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되고 첫 달을 맞으면 이런 저런 계획을 잡기도 하고 이런 저런 기대와 흥분으로 설레던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새해 첫 달의 그런 기분이 사라졌고 뭔가 불안한 것으로 바뀌었다. 폭설에 살림살이의 기능이 멎는다거나 꼭두새벽에 철거민이 불타서 죽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대지진에 마음이 갈라지면서 또 어디서 마음 뒤숭숭한 소식이 들려오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것이 새해의 가슴앓이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가슴앓이가 1월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이웃에서의 원전 참사가 내 집 앞 교통사고와 같은 일이 돼버리면서 어느 때고 어디서고 불안불안하니 계획과 기대란 단어가 초등학교 때 동그라미 생활 계획표 그리던 때를 떠올릴 때나 써먹을만한 단어로 여겨지게 됐다.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흔한 광경은 폐업과 새로운 간판이 붙는 일의 반복이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터에 누군가의 퇴직금이나 대출금을 쏟아 부었을 고만고만한 가게가 들어서고 서너달을 버티지 못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그것으로 바뀌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종 지표의 악화를 신문에서 읽지 않아도 내가 숨 쉬는 거리의 광경이 생방송으로 그것을 전해준다. 두 집 건너 하나가 커피집이요, 떡볶이와 만두집이요, 편의점이다. 두 집 건너 하나 있으면서 다 알만한 상표를 내걸고 있으니 비싼 이름값을 치르면서 바지사장 역할로 종종거리다 털어먹는 사장님들 천지다. 그런 상표조차 내걸지 못한 집은 잡아먹힐 것이 너무도 뻔히 보이는 옹색하고 궁색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가게들 중 하나가 온갖 영화포스터와 유명 대사를 적은 색종이로 벽과 유리창을 채웠던 커피집이었다. 시각적으로 전혀 세련되지 않았지만 영화 카피와 대사를 읽는 맛이 쏠쏠했다. 지나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구절이 붙었나 살펴보곤 했는데, 어느날 맘에 들어온 구절이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였다. 어디서 인용했는지를 써놓지 않아서 누가 했던 말인지 모르겠거니와 그 누구의 말이 아니라 주인장의 삶의 철학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을 못 버티고 포스터와 색종이들은 낱낱이 뜯기었고 다른 가게로 바뀌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조차 지켜내지 못한 이의 절망을 느낀다.
돈과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계획도 도둑맞았다. 몇 살 쯤엔 학교를 졸업하고 몇 살 쯤엔 취직을 하고 몇 살 쯤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몇 살 쯤엔 은퇴한다던 계획을 할 수 있는 삶은 드물다. 사람의 삶뿐이 아니라 계절과 기온도 달라졌다. 이때쯤 펴야 할 꽃이 아무 때나 피고 선선해야 할 때쯤 무지 덥고 이때쯤 와야 할 비가 제멋대로 한꺼번에 내린다.
<사회적 감시(Socail Watch) 네트워크>는 전세계 60여개 이상의 나라들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감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망이다. 해마다 감시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있는데, 올해 보고서의 제목이 ‘미래에 대한 권리’이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들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다. 투기금융자본과 무역자유화가 얼마나 많은 삶과 자연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지키지 않은 헛된 약속이 얼마나 많았는지,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재확인이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의 제목이 ‘미래에 대한 권리’라는 것에 설레었다. 무슨 근거로 ‘미래’를 말할 수 있단 말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계획할 수 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극적인 대답은 없었다. 대신에 보여주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란, 계속 성장을 통한 파이 키우기는 오답이라는 것, 이미 대기 중의 자기 몫이라 할 것을 온실가스로 다 채우고도 모자를 만큼 에너지를 써대고 탄소를 배출하는 생활수준이 기준일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선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삶은 새로운 자원을 더 써대지 않아도 지금 당장 누구에게나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불안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내일을 포기하고 오늘 다 써서 없애 버리는 것도 아니고 투기와 횡재와 약탈을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문턱을 지켜내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그것을 위한 행동이 지금 있어야 미래가 열린다고 말한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란 문구가 자꾸 겹쳐지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권리; 사회적 감시 네트워크 보고서 2012년 개괄 유엔총회는 2012년 6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약칭 리우)에서 열릴 정상회의를 소집했다. 이 도시에서는 20년 전에도 역사적인 ‘환경과 발전에 대한 유엔 회의’가 열렸다. 지구정상회의로 널리 알려진 1992년 리우 회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을 지지하고 기후변화, 사막화, 생물다양성에 관한 국제협약을 승인했다. |
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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