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71 호 [기사입력] 2007년 09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아주 오래전 영화 속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이루지 못할 꿈은 악몽이래요.” 몹쓸 꿈이 악몽이 아니라 이루지 못할 꿈이 악몽이라는 이 대사는 인생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대사였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에는 ‘악몽’을 꾸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어떤 악몽을 꾸고 있는가? 잘리지 않고 일하는 것, 일은 할대로 다하면서 반쪽 노동자로 취급받지 않는 것, 학교도 마치고 성인이 됐으니 취직해서 제 몸 건사하는 것, 장애를 가졌어도 학교 문턱 밟아보는 것,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동단속의 사냥감이 될 것을 겁내지 않고 맘 놓고 일하는 것 등이다. 이런 기본적인 생존에 관계된 것들이 ‘이루지 못할 악몽’인 사회에서 어린아이가 꿈을 꿀 수 있을까?
인간답게 일하고, 인간답게 먹고 살고, 인간다운 교육을 받는 것에 해당하는 권리가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윽박지르는 사회에서 더 많이 파헤치고 더 많이 경쟁해서 더 잘살게 해주겠다는 미래의 청사진들만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 청사진을 내놓으며 살림을 책임져보겠다는 분들이 꼭 알아야할 의무의 목록이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해 국가가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알려주는 지침이다.
인간답게 일하고, 일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인간다운 교육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담은 국제인권조약이 있는데, 그 이름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이다. 세계적으로 156개국이 이 규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한국도 1990년에 이 규약을 비준하여 그런 약속에 동참했다.
그런데 많은 정부들이 그런 약속과 달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의무를 피하려 했다. 먹고사는 문제에는 돈이 드니 어렵지 않느냐, 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인권 침해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잘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기다려보라는 식이다.
이렇게 사회권에 관련된 인권이 정부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국제인권법에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의 어떤 행위가 사회권 침해이며, 사회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침해 시에 어떤 구제를 제공해야 하는지 등을 상세히 정리했다. 그 결과가 1986년 ‘림버그 원칙’이고, 10년 후에 다시 점검한 결과가 오늘 읽어볼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이다. 두 원칙의 이름은 모인 곳의 이름을 땄다. 유엔은 이들 원칙을 수용하여 유엔 공식 문서로 채택했다.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은 모두 32개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핵심이 6번째 지침으로 사회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존중, 보호, 실현’의 의무로 제시했다. 이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존중의 의무(obligation to respect)
국가는 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하고, 인권을 누리는데 방해요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의 확대를 꾀하는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일은 노동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며 고의적으로 사회권을 후퇴시키는 조치에 해당한다. 국가소유시설이 환경오염물질을 함부로 배출하거나, 국가기관이 장애인 의무 고용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대안적 주거시설 없이 강제철거를 강행하는 일 등이 존중의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 보호의 의무(obligation to protect)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제3자(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 고리대금업자가 폭력과 위협을 행사하도록 내버려두는 일, 기업이 산업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게 내버려두는 일 등은 보호의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실현할 의무(obligation to fulfil)
국가가 어떤 의무를 갖는지 그 내용을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의무라는 말만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인권의 충분한 실현과 향상을 위한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법률·행정·예산·사법조치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성취의 결과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증명할 책임도 있다. 예를 들어 태풍 때문에 교육기관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면 그것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경우인 반면, 적절한 대책 없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급여 체계를 축소했다면 의무이행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지침 7의 ‘행위와 결과의 의무’이다. 행위의 의무는 권리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할 의무이고, 결과의 의무는 국가가 세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회권만이 아니라 모든 인권이 당장 완전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완전한 실현이란 목표를 향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즉각’ 이뤄져야 할 조치를 외면해서도 안되고, 점진적으로 실현한다고 해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진보’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상관없이 이행돼야 할 ‘최소핵심의무’란 것이 있다. 여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기초의료, 기본적인 쉼터와 살집, 초등교육 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실천되기 위해서는 민간단체, 언론, 전문기구 등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사회권의 침해에 대해 촉각을 세우는 것이 요구된다. 사회권의 침해를 기록하고 감시해야 한다. 이런 일의 기본중의 기본은 사회권 침해의 피해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지침 21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때문에 처벌받아선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회권의 피해자들은 물리적 폭력과 벌금을 때려 맞고 있는데 침해자들은 사회봉사를 권고 받고 명예훼손에 대한 고발을 남발하고 있으니 사회권의 의무를 고의적으로 어기고 있는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류은숙] <2007년 9월 11일 인권오름 제71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에 관한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The Maastricht Guideline on Violations of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1997) … |
인권오름 제 71 호 [기사입력] 2007년 09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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