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35 호 [기사입력] 2011년 01월 19일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복판에서 6명의 생명이 불길에 쓰러졌다. 잘못된 재개발을 바로잡아달라고 외치던 철거민과 그를 진압하던 경찰이었다. 뉴스를 듣고 달려가 본 현장은 박살난 유리가루와 매캐한 그을음으로 난장판이었다. 그곳은 눈에 익은 골목이었다. 10여 년 전 사무실이 있던 곳 근처 시장골목이었던지라, 찬거리며 군것질 거리를 사러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사는 사람, 살고자 하는 사람을 함부로 내쫓는 법은 없다는 것이 주거권이라는 인권의 제일 원칙이다. 그 제일 원칙이 무너진 곳에서 사람은 살아갈 도리가 없다.
집 잃고 가게 잃은 사람들은 영혼이 쉴 집도 얻기 힘들었다. 장례는 355일만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올 1월은 용산참사 2주기지만 장례를 치룬지는 1년이 되는 이상한 산수가 적용되는 때이다.
용산참사가 있기 몇 달 전(2008년 8월), 지구 저쪽 편 남아공에서 먼저 떠난 영혼이 있었다. 아이린 그루트붐(Irene Grootboom), 그녀 역시 집 없는 이였다. 모든 부고기사가 마음 저미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부고기사에는 “집 없이 무일푼으로 죽다”란 제목이 붙어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무일푼이었을지 모르나, ‘그루트붐 판례’란 큰 재산을 전 세계 이웃들에게 남겼다. 그루트붐 판례란, 사람은 헌법상 보장된 주거권을 가지며, 국가가 취약 계층의 주거권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헌법상 국가의 의무 위반이라는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다. 이 판결을 이끌어낸 싸움에 앞장선 이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 판례는 강제퇴거와 철거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인용되고 있고, 이 사건에 대한 연구물은 경제사회적 인권의 핵심주제를 차지하고 있다. 주거권의 전설, 주거권의 영웅이라는 호칭이 이런 연구물들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
남아공은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하에서 잔인한 철거를 자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를 물리친 후, 남아공에선 “모든 사람에게 주거를”이란 강령을 내걸고 주거권을 새겨 넣은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을 비롯한 4천명 명의 주민들은 공설운동장 윌러스덴의 끔찍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침수된 땅이었고, 수도도 하수구도 부족했고 쓰레기 수거도 거부됐다. 전체가구의 5%만이 전기를 공급받았다. 주민 대부분은 아주 가난했고 1/4은 전혀 수입이 없었다. 이들은 비용이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7년의 기다림에도 입주하지 못했다. 결국 390여명의 어른과 5백여 아동이 근처의 빈 사유지로 옮겨가 달동네를 이루고 살게 됐다. 그들은 이 마을을 뉴 러스트라 불렀는데, 그들 말로 “새로운 휴식처”란 뜻이었다. 이 마을로 옮긴지 3개월 후 땅 소유주는 퇴거명령서를 받아냈다. 갈 곳이 없다며 떠나기를 거부한 주민들에게 1999년 5월 18일 강제퇴거가 시행됐다. 이때는 남아공에선 막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뉴 러스트의 집들은 불도저로 밀리고 불태워지고 다른 소지품들도 파괴됐다. 주민들은 이전에 살던 공설운동장 근처로 가려 했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시당국에 호소했으나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한 주민들은 집을 얻을 때까지 “기본적인 임시 주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권리를 청구하려 시도한 것은 남아공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등법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의회 등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주거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한의 거주를 구성할 수 있는 텐트와 화장실,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물을 즉각 제공할 것을 명령했다. 정부는 항소했고, 결국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에서 크게 다뤄지게 됐다.
2000년, 헌법재판소는 “거처가 없는 사람에게는 우리 사회의 토대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같은 가치가 거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원칙적으로 주거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이 신청자들에게 즉각 주거 시설을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채울 내용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루트붐 자신은 약속 이행을 기다리기에 지쳤다며 움막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얻어낸 판결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지요. 우리는 가난했고 살 곳을 원했기에, 나는 전진하는 걸 선택했어요.”라는 게 그루트붐 판결에 대한 그녀의 소회였다.
그루트붐 사건에 함께했던 인권단체들은 주거권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루트붐 사망 이후 그녀를 추모하는 연속 강좌를 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읽어볼 제프 버들렌더의 강연이다. 제프 버들렌더(Geoff Budlender)는 그루트붐 사건당시 주장요지(http://www.escr-net.org/caselaw/caselaw_show.htm?doc_id=401409)를 썼던 인권변호사이다.
1990년대 주거권이란 말이 한국 사회에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었다. ‘세계주거권회의’에서 한국을 남아공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으로 철거를 하는 국가로 지목했다는 거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의 남아공의 행태와 비교됐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비교도 그보다 덜 수치스럽지는 않다. 그루트붐 판결과 용산판결의 비교….
용산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감옥에 있다. 하나같이 중형선고다. 참사이후 함께 했던 인권활동가에게도 재판 결과 어떤 선고가 떨어질지 모른다. 선고재판이 몇 차례 연기되는 사이 또 구속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만 깊어가고 있다. 약자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법원의 역할을 기대하는 버들렌더의 연설문을 읽어보면서, 이정도 바람은 아닐지라도 살인진압의 지휘자는 한 번도 서지 않은 법정에서 철거민들만 중형을 때려 맞는 상황만이라도 벗어나길 바라는 게 지나친 바램일까.
그루트붐 추모 강연; 법원, 책임성과 참여 민주주의(제프 버들렌더, 2010년 10월) 아이린 그루트붐은 헌법재판소에 사회경제적 권리사건을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법부를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사회경제적 권리를 의도적으로 포함한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는 투표권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그랬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정의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존엄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고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을 성취할 수 있게끔 하는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에 대한 접근의 형태로 말입니다. |
인권오름 제 235 호 [기사입력] 2011년 01월 19일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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