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75 호  [기사입력] 2007년 10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어지러운 대권경쟁의 불꽃놀이 속에서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신음소리가 불쏘시개로 동원되고 인용되는 틈새로 희미한 촛불 하나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버마’, 공식적으로는 ‘미얀마’로 불리는 나라에서 오랜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이 터져나왔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있다.

버마는 1948년부터 내전 상태이고, 1962년부터 죽 군사통치하에 있다. 1988년 대규모 항쟁이 있었으나 군부는 수천명의 시위자를 학살하고 진압했다. 이후 체제를 정비하면서 1989년 군사정부는 국가의 공식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다. 유혈 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하여 1990년 민주화세력과의 타협책으로 총선을 치뤘다. 군부는 대참패했고,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가 압승했으나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폭압은 계속됐다. 군부는 비사법적 처형, 약식처형, 고문, 강간, 강제이주, 강제노동, 토지와 재산의 몰수, 아동군인의 이용 등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즉 함부로 죽이고 뺏고 노예처럼 부리고 아이들까지 총알받이와 지뢰탐지기로 활용했다는 말이다. 최근의 시위는 그렇게 오래 강요된 고통과 침묵을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건조한 사실 묘사에 담긴 정황을 살아있는 인간이 겪는 구체적 현실로 그려보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나를 보여준다. 이 글들은 강제로 고향을 등지고 살아가는 난민아동이 쓴 것이다. 타이-버마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는 타이의 인권단체 ‘국경없는 친구들’(Friends Without Borders)이 소개한 것으로, 국경지대의 카렌족 난민 마을 러퍼허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버마에는 130여개에 이르는 소수민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족이 다수족이고 카렌, 카레니, 샨, 몽족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전쟁과 자원 부족으로 난민 아동 중 열에 한 명 정도밖에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움막에 불과한 초라한 학교지만 아이들은 이런 것을 배운다 한다.

아침에 선생님이 사회수학(social math) 수업을 시작하셨다.
“모래 한 더미에 또 모래 한 더미를 더하면 얼마가 되지?” “둘이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만약에 두 더미의 모래가 하나로 섞이면 어떻게 되죠? 마치 우리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인권은 사람과 사람의 연대를 토대로 할 때만 추구될 가치가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가치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한 모퉁이에서 밝혀지는 작은 촛불 하나를 돌아보고, 민주화된 한국에 와서 난민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노동과 민주화투쟁을 병행하는 버마인들을 지지하고, 돈벌이를 위해 군부에 무기를 팔고 ‘건설적 개입’이라는 명분하에 자원착취에 나선 한국 및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대한 압력을 넣는 것이야말로 인권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하진 않더라도 필수적인 방도일 것이다. [류은숙] <2007년 10월 17일 인권오름 제75호>

쏘 투 루(Saw Tu Lu, 14살, 3학년)


나는 커리루키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부셨다. 내겐 누나 한명과 형 세명이 있다. 난 막내다.


내가 어렸을 때, 버마 군부가 강제로 마을사람들을 짐꾼으로 데려갔다. 내 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무거운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매를 맞으셨다. 아버지와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향과 땅을 떠날 수 없으셨다. 그때 우리는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버마 군인들은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떠밀었다.


우리는 쏘코 마을로 도망쳤다. 그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학교에 다녔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는 병이 드셨고 결국 우리를 남겨둔 채 돌아가셨다. 가끔씩 버마 군인들과 무장세력이 와서 우리 마을을 또다시 부쉈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타이로 도망쳤다. 거기에는 타이 군인들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우리를 난민 캠프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그들의 자동차를 타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난민 캠프에서 사는 것을 무서워하셨다. 많은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다시 되돌아 건너가기로 했고, 해방구에 있는 러퍼허 마을에 모였다.


러퍼허 마을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다시 갖게 돼서 행복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너무 짧았다. 군인들이 쫓아왔고 우릴 공격했다. 또 한번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타이로 도망쳤다. 군인들이 가버리고 나서 우리는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우리 집과 학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남쪽으로 좀더 내려갔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집과 학교와 병원을 다시 세울 때까지 나무 아래서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새 러퍼허’라고 불렀다. 형들과 누나는 결혼해서 나갔다. 그래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어머니는 아주 나이가 많으셔서 나는 어머니가 음식 구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와 쥐를 잡으러 갔다. 어둑해질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앞장섰고 나는 뒤따랐는데 나는 지뢰를 밟았다. 친구들이 마을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타이에 있는 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내가 회복되자 학교에 다시 보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더 이상 똑같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도와주신다. 난 더 이상 부끄럽거나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밤, 숙제를 하고 나서 잠자기 전에, 나는 기도한다. 우리를 모든 해악에서 보호해달라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처럼 피난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 무 재(Naw Mu Jae, 11살, 1학년)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고향은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불태워졌고 우리는 쫓겨났다. 그래서 여기 와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사람들이 쌀과 소금과 어묵과 옷을 가져다줬다. 나는 너무 좋았다.


여기 있으면서 나는 아주 행복하지만, 가끔은 아주 비참하기도 하다. 우리 학교와 마을은 연거푸 불태워 무너졌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정글에 숨었다. 나무 아래 땅바닥에서 모기와 벌레들에게 물리면서 자야했다. 공포와 걱정이 내 인생의 친구가 됐다.


이제 나는 학생이다. 아침에, 나는 학교친구들과 놀러간다. 학교가 문 닫으면 전혀 재밌는 일이 없을 거다. 집에만 있어야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나를 사랑해주신다. 나도 언젠가는 선생님이 돼서 우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돕고 싶다.


쏘 무(Saw Mu, 13살, 3학년)


우리 학교는 버마 쪽 강둑에 있다. 나는 학생이다. 매일 나는 빨간색으로 된 카렌족 전통 셔츠를 입고 학교에 걸어간다.


때때로, 나는 학교 근처에 서서 타이 쪽을 바라본다. 타이 쪽에 있는 학교는 근사하게 서있다. 아름답다. 거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때때로 나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


우리 학교건물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지붕은 마른 잎으로 돼있다. 땅바닥 말고는 우리가 공부하는데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때때로 버마 군인들을 피해 숨어야 하고, 그럴 때는 학교 대신에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일 때문에 부모님에게 불평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작고 볼품 없는 학교지만, 좋은 선생님이 계시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언젠가 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쏘 수 래 (Saw Su Le, 11살, 1학년)


빨간색 카렌족 셔츠를 입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학생들은 배울 수 없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읽는 것을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때문에 셈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읽고 쓸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밤낮으로 도와주신다. 전혀 불평하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시고, 너무나 친절하게 너무나 인내심을 갖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우리 카렌족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우리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친구들을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울 것이다.

인권오름 제 75 호  [기사입력] 2007년 10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8. 9.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4조

1.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타국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비호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이 권리는 비정치적인 범죄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는 행위만으로 인하여 제기된 소추의 경우에는 활용될 수 없다.

맨 손으로 서 있는 사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오래전 발행한 포스터가 있었다. 이 포스터에는 연장을 들고 서있는 사람, 땅을 파는 사람, 트럭을 모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림 밑에는 “누가 난민일까요?”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그림 속의 수많은 사람들을 훑어보면 답이 드러난다. 저마다 뭔가 쓸 만한 도구를 갖고 있는데 맨 손으로 서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난민이다. 아무것도 없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난민이라고 포스터는 설명해준다.

세계인권선언은 “박해를 피하여”란 표현으로 난민을 설명하고 있다. 1951년 채택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사람,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공포 때문에 국적국의 보호를 원치 않는 사람, 국적국 또는 상주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길 원치 않는 사람을 난민이라 한다.

그런데 이 협약은 1951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결과로 인한 난민에게만 적용되었고,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했다. 이미 발생한 난민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예상할 수 없는 미래의 난민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에 이런 제한을 둔 것이었다. 이런 시간적·지리적 제한은 곧 문제가 됐다. 1950-60년대 특히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난민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51년 협약의 시간적·지리적 제한을 제거한 것이 1967년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이다. 또한 난민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여 1951년 협약에 담긴 정의를 기본으로 하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됐다.

1969년 아프리카통일기구협약(OAU협약)은 “출신국 또는 국적국의 일부 또는 전부에서의, 외부침략, 점령, 외국의 지배나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해치는 사건을 이유로 강제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을 1951년 난민협약의 정의에 덧붙였다.

1984년 미주기구 난민선언(카타헤나선언(Cartagena Declaration))은 “보편화된 폭력, 외부침략, 국내소요, 대량의 인권침해 또는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해치는 기타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 안전이나 자유가 위협받음으로 인하여” 자국을 탈출한 사람을 추가했다.

변화하는 상황

난민에 대한 정의의 변화가 보여주듯이 난민의 발생요인과 결과, 난민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태도와 대응양식은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속에서 세계인권선언 14조는 20세기 난민 정책의 전환점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선언을 전후한 국면의 특징이라 하면, 난민 문제를 ‘일시적’이고 ‘특별한’ 상황으로 봤고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가졌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을 비호하지 못한 실패가 역력했던 경험을 안고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다. 더 이상의 협상이나 조약 없이 개별 사례별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대응방식을 취했고, 본국 귀환이 이상적 해결책이며 유엔이 더 이상 난민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를 원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설립하면서도 3년 시한의 임시기구로 생각했을 뿐이다. 또한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공산정부의 박해로부터 피해온 난민들에게 이익을 부여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옛날 영화 속에 흔히 등장하듯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 자유세계로 넘어오는 정치적 망명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민은 양차 대전과 그 결과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님이 곧 드러났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현재까지 임기가 연장되고 있고 난민 문제가 일시적일 뿐이라는 생각은 바람에 그쳤다. 또한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정확한 수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60년대 2백만 명 수준에서 현재는 2천만 명 수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난민에 대한 태도는 ‘냉정’으로 변화했다.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결로 난민의 정치적 근거가 상당부분 상실된 면도 있고, 9·11 이후에는 미국의 난민수용 급감과 유럽 국가들의 입국허가규범 강화로 나타났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의 정부 폭력이 곳곳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난민을 내쫓는 나라들

분쟁의 성격이 ‘내전’이 되면서 상황은 더 나쁘게 됐다. 국내실향민수가 난민의 두 배에 달하고 이들의 처지가 난민보다 더 나쁜 경우도 많다. 무력분쟁의 결과로 실향민이 발생할 뿐 아니라 살던 곳에서 대량의 인구를 쫓아내는 것이 교전 당사자들의 분명한 목적이기도 하다. 내전과 인종청소, 대량의 인권침해, 경제적 불평등과 극빈, 여기에다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재앙까지 가세했다. 가난한 나라들이 수천수만의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반면 부자 나라들은 자신의 영토에 난민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지구적 불평등의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렇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난민과 다른 유형의 이주자(가령 경제적 이유의)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가 논란이 된다. 하지만 많은 정부들은 난민과 경제적 이주자를 구분하려 들고, ‘문’(door)으로 들어온 난민이 아니라 ‘창문’(window)으로 몰래 들어온 경제적 이주자라 비난하면서 난민 신청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쫓는다.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서 핵심 원칙은 강제송환금지(non-refoulement) 원칙이다. 어느 누구도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민 지위를 구하러 들어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핵심원칙을 써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난민에 대한 대응이다. 인권에는 냉혹한 국경이 있다.

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 종교,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그 생명 또는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하여서는 아니된다.(난민협약 제33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정부는 난민협약에 1992년 가입한 이후 2000년까지 단 한명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다가 2001년에야 처음으로 1명을 난민으로 인정했다. 이후 조금씩 난민인정 자체에 있어서는 개선을 보여 왔다고 하지만, 한국의 난민 신청자가 1천 명을 넘어선 현실에 비해 난민정책은 빈곤하다고 할 수 있다. 전문공무원이 너무 부족하고, 난민정책을 생산하고 실무를 지도할 정책단위 없이 출입국관리법과 출입국관리국이 관리하며, 이의신청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등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난민문제를 국가 안보 혹은 치안유지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고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왔다. 유엔의 인권조약 관련 위원회들은 난민정책을 재고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한국에서 최초로 난민 인정을 받았던 데구(Degu)씨는 한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인종적 박해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던 땅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결코 한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나 꿈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정부와 민간단체가 보다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논의하고 이들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

난민=인권의 종말?

세계 곳곳에서 난민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것이다. 가령 바다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불문법이다. 해상에서의 인명 구조는 전시의 적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난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항해를 견딜 수 없는 보잘것없는 보트에 몸을 싣고 음식도 물도 없는 상황에서 애타게 도움을 청해도 버리고 가버리거나 오히려 해안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민간어선들이 구조해서 데려오면 받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구조한 사람들에게 불법밀입국을 도운 혐의로 처벌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탈출을 위해 브로커들에게 전 재산을 넘겨주고 길을 나선 이들을 영하의 산속이나 벗어날 수 없는 사막 가운데 버려두는 일 등이 난민에 관한 보고서들에는 넘쳐난다.

난민의 국제적 보호를 천명한 원칙들은 다음의 경우를 인권침해라 한다.

· 선박으로 도착하는 난민을 해변으로부터 내쫓아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경우
· 어느 곳에서도 비호를 구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국경선 지역에서 입국이 거절되는 경우
· 박해를 받을 공포가 있는 국적국 혹은 기타 국가로 강제송환되는 경우

앞서의 사례들을 보면 ‘사문화’된 기준이란 힐책을 받아도 대꾸할 말이 없다. ‘난민의 세기’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가진 20세기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로 인해 “인권의 종말”까지 거론되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인권선언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중심으로 한 인권개념에 기초해 있다. 즉 자유권은 국가에 의한 권리침해로부터의 자유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권은 국가에 의한 복리의 보장과 증진을 강조했고, 국제인권법의 의무당사자는 국가이다.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 관해서도 비호국이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제공하는 보호가 자국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보호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난민은 이 의무당사자와 관계가 없다. 어느 국가도 내 사람이라 하지 않는 사람, 내 사람이라 하는 국가로부터는 보호는커녕 공포와 박해밖에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난민이기 때문이다. 난민의 존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의 주체가 된다는 인권의 기본 설정을 비웃는다. 난민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난민은 인권의 주체로서 권리를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처분 대상이고, 정치조직이 아니라 인도주의 기관들의 수중에 있다. 기존의 ‘국가-국민-영토’의 구조 속에서 사고되는 인권 틀로는 난민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기존의 인권틀 내에서의 ‘비호 받을 권리’는 잘못된 접근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현재 인권의 큰 과제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