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6. 10. 22

작성자 :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피해자에게서 박탈된 삶(엄기호)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신지 한 달이 되었다.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사과하고 처벌받기는커녕 일은 점점 더 꼬여간다. 담당 주치의와 서울대병원이 보여주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와중에 괴담은 일부 네티즌들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퍼트리고 있다. 그들은 병실을 지키던 딸이 시댁 식구를 방문한 것을 휴양이라며 폐륜으로 몰아가고 있다. 연명치료에 대해서도 마치 유족들이 적극적으로방치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인간성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냐는 개탄이 이어지고 있다.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신 후 두 차례 장례식장을 방문해서 유족을 만났다. 그들을 보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상가집에서 의례적으로 입어야만 하는 까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언제까지 그 상복을 입어야만 하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유족들에게 허락된옷은 저 까만 옷밖에 없다. 그 분들이 저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기라도 하면 아마 득달같이 달라붙어 온갖 흉측한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 옷만 입고 있을 때 유족들을 정당성은 겨우 보장된다.(이후에 다시 백도라지님을 만났을 때 다행히상복을 벗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족들의 건강이 걱정이다.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서 밥을 제대로 챙겨먹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반경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몇 미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루 종일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해야한다. 혹 그들이 서울대병원을 떠나 그 앞의 창경궁에 산책이라도 가면 그 사진을 찍어 바로 또 아버지의 시신을 두고 고궁이 눈에 들어 오냐는 둥의 참담한 고발이 이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유족들에게 움직임이란 앉았다 일어섰다, 가끔 절을 하는 조문객을 상대로 맞절을 하는 것만 허락된다. 마음은 마음대로 다치고, 밥은 밥대로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움직임은 최소로 제한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이 건강할 수가 없다. 사람은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자고, 제대로 움직이고 활동해야 겨우타고난 대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겨우를 할 수 없는 게 지금 백남기 선생의 유족들이다.

 

이것은 발리를 갔다 왔다 어쩌고 하면서 폐륜 운운하는 저들이 유족들에게서 박탈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함과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빼앗겨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정희진 선생이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말을 했던 것처럼 피해자는 오로지 을 박탈당한 피해자로서만 말을 할 수 있다.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사회가 정한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피해자로서 말을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 그는 죽은 존재로서만 재현되고,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유족들에게서 박탈당한 것은 이다. 당신이 오늘 아침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걷고 눕고 떠들고 한 바로 그 말이다. 삶이란 변화하는 것이고 부딪치는 것이며 그래서 생동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기약 없이 까만 옷 하나만 입어야 하고, 반경 몇 미터 내외를 떠날 수도 없고, 만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 자체가 반복이며, 지어야하는 표정이 또 슬픔하나인 삶. 이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이 나라에서 피해자는 오로지 죽은 존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정희진 선생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피해자에게 가장 큰 가해는 피해자를 만든 바로 그 폭력뿐만이 아니다. 그를 살아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오로지 피해자로만 머무르게 하는 그 가해야말로 폭력이다. 지금 보수 세력이 폐륜운운하며 유족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해자인 유족들을 죽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잔인한 죽임의 폭력인 것이다. 그들은 이 폭력을 백남기 선생을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그리고 유족들을 그들이 만든 피해자의 이미지에 가둠으로써 반복하고 있다.

 

유족들이 웃을 수 있다는 것, 고궁을 거닐 수 있다는 것,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을 만나 떠들 수 있다는 것, 이 삶을 유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조문이라는 유족들과의 만남은 기뻐야 한다.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또 그 사람들 덕분에 유족들이 까만 유니폼을 잠시 벗고 고궁을 거닐고, 친구들을 만나고, 일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유족들을 남편/아버지에게서 잠시라도벗어나 자기의 삶을 돌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닌가?

작성일자 : 2016. 10. 11

작성자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죄하라

(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국가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

백남기 농민 사건은 공권력이 과잉 진압해 한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한 말이다.

 

물대포를 사용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한국의 경찰에 대한 총체적이고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한다.” “가해자는 처벌되어야 하고 백남기 농민의 가족은 적절한 배상을 받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 비통한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이나 키아이(Maina Kiai) 유엔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고 백남기 님의 죽음에 대해 표명한 입장이다. 여러 유엔 특별보고관들도 이런 입장표명에 연명했다.

 

안팎으로 자명하다. 고 백남기 님의 죽음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 이것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 행위라는 것, 따라서 국가는 공식적인 사죄로부터 시작하여 일련의 책임지는 사죄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사죄해야 하는가?

 

잘못에 대하여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근본 규범이다. 우리는 부당한 일에 대하여 일단 사죄를 기대한다.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사죄를 거부하거나 고자세로 버티려할 때 피해자의 참담함은 배가된다.

 

무산된 사죄는 개인 사이에서도 큰 상처이지만, 시민과 국가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국가가 사죄를 거부하는 건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잘 하겠다는 다짐은 다짐이 아닌 더 큰 비극을 부르는 전주곡일 뿐이다.

 

국가의 범죄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고 시민이 준 공권력을 제약 없이 휘두른 것이다. 공권력에 대한 제약은 시민의 인권을 지키고 증진하는 한에서만 그 힘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사죄를 거부하는 건 개인적 차원의 양심의 문제와 다르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제약을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직분과 행위에 따른 책임을 외면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범죄와 그에 대한 책임의 공개적인 인정을 뭉개고 넘어가는 걸 용납하면, 정치공동체가 딛고 선 발판이 흔들리고 무너지게 된다. 권력행위의 대가로서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공권력과의 동거는 불안공포불신에 휘둘리고 힘에 대한 굴복과 숭상에 쏠리게 될 것이다. 사망진단서 발급 하나에서도 나타나는 권력의 손때가 이점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인권의식은 김빠지고 각자의 안위에 목매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공동의 문제를 부각시켜 새 길을 모색하려는 행동들이 위축될 것이다. 국가범죄에 관한 행적을 권력과 법으로 은폐하는 게 관습이 될 것이다. 권력자의 생각과 선호에 자신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타인이 겪는 고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잔혹함이 지배할 것이다. 무책임한 국가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의식 없는 각자도생의 사회를 반길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서 자신의 잠재된 고통을 볼 줄 모르는 사회는 똑같은 일이 더 심각하게 재발되는 걸 내버려둘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철저하게 시민의 말을 죽이고 억압했다. 말을 죽이는 정부가 결국 사람까지 죽였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강남역, 구의역, 지진과 태풍, 군납품비리……. 이어진 죽음들 속에서 국가는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있었다. 책임져야 할 데는 나서지 않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에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의 말, 공동의 문제를 나눌 말을 부활시켜야 한다. 국가의 무책임, 무능력, 적반하장을 지적하는 말을 죽일 때 납득 못할 죽음의 고리는 이어질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새 고리를 꿰기 시작하는 첫 작업, 말을 살리고 대화가 가능해지는 첫 시작이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이다. 사죄는 말로써 책임의 1번지를 확인하고 책임의 고리를 확산하고 공유하는 정치의 첫 걸음이다.

 

공식적인 사죄는 시민의 일부를 악마화하는 정치에서 벗어나 책임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공권력은 시민을 갈라 치는데 몰두해왔다. 시민들의 집회시위를 과잉 통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어떤 시위는 권력이 직접 부추기고 심지어 돈으로까지 지원하면서, 어떤 시위는 위험시하고 참가자를 으로 대했다. 누구에 대한 기소는 신속하고 가혹하게 처리하고 누구에 대한 고발은 수사조차 안하거나 기소할 생각 없이 굼떴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복수의 가치와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서로의 존재를 관용으로 대하면서 이 아니라 서로 논쟁하고 경합하는 상대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이 정권의 권위와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시민을 또는 비인간으로 갈라서 분류하고 처우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한국의 근현대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비판적 세력 또는 이질적 집단을 적으로 상정한 공권력은 언제든지 심각한 인권침해를 일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죄는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행위이다. 국가의 공식적 사죄는 시민을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표시이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공권력과 공권력에 대한 인권의 제약이라는 원칙 위에 다시 정립하겠다는 행위여야 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비인간또는 내 편으로 갈라온 점을 반성하고, 보편적 인권과 국가 책임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공식적인 사죄이다. 사죄는 이런 기본적 관계를 국가가 존중하겠다는 시인이다. 그런 책임의 시인 속에서 공유할 공적세계를 확장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작동이다. 고인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며 연대와 책임의식으로 작동하는 정치를 말이다.

 

어떤 사죄여야 하는가?

 

사죄가 필요할 때, 입술로만 하는 사죄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회와 사죄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국가에 요구하는 사죄는 그런 내면에서의 사죄가 아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정치 행위에 따른 정치적 책임이고 불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따른 법적 책임이다. 이런 책임은 내키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참회할 맘이 없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성격의 책임이 아니다.

 

입술로만의 사죄라도, 일찌감치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물대포에 머리를 직사 당했을 때도, 긴 시간 사경을 헤맬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입술만의 사죄조차 없었다. 지나치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처럼 사죄가 지체될수록 사죄의 진정성은 흐려질 뿐이고 져야할 책임만 늘어갈 뿐이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매우 당당한 어조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하게 한 후에 말할 수 있다. 결과만 두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죄는커녕 비난도 감수 못하겠다는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데, 비난을 수용하는 것도 사죄의 일부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더 자기변호로 빠지는 사죄, 얼렁뚱땅 모면하려는 사죄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적절하고 유효한 사죄를 요구한다.

 

첫째, 국가의 사죄를 보증하는 명백한 국내외적 규범이 있다. 그런 규범에 따른 충실한 사죄를 요구한다. 국가가 가진 힘을 잘못 또는 과잉으로 휘둘러서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을 때는 당연히 사죄해야 한다. 이것은 백남기대책위원회 또는 유승민 의원의 요구이기 이전에 보편적인 인권규범의 침해이다. 유엔의 인권피해자권리장전을 포함한 국제인권규범은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를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순한 유감이나 후회의 표시가 아닌 사죄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수용하겠다는 약속이다.

둘째, 사죄는 사죄의 주체상황이유절차를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사죄는 유효한 후속행위의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즉 배상과 재발방지 조치를 포함해야 한다.

 

사죄 받을 권리사죄하라는 명령

 

공식적인 사죄는 피해에 대한 인정’ ‘진실을 알 권리’ ‘정의실현에 대한 권리’ ‘피해 배상에 대한 권리’ ‘재발방지와 제도 개혁에 대한 권리의 연쇄작용으로 이뤄진다. 이 연쇄과정 전반에서 국가는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당연히 인권을 가진다. 정부가 가하거나 부추기는 모욕과 강압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갖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유엔의 인권피해자권리장전에는 피해자의 만족(satisfaction)’이란 항목이 있다. 만족에 포함되는 게 책임의 인정공식적 사죄이다. 만족이란 피해자가 흡족할만한 사죄를 의미한다. 가해자의 자기변명이나 상황의 모면 또는 충실한 책임 이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하는 사죄를 사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죄 받을 권리사죄하라는 명령문과 같다. ‘권리라는 건 그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죄 받을 권리가 권리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진상규명배상재발방지 보장 등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걸 포함한다. 나아가 사죄 받을 권리는 직접적인 피해자의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재발방지조치는 피해자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원들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애도는 거듭된 사죄로 표시된다

 

공식적인 사죄는 일회성이 아니라 거듭돼야 한다. 우리는 달력에서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만 보는 게 아니다. 어떤 사건과 의미가 되돌아옴을 거듭 느낀다. 사죄는 한번으로 해치우는 게 아니라 새기고 거듭돼야 한다. 또한 국가의 공식적 사죄 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죽음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공유하는 것도 거듭된 사죄의 중요축이다. 사죄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책임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이고 그런 책임의식이야말로 재발방지의 기본 장치다.

작성일자 : 2016. 10. 2

작성자 :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존엄과 안전(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엄기호)

 

백남기 농민이 운명하셨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죽음과 맞서신지 316일 만에 끝내 숨을 거두셨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함께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서 삶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죽음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메르스는 질병 앞에서 국가의 방역망이 어떻게 뚫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질병으로부터의 안전. 이것은 근대국가가 위생과 보건을 도입하면서 가장 먼저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위협이다. 오래된위협이 다시 귀환했지만 국가는 철저히 무능했다.

강남역. 강남역 사건과 그 이후에 터져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안전은 짓밟히고 있었다는 걸 증언했다. 이 사건이 우연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위협이라는 걸 말이다. 가정에서부터 길거리, 학교나 직장, 그 어디에서도 여성을 향한 폭력이 존재한다. 안전한 곳은 없다.

구의역 사건. 구의역 사건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죽음에 닿아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근대 국가가 보장해야하는 안전의 또 다른 영역이 바로 경제다.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항시적으로 해고의 위협, 해고로 인한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삶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또한 현장에서의 사고를 예방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국가다. 그러나 이런 안전은 없다는 걸 구의역 사건은 우리에게 여실히 알려줬다.

경주의 지진. 물론 자연재해는 근대국가가 완전히 제거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예방조치들을 한다. 또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대처한다. 그러나 경주의 지진은 이 나라가 자연재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력하며, 나아가 무모한지를 보여줬다. 무지가 바로 무모함을 낳으며 그 무모함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4년간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국가가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는 생명을 지키는데, 무관심하고,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모했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이에 더하여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폭력을 휘두르는 데는 매우 유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 이 죽음의 권력 앞에서 우리는 이 나라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안전과 더불어 존엄이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존엄은 생명 하나하나가 대체되지 않는 절대적인 고유성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한 생명이 지는 것은 곧 한 우주가 사라지는 일이다. 인간 존엄의 근거는 그가 누구든, 그가 어떻게 살았건 상관없이 그의 절대적 고유성을 무조건적으로 가정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정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는커녕 가장 모독 받는 존재가 된다. 서구가 나치의 경험 이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인권과 인도주의와 관련된 법적/제도적 장치를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 노력에 의해서 가까스로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 존엄에 대한 보호가 그저 생명의 존엄을 넘어 인간의 존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생물학적 위계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있다고 간주되는 동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인간은 한자가 말하는바 그대로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로서 삶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엄이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나눈 대로 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의미에서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 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그의 말을 묵살하고, 그를 파괴하는 것이야 말로 그의 사이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이러하다. 그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말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존엄에 입각한 안전이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다. 그렇지 않고 그저 생물학적 생명이나 보호하는 사회에는 존엄성은 없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그저 목숨이나 구걸하고 사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혹자들은 그가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도 불법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즉 그의 행위 자체가 그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고, 안전을 저버린 것은 그 자신이기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전하고자 하였으면 시위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며,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저들이 이야기하는 안전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저들이 말하는 안전이란 바로 생물학적 생명에 대한 안전이다. 그 안전을 위해 말하는 존재로서, ‘사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존엄을 버리라는 말이 된다. 그 결과 나오는 국가의 명령이 이것이다. 안전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위험하며, 그 위험은 가만히 있지 않은 당신이 자초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안전과 존엄을 대치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존엄 없는 생명, 비루한 삶이냐 죽음이냐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엄의 관점에서 이것은 삶과 죽음의 선택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과 죽음의 선택이다. 이미 미국의 도망노예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간파한 것처럼 말할 수 없고, 공동세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노예는 1) 주인 밑에서의 비루한 노예의 2) 도망을 가다 총에 맞는 죽음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1) 주인 밑에서 비루하게 살다 주인의 변덕에 의해 채찍에 의해 맞아 죽는 죽음2) 삶을 위해 도망치다 총에 맞는 죽음두 죽음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비루할지언정 삶은 그래도 삶이 아니냐는 말이 사실은 죽음이라는 걸 간파했다.

저들이 말하는 비루한 삶이라는 안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안전은 안전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그러나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죽음이다.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의견과 활동이 없다고 해도 비루할지언정 삶은 보장되리란 기대를 배신한 것이 바로, 메르스요, 강남역이요, 구의역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죽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 아닌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라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기 위해 시위를 피해 다니는 삶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 게 안전해야 한다. 그런 시위 자체가 우리 삶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과 무관심, 그리고 무모함을 막기 위한 것이면 더욱 그렇다. 이런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더욱 무관심해지고 무능하며, 무모해지기 때문이다. 이 위험을 막기 위한 활동이 안전하지 못할 때 국가는 흉기가 되고 삶은 파괴된다.

우리는 안전이 마치 침묵의 대가인 것처럼 말하는 권력에 맞서야 한다. 대신, 말하는 것이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안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요구해야하는 것은 '사회'이지 안전을 지켜내는 각자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요구하는 활동이 안전한 사회가 안전한 사회다. 존엄과 맞바꾼 안전이 아니라 존엄한 안전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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