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67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기나긴 연대의 세월

인권운동은 연대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일대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인권침해로 인한 고난이라면 그 동전의 다른 면은 전 세계적인 인권운동의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제 앰네스티(AI)의 활동 기록을 살펴봤다.

- AI 사무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의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과 그의 아내 이희호를 포함한 양심수에 대한 석방과 민주적 권리의 회복을 촉구했다.(1976년 3월 10일 AI 보도자료)
-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명동성당 구국선언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대중에게 8년의 중형을 부과한 것에 항의한다.(1976년 8월 31일 AI 보도자료)
- 명동성당 구국선언으로 구속된 김대중은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심각하게 아프다”.(1976년 11월 1일)
3월 7일 김대중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AI 1977년 인권보고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런 기록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인권의제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발표한 한 문건에 다음과 같이 요약돼 있다.

김대중은 1970년대의 대부분을 가택 연금이나 감옥에서 보냈다. AI가 김대중을 양심수로 처음 채택한 게 이 기간이었다. 그는 1976년 3월 유명한 명동성당 구국선언에 서명한 이유로 구속됐고, 1980년 5월 광주 학살 직전에 내란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1980년 9월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장남 김홍일과 형 김대현도 동시에 투옥됐고, 아내 이희호는 부분적인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AI와 다른 많은 인권 단체들은 이 기간 동안 정열적으로 김대중을 위해 캠페인을 했다. 1981년 국제단체들의 광범위한 국제적 항의와 캠페인이 있은 후 사형선고는 감형됐다. 1982년 그는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1985년 2월 그는 또다시 2년간의 미국망명에서 돌아온 날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 연금과 괴롭힘은 1986년 2월까지 계속됐다.
1993년 런던 방문 중에 김대중은 AI 피에르 싸네 사무총장에게 자신이 쓴 서예 작품을 선물 했는데, 거기 쓰인 네 글자 한자의 의미는 “모든 민족은 한 가족이다”였다.(AI Index: ASA 25/05/98)

단 존스와 김대중

서거 정국에서 한 인권활동가가 떠올랐다. 칠순을 바라보는 영국 앰네스티의 활동가 단 존스(Dan Jones)씨다. 그는 AI 회원으로서 1970년대부터 김대중, 김지하, 서준식․서승 형제 등 한국의 양심수들을 위한 캠페인을 했다. 직업적으로 AI에서 일하게 된 1987년 이후부터는 한국에도 자주 왔고 수많은 양심수 가족들과 인연을 맺고 최루탄 냄새와도 친해 졌으며 광주 망월동 묘지를 아끼는 사람이다. 광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은 일을 생애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긴다. 구명운동을 했던 양심수들이 석방되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그에게 구명 운동을 펼쳤던 이전 사형수의 대통령 당선이 어떤 의미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에피소드 하나. 단 존스씨는 인권교육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인권교육 방법을 훈련한다. 그는 그 여행길에 ‘대통령 김대중 영부인 이희호’라 쓰인 시계를 차고 다녔다. 가운데 봉황이 새겨진 시계였다. 그런데 어느 밀림 속에서 넘어져 시계가 박살났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인권활동을 같이 하며 10여년 넘는 인연을 맺어온 나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이미 퇴임한 대통령의 시계가 어디 남아있을까’ 궁리하다가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것이 호남 출신이 아니면서도 고인의 책이나 연설 비디오 등을 무지 좋아하는 아빠의 소장품들이었다. 아빠의 소장품 가운데서 그 시계를 발견한 나는 멎어있는 시계의 배터리를 갈아 넣어 런던에 보냈다. 작은 물건에 무지 기뻐할 할아버지 활동가를 떠올리며 즐거웠다. 그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허탈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글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연락을 취하다 들은 얘기다.

15년 전 나는 한국의 인권활동가인데 인권교육을 배우고 싶으나 돈도 없고 길도 없다는 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그는 흔쾌히 자기 집에서 9개월간 무전취식을 제공해줬다. 그를 따라 다니면서 인권교육을 귀동냥 하는데 정규시간의 활동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은 그의 과외활동이었다. 방글라데시 의류노동자들 집회, 이주노동자 동네 모임, 주말시장에서 하루 종일 꼬박 나 홀로 캠페인,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인권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모임 등 AI 정규 활동과 상관없이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에 바치는 삶이었다. 그의 집에는 나 말고도 전 세계에서 이런 저런 일로 런던을 찾는 인권활동가들을 위해 언제든지 잠자리와 부엌이 무료로 열려있었다. 인권은 연대라는 걸 깨닫고 실천하는 삶, 그것이 인권교육의 핵심이었다.

연대를 호소하는 오늘의 인권의제

서거정국이 끝나고 실천정국이 시작됐다. 10여 년 전의 인권의제를 오늘 다시 풀어 헤쳐 본다. 이 의제들은 1998년 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취임 전에 AI가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10여 개의 요구사항들은 오늘도 한결같은 현안들이다.

언론인, 노동자, 촛불시민의 대량연행․구속 재판을 비롯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한 구속자 등 멀어져갔던 양심수 의제는 다시 현안이 되고 있다. 국가인권위는 조직축소와 무자격자의 위원장 도둑 취임을 겪었고, 국가인권위원장이란 사람이 전 세계적인 캠페인의 대상이 되어온 국가보안법에 대해 망언을 했다. 국가인권위 조직축소로 인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시행 등을 위한 활동이나 인권교육의 강화는 저만큼 멀어졌다. 이로 인해 세계의 인권향상에 기여할 무대였던 세계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국의 기회를 차버렸을 뿐 아니라 등급의 강등마저 얘기되고 있다. 실질적 사형폐지국에 명단을 올린 지 얼마 안됐는데 다시 사형제의 도입이 호시탐탐 고개를 든다. 과거 권력기구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침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위원회의 활동들은 산적한 일을 남겨두고 통폐합되거나 중단되게 됐다. 비정규직 시대의 여성 인권의 참담함에 보태진 것은 여성부 축소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계속되는 조치의 ‘절약’이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국장이 있던 날 유가족이 또 경찰에게 폭행당했다. 기무사가 민간인 사찰에 나선 것을 비롯해 공안기구의 노골적인 맨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의 기본권인 결사의 권리와 파업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보복 속에서 몸과 정신이 신음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단속에 신음하고 있고 한국의 외국인, 국제결혼가정의 구성원들은 각종 차별로부터 안전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다.

오늘날의 인권의제를 퇴행 속에서가 아니라 인권향상을 위한 전진 속에서 마련하는 일, 연대와 보듬음을 통해 그 열쇠를 찾아내는 일이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인권 의제(국제 앰네스티 1998년 2월)

1997년 10월 AI 사무총장은 대선 후보자 모두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는 후보자들에게 당선된다면 인권 개혁 프로그램에 헌신할 것을 촉구했다.

AI가 이 서한을 발표한 후, 김대중은 전부는 아니지만 양심수 일부를 석방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 당선 후에는 인권개혁을 위한 다수의 제안들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안기부 개혁, 인권위원회 설립, 여성의 권리 보호를 위한 조치들, 한국의 법과 관행을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됐다. AI는 이러한 김 대통령의 제안들을 환영했다.

AI는 1998년 2월 다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아래와 같이 인권개혁을 위한 제안들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양심수를 석방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라
AI는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고 국가보안법을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한다. 최근 AI는 수백 명의 수인들을 위해 캠페인을 해왔고 이들의 사례는 국가보안법에 따른 인권침해의 유형을 논증하고 있다. AI는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비폭력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현재 구금돼있는 모든 양심수의 석방을 촉구한다.

(…)

안기부를 개혁하라
AI는 새 대통령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과거 이름)를 개혁하겠다고 제안한 것에 고무됐고 이러한 개혁이 정보기관이 기본권 권리를 침해하는 걸 방지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최근 몇 년 간 AI는 안기부가 자행한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보고들을 받아왔다. AI는 1996년 12월 안기부의 권한이 남용되지 않도록 보장하거나 막기 위한 추가조치 없이 안기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법률이 통과된 것에 우려한다.

과거와 현재의 인권침해를 조사하라
AI는 과거와 현재 한국에서 보고된 모든 인권침해에 대한 전반적이고 공정하며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한다. 여기에는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과거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 정치적 구속과 부당한 재판 사건이 포함된다. AI는 과거와 현재의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자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고된 모든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는 인권침해에 대한 불처벌 종식을 추구하는 국제인권기준에 부합돼야 한다. 국제인권기준은 인권침해에 대한 모든 보고는 철저하게 공정하게 조사돼야 하며, 조사결과는 공표돼야 하며, 인권침해의 책임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피해자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 증진과 인권 교육을 향상시켜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에 AI는 새 대통령에게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시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의 중요성을 향상시킬 것을 촉구했다.
AI는 새 대통령에게 인권교육을 학교 수업에 통합하고 모든 정부공무원, 법집행 공무원, 군사요원 훈련프로그램에 인권교육의 포함을 보장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여성과 취약집단에 대한 사회적 및 제도적 차별을 방지하도록 한국사회 도처에서 평등을 증진할 것을 촉구했다.

인권위원회를 설립하라
AI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겠다는 새 대통령의 제안에 고무됐고 국가위원회법이 인권위원회에 대한 국제기준에 부합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새로운 위원회의 임무에는 정보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를 포함하여 보고된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법률 개혁을 위한 제안, 인권교육활동의 주도가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가 효과적인 법률구조나 독립적인 사법부의 대체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인권위원회가 효과적이려면 독립적이고 공정해야 하며 한국의 인권옹호자와 대중의 신뢰와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

(…)

사형제를 폐지하라
1997년 12월 30일 23명이 처형된 후에 AI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의 임기 중에는 사형을 폐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 첫 단계로서 모든 사형 선고를 감형하고 더 이상의 처형 명령이 없도록 보장할 것을 새 대통령에게 촉구한다.

노동조합의 권리를 존중하라
AI는 새 대통령에게 노동 법률을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권리와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국제노동기구(ILO) 제 87호와 제 98호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

외국인의 권리와 망명자의 권리를 보호하라
어떤 국적이건 한국에서 망명을 구하는 사람은 인권침해에 직면할 국가로 돌려보내져서는 안 되며, 망명을 구하는 모든 사람은 공정하고 만족스러운 난민 지위 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국제 기준에 부합되도록 그들의 시민적 및 사회적 권리에 대한 합법적인 보호막이 제공돼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인권을 증진하라
유엔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서 한국은 국제적으로 인권상황의 향상을 위해 압력을 가할 책임이 있다. AI는 인권증진을 위한 유엔의 활동에 대한 지지를 표현할 것을 새 대통령에게 촉구하며 김대중 정부가 유엔 체제 안에서나 다른 정부와의 쌍무관계 속에서나 적극적인 인권외교에 헌신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선언을 지지하고 증진할 것을 요청한다

인권오름 제 167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67호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 역자 주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표가 아니라 당신의 행동을 헤아린다”는 말이 사무치는 시대이다. 아주 예전의 인권보고서를 찾아봤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시기의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AI)의 연례 인권보고서이다. 국제앰네스티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인권단체로 한국의 양심수 구명 운동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국내외적으로 정보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기였기에 제한된 내용이 담겨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고난으로 점철됐던 시기였음이 느껴지는 보고서이다. 1980-81년의 한국 인권상황을 2009년의 오늘과 비교하며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어 얻은 것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해보려 한다. 옛날 보고서인 관계로 파일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사본을 제공해 준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감사드린다.

국제앰네스티(이하, AI)의 우려는 양심수의 구속과 투옥, 사법 절차의 잦고 심각한 변칙, 정치수에 대한 학대와 고문, 정치범과 형사범에 대한 사형이다.

1981년 3월 2일 AI는 한국에 대한 우려를 널리 알리고 정치적 투옥, 고문, 불공정 재판 및 사형의 이용을 당국이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세계적인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러한 우려들은 캠페인 초기에 발간한 AI 보고서 「한국: 인권침해」에 기술돼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에 한국의 대부분에 계엄령이 적용됐다.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계엄령은 긴급조치 10호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파업을 금지하고, 전․현직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을 불법화했다. 긴급조치 10호를 위반하는 사람을 체포, 구금, 수색하는 것은 영장 없이 허용됐다. 전국적인 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정부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학생 지도자 등을 구금하고 수 시간 내에 뒤따른 조치였다. 수도 서울에서는 수백 명이 군사당국에 의해 구금됐고, 이들 중 일부는 AI가 양심수로 선정했던 사람들이었다. 광주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이 구금됐고, 이 중 대다수는 군부가 5월 27일 광주지역 항쟁을 진압한 후에 이뤄졌다. 5월 18일 학생 데모는 공수부대의 개입으로 폭력적으로 끝났다. 이후 계속된 충돌은 시위대가 광주를 장악한 때 절정에 도달했다. 5월 27일 군부가 통제를 재장악했다.

1980년 7월 AI는 AI의 우려를 정부와 논의하고, 5월 17일 이후 대량 체포와 고문, 법적 상황, 5월 17일 이전에 구금된 수인들의 처우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다. 당국은 AI 대표단의 입국 허용을 거부했다. 도쿄의 한국 대사관은 AI 대표자에게 말하기를 인권 문제는 “현 시기 한국에서 너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AI의 임무 수행 시기로는 곤란하다고 했다.

1980년 8월 15일 AI는 다수의 권고를 정부에 보냈다. 여기에 포함된 것은 1980년 5월 17일 전후로 구금된 양심수 석방에 대한 호소, 5월 17일 이후 구금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석방 또는 재판, 피구금자 모두의 명단 발표,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구금의 중단, 학대와 고문에 대한 수인들의 주장에 대해 독립적인 기구의 조사,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 특히 강압 하에서 취한 불리한 진술의 증거 배제, 유죄로 증명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에 대한 존중이다.

AI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비폭력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구금하는 긴급조치를 비롯한 법률들의 적용에 우려를 가져왔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명목의 활동에 관해 1961년 반공법 조항으로(1981년 1월 폐지), “반국가단체”에 관해서는 1960년 국가보안법으로, 국가전복과 간첩행위에 관해서는 형법 87, 90, 98조에 의해, 예방 구금에 대해서는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1980년 11월 개정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하에서 구금과 구속이 계속됐다.

새 헌법이 1980년 10월 27일 공표됐고, 이는 고문으로부터의 자유, 언론과 출판, 집회 및 결사의 자유, 강제 자백의 법정에서의 증거배제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들은 “국가안보, 법과 질서의 유지 또는 공공복지를 위해 필요할 때”는 헌법적으로 제한될 수 있었으며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반에 속했다. 계엄령은 1980년 9월 일부 해제되고 1981년 1월 25일 완전히 해제됐지만 계엄법정은 사건을 1981년 2월 24일까지 계속 다뤘다.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으로 대통령 사면이 5,221명의 범죄자와 정치수들에게 취해졌다. 또 다른 대통령 사면은 4월 3일에 있었는데 광주항쟁과 관련 실형을 선고받은 83명에 대해서였다. 이 사면으로 AI가 양심수로 지정한 13명이 석방됐다.

1981년 2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AI는 계엄령 해제를 환영하고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비준을 권고했다. AI는 또한 이전 정권에서 투옥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구금자의 사건을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많은 이들이 강압 또는 때론 고문에 의해 확보된 자백에 기초해서 유죄가 확정된 것으로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9일 AI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석방을 호소하고, 5월 17일에 체포된 다른 43명에게 법적 보호를 완전히 보장할 것과 즉각 석방되지 않을 경우 혐의내용을 공표할 것을 촉구하는 국제전신을 보냈다. 김대중과 그와 함께 재판정에 선 23명은 재판이 시작되기 며칠 전까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구금돼 있었다. 7월 31일 김대중은 정부가 생각건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연설을 하고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로 1980년 5월 19일에서 27일, 광주에서의 학생 봉기를 선동하고 자금을 댄 혐의로 기소됐다. 그와 함께 공동 피고인으로 기소된 12명은 계엄령의 긴급조치에 따라 불법이었던 모임에 참석하고 형법하의 국가전복 음모로 기소됐다. 다른 사람들도 긴급조치를 위반한 혐의로 기속됐다. 8월 14일 군사법정에서의 재판이 시작됐고 9월 17일 전원의 유죄가 확정됐다. 김대중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나머지는 2년에서 20년 사이의 구금형이었다. AI는 이들에 대한 재판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법적 기준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 명을 제외한 피고인 전원이 혐의를 부인했고, 자백을 위해 구타와 협박을 당하고 수면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에도 심각한 제한이 있었다. 피고인들은 변호인을 선택할 수 없었다. 다수의 민권 변호사들이 체포됐고 또 어떤 이들은 변호를 맡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다. 피고인의 법정 증언에도 제약이 가해졌다. 계엄령 위반에 관련해서만 기소된 이들의 경우에는 어떤 증인도 요청되지 않았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증인들은 협박당했고, 피고인을 위한 증인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부적절하게 취득했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이나 그 유효성에 대한 적절한 검토 없이 자백은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AI는 1980년 9월 24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제전신을 보내 항소 법원에서 확정되지 않는다면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할 것을 촉구했다. AI는 김대중과 그의 공동 피고인들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석방 또는 완전한 법적 보호가 되는 개방된 법정에서의 재심을 되풀이해서 호소했다. 1980년 12월 2일, AI는 김대중의 처형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엔인권위원회의 43개 회원국 정부 대표에게 호소했다. 1981년 1월 23일 김대중과 공동피고인 중 일부에 대한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에 대한 세계적인 우려의 표시가 있은 후 사형선고는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됐고 11명의 공동 피고인에 대한 형은 5년에서 15년으로 감형됐다.

AI는 1980년 5월 서울과 지방도시에서의 데모 후에 체포된 다수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데모들은 주로 평화적이었고 AI는 학생들이 폭력을 사용하거나 옹호했다고 하는 어떤 정보도 받은바 없다.

AI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폭력적인 혼란과 관련하여 구금된 사람들에 대한 학대와 고문의 보고에 대해 우려한다. 몇 사람의 수인(囚人)은 조사를 받는 동안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됐다. 수인들은 전해진 바에 따르면 구타당하고 수면을 박탈당하고 자백을 위해 장기간 지속되는 조사를 받았다. AI는 김대중과 관계가 있다는 것과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광주 계엄 법정에서 1980년 10월 25일 390명의 사람들에게 형을 선고한 절차의 변칙성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피고인들에게는 변호사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다.

AI는 한 해 동안 37명의 언론인이 구금됐다고 알고 있다. AI는 한국언론인협회의 의장을 포함해 3명의 회원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1980년 5월 17일 이 협회는 검열과 일을 중단하라는 위협에 대해 군사 당국에 항의했다. 이 협회의 의장 김태홍은 몇 개월의 도피 끝에 8월 27일 체포됐다. 그에 대한 재판과 선고의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긴급조치 10호의 언론 검열 강화에 항의한 8명의 언론인들은 반공법과 긴급조치 10호에 의해 광주 항쟁 기간 동안 군대의 행위에 대해 “거짓되고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AI는 이들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AI는 1981년 3월과 4월, 몇 개 대학에서의 시위 후에 학생들의 체포를 조사했다. 이들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이다. 받은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다. AI는 이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AI는 오랫동안 구금된 양심수들의 석방 호소를 계속했다. 이들 중에는 1974년 “인혁당”사건으로 재판받은 16명의 수인이 있다. 1980년 8월에 AI는 1971년부터 구금돼 온 서준식과 서승의 석방을 위한 특별 호소에 착수했다. 서승은 종신형을 치르고 있고, 서준식에 대한 형은 1978년 5월에 끝났으나 그는 사회안전법 하에서 여전히 구금돼있다.

한 해 동안 AI는 140명의 양심수와 여타 정치수들을 위해 활동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촉구했다.

AI는 정치수와 형사범에 대한 사형선고의 감형을 위해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한 해 동안 정치수에 대해 10건의 사형선고가 부과됐고, 그들 중 여덟은 나중에 대통령에 의해 감형됐다. AI가 아는바에 따르면, 7명의 정치수가 사형수 감방에 있다. 이들 중 2명에 대한 형이 1980년 12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다른 5명의 재심청구는 1980년 7월 25일 기각됐다. 1981년 1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AI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한 결정을 환영했고, 부당한 재판 후에 형이 확정됐다고 여겨지는 4명의 수인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할 것을 촉구했다. 1979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유죄가 확정되고 사형이 선고된 5인에 대해서는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인권오름 제 167호 2009년 08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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