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4. 21

작성자 : 엄기호

 

데카르트로부터 탈출하기: 흔적으로서의 나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묵시록이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녀도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는 근미래"에 인간의 뇌는 전자화되고 몸은 기계화된다. 전자화된 인간의 뇌는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기억은 네트워크에 의해 스캔하여 보관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 탐색되고 지우거나 조작 가능한 것이 된다. 반대로 인간의 몸은 언제나 대치가능한 것이 된다. 성인의 몸을 가질 수도 있고 아이의 몸을 가질 수도 있으며 반대로 몸을 가지지 않고 네트워크상에 ‘자료’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1995년에 만들어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매트릭스’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처럼 이 영화는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기억이 몸을 완전히 떠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조작가능하다면 ‘나라고 하는 것-자아’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더구나 그 기억이 네트워크에 존재함으로써 언제든 누구라도 자아의 영역을 침범하여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더 이상 개별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개별성을 상실한 인간도 인간일 수 있는가?

 

데카르트라는 진리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고유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한 페이지 정도의 글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이 질문 자체는 사실 대단히 진부하다. 하지만 언제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는가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학생들은 곧 자신의 과거에 대한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어렸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며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져서 얼굴을 만져 보는 짓을 누구나 한번쯤은 하게 된다. 한 학생은 ‘현재까지 이어 온 나의 기억의 끈은 7살의 어느 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지?”라고 물은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며 ‘그 후로 어린 나는 ‘나’의 존재와 ‘우주’ 등에 대해 생각하며 왠지 모를 공허함에 혼자 울곤 했다’고 회상한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중요한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질문일 경우에는 따분하고 귀찮기만 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내가 이미 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분과 토론의 분위기는 상승할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즐거워하게 된다. 이미 내가 한번 던져본 적이 있는 짊문은 나와 무관한 질문이 아니게 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겉도는 질문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이미 그 질문을 살면서 던져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던졌을 때의 분위기와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학생들의 대답은 대충 비슷하다. 몇몇 학생들은 영화가 기억이 조작가능하고 침범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하였지만 역시 나라고 하는 것은 ‘기억’과 그 기억의 총합으로서의 ‘추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억과 추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나의 기억은 사회적인 관계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처럼 다수의 학생들은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보다 ‘기억’과 ‘사회적 관계’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좀 더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들은 인간의 기억은 영화에서처럼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유성이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토대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 그 기억이 조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인식하는 한’ 그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생들은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계속 의심하며 자신에 대한 탐구를 벌이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관계는 나의 기억이 축적되는 것이 된다. 사람은 인식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게 된다. 이처럼 ‘서로를 의식하게 되면서 인간 사이에 상호 교류’가 일어난다. 이것이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다. 인간의 의식은 나에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축적되는 것이고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자신을 규정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물리적인 ‘나 자신’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나의 의식은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자아의 토대를 ‘의식’에서 찾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가르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근대교육 자체가 이 토대위에서 구성되어 있다. 고등학교까지의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적 과정은 근대적인 이성적 주체를 키우는 과정이다. 학생들이 당연히 ‘데카르트의 후손’으로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지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공식교육과정에서 습득하게 되는 언어와 담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아이들의 삶에서 겉돈다고 생각한다. 현상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배운 언어와 지식이 자신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절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 ‘의미 없다고 하는 고등학교 교육’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아이들은 공교육에서 배운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진리’라고 믿는다. 수업시간에 졸았거나 땡땡이를 쳤거나와 상관없이 공식과정에서 가르쳐진 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정말로 아이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믿지는 않고 그것이 살아가는데 중요하지도 않지만 그 ‘진리’ 말고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자와 같은 진리에 대한 내용적 승인이건 후자와 같이 진리의 형식에 대한 승인이건 이 진리가 가진 강력한 힘이다.

‘진리’가 가진 힘은 강력하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하거나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인간의 사유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이 ‘진리’가 세상만사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공식적’ 언어가 된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정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아이들의 삶과 겉돈다. 그러나 그 겉도는 지식이 가르쳐지는 순간에 선포되는 ‘진리’는 아이들의 세계관을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교가 이처럼 강력한 ‘진리의 공간’이라는 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간과하게 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학교는 여전히 ‘심각하게’ 중요하다.

 

진리에 맞서는 사유

데카르트가 맞는지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면서 학생들의 사유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유는 진리에 맞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리를 상대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것이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거 시장잡배들도 하는 거잖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게 정말 진짜 맞는 말이야?’라고 물을 수 있는 껄렁껄렁함에서부터 진리의 권위는 무너진다.

이번 토론에서는 다행스럽게도 한 학생이 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일단 이 학생은 영화가 재밌는 것은 사실이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하던 고민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고 한다. 이 영화에 대해 ‘하품하며 비평할 생각’은 없지만 더한 허망함에 ‘생각할 기회를 빼앗은 것 같은 불쾌함’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학생은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적 진리를 무의식중에 ‘해체’하였다.

자신이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 때 벌어진 일이다. 작업을 나갔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자신이 탄창을 잡고 선임병이 해머로 그 탄창을 부수는 작업을 하던 중에 선임이 그만 해머로 자신의 손을 내려쳤다. 손가락이 완전히 으깨져서 뼈가 훤히 다 드러나는 중대한 사고였다. 놀란 선임이 ‘괜찮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괜찮습니다’하면서 다음 탄창을 집어 들었다고 한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픔은 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나서야 아픔을 느끼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는 딱 그 반대의 경험을 했다. 마취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아프더란다. 그때는 그 아픔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제대를 하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도 가물가물하다고 한다. 대신 그에게 확실히 남은 것은 손에 남은 상처이다. 그 상처를 보며 이 학생은 나라는 고유함은 아픔에 대해 자신도 헷갈려하는 의식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흐리멍덩해지는 그 기억도 아니고 몸에 남은 이 상처, 그 ‘몸뚱아리’ 자체라고 결론지었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던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제공해주는 아주 좋은 사례이다. 무엇보다 이 사례를 가지고 학생들과 ‘누가 몸을 가지지 않고서도 사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것을 위해 누가 자신의 몸을 떠나서는 사유를 할 수 없는 존재들인지, 늘 몸을 의식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 존재들인지를 질문해보았다. 학생들과 나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흑인,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들은 ‘사유’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몸에 대한 규정이 곧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다.

대표적인 흑인의 예를 학생들과 토론하였다. 왜 운동선수들 중에 흑인들의 비율이 월등하게 많은가? 한편에서는 흑인들이 운동능력이 다른 인종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 말고는 달리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흑인이 등장하는 광고는 대부분 그들의 색깔과 몸을 강조한다. 한국의 지하철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캘빈클라인 속옷의 모델도 흑인이다. 흑백 필름에 그는 자신의 까만 몸색깔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하얀 속옷을 입고 그 위로 두드러져 보이는 거대한 성기와 미끈한 근육으로 재현된다. 이 모델은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색깔과 근육, 그리고 거대한 성기라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여성도, 성소수자도,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토론을 통해 우리가 놀랄 정도로 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 나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흔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사유는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몸 없는 사유의 주체’가 되어 온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유는 우리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흔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몸과 몸에 남은 상처가 학교에서 절대화된 데카르트적인 진리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이다.

이 토론의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일단 ‘인간은 몸뚱아리다’라고 말을 했던 학생은 자신의 이야기가 그렇게 심오한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자신의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으며 인문학의 언어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이 힘에 한 번 압도되고 나면 수업과 공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다른 학생들과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에 대한 질문에서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하늘에서 붕붕 뜨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한 학생에 따르면 자신들이 그렇게 배운게 별로 없다고 폄하하고 한편으로 치워놓은 학교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탄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내가 던지는 질문의 방식 자체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질문 방식 자체가 학생들의 사유를 ‘학교의 진리’에 의존하여 증명하는 방식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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