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류은숙
며칠 전부터 핸드폰 기계가 먹통이 됐다. 꼬박 6년을 쓴 기계다. 전화를 무지 싫어하는 나는 생활필수품이란 핸드폰을 장만하지 않고 버텼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아빠가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없이 어찌 사냐’면서 억지로 만들어준 물건이었다. 지인들에게 악명 높은 통화습관으로 알려진, ‘응, 알았어, 끊어’외엔 별말 안하고, 번호 노출 안하고 너무 안 써서인지 한 기계로 6년을 버텼다. 기계가 다된 김에 아예 핸드폰을 없앨 것인가, 남들처럼 최신 폰을 장만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주변 사람들은 6년이나 한 기계로 버텼다는 걸 신기하게 여긴다. 뭐 그게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런데 말이다. 조심조심 쓴 기계도 닳아버리는 6년여 세월동안 한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외쳐온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구로디지털 산업단지에 자리 잡고 디지털위성방송기술의 선두주자임을 자랑해온 기륭전자를 상대로 6년여 다윗의 싸움을 펼쳐온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2005년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분노해서 노조를 만들고 처우개선을 요구했다가 200여명이 해고됐다. 그때 비정규직 파견노동자들이 받던 임금은 그해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1850원이었다. 밥벌이도 밥벌이지만 인간대접을 받아봐야겠다고 싸움에 나선 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요 며칠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의 극한을 시험하는 행동을 할 때만 잠깐 주목받을 뿐, 사람들의 시야밖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94일 씩이나 단식을 하기도 했고 서울광장의 16미터 무대 조명탑, 구로역 광장의 25미터 감시카메라(CCTV) 철탑 등에 오르기도 했다. 굶는 일이라면 진저리가 쳐질 텐데 얼마 전 다시 세 번째 단식을 시작했다. 협상이 또 깨졌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회사와 그걸 방치하는 정부에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들이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굶고 밟히고 협박받고 손해배상 두들겨 맞으며 6년여 한 자리에서 외친 요구는 억울하게 해고됐으니 ‘일자리를 돌려 달라’는 것이고,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로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 회사 다니면 그 회사 직원인 것으로 아는 일반인의 상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물러서면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견노동과 무노조, 무권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강자는 언제나 이기고 챙기며, 약자는 언제나 지고 잃는다는 패배감을 벗어날 수 없기에 계속 가야한다고 말한다.
국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노동 기준이라는 게 있다. 시장에서 강자들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노동규범이 위협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결코 이것만은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이걸 지켜야만 다른 노동기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취지로 세계정상들이 합의한 ‘핵심’ 기준이다. 여기에 속하는 항목은 달랑 네 가지다. 이걸 또 압축하여 두 개만 추려 보면, 그중 하나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가 고용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다. 세상의 노동인권기준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남은 단 두 가지 핵심기준도 못 지킨다면 노동자의 다른 권리상태는 볼 것도 없이 빤한 것이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는 이 ‘핵심’에 해당한다.
많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 핵심 노동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19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절규를 담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이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소수의 남성들이 장악해서 기업주에 순응하는 어용노조에 맞서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만든 노조를 지키려 싸웠다. 이에 노조를 파괴하려는 사측은 깡패들을 동원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세례까지 퍼붓고 공장 밖으로 내쳤다. 여공이라 불리던 그녀들은 부당함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고 동일방직 투쟁은 서슬 퍼런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선 대표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 호소문을 읽다보면 기륭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30여 년 전 선배들이 겪었던 일들과 겹쳐진다. 용역깡패들이 성적인 폭언과 폭력을 가하고 경찰은 폭력을 방관하고 사회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아 저런다는 회사 측의 선전과 정부의 외면까지 꼭 닮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닮은 게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이렇게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륭노동자의 말이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는 동일방직 노동자의 선언과 만난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냉장고가 커지고, 티브이가 평평해져 화려해질수록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일회용 휴지보다 못한 처지로, 김치마저 먹지 못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는 지적은 “100억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는 고발을 이어간다. 진짜 닮은 것은 이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 위해 싸운다.”며 “탄압 때문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륭 노동자들의 의지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다짐을 빼닮았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핸드폰이 존재의 근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디지털 세상이다. 인간과 세상의 소통을 돕는다는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태반이 비정규직이란다. 무소통과 무권리위에서 소통의 기쁨과 권리를 말하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인다. 핸드폰 없이 살아볼까 생각하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대신 이런 걸 이상하게 봐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기 몸을 불사른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기륭여성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해가 됐으면 정말 좋겠다.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겠다.” |
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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