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 2005년 03월 08일 인권하루소식 제2764호>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서의 문구는 유럽에서 국왕과 귀족이라는 특권계급에 대한 복종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에 분명히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근대 인권선언의 기원을 마그나카르타나 권리청원 또는 권리장전이 아닌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인권선언에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의 문서들에서는 특권 신분의 이익을 국왕이 승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뒤의 문서들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인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권리의 원천을 국왕의 하사품이 아닌 자연법으로, 실정법의 정당성을 자연권이라는 추상적인 보편적 원리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이해하려 한 것이다.
독립선언서의 의의
사실 독립선언 직전까지도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을 '아메리카인'이 아니라 '영국인'으로 생각했다. 혁명의 지도자로 유명한 인사들은 영국왕정과의 분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 전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팽창은 영국과 식민지인간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태도를 키워가고 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부과하는 새로운 규제들(당밀세, 인지세, 숙영법, 수입세 등)에 대한 반항도 초기에는 영국의 신민으로서의 자유의 방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항은 사람들의 사상을 바꾸고 사상의 변화는 더 많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인권선언의 선구라고 인식된 1776년 6월 12일의 '버지니아권리장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독립선언서는 영국 헌법을 부정하고 그 테두리 외에 있는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다. 인간이 평등한 것은 자명한 진리이며,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천부의 권리이며 그 권리에 걸맞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 권리가 있다. '악행과 찬탈의 역사'였던 영국 식민주의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했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를 앞서는 시민혁명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고, 유럽에서의 시민혁명 전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
선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잔인한 학살, 남부의 노예착취, 북부 공업의 여성과 아동노동착취,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미국의 추악한 측면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할지라도, 미국의 독립전쟁과 인권선언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
그러나 이러한 의의에는 또한 그 역사적 한계가 내포돼 있다. '자유'와 '재산'을 동일시하는 근대의 인권선언이 갖는 일반적인 한계와 더불어 미국에는 '노예제도'가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제퍼슨 자신도 노예 소유주였다. 독립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내부에서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를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인류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헛되이 자랑하고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신성한 자연권을 짓밟음으로써 스스로 공언한 것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독립전쟁 발발 후 대륙회의는 아프리카와의 노예무역을 금지했지만 대농장주와 해운업자들의 반발로 독립선언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내용이 삽입될 수 없었고, 노예의 수입·매매가 계속되어 금지령은 무의미했다. 이후 합중국 헌법에서는 연방 하원의원 선거의 기초가 되는 주 인구를 산정함에 있어 자유인 이외의 흑인 노예를 자유인의 3/5가치로만 인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초기에는 상인이나 대농장주와 같은 상류층이 주도한 독립투쟁에 농민, 수공업 계급과 같은 대중의 역할이 커지자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한 대답은 '보편적인 참정권은 재산을 위태롭게 하고 빈민과 난봉꾼들로 하여금 부유한 사람들을 통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재산 자격으로 참정권을 제한했고, 공직취임에는 더 높은 재산자격이나 종교 자격을 요구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선언이 글자 그대로 정확하게 "백인이건 흑인이건", "부유하건 그렇지 않건", "미국인이건 이라크인이건"을 뜻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과 과제를 독립선언은 지고 있는 것이다.
천부인권에 던지는 물음
지식인들의 성명에서 대학생의 리포트, 재판부의 판결문, 국가인권위의 인권교재, 기자들의 고발기사에 이르기까지 고정 출연하면서 앞머리와 끝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천부인권"이다. 그리고 이 천부인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것이 미국 독립선언서이다.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천부의 권리의 부여받았다는 것보다 인권의 정당성에 대해 더 큰소리 칠만한 주장은 없어 보인다. 실정법을 어겨가며 인권을 부르짖은 사람이 처벌과 박해 속에서도 "나는 더 높고 더 가치 있는 하늘의 법을 따르오"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흔히 벅찬 감동을 자아내는 장면이 아니던가.
하지만 '천부인권'이 가진 편리성으로 인해 우리가 따져봐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천부인권'은 인간이 '당연하게' 인권을 갖는다고 말하는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인권을 억압해온 역사를 이해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권을 그저 '이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인권을 구현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천부인권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은 인류가 모든 역사 시대에서 당연히 인권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이다. 예를 들어 원시시대의 인류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인류에게 인신의 자유, 노동의 자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당연히 존재하고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는 인권이란 것을 당연히 갖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 사악한 권력에 의해 그것을 억압당하다가 근대시민혁명으로 인권을 구현하게 됐다고 설명하는 건 무책임한 설명이 아닐까.
또한 근대시민혁명으로 드러난 천부인권의 내용이 오늘날에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에 완전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권선언에서 가장 주요한 권리의 내용인 재산권은 대다수 사람의 인권 실현에 방해가 되거나 인권에 대한 허기짐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천부인권에 담겨있는 기독교라는 특정종교나 자연법이라는 특정 사상에 기대지 않고서는 인권을 얘기해서는 안되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천부인권의 주장이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서는 힘을 제공해왔다 할지라도 이런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인해 '과연 천부인권인가'라고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권이 어떠한 시대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탄생했으며 전개돼 왔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는 인권이 마냥 좋은 것이니까 금문자로 새겨진 고정불변의 현판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쟁에 의해 새로운 외연과 새로운 의미가 쟁취되는 인권의 역동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라 표현된 추상성 속에서 구체적 인간을 찾아내며, 인간의 부단한 실천활동에 의해 구상되고 실현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인권에 접근할 때 인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7.4) 인류의 역사에서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과의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정한 고려는 우리로 하여금 독립을 요청하는 여러 원인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류은숙] < 2005년 03월 08일 인권하루소식 제27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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