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67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기나긴 연대의 세월
인권운동은 연대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일대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인권침해로 인한 고난이라면 그 동전의 다른 면은 전 세계적인 인권운동의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제 앰네스티(AI)의 활동 기록을 살펴봤다.
- AI 사무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과 그의 아내 이희호를 포함한 양심수에 대한 석방과 민주적 권리의 회복을 촉구했다.(1976년 3월 10일 AI 보도자료)
-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명동성당 구국선언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대중에게 8년의 중형을 부과한 것에 항의한다.(1976년 8월 31일 AI 보도자료)
- 명동성당 구국선언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심각하게 아프다”.(1976년 11월 1일)
3월 7일 김대중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AI 1977년 인권보고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런 기록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인권의제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발표한 한 문건에 다음과 같이 요약돼 있다.
김대중은 1970년대의 대부분을 가택 연금이나 감옥에서 보냈다. AI가 김대중을 양심수로 처음 채택한 게 이 기간이었다. 그는 1976년 3월 유명한 명동성당 구국선언에 서명한 이유로 구속됐고, 1980년 5월 광주 학살 직전에 내란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1980년 9월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장남 김홍일과 형 김대현도 동시에 투옥됐고, 아내 이희호는 부분적인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AI와 다른 많은 인권 단체들은 이 기간 동안 정열적으로 김대중을 위해 캠페인을 했다. 1981년 국제단체들의 광범위한 국제적 항의와 캠페인이 있은 후 사형선고는 감형됐다. 1982년 그는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1985년 2월 그는 또다시 2년간의 미국망명에서 돌아온 날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 연금과 괴롭힘은 1986년 2월까지 계속됐다.
1993년 런던 방문 중에 김대중은 AI 피에르 싸네 사무총장에게 자신이 쓴 서예 작품을 선물 했는데, 거기 쓰인 네 글자 한자의 의미는 “모든 민족은 한 가족이다”였다.(AI Index: ASA 25/05/98)
단 존스와 김대중
서거 정국에서 한 인권활동가가 떠올랐다. 칠순을 바라보는 영국 앰네스티의 활동가 단 존스(Dan Jones)씨다. 그는 AI 회원으로서 1970년대부터 김대중, 김지하, 서준식․서승 형제 등 한국의 양심수들을 위한 캠페인을 했다. 직업적으로 AI에서 일하게 된 1987년 이후부터는 한국에도 자주 왔고 수많은 양심수 가족들과 인연을 맺고 최루탄 냄새와도 친해 졌으며 광주 망월동 묘지를 아끼는 사람이다. 광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은 일을 생애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긴다. 구명운동을 했던 양심수들이 석방되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그에게 구명 운동을 펼쳤던 이전 사형수의 대통령 당선이 어떤 의미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에피소드 하나. 단 존스씨는 인권교육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인권교육 방법을 훈련한다. 그는 그 여행길에 ‘대통령 김대중 영부인 이희호’라 쓰인 시계를 차고 다녔다. 가운데 봉황이 새겨진 시계였다. 그런데 어느 밀림 속에서 넘어져 시계가 박살났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인권활동을 같이 하며 10여년 넘는 인연을 맺어온 나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이미 퇴임한 대통령의 시계가 어디 남아있을까’ 궁리하다가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것이 호남 출신이 아니면서도 고인의 책이나 연설 비디오 등을 무지 좋아하는 아빠의 소장품들이었다. 아빠의 소장품 가운데서 그 시계를 발견한 나는 멎어있는 시계의 배터리를 갈아 넣어 런던에 보냈다. 작은 물건에 무지 기뻐할 할아버지 활동가를 떠올리며 즐거웠다. 그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허탈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글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연락을 취하다 들은 얘기다.
15년 전 나는 한국의 인권활동가인데 인권교육을 배우고 싶으나 돈도 없고 길도 없다는 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그는 흔쾌히 자기 집에서 9개월간 무전취식을 제공해줬다. 그를 따라 다니면서 인권교육을 귀동냥 하는데 정규시간의 활동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은 그의 과외활동이었다. 방글라데시 의류노동자들 집회, 이주노동자 동네 모임, 주말시장에서 하루 종일 꼬박 나 홀로 캠페인,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인권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모임 등 AI 정규 활동과 상관없이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에 바치는 삶이었다. 그의 집에는 나 말고도 전 세계에서 이런 저런 일로 런던을 찾는 인권활동가들을 위해 언제든지 잠자리와 부엌이 무료로 열려있었다. 인권은 연대라는 걸 깨닫고 실천하는 삶, 그것이 인권교육의 핵심이었다.
연대를 호소하는 오늘의 인권의제
서거정국이 끝나고 실천정국이 시작됐다. 10여 년 전의 인권의제를 오늘 다시 풀어 헤쳐 본다. 이 의제들은 1998년 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취임 전에 AI가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10여 개의 요구사항들은 오늘도 한결같은 현안들이다.
언론인, 노동자, 촛불시민의 대량연행․구속 재판을 비롯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한 구속자 등 멀어져갔던 양심수 의제는 다시 현안이 되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조직축소와 무자격자의 위원장 도둑 취임을 겪었고, 국가인권위원장이란 사람이 전 세계적인 캠페인의 대상이 되어온 국가보안법에 대해 망언을 했다.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로 인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시행 등을 위한 활동이나 인권교육의 강화는 저만큼 멀어졌다. 이로 인해 세계의 인권향상에 기여할 무대였던 세계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국의 기회를 차버렸을 뿐 아니라 등급의 강등마저 얘기되고 있다. 실질적 사형폐지국에 명단을 올린 지 얼마 안됐는데 다시 사형제의 도입이 호시탐탐 고개를 든다. 과거 권력기구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침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위원회의 활동들은 산적한 일을 남겨두고 통폐합되거나 중단되게 됐다. 비정규직 시대의 여성 인권의 참담함에 보태진 것은 여성부 축소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계속되는 조치의 ‘절약’이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국장이 있던 날 유가족이 또 경찰에게 폭행당했다. 기무사가 민간인 사찰에 나선 것을 비롯해 공안기구의 노골적인 맨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의 기본권인 결사의 권리와 파업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보복 속에서 몸과 정신이 신음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단속에 신음하고 있고 한국의 외국인, 국제결혼가정의 구성원들은 각종 차별로부터 안전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다.
오늘날의 인권의제를 퇴행 속에서가 아니라 인권향상을 위한 전진 속에서 마련하는 일, 연대와 보듬음을 통해 그 열쇠를 찾아내는 일이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인권 의제(국제 앰네스티 1998년 2월) 1997년 10월 AI 사무총장은 대선 후보자 모두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는 후보자들에게 당선된다면 인권 개혁 프로그램에 헌신할 것을 촉구했다. |
인권오름 제 167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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