법보다는 진실을 밝혀달라는 거거든요. 질의한 자가 누군지, 왜 이런 질의를 했는지? 생각을 해 보십쇼. 길을 가다가 갑자기 문득 경비업이 생각나서 물어보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이거를 법적으로 밝혀라 그래도 경찰청에서 알려줄 수 없다, 그냥 그게 법입니다. 재판이고 뭐고 갈 필요가 없이, 이거는 개인정보 상 누출할 수가 없다, 그냥 딱 그래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양심선언을 하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계속 투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스스로 잘못한 거를 인정하라는 거죠, 회사 측에서. (그리고) 저희가 해고될 사유가 아니라는 법제처의 답변까지 나왔고, 어느 자문변호사한테 물어 봐도 계약서 자체가 위법이 아닌데 왜 잘랐냐 이거죠. 그것이 위법이라 할지라도 자를 사유가 안 되는데……. 그러니까 도로 원직복직 시켜 달라는 거죠.

 

[정리/범용] <2007년 1월 30일 인권오름 제39호>

[정리/범용] <2007년 1월 2일 인권오름 제35호> 

1994년 안성에서 의료생협이 처음 생긴 이래, 인천평화(1996년), 안산(2000년), 원주(2002년), 서울(2002년), 대전(2002년), 전주(2004년), 울산예장(2004년), 함께걸음(2005년) 등 의료생협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의료생활협동조합, 즉 의료생협이란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협동하여 가족과 이웃의 의료와 건강, 생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협동조합’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의료생협은 아직까지 생소하다. 이에 전주에 있는 의료생협 무지개 한의원을 찾아 김수정 상임이사로부터 건강한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의료생협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어려움을 들었다.

 

의사 중심 진료는 안 된다

각 의료생협이 자기네들의 특징이 있는 거잖아요. 저희같은 경우는 처음에 ‘청년 한의사회’라고 학교 다닐 때 운동했던 한의사들이 중심이 되구요. 거기서 학생운동 내지는 시민운동, 이러한 사회개혁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만든 거거든요. 초기에 30명 정도가 모여 가지고 3년 정도 연구모임을 했어요. 3년 연구모임 끝에 2004년 3월에 창립총회를 해 시작을 했었거든요.

저희의 배경은 한의사들이다 보니까, 보건의료에 문제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진료가 전부 의사 중심인 거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 진료는 원래 소비자 중심인 환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문제에서 시작을 한 거거든요. 그래서 보건의료라는 문제가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가야 된다. 이 두 개가 가장 큰 이유였거든요.

일상에 소비자들이 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의사에게 진료 받고, 그 속에서 내가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만성질환자 교실, 고혈압, 당뇨 이런 거, 체조교실 이런 것들에 참여하고,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교육 프로그램이 많으니까 교육도 받고. 요즘 만성질환들이 나 혼자 어떻게 잘 한다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생을 통해서 그것을 예방하고 증진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차피 건강의 문제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건강이나 생활, 나에게 주어진 이런 일상의 것들을 같이 모여서 협동이라는 방법으로 해결을 함으로써, 건강한 지역사회,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자, 이런 취지에서 처음에 만들었던 거거든요.

전주의료생협의 활동들

저희가 한의원이 하나가 있고, 제가 하는 것이 사무국 사업이거든요. 사무국에선 주로 보건예방 활동, 건강증진 활동, 또 지역사회 교육과 관련된 교육활동을 하거든요. 또 하나는 복지활동으로 지금 재가간병팀이라고 있거든요. 간호사가 6명 있구요, 재가간병팀이 13명이 있고, 사회복지사가 1명 있어요. 그래 20명이 모여 가지고 실제 재가서비스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거거든요. 의료생협이 했을 때의 장점은 이 사람들이 의료 셋팅도 있고 복지 셋팅도 있기 때문에, 보건의료와 복지를 한꺼번에 보고 한꺼번에 줄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요.

지역사업에는 건강마을축제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지역주민들 대상으로 건강과 관련된 건강복지 박람회 이런 것도 하거든요. 그런 박람회를 통해서 건강에 대한 운동들 그리고 걷기 대회도 하거든요. 그리고 동네 경로당을 돌아다니면서 어르신들과 같이 체조교실도 하거든요. 찾아가는 복지로 체조교실 하고, 또 문제가 있으신 분들에 대해서 교육하고. 이런 활동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면서, 보건 의료에 있어 소비자가 항상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가 항상 주체가 되어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재발견하고, 이런 활동들을 계속 하고 있어요.

참여의 형태, 소위원회와 소모임

조합원 참여의 형태는 소위원회가 있거든요. 소위원회 같은 경우는 지금 네 개가 운영되고 있거든요. 교육소위원회라 그래서, 의료생협이나 생활협동조합 교육을 하는 형태가 하나 있고요. 경영이용위원회라 해가지고, 경영과 관련된 내지는 이용과 관련된 편의를 돕기 위한 이런 것도 하고요. 조직홍보소위원회가 있거든요. 말대로 조합원들에게 계속 연락하고 소식지 만들고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게 하나 있고요. 지금은 보건복지위원회가 있거든요. 여기서는 모여서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을 뭘 할 것인가 이런 테마들을 잡아가는 모임이에요. 각 위원회마다 5명에서 10명씩 있거든요.

또 하나는 소모임이 있어요. 소모임 같은 경우는 걷기나 요가, 등산, 사진, 이런 모임들이 있는데요, 요즘 많이 되는 것은 확실히 걷기가 많이 되거든요. 근데 지금 겨울이어서 겨울에는 좀 쉬었다가 봄 나면 다시 시작하는 이런 형태로, 주에 한두 번씩 모여 전주 천변 걷기, 이런 식으로 해 가요. 저희가 전에는 비만모임도 했었거든요. 이거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호응도는 상당히 좋았어요. 아침마다 모여 체조하고 자기 칼로리 계산해 보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지역주민의 참여의 폭은 항상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플 때만 가는 게 의료?

아플 때만 가는 게 의료거든요, 우리 인식은 항상. 그러기 때문에 의원이나 한의원을 이용하지 않으면 내가 조합원이어도 가기가 뻘쭘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참여의 폭을 찾지도 못하고, 여전히 그런 게 어려운 게 좀 있어요. 근데 의료생협이라는 게 알리기 애매한 부분이 많거든요. 사람들이 금방 이해가 안 오는. 협동조합 같은 데 농협은 아니고, 이게 의료라고 하니까 병원 수입을 내기 위한 왠지 영리를 추구하는 것 같고.

근데 조금 우리가 긴 호흡을 가지고 본다면, 이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의료의 필요성을 느끼는 거거든요, 내 생활에서 건강의 필요성이. 그러다 보면 우리나라도 곧 머지않아, 나이 먹어가면서 그 필요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내가 내 아파트 안에서 작은 소그룹 만들어서 운동도 하고 이런 형태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나도 한번 참여해 볼까!

조합원의 자격은 전북지역에 살면 되고요, 회비 10만원을 내야되지요, 저희가 나가서 무료 방문진료도 옛날에는 거의 주에 1번 정도 했었거든요, 지금은 월에 1-2번 정도 하는데요. 경로당마다 계속 돌면서 간호사들이 건강체크도 하고, 문제 있으신 분들은 가까운 병원 가시라고 종이도 써드리고 하니까, 그런 것들을 보고 ‘아! 나도 한번 참여해 볼까’ 그리고 비만 모임이나 이런 소모임들을 하는 거 보면은 ‘나도 한번 가볼까’ 이렇게 하시면서, 직접 오셔서 10만원 들고 가입하시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요즘 조합원 최근에 한 100명 정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이 취지에 동의해서 이런 사람들이고.

근데 사람들이 ‘조합원 혜택이 뭐야?’, 인제 조합원 되면 그런 거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근데 이거에서 막히는 거예요. 당장 줄 수 있는 혜택은 별로 없는 거잖아요. 내가 내 병원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소모임이나 이런 활동들도 자유롭고,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설명한다는데, 그것이 아직 전체적으로 공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경영 때문에 갖는 어려움

저희가 매월 적자가 한 400(만 원) 정도 되거든요. 폭이 꽤 크죠. 그래서 1년에 한 5천(만 원). 그냥 말로는 5천이고, 거의 한 7-8천(만 원)은 되는 거 같아요. 3년째 계속 그러고 있거든요. 초기 자본을 까먹고 있는 쪽이고, ‘꼭 의료생협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한의사들이 많이 출혈을 하는 편이예요.

의료생협마다 경영 때문에 갖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거든요. 근데 이것이 저는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있어요. 결의하고 오는 의사, 이것이 아닌 이상은 내 병원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거 아니면 우리 거면 사람이 태도가 달라지는 거 누구나 그러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그런 것에서 오는 협동조합의 한계가 아닌가 그런 고민도 해요, 요즘은. 왜냐면 ‘내’ 거 아니고 ‘우리’ 거기 때문에 조금 느슨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문제들이 약간의 딜레마에요.

의료생협, 그래도 해 볼만하구나!

그래도 의료라는 게 여전히 의사 권력으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있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이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고, 그 중에서 건강하기 위한 것으로서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나누는 건강, 이런 것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그나마 아직은 그 필요성에 의해서 스스로의 당위가 앞서는 것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변하는 건, 진짜 이건 어지간해서는 어려운 거잖아요. 똑같이 고혈압 가진 4-50대를 따로 모으거든요. 그럼, 이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몰랐던 거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아! 그렇지’ 내지는 ‘뭘 해야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이 운동을 하자고 얘기도 하고, 자기 건강을 위해 스스로들 뭔가를 찾아낼 때, 그럴 때 ‘아! 해볼만하구나. 이제 건강이 단순히 의사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약만 먹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할 지 스스로를 견인하는 방법을 배우는구나’ 이런 걸 느낄 때, 정말 해 볼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리/범용] <2007년 1월 2일 인권오름 제35호> 

[정리/범용] <2006년 11월 29일 인권오름 제31호> 

인천 부평구의 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우연찮은 계기로 마을도서실을 만들어 6년째 운영해 오고 있는 김영곤ㆍ김동애 부부. 한때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김영곤 씨가 ‘마을도서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보의 꿈은 무엇일까? 김동애 씨가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공부방을 진행하면서 얻은 대안교육의 경험은 무엇일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마을도서실을 찾아 이들 부부의 훈훈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영곤)

제가 노동운동을 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쯤 되니까 운동권들도 노동조합 하는 것하고 진보정당 의회로 가는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열외인 거예요. 민주노동당에 조직되어 있는 민주노총, 전농, 그밖에는 환경운동, 참여연대 같은 조직된 부분만 자기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 주장만 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찬밥인 거예요. ‘원래는 이렇게 사는 취지가 아닌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하다가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왔거든요.

처음 접해본 서민의 삶

여기가 한 15평짜리 되는 집들인데, 어떤 집은 가구주 남자의 소득이 한 60만 원쯤 되는데, 부인이 가내 부업하고 딸들이 벌어서 200만 원 정도 되는 데가 있고, 안 되는 데가 있고. 처음에 와 보니까 저녁 때가 됐는데도 애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거예요. 밤 10시가 되도록 애들이 떠들고 울고 그래도 안 불러들이는 거예요. 대개 초등학생 같으면, 날 어둑어둑해지면 들어와서, 이제 씻기고 숙제도 시키고 밥 먹이고 재우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처음 1998년도에 이사 왔는데요, 이해를 못했어요, 왜 그런가? 나중에 한 6개월 돼서 보니까, 엄마는 가내 부업을 하니까 애가 이걸 발로 차지 않으니까 좋은 거고, 아버지는 야간을 들어가거나 나갔거나 하니까 잠도 자야 되고 텔레비전도 봐야 되고, 애들이 밖에서 노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예요. 공부같은 거는, 뭐, 챙기는 사람도 있지만은……. 40가구인데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꽃 아줌마’와 마을도서실의 탄생

마침 보니까 여기에 창고가 있더라고요. 이게 아파트의 공유 건물인데, 실세가 개인적으로 이용하고 몇 사람 붙어가지고 돈도 빼먹고 이런 악의 공생관계를 하면서, (도서실을 만들자고) 제안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 그래서 애 엄마하고 저하고, 방치되어 있던 이 주변 화단을 3년 정도 파서 전부 꽃으로 가꿨어요. 애 엄마는 별명이 ‘꽃 아줌마’가 됐어요. 그래서 한 3년 정도 했는데, 하다 보니까 학교에서 애들이 평가를 받아오는데 관찰력이 뛰어나다 이렇게 평가를 받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치원 들어가기 전 애기 때부터 애들이 꽃을 보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계속 있는데, 색감을 익히니까 그런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오는 거예요.

이래 그럭저럭 지냈는데, 2001년 추석 전에, 이 뒤에도 재개발을 했어요. 재개발하면 쓰레기를 다 갖다 버리잖아요, 동네 거를. 동네 거를 다 버리면서 꽃도 다 잘라다 버린 거예요. 그러자 젊은 엄마들이 “자기네 어린애들 감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꽃을 왜 자르냐” 이래 가지고 반란이 일어난 거죠. (반란이) 일어나서 그 반장하고 관계된 사람들 권력을 뺐은 거예요. 그걸 깨버리고, 주민총회를 열어서 여기를 도서실로 개조하기로 결의를 한 거예요.

사람들이 나서 가지고 다 공사하고, 바닥도 다시 하고, 전기하는 사람 전기하고, 또 책상 같은 거는 보면서 다니는 사람이 버린 거 갖다 놓고, 또 책꽂이는 다 주워 오고, 그렇게 해서 도서실을 만들기로 했는데, 책을 구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이런 뜻이 있으니까 집에서 안 보는 책 좀 달라고 했죠.

도서실의 확산과 공동체의 복원

그거를 해서 여길 쭉 쌓는데, 몇 달 지나면 책이 쭉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 고향이 당진인데, 제가 이런(마을도서실) 얘기를 했더니, 시골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자기네들도 이걸 하겠대요. 그래서 거기 교회에다가, 이 책을 뚝 잘라 주면 한 2천 권 나와요, 거기다가 책하고 책꽂이하고 실어서, 시골에는 농경차량들 많으니까, 여기 와서 이걸 보고 수거해 가서 개막도 하고…….

그 다음에도 책이 계속 들어오는데, 한 2~3달에 한 번씩 책을 분양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전국적으로 한 30군데 넘어요, 다해서. 그 다음 단계에 나오는 것이 유기농 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 다음에 이걸 한 3개 내지 4개를 묶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당진에 3개, 아산에는 2군데, 홍성에 4군데, 전라남도에 6군데, 추풍령에 2군데, 상주에, 경기도에 몇 군데, 인천에, 강원도에…….

그룹별로 묶어줘서 자기네들끼리 연계해 가지고, 매개체는 도서실과 동네 애들 챙기는 거지만은, 내용적으로는 지역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또 유기농산물을 어떻게 할 건가. 유기농산물 같은 경우는 유기농산물로의 전환이 한두 해 되는 게 아니지만은, 도시민 생활협동조합과 연계해서 정보를 주고 또 팔 수 있다는 전망을 주고, 이렇게 지그재그로 양쪽을 짜면서 나가는 거죠.

헌 책을 받으니까, 책을 공급하는 사람, 여기(마을도서실)는 일정하게 터미널이죠, 모델이고, 그리고 받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쪽에서 흐름을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또 오기도 하고, 갈 때는 책과 정보로 가지만, 올 때는 좋은 농산물 생산해서 이쪽 도시로 공급해 주고, 이 사람들은 또 의무적으로 책임껏 소비해 주고……. 그러면 정부한테 기업한테 돈을 안 받아도 돼요. 책이 좀 헌 거긴 하지만은 정부의 지원도 안 받고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는 다른 측면까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작게 보면 도서실 운동이라고 해도 되는데요, 크게 보면은 정보화 사회에 맞는 두레의 현대화라고 볼 수 있죠.


(김동애)

교육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큰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 사회 자본이 지배하면서 모든 것을 그 구조 안에서 수탈해 가잖아요. 근데 이 경우에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도서실이) 채워지면 물 흐르듯 가야 된다, 그러니까 나눌 수가 있는 거죠. 한참 많이 들어올 때는 2~3달에 한 번씩 여기가 꽉 차요. 그러면 다른 데로 보내는데, 이게 교육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나누면서 배우는 가치

처음에는 아이들이 막 서운해서 아주머니들도 서운해하고. 이 책을 그냥 거저 주니까, 이게 내 거였는데, 내 소유였는데, 그게 통째로 확 비거든요. 여기가 훵하게 비어요. 그러면 저부터도 “아니, 어떻게 여기서 볼 거는 놔두고 보내야지, 그렇게 싹쓸이해서 보냈느냐”고 그러고…….

그랬는데 그게 참 신기할 정도로, 그렇게 보내고 나면 또 채워져요. 그게 교육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결국 나눠 갖는다는 것을 그리고 물질이라는 게 큰 흐름 속에서 잠깐 내가 소유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사실 그게 일종의 철학적인 건데요, 우리 교육 딴 데서는 (이것을 배우는 게) 가능하지 않잖아요.

소외의 현장에서 시작된 글쓰기

일주일에 한 번씩 제가 글쓰기를 하거든요. 2002년부터 시작했어요. 이 지역 엄마들이 기껏해야 부업해서 30만 원 내지 50만 원 버는데, 학원비로 다 나가요. 그런데 애들은 (학원에) 그냥 갔다 오는 거예요. 거기서도 학교에서 주변부인 것처럼, 사교육을 받는 그 현장도 애들은 소외되고 있더라고요. 그 문제를 지켜보다가 ‘이래서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대학 강사 문제 가지고 싸움을 99년부터 시작했는데, 한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쪽으로는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면서 대안교육 현장을 돌아봤어요, 전국적으로. 근데 거기도 소위 말하는 소외 계층을 위하는 곳이 아니더라고요. 소외 계층이 갈 곳은 없는 거예요. 교육의 문제, 제도권 교육에서의 소외 문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의 소외 문제를 해결할 곳은 바로 이 곳이지, 그 산 속에 있는 대안학교가 아니겠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엄마들이 논술학원처럼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한테 부탁을 하면 “난 학원선생이 아니다. 난 그렇게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못한다” 거절을 해요.

개발 광풍에 휘청거린 공부방

몇 달 전에, 그 쪽 역부터 이 끝까지 개발한다고 바람을 누군가가 넣었어요. 그래 가지고 이 동네에서 몇 집이, 저희 학부형인 몇 집이 거기에 넘어간 거예요. 이 사람들의 논리는 뭐냐면, 이게 개발이 되면 이 집이 기껏해야 4천이나 5천밖에 못 받는데 1억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느냐, 그 계산을 하더라고요. 근데 사실은 삶의 터전을 뺐기는 거고, 어딘가로 가서 전세 세입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자기 집 가지고 있다가. 근데 그거를 모르더라고요,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그러면서 이제 갈등을 생긴 거죠. 그 쪽에서 생각할 때는 몇 년을 두고 보면서 우리를 의지했는데, 정말 이해의 순간, 자기들이 볼 때는 돈을 왕창 벌 수 있는 순간에 우리가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돌아서 가지고, 글쓰기 반에 한두 집이 애들을 안 보내면서 완전히 저에게도 막 대하더라고요, 사람들이요. 살면서 그런 상실감이나 배신감은…….

제가 공들였던 아이들의 부모가 그야말로 싹 변해 가지고, 그렇게 사람이 다른 모습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공부방도 없애버리려고, 그러니까 이 공부방을 만든 사람들이 이 공부방을 없애버리려더라고요. 사실 이 아파트도 저희 집이 아니예요. 그래서 ‘아, 이제 떠날 때가 된 건가’ 이사 갈 생각도 하고, 공부방을 접어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다시 중심이자 원천으로

그러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동네 꼬마가 만화천자문 책을 들고 가더라고요. 보니까 이 쪽 옆에는 비닐봉지에다 엄마 심부름인지 뭔지를 들고 가더라고요. 얼마나 힘겹게 만화천자문을 보고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이 낑낑대면서 가던지, 아이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되잖아요. 제가 이사를 가든, 쫓겨나든, 아니면 여기서 살든 상관없이.

그래서 자전거에서 내려 가지고, “얘, 너 어디서 사니? 이거 네가 보는 책이니?” 그러니까 그렇대요. “재밌니?” 그러니까 재밌대요. “그러면 책이 많은 데 가르쳐 줄까?” 그랬더니 가르쳐 달래요. 그래서 여기를 가르쳐 줬어요. 그랬더니 어디서 형이 나타나더라고요. 형이 나타나면서 하는 얘기가 저희도 여기서 산대, 이 아파트에서. 그러면서 “이사 온 지 두어 달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올래?” 그랬더니 오겠대요. 그래 바로 오더라고요. 걔네들하고 또 한 집 아이하고 오면서 한두 주를 하니까 (다른 집 아이들도 나오더라고요).

지나면서 보니까 ‘뭘 그렇게 그게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자본이 그렇게 교묘하고 악랄하더라고요. 그리고 선거자금 때문에 이 동네 이런저런 사람들이 결탁했을 거예요, 앞으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몇 달 안 됐어요. 올해 사건이예요. 다시 자리 잡은 지 한 달 됐을 거예요. 지난 여름부터 한 서너 달 아주 힘들었어요.

부모들이 개발 때문에 갈등이 생기니까, 밤이면 큰 아이들이 나와서 공부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공부방은 없어져선 안된다라는 시위 같은 거죠. 그리고 어른들도 ‘그거(공부방 없애자는 생각)는 틀린 생각이야’, ‘이런(공부방같은) 중심을 지켜야 돼’, ‘잘 몰랐는데, 이것이 참 소중한 거다’ 확실하게 느끼게 된 사람이 있어요, 이번 일로. 그 전에는 자기는 뒤로 빼고 주로 술만 마시고 다녔는데, 그 후로는 중심을 잡고 그런 사람이 생긴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김영곤ㆍ김동애 부부는 버리는 책이 있다면 아무리 헌 것이라도 착불(인천 부평구 부개2동 131-3 한양아파트 103호)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고, 자기네 마을에서 도서실을 만들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2천권을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국비정규교수노조에서 강사문제 해결을 위해 ‘강사를 교원에 포함시키자’는 온라인(www.kipu.or.kr) 서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정리/범용] <2006년 11월 29일 인권오름 제31호> 

[정리/류은숙] <2006년 10월31일 인권오름 제27호>

경기도청이 자리한 수원역 근처의 언덕배기에서는 50여 일이 넘도록 중증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길거리 농성을 하고 있다. 도청의 묵살과 무응답이 이어지는 나날 중 큰 슬픔이 찾아왔다. 이들은 지난 주 금요일(10월 25일), 함께 하던 동료인 정정수 씨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뇌수막염을 앓던 중증장애인 정정수 씨는 독립생활의 꿈을 키우고 있던 중 사망했다. 동료들은 오랜 농성참여로 인한 과로사라고 여긴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고 중증장애인 독립생활의 꿈을 현실화하려는 장경수 소장을 만나봤다.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한 투쟁

저희는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에 시설도 많고 중증장애인, 재가장애인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지금까지 진짜 사는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진짜 손 하나도 제대로 못 움직이는 장애인이 많은데, 예를 들면 누워서 주무실 때도 활동보조가 필요한 분이 계세요. 욕창 걸리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잘 때 몸을 움직여 줘야만 잠을 조금이라도 청할 수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데, 지금은 유료이거나 생활도우미 정도가 있어요. 일정하게 정한 시간에 하루에 약 두 세 시간, 일주일에 한두 번 많아야 두세 번, 복지관 같은 곳에서 파견해주는 도우미는 진정한 활동보조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것은 반찬 만들어놓거나 빨래, 방청소에 국한돼 있고, 그건 시혜 쪽이나 자원봉사에 가깝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내게 필요한 것,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얘기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일방적으로 봉사자 입장에서 해주고 장애인은 받는 쪽이거든요.

진정한 활동보조인을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정말 중증장애인도 같은 사람인데 하나의 인격체로 태어난 것이고, 거기도 욕구들도 있고, 같은 사람이니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고 직업생활이라든가 나가서 활동하고 싶거든요. 정말 중증장애인들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거든요. 아니면 그 온갖 인권유린 당하는 그런 시설에 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있어요. 지금은 부모나 가족이 책임지는 세상이 현실이거든요. 식구들이 챙길 수 없는 상황이 왔을 때 장애인 본인이 시설을 원하겠습니까? 어쩔 수없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인간처럼 살 수 없고, 집에서 가족이 보호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거거든요. 활동보조인이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돼서 누구나 충분히 원하는 데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중증장애인들도 서비스가 제대로 되면 밖에 나가 움직이고 최소한의 사람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독립생활도 가능하고 그런 의미에서 활동보조인 제도가 중요하고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제도화를 이루고 시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늘로 54일째 노숙농성을 하고 있어요. 서울이나 인천, 광주, 울산 같은 데서는 전부다 조례를 제정하고 활동보조가 시급히 필요한 중증장애인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인데 유독 경기도는…….

농성하면서 도지사가 면담을 딱 한 번 했는데 전혀 활동보조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거든요. 도지사 당선 전에 질의서 보내고 했을 때 답변서에는 전형적인 말들, 실시하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는데 지난 번 면담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거는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요.

농성하는 동안 별별 일이 있었죠. 도지사 면담이 자정, 밤 12시에 이뤄졌는데 그 다음날 아침 전경들에게 끌려나왔어요. 저는 휠체어가 뒤로 넘어갔어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고……. 여성장애인들은 무자비하게 들려서 휠체어와 몸이 분리돼 따로 따로 들려나왔어요. 이거 굉장히 위험한 일이거든요. 중증장애인들은 함부로 몸을 꺾는다거나 하면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그렇게 무자비하게…면담한 바로 다음날, 그것도 밥 먹는 중에…….

점거도 하고 농성도 하고 거리 선전전도 하고 집회도 했어요.…근데 아이러니한 게 비장애인만 연행해가요. 뭐, 장애인들이 힘든 건 알아서 그런지…왜 비장애인만 연행해 가는지. 정작 하는 주체는 장애인들인데, 이 일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선동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들이 주체가 돼서 제도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고 비장애인들이 저희들을 위해서 아무래도 활동보조가 필요하니까 저희 뜻에 동조를 하셔서 참여를 하시는 건데, 그렇게 보지 않고 전혀 다르게 보고 있어요. 중증장애인들이 이끌려서 하는 것이라고 보는 그런 시각이 참 문제라고 생각해요.

고인이 된 정정수 씨 이야기

고인이 된 정정수 씨가 자주 하던 말이 있어요. “인생이 뭐 있겠냐? 아무것도 없다!” 자주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백 년도 못 사는 게 인간인데 아귀다툼 할 것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자주 했죠. 많이 활동을 하고 싶어 했어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시던 분이었거든요. 그분이 뇌수막염이 있어서 몸을 약간 움직이기는 했지만 수동휠체어를 탄다고 하면 밀기조차 힘든 그런 장애인이었는데, 수원중증장애인 독립생활센터에서 같이 활동하고 경기장애인차별쳘폐연대에서 같이 활동하고……. 그 의지가 굉장히 강하시고 독립생활이라는 것, 활동보조라는 것, 그걸 굉장히 이루고 싶어 한 분이예요. 활동 전에는 집에서 오래 보내셨는데 장애인도 주체적으로 활동보조가 제공되고 기본 인프라·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본인을 포함해서 세상에 나가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고 의지가 강하고 누구보다도 그러셨던 분이예요.

군대까지 다녀오셨고, 제대할 무렵에 그렇게 돼서 15-16년을 장애생활로 지낸 거죠. 비장애인의 삶과 장애인의 삶을 둘 다 살았어요. 비장애인으로 왕성하게 살아가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병이 와서 장애인이 된 후에 16년이라는 세월을 사람같이 살아보지 못한 세월이었던 거죠. 사회에 나가 활동도 하고 싶고 전에도 그런 맘이 있었는데 사회가 그게 아니잖아요? 휠체어 타고 나와 가지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포기하고 계셨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중증장애인도 나와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지금 있는 것 같은 독립생활센터 같은데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어한 분이예요.

그 계기란 게, 제가 먼저 만났어요. 제가 먼저 장애운동 쪽에 돌아다녔거든요. 서울집회에도 참가하고…중증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내야 사회가 변화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지금 복지라는 게 모두 경증장애인 위주로 되어 있는 게 안타깝고 저는 뇌성마비 1급인데, 재가장애인, 중증장애인들이 나와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가 센터 준비를 해오던 과정에서 정정수 씨를 만났고 같이 해오게 됐어요.

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게 저하고 정정수 씨하고 나이가 한 살 차이밖에 안났고 제일 먼저 만났고……. 중증장애인들이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부족하잖아요. 친구 만나기도 어렵고…속으로만 앓고 있었고, 살아가면서 속에 담아뒀던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저희 센터로 보면 부소장이셨는데…앞으로 어느 정도 잘 되는 모습도 보셔야 했고 일단 자기 뜻을 펼치려고 계획을 하고 있던 와중에 돌아가셔서 안타깝죠. 다른 동료 분들도 마찬가지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장애인이 나서야

일반적인 생각이 도와주면 되지, 장애인들이 스스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안하죠.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몸에 장애를 입게 되면 당연히 외부하고는 단절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거고, 가족들이나 이런 분들도 일단 비장애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을 하시는 거고…활동보조인이 제도화되면 달라질 생각일 텐데, 일단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족들도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제 생각엔 정말 장애인들도 이제는 의식이 변화돼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해요. 장애인도 일단은 인간이잖아요. 기본적 권리를 갖고 태어난 거고 자기 권리잖아요. 보편적으로 모든 목숨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증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외국인노동자든 모두 인간이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거고,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이제는 자기 마음과 얘기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권리를 찾아서 권리를 행사하고 그동안 빼앗기고 행사하지 못했던 권리를 이제는 좀 찾는 노력들을 해서 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서 살 수 있는 그런 희망들을 갖고 그런 인식들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저도 이 일한 지는 사실은 얼마 안돼요. 저는 돌 때 아팠어요. 35-6년 전이니까 병원에 가도 병원에서 몰랐죠. 지금 같으면 치료 같은 거 했을텐데.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몰라서 병원에서 정확한 병명을 모르고 감기약을 주고 그런 상태에서 몸이 연체동물처럼 늘어졌다고 해요. 며칠은 그런 상태로 있더니 며칠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업지 못할 정도로…저도 집 바깥에 처음 나온 게 26-7살 때였어요. 그 전까지는 집에만 있었어요. 나가고 싶은 맘이야 많았죠. 학교는 전혀…유치원에도 못 가봤어요. 동네 친구들이나 형제들 배우던 책을 혼자 보고 해서 글자 아는 정도…26-7살에 검정고시 학원에라도 갈까 노력했는데 집을 한 바퀴 도는데 반나절이 걸릴 정도였어요. 학원 찾아 다녔는데 없더라구요. 전부다 2-3층이라 갈 수 있는 데 한 군데도 없고…제때 배우고 그럴 수 있어야 하는데…그래서 활동보조 못지않게 교육권도 중요하죠.

26-7살에 나왔다는 게 사회생활을 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왔다’는 의미는 겨우 집 주위 한 바퀴 돌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 생활을 서른 살 될 때까지 유지했어요. 저는 그 이후에 장애가 급속도로 나아진 경우예요. 예전에는 침도 흐르고 목도 돌아가고 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 나아져서 혼자 스쿠터 정도는 겨우겨우 탈 수 있는 정도가 됐어요. 다른 분들은 대단하다고도 표현하시는데 제가 장애가진 몸이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조르고 졸라서 오토바이 하나 마련해서 연구를 하다가 장사를 택했어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장사밖에 없더라구요. 취직도 안되고. 장사를 오래했어요. 10년 가까이 카세트 테이프를 팔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을 몰랐던 것, 장애인 세상을 몰랐던 걸 깨달았죠.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내가 사는 것만 고민했던 것,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좀더 알았더라면 참여를 했을텐데……. 지금 장애인들이 지하철 보면 엘리베이터 있고 경사로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당연히 된 게 아니거든요. 선배 장애인분들의 투쟁을 통해 제도화된 거고, 그런 과정들이 있었는데 저는 참여를 못했는데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이용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동참하는 게 옳은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제가 인터넷 보고 찾고 해서 서울에 집회 간 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온 거죠.

1년여 년 전부터 독립생활투쟁에 전면으로 나서고 있어요. 앞으로 계획은 지금 우리나라에 일본의 자립생활이념이랄까 이런 게 도입돼서 센터도 생기고 운동들도 생겼는데 일본을 따라가지 않고 우리의 독자적인 방식, 옳은 방식으로 저희 센터를 이끌어가는 거예요. 오래 유지되고 제대로 서려면 사회의 변화에 첫째 주안점을 두고 진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예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10월31일 인권오름 제27호>

 

[정리/류은숙] <2006년 9월 26일 인권오름 제23호> 

최근 두발 제한 폐지, 체벌 반대를 주축으로 한 청소년인권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잘하라는 관심보다는 걱정 어린 또는 못마땅해 하는 시선 속에서 그 운동의 당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청소년인권활동가 ‘새싹’의 얘기를 들어봤다. 청소년이면 ‘무슨 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이 싫다면서 자기가 불리고 싶은 이름 ‘새싹’으로 소개해달라고 했다. 청소년인권활동가 새싹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작

인권이란 걸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알고 있었어요. 지금도 딱히 이거라는 것은 없지만 요즘은 이게 인권적으로 어떻게 되냐는 생각을 많이 해요.

확실히 판단능력은 많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부당하다 싶어서 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 청소년인권이란 게 있구나 알게 되고 이런 것이 인권문제라는 걸 알게 된 다음에는 인권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아직까지도 인간답게 사는 것 이외의 뜻을 잘 정리를 못하겠어요.

학교에서 말 잘 들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이유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딱히 마땅한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옛날부터 그렇게 들어왔으니까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일들에 대한 이유 같은 거를 하나하나 되물어가면서 생각하다 보니까 정당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게 별로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놀랐어요. 여태까지 하던 것에 배신감도 느끼고…….

가장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에 ‘우리도 말할 수 있어요’라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어린이용으로 풀어놓은 것을 읽었어요. 그거 읽고 나니까 일기장을 함부로 읽어서는 안되는 거구나 알고 나서 참, “아 이런 법이 있었구나” 알게 된거죠.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읽고 “아 이런 게 있구나” 알았던 것처럼 그런 기분이었어요. … 초등학교 때 했다가 잠깐 쉬었다고 해야 하나, (인권에 대해) 포기했다가 중학교 동안 암흑기였고 고등학교 올라와서 두발제한 그런 얘기 나오니까 한번 생각해보게 된 거예요.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여러 글 읽고 책 읽고 사람들 하고 얘기하다보니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전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 시작은 모금활동이었어요. 학교에서 이유는 회피하면서 애들한테 강제로 돈을 내게 하는 것이 미심쩍기 시작했고. 돕기 활동이라는데 ‘강제로 내라’ 해서 “다른 곳에 2천 원 내면 안될까요?” 했더니 안된대요. 그래서 제가 회장이었는데 “강제로 걷지 않고 내고 싶은 사람에게만 걷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강제로 안 걷어오면 안 받겠다”하고 모금 독촉하러 학생회 애들 보내고 해서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강제로 안 걷었더니 아이들이 반만 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다 걷어올 때까지 안 받겠다고 해서 나머지 애들한테 다 돌려줘버렸어요. 그렇게 찍히고 나니까 대우가 달라지고, 제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시각을-밑바닥 시각이라 해야 하나-봤던 거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애들한테 걷은 돈 다 돌려주고 나니까 바로 학교에서 찍혀 가지고…

찍혀서 교무실로 자주 끌려다니고, 선생님들 눈초리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고, “쟤 이상한 놈이다”, “쟤 때문에 너희들이 입시를 망친다”고 하고……. 그걸 바깥에 알리는 걸 학교에서 정말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게 좀 이상한 거죠. 학교에서 공공연한 사실인데도 못 알리는 것 보면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 학교의 일을 외부에 알리고 나서는 교무실로 끌려가고 어떤 사람은 저한테 소송 걸겠다고 하고 동문 중에서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고, 제가 예전에 인터넷에 썼던 글까지 다 검색해서 그것도 소송 건다고 하고 동창회실로 끌려가는데 손목 다치고…무서웠어요.

지금 주로 벌이는 활동은 두발 제한 철폐, 그걸 통해서 학생들이 다른 문제까지 펼쳐나갈 수 있기를 그래서 먼저 그 쪽을 주장하고 있어요. 머리 모양 그 까짓것 가지고, 졸업만 하면 너희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데…형식적으로 봤을 때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유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봤을 때는 고등학교 때까지 억압을 당하고 나서 자유를 준다한들 생각이 굳어진 게 많이 보여요.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에 주어져도 참…….

자유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두발 자유를 굳이 외치는 것은, 두발 제한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정말로 자랑스럽다면 국제사회에 나가서 “한국은 두발 제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을 하든가……. 우습다고 생각해요. 자기들도 잘못된 줄 알기 때문에 다른 곳에 알리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들은 하고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신경 쓰는 친구들은 두발 제한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친구들에겐 “너희들은 머리 자르고 싶으면 잘라라. 그러나 자르기 싫은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설령 99명이 두발 제한 찬성하고 1명이 반대하더라도 당연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고, 물론 100명이 찬성을 해도 심각한 고찰을 하고 왜 그런 제한을 두는가 얘기를 해봐야 하겠죠.

두발 제한 문제가 상징처럼 나오는 게 억압의 대표적 상징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은데, 그밖에도 학교에서 청소년 인권침해는 체벌, 학생회 성적제한, 연좌제-그러니까 학교에서 싫어하는 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애들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친구랑 안 지내게 되고 관계가 떨어져 나가는 거죠. 이게 가장 잔인해요. 학교 안에서 이런 것 자체가 인권침해고 거기서 다른 문제들이 파생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학생과 교사를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 어느 한 쪽을 우월하게 보는 것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고 그것 자체가 커다란 인권침해를 구성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을 존중해야 한다는데 존중과 복종은 다르죠. 학생들도 존중을 받아야 해요. 선생님은 존중해야 하고 학생은 존중받지 않으면 그건 주인과 하인의 관계니까요. 그런 관계 속에서는 불평등이 생기고 불만이 생기고 가짜 존중, 형식상으로 선생님 앞에서는 존중하는 것처럼 만들 수 있겠지만 정말로 존중이 아니라 거짓된 존중이 생긴다 생각해요.

미래의 꿈나무가 아닌 지금의 주체로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게 ‘미래의 꿈나무다!’ 이러면서 주체로 보지 않는 거죠. ‘나중에 커서 뭘 하겠지’라고만 바라보고. 심지어 청소년 운동조차도 다른 시민단체들에서 표현하는 것은 ‘미래의 꿈나무들’로 보는 거예요. 청소년 운동이 아니라 나중에 커서 노동운동에 가든지 환경운동에 가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좀 하위에 둔다고 해야 하나요. 덜 자랐다, 보호받아야 한다, 미성숙하다 그런 시각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청소년인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제들, 청소년들은 임금도 팔푼이(80%), 칠푼이(70%)로 주고 똑같은 일을 해도 어리면 반만 주고……. 그런 문제도 있고, 청소년들을 언제나 보호의 대상으로 본다고 해야 하나요. “너희들은 이런 거 하면 안돼” 그런 식으로 나오면서 “나중에 해”…….

어른들이 “나중에 대학 가고 네가 돈 번 다음 하라”는 말에 대해선, 지금 입시 때문에 못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커서는 취직 때문에 못하고, 취직해서는 돈 버는 것 때문에 못하고…그렇게 늙어죽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입시, 취직, 돈벌이하고 상관없이 자신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맞서 싸우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싸우는 사람들은 힘든 것 있어도 그거 감안하고 싸우는 거고.

앞으로 계획은 막막하긴 막막해요. 좀 있으면 더 이상 학생이 아닐 텐데. 일단 졸업하기 전까지 학교에 이런 활동이 끊이지 않도록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저도 청소년인권운동 계속할 거고. 등록금 문제가 있지만 더 배우고 싶고……. 선생님이 교실에 가두고 못나가게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내가 왜 이러나. 무서워서 대들지도 못하고…내가 왜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땐 살아있는 게 싫었어요. 그런데 배우고 싶은 게 아직 너무 많아서 죽을 수가 없더라구요. ‘다 배웠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때는 없겠지만 지금은 배우고 싶어요. 사회과학을 배우고 싶어요.

청소년 운동을 바라보는 어른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4.19, 5.18, 6월 항쟁, 광주학생운동 그런 것들처럼 사회변혁운동에서도 청소년들이 차지했던 역할이 작지 않고 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사그라들어 아쉽긴 하지만 그런 역사적 예로 봤을 때 어디까지나 (청소년을) 운동의 주체로 인정해야 해요. 보호받아야 하고 미성숙하고 나중에 커서 다른 운동에 가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깔끔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줬으면 해요. ‘깔끔한’ 위치란 표현이 좀 그런데,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이라든가 명예라든가 그런 게 개입되지 않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고 그런 걸 비판할 수 있는 세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오히려 청소년운동이 주체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어른들이 청소년은 돈도 안 벌고, 어른들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물질만능에 사로잡혀 있고, 남 생각은 안한다는 둥 청소년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데, ‘요즘 젊은 것들’이란 말은 공자‧맹자시대에도 썼다고 하고……. 물질만능에 사로잡혔다든가 하는 그런 평가들은 오히려 이런 체제 속에서 (소비가) 나쁘다는 소리 안하고 인간이 소비로 평가받는 세상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자연스럽게 (물질만능이) 습득된 거고 어른들이 주입시키고 있는데 그게 나쁘다고 하면 그게 모순이잖아요. 아니면 그 어른들은 사람들이 소비한 양으로 평가받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던가. 청소년 소비문화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 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평가하면서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청소년들 스스로도 자각해야죠.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이 많다는 거죠.

올바르게 살기는 힘들다

강풀 만화 『26년』에서 보면, 문익환 목사님인가 나오는데 고문 받으면서 이런 얘길 해요. “착하게 사는 것은 쉽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은 힘들다” 진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학교에서 싸웠을 때 제가 기대했던 선생님들이 참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어요. “네가 뭔데 교권인 체벌을 반대하느냐”, “넌 학교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인권이란 하찮은 가치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얘기할 때 많이 놀라고 상처받았어요. ‘저 선생님들도 착할 수는 있지만 올바로 살기는 힘들구나’ 그렇게 느꼈죠.

이런 얘길 하고 싶어요. 착한 척만 하고 싶어 자기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수준까지만 주장할 때에는 “맞는 소리야” 하다가 자기 기득권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특권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런 하찮은 인권 때문에”라고 얘기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 인권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인권이란 말을 보수적인 사람들이 ‘북한인권’ 얘기한다든가 자기 지배하는 것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쓰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것도 되지 않아서 진보적인 사람들도 인권 얘기 하고 그러는 게 많이 역설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빨리 이 운동 그만두고 싶어요. 제발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지켜져서 빨리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9월 26일 인권오름 제23호>

[정리/류은숙] <2006년 8월 29일 인권오름 제19호>

<성람복지재단의 비리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개정을 요구하는 농성이 40여 일째 계속되고 있는 서울 종로구청. 그곳으로 가는 내내 박정혁 씨와 어디서 얘기해야 할까를 걱정했다. 거리는 소란스러울 텐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턱없는 커피숍은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은 박정혁 씨가 해결해줬다. 앞장서서 휠체어를 주변 시민공원으로 향했다. 전동휠체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나에게 “제가 너무 빠른가요?”라고 그는 여러 번 물었다. 그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먹고 자고 배설하고…

저는요, 96년 5월에 강원도 철원에 있는 은혜장애인요양원(성람복지재단 산하)에 갔어요. 수용인원이 500명 가까이 된다고 그랬거든요. 규모가 엄청 커요. 거기서 생활하다가 어떤 좋은 인연으로 인해서 2003년에 서울에 올라오게 됐어요. 뭐, 거기서의 생활은 되게 할 일없는 생활이었어요. 먹고 자고 배설하고...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죠. 제가 좀 특이하다면, 글 쓰는 걸 좋아해요. 제가 손을 못 쓰니까 요만한 전자수첩에다가 시나 뭐 수필, 동화… 문학이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집필활동을 좀 했고요. 거기는 전방지역이라 군인들이 자원봉사자로 많이 와요. 그래서 군인들한테 전자수첩 보여주고 대필하게 하고 그렇게 생활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집안에서 27년, 27살까지 살았어요. 가족들 품에서 살았었는데 집안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그러는 바람에 생활장애인 시설에 입소하게 됐죠. 그리고 앞에서 얘기했던 그대로의 생활을 했어요.

집안형편이 어려워져서 시설에 갔고 자립생활을 배우면서 시설에서 나오게 됐어요. 시설은 워낙 답답한 곳이었어요. …시설에서는 솔직히 짜장면도 못시켜먹어요. 솔직히 사람이 밥만 먹고 못 살잖아요. 그럴 수 없잖아요. 제 와이프 표현에 따르면 “밥만 먹고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저도 그래요. “그게 감옥이지 요양원이냐?”그런 식이었죠. 그러니까 시설은 그야말로 관리가 아니라 방치하는 거예요. 밥만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변소 가주는 수준밖에 안돼요. 교육 전혀 없고, 여가활동 전혀 없고, 하루 종일 그냥 앉아있어요. TV를 틀어줬는데 그것도 저녁 7시, 8시만 되면 다 꺼요. 불도 다 끄고. 자라고요. 그리고 아침 6시 반에 깨워요.

제가 처음 입소했을 때 방에 한 명의 보모를 뒀는데 그 보모가 24시간 일하고 다른 보모로 바뀌고 그렇게 2교대로 운영하더라구요, 그러다보니 한 방 12명에, 저 같은 지체장애인은 단 2명이고 나머지는 정신지체발달장애인인데 한꺼번에 자게 하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뭐 그들의 수가 워낙 많으니까 보모는 그들을 위주로 돌봐주게 되고, 그러다보니 우리는 욕구불만이 생기는 거죠.…보모들이 그냥 생활시설만 돌보느냐 그것도 아니었어요. 뻑하면 밖에 나가 가지고 논일 시키고 밭일 시키고 소 키우게 하고...피곤에 지친 사람들이 어떻게 애들을 봐요. 솔직히 저나 다른 정신이 멀쩡한 장애인, 비장애인과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은 다른 방 보모들에게 얘기해서 대소변도 보고 밥도 먹고 그러는데 정신지체장애인들, 지능수준이 낮거나 자폐를 가진 중증장애인들의 경우에는 그러질 못하는 거예요. 바닥에다 옷에다 소대변을 봐요. 물론 보모들이 전부 다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 당번을 남겨놓죠. 그런데 우리 요양원 건물이 4층 구조인데 한 층마다 4명이 남아 100명이 넘는 인원을 돌봐야 해요. 전부 밖에 일 나가면 당번만 남게 되니까. 점심때도 안 들어오고 그런 날이 많았어요. 4명이서 모두 중증장애인 사람들 밥을 먹여줘야 하니 어떻게 되겠어요. 거기다 소대변을 다 해결해줘야 되고. 물론 정신지체장애인 중에 조금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보모들하고 같이 애들 밥도 떠 먹여주고 소대변도 치워주고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니까 보모들이 늘어나도 일 나갈 때는 똑같은 상황이 또 발생하고...그러다보니 스트레스 받고 그걸 우리들한테 풀어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소대변을 본 친구들한테 폭력이 가해지는 거예요. “왜 쌌냐” 그러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그런 사람들인데…애기처럼 해줘야 하는데 그걸 안 해주니 그렇게 쌀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면 말이 돼요? 자신들의 본분이 시설인을 돌봐주는 것인데 엉뚱한 다른 일 하다가 들어와 놓고 그 일은 귀찮다고 안하고,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인 시켜요. 치우라고. 뭐 대충 그런 식의 생활을 시설에서 했어요.

장애인권의 한걸음으로

제가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면서 장애인 인권운동에 입문하게 됐어요. 장애인 이동권투쟁이 되게 과격하더라구요.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도로점거하고 지하철 점거하고 그럴 필요가 있나.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혼란이 오는 거예요. 왜냐? 그렇게까지 안하면 들어주질 않는 거죠. 그러다가 결국 참여하면서 생각이 좀 많아졌죠. 솔직히 장애인만, 우리 사회가 장애인만 힘든 사회가 아니더라구요. 저기 앞에 계시는 저 분도 노숙인인 것 같은데(공원 의자에 누운 노숙인을 가리키며)... 주변에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구제책이 없다는 것 자체가 장애인 문제라고 봤고…장애인 운동만이 전부라고 보지 않아요.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목소리가 높아져야 변화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제가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먼저 깨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솔직히 장애인 인권 운동하는 분들 되게 극소수에 불과해요. 많은 장애인 분들이 시설에 있거나 집안에 재가 장애인으로 남거나 그냥 수급자인 경우는 나온 돈 받아서 쓰고 어디서 놀러가자고 하면 따라가고 그 수준이거든요. 장애인 당사자부터 바뀌어야 해요. 솔직히 활동보조인 투쟁 4월에 있었고, 49일 만에 서울시가 항복한 거고 보건복지부도 활동보조인 제도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결국은 보건복지부에서 장애인 단체들과 자리를 마련했는데, 한다는 소리가…105억을 가지고 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의 장애인, 1급 장애인들만 활동보조하겠다고 그런 얘기 한대요. 솔직히 105억 가지고 나누면 2만 명 정도 된다는 얘긴데, 이것 가지고 나누면 말도 안되는 소리잖아요. 이런 식으로 국가는 장애인의 권리를 시혜로밖에 이해안하고, 동정, 베풀어준다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어쨌든 국가에 장애인의 목소리가 전달 안되고 있다는 얘기에요. 우리 장애인이 전부 250만이래요. 적은 수가 아니잖아요. 전 국민의 5%가 장애인이잖아요. 그중 몇백 명의 장애인이 목소리를 낸다고…솔직히 촛불 시위할 때 몇십만 명 모이는데 우리가 데모·집회하면 많이 모여봤자 100명 내외예요. 휠체어 장애인들 많이 모여봤자 그러고요. 지체장애인밖에 없어요. 시각·청각 장애인도 오는 경우 있지만 극히 제한적으로 있어요. 장애운동 자체도 많이 넓혀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강력한 힘으로 정부에 압박을 가해야 해요. 장애운동도 분열이 되어 있어요. 어떤 목표가 정해진다면 자기들 이익을 한 발짝씩 양보하고 그 목표를 가져가서 함께 한다면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보거든요.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거예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구심체, 밑거름이 되고 싶어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봐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요?

성람복지재단 투쟁에 직접 같이 하는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은혜요양원이 성람재단 산하 기관이에요. 결국 시설비리는 재단의 비리와 이어져요. 재단이 시설에 압력을 가해서 ‘기름값 절약해서 내게 가져와’ 하면 시설은 복종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시설에서 나오는 밥도 형편없고…강원도 철원지역은 무지 추운 지역이에요. 그런데도 불을 땐 기억은 잘 안나는데…제 와이프 얘기론 하루 20분만 돌린대요.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계속 영하 10도, 20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도 난방을 하루 한 번밖에 안돌려주고 그래서 사람들 많이 얼어죽었어요. 더군다나 장애인들은 움직임이 수월치 않기 때문에 근육경도가 더 심해요. 수축과 이완 작용이 계속 원활해야 하는데 춥게 지내다 보니 근육자체가 수축이 돼서 안 펴지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면 근육이 갑자기 이완이 돼서 죽는 거예요. 질병에 걸려도 치료가 불가능해서 죽고. 우리 방에서만 99년인가 2000년인가…8명인가 7명인가 식구들이 있었는데 한겨울 되니까 병원에 입원하더니 안오는 거예요. 4명 정도가… 방 보모한테 물어보니 병원에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 돼요? 우리 방에 8명중에 4명이 죽었다는 게 말이 돼요? 진짜 비참하더라구요. 걔네들 정말 한솥밥 먹고 같은 이불 덮고 자던 친구들이었어요. 말은 안 통했지만, 그 친구들 중에 나한테 안 좋게 했던 친구도 있었지만 그게 자기 의도가 아니란 걸 잘 알고...나도 화가 나서 때려준 적도 있는 친구들이었지만 그렇게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죽었어요.

드러난 비리는 빙산의 일각

저는 시설을 재단이사장이 돈을 목적으로 지었다고 생각해요. 뭣 때문에 그러냐면, 재단이사장이 장애인 시설 원생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아무리 기업이라지만 한번쯤 들여다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년 동안 그런 꼴 한 번도 못 봤어요. 와서는 사무실 가서 장부나 보고, 요양원 위쪽에 소 키우는 우사에나 갔다가 집에 가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이사장이 온다고, 방송해서 ‘원생들 옷 깨끗이 입혀라’ 그래봤자 그것뿐이에요.

지금 한 요양원에서 27억인가 발각됐다고 하는데, 검찰에서 확인한 게 9억 얼마이고, 그거 빙산의 일각이에요. 그것도 꼭대기 50센티미터. 그 밑에는 더 많을 거예요. 은혜요양원 1년 예산이 100억이에요. 은혜요양원이 94년에 지어졌고, 지금이 2006년이죠? 그 동안 비리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게다가 성람재단 이사장이 은혜요양원 말고도 13개나 갖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에서만 그렇게 해먹은 게 드러났어요. 비리가 모두 드러나면 재벌 그룹 수준이 될 거라고 봐요.

계속 내부 감사에서도 드러난다고 하고요. 당연히 곪고 곪고 하다가 터져버린 거죠. 전 그렇게 봐요. 여기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더 해먹을 사람이에요.

솔직히 제가 재단이사장이고, 이사장이 돈을 벌기 위해서 시설 지었다면 당연히 관할 구청에 힘 좀 썼겠죠. 당연히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한테 힘 좀 붙여달라고 하면서 돈 주고 했을 거예요. 엄청 받아먹었을 거라 보는데 그 밥에 그 나물 아니겠어요? 한 예로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저희 시설에 정기감사 오잖아요. 보통 재무감사 오면 며칠씩 와서 검토하고 그러는데 단 하루밖에 안하고 가더라구요. 구청직원 왔다는 건 알 수 있어요. 길어도 이틀 안에는 갔어요. 1년 치 조사를 그렇게 다 했어요. 어떨 때는 오지도 않고 어떤 해는 요양원오지도 않고 별장에서 지내다 갔다고 하고, 노조원들이 그러더라구요.


이렇게 농성하면서 시민들 반응은 솔직히 그게 좀 그래요. 어떤 분들은 응원해주시는 분도 있고, 먹을 것 같은 것 사갖고 온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그 응원이 응원으로만 그쳐서는 안되죠. 결국 종로구청이 거둬들인 세금이 어떤 사람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들어간 거잖아요. 그 돈에 대해서 종로구민들이 나 몰라라 그러는 거잖아요. 내가 살고 있는 구청에서 국고보조금으로 들어간 돈이 엉뚱한 사람의 배를 채웠다, 그런데도 구청장은 재판이 끝나봐야 제재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고. 검찰조사에서 다 나왔는데. 뭐 조사는 안하겠다, 특별감사를 하겠다, 그러더라구요. 보건복지부, 구청...명백한 사건인데도 이렇게 두 손 놓고 있는 걸 보면, 이런 데 솔직히 재단과 유착관계가 없다고 보기 힘들다고 봐요. 그런 데 믿을 수 있겠어요? 여기 농성장에 있는 사람들, 복지를 전공한 사람도 들어가고 장애인단체도 들어가고 그래야 진짜 진정한 감사가 되지 않겠어요? 종로구청에서 감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엉터리로 끝날 것 같아요. 그러면 이 싸움 1, 2년 지속될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시설은 그만, 자립생활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싸움의 목표는...우리 사회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지금까지 시설정책을 펴고 있어요. 노인들이 많아지면 양로원 증축해서 몰아넣고 중증장애인들이 많아지면 생활시설 지어 몰아넣고, 이게 다예요. 지역사회 내에서 노인이나 장애인들이 살기 편리하게 환경을 먼저 한 다음에 진짜 시설이 필요한 장애인이나 노인을 입소시켜야 하는데…그렇게 하면 시설에 솔직히 누가 가고 싶겠어요? 지금 보건복지부에서 수천억 들여서 시설을 늘리겠다는 방침이에요. 그런데 활동보조인 제도를 위해서는 105억밖에 못 내놓겠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정책은 시설정책이란 얘기 밖에 안돼요. 시설을 암만 짓더라도 전원입소는 불가능해요. 원하지 않는 사람을 강제로 집어넣을 거예요? 말이 안되는 거예요. 시설정책을 펴기 전에 지역사회에서 먼저 환경을 바꿔야 하는 게 우선인데 그걸 꺼려한다는 거예요.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우리가 요구해서 했고 활동보조인도 옛날에는 뭔지도 모르던 정부가 활동보조인 제도를 장애인의 권리라고 정해놓고 105억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돼요.…시설에 가란 얘기밖에 안돼요. 정책은 한 쪽은 엄청 쪼끔, 한 쪽은 엄청 비대해 결국 비대한 쪽으로 가라는 얘기에요. 결국 정책이 바뀌어야 해요. 그래야 시설비리도 없어질 거에요.

장애인당사자들에게 진정한 선택권이 주어져야 해요. 시설장들에게 몇백 억씩 줄 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주고 자립생활 선택하게 한다면 시설비리 일어날 수가 없어요. 시설 안가면 그뿐이고 시설 갔다가도 기분 나쁘면 나와 버리면 그만이면 시설이 돈을 벌 수 있겠어요? 못 벌어요. 장애인에게 그런 결정권이 주어진다면 결국 시설비리가 없어지는 구조가 되는 거예요. 삼성전자에서 휴대폰을 만들었는데 성능이 좋아봤자 소비자들이 선택 안하면 망해요. 그것처럼 장애인이 소비자가 돼서 시설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시설선택 안하면 시설은 문 닫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식으로 바뀌어야 하고.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게 우리나라도 시행돼야 해요. 그렇게 하기 전엔 아무리 국가에서 잘한다 해도 시설비리는 일어나고 장애인 인권은 바닥일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사람의 겉모양, 얼굴도 몸매도 호감이 가는 쪽이 좋은데 그것만 보지 말라는 거예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얼굴이 망가질 수 있어요. 몸매 아무리 좋아도 누구나 비만에 걸릴 수 있듯이 장애 또한 누구나 올 수 있는 문제예요. 비장애인들, 자기들 장애인 아니라고 시설문제·활동보조인 문제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많은데 결국 늙고 자기들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걸 알아야 될 것 같아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8월 29일 인권오름 제19호> 

[정리/류은숙] <2006년 8월 2일 인권오름 제15호>

<수십년 만의 폭우가 몰아치던 날, 서울 강남의 아셈타워를 찾았다. 프랑스계 다국적 기업인 라파즈 한라 시멘트 하청업체(우진)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노조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바로 위장폐업의 철퇴를 맞은 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백일 가까이 노숙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화학섬유노조 ‘우진산업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최철규 씨를 만나봤다.>

 

2004년 1월에 라파즈 한라 하청업체인 우진산업에 들어와서 일을 했다. 입사를 할 때는 진공청소차라고 라파즈 한라 내에 분진이나 시멘트 가루 청소하는 차가 있는데, 그걸 운전하러 들어갔다. 실질적으로 사장이나 소장이나 처음에 면담할 때는 임금문제에 대해서는 책정을 안 해주는 상황이었고 “일을 하게 되면 최소한 150, 170(만원)은 가져갈 수 있다. 노력만 하면은 가져갈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그런데 과다근무가 많아서 8시에 출근해 업무가 늘어나다 보니까 그 다음날 12시에 퇴근하든가, 아니면 32시간 계속 일을 해서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노사협의회에서도 얘기했고 조정해달라고 했는데 사장님은 앞으로 개선하면 되고 지금 실정이 회사가 많이 바쁘고 어려우니까 현 상황에서 유지를 해야 한다, 만일 힘들다고 하면 대체인력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6개월 되고 7개월이 되어도 개선이 안되었다.

노조설립 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나 3~4개월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근무에 복귀했을 때에는 또다시 다치면 회사에 마이너스가 되니까 다른일을 하라고 해서 노면청소차를 시작했다. 그런데 따로 각서를 써야 했다. ‘일을 하다가 다치게 되거나 불상사가 생겼을 때 회사는 책임을 못 진다’는 각서를 써야 됐다. 각서를 쓰고 업무복귀를 해서 노면청소차를 했는데…거기도 모두가 자격증이 3~4개 되니까 노면청소차 업무 끝나고 가려 하면 “네가 덤프 자격증이나 용접자격증이나 있으니까 연장근무 좀 해라, 저쪽에 가서 정비 좀 해라”라며 일을 시켰다.…들어올 때는 과로나 불상사에 대해 회사가 책임 못 진다는 각서까지 쓰고 노면청소를 하는 것인데 과다근무를 하는 거는 똑같은 거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과다근무도 아니고 해당 업무가 끝나고 나서 다른 업무를 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든 직원들 실정이 비슷했다. 그래서 그런 실정을 바꿔보기 위해서 노사협의회가 있으니까 반장, 소장 만나서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게 노사협의회 자체는 법적 근거도 없고 사장이 말로만 운영되는 것이라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다. 업무조정, 과다업무 시간조정, 대체인력 문제, 업무분담 등과 같은 문제들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수차례 얘기를 했는데도 안 들어주니까 어쩔 수 없이 2006년 3월 7일, 26명의 직원이 모여서 이래서는 안된다, 힘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그 땐 임금도 시급 1350원, 최저임금 1300원에서 50원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었고, 더 많아봤자 250원, 350원을 더 받고 있었다. 투표를 해서 한 명의 반대도 없이 3월 7일 노조를 설립했다.

이런 움직임이 사장 귀에 들어갔다. 사장이 불러서 “노동조합을 왜 만들려고 하느냐”고 물어서 “노사협의회에서 업무개선, 임금이랑 얘기 많이 했지만 안 들어주니까 노동조합 만들려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노사협의회가 형식적이었다고 사장님도 인정했고 앞으로 대화를 열어보겠다고도 했는데, 더 이상 대화도 없었고 임금도 최저임금에서 안 올라가는 상황이다. 2년 동안 임금이 동결됐고 4년 동안 거의 150원, 200원밖에 안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사장은 “노동조합을 만들지 말고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노동조합을 만들어주겠다. 임금 문제는 할 수 없다. 라파즈 내에서 임금을 동결했고 임금인상을 안 해주기 때문에 내가 올려줄 수가 없다. 업무시간 조절은 회사가 어렵기 때문에 너희들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정 일하기 싫으면 나가라. 집에 가서 쉬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사장님, 그거 말에 어거지가 있습니다. 저희 업무는 기본 8시간이고 연장근무란 게 보통 하고 싶으면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했다. 사장은 계속 “임금문제 거론하지마라. 나는 라파즈의 심부름꾼밖에 안된다. 임금을 올려주고 싶어도 라파즈에서 동결시켰고, 업무조정도 라파즈에서 업무지시를 하기 때문에 내가 해줄 수 없는 거니 말할 수 없다. 노동조합의 문제는 조금 기다려라. 지금 라파즈랑 업무조정 같은 것 얘기중이니까…노동조합 하면 우리 회사가 라파즈랑 계약도 못할 테니까 업무조정이 끝났을 때 제일 마지막에 노조설립을 해라”고만 말했다.

과다 업무를 하다 보니 안전사고가 많이 난다. 졸리니까 무감각해지고 사고도 많이 나고…사고 나면 ‘편한 걸로 끝내자’며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라파즈에 보고를 안하고 자체 내에서 알아서 보험처리 하려고 한다. 그렇게 무마해서 ‘무재해 1000일’.

노조 설립하자마자 위장폐업

3월 7일 노조 설립하자 바로 회사가 갈라진다고 했다. 설립과 동시에 사장 귀에 들어가 10일 바로 전직원들을 호출해서 업무 중단시키고 회사대기실로 모아 회사 얘기를 하는 거다. “회사가 갈라지게 된다. 노조를 깰 것이냐 말 것이냐 여기서 찬반투표를 해라. 노조를 깨라. 투표는 유기명으로 해라”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임단협 하겠다고 공문을 띄웠다. ‘노조를 설립했으니 지회장, 사무국장과 상견례를 하자’고 공문을 띄웠는데 사장은 계속 거절했다. 3월 28일 3차 협상에 사장이 나와서 “나는 3월 31일자로 회사를 폐업할 테니까 당신들하고는 단협을 할 것도 없고 만날 필요도 없다. 알아서 해라. 노조를 탈퇴하고 다른 회사로 가든가 노조를 하든가 당신 맘대로 해라. 나는 회사를 폐업할 테니까.”라며 5분도 안되는 시간에 사장은 나가버렸다.

31일 게시판에 회사원가 절감 문제 때문에 페업을 하겠다고 공고만 내고…회사 측은 31일 폐업 전에 직원을 개인적으로 만나 “노조탈퇴하면 다른 회사 보내준다. 사직서를 쓰면 새 직원으로 하는 일 그대로 받는 임금 그대로 해주겠다. 사직서, 탈퇴서 써라.”고 회유했다. 그 와중에 많은 인원이 다른 회사로 이전해서 전화연락을 끊었다.

그 외 사람들에게는 핸드폰 문자로 31일자로 우진산업과 계약해지가 됐다는 문자메시지가 와서 황당했다. 그래도 4월 1일 출근을 하니까 라파즈 내에서 경비들하고 정직원들 100여 명이 정문 앞에서 출근 저지하려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출근도 못하고 4월 5일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라파즈의 반응

5월부터는 힘들지만 라파즈 상대로 상경투쟁을 하게 됐다. 라파즈 사장이 영업사가 있는 아셈타워 18층에서 업무를 보기 때문에 아셈타워 앞에서 1인시위를 한다. 우리는 적은 인원이라 할 수 있던 것은 1인시위 밖에 없었다. 5~6명이 로테이션으로 올라와서 하고 나머지 인원은 동해에서 천막시위를 한다. 회사는 처음에는 신경 안 쓰더니 회사 이미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면담에 응했다. 회사 측이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하기에 “하던 업무 그대로 그 자리에 넣어 달라,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 과다업무시간을 조정해 달라, 임금을 인상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라파즈는 “당신들의 요구에 대해 할 말 없다. 당신들이 여기 와서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것이지 요구를 듣고자 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 왜 폐업을 시켰느냐”고 물어봤더니 “폐업하란 얘기 안했다. 나는 우진 사장이 계속 끌고 갈 줄 알았다. 내가 그만두란 얘기 한적 없다. 당신들에게 책임질 일 없다. 하청업체 일은 하청에서 해결하는 거다. 회사 이미지 있으니 1인 시위 접고 내려가라”고만 했다. 두차례 정도 면담했는데 그런 식으로…

마지막으로 7월 초에 만났는데 그쪽 최종안이 5명은 받아준다. 나머지 4명은 어쩔 수 없다. 2명은 하청업체 일자리로, 나머지 3명은 단계적으로…노동조합 문제도 거론됐는데 깨야한다고 했다.…이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안이었다. 지금까지 같이 투쟁했는데 누구는 들어가고 누구는 안 들어갈 수 없다. 노조자체를 깰 수도 없고…라파즈에서는 아직까지 대화의 창을 안 열고 “개인적으로 만나자, 노조를 끼지 말고 개인적으로 만나자”고만 했다. “그건 노조를 깨자는 얘기고 그건 안된다. 우리는 만날려면 공통문제를 갖고 안건을 갖고 좋은 방안이 있으면 그걸 갖고 나올 때 대화를 하자. 그러면 우리는 응하겠다”고 대응했다.

하청에 하청

우진산업은 아웃소싱이고, 그 외에 보통 사내하청이란 게 라파즈 한라 관리직들이 계속 인원 줄여가니까 라인을 줄이면서 그 사람들에게 협력업체를 만들어준다. 그게 15개 정도다. 50명이 넘게 되면 주5일 근무제가 되니까 인원을 제한한다. 우진산업도 48명으로 시작했는데 한 1년 지나니까 주5일 근무제 얘기가 많이 되니까 총무과에 있던 젊은 사장을 내보내서 청소용역 11명을 빼서 다른 회사를 만들어버리더라. 그래서 사내하청이 또 사내하청을 만드는 거다. 그래서 15개 정도가 사내하청인거다. 우진만이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다 하청이다. 정규직만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있고, 협력업체에 3개 정도의 노조 외에 다른 하청회사들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는 처지다. 사내하청들도 노조를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우리 처지를 봤듯이 만들자마자 회사가 폐업을 해버리니까 어려워서 못 만드는 거다.

사내하청 직원들이 천막농성장에 오가면서 많은 얘기를 한다. “직접적으로는 못 도와주지만 뒤에서 돕겠다. 너희들이 이겨서 들어오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다”라고 얘기한다. 택시로 음료수 배달이나 라면박스 배달이나 전화를 해주거나 구좌에 후원금을 내준다. 그러면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 있다. 임금이 300원 이상 올랐다” 우리가 (투쟁을) 시작하면서 최저임금에서 50원 정도 더 주다가 우리가 투쟁하는 몇 달 동안에 300원이 뛴 것이다. 그렇게 싸우니까 하청노동자들 문제가 나오고 우리가 뭐라 할까봐 미리 임금을 올려주는 게 있다.

진작 알았더라면

이 싸움 이전에는 노동조합을 몰랐다. 우리 모두에게 이번이 첫번째 경험이다. 우리 모두 기본적인 노동3권이라던가 근로기준법, 이런 거에 대해 몰랐었다. 계약서 쓰면서도 회사 사람들은 꼭 밑에를 가린다. 시급이라던가 밑에 조항은. 이번에 근로계약서를 보면서는 왜 그걸 가렸어야 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모르니까. 최저임금 3,150원 받으면서, 연장근로를 하면서도 한 달에 150만원도 못 찾아가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일했으니까 지금은 후회를 하는 거다.

왜 내가 몰랐나. 그때 처음에 우리가 알았으면 이렇게 됐을까. 우리가 근로기준법 알고 노동법을 알았다면 우리의 과다업무시간에 대해서 분명히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시키는 대로 지시한 대로 안하면 소장은 욕부터 나오고 ‘때려치워라. 집에 가서 애나 봐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회사에서 나가면 일자리가 없는데 월급이 그렇게 적더라도 고정적으로 나오니까 감지덕지라고 불만이 있어도 욕먹어가면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한거다.

다친 마음 어떻게 아물까

우리는 동해시에서 5분밖에 안되는 거리에서 일한다. 강원도에서는 시멘트업체가 주인데 정규직은 거의 없고 모든 게 사내하청이다. 여기서 (상경농성하면서) 자금이 쪼달리다 보니 하루 두 끼를 먹는다. 잠은 농성장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동해에서의 천막농성은 100일이 넘었고, 서울 상경 농성은 5월부터 했다. 1인시위는 오전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고 있다. 상공회의소, 프랑스대사관, 아셈타워에서…

서울의 강남, 너무 낯설고…여기 땅값도 모르는데 근처에서 근무하는 경비가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데란다. 임대료가 몇 억씩 하는 데 라파즈가 있는데 우리가 일해서 벌어준 돈 갖고 얘네가 이거 하는 거 아닌가?

촌에서 순진하게 욕 한마디 못하고 말 한마디 못했는데 여기 와서 사람들이 막 대하고 ‘시끄럽다. 조용히 해달라’면서 욕부터 나오니까 우리도 감정이 쌓인다. 왜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욕을 해. 저 사람이 내 심정을 안다면 과연 그랬을까. 내가 설명을 해줘야겠구나. 그런데 설명을 해줘도 쉽게 와닿는 게 아니니까…

나도 여기 와서 많이 거칠어졌다. 그래서 진짜 안좋다.…살아가려고 하는 것이지만 마음이 많이 다쳤기 때문에 이거 끝나고 시골로 내려갔을 때 옛날의 순진했던 마음이 다시 돌아올까 걱정이다. 여기 와서 진짜 고생도 했지만 다친 마음이 옛날 마음으로 돌아갈까가 제일 걱정이 된다. 그 마음을 다스리고 내려가면 좋은데…이게 길어지면 더 거칠어질 것만 같고…내려가면 정말 마음을 다독여서 옛날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깨지더라도 당당하게

5월 13일에 결혼했다. 처음 만날 때는 ‘라파즈’라고 하면 크니까 사람들이 월급 많은 줄 안다. 내 아내도 그랬다. 내 월급이 110~120만원밖에 안되는 걸 알고 이 월급 받고 어떻게 살았냐고 하더라. 그래서 노동조합을 설립했다고 하니 아내가 “만들어라. 요구할 수 있는 건 해라. 이렇게 부당한 것에 대해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건 하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다보니 그 사람도 힘들어한다. 언제쯤 끝나냐고. 그래도 이 싸움을 멈춰서는 안되니까 시작을 했으니까 끝을 보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당당할 수 있어야지. 깨지더라도 당당하게 깨져야지, 나중에 우리 자식에게 당당하게 얘기해줄 수 있다. 중간에 그만두면 내 자식에게 뭐라 할까? 나도 하다가 중간에 포기했으니까 너도 하지마라? 조합원들이 다 힘들어 한다. 앞으로 당당하게 나갈려면 힘들어도 싸워야 한다.

* 덧붙이는 글

어려운 여건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라파즈 한라 시멘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 계좌번호 335096-51-143041 농협(예금주/최철규)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8월 2일 인권오름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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