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91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
이것은 세네갈의 시인이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가 1960년대에 유엔에서 연설할 때 했던 말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경제‧사회적 권리의 어렴풋한 윤곽을 제시했다면, 아프리카의 소국 세네갈의 상고르 대통령이 말한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는 느낌이 팍 오는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래서 이 문장은 경제‧사회적 인권을 함축한 표현으로 널리 사랑받으며 인용돼왔다.
지구상의 남북문제나 지구화와 인권문제 등을 연구하는 전문 저술가인 존 매들리도 이 문장을 즐겨 인용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그가 80년대에 유엔 영국 위원회의 기획으로 쓴 경제‧사회적 권리의 팜플렛 제목이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이다. 이 팜플렛은 국제원조, 무역, 초국적기업 등과 경제‧사회적 인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장이 군수산업에 대한 것이다.
이십여 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변치 않는 현실, 아니 손에 잡힐 만큼 턱 앞에 가까이 온 문제들의 다급성 때문일 것이다. 핵 안보 정상회의가 열린 서울은 삼엄한 경계에 싸였다. 그런 도시의 한복판에서 정리해고 되어 장기실업상태이거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노동자들이 희망텐트를 치고 꽃샘추위를 여러 날 버텼다. 뭔가 변화가 있지 않으면 ‘외롭다’는 그들의 힘든 버팀은 계속될 것이다. 평화롭던 제주에서는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일 군사기지 건설 강행의 폭음이 멈추질 않고 있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란 콧노래가 ‘초록빛 바닷물에 화약과 케이슨을 던지네’란 탄식으로 바뀌었다. 핵 사고와 방사능 유출을 현실적인 공포로 느끼면서도 원전을 포기 못하는 이중성이 갈짓자(之) 걸음이다. 핵발전소에서 대도시로 전기를 나르기 위한 죽음의 송전탑이 농촌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다.
그런데 정치의 꽃이라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주류 정치권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남의 다리 긁는 소리들만 해대고 있다. 변덕스런 봄 날씨 만큼이나 내가 서 있는 땅의 공기가 불안하고 삶의 안정성은 시소를 탄다. 그래서인지 ‘모든 무기는 가난한 이들의 몫을 훔친 것’이라는 이 글의 메시지가 뒷덜미를 잡는다. 무기, 무기산업, 전쟁, 핵발전 등의 단어는 일상어가 아닌 듯 여겨지면서도 생활 구석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순간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소비하는데 중독돼있고, 늘 ‘모자란다’고 푸념하면서도 엉뚱한 곳에 자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원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이들의 몫을 도둑질한 것이다.
이 글을 읽다보니 ‘너도 같이 훔쳤지? 훔치는 걸 보고도 가만 있었지? 그냥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래?’라고 묻는 목소리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러구 살아!’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멘붕’(정신이 나간 상태)으로 살아갈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약탈로부터 지킬 것을 지켜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나뿐 아니라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살면서 곤란한 문제에 닥칠 때마다 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답을 애써 피해 다녔고 그래서 오랫동안 질척거리곤 했다. 도망치기를 그만두고 애초에 생각했던 답대로 결정을 하고나면 홀가분했던 경험이 많다. 요즘처럼 정신 사나운 때, 나 자신이나 내 주변 사람들이 도망치기를 멈추고, 당당한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지기를 시도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희망해본다. 무기를 먹거리와 바꿔서 근사한 아침밥상을 차려보는 꿈을 여럿이 같이 꾸고 싶다.
무기와 경제적 권리(존 매들리, 1982) “제작된 모든 총, 진수된 모든 군함, 발사된 로켓이 최종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굶주리고 먹지 못한 사람들, 춥고 헐벗은 사람들로부터 훔쳤다는 것이다.” |
인권오름 제 291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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