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구소 '창'에서는 인권에 관한 정보의 확산과 공유를 위해 인권아카이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권아카이브’에서는 아카이브 활동의 일환으로 디지털 아카이브(http://hrarchive.or.kr)를 구축하여 누구나 인권의 기록들을 자유롭게 검색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웹페이지에는 1990년대 이후 인권단체, 네트워크, 연대체에서 생산한 기록들이 등록되어 있으며 매월 새로운 기록을 수집하여 업로드하고 있으니 많은 활용 바랍니다.

 

작성일자 : 2018. 1. 5

작성자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2017년 인권연구소 활동보고

 

1. 인권아카이브 구축 사업(3년차)

2015년 시작한 인권아카이브 구축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에 각 단체나 네트워크에는 정리하지 못한 자료들이 쌓여갑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사라집니다. 각 단체가 창립 10주년, 20주년 행사를 맞을 때 정리하기에는 벅찰 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정보의 확산과 공유를 제때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체계적으로 인권자료를 축적/정리하는 시스템의 마련이 절실했습니다.

 

이에 2015인권아카이브를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첫 사업은 각 단체에서 자료 정리와 입력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발이었습니다. 수 십 차례의 논의와 검증을 거쳐 자료입력정리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활동을 하는 모든 활동단위(개인/단체)에 무료로 보급됩니다.

 

2년차(2016)에는 아카이브 서버로 모은 자료 중에 공개 가능한 자료들에 접속할 수 있는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개발했습니다. 3년차(2017)에는 본격적으로 자료를 스캔하고 입력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인권아카이브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에서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자료는 꾸준히 입력중이고, 검색 기능 에러 등을 계속 수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인권운동의 옛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아카이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실 주소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37-7 현대빌딩 201호 인권연구소 ’(우편번호 03735)입니다. 파일 자료는 soom9999@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2. 한국인권운동사 정리 작업

한국의 인권운동 역사를 정리하는 세미나와 기획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문민정부(김영삼 정권)때부터 박근혜 정부 시기까지의 인권운동 주요일지를 정리했습니다. 이전 시기는 민주화운동으로 정리가 많이 되어있기에 의 세미나는 인권운동이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인권활동가 수다회란 이름으로 당대 주요 현안 활동을 했던 활동가들의 집담회를 열었습니다. 현재는 인권운동의 주요 연대조직(비엔나세계인권대회 공대위부터 인권단체연석회의까지)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5년 정도의 기본자료 수집과 인터뷰,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고, 매 소주제 세미나가 끝날 때마다 소책자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3. 출판

은 한 명의 상임활동가와 십여 명의 비상임 활동가들의 조직입니다. 비상임 활동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7의 연구활동가들이 단독으로 내거나 참여한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류은숙 상임활동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이제 마주하는 인권의 문장들>, <아무튼 문고 제1-아무튼 피트니스>,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유해정 비상임활동가 <재난을 묻다-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김영옥 비상임활동가 <노년은 아름다워-새로운 미의 탄생>, 엄기호 비상임활동가 <공부 공부>

 

4. 세미나

촛불집회 이후 한국사회에서 집회시위의 권리는? 민주주의의 심화는 어떻게?

이런 물음을 갖고 공권력 감시 대응팀소속 인권활동가들과 공익변호사모임 희망법과 공동으로 길 위에서란 주제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세미나는 2018년에도 이어갑니다.

공개 세미나에 대한 물음이 많으실 텐데, 당분간 공개 세미나는 없습니다. 인권운동사 세미나와 길 위에서세미나 두 개는 고정 참여자들이 있고, 현재 조건에선 일주일에 두 개 이상 정기 세미나를 운영하기는 벅찹니다. 다만, 정기 세미나 사이사이 소주제를 정리하는 특강 등의 형식으로 공개세미나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공개세미나는 홈페이지를 통해 알리겠습니다.

2018년 한 해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서로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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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학교는 죽었다 -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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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지난 11월 10일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 하루였다. 첫 조카가 수능을 치른 날이었고 김진숙 씨가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이었다. 내가 인권운동이란 걸 시작하던 무렵 갓난애였던 조카가 다 큰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은 얼마만큼 좋아졌나, 그 세월 동안 난 뭘 하고 살았나,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추위와 더위를 보내고 또 추위를 맞은 300여일 동안 또 난 무엇을 했나, 나는 하루 종일 시험 치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치를 때 문제지를 받아드는 순간은 긴장감의 절정이었다. 책상에 채 다 펼치지도 못할 만큼 큰 시험지를 받아들고 볼펜을 깨물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가 이날 받아든 시험문제는 숱하게 치러왔던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지에서 김진숙 씨는 ‘연대란 무엇인가’는 굵직한 물음을 던졌다. 오랫동안 연대가 뭐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줄 몰라 우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에 속하는 대학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다반사이거나 ‘연대기를 말하는 건가요?’라는 물음을 되돌려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오답자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김진숙의 309일은 연대란 어떤 사람들 사이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공동학습의 기간이었다. 연대가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아하 그거’라고 가슴 한편을 스치는 무엇을 느꼈다. 계속 연대를 공부하고 실천할 동기를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으리란 것이 난생 처음 시험을 치르면서 든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또 다른 시험지는 ‘대학입시거부선언’이었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던 같은 시간에 18명의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과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루저”나 “낙오자”라 손가락질 할 사회에 대해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그저 대학을 안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라 했고,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했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손을 내미는 몸짓”이라 표현했다.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리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가 선언의 마침표였다.

학벌사회를 거부한다고 기껏해야 경력을 쓸 때 출신학교를 쓰지 않는 정도밖에 못하던 나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걱정도 됐다. 이 험한 학벌 세상을 계속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학교를 너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 원치 않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입시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은 뭐가 같고 다른 거지? 이런저런 이유로 ‘탈학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청소년과 입시를 거부할 배짱을 가진 청소년은 뭐가 다르지? 아무리 정규교육에 문제가 많아도 배울 게 있는 것인데 배움의 시기에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지인들과 이런 문제들로 장시간 토론도 벌어졌다.

김진숙 씨의 책 <소금꽃나무>에는 ‘학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김진숙 씨에게는 학번이 없다. 가출하면서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던 대학생이 돼보자는 꿈을 갓 입사한 한진중공업에서 밝히며 ‘공부 땜에 잔업을 못하겠다’고 했다가 비웃음 섞인 벼락을 맞은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 건 김진숙 씨의 트위터 아이디 ‘JINSUK_85’를 봤을 때 85호 크레인이 아니라 85학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습관 때문이었다. 85학번이 아닌 85호 크레인에서 버텨낸 그녀의 힘은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많고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믿음이었다. “학번 없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지고부터였을 게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생기고부터” 그녀는 대학에 못간 잔인했던 청춘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글의 끝에 “세상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투쟁. 그 투쟁에서 당신들은 나의 소중한 동지들이다”라고 그녀는 사랑을 고백한다. 이 고백에서의 ‘당신’은 학번이 없는 사람 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호명이다.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연대, 희망버스나 날라리 외부세력 등에 대한 얘기가 넘쳤던 한 해였다. 그 얘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연대란 ‘우리들’이란 틀을 해체하는 것,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는 거였다. ‘왜 외부세력이 와서 간섭하냐’는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에 대하여 ‘저희는 날라리 외부세력인데요’란 이름으로 화답하는 경쾌함이 이미 ‘우리’의 틀 안과 밖의 구분을 해체했다는 것이었다. 연대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리’ 문제로 뭉친 ‘우리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는 거란 지적이었다.

조카의 수능, 김진숙 씨의 크레인과 연대, 대학입시거부선언이 얽히고설킨 날, 던져진 시험문제에 참고하고 싶어서 나는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절판되었고 누렇게 뜨다 못해 제본까지 너덜너덜해진 책이다. <학교는 죽었다>라는 과격한 제목의 책 내용은 김진숙 씨나 입시거부선언자들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아마 던지는 질문이 같아서일 것이다. 저자인 에버레트 라이머는 미국의 교육학자인데, 저명한 철학자인 이반 일리히와 15년간 나눈 토론과 대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토론에 기초해 이반 일리히도 책을 썼는데 그건 <학교 없는 사회>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교육을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던진 질문을 공유한다면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학번이 있든 없든, 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동료일 수 있다는 것을 묵은 책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학교든 대학이든 정규교육이든 그 무엇이든 어디에 걸쳐 있든 간에 우리 삶 자체가 교육이고 배움인 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라는 걸 말이다.

학교는 죽었다 (에버레트 라이머, 김석원 옮김, 한마당, 1979)학교를 왜 거부하는가

… 전 세계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학교로부터 배우게 된다. 학교에 입학조차 못해본 아이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를 일찍이 중퇴해버린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인생의 좋은 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를 좀 더 다니다가 중퇴한 아이들은 이 체제가 타도될 수는 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 모두가 다 학교란 한 세상 편히 살기 위한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식들만은 그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시켜 잘 살게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들의 자식들은 자기들보다 학교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소망은 결국 현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좌절감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 너무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 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실제로 교육받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실제로 취업관계에서 그리고 실수입면에서도 형편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교육비용이 학생 수나 국민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 소비수준에 한계가 없고, 학위가 사람의 지위를 결정해 주는 이 세상에서는 학교교육의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 진학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닥친다. …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매우 철저한 과정을 거쳐서 길들이는 -즉,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학교에 다니려면 학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즉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규범에 순종하여 따르게 만든다. …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되려면 부모의 재산과 권력 외에도,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순종을 가르치면서 또 규정위반을 가르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규정위반이 일종의 순종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선생 개개인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학교 조직은 학생들이 얻는 점수만을 문제로 삼는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규정은 순종해야 하고, 별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어겨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규정에 잘 순종하는 학생들은 그 사회에서 생산 및 소비 생활을 요구받는 대로 수행하게 된다. 학교 규정을 어기며 성공하는 것을 배운 학생들은 이 사회를 요리조리 이용해먹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 학교는, 기술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사람이 이 지배관계를 통하여 이득을 얻게 보장해주며, 더구나 그들이 이 지배관계를 거부할 줄 모르도록 무능력화시켜 버린다. 결국 학교 운영 과정에서, 상부의 운영자에서부터 하부의 추종자까지 모두가 끝없는 경쟁 -처음에는 규정에 따르다가 결국에는 규정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는 경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 규정이 옳고 그르고 혹은 그 경쟁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제쳐두고 말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테크놀로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테크놀로지의 노예 혹은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예로 전락하기는 쉽지만 자유인 혹은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테크놀로지는 환경의 오염에 의하여, 현대전쟁을 통하여, 혹은 인구폭발 등에 의하여 인류를 죽여버릴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소비경쟁을 통하여, 경찰국가에 의하여 혹은 결국에는 무너지고야 말 생산양식을 통하여 인류를 노예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기회(life chance; 사회계층적 이동, 즉 하층에서 상층으로의 상향이동의 수단으로서의 학교교육을 의미한다)에 있어서 학교 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가

… 학교의 선별기능에 의해 승자가 탄생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자도 또한 생겨나며 학교의 선별은 인생의 선별로 연장되어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어 내게 된다. … 학문 자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기보다는 경쟁에 이기는 것 자체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일부분은 항상 그 대열에서 탈락하기 마련이다. … 더 큰 해악은 학생들을 선별해서 카스트 제도와도 같은 특권적 위계질서의 틀 속에 끼워 넣는다는 점에 있다. … 오늘날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은 그 사회구조와 부합되는 실력뿐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징은 기술문명의 생산물의 경쟁적 소비에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다시 제도에 의하여 통제된다. 한편 제도는 현재의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현재의 특권층이 새로운 ‘실력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물을 통제한다.

학교란 무엇인가

… 여기서 학교를 <일정한 연령의 집단이, 단계적인 교육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가 감독하는 교실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라고 정의하자. … 선생들도 학교가 생기면서 그 전과는 반대의 위치에 서도록 바뀌었다. 선생의 진정한 역할은, 질문을 받고서 보다 깊은 질문을 다시 던져올 수 있도록 대답해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즉 선생이 질문해야 하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정설을 제시해야 한다. … 학교가 직업을 알선하고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을 갖게 해주는 독점적인 제도로서 성장한 것은 표준화된 단계적 교육과정에 의해서 가능했다. … 학교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 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한다 -마치 현대기술문명 세계 모든 것을 취급하듯이. 물론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작과정에서 대상물의 다른 측면을 짓밟고, 바라지 않았던 부산물이 생기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을 조작대상으로 삼을 때 그 희생은 특히 크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있어서 조작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할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교육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은 벌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그 방법이 성공할 것이라는 고집에 있다. 교육과정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조작 처리되어 배출되는 인간은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 -인간을 다른 나머지 물질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교육의 혁명적 역할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 없이는 학교 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의 변화로 교육에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소용없는 짓이다. … 교육적인 변화는 그 변화과정에서 다른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교육은 사회의 근본적인 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는, 비록 소수만을 교육시킨다 하더라도,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서 붕괴되고야 말 것이다. 여기서는 학교 교육 이상의 다른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학교에서 교육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사회를 창조하거나 혹은 다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도움이 없다면 영웅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정의로운 세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삶을 지금부터 살기 시작하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모든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나마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이나 정당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사회는 일단 획득되고 그 다음에 향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하며, 따라서 획득되어지고 있는 동안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사회

A: 나, 노안 때문에 요즘 안경 두 개 쓴다.
B: 두 개?
A: 응. 가까운 거 볼 때랑, 길거리에서 먼 데 볼 때랑 바꿔 써.
B: 불편하겠다.
A: 응. 젤 불편할 때는 사람들 얼굴 보며 얘기해야 하는 데 자료도 같이 봐야 할 때야. 자료를 보려고 이 안경을 끼면 사람들 얼굴이 흐릿해 보이고. 사람들 얼굴 자세히 보려고 딴 안경을 끼면 자료가 안 보이고.
B: 늘 두 개의 시야 사이를 오가네. 나도 요즘 시야가 흐릿한 데 곧 그렇게 되겠다.
A: 두 시야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조리개가 있었으면 좋겠어.
B: 우리들 시력에만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갈수록 느끼는 건데 한국 사회에도 안경 같은 게 필요한 거 같아.
A: 무슨 안경?
B: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 말이야.
A: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엄청 달라 보이는 데, 사회에 요구되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은 뭐로 만들지?
B: 인권교육 같은 걸로?

지긋지긋한 공부

A: 맨날 공부해야 할 게 허다한데 뭘 또 배워? 공부라면 지긋지긋하다.
B: 네가 지긋해하는 그런 공부 말고.
A: 그럼 무슨 공부?
B: 넌 왜 공부가 지긋지긋한데?
A: 음… 내가 지긋지긋해 하는 공부란… 하면 할수록 남과 비교해서 내가 초라해지는 공부, 갈수록 암기하고 익혀야 할 것만 늘어나는 공부야.
B: 또 하면 할수록 전문가들을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공부지. 그래서 주눅 들고. 공부하다 보면 빚도 엄청 쌓여. 돈이 좀 많이 들어야 말이지.
A: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기력해져. 인권교육은 그런 공부와 뭐가 다를까?
B: 네가 싫어하는 공부를 뒤집는다고 생각해봐.
A: 뒤집는다? 그럼 경쟁과 비교 말고, 암기 말고, 전문가나 가르치는 쪽의 우위 말고, 전문가의 일방적 전달 말고, 무기력 말고…. 뭐 이렇게 되네.
B: 반대말을 모아 보면 협력과 공유, 비판적 사고, 위계를 지우고 서로 배우기, 힘이 생기는 배움이 되네.
A: 그런 공부가 세상에 어딨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냐. 우리가 생각해 온 공부는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 위계에서 더 높은 학교로의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거였는데.
B: 이상적이지. 근데 인권교육의 이상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배움이 할 수 있는 참다움이 아닐까? 암기와 기술만을 요구하는 교육에 이미 우린 너무 물렸잖아. 이제 그만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인권교육은 권리다

B: 무엇보다도 인권교육은 그저 하면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권리이기도 해.
A: 우리의 권리라고?
B: 그래. 권리!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권리를 지킬 수 있겠어? 또 권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겠어?
A: 우리 주변을 보면, 인권이나 평등 관련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걸.
B: 그렇게 권리를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 아닐까?
A: 권리 침해라는 생각까지는 못해봤는데… 내 경우엔 내가 받는 모욕과 무시를 ‘내가 못나서’라고 내 탓으로 여기게끔 길들여져 온 것 같아. 또 노동착취를 열정 또는 헌신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B: 우리 주변엔 차별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문제제기하는 쪽을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내모는 사람이 많아. 나도 거기에 쉽게 동조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
A: 특히, 타인에 대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무시를 자기의 자유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
B: 이상한 제목과 명칭을 씌워 피해자를 모욕스럽게 부각시키고 가해자의 존재는 지워주는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인권감수성 결핍이란 생각도 자주 하게 돼.
A: 돌이켜보니 구석구석 인권교육이 필요한 데가 많구나.
B: 지금껏 못 배웠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해 알 수 있어야지. 그 앎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해.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만든 인권교육길잡이 책<인권교육,날다>

 

인권교육을 옹호하는 근거들

A: 인권교육은 한편으론 의무이기도 한 것 아닐까? 인정받을 권리는 곧 타인을 인정할 의무이고 자유를 주창할 권리는 곧 타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할 의무이니까.
B: 그래.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전문)해야 한다고 돼 있어.
A: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강화”(제 26조)여야 한다고도 써있네.
B: 또 있어. 유엔에서는 ‘인권교육훈련선언’을 2011년에 채택했어. 그에 앞서 1994년에는 유엔인권교육을 위한 10개년 행동계획을 채택하기도 했어. 이런 행동계획의 요지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삶을 위한 학습이란 거야.
A: 그럼, 한국에서도 그에 따른 노력이 있어야 할 것 아냐?
B: 물론이지.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교육에 노력해왔어. 무엇보다도 국가는 인권교육에 대한 의무가 있어. 유엔의 ‘인권교육훈련선언’에서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 정책과 절차를 적용해 인권교육훈련을 실행하고,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 7조)고 명시했어.
A: 그러니까 인권교육훈련에 기반이 되는 법 제정 등을 해야 한다는 거네.
B: 그렇지. 가령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교육훈련을 증진하고 공공기관과 민간 활동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해. 2014년에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어.
A: 그래서 인권교육법안이 생겼어?
B: 아니. 법안 철회로 끝났어.
A: 왜?
B: 일부 단체들이 ‘인권교육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 ‘동성애 옹호 등으로 국민의 안전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식의 반대활동을 벌여서 결국 법안이 철회됐어.
A: 반대의 이유 자체가 인권과 거리가 머네. 정말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것 같은데.
B: 그러게. 인권교육의 원칙은 평등, 존엄, 화합, 반차별인데 말이야.
A: 인권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인권이라 했는데, 자기 권리를 걷어찬 것과 마찬가지야.
B: 인권을 내세우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자격조건을 다는 것, 그런 조건부 인권의 주장은 이미 ‘특권’이라 할 수 있어.

비판적 사고의 힘

A: 나는 말을 잘 듣고 지시에 복종하는 게 좋은 태도라고 배워왔는데… 비판적 사고를 가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B: 나도 비판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삐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
A: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곤 했지.
B: 비판적 사고든 창조성이든 ‘자유’를 필요로 하는데 우린 그런 자유를 방해받는 일이 더 많았지. 우리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엘리트의 언어나 표준화된 언어로만 말할 걸 요구받곤 했어.
A: 내겐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한 데, 그게 도대체 뭘까?
B: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란, 모호함을 떼어내는 훈련이 아닐까?
A: 모호함을 떼어낸다?
B: 가령 ‘성폭력’이라 명백히 지목할 일을 ‘어쩌다보니’, ‘몹쓸 손’, ‘스트레스로 인한 일탈’ 등으로 모호하게 말하는 일이 많잖아.
A: 그런 일을 ‘성폭력’이라 말할 수 있으면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거네.
B: 또 ‘노력이 부족해서’, ‘눈높이가 높아서’ 등으로 설명하는 언어들은 대규모의 실업과 열악한 노동현실을 가리는 모호한 언어야.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가령 지배엘리트의 시각으로 해석된 현실이야.
A: ‘변화란 불가능하다’,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거다’ 이런 것도 누군가,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의 시각일 뿐인데, 그걸 나의 시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 이런 것도 비판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
B: 내 삶의 구체적 문제를 드러내고 뭔가 요구하고 싶은 데, 그걸 국가안전이니 애국이니 하는 추상적인 논의와 맞불을 붙일 때가 많아. 그래서 내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몰거나 침묵시키지. 그런 것에 도전하는 것도 비판적 태도 아닐까?
A: 우리가 당연시 했던 해석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또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판적 사고란 거네.
B: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기존에 당연시되던 권력의 작동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는 변화를 찾아내야 해.
A: 그런 변화를 찾아내는 힘을 스스로 긍정하고 서로에게 격려할 수 있는 것에 비판적 사고의 힘이 있을 거야.

인권교육의 방법

A: 그런 힘을 기를 수 있는 인권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B: 일단 내용 자체가 내 삶의 내용, 내 삶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인 권리의 내용, 내 삶의 터에 존재하는 인권규범, 주요한 인권침해에 대한 지식, 인권에 대한 책임을 진 기관과 제도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
A: 또 배움의 방식이 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할 것 같아. ‘꿇어’, ‘외워’ 식으로는 안 될 거 아냐. 검열이 아닌 성찰을 요구하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를 통한 것이면 좋을 것 같아.
B: 공부할수록 날 무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해. 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구체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으면 해. 가령 ‘카더라’ 통신과 근거 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능력,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쟁점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 상호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
A: 나는 그런 교육을 통해 멋진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B: 다시 태어난다고?
A: 응. 우린 그냥 우연히 태어나 저절로 시민권이란 걸 가졌잖아. 그런 걸 누군가 “저절로 된 시민”이라고 말했어. 그런 시민이 다른 운을 갖고 태어난 동료 인간에게 거들먹거리고 배타적으로 군다면 시민성의 의미가 빛이 바래. ‘저절로 된 시민성’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민주주의적 시민성’으로 거듭나는 것, 멋지지 않아?
B: 그래. 좋은데! 아주 멋져!
A: 어느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장애를 만드는 건 환경이고 느끼게 하는 건 사람입니다.”
B: 인권교육이 세상을 전부 바꿀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떤 환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나 또는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를 성찰하는 힘을 기를 순 있을 거야.
A: 요즘 광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배우고 있어. 누군가를 배제하는 폭력이 뭔지도 느끼고 있어. 이런 배움이 비판적 성찰로 이어져 우리 삶을 꾸리는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국민 주권

A: 난리다. 난리.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B: 검은 돈으로 주고받는 이권의 정치, 권력의 사유화……. 넌 요즘 심정이 어때?
A: 어릴 적 꼬리잡기 놀이할 때 같아.
B: 꼬리잡기?
A: 머리에 선 대장은 팔짱끼고 버티는데 꼬리에 붙은 애들은 서로 잡고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뛰고 몸부림치던 놀이 있잖아.
B: 넌 머리였어, 꼬리였어?
A: 말해서 뭣하냐. 늘 꼬리였지.

정당성의 근거로만 이용

A: 내가 유권자이고 주권자인 것 맞냐? 나를 대리하거나 대표한다는 자들에게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배신당하기만 하는데.
B: 애초에 저들은 ‘국민’과 ‘주권’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해.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
A: 어떻게 다른데?
B: 일단 저들은 국민주권을 통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만 생각하지.
A: 우리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로 뽑아주기만 하면 ‘나는 국민을 통해 선출된 정당한 권력’이라고 써먹기만 하는 거?
B: 그런 써먹기에서 ‘국민’은 그저 같은 국적을 갖는 사람들의 덩어리에 불과해.
A: 정치의 무대에 등장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의사결정과 집행능력을 갖지 않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한 거지.
B: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은 명목상 주권자이지만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잖아. 그래서 개발된 논리가 헌법상의 권력에 위임한다는 거지.
A: 주권자의 의사라는 명목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뜻’이란 모호한 이름으로 대표자로 나선 권력자의 자유가 표명되기 십상이지.
B: 물론 헌법이 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행사된다고 하지만.
A: 우리를 매개로 했으니 정당하다? 그럼 국민주권이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인증서로 끝나는 거야?
B: 정당성의 근거만 제공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또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선거에 착실히 투표하러 가는 거…….
A: 에효. 대통령이 빈껍데기 허수아비였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우리 주권자들이 허수아비인거네.

권리로서의 국민 주권

B: 국민주권 개념 자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거야.
A: 정치적이란 건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대항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는 말일 거고
B: 역사적이란 건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구성됐다는 거지.

A: 지금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국민주권론 말고 분명 딴 게 있지 않을까? 정치적, 역사적으로 말이야.
B: 있지. 주권을 우리들 권리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구성하려는 주권론도 분명히 있어.
A: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B: 그러니까 주권을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이 진짜 누구에게 있는가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거야.
A: 우리가 주권자라는 건 우리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 권력을 어떻게 쓰지?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B: 우리가 주권자란 걸 관철시키려면 적극적 정치 참여의 권리, 권리 투쟁의 과정으로 주권행사를 생각해야 해.
A: 참정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대표를 선출할 때만 등장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의사를 확인하고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여야지 우리가 주권자라는 게 말이 되지.
B: 권리로서의 주권론과 권력을 옹호하는 주권론의 경합이 오랫동안 있어왔어. 우린 지금 그 경합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야.

국민 주권 vs 인민 주권

A: 무슨 역사적 사례 같은 걸로 얘기해 보자.
B: 근대적 의미의 헌법과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에서 그런 경합의 사례를 볼 수 있어.
A: 맞아. 의회 안의 정치세력과 의회 밖의 정치세력의 경합이 치열했지.
B: 구체제의 특권세력과 특권을 몰아내는 데는 힘을 뭉쳤지만, 중상층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 장악력을 빈농, 소농, 노동자, 소상인 등 민중에게 뺏길 것을 두려워했지.
A: 당연히 두려웠겠지. 민중들은 아주 배가 고팠고 자신들의 단결과 직접행동을 통해 배를 곯게 만드는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했으니까.
B: 그래서 민중들은 정치적 참여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어.

A: 그걸 표현한 것이 ‘국민 주권’과는 다른 주권론이었겠네.
B: 맞아. 둘을 구분 짓기 위해 ‘인민 주권’이란 말을 쓰기도 해. 한국에선 북한이 ‘인민’이란 말을 쓴다고 이 단어를 꺼리지만. ‘국민 주권’의 ‘국민’과 구분 짓기 위해 ‘인민’(people)이라 해보자.
A: 주권론에서 국민과 인민의 차이가 뭘까?
B: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국적보유자의 덩어리가 ‘국민’이라 했잖아. 반면에 ‘인민’은 직접 주권을 행사하고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유권자, 즉 주권행사에 참가한 시민의 집합이야. 이런 인민은 덩어리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은 존재야.
A: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았다면, 유권자의 의사는 유권자 전체의 1/n씩 모여 표현되는 거네.

B: 그런 표현이니까 대의 제도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일 뿐이야. 이런 유권자는 추상적 국민과 달리 의사결정 능력과 집행 능력을 갖는 존재야. 이런 인민은 주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행사하는 존재야.
A: 대의 제도 말고 달리 주권을 행사할 방법이 있을까?
B: ‘인민 주권’의 주창자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구상을 했어. 가령 의회가 법률안을 작성하면 개별 유권자들은 각 지구별로 주권자 집회를 열어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 그 결과가 의회에 전달되면 이를 집계하여 법률의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거야. 법률안을 작성하는 의원은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고, 유권자는 선출된 대리인(의원)에 대하여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책임 추궁은 소환과 형벌로 이뤄지지. 또 의원에 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도 구상했어.
A: 상층 계급이 그런 구상에 동조할 리가 없잖아.
B: 그렇지. 그들은 구시대의 특권층을 내모는 데는 민중들과 힘을 합쳤지만, 이런 급진적인 민중들의 주권론을 받아들일 순 없었어. 자기들 이익을 반영하는 주권론으로 물타기를 해야 했어.
A: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민 주권’이란 거네.

B: 맞아.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규정했지만 그 국민은 ‘대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덧댄 거지. 그러니까 선거 제도가 당연 필요한데, 의회를 장악한 세력은 돈 없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는 제한 선거를 내세웠어.
A: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법률 등의 제정에 직접 참가할 수도 없고, 선거에 나설 수도 없는 거네.
B: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책임추궁, 소환과 형벌 등은 꿈도 못 꿀 명목상의 주권자가 된 거지. 지배세력은 국민 주권론만 헌법에 새겨 넣는 데 그친 게 아냐.
A: 또 뭘 했는데? 제한선거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데.
B: 아주 촘촘한 사슬을 갖췄지.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인권에 대한 제한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법, 또 반선동법을 만들어서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
A: ‘국민 주권’론으로 정당성만 챙기고 사실상 국민의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는 거였구나.
B: 정치적 의사표현의 집회의 자유 보장, 압제에 대한 봉기권을 말한 인민 주권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거지.

주권자는 쉬지 않는다

A: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네.
B: 주권자에 대한 탄압도 다르지 않지만 저항도 다르지 않지.
A: 우리의 가까운 역사만 봐도 ‘국민 주권’에 갇힌 명목상 주권자가 아니라 실질상 주권자가 되려는 저항은 쉰 적이 없는 것 같아.
B: 오늘날 ‘국민 주권’은 그런 저항 속에서 변화된 거라고 봐야 해. 간판은 ‘국민 주권’이지만 ‘인민 주권’의 이상이 많이 침투한 국민 주권을 오늘날 우리는 구상하고 구성하려고 하고 있어.
A: 그치. 제한 선거 제도는 보통선거 제도로 바뀌었고, 건드릴 수 없던 대표에 대해서도 유권자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으로 역사는 진전해왔어.
B: 위헌 법률 심사나 정당의 민주화, 많은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국민투표, 국민발의, 소환제도 같은 것도 있잖아.
A: 도처에서 주권자들은 쉬지 않았구나.
B: 우리도 쉴 수가 없잖아.
A: 신정정치니 어쩌니 하면서 추문에 대한 꼬리잡기 놀이로 빠지지 않아야겠어. 똑바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국정 통제권을 발휘하는 거야.
B: ‘정치고 경제고 힘 있는 자들은 원래 다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체념하고 관심을 접을 때 그들은 계속 이익을 얻을 거야. 권력도 공공 재산도 맘껏 사유화하면서 말이야.
A: 나에게 딱히 지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공적 과제들을 다루는 장에서 절대 나가지는 말아야겠어. 레이더를 계속 켜두겠어.
B: 그리고 서로를 더 많이 초대했으면 해.
A: 무슨 초대?
B: 우리 삶은 갖은 고통으로 점철돼 있고 우린 그 고통으로 서로 연결돼 있어. ‘왜 지금 시국에 그 얘기를 하느냐?’ ‘‘하야’얘기에 물타지 마라.’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배척하지 말고 다양한 문제를 들고 공론의 장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서로 환영했으면 해.
A: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이 참, 겨울 바람에 스치운다.
B: 헌법 제1조 2항이잖아? 우린, 개별 유권자들은 따로 또 같이, 집합적으로 이 헌법대로 할 권리가 있어.

 

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503 호 [기사입력] 2016년 10월 0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죄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다

A: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알아?
B: 새삼스럽게 웬 장래희망 묻기야?
A: 한번 물어봐줄래.
B: 그래. 어색하지만 물어볼게. 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
A: 미안하단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
B: 겨우 그거였어?
A: 겨우가 아냐. 너, 제 때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인정할 줄 아는 어른 본 적 있어?
B: 어어, 생각해보니 잘 안 떠오르네. 과오를 없던 일처럼 뭉개거나 ‘그 정도 했으면 됐지’라며 자기 합리화하거나 체면 봐서 넘어갈 주길 바라거나……. 뭐 대충 그런 것 같은데.
A: 그것 봐. 그래서 내 희망은 여전히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

B: 나한테도 물어봐줘. 어떤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은지.
A: 보편적 복지 빵빵하고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국가?
B: 그건 정말 먼 희망사항이고. 적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어.
A: 야아, 국가는 지독한 인권침해의 최고 가해자야. 그런 국가에게 잘못의 인정을 기대하다니. 그건 내가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B: 그렇지. 너와 나 같은 보통 시민이 하는 사과와 국가의 사과는 달라. 너와 내가 주로 부딪치는 사과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잖아.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관계회복을 이룰 수 있는 단순한 사과에 속하는 경우일 거야. 하지만 국가의 경우는 권력 행위의 대가로서 져야할 책임이야. 명백한 과오와 범법에 대한 사죄인 것이지 도덕적 양심에 따른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A: 너와 내가 잘못을 뭉개는 것과 국가가 국가범죄에 관한 행적을 권력과 법으로 은폐하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

B: 국가는 가해자인 동시에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를 지고 있어.
A: 국가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B: 그러니까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죄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고 실효성 있는 후속조치를 취할 의무까지 져야 돼.
A: 과연 우리는 사죄할 줄 아는 국가의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부인을 부추기는 잔혹함

B: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게 사죄잖아. 그런데 사죄는커녕 부인을 해도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부인을 하고 있으니…….
A: 사죄할 줄 모르는 정부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는 사회에 걸맞는 정부가 아닐까?
B: 난, 나한테 걸맞는 정부가 그런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A: ‘외압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소위 전문가들, 피해자를 오히려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부인과 회피를 응원하고 있잖아.
B: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권력자의 생각과 선호에 자신을 맞춘다.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길이 성공이다. 성공하고 출세하면 불의를 행하고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게 사죄를 가로막는 삼종 세트지.
A: 참 잔인하다. 타인이 겪는 고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잔인함 또는 잔혹함이라 하는데.
B: 타인의 고통에서 잠재적인 나의 고난을 상상할 수 있고, 그렇기에 피해자와 동료감을 느끼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미안함과 동료감은 아무리 나눠가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것인데 왜 잔혹함마저 경쟁하는 걸까?

A: 저렇게 국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저런 대접을 받는구나, 우린 정의의 바깥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우린 무슨 가치를 믿고 누구를 신뢰하며 어떻게 서로 의지할 수 있을까?
B: 그래서 우린 꼭 사죄를 받아야만 해. 이 사회에 어떤 멍석을 까느냐에 따라 앉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어. 우리가 멍석을 바꾸면 설령 악마 같은 이들이라도 잔혹함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을 거야. 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에 걸맞는 정부를 가질거야.

사과 받을 권리, ‘사죄하라’는 명령문

A: 우리 예전에 인권피해자의 권리에 대해 얘기했던 것 생각나?
B: 응. 유엔에서 만든 ‘인권피해자권리장전’에 대해 얘기했었지.
A: 거기에서 최소의 출발점으로 ‘공식적인 사죄’를 꼽고 있잖아.
B: 그 권리장전은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의 구제와 피해회복의 원칙과 방법을 열거하고 있어. 그중에 ‘만족(satisfaction)’이란 항목이 있어. 만족에 포함되는 게 책임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야.
A: 권리장전 말고도 또 있어. 국제법위원회가 만든 ‘국가책임법 초안’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도 ‘만족’이란 항목에 의무위반의 인정과 공식적 사죄를 언급하고 있어.
B: ‘만족’이란 말밑에 공식적 사죄가 속해있다는 게 의미심장한 것 같아.
A: 그치? 그 만족은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흡족할만한 사죄를 말하는 거잖아. 가해자의 자기변명이나 상황의 모면 또는 충실한 책임 이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하는 사죄는 사죄로 보지 않는 거야.
B: 솔직히 그런 기준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면 사죄부터 하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또 사죄를 했으면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뭔가를 행동으로 옮겨야지. 그래야 사죄라는 말에 걸맞지. 이것도 상식, 저것도 상식이다.
A: 그렇지. 피해자에게 사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뭐야? ‘권리’라는 건 그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는 거야.
B: 그래서 난, ‘사죄 받을 권리’를 ‘사죄하라’는 명령문으로 생각해.
A: 우린, 지금 ‘제발 사과해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게 아니라 ‘사죄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거야.

B: 난 ‘사죄 받을 권리’가 직접적인 피해자의 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물론 ‘사죄 받을 권리’는 피해자가 응당 받아야할 배상 등의 권리와 연관되지만, ‘재발 방지 조치’ 같은 건 나와도 직접 연관되는 문제야. 나뿐 아니라 잔혹함을 배제하고 공감의 멍석을 까는 인권의식이나 사회체제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야.
A: 그러게. 난 요즘 한국 사회가 합동위령제 사회 같아. 오래전 얘기지만, 영화 <괴물>이 개봉됐을 때 ‘합동위령제’ 장면이 참 ‘한국적’이란 말이 오갔던 게 생각나.
B: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강남역, 구의역, 지진과 태풍, 군납품비리 등으로 이어진 죽음들, 그 속에서 무책임과 무능력과 적반하장만 연출한 정부,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는 삶……. 정말 이대로 ‘합동위령제’만 지내다 끝내는 사회여야 할까?

백남기 농민을 죽게한 국가폭력을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사진출처-백남기 대책위>

 

사죄로부터 시작되는 ‘말’의 정치

A: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데, 이 정부가 망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말’을 망친 게 치명적인 것 같아. 말 같은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대화는 없고 독백만 있잖아.
B: 말을 죽이는 정부가 결국 사람까지 죽였어.
A: 그래놓고 사과는커녕 폭력시위 운운하면서 계속 말을 죽이고 있네.
B: 온 몸으로 말하는 직접행동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를 할 수가 있지?
A: 고 백남기 님을 봐봐. 정부의 책임지는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하다 말을 망친 정부의 물대포에 쓰러지셨어.
B: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왜 ‘말’로 안 하고 ‘직접행동’을 하냐는 반대자들의 비아냥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어. “사회적 쟁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직접행동을 하는 이유”라고 말이야.
A: 고 백남기 님이 계셨던 자리의 사회적 쟁점들이 어디 한두 가지야? 쉬운 해고를 비롯한 노동개악 중단, 재벌 책임 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
B: 그분은 인간성에 대한 존중을 몸으로 말해주셨어. 자기 일상을 희생하면서 용기를 다해 불의를 고발하다 쓰러지셨어.
A: 그런데 남은 자들은 그분의 죽음에 대해 사실을 증언하고 인정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다니.

사죄 없는 정부, 무력감의 직사

B: 국가범죄에 대한 사죄 없는 정부는 결코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걸 공언하고 있는 거야.
A: 우리에게 계속 직사하고 있어. 무력감을 말이야.
B: 말이 통하지 않는 정부, 시민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가 쏠 수 있는 건 무력감뿐이야.

A: 사죄는 정부가 시민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거야. 바꿔 말하면, 우릴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계를 부인하기 때문에 사죄하지 않는 거야.
B: 개인끼리도 사과가 제 때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관계가 일그러지잖아. 건성으로 사과하거나 사과의 말과 다른 행동을 보이면 오히려 불화만 커지잖아. 하물며 시민과 국가 사이에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사과가 없으면 정말 관계를 부인하는 거잖아.
A: 피해자의 ‘사죄 받을 권리’란 진상규명, 배상, 재발방지 보장 등의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걸 포함해.
B: ‘사죄’는 피해자의 존재와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거야. 관계를 부인하는 마당에 피해자의 참여는커녕 피해자가 오히려 표적이 되는 게 가장 악질적인 피해의 확대재생산이야.

A: 사인이 명백한 고인에 대한 부검 시도 같은 게 대표적이지. 유엔과 국제인권단체 등 국제인권사회 뿐 아니라 사죄 없는 정부의 폐해를 이래저래 숱하게 겪은 시민들이 비난하고 있는데 계속 버티기네. ‘비난의 수용’도 사죄의 구성요소란 걸 모르나봐.
B: ‘내키지 않는다’, ‘싫다’고 도리질하고 내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권침해와 국가범죄에 대한 귀결로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져야 할 책임이라는 걸 모르면 그런 직분과 직무를 가져선 안 되지.
A: 뭘 노력하다가 잘해보려다가 벌어진 실수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엄연한 범죄에 대한 사죄인데 말이야.
B: 미국의 어느 법관은 “지나치게 오래도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이다”라고 했어. 지나치게 오래 끄는 사죄는 부적절하고 실패한 사죄가 될 수 있어.
A: ‘누가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란 질문이 있지. 누군가 ‘강자에 의한 약자의 권리 침해를 막으려고 법이 있다’고 답했어. 법 앞에 권력이 먼저 꿇어야 하는 거라구. 권력이 우릴 야단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권력을 야단치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불법행위에 대해 빨리 사죄하라고 우리는 명령문을 발사하는 거야.
B: 그래. 할 일이 태산인데 얼른 사죄부터 해야지. 국가범죄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사죄는 일회적인 표명만으로 사죄의 행동이 완결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아. 사죄에 따른 후속행위의 실천을 통해야만 사죄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다구.
A: 은폐, 부패, 악폐는 이제 그만.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로 가는 길에 이정표는 ‘사죄 먼저’야. 이제 길 좀 제발 나서보자. 출발 좀 해보자구.

 

인권오름 제 503 호 [기사입력] 2016년 10월 0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99 호 [기사입력] 2016년 09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비 내리고 벌써 춥다. 그 날도 비가 왔는데.
B: 그 날? 무슨 날?
A: 작년 11월, 농민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쓰러지시던 날, 그 날도 비가 왔어.
B: 그랬나? 그나저나 의식불명으로 누워 계신지 벌써 9개월이 넘어가네.
A: 의학적으론 더 이상 해볼 게 없다는데……. 정치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손을 놓고 있으니…….
B: 이제서야 겨우 ‘백남기 국가폭력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기로 여야 합의했잖아. 한참 늦었지만, 청문회라도 제대로 돼야 할 텐데.
A: 비 내리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권력도 속 시원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
B: 누구에겐 굼벵이고 누구에겐 속사포 같은 그 속성이 쉽게 바뀌겠어?

시민을 표적 삼는 국가폭력

A: 공권력을 일컬어 야누스의 얼굴이라 하더라.
B: 야누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성이나 집의 문을 지킨다는 신? 근데 국가폭력이 왜 두 얼굴이야?
A: 국가가 가진 권력 자체가 엄청난 거잖아. 멋대로 날뛰는 폭력을 지배하고 통제하라고 ‘공적’으로 모아준 폭력이 공권력이니까.
B: 법의 얼굴을 한 폭력이 공권력이란 말도 있지.
A: 내가 아는 인권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수단일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의 인권이 ‘목적’이고 국가권력은 그 이행을 위한 ‘수단’일 뿐이야. 근데, 그 힘을 정권 또는 기득권 세력을 위해서만 쓰려할 때 권력의 오남용이 발생하는 거고, 그게 국가 폭력이지.
B: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국가가 만인의 인권을 평등하게 보호하는 장치라고 미화하지만, 현실적으론 차별하고 현실 정권이 맘에 들지 않은 시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제압하려 드는 거, 그게 공권력의 ‘두 얼굴’이란 거네.
A: 그래. 국가권력이 시민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려드는 거, 시민을 표적삼고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것, 그게 국가폭력이지.

B: 누가 그러더라. 정치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고, 권력은 그 무언가를 ‘이행할 힘’이라고.
A: 국가폭력은 바로 그 정치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게 문제야. 정치의 진짜 목적은 시민의 인권보장이란 걸 왜곡해서 ‘통치자에 대한 보호’로 목적을 변질시켜.
B: 강자가 약자를 해치는 폭력을 국가권력이 방관하고 엄호하겠다는 신호를 노골적으로 보내는 것이기도 하지.
A: 국가폭력은 시민을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거잖아. 백남기 씨가 쓰러졌던 그 집회의 요구안이 뭐였는지 알아?
B: 알지. 우리가 당면한 삶의 과제들인데. 쉬운 해고를 비롯한 노동개악 중단, 재벌 책임 강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 차별금지법 제정, 대북적대정책폐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같은 거였지.
A: 농민으로서 백남기 씨가 요구한 내용은 밥쌀 수입 저지,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이었어.
B: 그런 걸 요구하는 시민은 공권력이 겨냥하는 ‘폭도’가 되는 거야?
A: 본래 정치의 의미를 저버리고 정권안보라는 정치적 의도 하에 공권력을 동원하고 조직적으로 불법적이고 위압적인 행위를 하는 국가권력은 그런 요구엔 관심조차 없어.
B: 평화적으로 저항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거, 그거야 말로 최악의 폭력 아닐까?

A: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보면 더 기가 막히지. 경찰처럼 공식적인 국가기구나 국가소속 공무원들이 자행하잖아.
B: 또는 국가의 후원을 받는 집단도 있지. 정부의 지시아래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 끈끈한 관계이지만 언제라도 관계를 부인할 수 있는 그런 세력을 통해 폭력을 저지르잖아.
A: 맞아. 백남기 씨의 경우나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처럼 경찰이 직접 사람이나 재산을 공격해서 시민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사기업이나 민간용역업체, 관변단체 등도 국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어.
B: 노동자 블랙리스트의 이용, 폭력적인 노점단속, 관제데모 같은데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지.
A: 국가폭력이 표적 삼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공권력이 내세운 명분인 국가안보, 범죄와의 전쟁, 공공의 안녕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 현실 정권의 권력 유지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행동 원리나 사고방식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잖아.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

A: 국가폭력은 국가권력이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하는 걸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해.
B: 인권침해 중에서도 너무 단순하고 분명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게 국가폭력 아닌가?
A: 맞아. 인권에는 구조적인 맥락과 조건을 성찰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이 많아. 하지만 국가폭력 같은, 특히 백남기 씨 같은 사건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이야. 고차방정식이 아니라 그냥 단답형 문제라고. 신체적 안전 보장을 유린한 부당한 폭력이고 법을 무시한 공권력의 횡포잖아.
B: 생명‧자유‧안전의 보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침해이지.
A: 범죄가 발생했으면 범인을 쫓고, 어긴 법에 따라 수사하고 재판하고 처벌하는 건 당연하잖아.
B: 그러게.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인 만큼 단답형 문제지.
A: 이런 단답형 문제에도 답하지 않는 권력이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적 인권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손댈 수 있을까?
B: 악법이나 부족한 법을 바로잡진 못할 지라도 적어도 확실한 법은 지켜야 할 것 아냐?
A: 범법자, 그것도 법을 어긴 경찰이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시민들이 어떻게 법을 존중할 수 있지?
B: 폭력에 대한 면책을 권력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걸 뻔히 보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모욕 받는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법을 존중할 수 있고, 법 집행자들을 신뢰할 수 있겠어?
A: 부패와 폭력 혐의가 있는 고위층 범죄자는 예외 없이 처벌을 면하고, 승진 등 승승장구하고, 살인용의자가 활보하고 다니면서 고위직을 노리고 다닌다면?

B: 갑자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착각했다는 생각이 든다.
A: 왜?
B: 킹 목사가 이런 말을 남겼거든. “법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도 악당을 저지할 수는 있습니다. 법은 상대방이 나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A: 시민을 중태에 빠뜨린 경찰의 살인적인 과잉진압이란 단순하고 명백한 폭력에 대해서조차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킹 목사의 어록을 수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갈라치기의 폭력

A: 국가폭력은 물대포처럼 가시적이고 확실한 폭력에만 있는 게 아냐. 더 깊이 뿌리박힌 근원적 폭력의 문제도 있어.
B: 근원적 폭력? 예를 들면?
A: 시민을 갈라치기 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국가폭력, 국가폭력의 핵심이야.
B: 갈라치기라, 누구를 어떻게 가른다는 거야?
A: 아까, 세월호 진상규명 등을 요구한 집회 참가자를 공권력이 ‘폭도’로 대했다고 했잖아. 그럼, 그 집회에 안 나오거나 그런 요구안에 찬성 안하는 이들은 ‘선민’인가? 어떤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 이외의 사람을 외부로 배제하는 일, 권력이 이분법적으로 만든 틀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사람들을 가두는 것 자체가 중대한 폭력이야.
B: 정권에 저항하는 목소리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지. 평소에도 젠더, 민족, 인종 등등의 축에 따라 경계선을 긋고 사람들을 달리 대하잖아. 똑같이 범죄를 저질러도 누가 하면 ‘앞길이 창창한 사람의 실수’ 정도로 넘어가려 하고, 누가 하면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식으로 난리가 나지. 또 같은 범죄피해자라도 그게 누구냐에 따라 ‘의심’하거나 ‘공감’하고. 가령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에 대해서는 미적거리거나 되려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 많잖아.

A: 시민들의 집회시위를 과잉 통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야. 어떤 시위는 권력이 직접 부추기고 심지어 돈으로까지 지원하면서, 어떤 시위는 위험시하고 참가자를 ‘적’으로 대하는 것은 시민을 철저히 갈라치기 하는 거지.
B: 누구에 대한 기소는 신속하고 가혹하게 처리하고 누구에 대한 고발은 수사조차 안하거나 기소할 생각 없이 굼뜬 것, 선택적 수사와 기소, 이런 게 시민을 갈라치기 하는 거야.
A: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복수의 가치와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서로의 존재를 관용으로 대하면서 ‘적’이 아니라 서로 논쟁하고 경합하는 상대로 대해야 하는 거잖아.
B: 그치. 그런데 국가권력이 정권의 권위와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시민을 ‘적’ 또는 ‘비인간’으로 갈라서 분류하고 처우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야.
A: 평화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을 일단 제압하고 본다는 데 골몰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야. 비판적 세력 또는 이질적 집단을 적으로 상정한 공권력은 언제든지 인권침해를 일삼을 수 있어.

식민주의의 유산

B: 우리 어렸을 때, 떼쓰고 우는 아이에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던 얘기 기억나?
A: 기억나. “계속 울면, 순사더러 잡아가라고 한다”던 말?
B: 그래, 정작 우리는 ‘순사’라는 말조차 모르는데 말이야.
A: 그러게. 순사라니?
B: 일제시대 경찰을 말하는 거야. 공권력, 특히 경찰의 폭력은 식민지 유산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식민지 종주국들은 본국과는 다른 경찰상과 제도를 식민지에서 써먹었지. 대표적으로, 식민 경찰제도의 목적은 폭력에서 시민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식민 통치자들을 보호하는 거였어.

A: 그럼, 독립 후에는?
B: 엘리트들은 철통같이 보호하되, 시민, 특히 가난한 시민은 보호하지 않는 거였지. 권력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지배자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 반체제 인사 처리, 사회악에 저항하는 시민을 제압하는 게 공권력의 필수 활동이고, 식민 경찰과 식민지 유산을 간직한 경찰의 모습이야.
A: 에고. 옛 일만은 아니다. 자신의 임무가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임명권을 가진 정치 세력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가 공권력의 수장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나 울고 싶어졌어.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누가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

누가 통제할 것인가?

A: 아까, 공권력의 속성이 쉽게 바뀌겠냐고 했지?
B: 그 버릇, 속성이 하도 오래된 거라…….
A: 그럴수록 우린 국가폭력에 대해 더 많이 더 세게 말해야만 돼.
B: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시민에게 봉사하는 선의의 경찰관도 많지 않냐고.
A: 맞아. 바로 그런 경찰들을 위해서 더욱더 폭력 경찰을 잘라내야 해. 정권 해바라기인 공권력의 수장들은 내부의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자기 업적을 위해 몰아붙이기 마련이라구.
B: 맞아. 공익을 위해 시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승진하고 조직문화에 영향력을 갖는지를 지켜보는 것과 위법한 공권력을 행사한 간부가 승진하고 포상 받는 것을 지켜보는 건 아주 다를 거야. 냉혹하고 부패한 자들이 보상체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조직 문화를 쥐락펴락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괜찮은’ 내부인들이 어떤 태도를 지향하게 될까? 백남기 씨 같은 일조차 예사로 넘기면 국가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거잖아.

A: “우리가 사실을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처리한다.”는 말이 있어.
B: “우리가 사실을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처리한다?”
A: 공권력의 폭력에 의한 시민 생명의 위기, 이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사실이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정권의 잘못과 공권력의 오남용에 저항하는 시민은 저렇게 되더라. 우리는 보호받지 못할 거고 납작 엎드리는 게 살길이란 자괴감‧무력감만 남겠지.
B: 그건 안 되지. 반대로 우리가 사실을 처리해야만 해.
A: 맞아. 우리가 사실을 처리해야 해. 백남기 씨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그 결과에 따른 국가의 책임 인정과 배상, 책임자 처벌, 피해자의 명예 회복, 재발방지를 위한 법제도 정비 등이 이뤄져야 해.
B: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국가가 시민을 죽이게끔 내버려두는 건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인권오름 제 499 호 [기사입력] 2016년 09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조난 신호 읽기

A: 덥다 더워.
B: 그러게. 이런 날씨에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해. 마음까지 펄펄 끓는 것 같아.
A: 날씨만 더운 게 아니라 요즘 나라 안팎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 끔찍해.
B: 가까운 사람을 잃는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큰 고통일 텐데, 그것도 증오에 찬 폭력 속에서 일어난 상실이라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A: 자기를 망치고 타인을 해치는 폭력이 모두 늘어나고 있어. 그런 인권침해를 법 제정이나 규범 준수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B: 사람들 마음 밭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면 권리 목록을 읊어대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어느 때보다 인권규범과 제도가 넘치는 시대인데, 사람들 마음은 팍팍하기만 한 것 같아.
A: 그 팍팍함을 오히려 조난신호로 읽으면 어떨까?
B: 조난신호?
A: 사람은 누구나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워. 게다가 지금처럼 좌절과 실패가 강요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버텨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조난신호를 보내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고대하는 게 아닐까?

B: 그런데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가마솥더위라는 날씨 예보 보다 무반응의 결과가 더 무섭다. 더위에 반응하는 감각처럼 우리에겐 고통의 신호에 반응하는 감각이 있지 않을까?
A: 그러게. 타인의 고통과 비참에 영향 받고 상처받는 감각. 뭔가 남 일 같지 않고 나도 연루돼 있다고 느끼는 감각.
B: 원하는 만큼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조난신호를 주고받고 거기에 서로 반응하는 역량도 있고.
A: 타인의 고통에 초연할 수 없고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심란한 것. 그게 우리가 가진 인간성의 징표일지 몰라.

안으로 굽는 팔

B: 하지만 그런 고통에 대한 반응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덕스럽기 그지없어. 가만 앉아서 그런 반응을 기다릴 게 아니라 뭔가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A: 맞아. 인권에서의 관계는 인권을 옹호하는 쪽과 반인권 세력과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아.
B: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적대만큼 심각한 것이 내 쪽을 편애하는 차별이지.
A: 내편, 우리 편으로 동일시하기 쉬운 쪽으로 기울기 쉽지.
B: 누구에겐 펄쩍 뛰며 반응할 일을 누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원래 그런 거야’라고 체념시키거나 쉽게 수용해버려. 내 편에 관련된 일이면 책임을 묻지 않고 ‘유감이다’란 표명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엔 피해자를 비난해. 네 탓인데 누굴 원망 하냐고 말이야.
A: 부끄러워 할 쪽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수치심을 뒤집어씌우기도 하지.

B: 자원의 불평등만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 관계 맺는 방식 자체의 불평등에도 주목해야 해. 누구에겐 쉽게 공감하고 역지사지를 하고 그 처지를 헤아리려 들어. 반면 누구에겐 야멸차게 굴거나 멸시하고 문제를 경시하고 빨리 잊으려 하고 불행마저도 경쟁의 목록으로 놓고 싸우려 들어.
A: 그러다 보면, 우리 편 또는 끼리끼리 사이에선 불평등하고 불의하다고 느끼는 일을 공적으로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게 돼. 고통의 선별작업과 취사선택이 이뤄지게 돼.

B: 공분을 느낄 수 있어야 사회적으로 영향 받는 고통, 보이는 고통이 될 수 있는 데……. 그런 공분을 형성하는 과정은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안 보이고 안 들리던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고 평소 별 불편을 모르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조용히 점잖게 하자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
A: 다급해서 당장 무엇이든 가능한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관망할 여유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정의란 어느 한쪽이 독점할 수 없으니까 이 과정을 시끌벅적 통과하면서 공분을 만들어내야 해.
B: 그 시끌벅적함을 기꺼이 같이 경험하려 하는 게 인권 감수성 아닐까? 공분이 무르익기 전에 단순히 눈에 띄는 제도 변화만을 선호하거나 단순한 취사선택으로 결정짓는 건 뜸을 덜 들이고 설익는 밥을 급하게 먹는 건 아닐까 싶어.

A: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동일시할 때도 있지만, 자기의 인권에 해로운 질서의 보존을 자기 안전과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야.
B: 권력은 국가권력이든 가부장제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우리의 감정도 통제하려 들어. 권력에 좋은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지. 누군가의 인권을 반대하고 실천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비극은 없을 거야.

A: 또 착각 중에는 고통을 평준화시키는 것도 있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 받는다는 게 고통의 맥락 없음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누구나 저마다의 문제로 아파한다고 해서 ‘고통은 다 똑같다’인 건 아니지. 부당한 고통을 강요하는 불의한 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그런 식의 생각 또한 공분을 훼방하는 것 같아.
B: 내 편하고의 동일시만이 아니라 은근히 강요된 동일시로부터의 냉정한 거리유지의 균형감각, 그게 인권의 감수성인 것 같아. 단순한 동일시에 쉽게 빠지는 게 아니라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인식하는 만남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공분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권이 자극하는 감수성

A: 우리에게 뭔가 느끼게 하고 뭔가를 지향하게 만드는 것들, 즉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많아. 인권이 특별히 자극하는 감수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B: 난, 무엇보다도 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말하고 싶어. 같은 사람인데 차별적 취급을 받으면 그냥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주눅 들고 내 인간성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 같아.
A: 그럴 때 ‘법으론 평등하다’란 말을 들으면 약 올리는 것 같고 더 화가 나더라.
B: 차별적 취급이란 게 형식적인 법의 문제만이 아닌 데, ‘법으로 보장돼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하면, ‘더 이상 기대하지 마라’,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

A: 반대로 실질적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차별적인 법이나 제도를 일부러 더 만드는 경우도 있어.
B: 사람간의 위계와 등급을 나눈 대우를 능력에 대한 대우인 것처럼 위장하는 기술만 늘어가지.

A: 그런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게 자유에 대한 감수성인 것 같아. 남의 눈의 기준에 따라 남의 눈에 들려고 하다보면, 나의 자율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없고 타인의 잣대에 좌지우지되거든. 그렇게 좌지우지되다보면, 차별적 취급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는 눈에 들지 못했으니까’, ‘내가 못나서’, 이런 식의 자격지심에 빠지게 돼.
B: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과 타인을 존중하는 건 다르잖아. 대칭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 속에서 느끼는 친밀감, 나를 깎아내리거나 주눅 들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소망과 감정을 인정하고 반영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어.
A: 자유를 침해당한다는 건 ‘나에겐 힘이 없다’에 지배당하는 상태인 것 같아. 무력한 인간은 책임감이 아니라 ‘강자의 결정을 따라야 할 의무’만 강요받아. 책임감은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할 것과 좋은 정치공동체를 일구기 위한 참여를 요구해. 무력한 개인들의 사회에서의 ‘쿨(cool)함’을 유지하는 게 과연 책임 있는 자세일까?
B: 인권감수성은 내가 져야 할 책임의 속성을 숙고하고 판단하게 하는 지침인 것 같아.

인권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감수성으로 돌아보는 인권교육인 '나를 둘러싼 인권꽃잎'. 각자 꽃잎에 소중한 것을 적고 누군가 그것을 함부로 대할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나눈다. 사진은 2007년 동자동에서 주민들과 함께 했던 교육장면

 

상상력의 힘

A: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존중할 수 없다. 날 한번 이해시켜 봐라’ 타인의 인권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인 것 같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데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야.
B: 그럴수록 인정과 겸손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타인 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불가능성,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겸손 말이야.

A: 불가능한 게 뻔해도 추구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있지.
B: 그게 뭔데?
A: 상상력의 발휘지. 내 관점이나 내가 속한 집단의 관점을 넘어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말이야.
B: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깨비감투 같은 것처럼 말하네.
A: 상상력은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면서 다양한 감정의 배치와 영향력을 바꿀 수 있어. 혐오의 모래톱을 쌓기도 하고 편견의 희생양으로 몰아붙이기도 해. 편애와 선호로 암묵적 윗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고정관념으로 상시적 아랫자리를 만들기도 해.
B: 하긴, 원래부터 부정적이기만 하고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은 없는 거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야. 우리가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변형되고 변화하는 거니까.
A: 좋은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자기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공감의 표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불리함에 대한 공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불의에 대한 억울함을 그것의 원인을 겨냥해 표출하고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 그런데 나쁜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시나리오 속에서 누구는 있지도 않은 소득으로 과소비를 하고, 있지도 않은 사회적 지원에 기생하고, 있지도 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힘을 남용하는 존재가 돼버려. 상황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란 걸 거부하니까 그들에 대한 감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어.
B: 상상력을 잣대로 ‘판 깨기’를 해보잔 말이네. 하긴 인권의 역사란 건 기존의 ‘판’을 그대로 두고 누구를 끼워주거나 끼어드는 게 아니라 새 판을 짜는 일이었지. 이 일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힘이 주효했어. 상상력은 타인에게 다가가고 접촉하여 연합할 수 있는 힘이 되니까.
A: 또 상상력은 ‘아직 현재가 아닌 것’의 상태를 그려보게 만들잖아. 인권은 단지 좋은 원칙과 규범의 준수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움직여서 아직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다양한 느낌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해.
B: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걸 통해 무언가를 지향하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 인권감수성은 그런 움직임, 행동을 내포하고 있는 걸 거야.

 

 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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