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1. 23

작성자 : 엄기호

 

아직 한국에 개봉되지 않은 ‘천수원의 낮과 밤’은 홍콩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년여성과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의 우정을 잔잔하게 다루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대화도 없다. 그렇다고 이 둘의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다. 아들은 신기할 정도로 어머니 심부름도 군말없이 하고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맛없어 보이는 음식도 불평없이 잘 먹는다.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던 아들은 어느날 친구를 따라 학교에서 하는 가족에 대한 심리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여기서 같은 또래의 상담가는 부모와 말을 많이 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그리고 부모의 요구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를 묻는다. 아들은 자신이 엄마에게 하는 대답이 ‘응’이라는 것 하나 뿐임을 알게 된다. 상담을 하는 친구는 마치 그것이 뭔가가 잘못된 것이양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한편 같은 수퍼마켓에서 일을 하게 된 엄마와 독거노인은 음식을 같이 사 나누어 먹으면서 정을 쌓아간다. 독거노인은 없는 살림에 모은 돈으로 반지를 사서 죽은 딸의 남편, 이제는 다른 이와 결혼하여 새로운 살림을 꾸린 과거의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엄마의 병원에는 자주 찾아가보지 않으면서도 엄마는 이 자리에 독거노인을 따라간다. 그러나 과거의 사위는 무뚝뚝하기만 하다. 급히 밥을 먹은 다음 반지도 거부하고 사위는 자리를 뜬다. 돌아오는 길에 독거노인은 그 반지를 엄마에게 주고 엄마는 독거노인을 위로한다. 추석을 맞이하여 엄마와 독거노인, 그리고 아들은 같이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대단히 지루하다. 다수의 학생들은 너무 졸려서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고, 어떤 학생들은 며칠에 걸쳐서 봤다고 고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기승전결도 없이 전개되고, 특별한 갈등조차 없는 이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심지어 한 학생은 이 영화보다 차라리 자기네 집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하루 종일 찍어놓더라도 이보다는 재미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한글 자막도 없는 이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라고 한 것은 추석을 맞아 각자 자신의 가족과 친족들을 돌아보며 문화기술지를 한번 써보자는 의도였다. 한국의 가족과 친척 공동체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급속도로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설날이나 추석이면 우리는 기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고 입석표까지 다 팔려 콩나물시루가 된 기차를 타고서라도 악착같이 고향으로 내려간다. 평소에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살다가 왜 우리는 이렇게 명절이 되면 악착같이 서로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정작 만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하면서 어떤 관계를 확인하려는 것일까? 혹 설날과 추석은 이미 해체되어버린 가족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공동체는 출현하지 않은 ‘위기의 상태’에서 도착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멸한 친밀성에 대한 알리바이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례행위를 지금의 대학생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외로운 가족, 든든한 가족

 

다수의 학생들은 이 대화없는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의 가족을 만났다. 천수원의 가족들이 가진 외로움을 자신들의 가족들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한 학생은 자신들의 가족에서 소통이 얼마나 단절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기독교 집안인 이 학생의 집에서 명절에 추도 예배가 끝나고 나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족들이 나눌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날에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는 친교와 그리움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어색함’의 공간이다. 할아버지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주도하시지면 이 학생에 보기에 이것은 가부장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권위 있는 허수아비’로 비쳐진다. 할아버지가 있기에 그나마 친척들이 모이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것 같지만 그분의 말과 나눔은 가족들 사이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그냥 의례적인 것이고 헛돈다. 다른 한 학생 역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할머니 덕분에 온 가족이 명절이면 무조건 다 모이지만 정작 모이고 난 다음 하는 이야기는 핸드폰 이야기에서 새로 나온 차에 대한 이야기 등 피상적인 이야기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학생이 보기에 자신들의 가족은 외롭다. 친척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할아버지도 당신의 방에서 ‘혼자’ 바둑을 두시고, 아버지도 그저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 골프치고 바깥일을 하실뿐 할아버지나 다른 가족들과 말을 많이 나누지 않는다. 엄마도 집안일에 지쳐 있다. 동생이나 자기 자신도 바깥으로 떠돌지 결코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소통을 하고 정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아버지는 당신은 못하면서 이 학생에서 할아버지에게 자주자주 전화하라고 부탁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다니고 싶지만 차마 말로는 못하고 몰래 골프를 배운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들은 소통은 단절되어 있고 외롭다. 이 학생은 인간은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오히려 외부의 사람, 이웃에게 더 친절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들의 삶은 서로 겉돌고 헛돈다. 그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말은 의례적이고 판에 박힌 말 뿐이다. 한 학생은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학을 하고 의무교육을 다 받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에게 맞는 직무는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고찰 없이 소위 "그래도 대학교는 나와야지" 말을 수 없이 되뇌어 주시는 부모님, 주변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돼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삶이라고 일갈한다. 그 가운데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친구들이지 결코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아니다.

그래서 가족, 혹은 친척들과의 만남은 불편하다. 친척들에게 전화하여 안부를 묻는 것은 낯선 일이다. 이렇게도 ‘재미없는 명절을 보내느니 차라리 안 오시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왜 만나는가? 이 학생은 명절 때의 만남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쾌하게 이야기한다. 평소에 만나지 않아도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명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명절 때만 만나면 되는 것이니 평소에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명백한 도착이다. 다른 한 학생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들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냉소’ 그 자체이다.

반면 몇몇 학생들의 글에서는 한국의 가족 관계에 의미심장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아직 친척관계로까지 확장되지는 않았지만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과거와는 다른 친밀성이 태동되고 있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친구같은 부보-자식관계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사이는 친구이자 스승이자 가장 활발한 수다상대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 학생은 남학생이다. 그는 어머니는 ‘존경’한다고 말을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해결이 방법이 안 떠오르는 문제가 있거나 마음이 뒤숭숭할 때 주저 없이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하고 나면 ‘열에 아홉은 가슴이 뻥~~ 뚫린’다고 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연애상담까지 많은 것을 엄마와 흉허물 없이 터놓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마보이도 아니다. 언제나 자신은 자기의 일을 줏대있게 처리하고 어머니는 그것을 존중한다고 한다.

여전히 많은 가족들은 가부장제 때문에 명절이면 남자들은 방에 모여 고스톱치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겉도는 이야기를 하지만 여성들은 부엌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한다. 하지만 한 학생은 자신의 집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어머니는 재료를 준비하고, 동생과 자신은 음식을 만들고 기름에 부친’다고 한다. 온 식구가 서로 같이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친척들이 모이게 되었을 때 최근 동향이나 앞으로 나가갈 미래들’을 같이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생에게 가족과의 약속이나 만남은 그 어떤 다른 친구들과의 그것보다 더 우선적이다.

 

새로운 공동체인가, 가족의 민주화인가?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가족은 지금 새로운 친밀성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소수의 가족들과 이전의 가부장적 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헛돌고 겉도는 관계로 완전히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이런 형식적인 모임을 계속 가지는 것보다 차라리 이 도착된 알리바이, 허구만 남은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농사짓던 때는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다 따로 살다보니 같이 토론할 주제도 별로 없다. 게다가 다 따로 살면서 경제적 격차도 커지다보니 ‘며느리’들끼리의 신경전도 커지고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이 학생의 가족만 하더라도 첫째 큰아버지는 부도나셨고, 둘째는 큰 회사 사장님이고, 자기네 집은 중산층이라고 한다. 게다가 정치적 견해까지 달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피하고 나면 실제로 할 만한 이야기가 거의 없는 셈이다.

사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특히 IMF이후에 겪고 있는 문제이다. 집안에 망한 형제자매가 없는 가족은 거의 없다. 망한 가족이 자연스럽게 다른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소원해지고 심지어 원망하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이런 학생들은 혈연에 기초한 이런 허구적인 공동체를 깨고 새로운 공동체를 결성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현대 사회에서는 ‘혈연’에 얽매이기 보다는 도시 사회에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하는 것이 더 현대인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매스컴에서는 시골로 돌아가 가족들끼리 모이는 귀가 행사를 우리나라 전통의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적 풍습으로 묘사를 하고는 하지만, 실상은 정체되는 교통과 텔레비전을 매개로 하는 일방적 대화이며, 며느리들의 끊임없는 식사준비 및 설거지의 반복이다. 지나치게 전통과 혈연을 강조하고 이에 집착하면 그것이 도착이 되어 형식만 남게 된다. 영화 ‘낮과 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셋, 즉 온, 크와이, 그레니(이름이 다 맞는지 모르겠다) 가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마음을 나눔으로써 한 가족이 되었던 것처럼, 멀리에서 찾기보다는 아파트 문화를 새롭게 살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가족에서 배제된 이웃에게 새롭게 가족을 선사해주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이 학생은 영화에서도 ‘웃음과 대화가 없던 모자의 집, 혼자 묵묵히 밥을 해드시는 딸 잃은 나이든 어머니의 집’이 서로에게 인연이 되면서 ‘하나의 끈’을 형성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아파트처럼 밀집되게 서로 붙어살 수 있는 것이 ‘비인간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가족이 형식이 아니라 친밀성의 공간이 된 친구들은 여전히 ‘가화만사성’을 부르짖는다. 가족이 행복하면 ‘내 삶의 모든 것이 행복한 것’같은 느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 당장 불행이 닥쳐와도 걱정과 불안’이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힘을 얻어 그 일들에 다시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공통된 점이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친구처럼 자식과 논다는 것이다. 격의가 없으며, 같이 음식을 만들어먹는 것을 좋아하고 자식이 하는 일을 끝까지 신뢰하고 무엇인가 잘못되면 같이 책임을 진다. 즉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로서의 가족인 셈이다. 다른 가족들이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우선순위에서 늘 뒤로 미루다가 친밀성 그 자체까지 놓쳐버린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많은 대화가 필요한가?

 

반면 몇몇 학생들은 정말로 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자지간이 거의 대화가 없는 것을 단절이라고 이해한 것에 반하여 이들은 오히려 가장 친한 사이는 사실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를 되묻는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중간에 나오는 ‘소통이 활발한 것이 좋은 가족’이라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 오히려 그것이 착각이고 환상이며, 우리로 하여금 혹시 계속해서 지금의 가족을 불행한 것이라고 강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가족은 정말로 대화가 없으며 아들은 무슨 말을 하던지 수긍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인가?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것 같은 아들이 은둔형외톨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썽쟁이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가 무엇을 부탁할 때마다 군소리없이 다해주는 효자이다. 엄마 역시 아들에게 인생 하소연을 지겹게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면서 사람을 넉다운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아들에게 엄마로서 해야하는 것은 묵묵히 다 처리하는 사람이다.

 

혹 서로간의 냉대나 갈등의 조짐이라도 보인다면 또 그러한 ’명분‘이 설진 몰라도, 애석하게도 두 모자간의 관계는 평범을 넘어 지극히 평온하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귀찮고 궂은 부탁에도 한치의 투덜거림없이 척척 도와가며 살아가는 이시대의 진정 ’행동하는 효자‘인데다가, 이것이 정녕 ’어머니의 밥상‘인가 할 정도로의, 눈물나는 영양식단에 단 한번의 투정이나 투쟁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주인공(아들)의 그 넓은 아량와 인내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의 감동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한 학생은 오히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이 지루하기짝이 없는 가족이 ‘부럽다’고 말한다. 이 가족의 삶은 감동적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담담하다. 이 학생은 반대로 되묻는다. 혹시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렇게 덤덤하고 무의미하고 건조한, 그러면서 의례처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현재 가족의 모습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학생은 그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딱 잘라서 말을 한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이 무덤덤하고 무의미한 가족 그것에서 친밀성을 발견하고 가꾸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어떤 정답에 기대어 우리의 현실은 평가되고 단죄되어야만하는 그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이 '가족의 정석'과 다른 우리의 현실 속 가족의 모습에 실망한다. 물론 대부분 나이를 들어가면서 현대 사회 속 일상의 가족은 도덕 시간에 배운 '가족 환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수긍한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와 수긍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가족에 대한 판단에서 오히려 다른 분야에 대한 판단보다 옳다/그르다라는 이성적 판단하에 엄격한 기준을 두어 정확한 답을 요구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과제라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영화를 보는 관점이 감성에서 이성으로 바뀐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첫 시간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정규 교육에서 주입해 준 지식에 사로잡혀 가족을 마치 내게 주어진 하나의 점수화해야'만' 하는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생의 시선에 따르면 우리의 가족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그 또래 학생이 모범적으로 늘어놓는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 우리의 가족은 그런 중산층의 핵가족 모델에 한참이나 못 미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마와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가족은 정상적인 척하면서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문제가 ‘곪아터질대로 터진’ 가족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건강하다. 너무 건강해서 오히려 이 가족이 잔잔한 일상이 아니라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일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이상적인,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 학생의 놀라운 발견이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주 만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가족에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뭔가 정상적이고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정답을 강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한다. 이들의 관계가 이상하고 문제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시선이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애초부터 ‘아무런 문제도 없기 때문에 답도 있을 리 없는 이 가족’에 대해 비평의 칼날을 들이대는 사람들의 사랑은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어떤 사랑인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라는 강박에 늘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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