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79 호  [기사입력] 2011년 12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겨울이 더욱 춥게 느껴진다. 살림살이에 엄청난 한파를 가져올 것이라 하는 법 내용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알려고 노력해도 이런저런 전문용어로 가득 차 있어서 친절한 정부의 설명이 필요할 터인데, 자세한 건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좋은 것이라는 선전만 가득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잡고 구경한 장터 약장수의 공연 같다. 그냥 좋으니까 일단 한번 잡숴보라는….

나는 통상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국제인권법이다. 미국에 대해서 이모저모를 많이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국제인권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국제법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국제인권법에 대해 취해온 태도를 보면 한국과 FTA를 맺을 상대가 어떤 상대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미국은 주요인권조약을 거의 비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 아동권리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 장애인권리협약 등을 비준하지 않았다. 사회권규약은 1977년에 서명해놓고 30년이 넘도록 비준하지 않았고, 아동권리협약은 거의 모든 정부가 비준해 193개국이 당사국인 국제조약인데 미국은 비준하지 않았다.

주요인권조약을 비준하지 않을뿐더러 인권의 기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결의안 등에 반대표를 던지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가 ‘발전권 선언’이다. 개별적인 권리목록의 나열이 아니라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만들자는 취지의 이 선언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것이 미국이었다. 반대표를 던질 뿐 아니라 약소국과 따로 쌍무협정을 맺어 이미 만들어진 다자간 조약에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지못해 비준한 몇 개 안되는 인권조약에 대해서는 조건을 잔뜩 단다. 그것을 ‘유보’라고 하는데 구속받고 싶지 않은 조항에 대해서는 자국에 구속력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때 그 기초위원회의 위원장이 미국의 전 영부인인 엘리노 루즈벨트였고, 그 이후 여러 국제인권조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높았던 게 미국 대표였다. 국제인권조약을 만들고 교육하는데 열심인 것도 미국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들이다. 하물며 미국 정부는 인권을 국제정치에 이용하며 인권을 이유로 전쟁까지 불사해왔다. 인권을 명분으로 국제정치에 개입하려면 국제인권법을 활용하는 게 당연할 텐데, 정작 미국 자신은 국제인권법의 당사국이 아니다.

십여 년 전 뉴욕 컬럼비아대 인권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세계 곳곳에서 온 15명의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5개월 여 국제인권법을 공부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의 세미나에는 우리가 읽고 공부해온 국제인권법 책의 저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같이 토론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온 질문은 ‘왜 당신들 정부는 국제인권조약을 비준하지 않는가?’, ‘우리한테는 그렇게 국제인권법을 강조하면서 정작 당신들 정부가 비준하지 않는 것은 왜 내버려 두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하나같은 대답이 ‘미국법과 상충되는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 때문이며 ‘미국의 시민권 기준이 월등하기 때문에 (국제인권법보다) 더 높은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그런 대답에 우리 참가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라고 씁쓸해하곤 했다. 가령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이유는 협약이 18세 미만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사형을 금지하고 있는데,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청소년에 대한 사형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법을 우선시 하는 건 맞는데 과연 그게 더 월등한 기준인가란 의문은 계속됐다. 컬럼비아대 프로그램에 따라 뉴욕과 워싱턴디씨에 있는 40여개의 인권관련 연구소와 단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특별히 ABA(미국변호사협회) 방문을 요청했다. 국제인권조약의 비준을 반대하는 의견을 내온 대표적인 전문가단체였기 때문에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ABA 공보담당 변호사의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법 우선주의의 전통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것이며 미국법이 다른 기준보다 월등하다는 것이었다.

좀 더 상세한 이유를 알고 싶었던 나는 도서관을 뒤져봤다. 그때 찾아 읽은 책이 오늘 소개하는 <인권조약과 상원, 반대의 역사>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지돼온 국제인권법 ‘반대’의 역사가 기록돼있었다. 최초의 반대는 ‘제노사이드 협약’에서 시작된다. 제노사이드 협약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바로 전날 채택된, 2차 대전 이후 최초의 인권조약이다. 제노사이드란 국민‧인종‧민족‧종교적 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집단살해하거나 중대한 위해를 가하는 등의 범죄를 말한다. 2차 대전에서 엄청난 반인도적 행위를 목격했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인권조약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인종을 이유로 한 학살과 분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횡행하던 인종 분리를 해체하는데 이용될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비준 반대자들은 인종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게 전통적인 미국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킨다는 공포, 미국법이 아닌 외부의 법으로 그런 강제를 받게 된다는 공포, 각 주의 자율성(특히 남부)이 침해받게 된다는 공포를 자극했다. 더 근본적인 공포는 당대 미국사회를 지배하던 내외부적인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공포였고 국제인권조약의 반대자들은 공산주의에 물든 세계정부(유엔을 말함) 운운하며 그런 공포를 대거 동원했다.

제노사이드 협약에 대한 논쟁에서 만들어진 구도는 모든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반대로 이어진다. 유엔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이후 선언을 국제조약으로 만들려고 박차를 가한다. 여기서 미국은 엄청난 활약(?)을 한다. 무엇을 위한 활약이었냐 하면 전통적인 미국의 인권관에 따른 시민‧정치적 권리만을 인권으로 인정하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조약을 두 개로 찢어놓기 위한 활약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한 개이니 그것을 국제조약으로 만들 때도 한 개여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한 미국 등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두 개로 갈라서 만들게 됐다. 또 시민‧정치적 권리는 당장 실현해야 할 의무를 가진 강한 권리로, 경제‧사회적 권리는 점진적으로 노력할 정도의 약한 권리로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고 미국은 성공했다.

양대 규약(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아주 성공적이었고 전통적인 개인의 권리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보호하는 조항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인종적 혐오를 고취하거나 전쟁에 대한 선전을 금지하는 조항이, 미국이 원치 않는데 들어갔다는 정도였다. 원하는 바를 이뤘음에도 미국은 두 개로 분리돼 만들어진 양대 인권규약 중에서 ‘사회권 규약’(1966년 채택)은 여태 비준하지 않고 있다. 자기 뜻에 맞는 ‘시민‧정치적 권리규약’(1966년 채택)을 비준한 것도 한참을 미적거린 후(미국 비준 1992년)였다.

2011년 현재에도 미국의 주요 인권조약 비준기록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통상법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강조하면서 비준하고 당사국이 된 국제인권조약의 실현에는 별 관심 없는 정부와, 자국법 우선주의를 끔찍하게 강조하면서 국제인권조약에 가입조차 하지 않는 정부가 만나 맺은 협정이 인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279 호  [기사입력] 2011년 12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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