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돌봄, 지방공무원이 현장에서 풀어가는 관계의 방정식=(혁신×관계)+공공민간협력+오차항

『통합돌봄의 길을 내다 - 시범사업 7년의 현장 기록』 (장숙랑, 유애정, 윤종성, 이재철, 박영근, 한진희 지음/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6)

최홍조(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역사는 2026년을 한국사회의 통합돌봄 원년으로 기억할 수 있다. 통합돌봄지원법이 시행된 첫해이기 때문이다. 준비 없는 새로운 정책, 제도, 사업은 없다. 『통합돌봄의 길을 내다』는 돌봄 전문가 2인과 지방공무원 4인이 각자 2026년을 준비해 온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통합돌봄은) 하나 같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처음 시작하는 낯선 것”이라고. 그렇게 시작한 통합돌봄의 공간을 주민들이 자발적 모임으로 채우고 만들었다. 의료와 복지의 협력은 한참을 돌아왔지만,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례를 모으고 토론하는 공간은 관료적 회의장에서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이 책은 혁신에 대한 이야기다.

광주 서구는 우리 동네 75세 이상 노년의 삶을 전수조사하고, 부천시는 전체 동의 돌봄자원을 조사했다. 당시에는 무모하고 과도한 업무로 여겨졌을 것이다. 전통적 복지사업 – 중앙정부가 예산과 세부 지침을 내리고, 지방정부는 그대로 실행하는 – 의 문법을 반복하지 않고, 진천군은 “자율 결정”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몸에 새겼다. 중앙정부가 시군구 단위로 설치/운영하라던 “지역케어회의”를 청양군은 주민들의 삶에 더 가까운 읍면 단위로 설치/운영했다. 자연스레 “지역케어회의”는 주민들 사이의 깊이 있는 돌봄의 “치열한 토론”장이 되었다.

이 책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통합돌봄은 “아는 관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 같이 일하는 관계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목적과 가치를 충분히 공유”하는 관계의 최고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 ‘관찰’과 ‘애정’을 넘고 ‘실천적 연대’를 통해 ‘입장의 동일함’을 강조했던 신영복 님의 글이 떠오른다. 어떤 관계를 다루는지 한눈에 이해하기 위해 본문 35쪽의 “지역사회 통합돌봄 개념도”를 우선 살피고 넘어가시길 바란다. 가장 어렵고 여전히 쉬이 만들지 못한 관계는 보건의료와 복지의 협력이다. 한 공간 – 회의나 사무공간 공유 - 에 모여있더라도 함께 일하는 관계가 아닐 수 있다. 전담인력이 없이 새로운 사업을 할 여유를 만들기 어려운 보건사업의 현실을 복지담당자가 이해하는데는 실패의 경험이 필요하다. 재택의료센터와 통합돌봄팀의 협력 경험이 없었다면, 조정자로서의 공공/정부 역할이 왜 필요한지 절실히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관계맺기에서 좌절의 경험이 없었다면, “주민은 서비스 수혜자가 아니라 제도를 지속시키는 ‘사회적 기반’”이라는 고민까지 확장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은 지방정부와 민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들은 통합돌봄에서 “공공” - 여기서는 중앙/지방 정부를 의미 - 은 조정과 사례관리를 담당하고, 민간은 서비스 제공을 담당하는 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제시한다. 당장의 부족한 돌봄자원을 통합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공공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민간과 지방정부의 협력은 경직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공공’은 지시와 통제의 주체로서 실행의 역할을 외주화하던 중앙/지방 정부의 행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 공공/정부가 실행기관과 수평적 협력관계임을 받아들여야 통합돌봄의 공공민간협력이 가능하다. 부천시의 통합방문간호센터의 경험에서 민간에 서비스 제공을 떠넘기듯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재택의료센터를 조정/조율할 ‘지원’센터 역할을 지방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7년의 결론이 조정자로서의 공공/정부와 실행자로서의 민간기관의 협력관계라면, 앞으로의 7년, 10년은 어떤가. 조금 더 공공성을 강조하는 서비스 제공기관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협력구조를 공식이자 원칙으로 세우는 순간, 미래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공공은 ‘생산과 실행’의 역할을 직접하지 않고 민간에 의존해야만 할까. 돌봄의 생산을 조금 더 공공적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는 고민의 출발선도 지금일 필요가 있다.

읽고 나서 중요하지만 아직 확인 못한 질문이 많이 남았다. 통합돌봄 7년의 실험 이후, 마을은 어떻게 변화하고, 가족 돌봄의 부담과 구조, 돌봄의 젠더화, 돌봄 결핍 경험과 사회적 돌봄 비용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직 살피지 못했다. 다음 책이 궁금하고 필요한 이유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한 많은 이들을 더 포함하지 못한” 아쉬움을 풀어줬으면 한다.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 지역 공무원의 이야기다. 책에서 등장하는 간호직 공무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마을 돌봄 서클에 참여한 이들의 기쁨과 고뇌를 듣고 싶다. 지역케어회의에 묵묵히 참여하다 어느 순간 돌봄을 토론하기 시작한 부녀회분들도 초대하자. 통합돌봄의 “사회적 기반”인 돌봄수혜 주민들의 이야기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통합돌봄을 다루는 소위 전문가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이제 당신들도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시라. 혹여, 몇 페이지 넘기고선 다 아는 이야기라 느끼신다면, 부디 통합돌봄의 논의에서 비켜나 주시면 좋겠다. 혁신도, 관계도, 협력도, 현장에서 나고 지고 다져진다. 알고 있었으나 몰랐던 맥락이 있고, 안다고 생각했으나 돌파해 보지 못했던 경험이 이 책에는 있다. 이 책은 통합돌봄의 방정식의 일부를 잘 풀어 설명한다. 이제 남아 있는 오차항 – 혹은 아직은 모르는 미래의 가능성 –을 하나씩 밝혀낼 시간이다.

돌봄은 생산이다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우리는 오늘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잔뜩 만들어냈다. 온갖 물건, 먹거리, 문서와 데이터 등과 미소와 관용, 짜증과 혐오 등을 자아냈다. 그 무엇이 됐던 물질적·비물질적인 뭔가를 만들어냈다. 그중에는 과잉 생산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절실한데도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과소생산의 대표적인 것으로 돌봄을 꼽고 싶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돌봄에 의존하는데, 돌봄은 기대하는 만큼 생산되지 않는다. 돌봄이 시급한 상황에서조차 충분하지가 않다. 절실한 돌봄은 왜 만들어지지 않거나 불충분하거나 아니면 ‘불량품’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또한 실제로 돌봄을 만들었는데 왜 만든 것으로 간주 되지 않는 것일까?

원하는 질의 돌봄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 체계(system) 속에서 돌봄의 자리가 불안하고 홀대받기 때문이다. 돌봄을 애써 만들 의욕 자체가 생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돌봄은 파편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 혹은 ‘서비스’라는 조각으로 다뤄져 왔다. 사회 체계 속에서는 자연적인 산물인양 여성의 성별화된 역할이자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했고, 경제 체계 속에서는 생산을 보조하는 부차적 활동이거나 생산활동의 부양에 의존하는 비생산적 비용으로 구박했고, 정치 체계 속에서는 돌봄 관계자의 소리를 침묵으로 처리하거나 적극적인 정치적 행위자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했다. 돌봄은 일방적인 수혜이자 부담일 뿐이며, 인적 투자의 가치가 클수록 가치가 있고, 거리가 멀수록 홀대당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에 돌봄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왔다. 돌봄을 조각이 아닌 전체로서, 체계와 관련된 사안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얼만큼의 돌봄서비스가 제공됐느냐가 아니라 돌봄을 만들어내는 포괄적 과정과 최종적 결과를 포함하여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돌봄 생산과 분배의 불평등과 왜곡된 정책 설계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은 인간이 돌봄을 생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돌봄도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돌봄은 생산한다. 무엇을 생산하는가? 경제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 활동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역량을 생산한다. 역량은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다양한 조합을 가리킨다. 다양한 조합이기에 역량은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추구할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길만한 삶을 실제로 영위할 자유가 있으나 취약하고 불안정한 게 모든 존재의 현실이기도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보편적인 취약성을 공유하는 토대 위에서, 저마다의 자기다운 삶이 실제로 성취될 수 있는 실질적 자유가 되려면, 누구에게나 돌봄 체계가 요구된다. 인간 역량을 만들어내는 돌봄은 이타주의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호혜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 누구나 쓰는 공공재이자 쓰면 쓸수록 긍정적인 효과가 부각되는 그런 인프라에는 공공의 투자가 당연하다. 공공의 사회적 돌봄 인프라에 누구나 의존할 수 있는 사회는 일방이 아닌 상호적인 호혜성에 기반해 돌봄을 운영할 것이며, 그것을 위해 노동·교육·생태 등과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제도들을 배치할 것이다.

인간 역량을 만들고 확장하는 돌봄은 비용이 아닌 생산으로 다뤄져야 한다. 돌봄에 대한 투자는 경상소비가 아니라 인간 역량과 회복탄력성에 대한 투자로서 사회적 인프라의 일부다. 이 말은 자칫하면 돌봄이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돌봄의 도구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일종의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 논의처럼 오해될 수도 있다. ‘돌봄을 생산으로 보자’는 것은 기존의 생산활동을 잘 보조하기 위해서 돌봄이 필요하다는 식의 돌봄의 수단화를 벗어나자는 말이다. ‘돌봄이 생산한다’는 말은 무엇을 생산으로 보느냐는 생산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생산을 잔뜩 더 늘린 후에, 다른 말로 경제성장을 더 이룬 후에, 그것의 재분배를 늘린다고 해서 정의로운 돌봄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돌봄은 ‘필수적으로 정의로운 일이니 하라’는 명령이나 단지 ‘돈의 투입을 늘린다’고 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부정의하고 불공정한 돌봄은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생산의 의미와 방식을 바꾸자는 흐름 속에서 돌봄은 부정의를 배격하려는 전환의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인간 역량의 생산과 유지에 복합적 위기를 몰고 온 경제 체계를 돌봄을 중심으로 다시 상상할 수는 없는가? 이에 대한 상상은 이미 시작됐다. 페미니즘 경제학을 필두로 국제노동기구(ILO), 유엔여성기구(UN Women) 등 인권을 중시하는 유엔 전문기구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세계경제포럼(WEF) 등 경제기구들도 돌봄을 전체로서의 체계로 파악하며, 돌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전략적 인프라이자 위기 상황에서 복원력을 결정짓는 공공재로서 그 가치를 재평가하면서 돌봄 경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돌봄의 필요와 역량의 성취는 시장에서의 서비스 생산을 부추기고 국가에서 바우처 등으로 지원해 준다고 충족되는 게 아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은 생태·돌봄·노동위기 등 복합적 위기에 대응하는데 무능한 상태에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기존의 생산주의를 넘어서는 다른 생산이 필요하다. 인간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의 재생산에 무엇이 절실한지를 기준으로 생산활동을 조정해야 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이에 돌봄을 생산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발상은 변혁적 의제의 핵이다. 기존의 협소하고 부정의한 개념으로부터 빠져나와 생산도 투자도 돌봄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해보자.

『있기 힘든 사람들 - 돌봄, 의존 그리고 지켜져야 할 우리의 일상에 대하여』

도하타 가이토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5.

 

‘있기’와 ‘하기’의 이분법적 사유의 오류를 넘어: 함께 살기(being/living)로 읽는 『있기 힘든 사람들』

김영옥(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있기 힘든 사람들』은 정신과 돌봄시설의 돌봄-치료 풍경을 묘사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정신장애인과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정신장애인들은 소통 능력이나 사회생활 능력(이라 말하고, 경제활동 능력이라 이해하는)이 ‘원활하지 못’하다. 그래서 생산활동을 하기 어렵고, 생산활동이 중심인 곳에서는 있기/살기가 어렵다. 이들이 아침마다 이곳으로 출근하는 이유다. 이 상황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그저, 있을, 뿐’인 장애인들의 나날을, 있기와 하기라는 두 실존 형태의 비교 속에서 살핀다. 알아차림과 익숙해짐의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과정에서 일 방향의 의존과 돌봄이 여러 방향의 의존과 돌봄으로, 그리고 치료와 돌봄의 두 갈래 실천이 돌봄-치료라는 하나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2016년 도쿄 인근에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 스쿠이야마유리엔에서 전 일본을 경악에 빠뜨린 사건이 터졌다. 그곳에서 잠자고 있던 장애인 19명이 살해되고 2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이곳에서 일했던 직원이었다. 그에게 형사책임능력이 부재했음을 주장하는 변호사의 말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죠?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심실자(心失者)들입니다.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동반자살이나 간병 살인, 사회보장비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들을 안락사시키는 게 사회 정의입니다. 그런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으니 내가 나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한’ 일에 사회가 고마워할 겁니다.

자신의 책임 능력을 온전히 인정받고자 했던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스쿠이야마유리엔에는 장애인 150-60여 명이 ‘있다’. 이들은 식사와 목욕, 배설 등에서 돌봄을 ‘받는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원예 작업과 창작 활동도 ‘한다’.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 나는 살인을 저지른 범행자의 ‘하기’와 살해당한 장애인들의 ‘있기’를 대조해 보았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매우 심각한 일을 했고, 그의 행위로 많은 사람이 삶을, 있기를 빼앗겼다. 그리고 나는 저 복지시설의 장애인을 설명하는 동사들도 명료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있기와 받기와 하기. 비중은 다를지라도, 이 세 상태가 엄연히 공존한다. 받기 덕분에 있기가 가능한 건데, 그렇다면 받기는 하기가 아닌가. 하기와 어떤 차이가 있나.

『있기 힘든 사람들』은 사람의 실존 상태를, 있기와 하기라는 대립 쌍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 대립 쌍은 어느 정도 이념적 구성물이다. 생명체의 현실 속에서 있기와 하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아니, 이 비유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있기 속에 하기가 있고, 하기 속에 있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묘하다. ‘있다’라는 동사의 쓰임새 때문이다. 있기가 있다니. 이건 뭘까. 언어가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이 단지 언어철학자들의 사변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self) 이해와 세계 이해가 언어 안에서만 가능함을 가리키는 거라면, 이 문장에서 ‘있다’라는 동사의 역할과 의미에 주목해 볼 만하다.

우리는 곧 이 문장뿐 아니라, 모든 문장에서 ‘있다/이다’와 ‘하다’가 기본 토대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삶이, 삶에 관한 모든 이해가 언어 안에서 구축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삶은 ‘있다/이다’와 ‘하다’로 구성된다는 거다. 이 둘이 없으면 삶도 없다. 이 둘 중 하나만 있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비중도 가늠할 수 없다.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처럼, 둘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삶을 (특히 자본을 중심으로) 계량화할 수 있는 듯 다뤄온 오랜 자본주의 문화 관습 때문이다.

‘있다’라는 동사의 이중적 의미를 상기해 보자. ‘나는 장애인이다‘, 라는 문장과, ’나는 있다’라는 문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상태를 표현하면서, 그러나 현실 속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즉, 나는 장애인으로 있다, 즉 장애인으로 산다는 사실 말이다. 저 두 개의 문장은 각각 실존의 형태와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지만 현실 속에서 이 두 개는 한 몸이다. 실존의 형태를 부정하면서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있기 힘든 사람들』은 실존과 존재가 맺는 이 근본적이며 오묘한 얽힘을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시도한다.

내게 이 책은 ‘실패한 듯 성공한, 성공한 듯 실패한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실패나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이미 잘못된 느낌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ㅜㅜ)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그러나 점차 은근슬쩍 미소를 짓게 만들며 전개되는 친밀한 관계라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닌 듯, 아리송해지는 이야기라서 하는 말이다. 이런 느낌은 결말 부분에 제기된 질문 때문이다. ‘그저, 있을, 뿐’인 실존의 상태를 존재 차원이 아닌 ‘가치’의 차원에서 질문하고, 그때 그 가치는 ‘기여’로 치환되고, 그때 기여 여부를 판단하는 건 ‘자본’이다. 여기서 독자는 쓰라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처럼 다른 삶의 모습을, 실재하는 그 현장을 만났다고 기뻐하고 뿌듯해할 때, 그 다른 삶은 돌연 자본의 법정에 서 있지 않은가. 심문은 혹독하다.

법정을 채우고 있는 전문가들은 모두 회계사들이다. 1세기 전 카프카는 『심판』에서 법관들이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 책이 포르노라고 말한다. 정신장애로 ‘그저, 있을, 뿐’인 사람들의 이 ‘있기’를 가능케 하려는 모든 시도를 법정에 세운 법관들의 앞에는 이제 보란 듯이 회계 장부가 펼쳐져 있다. 카프카의 법관과 달리 현재 법관들은 심지어 회계 장부를 높이 들어 흔들어 댄다. 이윤 창출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낙오자의 수치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수치심, 방향이 잘못 틀어진 것 아닌가.

자본의 관점에서 치료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투자다. 다 나으면 다시 생산으로 기여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돌봄은 유지일 뿐이고, 결국 계속 소비하는 과정이다. “돌봄과 치료는 인간이 관계 맺는 두 가지 방식이고 본래 둘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 우위도 없지만 현실에서 자본은 압도적으로 치료에 우호적이다.”(『있기 힘든 사람들』, 344쪽) 그래서 ‘그저 있는 상태’의 사회적 가치를 논하긴 어렵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의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리 모두 이 느낌을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무의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논리에 매수당한 우리 귀에는 반복해서 환청이 들린다. ‘이래도 괜찮은가?’ 이 환청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우리 모두 또한 알고 있다. ‘그저 있을 뿐’인 사람은 없다는걸. 이걸 모두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저, 있을, 뿐’인, 그런 사람은 없다! 저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한다.

이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시설의 다른 구성원들을 어떻게 돌보는가를. 치료와 돌봄의 관계를, 윤리적 태도를 먼저 강조하기보다는 어찌어찌 살아내지는 일상의 차원에서, 조목조목 살핀다. 독자들은 알던 것도 현장의 풍경과 냄새로 더 잘 알게 되고, 모르던 것도 ‘아하’ 감탄하며 배우게 된다. 돌봄에 관해 (주로 경제적 관점과 돌봄노동의 어려움 때문에) 편협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도 견해를 수정하고 싶을 만큼 설득된다. 이 책의 ‘사회적 기여’라고 할만하다.

저자는 그러나 돌봄의 가치를 경제학 용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강요된 명제 앞에서 ‘허무주의’를 말한다. 허무(虛無), 아무것도 없이 텅 빔. 니힐리즘(nihilism), nihil 아무것도 없음의 사상. 허무주의/니힐리즘을 동사형(annihilate)으로 이어서 생각해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annihilate 모조리 없애다’. 그 복지시설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간호사와 심리상담사, 원무팀원들이 계속 뭔가를 해서 전체적으로 만들어 낸 돌봄의 장을, 단지 장애인들의 있기뿐 아니라, ‘모두 함께 있기’를 가능케 했던 시간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저자가 의료 경제학자나 후생 경제학자 등 돌봄의 경제학을 아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 자신의 고백처럼 단지 심리상담가일 뿐이라고 해서, 이렇게 돌봄의 미세한 결들을, 돌봄으로 지켜내는 존재와 실존의 엄연한 몸을 무(無)로 만드는걸,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주도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자본주의 태도가 깔려있는데, 이런 태도는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돌봄은 항상 허무주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같은 책, 351) 그래서 우리는 이 위협을 잘 안다. 다행이다. 앎이란 ‘있다’와 ‘하다’ 모두에 중요하다. 이 앎을 마중물 삼아 우리는 돌보고 돌봄 받는 것의 중동태적 상태를 알아차리게 된다. 돌보는 게 나인가, 아니면 너인가.

‘능동에서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해 주어 밖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중동에서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 즉 자리가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즉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라고 언어학자 벤베니스트는 설명한다. 돌봄은 시장에서 계약에 따라 제공되는 서비스에서처럼 능동으로 수행될 때도 중동의 속성을 지닌다. 돌보는 사람은 돌봄 받는 사람과 함께 그 돌봄의 장소에 있다. 돌봄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돌봄 받으며 ‘소비’하는 사람과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위협이 아무리 거세도, 돌봄이 돌봄의 비자본적 순환 때문에 수치심을 강요받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돌봄은 생명/삶 생성적 순환을 이루며, 이 순환에서 벗어나 있는/사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는 걸. 모든 ‘하기’의 자유는 바로 이 순환에 근거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수치심은, 마치 이 순환에서 벗어나 (free from) 단독자로 하기에 투신할 수 있다고 믿는 저 회계주의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걸.

함께 있기를 함께 수행하는 돌봄이 시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런 돌봄을 시장 밖으로 내모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생명/삶 순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치심이 의식의 언어 속에 자리하는 ‘나’와 현실 속에서 삶으로 행해지는 것 사이의 어긋남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면, 생명/삶 순환 밖에서 돌봄을 평가하는/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수치심을 가져 마땅하다.

돌봄 현장에는 돌봄의 지평이 필요하다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추상적인 얘기는 지긋지긋하다. 당장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당면한 문제의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만나는 건 철학의 빈곤이다.’

국회와 시민단체 등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돌봄 관련 토론회를 여는 시대다. ‘돌봄 위기’나 ‘돌봄 절벽’이란 말로 절박감이 표출되고, 구체적 양상으로 돌봄 인력의 태부족과 돌봄 현장의 열악한 환경 등이 꼽힌다.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의견들은 당장의 필요 충족을 위한 대책과 근본적 가치와 이념을 재고하자는 당위로 압축되곤 한다. 그런데 실용적인 논의와 돌봄의 철학이나 이념은 과연 대립되는 것일까?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의 뿌리가 아닐까? 이론과 현장 사이의 간극을 단지 메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이 아닌 것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를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돌봄을 둘러싼 동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 태도, 실천을 붙잡을 수 있는 틀이 철학과 이념이라면, 그런 틀 없이 돌봄 현장의 문제를 포착하고 고쳐나가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장과 이론의 이분법은 돌봄이 홀대받게 된 고질적인 근본 원인과 맞닿아 있다. 돌봄에서 벗어나는 삶을 자유롭고 생산적인 것으로 추구했고, 돌봄 받는 몸이나 돌보는 몸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거리두기를 했다. 누구나 몸을 갖고 있고 돌봄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그런 몸과 의존을 부정하는 경제적·정치적 권력과 지적 논의와 담론을 돌봄을 홀대하는 데 사용해 왔다. 주로 여성에게 전가한 ‘공짜’ 돌봄에 익숙했고, 그것이 막다른 길에 봉착하자 되도록 싸게 오래 맡아주는 것에 치중했다. ‘더 싸게’를 구현하기 위해 돌봄 노동을 가치의 위계질서에서 맨 밑바닥에 두었고, 생산노동을 더 중시하고 더 오래 노동해야겠기에 ‘더 오래’ 맡기는 것에 치중했다. ‘공짜’ 돌봄도, 시장화된 돌봄도 ‘더 싸게’와 ‘더 오래’를 선택의 여지 없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처지의 성별, 나이, 계급, 인종의 사람에게 주로 몰아주었다. 그렇게 돌봄을 착취하려고만 할 때, 우리는 돌봄 받고 돌보는 힘 모두를 동시에 잃게 된다.

이렇게 켜켜이 누적된 부정의한 조건에서, 돌봄의 필요성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돌봄이 숨구멍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늙고 병들고 장애가 생기는 몸, 먹고 싸고 자고 입고 씻고를 반복해야 하는 몸, 살아가야 하는 필요에 종종거리는 삶을 열등하고 비참한 것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거리를 둔 지식이나 학문이나 정치활동에 맞서 싸워야 한다. 고상한 일과 노동자의 일을 나누고, 노동자의 일 중에서도 재생산 노동을 경시해 온 것,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이성이나 의지를 중시해 온 것, 이런 중첩된 모순들을 총체적으로 내파하는 철학과 실천이 돌봄 이념일 것이다. 다른 이의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수탈함으로써 얻는 돌봄이 아니라, 도구적으로 쓰고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재생적인 방법으로 관계 맺고 돌봄 관계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누구나 익혀야 한다. 이를 위한 돌봄 이론의 과제는 돌봄을 음침한 뒷방이 아니라 볕이 잘 드는 한가운데에 두는 것이고, 삶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돌봄을 두는 것이고, 그렇게 돌봄의 현장을 삶의 전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평평한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맞닿아 보이는 경계선이 지평선이고 이를 비유하여 전망이나 가능성을 말할 때 지평이란 말을 사용한다. 돌봄 현장에는 그러한 지평이 필요하다. 돌봄의 이념은 이념형대로 있어야 되고, 또한 그런 것으로서 필요하다. 그런데 돌봄의 가치가 너무 선언적으로 공포되고, 돌봄의 어떤 이상적인 형태가 공익 광고나 선전선동처럼 말해지는 가운데 그에 비추어 본 현장들은 얼마나 초라하게 훼손되고 상처받고 있는가? 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가령, 현실의 법들과 법의 이념형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보통 사람들은 정의를 구현하려고 법을 구하는데, 개별적인 법이 모두 정의로운 것은 아니기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개별법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이렇게 상관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이념형으로서의 법은 다른 말로 정의를 말한다. ‘정의로서의 법’과 척박한 인권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법들’ 사이의 간극을 계속 아프게 뼈저리게 인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형을 버려도 안되고 현실을 너무 추레하다고 사소하게 취급해서도 안된다.

이런 사회적 역량이 너무 중요하고 특히 돌봄에서 그러하다. 현재 돌봄 담론에서는 선언적 구호가 너무 세고, 그런 담론이 돌봄 현장의 품행을 평가하는 식으로 작동하는 문제가 있다. 돌봄 현장을 겨냥한 품행 평가가 아니라 일종의 지평이 돼야 한다. 돌봄 이론이 지평이 되지 않고, 현장의 종사자와 실천을 비난하는 식의 도구가 되고, 그런 식으로 도구화된 이념에 비해 현장은 너무 열악하고 초라하니, 반사적으로 이념을 버려야 될 것으로 적대시하고 자꾸 실용으로 가게 될 것이 우려된다.

돌봄 이론은 돌봄 노동을 맨 밑바닥에 두는 가치의 위계질서를 뒤집기를 바란다. 지금의 돌봄이 어떤 가치에 의해 조직되었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빠져나올 구멍을 찾을 수 있다. 전복이 단순히 이론만으로 될 수는 없기에 당장의 돌봄 필요와 맺고 있는 구체적 관계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구체적 관계는 주간보호센터, 요양병원, 요양원 등 직접적인 현장에서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런 장소를 조성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들을 말한다. 돌봄을 삶에서 추방한다면, 돌봄 현장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면, 돌봄 받는 몸과 돌봄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그대로 놔두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다른 관계의 지평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생명정치의 통치를 가로지르는 돌봄의 수행성:

『돌봄이 이끄는 자리』(서보경 지음, 반비, 2025)

 

김영옥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통치의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이 보편적 건강 보장의 약속과 만날 때, 이 약속에 부여하는 의미와 실현의 방식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역사적 과정과 정치적 환경, 경제적 상황, 그리고 믿음과 가치 체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태국 근대사에서 국민 건강이 사회적⬝정치적 목표로 고려되는 양상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여러 시도와 결부되어 있다. 의료 관리학이나 보건 경제학이 아닌 문화인류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다스림이 어떻게 삶의 돌봄이 될 수 있는가. 공공의료에 관한 질문과 그것의 실질적인 구현 사이에서 정책적 접합이 쉽지 않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돌봄이 이끄는 자리>가 주는 시사점은 크다. 이 책은 태국의 지역 거점 병원의 사례를 통해 다스림과 돌봄의 통합이라는 보건의료(healthcare)의 당위성이 어떻게 현실이 되고 있는가를 다면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이 제공하는 보건의료의 면면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생명 윤리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우리가 정부니까요’라는 의료진의 말을 꼽고 싶다.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이 답변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최선의 돌봄 의료’를 출발점이요 목표로 삼는 이 말은 그러나 당연히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의 힘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책 제목이 ‘돌봄의 자리’나 ‘돌봄을 이끄는 자리’가 아니라 ‘돌봄이 이끄는 자리’임을 잘 되새김질해야 한다. 앞의 두 제목이 사람을 주체로 세우고 있다면 뒤의 제목은 돌봄을 주체로 세우고 있다. 돌봄이 어떻게, 무엇을 이끈단 말인가. 공공의료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환자, 의료진, 보호자, 간병인, 기계, 영(靈) 등등을 돌봄이 이끈다. 어떻게? 돌봄은, 이 주체들 ‘사이’에서, 끌고 밀고 당기며 서로를 제약하고 보완하고 지지하는 어떤 역학을 미세한 소용돌이로 불러일으킨다.

이 역학 내에서 명백한 경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서로가 이끌고 이끌린다. 이끌고 이끌리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돌봄은 상호 의무의 관계성 속에서 공현존(co-presence)의 감각으로 협력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어셈블리지가 된다.

의료진은 정부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부로서’ 환자의 치료가 보험 증서나 국적 관련 등록증(이주민, 난민, 미등록 체류자, 무국적 아동으로 분류되는) 혹은 입원비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한다. 이민자 어머니들은 병원에서 받은 대기표나 영수증, 처방전 등 모든 서류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이 서류들은 자신들이 이 장소에 엄연히 존재해 왔음을 증명할 것이다. 이른 시간 대기실에 도착한 환자와 보호자들은 믿음을 갖고 기다린다.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는 게 중요하다. 간호사들은 퇴원한 환자가 병원에서 말한 대로 잘 따르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이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지역사회에 각인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靈)들도 자기 몫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이 모든 돌봄의 회로망에서 강력하게 표출되는 건, ‘빈곤하고 아프고 힘겨운 우리를 다스림의 대상이 되게 하라, 우리를 내치지 말고 돌보라’는 호소와 그 호소에 몸을 돌리는 지역 공공의 응답이다. 이끌고 이끌리는 상호 회로망이, 미약하지만 피할 수 없는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환자(patient)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기다림은 그저 무기력한 상황의 수용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하고 이끌어내는 일이다. 기대와 요구 사이에서의 행위성이자 수행성이다.

돌봄이 통치와 의료, 가정과 신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공통 원리로 작동하는 태국의 사례는, 특정한 주체의 고통과 죽음을 용인 내지 조장하는 생명 정치의 문제를 재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즉 돌봄의 윤리와 실천이, 생명 정치라는 거시적 사회 차원이 만들어내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조건 속에서 어떤 정치적 조정을 해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태국 사회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생명과 삶의 형식에 대한 다원적 개념은 권력과 사회성 의무의 상호작용 또한 이끌어낸다. ‘이끌어내기’란 “타자로부터 반응을 유도하고, 그리하여 접촉과 연결, 수용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힘,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 즉 구체적 현존이 발휘하는 생성적 능력”을 뜻함을 한 번 더 상기하자. 생명 정치를 가동하는 국가 권력의 속성도 가변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쟁점은 어떻게 국가로부터 보살피는 힘을 이끌어내고 구체화할 것인가이다.

한국은 2024년 의료 대란을 겪었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현재 지역의 보건의료진 확보를 위한 의대 교육정책을 모색 중이다. 2026년 3월부터 시행될 지역통합돌봄에서는 방문의료가 필수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변화와 전환의 시도에서 태국의 지역 공공병원 사례가 제시하는 비서구적 공공돌봄 체계가 좋은 참조점이 되길 희망한다. 정책이나 제도로만 전환을 이뤄낼 수 없다. 관료제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감각과 거기서 태동하는 책임과 의무의 관계가 ‘이끌어내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담론은 특정 계층의 사회적 감각이다. 현재 가장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돌보고 지키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존과 자존⬝자율이 공생할 수 있는 이끌어내고 이끌리는 상호 수용성의 역학이 필요하다.

‘살던 곳’은 어떤 곳입니까?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올해 통합돌봄 예산은 914억, 인건비 제외하고 실제 서비스 확충에 쓸 수 있는 돈은 620억, 이를 전국 229개 시군구로 나누면 평균 2억 7천만원에 불과, 우선 지원 대상자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 중증장애인 등 약 2만 명···.

2026년 3월 27일, 지역사회 통합돌봄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관련된 보도와 논평이 쏟아지고 있으나,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예산 관련 수치들은 제도의 앞길이 평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지역사회’, ‘통합’, ‘돌봄’,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도전들의 압축점이다. 당국에서는 관련 조례 제정, 전담조직과 인력배치, 지자체별 사업 계획 제출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나 그걸 담보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도 건강보험, 일반회계, 지자체 예산 등으로 분절돼 있어 지자체가 지역에 맞는 돌봄을 운용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게 비판과 염려의 목소리이다. 지역간 인프라 격차, 돈과 인력의 턱없는 부족, 지자체의 경험차, 지원 대상의 협소함, 공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공급체계의 높은 민간 의존도, 칸막이를 허문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연계의 가능성이 희박한 점 등이 꼬리를 문다. 관련법이 통과되고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당국의 로드맵이 발표되던 내내 반복됐던 얘기다. 그럼에도 의료, 요양, 돌봄 등의 통합 서비스를 통해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살던 곳에서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자는 목적과 지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지하는 것 같다.

나는 서울이란 대도시에 살지만 한 동네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적지 않다.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진 할머니는 날씨의 궂음과 상관없이 담배꽁초 등을 줍고 돌아다니신다. ‘남은 여생 움직일 수 있는 한 보탬되는 일을 하고 싶다’며 혼자 결행하는 일이라고 슈퍼에 온 아주머니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뒷축없는 신발을 질질 끌던 땅달보 할아버지와 정신장애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와 인지저하가 분명해 보이는 꺽다리 할아버지 삼인조가 길모퉁이에서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더니 어느날부터 한 사람씩 사라지고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양지바른 곳에 철에 안맞는 옷을 입고 앉아서 지나가던 이에게 뭐라뭐라 하시던 아주머니도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눈에 익었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다른 ‘이웃’들로 바뀌곤 한다. 나와 그분들은 ‘이웃’ 아닌 ‘이웃’이다. 아는 데 모르는 관계, 그런데 어쨌든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관계다.

어느 날 문득 빈자리를 느낄 때면, ‘돌아가셨나’, ‘어디에서 돌아가셨을까’, ‘말년의 돌봄은 누구에게 어떻게 받았을까’, 혼자 궁금해하다 한숨짓곤 한다. 그분들의 마지막 궤적을 ‘괜찮게’ 그려볼 만한 그림은 잘 나오지 않는다. 나의 상상력의 부족이기도 하겠지만 그분들의 삶에 동행할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관계망을 떠올릴 경험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 돌봄과 지인들의 갖은 돌봄 경험을 다 긁어모아도, 집 아니면 시설이란 두 개 축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집이란 것도 거주 안정성, 위해요소, 드나드는 관계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의미의 집이고, 병원, 요양병원, 요양원, 호스피스 등 시설도 나름의 경험이 천차만별이다. 어쨌든 기존의 두 개 축을 벗어나 제3의 다른 관계와 장소, 다른 연결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때론 ‘혁명적’이란 수식어까지 붙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내 ‘이웃 아닌 이웃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방향성과는 달리 돌봄이 놓여있는 기존의 형편은 어렵기 그지없다. 부모의 고령화로 인한 중증장애인 ‘돌봄절벽’, ‘간병살인’, 대자본의 요양사업 진출, 돌봄노동자 결핍과 고령화, ‘탈시설’이란 용어 사용조차도 문전박대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이웃으로 같이 살아가기와는 동떨어진 얼어붙은 땅을 파야 한다.

어쩌면 첫삽뜨기와 같은 게 지역사회 통합돌봄 제도이다. 시행을 둘러싼 많은 기대와 염려와 질책을 가로지르는 핵심어를 꼽자면 ‘돌봄 생태계’의 구축이다. 살던 곳에서의 존엄한 삶이란 단지 제공되는 사회서비스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어떤 사회적 관계의 연계망을 구축하느냐의 문제이다. 인프라 구축은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를 포함하여 사람들 ‘사이에 있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말로는 지역사회 거주인데 고립된 섬 같다면, 들고나는 서비스 제공 말고는 다른 관계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라면, 세입자 지위 등으로 인해 편의시설을 갖추지도 임종할 장소로 맘 편히 택하지도 못할 곳이라면, 말로는 ‘살던 곳’이라지만 물리적 주거환경에 그칠 뿐이다. 단지 공간이 아닌 관계가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야심찬 도전이 필요하다. 일상돌봄에서 임종돌봄까지 삶의 고유하고 다양한 굴곡마다에서 변주되고 교차될 수 있는 돌봄의 생태계를 함께 상상하는 사회적 역량이 요구된다. 특정 기관이나 거기에 관계된 종사자만이 아니라 넝쿨처럼 얽히고설킨 모든 삶의 현장과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돌봄을 중심으로 어떤 시공간을 만들어가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국가와 공공의 책임성은 돌봄을 ‘대신’해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돌봄 생태계에 어울리게끔 변화시키는 문제를 공통의 의제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구성원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그러한 구축과 어떤 식으로 연루될지를 자기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살던 곳에서’의 의미는 단지 개인에게 오래된 물리적 장소, 살아왔던 공간만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기본적인 인프라에 접근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생애 끝까지 살아갈 만하고 살고픈 그런 곳, 넝쿨 같은 관계망 속에 엮여 들어가는 그런 ‘살던 곳’이 누구에게나 깃들기를 꿈꿔본다.

 

돌봄 경제학: 옥스퍼드 경제 정책 리뷰(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자료 출처: Oxford Review of Economic Policy

Vol. 41, Nos. 3–4, Autumn and Winter 2025

www.academic.oup.com/oxrep

The Economics of Care

Edited by Emily Jones, Isabel Ruiz, and Sarita Undurraga

 

주가, 금리, 물가, 환율, 수출, GDP, 성장률, 생산성 등등 경제활동과 관련된 지표는 아주 많고 다양하다. 경제적 활동은 갖가지 방식으로 측정·분석되고 그것을 근거로 경제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된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된 활동이 과연 충분히 포괄적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면, 그것에 기반한 정책과 집행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지 않을까?

가령, 내가 인지 저하 상태인 엄마를 위해 장 보고 반찬을 만들고 산책과 목욕을 시킨 시간과 가치는 계산에 포함됐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곳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환자와 장애인과 고령자를 돌보는 노동의 상당 부분이 무급으로 이뤄지고 있을 텐데, 그 노동이 상당한 가치를 만들어냄에도 화폐로 ‘지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환금 작물이 아닌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자립 농업, 차별과 수탈의 위기에 놓인 공동체를 집단적으로 돌보는 일 같은 것은 뒤떨어지고 비경제적인 것인가?

돌봄경제학의 선도적인 연구자와 정책가들의 논문 20편을 모아 놓은 옥스퍼드 경제 정책 리뷰는 평소 경제학 이론과 경제통계나 정책 등에 품었던 의심과 우려를 파헤치며 개념적, 방법론적, 실증적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논자들의 배경과 분야는 다양하면서도 일치하는 주장이 있다. 모든 경제활동은 인간의 역량에 달려 있으며, 이 역량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이 돌봄노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돌봄노동은 잔여적인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것이며, 데이터 수집 및 모형화 등 경제분석에 돌봄노동을 통합하는 작업이 경제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고, 돌봄 체계에 투자하는 것이 형평성, 효율성,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이론과 측정과 경제정책에서는 돌봄노동을 무시하고 저평가함으로써 돌봄위기와 젠더·계급·세대·인종에 걸친 구조적 불평등을 양산해왔다. 돌봄의 젠더화·인종화·식민화의 문제로 대표되듯, 하면 할수록 ‘벌칙’을 받고, 돌봄 안 하는 사람이 도리어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 돌봄노동의 역설이다. 이에 필자들은 경제분석에서 돌봄에 대한 무시와 간과가 어떤 오류를 낳았는지를 설명한다. 생산성을 잘못 측정함으로써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집단적인 사회적 책임이 아닌 사적인 가구의 책임으로 전가했고, 경제분석을 시장 기반활동으로 체계적으로 편향시키며, 시장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과정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구조적 불평등이 은폐되고 실증분석과 정책 설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진단한다. 경제학에서 무급 돌봄노동의 누락은 단순한 통계적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고 무엇을 무시할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권력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필자들은 돌봄경제의 개념적 토대를 차근차근 쌓아간다. 먼저 ‘사회적 재생산’ 개념에서 시작하여 노동의 젠더화된 배분과 적절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시장이 가진 구조적 한계분석으로 이동한다. 돌봄을 ‘공공재’ 및 ‘사회적 인프라’로 재개념화한 뒤 돌봄의 본질적 가치 대 도구적 가치, 관계적 특성, 그리고 교차성 및 지역사회 차원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논의 전반에서 돌봄을 하나의 ‘체계’(system)로 검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체계’로 본다는 것은 유급 및 무급 형태의 돌봄과 이것이 더 넓은 경제와 맺는 상호작용을 모두 분석하면서 돌봄을 변혁적 의제의 일환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적 재생산’ 개념은 사람을 생산·유지·발달시키는 데 관여하는 무급 및 유급 노동으로서 생물학적 재생산뿐만 아니라 건강·기술·능력을 매일 그리고 세대에 걸쳐 유지하는 일상적·세대적 노동이 모두 포함된다. 타자(노인, 장애인,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갖는 생산성 측면의 함의는 미래 노동력 형성에 직접적인 투입 요소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결속을 유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돌봄노동의 젠더화된 배분은 벌칙만이 아니라 특권도 부여한다. ‘돌봄 특권’ 개념은 자신의 돌봄 필요와 책임이 타인의 돌봄 노동을 통해 충족되는 비장애인 성인들이 시간·자원·영향력을 축적하는데 있어서 누리는 우위로써, 돌봄 책임이 없는 것이 사회에서는 리더십과 의사결정에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작용한다.

시장에서의 생산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급노동과 분리되어 분석될 수 없다. 관계적 형태의 돌봄에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돌봄의 질을 훼손하기에 사적 시장은 질 낮은 돌봄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중한 규제를 필요로 한다.

잘 돌봄 받은 개인은 더 건강하고 더 생산적이고 의료시스템에 대한 요구를 줄이게 되며 공동체 전반은 더 강한 유대감이라는 혜택을 입는 등 돌봄의 긍정적 외부효과는 크다. 이는 사회적 편익으로 널리 공유되고 개인이 완전히 사유화할 수 없기에 시장은 돌봄을 체계적으로 과소 공급하게 된다.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 돌봄을 경상소비가 아니라 인간역량, 생산성 및 사회적 결속에서 장기적 수익을 창출하는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로 취급해야 한다. 도로와 다리 등 물리적 인프라는 생산적 자본으로 계산하면서, 인간과 사회개발에 대한 지출은 왜 비용으로 분류하는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돌봄경제라 하면, 자칫 생산성에 기여하는 도구적 가치에 관심이 쏠림으로써 기존 경제학의 문제점을 반복할 위험이 있다. 국내에서 쉽게 목격되는 것은 기업과 시장 중심으로 돌봄 산업을 키우자는 식의 논의이다. 필자들은 돌봄경제 논의가 도구주의적 프레임에 경도되는 것을 경고하면서 돌봄 윤리와 역량접근법에서 강조해온 돌봄의 가치를 놓지 않는다. 도구적 주장은 돌봄에 대한 투자의 논거를 강화하고, 돌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주장은 돌봄이 협소한 효율성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두 개 프레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더불어 돌봄의 관계적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돌봄을 단순히 ‘서비스’로 구성하는 것은 관계적 특성을 무시하고 일련의 거래관계로 축소할 위험성이 있다. 돌봄의 질은 관계의 질에 달려 있다.

측정과 관련해 제기되는 과제이자 질문은 ‘돌봄의 관계적 가치를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경제통계에 가시화할 것인가?’이다. 시간 사용 조사, 대체비용이나 기회비용을 사용한 측정,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동등한 시장 가격으로 평가하는 등 돌봄 노동의 규모와 가치를 평가하는 시도와 새로운 경제 계정의 마련 등 혁신 사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시장이 돌봄노동을 체계적으로 저평가하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계산법은 저평가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돌봄의 가치에 대한 측정은 단순한 가격 유추를 넘어서는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끝으로 필자들은 고령화와 이주, 기술에 주목한다. 돌봄에 대한 불충분한 공공투자로 인해 발생한 돌봄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이 이주 노동이고 기술적 대체이다. 이는 지구적 돌봄 사슬과 이주의 여성화 현상을 낳았고, 남반구의 ‘돌봄적자’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기후위기와 돌봄위기는 깊이 연결돼 있고, 생태계와 무급 돌봄 모두 체계적인 저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 변화는 새로운 위험과 취약성도 도입하고 있다. 기술은 인간 돌봄을 대체하기보다 보강해야 한다. 인간 중심 돌봄의 관계 경제학의 접근이 필요하다. 신뢰, 주의 깊음, 존중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돌봄의 질이고, 이런 윤리적 토대는 경제적 가치에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요소이다.

재활의 밤-수치와 고통의 규범을 넘어, 자립과 연결로 나아가기

구마가야 신이치로 지음, 조승미 옮김 / 동녘, 2025

‘서로 줍는’ 관계가 만든 자립을 보며 세계와 연결되는 돌봄을 기대한다(랑희, 인권운동공간 활 상임활동가)

10년 뒤 또는 20년이 흐른 뒤 나의 몸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몸의 기능을 하나둘 잃게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움직임도 하나둘씩 사라지면 나의 세계도 점점 작아지게 되지는 않을까? 내가 돌봄에 의존해 살아가게 된다면 나의 자유도 축소될까? 그런 막연한 두려움은 오히려 쇠퇴한 몸의 움직임으로 살아가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떤 가능성으로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재활의 밤』을 읽고 깨달았다.

『재활의 밤』은 뇌성마비 장애인인 저자가 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현재는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에서 당사자 연구자로 살아가는 ‘장애 극복 성공담’이 아니라 반복하는 ‘패배’와 마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은 비장애인의 몸을 규범으로 삼은 세계는 장애를 가진 몸을 고립시킬 뿐이라는 것을 일깨웠고, 의존과 돌봄이 취약한 몸을 세계와 연결하고 ‘협응 구조’를 만들어 자립과 자유로 이끌었다. 실패에서 세계와 연결되는 여정은 그만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기록되었다. 장애인 당사자로 자신의 몸과 감각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표현은 의사이자 연구자로서 덧붙이는 다양한 학문적 해설의 동행을 통해 더 잘 이해된다. 또한 중간중간 만나게 되는 일러스트는 저자의 상태와 수행, 감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구마가야의 ‘나만의 운동’을 만드는 여정은 ‘비장애인의 움직임’이라는 목표를 향한 재활의 시간에서 시작한다. ‘재활(rehabilitation)’은 habilitate(적합하게 하다=fit)에 re(다시)의 접두어가 붙어서 생겨난 말이다. 즉 ‘규범적인 몸의 작동방식’을 습득해 정상성을 획득하는 훈련이다. 이 재활은 실패했다. 구마가야가 정상 규범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탈규범적인 운동을 결함으로 지적해 세계와 연결될 수 없게 만드는 재활의 목표가 오류였기 때문이다. 재활 캠프에서 지시를 따를 것을 강요하는 트레이너와의 ‘응시하고/응시당하는 관계’에서 구마가야의 몸은 얼음처럼 동결되어 결국 부서진다. ‘융화하는 시선’이 아닌 ‘감시의 시선’ 아래 홀로 부서진 몸에 ‘가해/피해의 관계’의 신체 개입이 이어진다.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몸을 교정한다는 트레이너의 물리적 신체 개입은 학대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처벌과 같은 폭력만 남길 뿐이었다.

자립생활운동을 알게 된 구마가야는 ‘응시하고/응시당하는 관계’에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생활 만들기로 돌입한다. 자립생활은 사물/환경과 타자와 교섭하며 ‘튜닝’을 거듭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서로 줍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규범과 상관없이 몸과 움직임을 받아주는 타자와 환경이 있을 때, 세상과 연결이 되고 운동에 의미가 생기는 것을 ‘줍고 주워진다’라는 관계와 역동으로 표현했다. 이 탁월한 표현은 나를 둘러싼 사물과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대체 사람이 ‘주워진다’라는 것은 무슨 상황인가? 구마가야가 자립생활을 하면서 겪는 일들을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다. 혼자 살게 된 집에는 비장애인의 몸과 움직임에 맞춰진 화장실뿐이었고 변의가 들이닥쳤을 때 결국 변기에 앉기를 실패했다. 이 화장실은 구마가야의 몸과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거부한 화장실을 자신의 몸과 움직임에 맞춰 개조하자 화장실이 이제 구마가야의 움직임을 줍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그의 몸은 긴장이 풀리며 열리듯 움직였다. 화장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후에는 샤워실과 침대와 현관과도 연결되었다.

의사 수련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신체적 체득이 필요한데 비장애인 의사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었다. 환자의 팔과 의사의 손과 주사기 그리고 그 외 도구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채혈을 하기 위해 구마가야는 움직임을 도울 자신만의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채혈은 잘되지 않았고 레지던트 1년 차를 패배감으로 마쳤다. 2년 차가 되어 동료들과 팀워크가 시작되면서 자신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동료와 채혈의 움직임을 재구성해 입으로 주사기에 음압을 거는 방식으로 채혈을 할 수 있게 됐다. 구마가야가 자신의 고유한 생활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나의 몸과 움직임을 받고 연결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 즉 서로 주워주는 것, 서로 줍기 위해 교섭하는 과정이었다.

구마가야는 사물과 사람, 자기 신체를 포함한 ‘타자의 존재’를 가볍게 취급했기 때문에 재활의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탈규범적인 동작이 세상에 굴러떨어질 때, 외부의 사물과 환경이 이를 ‘주워주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삶과 행동이 성립한다. 움직임은 홀로 이루어내는 고독한 성취가 아니라 세상과의 끊임없는 협응인 셈이다. 몸은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각각의 움직임으로 구조화되어 협응하는 관계라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은 나의 몸과 타인의 몸 사이에서도, 나의 몸과 외부환경과 사물 사이에서도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의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이는 장애인의 몸에 대한 것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몸을 가진 모두의 이야기, 타자와 세계와 관계 맺는 삶의 방식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외부와의 연결의 중요성에도 틈이 없는 연결의 견고함을 경계했다. 동결과 해방이 반복됨으로써 협응구조를 다시 짜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낸다. 서로 줍는 관계가 ‘풀면서 서로 줍는 관계’로 나아간다. 돌보는 이와의 관계에서 ‘틈’이 사라지면 내 몸의 일부로 여기게 되어 의존성이 강해져 혼자 있을 때 불안과 무기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서른두 살이 된 구마가야가 ‘쇠퇴’의 시간을 말한다. 뇌성마비의 몸이기에 쇠퇴를 향해가는 변화에 민감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존재는 쇠퇴를 향한 삶을 산다. 구마가야는 쇠퇴는 혼자 일어서는 자신을 잃는 ‘패배’이지만 동시에 혼자 일어설 수 없는 내가 세계와 다시 서로 줍는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연결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세계를 향해 열리고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허용’의 시간은 ‘관능’을 동반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문장 앞에서 역시 쇠퇴를 향해 가는 나도 ‘관능을 동반한 경험’을 채우고 싶어졌다. 아직은 패배의 두려움이 더 큰 내가 쇠퇴하는 시간 속에 마주할 돌봄과 함께 의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개방과 유대로 나아가는 관능을 느낄 수 있을까?

‘서로 줍는 관계’가 『돌봄, 동기화, 자유』(무라세 다카오 지음, 김영현 올김, 다다서재 2024)에서 돌봄을 ‘동기화’로 설명한 것과 연결이 되었다. 인지증(치매)를 가진 고령자의 행동은 장애를 가진 몸의 운동처럼 ‘규범’과 충돌하고 어긋난다. 저자는 이 어긋남을 교정하거나 통제하려는 ‘효율적인 돌봄’이 아닌 노쇠한 모습을 새로운 삶의 방식, ‘약동’으로 의미화하며 돌봄의 관계를 만든다. 이런 관계에서 비로소 인지저하증의 증상만 보았던 돌봄을 넘어서 돌봄받는 당사자를 보는 돌봄이 생성된다. 저자는 이를 ‘동기화’라 하는데, 이것은 돌봄 받는 이와 돌보는 이가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나’가 되고, 나아가 ‘우리’가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돌봄을 받는 이의 몸의 신호를 돌보는 이가 알아차리고 하나의 행위를 둘이서 함께해 나가기 위해 ‘동기화’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동기화가 자유를 빼앗지 않기 위해 놀이/틈이 필요하다는 돌봄의 태도가 ‘서로 줍는 관계’로 읽혔다. 그리고 동기화가 어긋날 때마다 동기화를 다시 거듭하면서 새로이 합의하는 과정은 구마가야의 교섭의 과정과 겹쳤다. 구마가야의 자립생활처럼 돌봄을 받는 이가 타자와 환경과 연결되는 협응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돌봄이 고립이 아닌 주고 받는 돌봄, 세계와 연결되어 자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며 만나는 ‘놀이’, ‘관능’, ‘줍기’의 표현에 잠시 멈추어 그의 몸과 감각을 상상했다. 자기 몸-장애의 반응을, 타인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탐구하는 그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느라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느려진다. 딱딱하게 긴장하는 몸과 타인의 시선과 신체의 부딪힘,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환경 속에서 부단하게 저항하고 연결되기를 시도하고 패배와 교섭/타협을 오가며 마침내 ‘나만의 운동’(나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여정을 따라가니 나 역시 쾌감을 얻었다. 그리고 부모님 집 현관에 ‘주워지길’ 기다리는 아빠의 스틱(지팡이)이 생각났다.

아빠는 2년 전 심장 수술을 하고 운동 능력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장시간 수술과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온 아빠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열흘 정도 지나서는 스탠드에 의지해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었고 걷기도 가능했다. 여전히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고 불안감을 동반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려니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빠의 걸음이 나아졌는지, 오늘도 거르지 않고 산책을 다녀왔는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와 나는 아빠의 걸음을 주시하고 응시했는데 사실은 감시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느 날 아빠는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걷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걸음의 중심은 흔들려 외부 자극에 재빠른 대응이 가능한 ‘신체 협응’은 어려운 것 같다. 우리 모두 아빠에게 제발 지팡이를 사용해 달라는 요청을 때로는 감정이 실린 잔소리를 해댔다. 지팡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아빠는 내심 과거 자신의 ‘정상적 보행’의 기억으로 끊임없이 올바른 움직임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수행을 반복하는 중이었을 것 같다. 지팡이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을 인정하고 패배를 선언하는 상징과 같은 것이리라. 1년 정도 아빠와 교섭의 결과 스틱을 집 안에 들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틱과의 동행은 아주 드문 일이어서 스틱은 아직 아빠와 ‘줍는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듯 하다. 아직 아빠는 스틱에 주워지려는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다. 스틱은 아빠의 걸음을 ‘주울’ 그날을 기다리며 현관에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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