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8. 16

작성자 : 엄기호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는다

 

지난달 교육관련 세미나에 참석차 홍콩을 다녀올 때의 일이다. 금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명품 쇼핑 관광을 떠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띠었다. 내 뒤에서 체크인을 기다리던 두 명의 아가씨들도 이번에 홍콩에 가서 무엇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을 어떻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자신들의 진정한 경쟁자는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고 갈 비행기보다 30분 먼저 도착하는 일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짐을 찾자마자 쇼핑몰로 날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홍콩을 서른 번도 넘게 갔다 왔지만 한 번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세미나가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말하는 루트를 한 번 따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홍콩에 도착한 다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였더니 놀랍게도 명품 쇼핑을 위한 카페가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세일에 대한 정보와 물건 고르는 법, 그리고 그렇게 고른 물건을 디카로 찍어 올리는 등 대단히 활발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추천하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하루 정도 명품 쇼핑 순례를 해 보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쇼핑센터이고 일 년 내내 세일이 끊이지 않는 곳이 홍콩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쇼핑에는 대단한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쉴 때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쇼핑센터에서는 쉴 때도 어디 주저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들어가 뭔가를 마시면서 쉬어야했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번에 산 물건으로 자신이 얼마를 절약하였고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전략을 짠다고 바빴다. 보통 에너지와 체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생들과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에서의 자신들의 스타일 만들기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대체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학생들은 어떻게 소비의 덫에 빠져있고, 또 어떻게 빠져나오고 있는지, 또한 스타일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드러내는 정치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학생들에게 ‘섹스 앤 더 시티’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스타일 전략을 살펴보게 하였다.

 

삶에서 겉도는 도덕적 언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이 명품에 얽힌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명품과 관련된 잡지사에서 일하며 명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치열한 과정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권력과 암투를 목격한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자유와 스타일의 도시라고 하는 뉴욕에서 살고 있는 4명의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로 섹스와 쇼핑 등 뉴욕의 화려하고 일회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숨김없이 욕망하고 즐기며 그 안에서 각자의 사랑을 펼쳐나간다. 두 영화 모두에서 ‘헐리우드 영화’식의 순박하고 인간적인 것을 찬양하는 듯 하는 결론만 제외하면 이 영화는 소비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힘이 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30대 주부가 시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나서 화가 나 있을 때 남편이 명품 백을 사주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명품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으며 이 영화들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업이라는 공간에서는 ‘당연하게도’ 다수의 학생들은 명품 소비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나는 대학이건 대안학교이건 어디에서나 수업을 할 때마다 대단히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도덕적 비판’의 문제였다. 학생들은 무엇에 대해서나 일단 ‘도덕적 비판’을 먼저 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이 되어 있는 듯하였다. 늘 사고보다는 정답을 강요받은 결과인지 습관적으로 상투적인 ‘도덕적 비판’에 머물러 버리곤 하였다.

명품소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등한시하고 껍데기만 중요시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자기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명품을 걸치건 보세 상품을 거치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소비에서도 자기 주체성을 가져할 것이고 소비자본주의의 상술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수의 학생들은 이런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 자신은 지금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하였다. 자신들이 비판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에 이미 자신들이 살면서 끊임없이 타협하고 협상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한 학생의 표현대로 하면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성찰해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학생은 매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고통을 서술하였다.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 속삭이면서도 거울 앞에서는 ‘이 옷은 이미 유행이 지난 옷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거리를 지나다닐 때 ‘진열대에 걸린 스키니 진이 "어이 이봐, 나를 사야만 친구들과 이야기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거 같다’고 고백한다. 군대에서는 양말 7개, 속옷 7개, 전투복 3벌로 2년을 버텼는데 ‘학교를 복학하고 나서는 내일은 뭘 입어야 할지가 걱정이고,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싶은 욕구에 늘 시달’리면서 계절이 바뀌면 옷장이 넘쳐나게 옷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은 명품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은 갖추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비싼 옷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같은 감각을 소유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유행은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기 때문에 대세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도태이다. 스타일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곧 같은 무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얼핏 보면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내야하는 것이 소비이다. 이 양자 사이에서 갇혀 오고가도 못하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이 학생은 고백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생이 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였다는 고백이다. 몇 번이고 이 이야기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언어 속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있었는데 수업이 반복이 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 무모하고 아픈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차라리 몰랐다면 속 편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속물됨이라던가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것을 부정하는 얕은 지식의 조합으로 쓰는 글들’보다는 더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학생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이 소비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상투적인 언어이다. 이런 도덕적 언어들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데 한참을 못 미치는 언어들이다. 삶에서 겉돌고 성찰에서 헛도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언어들이 학생들의 사고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학생들에게 사유를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투적 언어들의 가진 힘을 떨치고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학생의 말처럼 아픈 고백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가리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힘이 된다.

 

버리기 위해 소비한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비판을 좀 더 밀고 나가보기로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적 수준이기는 하지만 명품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이미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끊임없는 소비의 순환 고리에 빠져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과 스타일이 자신을 먹어버린다는 점이다. 또한 누구나 다 명품을 따라하게 되면서 ‘구별짓기’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또다른 명품을 찾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명품의 역설’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꼼꼼하게 살펴본 한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붙여보았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랜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학생은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명품’이 어떻게 ‘남들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대중’으로 회귀해 버리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 학생의 말에 따르면 ‘명품의 획일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진짜이건, 짝퉁이건’ 길거리에 다니면 거의 모두가 ‘프라다’,‘구찌’를 들고 다닌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갖고 있음으로 “명품 아닌 명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명품이 자신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어울리기 위해, 소외되지 않기 위해 ‘MUST HAVE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모두가 똑같은 ‘버섯머리에, 뿔테안경에, 스키니 진’을 입고 있다. 게다가 브랜드가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지는 것이며, 이 때문에 명품이 똑같아지는 순간 자본주의는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며 사람들을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다른 한 학생은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언니의 사례를 이야기하였다. 자신의 언니는 지독한 쇼퍼홀릭인데 한정판 가방을 사기 위해 자신을 깨워서 새벽 6시에 매장 앞에 줄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언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즉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를 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버리기 위해서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이 학생은 명품은 일회용품이라고 단언하였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티슈나 한 번 쓰고 옷장으로 직행하는 명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 년을 입어도 십 년 같고, 십 년을 입어도 일 년 같은’ 그럼 오래도록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품은 사기라는 것이 이 학생의 놀라운 결론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가 소비 자본주의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패턴을 유지하는 한 이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 게다가 자신을 남과 다르게 드러내기 위해서 소비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명품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과 내가 같은 경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 학생은 이것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품이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볼때조차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친구들 간의 대화에 끼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공감대가 전혀 쌓이지 않고 그 어떠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에 ‘웃어야 할 때 함께 웃지도 못하면서’ 사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따라서 ‘그 방송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호인정이라는 이 ‘소리 없는 전쟁’에서 피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소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켜주었다. 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을 소비한다는 것에는 쉽게 수긍하였지만 우리가 소비를 위해 시간과 공간에도 대단히 많은 품을 들이고 소비해야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소비는 빙산의 일각이며 그 밑에는 거대한 삶에 대한 소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나 자신

 

우리가 물건 하나를 소비하기 위해서 어떻게 삶을 소비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스타벅스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방살이를 하고 깁밥 한 줄을 먹어가면서도 반드시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마신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가지고 토론하였다. 스타벅스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다른 커피와는 다른 향을 가진 질 좋은 커피. 그 곳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 이 공감대에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세련되었다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공간을 소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편하기는 푹신한 소파가 있는 옛날식 다방이 편하지만 이런 곳을 이용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즉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 스타벅스를 이용한다. 결국 종착점은 이미지이다. 소비자본주의가 팔아먹고 있는 것은 이미지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이미지의 소비자들인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왜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가?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만족을 얻는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누구의 이미지인가? 한국의 보통 주부들이 가진 낭만 중의 하나가 주말에 남편이 모는 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서 아이들을 카트에 태우고 쇼핑하는 것이다. 이들 주부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바로 단란한 가족의 운영자로서의 주부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스타벅스건 대현마트건 소비의 현장에서 두 가지의 자아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물건을 소비하며 흡족해하는 자기 자신과 그 흡족해 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 자신. 이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가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합리성이다. 정체성은 내가 같은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정체성이다.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소비가 낭비나 궁상맞은 것은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위라는 스스로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며 소비하는 ‘나’가 두 명이라는 점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경험적으로 자신들이 나르시시즘적 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타인의 시선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특히 우리가 소비의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점과 그 합리성이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였다. 예를 들어 태국과 같은 곳에 여행을 가서 수천 바트(십여만원에 해당하는 돈)를 하는 5성급 호텔에 머물면서도 길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는 10바트를 깍기 위해 악착같이 구는 모습이 바로 소비가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품 쇼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말한 홍콩 명품 쇼핑 카페에 가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합리적 전략’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구매 상품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칭찬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것이다. 어떻게 이 가격에 이런 상품을 살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즉 구매한 사람의 합리성에 대한 경탄이다.

한 학생은 이런 합리성을 여성들이 싣는 힐에서 찾아내었다. 그녀는 ‘힐을 신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고개도 당당해지고 허리도 꼿꼿하게 세워지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통해 묘한 희열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이런 화려함과 황홀함이란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 발의 통증정도는 고사할 수 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나 이외에 그 통증을 고사할 정도로 스타일을 고수하고 즐기는 ‘나’가 있으며, 그 ‘또 다른 나’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자여. 7,8,9 센티의 아찔한 기둥을 달고 달아오른 거리를 걸어라.” 이 학생이 좋아하는 블로거가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된 화려한 힐 사진과 함께 적어둔 멘트라고 한다.

 

그러나 명품만 있고 스타일은 없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소비는 도덕적 비판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소비자본주의 안에서 그만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합리적 주체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비판이 소비자본주의의 주체성에 대한 비판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비판하지만 행위의 당사자는 이미 자신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초점이 어긋나게 된다. 이야기의 말미쯤 한 학생이 말을 한다. “근데요 선생님.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습니다.” 정답이다.

기실 이 합리성의 정체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이다. 뉴욕에 다녀온 한 학생은 섹스 앤 더 시티의 현실을 이렇게 말한다. 다음 요구사항이 충족되어야만 영화처럼 살수 있다. 무엇보다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 샬롯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중상류계층이다. 그리고 슬림한 몸매. 뉴욕인간들이 미친 듯이 사수하는 것이 ‘슬림한 몸매’란다. 그리고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 주소. 그렇지 않다면 뉴욕은 ‘열심히 눈으로만 봐야하는 도시’라고 한다.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비자본주의는 ‘그 비싼 관세 내가며 5번가에서 쇼핑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날 저녁 먹을 베이글 값도 달랑달랑’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지친 날 위로해줄 스타벅스의 2달러짜리 아메리카노와 역시 2달러 짜리 베이글’이었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궁핍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생은 그래도 뉴욕은 자유로왔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가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소비자본주의의 미덕도 제대로 못 갖췄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장 문을 열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었다. 뉴욕에서는 미니 청치마를 입고 물찬제비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닐 수 있었다. 비록 명품은 아니더라도 두루두루 벼룩시장, 싼 중저가 브랜드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었고, 또 추수감사절이후의 폭격세일기간(Thanksgiving day sale)엔 관광객마냥 비싼 명품 숍도 들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후 그녀의 옷장은 두 개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뉴욕에서 입던 옷들. 그리고 다른 옷장에는 한국에서 입는 옷들. 당연히 미니 청치마는 뉴욕 옷장에서 썩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청치마를 입으면 10m 멀리서부터 남자며 여자며 아래를 쳐다보며, ‘우아.. 용감하다..’는 무언의 말이 ‘응원의 눈길과 함께’ 날아온다고 한다. 엄청난 간섭이 한국에는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스타일이, 스타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오로지 학교 유니폼처럼 판에 박힌 듯이 맞춰 입고 나온 명품만이 허용될 뿐이다. 이게 대학만 들어가면 아이들이 모두 다 맞춰 입는다고 하는 학교 점퍼와 뭐가 다른가? 명품만 허용되고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 이것이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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