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43 호 [기사입력] 2009년 03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중년이 된 지금까지 일이 몰리거나 불안하면 다시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를 준비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선 내가 거친 교육과정이 다 무효가 됐으니 다시 시험을 보라는 선고를 받는다. 시험은 백 일도 안 남았는데 두껍다 못해 베개가 되고도 남을 국, 영, 수 참고서를 쌓아놓고 이걸 언제 다 볼까 걱정한다. 하루에 봐야 할 쪽수를 헤아리다 깨어난다.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시험에 어린 상처의 경험 때문일까 추측해본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짝 지워서 공부를 지도하라 했다. 그리고 점검을 위해 칠판에 산수 문제를 가득 내놓고 못하는 아이들을 나란히 세워 풀게 했다. 문제를 풀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으면 뒤에서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리쳤다. 매 맞은 엉덩이를 부여잡고 풀지 못하는 문제 앞에서 몸을 꼬던 아이, 항상 손이 터있고 코를 흘리던 짝꿍의 얼굴을 잊을 길이 없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반평균을 갉아먹은 아이들을 불러내 성적 우수자들에게 손바닥을 때리게 했다. 그리곤 반 평균을 높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라 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취업을 위해 타자부기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애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고 했다. 정신과 소파에 누워 상담을 받는다면 내가 중년이 된 지금도 시험 꿈을 꿀 만한 사건들을 밤새도록 떠들 것 같다. 누군가 느낀 성취의 기쁨이 수많은 누군가에게 굴욕과 좌절을 먹게 만드는 환경에서 자란다. 이게 지금 방식의 시험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교육은 학교 가는 것, 학교 가는 건 시험 보는 것, 그리고 시험보고 야단맞고 좌절하는 것의 등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꾸는 꿈은 여전할 것이고 누군가가 매일 밤 꾸는 악몽일 것이다.
교육권에 대한 국제인권법의 정의 중 대표적인 것이 세계인권선언 제26조와 그것을 더욱 구체화한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규약 제13조이다. 이중 교육의 목적을 규정한 제 13조 1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규약의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 당사국은 교육이 인격과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교육이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더욱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당사국은 나아가서 교육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사회에 효율적으로 참여하며, 민족 간에 있어서나 모든 인종적, 종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유지를 위한 유엔의 활동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13조에 대한 주석이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 13이다. 교육은 인격의 “존엄성 의식”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적을 재확인하며 그 필수요소로서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적응성이라는 4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이 요소는 초등교육 뿐 아니라 중등교육, 기술 및 직업교육, 고등교육단계에 공통되는 것이다. 교육권에 비추어 진짜 평가돼야 할 것은 교육당국이 이들 4요소를 교육주체들에게 제대로 보장하고 있는가이다. 즉 아이들이 진짜 교육을 받고 있는가, 교육에 능동적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모든 아이가 정당한 관심을 받고 있는가이다. 대학가기에 목을 맨 아이들의 상황도 참담하지만, 그 때문에 교육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아이들, 학교에 있으면서도 방치된 아이들에 관한 문제를 냈을 때 ‘이런 문제가 시험에 왜 나왔지’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글 야학을 하는 분을 만난 일이 있다. 요즘 시대에도 그런 게 필요하냐고 했더니, 예전처럼 아예 학교 문턱을 못 밟아서 생기는 문맹이 아니라 풍요 속의 빈곤 같은 문맹이 심각하다고 했다. 선행학습이다 과외다 해서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오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글을 몰라 대부분의 수업시간에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도 신경 안 쓴다고 한다. 자신이 만나 본 학생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글을 모른 채 교실에 그냥 앉아있었다고 한다. 교육당국자를 만나면 한국에 문맹이 없다는 건 환상이라고 비판하는 그분은 외형적으로 달성한 학교 등록율과 출석률이 실제적인 읽고 쓰는 능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초학력미달자가 아니라 기초관심미달의 교육환경을 평가할 시험지가 필요한 것 같다.
국제인권기준에서 교육권의 대전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차별을 금한다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건이란 없다. ‘차별’이 아닌 ‘차이의 구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요건은 개개인의 재능과 장점이다. 재능과 장점이란 특정 부문의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관심이나 소질을 말하는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심과 소질이 떨어뜨리기를 위한 시험으로 파악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불리하게 구별하고 배제하기 위한 시험이라면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을 포기한 인권침해일 수 있다.
‘노테스트(notest)’를 외치며 교육청에 농성장을 차린 청소년, 교육자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긴 이유로 교직에서 쫓겨난 교사, 일제고사 거부와 체험학습을 선택한 아이와 부모들의 꿈이 시험의 악몽에 허우적거리는 잠을 깨워줬으면 한다.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13: 교육에 대한 권리 (1999) 1. 교육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인권이자 다른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기도 하다. 역량강화적 권리로서 교육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성인과 아동이 가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사회에 완전히 참여할 방법을 획득하게 하는 주요 장치이다. … 교육의 중요성은 단순히 실용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잘 교육되고 계몽된, 자유롭고 폭넓게 부유할 수 있는 적극적인 지성은 인간 존재의 기쁨과 보람 중 하나이다. |
인권오름 제 143 호 [기사입력] 2009년 03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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