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47 호 [기사입력] 2009년 04월 0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어머니’,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로 깊은 울렁임이 있다. 고마움과 그리움으로 때론 원망과 미움으로, 어떤 성격의 울렁임이든 절절하게 다가오는 게 엄마와 관련된 감정이다. 엄마가 잘 해줄 때는 세상에 내가 무엇이기에 저리 잘해 줄까,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 물론 그 잘해줌이 내 맘에 꼭 드는 방식이 아닐 때도 있다. 빈자리가 나면 경로석이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제 자식부터 앉히려고 한다거나, 먹을 것을 싸줄라 치면 ‘내 입’에 들어간다는 게 확실해야 두말없이 싸주지, 다른 사람 먹인다고 하면 잔소리가 시작된다. 그럴 때면 내겐 한없는 그 사랑과 베풂이 집 담장 밖을 넘기가 참 힘들다고 느낀다.
집 바깥에서 만나는 엄마들이 또 있다. 유모차 엄마,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택한 엄마들보다 먼저 있었던 엄마들이다. 민가협 어머니라고 불리는 분들이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몰라도 이분들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학생 때 시위를 하다가 경찰들에게 당할라치면 이 엄마들이 맨 앞에 서서 몸으로 막아주셨다. “내 자식들 잡아가지 말라”면서. 젊은이들이 지각을 해서 성사되기 어려운 아침투쟁에 새벽밥 지어먹이고 대거 출동하는 이들도 엄마들이었다.
93년 9월 23일에 시작한 목요집회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탑골 공원 앞에서 매주 목요일 열리는 이 집회에서 엄마들은 머리에 보랏빛 머리 수건을 두르고 시대의 자식들의 석방을 외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탄압받는 언론인, 일터에서 쫓겨나고 경찰에 쫓기는 노동자 등이 이들의 자식이다. 관절염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무릎으로 이 단체 저 단체의 궂은 일 기념할 일마다 챙기러 다니는 엄마들이다. 나도 봉투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내 앞에서 다섯 장을 세어서 넣어주셨다. 그런데 새 지폐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천원 짜리와 만원 짜리가 잘 구분되지 않는 때였다. 눈이 어두운 이 어머니는 만원 짜리 1장과 천원짜리 4장을 내게 주셨다. 눈 밝은 나는 그게 5만원이 아니라 만4천원이란 걸 ‘현장’에서 알고 있었지만 5만원, 아니 그 이상을 주고픈 어머니의 마음을 받았다. 그 봉투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인권운동에는 또 유명한 엄마들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 어머니회’다. 군사독재의 폭압으로 얼룩진 시절, 이 엄마들은 자식들의 ‘실종’을 겪었다. 실종이란 영장 갖고 하는 연행, 재판조차도 하지 않고 정권의 맘에 안 드는 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고문을 받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기에 피해자나 그 동료, 가족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인권탄압이었다. 실종자의 엄마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자식을 돌려달라며 대통령궁이 마주보이는 오월광장에 모여 침묵의 원을 하염없이 돌았다. 독재정권은 원을 깨려고 사나운 개를 풀기도 했다. 엄마들은 나무를 껴안고 버텨냈다. 1977년 4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에서 14명의 엄마들이 시작한 이 원에 참여하는 수가 점점 늘어나 ‘오월광장의 어머니들’이라 불리게 됐다.
민선정부가 들어선 이후 과거의 권력범죄를 덮으려는 시도에 대해 엄마들은 “당신은 과거 우리의 자식들을 죽인 고문자들과 살인자들이 어디서 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라는 긴 제목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엄마들의 행동은 국제사회에도 경종을 울려 불처벌 문제를 유엔의 인권의제에서 주요 문제로 다루게 됐다. “진실과 정의가 없는 망각 반대”, “인권침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같은 범죄의 길을 여는 것”이란 구호는 불처벌 문제의 원칙이 됐다. 94년에 이 오월광장의 어머니회가 한국을 방문해 민가협 엄마들과 흰 수건, 보랏빛 수건을 나눠 두르고 국가권력의 인권침해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 구금, 수배, 강제징집 등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하는 일, 무엇보다도 어떤 인권침해가 누구에 의해 벌어졌는지 진상규명을 하는 일이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요구됐다. 국회 앞에서 400일이 넘는 노상농성을 하는 등 온갖 노력으로 과거사․의문사 진상규명과 관련된 법과 기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더니 이런 기구들이 일도 마치지 않았는데 폐업을 하려하고 있다. 엄마들이 이런 일에 항의하러 나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엔 엄마들이 잡혀갔다. 일흔 살이 넘은 엄마가 잡혀갔다. 간신히 보석으로 나왔지만 국회의원폭행죄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오월광장 어머니회’와 관련된 시이다. 이 시집(레진느 맥락 엮음․이종렬 옮김, 『어머니 당신은 이제 우리들이 동지입니다,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들의 노래』, 실천문학사, 1992)을 다시 꺼내 읽어볼 일이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흘러간 일’이란 대단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이 엄마들의 사랑도 처음에는 집 담장 밖을 넘기 힘들었을 게다. 제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됐을 게다. 그러나 집 안과 밖의 경계가 없다는 것, 내 자식의 안위가 정의의 실현 속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행동하였다. 집 안과 밖의 경계, 내 식구․내 조직의 안위를 넘어서 정의의 원을 그리는 것이야 말로 이 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엄마들의 선행학습에서 배우고 싶다.
『어머니 당신은 이제 우리들이 동지입니다, 아르헨티나 오월광장 어머니들의 노래』 어머니 당신은 이제 우리들의 동지입니다 |
인권오름 제 147 호 [기사입력] 2009년 04월 0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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