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기 힘든 사람들 - 돌봄, 의존 그리고 지켜져야 할 우리의 일상에 대하여』
도하타 가이토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5.
‘있기’와 ‘하기’의 이분법적 사유의 오류를 넘어: 함께 살기(being/living)로 읽는 『있기 힘든 사람들』
김영옥(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있기 힘든 사람들』은 정신과 돌봄시설의 돌봄-치료 풍경을 묘사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정신장애인과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정신장애인들은 소통 능력이나 사회생활 능력(이라 말하고, 경제활동 능력이라 이해하는)이 ‘원활하지 못’하다. 그래서 생산활동을 하기 어렵고, 생산활동이 중심인 곳에서는 있기/살기가 어렵다. 이들이 아침마다 이곳으로 출근하는 이유다. 이 상황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그저, 있을, 뿐’인 장애인들의 나날을, 있기와 하기라는 두 실존 형태의 비교 속에서 살핀다. 알아차림과 익숙해짐의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과정에서 일 방향의 의존과 돌봄이 여러 방향의 의존과 돌봄으로, 그리고 치료와 돌봄의 두 갈래 실천이 돌봄-치료라는 하나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2016년 도쿄 인근에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 스쿠이야마유리엔에서 전 일본을 경악에 빠뜨린 사건이 터졌다. 그곳에서 잠자고 있던 장애인 19명이 살해되고 2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이곳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 그에게 형사책임능력이 부재했음을 주장하는 변호사의 말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죠?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심실자(心失者)들입니다.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동반자살이나 간병 살인, 사회보장비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들을 안락사시키는 게 사회 정의입니다. 그런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으니 내가 나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한’ 일에 사회가 고마워할 겁니다.
자신의 책임 능력을 온전히 인정받고자 했던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스쿠이야마유리엔에는 장애인 150-60여 명이 ‘있다’. 이들은 식사와 목욕, 배설 등에서 돌봄을 ‘받는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원예 작업과 창작 활동도 ‘한다’.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 나는 살인을 저지른 범행자의 ‘하기’와 살해당한 장애인들의 ‘있기’를 대조해 보았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매우 심각한 일을 했고, 그의 행위로 많은 사람이 삶을, 있기를 빼앗겼다. 그리고 나는 저 복지시설의 장애인을 설명하는 동사들도 명료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있기와 받기와 하기. 비중은 다를지라도, 이 세 상태가 엄연히 공존한다. 받기 덕분에 있기가 가능한 건데, 그렇다면 받기는 하기가 아닌가. 하기와 어떤 차이가 있나.
『있기 힘든 사람들』은 사람의 실존 상태를, 있기와 하기라는 대립 쌍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 대립 쌍은 어느 정도 이념적 구성물이다. 생명체의 현실 속에서 있기와 하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아니, 이 비유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있기 속에 하기가 있고, 하기 속에 있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묘하다. ‘있다’라는 동사의 쓰임새 때문이다. 있기가 있다니. 이건 뭘까. 언어가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이 단지 언어철학자들의 사변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self) 이해와 세계 이해가 언어 안에서만 가능함을 가리키는 거라면, 이 문장에서 ‘있다’라는 동사의 역할과 의미에 주목해 볼 만하다.
우리는 곧 이 문장뿐 아니라, 모든 문장에서 ‘있다/이다’와 ‘하다’가 기본 토대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삶이, 삶에 관한 모든 이해가 언어 안에서 구축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삶은 ‘있다/이다’와 ‘하다’로 구성된다는 거다. 이 둘이 없으면 삶도 없다. 이 둘 중 하나만 있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비중도 가늠할 수 없다.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처럼, 둘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삶을 (특히 자본을 중심으로) 계량화할 수 있는 듯 다뤄온 오랜 자본주의 문화 관습 때문이다.
‘있다’라는 동사의 이중적 의미를 상기해 보자. ‘나는 장애인이다‘, 라는 문장과, ’나는 있다’라는 문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상태를 표현하면서, 그러나 현실 속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즉, 나는 장애인으로 있다, 즉 장애인으로 산다는 사실 말이다. 저 두 개의 문장은 각각 실존의 형태와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지만 현실 속에서 이 두 개는 한 몸이다. 실존의 형태를 부정하면서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있기 힘든 사람들』은 실존과 존재가 맺는 이 근본적이며 오묘한 얽힘을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시도한다.
내게 이 책은 ‘실패한 듯 성공한, 성공한 듯 실패한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실패나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이미 잘못된 느낌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ㅜㅜ)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그러나 점차 은근슬쩍 미소를 짓게 만들며 전개되는 친밀한 관계라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닌 듯, 아리송해지는 이야기라서 하는 말이다. 이런 느낌은 결말 부분에 제기된 질문 때문이다. ‘그저, 있을, 뿐’인 실존의 상태를 존재 차원이 아닌 ‘가치’의 차원에서 질문하고, 그때 그 가치는 ‘기여’로 치환되고, 그때 기여 여부를 판단하는 건 ‘자본’이다. 여기서 독자는 쓰라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처럼 다른 삶의 모습을, 실재하는 그 현장을 만났다고 기뻐하고 뿌듯해할 때, 그 다른 삶은 돌연 자본의 법정에 서 있지 않은가. 심문은 혹독하다.
법정을 채우고 있는 전문가들은 모두 회계사들이다. 1세기 전 카프카는 『심판』에서 법관들이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 책이 포르노라고 말한다. 정신장애로 ‘그저, 있을, 뿐’인 사람들의 이 ‘있기’를 가능케 하려는 모든 시도를 법정에 세운 법관들의 앞에는 이제 보란 듯이 회계 장부가 펼쳐져 있다. 카프카의 법관과 달리 현재 법관들은 심지어 회계 장부를 높이 들어 흔들어 댄다. 이윤 창출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낙오자의 수치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수치심, 방향이 잘못 틀어진 것 아닌가.
자본의 관점에서 치료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투자다. 다 나으면 다시 생산으로 기여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돌봄은 유지일 뿐이고, 결국 계속 소비하는 과정이다. “돌봄과 치료는 인간이 관계 맺는 두 가지 방식이고 본래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 우위도 없지만 현실에서 자본은 압도적으로 치료에 우호적이다.”(『있기 힘든 사람들』, 344쪽) 그래서 ‘그저 있는 상태’의 사회적 가치를 논하긴 어렵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의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리 모두 이 느낌을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무의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논리에 매수당한 우리 귀에는 반복해서 환청이 들린다. ‘이래도 괜찮은가?’ 이 환청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우리 모두 또한 알고 있다. ‘그저 있을 뿐’인 사람은 없다는걸. 이걸 모두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저, 있을, 뿐’인, 그런 사람은 없다! 저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한다.
이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시설의 다른 구성원들을 어떻게 돌보는가를. 치료와 돌봄의 관계를, 윤리적 태도를 먼저 강조하기보다는 어찌어찌 살아내지는 일상의 차원에서, 조목조목 살핀다. 독자들은 알던 것도 현장의 풍경과 냄새로 더 잘 알게 되고, 모르던 것도 ‘아하’ 감탄하며 배우게 된다. 돌봄에 관해 (주로 경제적 관점과 돌봄노동의 어려움 때문에) 편협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도 견해를 수정하고 싶을 만큼 설득된다. 이 책의 ‘사회적 기여’라고 할만하다.
저자는 그러나 돌봄의 가치를 경제학 용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강요된 명제 앞에서 ‘허무주의’를 말한다. 허무(虛無), 아무것도 없이 텅 빔. 니힐리즘(nihilism), nihil 아무것도 없음의 사상. 허무주의/니힐리즘을 동사형(annihilate)으로 이어서 생각해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annihilate 모조리 없애다’. 그 복지시설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간호사와 심리상담사, 원무팀원들이 계속 뭔가를 해서 전체적으로 만들어 낸 돌봄의 장을, 단지 장애인들의 있기뿐 아니라, ‘모두 함께 있기’를 가능케 했던 시간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저자가 의료 경제학자나 후생 경제학자 등 돌봄의 경제학을 아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 자신의 고백처럼 단지 심리상담가일 뿐이라고 해서, 이렇게 돌봄의 미세한 결들을, 돌봄으로 지켜내는 존재와 실존의 엄연한 몸을 무(無)로 만드는걸,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주도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자본주의 태도가 깔려있는데, 이런 태도는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돌봄은 항상 허무주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같은 책, 351) 그래서 우리는 이 위협을 잘 안다. 다행이다. 앎이란 ‘있다’와 ‘하다’ 모두에 중요하다. 이 앎을 마중물 삼아 우리는 돌보고 돌봄 받는 것의 중동태적 상태를 알아차리게 된다. 돌보는 게 나인가, 아니면 너인가.
‘능동에서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해 주어 밖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중동에서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 즉 자리가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즉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라고 언어학자 벤베니스트는 설명한다. 돌봄은 시장에서 계약에 따라 제공되는 서비스에서처럼 능동으로 수행될 때도 중동의 속성을 지닌다. 돌보는 사람은 돌봄 받는 사람과 함께 그 돌봄의 장소에 있다. 돌봄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돌봄 받으며 ‘소비’하는 사람과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위협이 아무리 거세도, 돌봄이 돌봄의 비자본적 순환 때문에 수치심을 강요받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돌봄은 생명/삶 생성적 순환을 이루며, 이 순환에서 벗어나 있는/사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걸. 모든 ‘하기’의 자유는 바로 이 순환에 근거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수치심은, 마치 이 순환에서 벗어나 (free from) 단독자로 하기에 투신할 수 있다고 믿는 저 회계주의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걸.
함께 있기를 함께 수행하는 돌봄이 시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런 돌봄을 시장 밖으로 내모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생명/삶 순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치심이 의식의 언어 속에 자리하는 ‘나’와 현실 속에서 삶으로 행해지는 것 사이의 어긋남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면, 생명/삶 순환 밖에서 돌봄을 평가하는/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수치심을 가져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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