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27 호  [기사입력] 2010년 1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수능일이 코앞에 왔다. 일 년 중 누구에게는 가장 긴장되고 누구에게는 아주 서글프거나 막막하기만 한 날이 온 것이다. 대학입학시험같은 걸 생각도 못해본 사람한테는 시험이란 것 자체가 부러울 수 있을 게고, 시험 잘 치르기를 바라는 부모들 마음엔 벌써부터 엄청난 등록금 걱정이 들어앉아있을 게다. 인생의 마지막 시험이 아니라 하염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질 시험들의 시작일 뿐이란 생각에 수험생의 해방감은 아주 짧을 것 같다. 

문제는 시험만이 아니다. 거대한 채무자의 대열에 끼게 될 학생이 대다수일 것이라는 문제다. G20으로 떠들썩하던 기간 중 한 여대생이 학자금 700만원을 갚지 못해 고민하다 자살했다. 청년유니온(만 15세부터 39세까지 가입하는 세대 노동조합, 지난 3월 13일 창립식을 가졌지만 노동부가 조합 설립신고서를 계속 반려하고 있어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의 구성원이 쓴 글에서 ‘매달 학자금 융자금을 갚을 때마다 죽은 그녀를 기억할 것’이라는 말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수능을 치르는 날을 전후해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학생들은 공공서비스 삭감에 항의하고 대학교육의 전면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들 중에 한 구절을 옮겨본다.

* 무상교육이란 뭘 의미하는가?

이 사회에서 어떤 서비스도 문자 그대로 ‘무상’인 것은 없다. 문제는 누가 지불하느냐이다. 우리는 모든 학비의 폐지를 원한다. 그래서 고등 교육이 공공서비스로서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길 원한다. 이건 졸업 전이나 후에 학생이 상환하는 형태를 말하는 건 분명 아니다. 학비는 일반 세금에서 충당돼야만 하고 모든 학생에게는 살아갈만한 보조금이 제공돼야만 한다.

* 하지만 돈이 없다고!

어디에 돈이 없는가? 언론이 보도한 부자 목록에 따르면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가장 부유한 1천명의 부는 엄청나게 증가했고, 대표적인 100개 기업 운영자들의 봉급은 작년에 55%나 올랐다. 가장 부유한 0.01%의 소득은 500% 치솟았는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10% 올랐을 뿐이다. 이런 통계들로 지면을 채우는 건 쉬운 일이다. 가난한 다수는 공공서비스의 삭감 때문에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너희들의 대안이 뭐냐고?

이런 위기를 정말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정부가 있다면, 해결방법은 ‘공정’이다. 부자들, 대기업, 은행들의 엄청난 부에 세금을 물려라. 소득세, 기업세는 계속 낮춰져왔다. 부자들의 이윤이 중요한지 아니면 그 나머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와 일자리가 중요한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 그래, 돈이 있다 치자. 그렇다 해도 다른 공공 서비스를 제쳐두고 대학생들에게 그걸 쓸 이유가 뭐냐고?

대학 교육만이 아니라 중등교육, 초등교육도 중요하고 연금도 중요하고 의료보장도 중요하다. 어떤 한 분야의 공적서비스를 삭감하게 내버려두면 그건 멈출 수 없는 미끄럼틀을 허용하는 거다. 어떤 한 분야의 공적서비스 이용자들이나 그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정부의 분리지배방식을 허용하게 되면 모두의 운동이 약화될 것이다. 필수적인 모든 공적서비스를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 우리의 대안이다.

*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냐고? 대학생을 지원하는 건 중산층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이 돈을 내는 걸 의미한다고?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면 안 되는가? 대학은 전통적으로 부잣집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 고등 교육의 확대는 좋은 일이었다.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정부 돈 안들이고 학비와 민영화로 대학교육을 하려는 것이었다. 왜 엘리트만이 대학교육의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가? 세상에 대해 배우고 정신을 확장하고 같은 일을 하는 타인들과 어울릴 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 아닌가? 중산층의 자녀를 위해 노동계급이 돈을 낸다는 말은 틀렸다. 사실은 부자를 위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긴다면 부자에게 세금을 매겨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부자들이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지지해라.


대학교육이 ‘공공 서비스’라는 말은 이 학생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유네스코가 1998년 채택한 “21세기를 위한 세계고등교육선언: 전망과 행동”에서는 ‘공공 서비스’로서 고등교육을 칭하며 그를 위한 재정의 확보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인 재정지원은 사회가 고등교육에 제공하는 지원을 의미하며, 따라서 고등교육의 발전을 보장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고 질과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교육적, 사회적 사명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려면 고등교육과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다”(제 14조 a항)

교육권이란 인권을 국제인권기준에서 말할 때, ‘필수요소’로 꼽는 것이 있다. 가용성(availability), 접근성(accessibility), 수용성(acceptability), 적합성(adaptability)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가 국제인권조약에서 말하는 교육권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내놓은 일반논평 13(1999년)에 담겨있다.

가용성은 교육기관이 충분히 이용될 수 있는 정도여야 함을 말한다. 접근성은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교육에 접근할 수 있음을 말한다. 접근성에는 여러 측면이 있는데, 특히 ‘경제적 접근성’은 ‘누구나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교육’을 강조한다. 초등교육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완전 무상을 강조하며, 중등 및 고등교육에 대해서도 점진적인 무상교육 도입을 지시한다. ‘수용성’은 모든 교육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수용성’은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기준에 맞는 교육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학생의 존엄성과 인권을 해치는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적합성’은 교육 내용과 과정이 다양한 여건에 놓여있는 학생들의 필요와 사회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에게 적합하게 조정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로지르는 것은 한마디로 교육은 학생이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등등 감당할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요소의 적용을 고려함에 있어서 언제나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은 학생의 최상의 이익이다.

교육권을 위해 평생 헌신했으면서도 “교육권은 아직 인권이 못되었다”고 개탄한 카타리나 토마세브스키(유엔 최초의 교육권특별보고관, 2006년 타개)는 정부들이 입으로는 교육권을 외치면서 교육에 과도한 비용부담을 지우는 것을 “돈벌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수능시험문제만 낼 것이 아니라 그 시험 못지않은 호된 시험을 좀 치러봐야 하지 않는가? ‘자기 앞가림 하는 것은 네 책임이다, 책임은 각자 져라,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먹고 살라’고만 한다면 사회와 국가가 왜 있으며, 인간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와 국가 속에서 살아야 하고 그 속에서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 700만원 때문에 죽어간 젊은 영혼 앞에서 그동안 외던 답 말고 달리 고심한 답안지라도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21세기를 위한 세계고등교육선언: 전망과 행동(World Declaration on Higher Education for the 21 Centry: Vision and Action, 1998 유네스코 세계고등교육회의에서 채택)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고등교육의 무한한 다양성과 고등교육을 위한 이전에 없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사회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중요성의 인식이 또한 증가하고 있고, 미래구축을 위해, 젊은이들이 신기술, 지식, 아이디어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고등교육은 ‘모든 유형의 연구, 훈련, 또한 국가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인정한 대학과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중등교육 이후의 연구를 위한 훈련’을 포함한다.



제 3조 공정한 접근
(나) 고등교육에 대한 공정한 접근은 모든 수준의 교육과의 연계성, 특히 중등교육과의 연계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필요할 경우 재정비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고등교육기관은 초기 아동교육과 초등교육으로부터 평생교육 체계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자체 내에서도 그러한 체계의 일부로서 작용하면서 북돋우는 기능을 해야 한다. … 고등교육은 아무런 차별 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라) 일부 특정집단 사람들, 원주민, 문화·언어상의 소수집단, 취약집단, 강점된 민족,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 물질적인 특별지원과 교육적 해결책을 통해 이들 집단들이 고등교육에 접근할 때 직면하는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제 14조 공공 서비스로서의 고등교육을 위한 재정의 확보
고등교육 기금을 확보하려면 공공 및 민간부문의 자원이 모두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가)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인 재정지원은 사회과 고등교육에 제공하는 지원을 의미하며, 따라서 고등교육의 발전을 보장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고 질과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교육적, 사회적 사명이 조화롭게 이뤄지려면 고등교육과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나) 고등교육이 지속적인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점을 감안할 때,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수준의 교육을 사회 전체가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관과 가정, 그밖에 고등교육에 관계된 모든 사회적 주체들은 물론, 경제, 의회, 대중매체, 정부 조직 및 민간조직의 참가와 인식의 정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 선언서를 채택하면서, 만인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각자의 특성과 역량에 따라 고등교육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인권오름 제 227 호  [기사입력] 2010년 1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지키지 않는 약속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다.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고용최저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아동에 대한 교육은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규범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선언 보다 훨씬 이전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 철폐를 얘기했다면 오늘날의 기준은 18세 미만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약속인 교육권은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말로만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교육을 외칠 뿐 정부와 국제사회가 실제로는 교육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것도 화가 나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초등교육조차 위태로운 아이들이 늘어가는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목격되고 있다. 자국에서 교육권을 잘 보장하고 있는 국가들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교육제도와 서비스를 소위 ‘수출’하고 있는 국가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을 인권으로 보장하는 데 반대한다. 인권으로서 공교육이 강화되면 자신들이 팔아먹을 상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구실에 충실한 국제기구들도 마찬가지다. 국제무역의 규범에 충실한 상품으로서 교육을 다루고 싶어 하지, 보편적 인권으로서 교육을 고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외 원조나 부채 구제에 대한 결정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로 세계은행이 교육에 대한 컨설팅을 해준답시고 500일간 쓴 비용이 그 나라에서 5천명의 교사를 고용하는 것과 같은 비용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그런 컨설팅을 통해 나온 조언이란 게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공교육을 강화하려면 교사의 확충이 중요한데 세계은행은 공공부문의 임금이 늘어나게 될 테니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육을 빈곤을 줄이기 위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도구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빈곤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교육의 양과 질을 국제금융기구와 은행에게 결정하게 한다. 그런 교육의 양과 질은 싼 노동력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내는데 치중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이 시장의 상품, 경제의 규모와 효율성에 따라 조절되는 것, 싼 노동력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수가 없다.

인권의 존중 강화가 교육의 목적

교육권이 필수적인 인권이란 데 반대의견이 없다 했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나치는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 따라서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한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대학가기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교육 주체들이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지금에는 구시대적인 것이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인권교육의 이상 담은 교육권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교육의 목적을 정리하면 그것은 곧 인권교육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유엔은 인권교육에 대하여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며, 모든 발달 단계에 속하는 사람과 모든 사회 계급의 사람들이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존중을 보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인 전 생애 과정”이라 했다. 교육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질과 내용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교육을 흔히 ‘역량강화교육’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은행저축식 교육’이다. 은행저축식 교육개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즉 학생은 무지하고 교사는 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며 학생들이 또한 교사를 교육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한다. 또한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무효로 한다.

반면 역량강화 교육은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배운다’고 한다. 교육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식은 억압적인 사회, 정치, 경제 조직의 유형을 이해하고 의문시할 수 있는 것이고, 비판적 의식을 획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비판적 의식을 통해 역량강화된 사람들은 억압적인 관계를 변화시킨다. 억압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 조직과 활동양식을 계획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추구한다.

역량강화 교육이 되어야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건이란 없다.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특정 부문의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관심이나 소질을 말하는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국에서는 요원한 무상 교육

의무교육의 전제조건은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고, 돈 걱정 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만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부과, 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선언의 규정은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확장되는 원칙이다. 선언을 만들 때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근거는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교육에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각 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해야 했기에 최소로 합의한 것이 초등의무무상교육이었다.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초등무상교육을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소득수준은 사교육비 지출과 비례하고 또한 학업성적과 비례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치기 위한 교육이 불평등 유전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교육의 불평등을 염려하는 교육단체나 언론 은 한국이 대학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이 아니라고 얘기해왔다. 가령 GDP 대비 6%의 교육재정만 확보해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를 충당하고도 수조원이 남으며, 이것을 대학에 투자하면 무상교육의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한국이 중학교까지 달성했다는 무상교육도 진짜 의미의 무상 공교육이라 볼 수 없다. 법적으론 무상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 당사자가 사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교육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이 천문학적 수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대학만이 아니라 무상교육단계에서부터 그렇다.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이것을 “공교육의 민영화”(privatization of public education)라 비판했다. 거죽은 공교육일지 모르지만 속은 사교육비로 채워져 있기에 이런 교육을 공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가 물어봤을 때, 그게 아니라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돈 주고 사는 상품인 것이다.

교육의 자유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을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국가의무의 4요소;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적응성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로서 4가지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가용성(availability)이다. 모든 학령기 아동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아동이 공립학교에만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공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교육기관은 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최소한의 일치된 성격을 보장해야 한다. 뭐가 일치돼야 하느냐면 국내외적으로 금지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초등무상교육의 원칙이 보장돼야 한다. 정부는 모든 교육기관이 최소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보장해야 하며 차별과 배제 없는 통합교육을 보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하고 재정 지원하는 것은 국제인권법에 부응해야 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교사들의 지위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

둘째, 접근성(accessibility)이다. 선언에서는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고 표현했다. 접근성과 밀접한 문제는 교육비이다. 직·간접적인 교육비용, 통학비용 등의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의무교육 이후의 교육에서도 비차별적이고 감당할만한 수준의 교육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 교육은 결코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 가령 장애아동의 경우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셋째, 수용성(acceptability)이다. 교육은 교육 참여자들이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한의 기준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기준에는 교육의 질, 안전, 건강한 환경이 포함돼야 한다. 학교 규율과 교수방법은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교육 참여자의 평등권, 프라이버시, 인격의 발전을 침해하는 처벌과 규제는 안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동은 억압에 제대로 맞설 수가 없다. 억압과 비교될 수 있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억압이 사라져도 언제든지 억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고 실현해보는 가치여야 한다. 배우는 과정은 또한 물리적 장벽의 제거를 요구한다. 가령 교육을 방해하는 빈곤, 교육에서 채택한 주류언어로 인한 차별, 장애로 인한 교육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교육권 위협하는 상품으로서 교육

넷째, 적응성(adaptability)이다. 아동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교육내용과 과정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개념에서 특히 주목한 점은 일하는 아동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가이다. 극단적 형태의 아동노동,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래서 기초교육을 마치는 나이와 고용, 결혼, 징병, 형사책임을 묻는 나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일하는 아동에게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측면의 고려도 있어야 한다. 많은 지역과 가정의 현실은 아동이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은 무조건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방식의 접근으로는 아동의 교육도 노동도 보호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교육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하고 배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주경야독’의 접근법이 요구된다. 한 예로 고용된 아동의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제한하여 적어도 2시간 이상의 교육과 병행하도록 하고, 그 비용을 고용주에게 지불하도록 한 국가도 있다. 빈곤한 가정이 아동을 학교에 보내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시도도 있다. 교육이 적응성을 갖는다는 것은 학교 밖의 교육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유를 상실한 아동, 난민아동, 국내실향민, 일하는 아동 등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없는 범주를 위한 교육이 적극 고려돼야 한다.

또한 공식 교과과정이라는 것이 아동의 실제 삶과는 상관없이 다음단계의 상급교육과정(사실상 많은 아동이 갈 수 없는)으로 진학하기 위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이다. 직업교육을 진학교육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 내용의 적응성은 교육을 통한 인권보장을 염두에 둔다. 다른 세계와 문화, 역사, 성역할 등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불평등·편견·차별의식과 싸울 수 있는 교육이 요구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유엔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라고 했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그 열쇠가 제대로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교사 100명당 적어도 150명 정도의 군인이 있는 것이 현세계이다. 거래하고 소비하는 상품으로서의 교육이 교육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를 그런 식으로 소진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인권오름 제 139호 2009년 02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2월과 3월,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때가 돌아왔다. 과연 모두를 위한 교육권의 성취를 어깨 펴고 가슴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이기도 하다.

이 보고서는 최초 ‘교육권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이었던 카타리나 토마세브스키(Katarina Tomasevski)가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보고서이다. 170여 개 국의 교육관계법과 관행을 조사하는데 6년여가 걸린 이 보고서는 2006년 8월에 발표됐고 그녀는 같은 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교육권과 기본적 인권 옹호에 생애를 바친 그녀는 이 보고서에서 무상교육에 대한 인권적 접근과 교육권을 껍데기로 만드는 국제금융기구와 정부들의 위선을 거침없이 질타하고 있다.

아래 글은 300여 쪽에 가까운 이 보고서의 서론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katarinatomasevski.com/images/Global_Report.pdf
에서 볼 수 있다.(역자 주>

 


말로는 교육권, 실제로는 돈벌이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가격 때문이다. 그런데도 공교육이라 말한다. 법적으로는 무상이지만 실제로는 돈을 내야하는 데도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대학에 다닐 수 없는 것도 아주 나쁜 일이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말만 공교육인 교육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일해야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상처에 소금 뿌리는지, 교육권에 대한 말의 성찬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국제사회’의 한편에선 국제적 결의안, 선언, 권고들이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정부들이 교육에 비용을 부과하도록 강요해서 교육권을 부정하게 만든다.

80여 년 전, 정부들은 교육을 무상 의무화해야 한다고 한 규범은 산업화된 국가들의 관행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국제사회’는 이를 채택했다. 그럼으로써 아동노동을 방지하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보장된 교육권이 됐고, 유엔은 큰 소리로 교육권을 선포하고 나선 조용히 배신했다. 세계적으로 교육의 조종자는 은행(은행은 돈이 안되니까 무상의 공적 서비스를 지지하지 않는다)과 교육서비스를 수출하는 정부들(교육이 무상의 공적 서비스가 되면 이들은 수십억 달러를 잃게 된다)이다. 경제적 배제라는 쓴 약을 설탕으로 겉칠 하듯이, 지구적 노동 분화는 인권을 이용한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배제에 대한 도전을 교육은 인권이 아니라며 부정하여 방해하는 것이다.

교육권을 위해 무슨 처방이 필요한가는 할 일을 안 하는 죄와 저지른 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안한 죄는 무상 의무 교육을 정부의 의무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정부들은 무상 교육을 제공하지 말고 그 비용을 가족과 지역사회에게 전가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무상’ 교육을 말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투자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다. 일반적으로 징세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필수적인 정책의 지렛대인 공공재정이 아예 빠져있다. 세계적 교육 구상은 미국 정부의 정책(교육이 권리라는 걸 부정한다)과 일치되며, 이것은 미국의 복사판인 세계은행에 의해 증폭된다. 하지만 교육과 인권의 주체들은 아직 이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그런 도전의 필요성에 부응하려 한다. 교육은 ‘모든’ 아이들을 다 품을 수 있도록 보편화돼야만 한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의무적이려면, 무상이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탈공업화된 국가들이 지난 2세기 동안 실천해온 것이다. 인권의 도전 필요성은 ‘이중 기준’에서 나온다. 이중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훨씬 낮은 기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적용하려 든다. 

왜 단일한 지구적 교육전략이 없는가?

모든 아동을 위한 무상의무교육은 국제인권법의 중추이지만 단일한 지구적 교육 전략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식적인 정책 결정에서는 한 국가당 한 표이지만, 그러한 정책들의 자금을 동원하는 결정에서는 일 달러 당 한 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적 교육 거버넌스에서 개별 정부의 무게는 그들의 지갑의 힘으로 결정된다. 가령 외교부는 교육권에 대한 지구적 선언을 지지할 수 있지만 동시에 통상부는 교육의 수출 증가를 협상한다. 최악의 경우, 이런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의 교육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이익을 취하는 위선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자국의 교육 기관이 벌어들이는 이윤 때문에 비판은 쉽게 침묵된다. 재정부는 가난한 채무국의 무상초등교육을 방해하는 외채 서비스를 지원하는 반면 성평등부는 그런 외채서비스에 내재된 여아에 대한 교육의 배제를 안타까워한다. 일부 부채 삭감을 이유로 비판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만, 부채삭감이 원조삭감으로 귀결된다면 헛된 일이다.

부채 삭감과 관련된 뉴스 제목은 큰 글씨인 반면에 두꺼운 공식 문서의 작은 글씨를 읽는 사람들은 없다. 부채삭감의 조건과 교육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 즉 약속된 부채삭감으로 얼마만큼의 돈이 교육에 할당되는지는 그 작은 글씨에 달려 있다. 일반적 규범은 모든 기금이 빈곤 축소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빈곤축소의 개념은 에두른 것이어서 마치 부채 삭감 기금이 모두 빈곤축소에 쓰인 것처럼 통계적으로 분류된다.

OECD 국가들은 WTO 규범아래 자신들의 수출을 보호하는 걸 우선시하기에 보편적인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에 대한 막연한 약속은 뒷전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세입원은 낮고 재정적자는 높기에 무상교육을 위해 공적 재정을 증가시키기 어렵다. 인권법은 교육에 대한 공공 투자를 늘릴 것을 명하지만 국제금융기구들은 재정적자를 줄일 것을 요구한다. 국제 개발 원조를 받으려면 이 조건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인권법은 무시된다. 결과적으로 무상이어야 하는 공교육은 수업료, 즉 돈을 위한 것으로 바뀌고, 교육비용은 정부에서 가정으로 이전됐다.

왜 세계은행의 경제학자들에게 교육을 맡겨선 안되는가?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규모의 경제 또는 서비스의 효율적인 전달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각 나라에서 전개돼온 교육의 특질을 놓치고 있으며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모델(one-size-fits-all model)에 각각의 특질을 억지로 구속시키려 한다.

교육이 빈곤 축소와 규모의 경제, 서비스의 효율적인 전달의 도구로 격하돼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대규모로 값싼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데는 유용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가치 있는 교육이 아니다.

교육이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말은 세계은행의 교육 용어에서 빠져있다. 무상의무교육은 인권법에 통합되며, 인권법은 정부가 교육을 제공하거나 교육이 제공되도록 보장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것은 적절하고 지속적인 공적 재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 대신에 세계은행은 교육을 수요와 공급의 용어로 분석한다. 세계은행은 요구되는 교육발전을 “교육의 기존 소비자들에게 수행과 효율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교육접근권의 확대를 “현재 소비하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학생 아동이 어떤 효율적으로 전달돼야 할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바로 교육 개념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비스’란 밝게 칠해진 교실과 예쁜 책으로 효율적으로 전달되지만, 교육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학생은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한다.

효율성의 잣대로 교사의 권리를 부정해서는 교육이 학생들의 배움을 촉진할 수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자들, 특히 교사들은 많은 국가들에서 노동권과 직업상의 자유를 부인 당함으로써 권한을 뺏기고, 예산 삭감으로 빈곤해진다. 공적 기금은 부족하며 자유시장에서 교육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조하는데 공적 기금이 쓰여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공교육의 질은 결과적으로 나빠진다. “사교육 시장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공적 서비스의 질이 아주 낮다”며 시장에서 교육을 사라고 부추긴다. 따라서 공교육의 빈곤화는 사교육을 구입할 여유가 되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공교육을 탈출하도록 유발한다. 또 많은 국가들에서 이런 게 교육개혁의 하나이다.

기쁘게도 세계은행식 모델에 교육을 맞추는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상당한 반대가 있다. 이 보고서가 강조하는 바는 모든 아이들이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학교에 갈 수 있도록 교육을 무상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국제인권법에서 교육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은행은 무상교육을 ‘구호품’에 빗대어 말한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세계은행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 경험상, 가난한 사람들은 구호품을 갖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적절한 질이라면 서비스에 대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 합니다.”

‘구호품’같은 모욕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세계은행이 무상의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사람들이 무료인 공적서비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거짓임은 무상에서 유상으로의 공적서비스의 전환에 반대하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밝혀졌다.

시장은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에선 돈 주고 서비스를 사는 것이다. 의무교육에서 ‘과도한 수요’란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아이에게는 교육에 대한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교육이 일으키는 사회화와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아동의 부모에게 의무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알맞은 교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자녀에게서 교육의 권리를 뺏을 수는 없다. 교육은 또한 국가에게 의무이다. 국가는 모든 젊은 세대가 교육받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 일에 실패한다면 국가 자신의 미래가 위태롭게 된다.

인권법은 지구적 목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국제인권법은 교육권의 점진적 실현을 명하고 국제협력이 이 과정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보편적인 인권으로서 교육을 선포한 것은 권리에 대한 권한을 확대하는 걸 목표했다. 국내에서는 조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에 지불하는 것이 보장되지만 국제적으로는 그와 대등한 것이 없다. 유럽의 성인 한명은 1인당 2만5천달러의 GNP로 세 명의 아동교육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반면 아프리카의 성인 한명은 1인당 5백달러의 GNP로 6명의 아동을 교육해야 한다. 이런 불평등한 부담을 고칠 국제적 약속은 없다. 결과적으로, 교육에 대한 ‘접근’(access)은 그에 상응하는 정부의 의무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권리’라는 용어는 회피된다. ‘접근’이란 말은 자유 시장에서 구입한 교육 또는 자선을 통한 재정에 걸쳐있다. 교육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이것은 과도한 수요로 정의되거나 불평등한 것으로 안타까워할 일이기는 하지만 인권침해의 비난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국제인권법의 목적은 권력 남용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제인권법의 핵심 목적은 교육에서의 침해를 포함하여 인권침해를 폭로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현행 지구적 교육 목표에서 국제인권법을 배제하는 것은 권력 남용을 촉진했다. 공적인 약속이 없는 체함으로써 의무를 피하려는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권력 남용도 없기 때문에 인권 보호의 필요성도 전혀 없을 것이다.

인권침해자들은 왜 나쁜 교육가인가?

전쟁과 억압을 보조하는 과세 또는 국제원조는 교육기금을 고갈시킴으로써 교육에 대한 간접세를 과하고 있다. 이런 왜곡된 우선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침묵시킴으로써 교육에 대한 간섭세가 강요된다.

정책적으로 인권을 부인하는 정부는 교육도 부인하므로 교육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정부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 생득적 권리라는 것을 배우지 못하도록 인민에게서 교육을 박탈할 것이다. 가난한 국가들의 부자 정부들은 권력 강화를 위해 기금을 사용한다. 그래놓고 가난 때문에 교육에 재정을 댈 수 없다고 변명한다. 정부간 기구들은 빈국을 돕기 위해 개입하여, 그 정부가 할 수 있지만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한다. 이런 식의 정부 기능 대체는 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침묵을 필요로 한다. 권력남용은 피해자 또는 인권단체들이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다고 폭로할 때야 터뜨려진다. 흔히 국제간 기구들은 인권침해의 촉진자로 정의된다.

정부는 교육을 제도화된 세뇌로 변질시킬 수 있다. 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아동을 학교에 등록시키라고 서둘면서 정작 해야 할 질문을 피하려든다. 교육이 제도적 세뇌에 해당한다면, 아동과 청소년의 학교가지 않을 권리를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인권법은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의한다. 해야 할 일 중에 최상위는 모든 아동에게 교육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는가는 질문은 어디에나 관련된다. 르 몽드의 한 사설은 “무책임한 정책들이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준비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어깨에 1천억 유로의 공공부채를 지웠다”고 개탄했다. 이처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악의 대가는 광범위한 청년 실업과 우발적인 폭력의 분출이다. 특히 빈부간에 잘못된 구분선이 인종, 언어 또는 출신으로 표시되는 소속의 경계와 일치되는 곳에서 그렇다.

자유에 대한 존중은 의무교육에 내재된 정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한다. 교육을 검토하기 위한 렌즈로 인권을 사용하는 것은 ‘교육으로부터의 배제에 도전하는 일’과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를 묻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교육 통계는 흔히 숫자계산밖에 모르고 그런 계산에 내재된 한계가 문제시된다. “학교를 위한 학교교육”, “죽은 목적의 교육”이란 말이 있다. 학교교육은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권의 보호 없이 모두를 포괄하는 의무 교육은 “선을 위해 사용되건 악을 위해 사용되건 간에 모든 학교 체제의 특질”로서 주입을 제도화한다. 경제학자들은 단지 교육재정을 대는 게 아니라 정부가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정부 주장에 대한 설명을 주입에서 찾았다. 인권보호의 구상은 교육이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점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개선된 교육적 통계에는 떠들썩한 환호가 동반되지만 정부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큰 침묵이 따른다.

인권침해는 무시될 수 없는 문제로서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이것은 과거 40여 년 간의 인권활동의 자랑스러운 성취이다. 인권법은 숫자계산이 회피하는 질문을 물어야 한다.

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2차 이라크 침공이 임박한 2003년 2월, 영국에서 ‘평화를 위해 손을 들자’ 캠페인을 조직하여 청소년으로서 유명인사가 된 키에라 박스(Kierra Box)는 당시 17세였다. 그녀는 캠페인을 ‘반전’에서 ‘평화옹호’로 바꾸기로 맘먹고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에게 관심가질 만한 여유가 있어야 여러분은 관심을 갖는다. 여러분 자신의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일을 신경 쓸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동이 초등교육비용을 내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곳에선, 저항 운동을 조직할 시간과 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아동의 잠잘 시간조차 빼앗는다. 교육은 아동이 성인기로의 모험을 하기 전에 필요한 능력과 사회화를 제공해야 한다. 흔히 아동은 생계비를 버는데 필수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학교를 나가도록 강요받고, 무권리 조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사회화된다. 억압 속에서 자라는 아동은 억압에 대면할 수가 없거나 억압이 사라져도 억압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억압과 비교할 수 있는 대안적인 체제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저항운동을 조직하는 일은 그것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가장 어렵다. 이 보고서가 드러낸 바대로 이 세상에는 100명의 교사당 적어도 150명의 군인이 있다. 경험법칙상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부는 교육을 우선시하고, 독재는 재정으로 교육을 고갈시킨다.

모든 아동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초등 교육은 ‘재정 압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국제인권법이 명한 바이며, 2005년 세계정상회의의 결과로 시인되었다. 그러나 국가들의 기록이 드러내는 바는 초등교육비용이 연간 가계 예산의 30%이상이며 교육부가 쓰는 돈보다 5배나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공립초등학교에서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불법이지만, 그런 법은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알면서도 무시된다. 불법인 국가 정책을 국제적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법의 지배에 더 해로운 일은 없다. 이러한 명백한 권력 남용은 공개적이고 효과적인 반대에 부딪혔을 때야만 변화될 수 있다.

 

<인권오름 제 139호 2009년 02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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