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8. 6. 3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아직도 ‘고문’을 얘기하는가? 춘향이가 곤장 맞던 적 시절 얘기일까? 고문은 인간성에 반하는 주요범죄라지만 세계 곳곳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아가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자연에 대한 고문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서나 어느 정도의 합법적인(?) 폭력은 봐줄만한 것으로 보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즉 합법적인 ‘조사’와 ‘고문’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없기 때문에 고문의 문화는 사회에서 얼마든지 쉽게 자라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통제와 가정·학교에서의 가혹한 기강잡기가 당연시되는 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번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자신이 제공한 ‘면허’에 의해 공무원이 저지른 고문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져야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인권침해를 방지할 의무, 개인들 사이에서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가혹행위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할 의무를 또한 지고 있다.

고문의 역사

고문의 역사를 볼 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벌’과 ‘자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체계적이고 사법적인 고문이 사용된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처벌을 고통스럽게 하고 가능한 한 고통을 길게 하자는 주장이 있어왔고 처벌과 처형에 관한 옛날 기록들에는 아주 잔인한 일들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렇다고 잔인함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고문은 자백을 얻어내는 가장 믿을 만한 수단’이라고 주장한 정치가가 있는 반면 ‘고문의 사용이 거짓된 자백을 이끈다’고 비판한 정치가도 있다. 초기 기독 교회에서 고문이 사용됐다는 증거는 없다. 이단자는 도덕적 설득으로 변화돼야 했고, 실패할 경우에는 파문하거나 공민권을 박탈하는 것이 충분한 처벌이었다. 한 저명한 수도사는 말하기를 “믿음은 확신의 결과여야지 힘으로 강요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11세기가 되면 이단자는 고문에 처해져서 신앙을 철회하거나 아니면 아주 잔인한 방법(가령 화형)으로 처형됐다.

중세 유럽 후반기에는 고문이 종교재판에서뿐만 아니라 세속의 재판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유죄의 강력한 증거 또는 자백을 얻기 위해 고문을 사용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형사 재판에서 더 많이 쓰이게 됐다. 유죄가 인정된 후에는 공모자의 이름을 얻기 위해 또한 고문이 사용됐다.

종교재판소는 특히 12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에서 성행했는데 항상 고문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심문가들은 당대의 기준을 갖고 질문을 통해 이단의 증거를 결정하려고 시도했다. 판결은 참회, 투옥 또는 죽음이었다. 중세 후반기에 지배적이 된 것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였다. 주로 잔존하는 무어인들과 대규모의 유대인 인구를 대상으로 했다. 심문과 고문이 성문화됐다. ‘고문 전에 간단히 취하는 5단계의 방법’, 이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범죄 수사에서 알맞은 고문의 방법’ 등이 저술됐다. 16세기 초반에는 종교재판관이 아메리카식민지와 네덜란드에도 수립됐고, 19세기 초에야 최종적으로 종교재판이 금지됐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휴머니즘의 부상과 과거의 견고한 사회구조의 이완을 겪었다. 볼테르는 정보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고문을 비난했다. 벤담은 고문이란 의도된 것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고 했다. 18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고문은 불법화됐고, 고문폐지는 한 국가의 ‘문명화’의 척도가 됐다. 하지만 고문은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에서보다는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에서 폐지된 면이 크다.

많은 유럽의 지배자들은 본국에서는 고문을 폐지한 후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의 고문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눈감았다. 가령 1950년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1954년 알제리 봉기에서 고문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고문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제3의 방법’ 또는 ‘경미한 신체적 압력’ 등 완곡어법으로 위장돼서 계속되고 있고, 물리적 고문만이 아니라 심리적 고문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국제법으로나 어느 나라의 국내법으로나 고문이 금지되고 있는 현재에도 규범의 예외는 분명히 존재한다. 현 시대에 대표적 문제가 되고 있는 두 개의 사례,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한 고문은 아래의 인용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의사의 고백(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인권의사협회가 낸 『고문; 인권, 의료윤리, 그리고 이스라엘』에 이스라엘의 한 의사가 쓴 글을 발췌·재구성)

내가 만난 팔레스타인의 한 소년은 이런 말을 했다. “왜 거짓된 자백을 했냐 하면요. 고문과 감금 때문에 그런 말을 했어요. 심문당할 때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난 내 상황을 이해하고 날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의 이름만을 불었어요.”

몸과 마음이 찢긴 그 아이를 보며 난 괴로웠다. 그래서 이 일을 폭로하기로 맘먹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의한 고문 폭로에 대한 반응은 절망스러웠다.

“이것은 예외적 경우다. 이스라엘에는 고문이란 없다”, 믿지 않을뿐더러 “사기치고 있다”, “자해한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고문피해자를 데리고 출현한 TV 토론회에서 이스라엘군 사령관은 피해자의 눈앞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고문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이에 청중은 박수를 쳤다.

이스라엘에서 ‘점령’이란 단어는 ‘규범의 예외’란 말과 거의 같은 식으로 쓰인다. 이스라엘 사람은 신화를 믿도록 길러진다. 내가 그렇게 자라났듯이 말이다. 유대인은 “우리는 완전 절멸당할 위험을 겪었다. 시오니스트들이 되찾은 것은 텅 빈 사막이요, 우리는 그것을 꽃피는 정원으로 바꿨다. 우리는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등의 생각을 하며 도덕적 우월성을 자만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자행하는 고문은 ‘외부자’에 대한 것, 폭력의 일종의 정신적 상부구조이다. 고문의 목적은 적들·외부자에게 말하게 하고 비밀을 털어놓게 하려는 것이라 한다. 그런 누설을 통해 내부자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손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그럴듯한 고문의 구실로 내세우지만 사실 피해자의 자백은 쓸모없다. 고문가해자는 피해자의 말이 가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은 고문관이 듣기 원하는 말(공허한 말이지만)을 하게 된다. 이것은 비밀을 누설시키겠다는 겉으로 내세운 목적을 완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실상 고문의 목적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침묵’이다. 침묵은 공포로 유도된다. 공포는 피억압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전염되고 확산되어 침묵하게 하고 마비시킨다. 폭력을 통한 침묵의 강요가 고문의 진정한 목적이다.

이스라엘처럼 군인들 간의 전우애가 최고로 중요한 곳에서 고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국가 반역과 마찬가지다. 고문을 막기 위한 운동에는 종족의 가치를 초월하는 도덕적 가치, 다른 종류의 결집력, 즉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미국과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고문 피해자들(2008년 국제앰네스티의 보고서에서 발췌)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로 수만 명이 혐의나 재판, 변호인과 법정에 대한 접근 없이 구금됐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고문 상황 폭로의 충격은 아직 생생하다. 주목으로 때리기, 발로 차기, 벌거벗긴 남녀 구금자에 대한 사진‧비디오 촬영, 사진을 찍으려고 다양한 체위의 성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기, 남자를 발가벗기고 강제로 여성 속옷 입히기, 자위하게 만들기, 벌거벗은 구금자들을 포개기, 손가락·발가락·성기 등에 전선감기, “나는 강간자다”라고 써서 구금자에게 걸고 있게 하기, 개목걸이 채우기, 겁주려고 군견을 동원하기(적어도 한 사례는 물어뜯었고 심각한 상처를 입힘) 등 고문의 양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미 당국은 최고위층 책임자에 대한 적절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 단지 하급자들만 조사했다. 고문 피해자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어떻게 항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럼스펠트 미 국방장관은 주장하기를 고문과 비인도적인 처우를 본 미군은 “물리적으로 그것을 멈추게 할”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보고할” 의무만 진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는 “예외적 상황이지 어떤 패턴이나 관행이 아니다”, “구금 시설에서는 학대의 주장이 언제 어느 때나 있다”, 그리고 “학대를 주장하는 것이 테러리스트들의 패턴과 관행이다”라고 했다.

2003년 6월 ‘고문피해자 지원을 위한 유엔의 날’에 부시는 연설하기를 “미국은 세계적으로 고문을 근절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고, 우리는 고문과의 싸움을 본보기 사례로서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악랄한 보기로 든 것이 버마, 쿠바, 북한, 이란, 짐바브웨이다. 국제사회의 모니터 접근을 거부하면서 세계의 눈을 피해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다며 이들 국가를 비난했다.

그러나 세계인권단체들의 보고와 비판에 따르면 이라크 말고도 아프가니스탄, 관타나모, 그밖에 세계 도처에 미국의 비밀 구금시설이 있다. 인권단체들은 이를 공개하고 유엔특별보고관의 방문을 포함한 독립적인 기구의 조사(부시가 다른 국가들에 대해 말한 것처럼)를 요구하고 있다.

2007년 부시는 행정명령을 통해 CIA가 비밀구금과 조사를 행사할 권한을 재보증했다. CIA 국장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00명이 안되며, 이 프로그램은 선택적이다. 오직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에게만 사용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블랙 사이트(black sites)라 알려진 미국 바깥의 비밀 감옥들이 있다. 2005년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2002년부터 적어도 8개국에(특정할 수 없는 동유럽 국가들에) 그런 비밀감옥이 있고 여기에 갇힌 사람들은 ‘유령’구금자들이라 불린다. 비공개 구금시설 중 대표 격인 관타나모의 구금자를 미국은 전쟁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그 어떤 지위도 법원에서 결정한 적이 없다. 미국의 공직자는 테러리스트 용의자에게 혹독하고 잔인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평에서 “누군가의 인권을 일정시간 침해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문폐지운동

1762년 ‘장 칼라스 사건’으로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1762년은 루소가 “인간의 권리”라는 용어를 도입한 해이다. 칼라스라는 사람의 집안에서 어느 날 큰 아들이 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당국은 자살이 아니라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 한 살해라며 칼라스 가족을 체포해 갖은 고문을 가했고, 가장인 칼라스는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그런데 노구의 칼라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당국이 원하는 실토를 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볼테르는 부당하고 야만적인 재판과 형벌제도를 비난하는 수많은 글을 써댔고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이 지나 무죄와 복권 판결을 받아냈다. 칼라스 사건에 자극·고무된 볼테르의 저작들은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지적에서 출발하여 고문 반대로 발전해갔다.

또한 1764년 이태리의 세자르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이란 역작을 내놓는다. 베카리아는 비인도적 형벌제도의 폐지를 사회계약론과 공리주의 관점에서 도출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처분 가능한 계약내용으로 제시할 리 없고, 자기보호본능에 위배되는 자백강요는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잔혹한 형벌은 범죄예방에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한다. 범죄와 형벌간의 적정한 균형을 설정하기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잔혹한 형벌과 사면은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군주의 특사는 강압적 형벌을 통해 지탱되는 폭정을 은폐하기 위한 가면이다. 따라서 잔혹한 형벌과 특사 사이를 왕복하기보다는 보다 관대한 형벌을 예외없이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근대형법의 토대가 되어, 공리성과 인도성의 조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봤다. 고문은 “강한 범죄자에게 무죄를 주고, 무고하지만 약한 사람을 유죄로 하는 확실한 방법”이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유효한 법률을 통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1787년 아메리카의 의사 벤쟈민 러쉬는 말한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범죄자라도 우리 친구들과 친척들의 영혼과 육체와 마찬가지의 물질로 구성된 영혼과 신체를 가졌다는 것을. 그들은 뼈 중의 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모든 형태의 사법적 고문을 금지하고, 1792년에는 길로틴(단두대)을 도입한다. 무수한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기억되지만, 단두대의 도입 목적은 사형을 단일하게 하고 가능한 한 고통 없이 집행 한다는 것이었다.

18세기 말 유럽을 휩쓴 인권운동의 결과로 18세기말 19세기 초에는 많은 점에서 향상이 있었다. 1874년 작가 빅토로 위고는 자랑스럽게 “고문은 존재를 멈추었다”고 선언했다. 불행히도 그런 성취는 오래가지 않아. 1·2차 대전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인간이 잔인한 폭력에 호소할 준비가 돼있다는 걸 보였다.

고문에 대한 국제규범

독일의 나치체제에서 고문은 공포를 확산하는 수단이 됐다. 독일의 수용소만이 아니라 점령지의 다른 나라들에서 자행되는 대규모의 체계적인 고문은 당대의 규범이 됐다. 따라서 2차 대전 후에 고문에 대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인식은 광범위했다.

하지만 ‘고문 금지’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았다. 어떤 잔인한 행위들은 적절하게 정의하게 어렵기에 “잔인하고 통상적이지 않은 처벌”에 대한 규제, ‘인간의지에 반하는, 사람에 대한 의학적 또는 과학적 실험의 금지가 포함돼야 한다’는 제안 등이 있었다.

결국 세계인권선언 5조에서 채택된 것이 “고문이나,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이다.

선언을 이어받은 ‘시민‧정치적 권리규약’ 7조는 “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취급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특히 누구든지 자신의 자유로운 동의 없이 의학적 또는 과학적 실험을 받지 아니한다”이다. 이 조항이 중요하다는 것은 비상사태시에도 절대로 위반해서는 안되는 몇 안되는 조항 중 하나라는 것이다. 즉, 고문금지는 절대적이고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유사한 조항이 유럽인권협약 3조, 미주인권협약 5조 2항,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헌장 5조 등이다. 전쟁시에도 이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 제네바 협약에서는 고문을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인권위원회 1969년 결정은 “비인도적 처우”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보였다. ‘비인도적 처우’란 특정 상황에서 정신적 또는 신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고의적으로 야기하는 것으로서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고문’이란 단어는 ‘비인도적 처우’를 묘사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데, 이는 정보나 자백의 취득 또는 처벌의 고통을 목적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비인도적 처우의 심화된 형태이다. ‘모욕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타인 앞에서 그 사람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거나 자신의 의지나 양심에 반해 행동하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간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심각성의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모욕적인 처우’는 다소 다른 특성의 개념이다. 처우를 모욕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자가 느끼는 굴욕감인데, 국제법으로 금지하려면 굴욕감이라는 것이 어떤 정도의 심각성을 가져야 한다.

관련된 문제들로는 구금된 자에 대한 처우(너무 혹독하거나 구금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와 추방의 문제(고문이나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를 곳으로 추방하는 문제)가 있다.

유엔 총회는 아래와 같이 고문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기준과 조치들을 채택했다.

* 1975년 ‘고문, 기타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고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에 처한 모든 사람의 보호에 관한 선언’; 고문방지를 위해 공무원들을 지도‧훈련하며, 조사 방법을 심사하에 두며, 고문행위를 형사범죄화하고, 적절한 사건에서 조사와 기소를 진행하고 범죄자를 처벌할 것
* 1979년 ‘법집행공무원 행위규범’ 채택
* 1981년 고문피해자를 위한 자발적 기금(Voluntary Fund for Victims of Torture) 설립
* 1982년 ‘구금자를 고문과 기타 자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로부터 보호하는데 있어 의료요원, 특히 의사들의 역할에 관한 의료윤리원칙’ 채택
* 1984년 고문방지협약 채택
* 1985년 고문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 임명
* 2002년 고문방지협약에 관한 선택의정서(2002년 12월 18일 채택, 2006년 6월 22일 발효, 2008년 1월 현재 당사국 34개국, 한국 미가입); 감옥 및 기타 구금시설에 대한 국제적 감시를 정한 의정서이다.

“그것(고문)을 받아들일 때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내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다.” (어느 고문 피해자의 말)



고문방지협약고문방지협약 1조 1항은 아래와 같다.

이 협약의 목적상 ‘고문’이라 함은 공무원이나 그밖의 공무 수행자가 직접 또는 이러한 자의 교사·동의·묵인 아래, 어떤 개인이나 제3자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가 실행하였거나 실행한 혐의가 있는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인이나 제3자를 협박·강요할 목적으로, 또는 모든 종류의 차별에 기초한 이유로, 개인에게 고의로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만, 합법적 제재조치로부터 초래되거나, 이에 내재하거나 이에 부수되는 고통은 고문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고문방지협약의 주요소는 1) 고문방지를 위한 효과적 조치를 취할 의무, 고문을 심각한 형사 범죄로 할 것, 2) 고문 받을 위험이 있는 국가로의 사람의 추방이나 송환의 금지, 3) 고문범죄에 대해 보편적 관할권을 적용할 의무, 고문용의자가 당사국 영토에 오면 기소하거나 송환할 것, 4) 구금, 수사 등에 관련된 요원들의 훈련에 고문금지에 대한 교육과 정보를 포함할 의무, 5) 모든 의심되는 고문사건을 조사할 의무, 6) 고문 피해자에게 공정하고 적절한 보상의 권리를 줄 의무, 7)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고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을 방지할 의무 등이다.

여기서 쟁점이 된 것은 ‘보편적 관할권’ 문제와 ‘이행장치’에 관한 문제이다. 보편적 관할권을 적용하자는 것은 고문의 의심이 있는 사람이 제3국으로 달아남으로써 안전한 하늘을 찾을 수 없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이 이 원칙을 고문에 적용하는 것을 주저했다. 효과적인 ‘이행장치’에 대해서도 국제적 감시를 거부하고 국내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여겼다. 이런 국가들의 반발로, 협약에 가입하는 국가들은 고문 진정과 조사 절차에 대한 조항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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