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의 표정에 꽉 찬 물음이다. 이 질문은 성찰일 수도 있고 초조함과 답답함을 뱉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이 되는 질문일 수도 있고 ‘길은 없다’는 탄식일 수도 있다. 꽉 막힌 골목으로 내몰려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낯빛들이 초췌해져간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들은 ‘힘이 없다’는 엄살과 ‘너 때문’이란 회피로만 달아나고, 애써 방향을 잡으려는 이들에겐 무시와 모욕이 일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능성과 응원을 담은 질문이 있고 빗장을 건 질문이 있다. 후자의 질문은 질문의 형식을 취한 명령문일 때가 많다. 불행히도 한국의 권력층은 후자의 화법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의 큰 분기점이 있을 때마다 응당 던지는 질문이다. 97년 IMF 구제금융의 폭탄을 맞으면서 87년 민주화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돈이 최고이고 돈 자랑이 수치가 아니다’란 노골성에 대해, ‘공공성이고 사회적 연대고 필요 없다. 알아서 각자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교리’에 대해 질문했다.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란 질문은 모욕 받았고 ‘더 많은 돈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사치’라는 ‘교리’가 강화됐다.

그리고 질문이 봉쇄된 바다 위에서 ‘세월호’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사회’로 뭔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돈에 대한 숭상의 교리가 우리 삶에 추상적인 위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기를 언제든지 낳을 수 있다는 걸, 우리 눈으로 실시간 학습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 정치색과 입장을 떠나 모두가 몰두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질문은 곧 오염됐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강자에 대한 저항을 무질서 또는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무시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모욕을 자유나 권리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부추겼다. 심지어 약자의 고통과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묘사하는 ‘모욕’이란 단어마저 제 것으로 뺏어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반세기 전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던졌다. 이 질문은 그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연례총회’에서 한 연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시민권 운동의 2막을 열겠다면서 경제 정의를 위한 빈민의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앞서 펼쳤던 시민권 운동보다 빈곤에 대한 공격이 훨씬 어렵다는 걸 그는 예감했다. 앞서의 투쟁은 백인과 흑인이 어느 식당에나 들어가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분리를 강제하는 법을 깨뜨렸다. 그런데 흑인에게는 식당에 들어가 햄버거를 사먹을 돈이 없었다. 돈 없는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나란히 식사할 수 없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가난에 내팽개쳐있는 한 결코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킹은 선언했다. 이제 시작하려는 투쟁은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킹 목사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빨갱이라 욕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킹 목사와 동료들을 사찰했고 죽음의 위협이 가해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킹은 아랑곳없이 나아갔다.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적대시하며 인색하기 그지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거와 생활임금의 보장, 특히 기본소득의 보장이라 할 것을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으로 요구했다. 그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담긴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연설이다. 가령 연설은 ‘빵바구니 운동’을 강조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이 지역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킹 목사는 “나의 돈을 존중한다면, 나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즉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하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싣지도 않고 흑인금융기관에 자금을 예치하지도 않는 기업에겐 우리도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였다. 표적이 된 주요 낙농회사들은 지역 상점의 판매대에 자기 상품을 놓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 것에 하나 둘씩 굴복했다. 운동의 대표자들과 기업이 마주앉아 계약서를 작성하게 됐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의 저축은행과 대출협회에 돈을 예치하고 흑인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게 됐다. 그것은 “채워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고갈되기만 하는 국내에 있는 식민지”를 벗어나 “우리에게서 벌어들인 돈을 우리가 사는 곳에 환원하라”는 당연한 요구였다. 이 요구에 포함된 정책 계획들은 다양했다. 가령 세입자연합을 조직하여 낡은 건물의 재개발을 건설 이익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추진하는 것, 세금을 이미 충분히 낸 사람들로서 정부 사업과 정부 관련 계약들을 대기업만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작은 사업체들도 따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진보적인 정책을 기획해야 한다.”면서 제시한 것이 기본소득의 보장이었다. “경제적 지위를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척도”로 여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릇되고 차별적인 시장경제의 운영”을 빈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열등하고 무능하다고 낙인찍음으로써,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해고시키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며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개인의 위엄이 번성할 것”이라 주창했다.

그런 구상에 담긴 것은 찔끔 보조금을 늘리고 생색용 개발사업을 유치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감옥에 안전하게 감금시켜 놓은 채 음식의 질만 조금 높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킹 목사는 “정당한 자긍심”의 토대 위에서 경제적 권리가 추구돼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존엄성의 힘 위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대해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 한다.”고 했다.

‘빈민의 운동’은 수도 워싱턴으로의 행진을 계획했다. 정부 수도의 일상 기능을 흔들어 놓는 게 계획이었다. 백악관과 의회가 빈민의 사안을 진지하게 다룰 때까지 그 앞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빈민의 행진에 대한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 킹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워싱턴의 한 성당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에서 그는 “인종주의, 빈곤, 그리고 전쟁”을 미국 사회의 3대 악이라고 불렀다. “빈곤에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빈곤을 제거할 기술과 자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 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 연설을 한 닷새 후 그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빈민의 행진은 취소되지 않았다. 3천여 명 이상이 전국에서 워싱턴으로 모였다. 흑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존엄성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다. 농성촌을 짓고 “부활의 도시”라 이름 지었다. 무자비한 비가 내리고 농성촌은 진창이 됐다. 언론과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절망과 혼란의 6주가 지나고 운동은 정리됐다. 빈민의 운동은 1968년 6월 19일 농성촌을 접었다. 누구는 철저한 ‘실패’라 평가했다. 또 누구는 ‘처음으로 다인종이 조직화된 경험을 맛봤다’고 했다. ‘우리들 자신의 해방 운동을 헤쳐 갈 만남을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농성촌은 사라졌어도 참가자들은 영감을 받아 워싱턴을 떠났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에겐 몇 달이건, 몇 주건, 단지 하루건 그건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오늘 읽어 볼 인권문헌, ‘빈민 권리장전’은 2003년에 ‘빈민의 운동’을 재건한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의 한 축은 ‘존엄과 안전 위원회’이다. ‘존엄’과 ‘안전’이 같이 가야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존엄 없는 안전’은 많다. 형사법과 공권력의 강화, ‘무전유죄 유전 무죄’의 차별적 사법체계 운영, 부자감세와 경제정책 등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사설경비 쓰고 폐쇄회로에 둘러싸인 특권지대에 사는 것도 물론 안전하다. 가난한 우리에게 안전이란 존엄과 같이 고려돼야 진짜 안전이 된다.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야 안전하고,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진짜 안전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면, 혹은 가난해지면 당장 맞닥뜨리는 건 사회적 지원이 아니라 경찰이다. 해고되거나 공장이 폐쇄되거나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거나 만성적 고용불안과 생계비 상승에 시달리거나 차별과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가난한 처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빌미를 제공했고 너의 책임이란’ 힐난을, 항의와 저항에는 ‘손 좀 봐주라’는 공권력의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존엄과 안전 위원회’가 존엄과 안전의 권리선언을 기획한다고 한다. 선언을 만드는 것은 그냥 말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실천을 종합하는 것이다. 킹 목사의 말대로 “신조의 고혈압과 행동의 빈혈”에 걸리지 않도록 우린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말이다.

‘빈민의 운동’의 ‘빈민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for the Poor, Poor People's Campaign)

1. 모든 형태의 인간 억압은 제거돼야만 한다. 모든 사람, 특히 빈민에게는 제도적 장벽 없이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빈민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 계급주의, 제국주의가 다뤄져야만 하고 제거돼야만 한다.

2. 빈민에게는 비인간적인 상태에 투입되는 공공 정책 의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방임되고 경제적 분리와 배제가 있어왔던 곳에 ‘기회의 공동체’를 창설할 것을 요구한다. 중앙과 지역의 자원들은 지역사회에서 경제적 기회를 만드는 지역사회 집단들과 시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없는 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열고 투자를 한 기업과 지역사회 집단 간 협력이 장려되고 보상받아야 한다. 기업의 탐욕스런 이익보다는 궁핍한 사람들의 이익을 우위에 두는 전국적이며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포괄적인 경제정책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기업을 규제해야만 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을 끝내야 한다. 공공의 의견 청취 없이 공장과 기업 본부를 폐쇄하는 일을 금지하며 일자리 상실로 고통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재훈련, 대체 직업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돼야만 한다.

3. 미국에서 6명의 아동 중 1명은 빈곤의 피해자이다. 비-백인 아동 3명 중 1명은 가난 속에서 자란다. 모든 아동은 양질의 건강 보호, 교육, 주거에 접근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법 앞에 동등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빈민은 사법 체계의 부정의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한다. 빈민은 흔히 이 나라의 감옥 산업 단지 창고에 처박혀진다. 이것은 노예제의 21세기 버전이 됐다. 빈민은 적절한 변호와 평등한 사법을 보장받아야 한다. 빈민은 민사와 형사 법정에서 정의를 보장받아야 한다.

5. 빈민은 경찰 폭력의 형태로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빈민은 학대받고 착취 받는 것과는 반대로 보호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에 대한 분명한 민간의 통제, 그리고 경찰의 남용과 비행을 다스릴 힘을 가진 시민의 심사위원회를 요구한다. 빈곤 지역에서 경찰과 지역사회에 근거한 집단들 간에 범죄와 폭력 철폐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이 수립돼야 한다.

6. 빈민은 완전 고용, 그리고 빈곤선을 넘어서도록 하는 보장 소득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지역사회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제휴에 대한 정부 투자를 요구한다. 실업이 집중된 지역이 있는 곳마다 일자리와 기회를 일으키는 집중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7. 빈민은 기회의 불평등에 희생돼서는 안된다. 여성과 비-백인에게 동등하게 지불하라. 여성은 직장에서의 성적 괴롭힘과 폭력, 또한 가정폭력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돼야만 한다.

8. 우리는 전 세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힘을 믿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했듯이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우리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정의와 자유로 규정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념에 뿌리를 둔 도덕적 권리 장전이다. 이 권리 장전의 이행은 “신 앞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로 우리를 더 가깝게 데려갈 것이다.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03 호  [기사입력] 2012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여섯 개의 P (Six Ps)

빈민을 조직화하는 빈민에 관하여(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는 구절이 시로 여겨지지 않는 시절이다. 이 시에서처럼 달관의 웃음이 아니다. 세상일에 어처구니가 없고 무기력감에 빠져서 생긴 얼버무린 표정이 피식 빠져나온 방귀처럼 얼굴에 ‘썩소’를 만든다.

배달시킬 때마다 몇 백 원씩 오른 새 가격표를 들고 오는 식당, 뉴스 창을 열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성적 비관‧생활고 비관의 자살기사들, 강정이든 쌍용차든 현장에선 끓어 넘치고 있는데 주요 뉴스 면에선 식어버린 문제들, 단식과 농성으로 스스로 뉴스를 만들고 있는 언론인과 가짜들이 판치는 거대 언론, 그 언론들이 즐겁게 챙기는 신구 공권력의 화신들과 양념치고 부채질해주는 소위 진보인사들…. 파국 앞에서 손 놓고 있는 무기력감의 ‘썩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과 대답을 피하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상황을 비를 잊은 하늘이 노여운 듯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주말 쌍용차 ‘희망걷기’ 행사가 있었다. 주말에 식당 알바를 하는 나는 한밤중에야 대한문으로 향했다. 종일 흘린 땀으로 몸에서 쉰내가 났지만, 땡볕에 종일 걸은 사람들의 땀내에 묻힐 것이라 생각하고 안 씻고 그냥 갔다. 역시나 스치는 사람들마다 땀내가 쩔어 있고 무대에 서는 이들마다 한을 토하듯 말을 끊을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잘렸고 용역과 경찰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며 지금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비슷한 사연들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온 세상을 짊어진 무게이다. 그들의 등 뒤로 보이는 무대 현수막의 “연대할 권리”라는 말이 신선하다. 연대할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하니 더 강한 느낌이 온다. ‘연대할 권리’란 말을 쓸 정도로 우리가 어느새 성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참가자들의 춤과 구호를 사진에 담아내고 있는 김진숙 씨가 보인다. 몸은 어떨지 모르지만 미소에는 건강미가 넘쳐 보인다. ‘저 사람이 살아있구나, 웃고 있구나’ 안도감이 밀려든다. 꼬리를 문 장례에 상복을 벗지 못한 쌍용차 노동자들도 간만에 웃으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노점상들의 장터가 뒤편에서 열리고 있다. 매연과 먼지 섞인 김치부침개를 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얘기꽃을 피운다. 아는 얼굴들이 스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용산 참사 유가족, 고문피해자를 위한 센터를 열었다는 이전의 고문피해자, 목소리 톤이 높아 단골 사회자인 장애인권 활동가, 싸가지 없는 언론사 사장 등의 이름이 적힌 걸레를 나눠주는 언론 노동자, 서울 나들이를 감행한 강정지킴이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공통으로 느끼고 영향받는 사람들의 행진이 꼬리를 문다. 잠시나마 ‘썩소’가 아니라 그냥 웃는다.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웃는다.

문득 잊고 있었던 낱말들이 떠오른다. 단결하고 조직하고 계획한다는 말, 이 말들은 서로 같은 말이다. 같은 문제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그 조직화와 계획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인가 빈민의 사회경제적 인권을 열쇠말로 하는 사이트들을 뒤지다가 거기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6P’란 걸 발견했다. 뭘 말하는 것인가 했더니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의 역사에서 따와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었다. ‘흑표범당’이란 196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FBI의 파괴공작으로 와해된, 흑인의 권리를 주창한 정치조직을 말한다. 흑표범당의 ‘6P’를 가져다가 단체마다 다양하게 고쳐 쓴 것들이 많았는데, 그 원조에 해당하는 글은 빈민운동가인 윌리 뱁티스트(Willie Baptist)의 것이었다. 뱁티스트는 그 자신이 홈리스 출신으로서 40여 년 이상 빈민 조직화와 교육활동을 벌여왔다. 그는 얼마 전 <빈민의 페다고지(빈민교육론)>를 출간하기도 했다. 뱁티스트는 연설이나 글 등에서 “빈민을 조직화하는 빈민”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같은 제목의 연설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나는 홈리스였다. 나는 평생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 사람들은 타이타닉 호에서 제일 좋은 의자를 잡으려고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 의자들을 어떻게 타이타닉을 벗어날 수 있는 구명보트로 만들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는 더 좋은 의자를 원한다’는 것에 고정돼 있다. … 상황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해체된 가족, 거대한 세계적 규모로 빼앗기는 일터를 보고 있다. ‘다운사이징’(감량경영)이란 그럴듯한 단어는 사람들이 해고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직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더 나은 자리를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타이타닉을 벗어날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접근하려는 방법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 시기마다 불거진 문제들에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투쟁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늘날 빈부격차를 중대한 문제로 본다면, 가장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빈민은 게으르고 제정신이 아니고 구제불능이며 도와야 할 사람들이라는 모든 편견과 반대되는 것이다. … 이 싸움은 동정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권력을 구하려는 싸움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정을 느끼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뭔가 성취할 수 없다. 관계는 서로 간에 동료여야지, 불평등한 관계 속의 온정주의여서는 안 된다. 이 나라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고, 동정심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누려왔다. 자선사업, 사람들을 돕는다는 관념, 자조주의의 관념이 미국인의 정신에는 풍부하다. 이런 생각들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려에 기초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통제를 위한 원천이자 수단이 되어왔다.”

그가 ‘6P’를 발굴하고 강조하게 된 배경 설명이 이 연설에 녹아있다. ‘6P’란 것은 간단하다.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를 모아내는 것이 프로그램(1. Program)이고, 안이하고 타성에 젖은 방식이 아니라 심사숙고하며 지속적으로 저항(2. Protest)한다. 서로의 기본적이고 긴급한 필요를 채워줄 방법을 일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생존프로젝트(3. Survival Project)이고, 주류 언론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만들어 알리는 언론작업(4. Press Work)을 한다.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정치교육(5. Political Education)이고, 몇 몇 인물의 인품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계획을 통해 힘을 모으는 집합적인 지도력을 기르는 운동(6. Plans Not Personalities)을 한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것의 실천은 간단하지 않다. 계속 만나고 움직이고 부대끼며 썩소와 미소의 차이, 무기력과 생동감의 차이, 고립과 연대의 차이를 배울 수밖에 없다. ‘연대할 권리’란 말을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의 작동법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여섯 개의 P (Six Ps) , 윌리 뱁티스트

대개의 미국인들은 흑표범당을 생각하면 백인을 죽이려고 검은 총을 가지고 다니는 과격 집단을 떠올린다. 그런 이미지는 언론과 미연방수사국(FBI), 그리고 FBI의 대(對)파괴자첩보활동(COINTELPRO, 국가안보에 위험이 있다고 간주하는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FBI의 비밀파괴활동)이 만들고 부채질한 이미지이다. 그런 이미지를 부채질해서 그들은 흑표범당을 고립시키고, 흑표범당에 잠입하여 파괴했다.

이런 조직적인 잘못된 정보에 맞서 흑표범당의 의장 바비 실(Bobby Seale)은 이렇게 말했다. “심문관이 우리더러 백인 반대자라 하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서슴없이 백인 반대자라고 한다. 이건 뻔뻔한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를 피부색 때문에 증오하진 않는다. 우리는 억압을 증오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살해를 증오한다. 우리는 대규모 실업을 증오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하면서 인종주의에 푹 빠진 미국을 위해 싸우려고 흑인들이 군 복무를 하러 떠나는 것을 증오한다.”

사실은 흑표범당이 모든 민중의 경제적 안전을 위해 두려움 없이 싸웠고 쉴 새 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조직들보다도 더 흑표범당은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란 요구를 옹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비난받았다.

그들의 효과적인 아동 무상 아침 식사 프로그램을 훗날 여러 주의 입법가들이 따라 했다. 무상 의료 진료소, 빈민이 감옥의 친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무상이동프로그램 등의 생존 프로그램들로 인해 흑표범당은 빈민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대파괴자첩보활동’은 이런 계획들을 위험하고 “사악한” 활동이라 비난했고, 지역의 FBI 요원들은 그것들의 파괴를 겨냥했다.

… 어떤 사회운동도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다. 이 풍요의 땅에서 만연한 빈곤을 끝내기 위해 오늘날 새롭게 떠오르는 운동은 지난 1960년대의 흑표범당의 역사적 경험에서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만 한다. … 오늘날, 근본적인 경제적 조건은 경제의 모든 측면에서 기계화로부터 전자화로의 지속적인 팽창이다. 이런 변환의 결과는 구조적인 실업과 빈곤의 엄청난 증가이다. 이것은 단지 도시의 흑인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피부색, 모든 연령, 모든 지리적 영역의 문제이다. … 오늘날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판단해야만 하고 오늘날의 상황에서 흑표범당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을 흑표범당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흑표범당의 조직화 방식에서 ‘6개의 P’를 찾아냈다. ‘6개의 P’란 프로그램(Program), 저항(Protests), 생존 프로젝트(Projects of Survival), 언론작업(Press work), 정치교육(Political Education), 인품이 아닌 계획(Plans not Personalities)이다.

1. 프로그램(Program)
흑표범당의 목적은 10개의 강령 프로그램에 기술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들이 기반한 지역민들의 핵심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표현했다. 가령 제2강령은 “우리는 우리 민중의 완전 고용을 원한다.”, 제4강령은 “우리는 인간의 쉼터로 적합한 존엄한 주거를 원한다.”이고, 제7강령은 “우리는 경찰 폭력과 흑인에 대한 살해를 당장 중단할 것을 원한다.”이다.

… 사람들은 쟁점이 되는 문제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행동할 동기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는 타인들을 찾게 된다. 이것이 조직화의 기초이다. 프로그램이란 그런 쟁점들을 요약하는 것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이행할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이란 해결책을 향해 한 조직을 공통된 방향으로 결집시키며 그 모든 활동을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은 빈민이 빈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도구이다.

2. 저항(Protests)
흑표범당은 “타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 가령, 지역사회의 의견을 세심하게 기록‧분석하고, 경찰의 행동과 민중의 권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조건과 법률들을 조사한 후에야 흑표범당은 그들의 유명하고 극적인 경찰 순찰대(경찰의 총에 맞서 총을 들고 흑인빈민가를 순찰한 활동을 말함)를 시행했다. 이런저런 저항들은 민중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의식을 건드렸다. 이런 정기적인 저항은 그들의 회원을 급격하게 늘렸고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투쟁하는 조직만이 투사들을 조직화한다. 심사숙고한 지속적인 저항은 빈민이 빈민을 조직화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이다.

3. 생존 프로젝트(Projects of Survival)
흑표범당이 시행한 무상 아침 식사 프로그램, 무상 의료 진료소 등의 프로젝트들은 회원들에게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접촉하게 했고 민중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긴급한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회원들의 정치적 훈련과 발전을 도왔다. 이런 활동들은 또한 그 자체가 저항과 정치 교육의 효과적 형태였다. 왜냐하면 생존 프로젝트들은 엄청난 풍요의 한가운데서 극심한 결핍을 양산하는 시스템의 광기와 비인간성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계속 움직이는 조직에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는 조직은 회원과 영향력을 모은다. 저항 활동은 시작과 멈춤, 들고 나는 성쇠가 있지만, 생존 프로젝트는 꾸준히 작동한다. 생존 프로젝트는 회원들을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게 하고 조직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몰두하게 한다.

빈민은 시시각각 당장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생존의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생존 프로젝트는 이런 즉각적인 필요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킨다. 빈민은 생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조직가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고 조직가들은 정치교육과 투쟁활동을 정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4. 언론 작업(Press Work)
흑표범당의 신문(The Black Panther)은 널리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았고 조직화와 소통과 교육의 도구가 됐다. 이 신문의 배포 범위는 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흑표범당이 수행한 활동의 성격상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소통하기 위해 주류 언론을 신뢰할 수도 없었고 의지하지도 않았다. … 우리들 빈민 자신의 언론을 이용하는 것은 빈곤에 대한 싸움을 조직화하는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의식을 잃은 언론과 우리의 처지와 싸움의 성격을 검열하는 언론이다. 목소리가 없는 운동은 고립되고 파편화되고 패배하는 운동이다.

5. 정치 교육(Political Education)
흑표범당은 자기들 구성원에 대해서나 광범위한 대중에 대해서나 지속적인 정치교육에 몰두했다. …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정치교육 없이는 운동을 조직하고 유지하고 훈련하는 일, 그리고 지도자를 발굴하는 일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6. 인품이 아닌 계획(Plans Not Personalities)
흑표범당의 역사는 그들의 성취뿐만 아니라 단점에 대해서도 연구돼야만 한다. 흑표범당의 주요한 결점은 계획(정치교육 계획, 생존 프로젝트 개발 계획, 저항을 수행하는 계획, 언론작업과 배포 계획, 가장 중요하게는 이 모든 계획을 조직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려는 전반적인 계획에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인품에 너무 의존했다는 것이다.

FBI의 ‘대파괴자첩보활동’은 이런 약점을 이용했다. 서로 간에 개별적인 충성심에 기초해 형성된 내부 분파 집단들을 싸우게 함으로써 흑표범당을 찢어놓기 위한 목적이었다. FBI는 이 일을 스파이의 잠입과 기관원인 선동가를 통해서 거짓 흑색 정보 운동을 수행함으로써 해냈다.

“뱀의 머리 자르기”는 운동을 파괴하기 위한 오랜 교리이다. 지도자의 인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운동은 적의 쉬운 먹잇감이다. 기획과 계획에 대한 헌신은 지도자들의 집합적인 발전을 허용한다. 계획을 통해 지도력을 통합하거나 집단화하는 많은 지도자를 가진 운동은 광범위하고 강력하며 심도 깊게 훈련된 운동이다. 그런 깨어있는 운동은 쉽게 잠입되거나 분열되거나 패배하지 않는다.

오늘날 모두가 “집합적인 지도력”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정말로 그것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심사숙고한 계획 없이 말뿐인 채로 있다. 그 계획은 ‘6개의 P’에 대한 고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03 호  [기사입력] 2012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