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범용] <2007년 1월 2일 인권오름 제35호> 

1994년 안성에서 의료생협이 처음 생긴 이래, 인천평화(1996년), 안산(2000년), 원주(2002년), 서울(2002년), 대전(2002년), 전주(2004년), 울산예장(2004년), 함께걸음(2005년) 등 의료생협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의료생활협동조합, 즉 의료생협이란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협동하여 가족과 이웃의 의료와 건강, 생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협동조합’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의료생협은 아직까지 생소하다. 이에 전주에 있는 의료생협 무지개 한의원을 찾아 김수정 상임이사로부터 건강한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의료생협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어려움을 들었다.

 

의사 중심 진료는 안 된다

각 의료생협이 자기네들의 특징이 있는 거잖아요. 저희같은 경우는 처음에 ‘청년 한의사회’라고 학교 다닐 때 운동했던 한의사들이 중심이 되구요. 거기서 학생운동 내지는 시민운동, 이러한 사회개혁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만든 거거든요. 초기에 30명 정도가 모여 가지고 3년 정도 연구모임을 했어요. 3년 연구모임 끝에 2004년 3월에 창립총회를 해 시작을 했었거든요.

저희의 배경은 한의사들이다 보니까, 보건의료에 문제 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진료가 전부 의사 중심인 거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 진료는 원래 소비자 중심인 환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문제에서 시작을 한 거거든요. 그래서 보건의료라는 문제가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가야 된다. 이 두 개가 가장 큰 이유였거든요.

일상에 소비자들이 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의사에게 진료 받고, 그 속에서 내가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만성질환자 교실, 고혈압, 당뇨 이런 거, 체조교실 이런 것들에 참여하고,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교육 프로그램이 많으니까 교육도 받고. 요즘 만성질환들이 나 혼자 어떻게 잘 한다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생을 통해서 그것을 예방하고 증진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차피 건강의 문제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건강이나 생활, 나에게 주어진 이런 일상의 것들을 같이 모여서 협동이라는 방법으로 해결을 함으로써, 건강한 지역사회,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자, 이런 취지에서 처음에 만들었던 거거든요.

전주의료생협의 활동들

저희가 한의원이 하나가 있고, 제가 하는 것이 사무국 사업이거든요. 사무국에선 주로 보건예방 활동, 건강증진 활동, 또 지역사회 교육과 관련된 교육활동을 하거든요. 또 하나는 복지활동으로 지금 재가간병팀이라고 있거든요. 간호사가 6명 있구요, 재가간병팀이 13명이 있고, 사회복지사가 1명 있어요. 그래 20명이 모여 가지고 실제 재가서비스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거거든요. 의료생협이 했을 때의 장점은 이 사람들이 의료 셋팅도 있고 복지 셋팅도 있기 때문에, 보건의료와 복지를 한꺼번에 보고 한꺼번에 줄 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요.

지역사업에는 건강마을축제 이런 것들이 있거든요. 지역주민들 대상으로 건강과 관련된 건강복지 박람회 이런 것도 하거든요. 그런 박람회를 통해서 건강에 대한 운동들 그리고 걷기 대회도 하거든요. 그리고 동네 경로당을 돌아다니면서 어르신들과 같이 체조교실도 하거든요. 찾아가는 복지로 체조교실 하고, 또 문제가 있으신 분들에 대해서 교육하고. 이런 활동들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면서, 보건 의료에 있어 소비자가 항상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가 항상 주체가 되어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재발견하고, 이런 활동들을 계속 하고 있어요.

참여의 형태, 소위원회와 소모임

조합원 참여의 형태는 소위원회가 있거든요. 소위원회 같은 경우는 지금 네 개가 운영되고 있거든요. 교육소위원회라 그래서, 의료생협이나 생활협동조합 교육을 하는 형태가 하나 있고요. 경영이용위원회라 해가지고, 경영과 관련된 내지는 이용과 관련된 편의를 돕기 위한 이런 것도 하고요. 조직홍보소위원회가 있거든요. 말대로 조합원들에게 계속 연락하고 소식지 만들고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게 하나 있고요. 지금은 보건복지위원회가 있거든요. 여기서는 모여서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을 뭘 할 것인가 이런 테마들을 잡아가는 모임이에요. 각 위원회마다 5명에서 10명씩 있거든요.

또 하나는 소모임이 있어요. 소모임 같은 경우는 걷기나 요가, 등산, 사진, 이런 모임들이 있는데요, 요즘 많이 되는 것은 확실히 걷기가 많이 되거든요. 근데 지금 겨울이어서 겨울에는 좀 쉬었다가 봄 나면 다시 시작하는 이런 형태로, 주에 한두 번씩 모여 전주 천변 걷기, 이런 식으로 해 가요. 저희가 전에는 비만모임도 했었거든요. 이거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호응도는 상당히 좋았어요. 아침마다 모여 체조하고 자기 칼로리 계산해 보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지역주민의 참여의 폭은 항상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플 때만 가는 게 의료?

아플 때만 가는 게 의료거든요, 우리 인식은 항상. 그러기 때문에 의원이나 한의원을 이용하지 않으면 내가 조합원이어도 가기가 뻘쭘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참여의 폭을 찾지도 못하고, 여전히 그런 게 어려운 게 좀 있어요. 근데 의료생협이라는 게 알리기 애매한 부분이 많거든요. 사람들이 금방 이해가 안 오는. 협동조합 같은 데 농협은 아니고, 이게 의료라고 하니까 병원 수입을 내기 위한 왠지 영리를 추구하는 것 같고.

근데 조금 우리가 긴 호흡을 가지고 본다면, 이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의료의 필요성을 느끼는 거거든요, 내 생활에서 건강의 필요성이. 그러다 보면 우리나라도 곧 머지않아, 나이 먹어가면서 그 필요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내가 내 아파트 안에서 작은 소그룹 만들어서 운동도 하고 이런 형태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나도 한번 참여해 볼까!

조합원의 자격은 전북지역에 살면 되고요, 회비 10만원을 내야되지요, 저희가 나가서 무료 방문진료도 옛날에는 거의 주에 1번 정도 했었거든요, 지금은 월에 1-2번 정도 하는데요. 경로당마다 계속 돌면서 간호사들이 건강체크도 하고, 문제 있으신 분들은 가까운 병원 가시라고 종이도 써드리고 하니까, 그런 것들을 보고 ‘아! 나도 한번 참여해 볼까’ 그리고 비만 모임이나 이런 소모임들을 하는 거 보면은 ‘나도 한번 가볼까’ 이렇게 하시면서, 직접 오셔서 10만원 들고 가입하시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요즘 조합원 최근에 한 100명 정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이 취지에 동의해서 이런 사람들이고.

근데 사람들이 ‘조합원 혜택이 뭐야?’, 인제 조합원 되면 그런 거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근데 이거에서 막히는 거예요. 당장 줄 수 있는 혜택은 별로 없는 거잖아요. 내가 내 병원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소모임이나 이런 활동들도 자유롭고, 이런 것이 있다 이렇게 설명한다는데, 그것이 아직 전체적으로 공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경영 때문에 갖는 어려움

저희가 매월 적자가 한 400(만 원) 정도 되거든요. 폭이 꽤 크죠. 그래서 1년에 한 5천(만 원). 그냥 말로는 5천이고, 거의 한 7-8천(만 원)은 되는 거 같아요. 3년째 계속 그러고 있거든요. 초기 자본을 까먹고 있는 쪽이고, ‘꼭 의료생협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한의사들이 많이 출혈을 하는 편이예요.

의료생협마다 경영 때문에 갖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거든요. 근데 이것이 저는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있어요. 결의하고 오는 의사, 이것이 아닌 이상은 내 병원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거 아니면 우리 거면 사람이 태도가 달라지는 거 누구나 그러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그런 것에서 오는 협동조합의 한계가 아닌가 그런 고민도 해요, 요즘은. 왜냐면 ‘내’ 거 아니고 ‘우리’ 거기 때문에 조금 느슨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문제들이 약간의 딜레마에요.

의료생협, 그래도 해 볼만하구나!

그래도 의료라는 게 여전히 의사 권력으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있고,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이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고, 그 중에서 건강하기 위한 것으로서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나누는 건강, 이런 것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그나마 아직은 그 필요성에 의해서 스스로의 당위가 앞서는 것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변하는 건, 진짜 이건 어지간해서는 어려운 거잖아요. 똑같이 고혈압 가진 4-50대를 따로 모으거든요. 그럼, 이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몰랐던 거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아! 그렇지’ 내지는 ‘뭘 해야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이 운동을 하자고 얘기도 하고, 자기 건강을 위해 스스로들 뭔가를 찾아낼 때, 그럴 때 ‘아! 해볼만하구나. 이제 건강이 단순히 의사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약만 먹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할 지 스스로를 견인하는 방법을 배우는구나’ 이런 걸 느낄 때, 정말 해 볼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리/범용] <2007년 1월 2일 인권오름 제35호> 

[정리/범용] <2006년 11월 29일 인권오름 제31호> 

인천 부평구의 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우연찮은 계기로 마을도서실을 만들어 6년째 운영해 오고 있는 김영곤ㆍ김동애 부부. 한때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김영곤 씨가 ‘마을도서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보의 꿈은 무엇일까? 김동애 씨가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공부방을 진행하면서 얻은 대안교육의 경험은 무엇일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마을도서실을 찾아 이들 부부의 훈훈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영곤)

제가 노동운동을 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쯤 되니까 운동권들도 노동조합 하는 것하고 진보정당 의회로 가는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열외인 거예요. 민주노동당에 조직되어 있는 민주노총, 전농, 그밖에는 환경운동, 참여연대 같은 조직된 부분만 자기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 주장만 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찬밥인 거예요. ‘원래는 이렇게 사는 취지가 아닌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하다가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왔거든요.

처음 접해본 서민의 삶

여기가 한 15평짜리 되는 집들인데, 어떤 집은 가구주 남자의 소득이 한 60만 원쯤 되는데, 부인이 가내 부업하고 딸들이 벌어서 200만 원 정도 되는 데가 있고, 안 되는 데가 있고. 처음에 와 보니까 저녁 때가 됐는데도 애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거예요. 밤 10시가 되도록 애들이 떠들고 울고 그래도 안 불러들이는 거예요. 대개 초등학생 같으면, 날 어둑어둑해지면 들어와서, 이제 씻기고 숙제도 시키고 밥 먹이고 재우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처음 1998년도에 이사 왔는데요, 이해를 못했어요, 왜 그런가? 나중에 한 6개월 돼서 보니까, 엄마는 가내 부업을 하니까 애가 이걸 발로 차지 않으니까 좋은 거고, 아버지는 야간을 들어가거나 나갔거나 하니까 잠도 자야 되고 텔레비전도 봐야 되고, 애들이 밖에서 노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예요. 공부같은 거는, 뭐, 챙기는 사람도 있지만은……. 40가구인데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꽃 아줌마’와 마을도서실의 탄생

마침 보니까 여기에 창고가 있더라고요. 이게 아파트의 공유 건물인데, 실세가 개인적으로 이용하고 몇 사람 붙어가지고 돈도 빼먹고 이런 악의 공생관계를 하면서, (도서실을 만들자고) 제안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 그래서 애 엄마하고 저하고, 방치되어 있던 이 주변 화단을 3년 정도 파서 전부 꽃으로 가꿨어요. 애 엄마는 별명이 ‘꽃 아줌마’가 됐어요. 그래서 한 3년 정도 했는데, 하다 보니까 학교에서 애들이 평가를 받아오는데 관찰력이 뛰어나다 이렇게 평가를 받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치원 들어가기 전 애기 때부터 애들이 꽃을 보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계속 있는데, 색감을 익히니까 그런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오는 거예요.

이래 그럭저럭 지냈는데, 2001년 추석 전에, 이 뒤에도 재개발을 했어요. 재개발하면 쓰레기를 다 갖다 버리잖아요, 동네 거를. 동네 거를 다 버리면서 꽃도 다 잘라다 버린 거예요. 그러자 젊은 엄마들이 “자기네 어린애들 감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꽃을 왜 자르냐” 이래 가지고 반란이 일어난 거죠. (반란이) 일어나서 그 반장하고 관계된 사람들 권력을 뺐은 거예요. 그걸 깨버리고, 주민총회를 열어서 여기를 도서실로 개조하기로 결의를 한 거예요.

사람들이 나서 가지고 다 공사하고, 바닥도 다시 하고, 전기하는 사람 전기하고, 또 책상 같은 거는 보면서 다니는 사람이 버린 거 갖다 놓고, 또 책꽂이는 다 주워 오고, 그렇게 해서 도서실을 만들기로 했는데, 책을 구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이런 뜻이 있으니까 집에서 안 보는 책 좀 달라고 했죠.

도서실의 확산과 공동체의 복원

그거를 해서 여길 쭉 쌓는데, 몇 달 지나면 책이 쭉 쌓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 고향이 당진인데, 제가 이런(마을도서실) 얘기를 했더니, 시골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자기네들도 이걸 하겠대요. 그래서 거기 교회에다가, 이 책을 뚝 잘라 주면 한 2천 권 나와요, 거기다가 책하고 책꽂이하고 실어서, 시골에는 농경차량들 많으니까, 여기 와서 이걸 보고 수거해 가서 개막도 하고…….

그 다음에도 책이 계속 들어오는데, 한 2~3달에 한 번씩 책을 분양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전국적으로 한 30군데 넘어요, 다해서. 그 다음 단계에 나오는 것이 유기농 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 다음에 이걸 한 3개 내지 4개를 묶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당진에 3개, 아산에는 2군데, 홍성에 4군데, 전라남도에 6군데, 추풍령에 2군데, 상주에, 경기도에 몇 군데, 인천에, 강원도에…….

그룹별로 묶어줘서 자기네들끼리 연계해 가지고, 매개체는 도서실과 동네 애들 챙기는 거지만은, 내용적으로는 지역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또 유기농산물을 어떻게 할 건가. 유기농산물 같은 경우는 유기농산물로의 전환이 한두 해 되는 게 아니지만은, 도시민 생활협동조합과 연계해서 정보를 주고 또 팔 수 있다는 전망을 주고, 이렇게 지그재그로 양쪽을 짜면서 나가는 거죠.

헌 책을 받으니까, 책을 공급하는 사람, 여기(마을도서실)는 일정하게 터미널이죠, 모델이고, 그리고 받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쪽에서 흐름을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또 오기도 하고, 갈 때는 책과 정보로 가지만, 올 때는 좋은 농산물 생산해서 이쪽 도시로 공급해 주고, 이 사람들은 또 의무적으로 책임껏 소비해 주고……. 그러면 정부한테 기업한테 돈을 안 받아도 돼요. 책이 좀 헌 거긴 하지만은 정부의 지원도 안 받고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는 다른 측면까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작게 보면 도서실 운동이라고 해도 되는데요, 크게 보면은 정보화 사회에 맞는 두레의 현대화라고 볼 수 있죠.


(김동애)

교육적으로 봤을 때 가장 큰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 사회 자본이 지배하면서 모든 것을 그 구조 안에서 수탈해 가잖아요. 근데 이 경우에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도서실이) 채워지면 물 흐르듯 가야 된다, 그러니까 나눌 수가 있는 거죠. 한참 많이 들어올 때는 2~3달에 한 번씩 여기가 꽉 차요. 그러면 다른 데로 보내는데, 이게 교육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나누면서 배우는 가치

처음에는 아이들이 막 서운해서 아주머니들도 서운해하고. 이 책을 그냥 거저 주니까, 이게 내 거였는데, 내 소유였는데, 그게 통째로 확 비거든요. 여기가 훵하게 비어요. 그러면 저부터도 “아니, 어떻게 여기서 볼 거는 놔두고 보내야지, 그렇게 싹쓸이해서 보냈느냐”고 그러고…….

그랬는데 그게 참 신기할 정도로, 그렇게 보내고 나면 또 채워져요. 그게 교육적으로 굉장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결국 나눠 갖는다는 것을 그리고 물질이라는 게 큰 흐름 속에서 잠깐 내가 소유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사실 그게 일종의 철학적인 건데요, 우리 교육 딴 데서는 (이것을 배우는 게) 가능하지 않잖아요.

소외의 현장에서 시작된 글쓰기

일주일에 한 번씩 제가 글쓰기를 하거든요. 2002년부터 시작했어요. 이 지역 엄마들이 기껏해야 부업해서 30만 원 내지 50만 원 버는데, 학원비로 다 나가요. 그런데 애들은 (학원에) 그냥 갔다 오는 거예요. 거기서도 학교에서 주변부인 것처럼, 사교육을 받는 그 현장도 애들은 소외되고 있더라고요. 그 문제를 지켜보다가 ‘이래서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대학 강사 문제 가지고 싸움을 99년부터 시작했는데, 한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쪽으로는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면서 대안교육 현장을 돌아봤어요, 전국적으로. 근데 거기도 소위 말하는 소외 계층을 위하는 곳이 아니더라고요. 소외 계층이 갈 곳은 없는 거예요. 교육의 문제, 제도권 교육에서의 소외 문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의 소외 문제를 해결할 곳은 바로 이 곳이지, 그 산 속에 있는 대안학교가 아니겠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엄마들이 논술학원처럼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한테 부탁을 하면 “난 학원선생이 아니다. 난 그렇게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못한다” 거절을 해요.

개발 광풍에 휘청거린 공부방

몇 달 전에, 그 쪽 역부터 이 끝까지 개발한다고 바람을 누군가가 넣었어요. 그래 가지고 이 동네에서 몇 집이, 저희 학부형인 몇 집이 거기에 넘어간 거예요. 이 사람들의 논리는 뭐냐면, 이게 개발이 되면 이 집이 기껏해야 4천이나 5천밖에 못 받는데 1억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느냐, 그 계산을 하더라고요. 근데 사실은 삶의 터전을 뺐기는 거고, 어딘가로 가서 전세 세입자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자기 집 가지고 있다가. 근데 그거를 모르더라고요,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그러면서 이제 갈등을 생긴 거죠. 그 쪽에서 생각할 때는 몇 년을 두고 보면서 우리를 의지했는데, 정말 이해의 순간, 자기들이 볼 때는 돈을 왕창 벌 수 있는 순간에 우리가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돌아서 가지고, 글쓰기 반에 한두 집이 애들을 안 보내면서 완전히 저에게도 막 대하더라고요, 사람들이요. 살면서 그런 상실감이나 배신감은…….

제가 공들였던 아이들의 부모가 그야말로 싹 변해 가지고, 그렇게 사람이 다른 모습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공부방도 없애버리려고, 그러니까 이 공부방을 만든 사람들이 이 공부방을 없애버리려더라고요. 사실 이 아파트도 저희 집이 아니예요. 그래서 ‘아, 이제 떠날 때가 된 건가’ 이사 갈 생각도 하고, 공부방을 접어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다시 중심이자 원천으로

그러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동네 꼬마가 만화천자문 책을 들고 가더라고요. 보니까 이 쪽 옆에는 비닐봉지에다 엄마 심부름인지 뭔지를 들고 가더라고요. 얼마나 힘겹게 만화천자문을 보고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이 낑낑대면서 가던지, 아이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되잖아요. 제가 이사를 가든, 쫓겨나든, 아니면 여기서 살든 상관없이.

그래서 자전거에서 내려 가지고, “얘, 너 어디서 사니? 이거 네가 보는 책이니?” 그러니까 그렇대요. “재밌니?” 그러니까 재밌대요. “그러면 책이 많은 데 가르쳐 줄까?” 그랬더니 가르쳐 달래요. 그래서 여기를 가르쳐 줬어요. 그랬더니 어디서 형이 나타나더라고요. 형이 나타나면서 하는 얘기가 저희도 여기서 산대, 이 아파트에서. 그러면서 “이사 온 지 두어 달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올래?” 그랬더니 오겠대요. 그래 바로 오더라고요. 걔네들하고 또 한 집 아이하고 오면서 한두 주를 하니까 (다른 집 아이들도 나오더라고요).

지나면서 보니까 ‘뭘 그렇게 그게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자본이 그렇게 교묘하고 악랄하더라고요. 그리고 선거자금 때문에 이 동네 이런저런 사람들이 결탁했을 거예요, 앞으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몇 달 안 됐어요. 올해 사건이예요. 다시 자리 잡은 지 한 달 됐을 거예요. 지난 여름부터 한 서너 달 아주 힘들었어요.

부모들이 개발 때문에 갈등이 생기니까, 밤이면 큰 아이들이 나와서 공부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공부방은 없어져선 안된다라는 시위 같은 거죠. 그리고 어른들도 ‘그거(공부방 없애자는 생각)는 틀린 생각이야’, ‘이런(공부방같은) 중심을 지켜야 돼’, ‘잘 몰랐는데, 이것이 참 소중한 거다’ 확실하게 느끼게 된 사람이 있어요, 이번 일로. 그 전에는 자기는 뒤로 빼고 주로 술만 마시고 다녔는데, 그 후로는 중심을 잡고 그런 사람이 생긴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김영곤ㆍ김동애 부부는 버리는 책이 있다면 아무리 헌 것이라도 착불(인천 부평구 부개2동 131-3 한양아파트 103호)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고, 자기네 마을에서 도서실을 만들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2천권을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국비정규교수노조에서 강사문제 해결을 위해 ‘강사를 교원에 포함시키자’는 온라인(www.kipu.or.kr) 서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정리/범용] <2006년 11월 29일 인권오름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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