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63 호  [기사입력] 2011년 08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얼마 전 취임한 검찰총장(한상대)의 취임사가 화제가 됐다.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며 ‘전쟁’, ‘응징’, ‘제거’, ‘싸움’ 등 군대 전투 교본에 쓰일 법한 단어를 엄청 써댔기 때문이다. 병역면제,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 투기 등 현 정부 공직자들의 필수스펙을 갖췄다는 것 따위에는 더 이상 눈길도 가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공포가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취임사는 나를 20여 년 전의 검사 책상 앞으로 다시 불러갔다.

대학 4학년 때였다. 보안과 소속 경찰들이 대학가 복사집 휴지통을 뒤져 찾아낸 ‘위험’한 폐지를 증거물로, 복사집 앞에서 경찰차도 아닌 택시로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낚아챘다. 소위 위험한 폐지 속에 담긴 생각들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혐의였다. 그 폐지에는 학교 주변의 지나친 상업화와 외래화(소위 미국화)에 대한 걱정 등을 친구들과 토론하여 적은 글이 담겨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행사실은 전혀 통고되지 않았다. 한 신문에서 북한을 추종한 대학생이 잡혔다고 1면 하단에서 보도했다.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지인들은 내 연행사실을 알았다. 경찰의 심문에 따졌다. 내가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북한에서도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하면 북한을 추종하는 거냐고.

삼일 후에 불구속으로 풀려났으나 사건 종결을 위해 검사 앞으로 불려가야 했다. 반말을 찍찍 던지며 허튼짓 하지 말라고 호통 치던 그의 책상 유리에는 전국 공안검사 조직도가 반듯이 끼어있었다. 검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 조직도를 계속 노려봤다. 저 조직도에 있는 엄청난 수의 공무원들이 매일 나에게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검사 책상 옆 벽에는 공안수배자 사진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거기 담긴 여러 대학교 학생회장들의 얼굴들이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군사독재 시절에나 통했을 공포 취임사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문민을 지나 소위 CEO(씨이오) 대통령이 있는 사회에서 왜 필요한 것일까?

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게 몇 년 전 은행에서 경찰이 내 신상정보를 요구해 가져갔다는 연락이 왔다. 찾아서 따져보니 국정원 어느 분실에서 와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개적인 인권활동을 하는 나에 대해 수사할 일이 없었다. 수사를 하려면 명확한 혐의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고소, 고발을 했으나 검찰에선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판에서도 나에게 왜 내사를 받았는지를 증명하라 했다. 그런 일로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오가던 때인지라 소위 검찰청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검찰청입니다’란 말에 메시지를 확인하려면 9번을 누르라는 지시를 따랐다가 거금의 전화요금이 떨어졌다.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으나 아무런 결과 통보도 받지 못했다. 그런 명백한 범죄에 대해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법조문에도 나와 있지 않을 ‘종북좌익’이라는 범죄를 굳이 만들어 ‘전쟁’까지 하려드는 것인지, 권위를 위해 숫자를 늘리지 않아 엄청난 과로 속에서 일하는 직군이라는데 법조문에 없는 범죄까지 만들어 굳이 일을 더 많이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일전에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검사의 역할에 관한 유엔 가이드라인’을 소개한 일이 있다. 오늘은, 유엔 가이드라인보다는 동급의 스펙을 갖춘 같은 검사들의 얘기라면 좀 통할까 하여 호주 검찰청장을 지내고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국제검사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rosecutors)의 대표를 했던 ‘검사’의 얘기를 끌어왔다. 제목이 ‘인권과 검사’이다.

이글에서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인용한 부분은 내게 이렇게 읽혔다.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정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아이들에게 보편적 급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종복좌익세력’,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수해대책을 비판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대량신상정보유출에 주민번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재벌을 비판하고 노동자 옹호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이다.
자유로운 생각은 범죄,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범죄, 일인시위도 범죄, 두 명 이상 모여도 범죄, 불경한 트위터 계정을 갖는 것도 범죄, 직업이 없는 것은 범죄, 비정규직인 것은 범죄, 일하다 해고되는 것은 범죄, 가난한데 아픈 것은 범죄, 가난한데 대학 다니는 것은 범죄, 반값 등록금 요구하는 것은 범죄”

남아공 법무장관의 글은 또 이렇게 읽혔다.

“검사들은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 체제의 일환이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종북좌익세력의 딱지를 붙여 정부비판을 단속하는 체제의 사수자이다. 공정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기득권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장애물로 간주된다. 그래서 국제인권법이 불법화한 법적 관행들이 규범이 됐고 많은 시민들을 협박하고 처벌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공포 취임사’가 아니라 인권옹호를 다짐하는 취임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것도 ‘종북좌익세력’의 꿈인가.

인권과 검사(니콜라스 코디리, 2001)

“형법은 그 나라 최상의 변호사들을 매혹해야 한다. 어떤 법 분야도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형법은 공정한 재판과 법의 지배가 전국의 법정에서 매일 시험받는 곳이다. 그리고 나쁜 짓을 저지른 자의 공포가 기본적 인권에 대한 존중과 만나는 곳이다.”(커비 제이, 호주 고등법원)

호주 연방 검찰청의 20차 연례 회의에서 2000년 6월 호주 법무장관 모리스 로젠버그는 말했다. “검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 의무는 견고한 전문적 판단과 법률적 유능함, 상당량의 실생활 경험과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일할 능력을 요구한다. 모두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든 사건에서 정답을 보장할 비결은 전혀 없다. 많은 사건에서 누가 합리적인 사람인지는 다를 수 있다. 확실성과 절대적 진실을 기대하는 검사는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검사 재량의 행사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문제가 많고 복잡할수록 실수할 여지가 커지기 마련이다.”

로젠버그는 또한 신중하고 공정하게 행동할 검사의 의무와 공익이 요구하는 바를 고려할 것을 언급했다. … 적어도 지난 50년 동안 검사들에게 점차적으로 요구된 바는 검사의 어려운 의무의 행사를 형사 사법 절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권보호와 준수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그것을 요구한다. 1966년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그것을 상세화하고 있다. 국제검사협회의 기준은 그것에 즉각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강제하고 있다. 1993년 세계인권대회의 비엔나 선언과 행동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주목했다.

“법 집행과 검찰기관 그리고 특히 독립적인 법관과 법률 전문직을 포함한 사법운영은 국제인권규범에 담긴 기준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인권의 완전하고 비차별적인 실현에 필수적이며 민주적 절차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불가결하다.”


다음의 명제들은 또 다른 다양한 성명에서 나온 것들이다.
1. 형사법을 이행하는 검사들은 아주 공정하게 해야 한다. 형사적 기소 과정의 궁극적 목적은 공정한 재판이며 사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피고인에게 공정한 것이다. 공정함은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 법률 체계 전반에서 성취돼야 하는 것이다.
2. 검사들은 형법제도에서의 위치와 역할 때문에 인권을 보호하는 데 특히 강력한 위치에 있다. 보통법 체제에서는 경찰에 대한 감독 역할이 거의 없지만, 검사들은 불법적 또는 부적절하게 획득한 증거 사용을 다루는 태도에서나 보강 수사에 대한 경찰 조언에서 재판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륙법 체제에서는 검사들이 행사하는 준사법적 권한으로 피의자(그리고 관련자 누구나)의 권리가 충분히 보호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도록 착수 때부터 수사를 감독할 수 있다.

… 2000년 국제검사협회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연례회의를 가졌다. 남아공은 인권을 이해하는 나라이다. 아주 오랫동안 시민 대다수에게 권리를 박탈해온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탈취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통 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구 남아공에 대해 썼다.

“아프리카 아동은 ‘아프리카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인 전용’ 버스로 집에 가고 ‘아프리카인 전용’ 지역에서 살고, 설령 학교에 갈 수 있다면 ‘아프리카인 전용’ 학교에 다닌다. 그 아이가 자라면 ‘아프리카인 전용’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아프리카인 전용’ 마을에서 집을 빌리고, ‘아프리카인 전용’ 기차를 타며 낮이건 밤이건 언제고 멈춰 세워지고 신분카드를 제시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게 없으면 체포되고 감옥에 던져질 수 있다.
‘백인 전용’ 문으로 드나드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버스를 타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식수대를 사용하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해변에 들어가는 것은 범죄, 밤 11시 이후 거리에 있는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에 틀린 서명을 한 것은 범죄, 실업자인 것은 범죄, 잘못된 곳에 고용된 것은 범죄, 특정 장소에 사는 것은 범죄, 살 곳이 없는 것도 범죄였다.”

남아공의 법무장관인 마두나 박사는 우리의 회의를 위해 이렇게 썼다.

“법원 또한 억압의 장치로 사용됐다. 검사들은 백인의 특권과 세뇌를 유지하는 사법 체제의 일환이었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차별정책) 체제의 사수자였다. 공정한 재판의 이상들, 침묵할 권리, 법률적 변호, 피고인이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서들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백인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장애물로 간주됐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불법화된 법적 관행들이 재판의 규범이 됐고 많은 피고인들이 유죄가 되고 심지어 사형당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 남아공은 잘못될 수 있는 것의 극단적 사례이며, 여기에 다른 나라들과 미래의 모든 곳에 대한 교훈이 있다. 그때 그런 식으로 인권을 바라봤던 검사들과 다른 공무원들은 틀림없이 지금은 자신들의 인권이 충분히 존중되고 법의 지배에 따라 다뤄지기를 원할 것이다. …

틀림없이 검사직을 수행하는 데 인권을 방해물로 생각하는 검사들이 여전히 있다. … 아무리 편리할지라도 “이기려는” 검사의 의도는 직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
- 제한 없이 범죄를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도한다. 어디나 갈 수 있고 무엇이건 수색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죄다 감시 장치와 전화 도청으로 감시하고 듣고 누구나 심문하고 구금하고 재산을 압수한다.
- 마음대로 용의자를 구금하고 보석(또는 조건부 석방)을 거부한다.
- 제한 없이 용의자를 심문하고 대답을 요구한다.
- 법률 자문에 대한 용의자의 접근을 방해한다.
-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밑을 파고 파괴한다. 소위 “문제 야기자”들을 표적삼고 제거하려 한다. …
- 진행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정치적 압력에 굴종한다. …
- 피고인에 대하여 재판에 앞서 해로운 선전을 유포하도록 언론을 선동한다. …
- 피고인의 묵비에서 유죄를 추정한다. …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 우린 뭘 얻을 것인가? 구 남아공이나 과거의 독재로 악명 있는 특정 체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서 그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처벌받지 않고 작동하는 것을 무엇으로 방지할 것인가? 인권이다. 즉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9조(신체의 자유와 안전), 10조(구금된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 14조(재판의 평등/무죄추정의 원칙 등), 17조(프라이버시를 존중받을 권리), 19조(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등의 조항들에 반영돼 있는 권리들이다. 이런 권리들은 형사법 체제가 침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며 모든 나라의 국내법에 반영돼야만 한다. 인권이 없는 법과 질서를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법과 질서 없이 인권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권 조항은 형사 재판이 수행되는 방식에 실제적인 효력을 갖는다. 인권의 원칙들은 실체적인 절차법으로 효력을 발해야만 하고, 검사들의 의지로 그 원칙들이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소망은 내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인권은 추운 밤 우리가 끌어당겨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덮을 수 있는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것이 아니다. 인권은 소수 좌경 세력만이 준수하는 그런 게 아니다. 인권은 형사법 체제나 법 실천에 선택적으로 추가하는 부속품(그러고 싶을 때만 끼워 넣는)이 아니다.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다. 검사들은 인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인권은 우리에게도 속한 것이며 때때로 검사들도 인권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

결론적으로 다시 남아공으로 되돌아가본다. 1964년 6월 12일, 넬슨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판사(Quartus de Wet)는 “두려움과 선호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남아공의 법과 관습에 따라 법을 집행하겠다”는 사법 선서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만델라에 대한 종신형 선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법원의 기능은 다른 나라들 법원의 기능처럼 법과 명령을 집행하고 국가가 그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법률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정의는 어찌됐나? 민주주의에서 법률이란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에 따라 만들어져야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권력집단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법의 지배는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다. 검사들 또한 인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권오름 제 263 호  [기사입력] 2011년 08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99 호  [기사입력] 2010년 04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검사-스폰서 관계에 대한 언론보도로 벌집 쑤신 듯하다. ‘막장드라마보다 더 재미있었다’는 관람평(?)부터, ‘XX들’이란 원색적인 욕까지 표현들도 다양하다. 인권 침해와 후퇴에 기여한 그간 정치 검찰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계속돼왔는데 기름 부은 격이다.

이 와중에 내겐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4월 15일에 돌아가신 ‘왕언니’의 얼굴이다. ‘왕언니’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오랜 기간 자원 활동을 했던 권태평 어머니가 스스로 지은 별명이다. 노인취급 하지 말고 ‘왕언니’라 불러 달라 하셨다. ‘왕언니’는 정치검찰이 조작한 대표적 사건인 소위 ‘유서대필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 씨의 어머니이다. 아들이 왜 그런 누명을 써야 했는지 알고 싶고, 아들이 한다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고 싶다고 늦깍이 공부를 시작하고 인권단체 활동을 한 어머니셨다.

1991년 민주주의가 질식하는 속에서 한 대학생이 경찰에게 대낮에 맞아죽었다. 전국적으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났고, 많은 젊은이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이때 궁지에 몰린 정권이 만들어낸 사건이 ‘유서대필’이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분신한 사람의 유서를 누군가 대신 써주고 그에게 죽으라고 시켰다는 사건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쓴 것은 바로 검찰이었다. 당시 검찰은 분신한 사람이 대학을 안 나왔다는 이유로, ‘대학도 안 나온 자가 이런 유서를 쓸 리 없다’는 학력차별 발언도 서슴지 않았고, 범인으로 지목한 강기훈 씨에 대해서도 ‘이념을 위해서라면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자’라는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강기훈 씨는 3년여 꼬박 옥살이를 했다.

세월이 흘러, 과거 조작된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2009년 9월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그럼, 이 사건의 시나리오를 쓰고 뛰어난 열연을 펼쳤던 그 검사들은 어떻게 됐을까? 관련자들은 대법관도 지내고, 고검장도 지내고 지검장도 지내며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현직을 떠나서도 안락하게 잘 살고들 있다고 한다.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 소식에 “문제없이 수사했다”, “옛날 재판 결과를 이제 와서 얘기하면, 불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재심을 청구해 법적 안정성을 크게 해칠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디 유서대필 사건뿐이랴. 사형까지 당했던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나 고문수사로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가 됐던 많은 이들이 검찰의 오욕의 역사 속에 남아있다. 그럼 지금은? 인터넷 게시판에 글 하나 썼다가, 패러디 한번 했다가, 불매운동 했다가, 집회에 나갔다가 검찰의 추궁을 받는 시민들이 많다. 교사들이 교원노조에 가입했다고 학교를 대거 압수수색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검사들도 많다. 그런데 거대 기업이나 고위 공무원에 대해서 검찰이 그렇게 했다는 일은 듣지 못했다.

인권운동에서는 요즘 감옥에 있거나 법원 또는 검찰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철거민과 같이 싸웠거나, 집회․시위를 했거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는 이유 등으로 말이다. 하나같이 검사한테 쥐새끼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삽자루로 내리쳐서 쥐를 잡는 모양새로 추궁받기 때문이다.

그런 기세로 좀 다른 걸 수사해 줬으면 좋겠다. 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재 공장을 파헤쳐보시라.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비자금 조성에 열중하는 기업구조를 파헤쳐보시라. 정경유착으로 벌집이 된 국토개발사업구조를 파헤쳐보시라. 사설학원의 돈을 받고 교육정책을 펼치는 고위 교육공무원들을 찾아보시라. 막걸리를 말로 받아주고, 소주를 궤짝 채 안기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자발적으로 대가없이 향응을 제공할 시민이 넘쳐날 것이다.

오늘 읽어볼 문헌은 ‘범죄예방과 범죄자 처우에 관한 제 8차 유엔 회의’(the Eighth United Nations Congress on the Prevention of Crime and the Treatment of Offenders)에서 채택한 ‘검사의 역할에 관한 가이드라인’이다. 별다르게 뾰족한 내용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그간 검찰에게 요구해 온 ‘상식’과 다를 바 없다. 정의구현까지는 못되더라도 상식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게 그간 검찰에 대한 초라한 요구사항이었다.

부패는 범죄일 뿐 아니라 곧 인권침해이다. 그런데 부패방지와 부패수사는커녕 자기 도끼 자루가 썩어 빠지고 있는 걸 무시하고 있다. 검사들이 ‘폭탄주’를 좋아한다는 취향에 대해선 내 알 바 아니다. 자기 돈 주고 마신다면 말이다. 검사들이 연애도 하고 사랑도 많이 하는 건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인간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물건처럼 사고팔고 상납 받는 게 아니라는 것, 그렇게 하는 건 성범죄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도마에 올려야 할 것은 정치적 필요를 위해 사건을 만들어내고 몰아가는 정치검찰의 행태가 아닐까 한다.

검사의 역할에 관한 유엔 가이드라인(Guidelines on the Role of Prosecutors, 범죄예방과 범죄자 처우에 관한 제 8차 유엔 회의에서 채택, 1990년)


자격, 선발 및 훈련
2. (b) 검사들은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자기 직무의 이상과 윤리적 의무, 헌법 및 법령의 용의자와 피해자의 권리 보호, 국내법과 국제법으로 인정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해 인식해야만 한다.

지위 및 복무 조건
3. 검사들은 법무부의 중요한 행위자로서, 언제나 그 직무의 명예와 존엄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형사 절차에서의 역할
12. 검사들은 법에 따라 자신들의 의무를 공정하며 일관되며 신속하게 수행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인권을 지지하며, 그럼으로써 사법 정의 체제의 정당 절차와 순조로운 기능의 보장에 기여해야만 한다.

13. 의무 수행에 있어서, 검사들은 다음을 해야만 한다:
(a) 자신의 직무를 공정하게 수행하며 모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성적 차별 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차별도 피해야 한다.
(b) 객관적으로 행동하고, 용의자와 피해자의 처지를 적절히 고려하며, 용의자의 이익 또는 불이익과 무관하게 모든 관련 상황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공익을 보호해야 한다.
(c) 의무의 수행 또는 사법상의 필요가 달리 요구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입수한 사안을 비밀로 유지해야 한다.
(d) 피해자의 개인적 이익에 영향을 줄 때 피해자의 견해와 관심사를 고려해야 하며, ‘범죄 및 권력남용의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 선언’에 따라 피해자의 권리를 피해자가 알도록 보장해야 한다.

14. 공정한 조사를 통해 혐의가 발견되지 않을 때, 검사들은 기소를 시작하거나 계속해서는 안 되며, 소송을 중단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

15. 검사들은 공무원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소, 특히 부패, 권력남용, 인권의 대규모 침해 및 국제법이 인정한 여타 범죄에 대한 기소에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법적 권한이 있거나 지역의 관행과 일치하는 곳에서는 이런 범죄들에 대한 수사에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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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199 호  [기사입력] 2010년 04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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