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02월 22일 인권하루소식 제2755호>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을 다루지 않으면서, 어떤 어떤 인권이 국제인권규약에 있다고 목록을 나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는 내게 무슨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서 무엇을 인권으로 존중받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 권리를 실현할 방법과 누가 책임져 줄 것인지를 알려달라"
풍부한 인권의 목록과 빈약한 실천을 타박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당연히 던질 것이다.
"기존의 인권체계가 기반하고 있는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접근법으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가, 인권의 실현을 저해하는 사회 부정의와 불공정한 국제질서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는가, 사회정의와 공정한 국제질서라는 구조적 조건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인권 논의에 포함시키라고 촉구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자니 또 하나의 인권 목록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것이 20세기 끝무렵에 등장한 '발전권'이다. 'development'를 개발 또는 발전으로 흔히 번역할 때, 경제개발(발전), 도시개발(발전) 등과 같이 이 용어가 갖는 성장지상주의적 인상을 쉽게 지울 수는 없겠지만,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인권을 명문화한 것이 '발전'이라 할 것이다. 발전권은 발전이 무엇과 거래돼서는 안되는 것인지를 규정하고, 발전의 주체이자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 및 국제질서를 만들 의무를 정하는 권리를 말한다.
1986년 유엔총회에서 채택(찬성 146, 반대 1(미국), 기권 8)된 '발전의 권리에 대한 선언'을 통해 이 개념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전문과 10개 조항으로 이뤄진 발전권 선언은 이전의 전통적 인권개념과 구분되는 여러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인권의 주체가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개인과 '모든 인민'으로 규정되어 처음으로 '복수화' 됐다는 점이다. 이건 개인의 발전이 공동체(집단, 집단으로서의 인민)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 발전을 '경제성장'과 동의어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경제·사회·문화·정치적'인 전 분야에 걸친 포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인간을 발전의 참여자인 동시에 수혜자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발전의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중심 주체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 실현의 핵심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참여'의 필수성이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과 인민의 의미 있는 참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넷째, 인권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 강조되고 있다. 발전권의 저해요인에 대해 선언은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주의와 인종차별, 식민주의, 외국의 지배와 점령, 침략, 국가주권과 국가적 통일·영토보존에 대한 외국의 간섭과 위협, 전쟁의 위협, 자결권 인정의 거부' 등을 명확히 짚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들은 이런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세계평화와 안보, 군비축소를 통해 확보된 자원이 발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상을 종합할 때 발전이라 함은 "포괄적인 경제적·사회적·문화적·정치적 과정으로서, 발전과 그로부터 산출되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의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참여의 기초 위에서 전 인구와 모든 개인들의 복지의 부단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갖고 일하고 또 일하자는 지배자의 교시로서 암송해 온 우리사회에서 '발전'은 초고속 경제성장을 의미할 뿐이었고, "정국의 안정은 경제발전의 대전제"였기에 사상·양심·표현의 자유 등은 지불이 연기된 어음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빈부격차의 심화, 행정엘리트에 대한 권력집중현상도 치유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돼왔다. 인권평가는 GNP나 수출과 무역의 성장 등의 지표에 종속돼왔다. 또한 재분배에 대한 요구는 경제성장을 통해 해결돼야 하기 때문에 또 다른 성장목표가 끊임없이 제시돼왔다.
이런 논리는 개발독재 국가들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특히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은 인권을 둘러싼 고전적 논쟁이다. 90년대 냉전이 끝나면서 몇몇 동아시아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성장과 유교적 전통 논리를 앞세우며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하면서 인권 논리의 보편성은 '서구적' 접근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자랑스런 문화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파괴한 서구의 인권사상이 자기 사회를 파괴했다며, 의무를 강조하는 전통적 가치를 십분 활용하려 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사회에서 개인이 갖는 역할의 정수이며, 그러한 의무가 인권을 이용하는 개인들의 시도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은 △경제성장이 인권보장보다 우선시 되어야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권리가 더 중요하고 △개별국가는 국제적 인권 기준을 각 나라의 역사, 문화, 정치제도, 그리고 경제발전의 수준에 따라 재해석해야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인권에 대해 간섭하는 행위는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규정한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자들도 "아프리카 문제에 대한 아프리카적 해결"이라는 구호 하에 '아시아적 가치'와 유사한 개념을 도입했다.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는 전통적 인권개념을 갖고 발전권에 반대해온 서구국가들과 국제법학자들에게 좋은 시빗거리가 됐다. 발전권 선언에서처럼 인권의 주체를 집단으로 인정하게 되면, 국가마저도 권리의 주체로 승인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책임의 주체가 모호해진다는 것. 독재정부가 발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에 완전노출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인권이 개인적 권리인가, 집단적 권리인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개인은 개인인 동시에 집단의 일부로서 인정돼야 한다는 관점이다. 초기 발전권의 논의가 국제적 차원에서 개도국의 집단적 권리로서 접근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발전의 열매가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억압과 인권침해를 동반한 발전과정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며, 국제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적 차원에서도 인권은 개인적·집단적 권리로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전권 실현의 장애 요소를 제거할 의무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유엔, 국제사회, 선진국, 국제경제기구 등에 의한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면서 발전권에 대해 '개인적 권리'의 전통성만을 주장하려는 것은 서구의 '도덕적 근시안'이라 비판받을 일이다.
발전권 선언 이후 유엔의 여러 문서에서 발전권은 '불가양의, 불가침의, 불가분의' 인권으로서 반복적으로 인정돼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불능의' 권리라고 여겨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발전권 선언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나 그것이 이어지고 있는 후속작업을 볼 때, 발전권 선언이 가진 위치는 어정쩡하기만 하다. '선언'도 물론 중요한 국제법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국제조약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 발전권 선언은 그 모호성으로 인해 그 안에 담긴 권리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인 의무를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모호함의 문제는 의무를 담당할 국가나 국제적 행위자의 시각에서 모호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구체적인 피해집단의 편에서 본다면 발전권의 의제와 실현 방법은 아주 구체적일 것이다.
발전의 권리에 대한 선언(1986) 1986.12.4 유엔총회 채택 총회는, |
[류은숙] <2005년 02월 22일 인권하루소식 제27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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