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류은숙

며칠 전부터 핸드폰 기계가 먹통이 됐다. 꼬박 6년을 쓴 기계다. 전화를 무지 싫어하는 나는 생활필수품이란 핸드폰을 장만하지 않고 버텼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아빠가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없이 어찌 사냐’면서 억지로 만들어준 물건이었다. 지인들에게 악명 높은 통화습관으로 알려진, ‘응, 알았어, 끊어’외엔 별말 안하고, 번호 노출 안하고 너무 안 써서인지 한 기계로 6년을 버텼다. 기계가 다된 김에 아예 핸드폰을 없앨 것인가, 남들처럼 최신 폰을 장만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주변 사람들은 6년이나 한 기계로 버텼다는 걸 신기하게 여긴다. 뭐 그게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런데 말이다. 조심조심 쓴 기계도 닳아버리는 6년여 세월동안 한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외쳐온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구로디지털 산업단지에 자리 잡고 디지털위성방송기술의 선두주자임을 자랑해온 기륭전자를 상대로 6년여 다윗의 싸움을 펼쳐온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2005년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분노해서 노조를 만들고 처우개선을 요구했다가 200여명이 해고됐다. 그때 비정규직 파견노동자들이 받던 임금은 그해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1850원이었다. 밥벌이도 밥벌이지만 인간대접을 받아봐야겠다고 싸움에 나선 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요 며칠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의 극한을 시험하는 행동을 할 때만 잠깐 주목받을 뿐, 사람들의 시야밖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94일 씩이나 단식을 하기도 했고 서울광장의 16미터 무대 조명탑, 구로역 광장의 25미터 감시카메라(CCTV) 철탑 등에 오르기도 했다. 굶는 일이라면 진저리가 쳐질 텐데 얼마 전 다시 세 번째 단식을 시작했다. 협상이 또 깨졌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회사와 그걸 방치하는 정부에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들이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굶고 밟히고 협박받고 손해배상 두들겨 맞으며 6년여 한 자리에서 외친 요구는 억울하게 해고됐으니 ‘일자리를 돌려 달라’는 것이고,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로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 회사 다니면 그 회사 직원인 것으로 아는 일반인의 상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물러서면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견노동과 무노조, 무권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강자는 언제나 이기고 챙기며, 약자는 언제나 지고 잃는다는 패배감을 벗어날 수 없기에 계속 가야한다고 말한다.

국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노동 기준이라는 게 있다. 시장에서 강자들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노동규범이 위협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결코 이것만은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이걸 지켜야만 다른 노동기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취지로 세계정상들이 합의한 ‘핵심’ 기준이다. 여기에 속하는 항목은 달랑 네 가지다. 이걸 또 압축하여 두 개만 추려 보면, 그중 하나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가 고용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다. 세상의 노동인권기준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남은 단 두 가지 핵심기준도 못 지킨다면 노동자의 다른 권리상태는 볼 것도 없이 빤한 것이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는 이 ‘핵심’에 해당한다.

많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 핵심 노동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19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절규를 담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이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소수의 남성들이 장악해서 기업주에 순응하는 어용노조에 맞서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만든 노조를 지키려 싸웠다. 이에 노조를 파괴하려는 사측은 깡패들을 동원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세례까지 퍼붓고 공장 밖으로 내쳤다. 여공이라 불리던 그녀들은 부당함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고 동일방직 투쟁은 서슬 퍼런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선 대표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 호소문을 읽다보면 기륭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30여 년 전 선배들이 겪었던 일들과 겹쳐진다. 용역깡패들이 성적인 폭언과 폭력을 가하고 경찰은 폭력을 방관하고 사회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아 저런다는 회사 측의 선전과 정부의 외면까지 꼭 닮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닮은 게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이렇게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륭노동자의 말이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는 동일방직 노동자의 선언과 만난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냉장고가 커지고, 티브이가 평평해져 화려해질수록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일회용 휴지보다 못한 처지로, 김치마저 먹지 못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는 지적은 “100억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는 고발을 이어간다. 진짜 닮은 것은 이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 위해 싸운다.”며 “탄압 때문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륭 노동자들의 의지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다짐을 빼닮았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핸드폰이 존재의 근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디지털 세상이다. 인간과 세상의 소통을 돕는다는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태반이 비정규직이란다. 무소통과 무권리위에서 소통의 기쁨과 권리를 말하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인다. 핸드폰 없이 살아볼까 생각하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대신 이런 걸 이상하게 봐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기 몸을 불사른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기륭여성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해가 됐으면 정말 좋겠다.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겠다.”
이 울부짖음은 지난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에서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깡패들에게 당한 우리 근로자들이 똥물을 뱉으며 통곡하던 말입니다.

가죽장갑을 끼고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이 몇몇 깡패근로자들은 똥을 바께스로 들고 와 머리부터 뒤집어씌우고 손으로 찍어 투표하러 오는 저희들의 입속에 쑤셔 넣고 걸레에 묻혀 얼굴에 문대고 가슴에 집어넣었으며 똥으로 뒤범벅이 되어 눈도 못 뜨는 우리들 머리채를 나꾸어채 끌고 다녔으며 이빨로 입술을 물어뜯기도 했습니다. 이 기막힌 만행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자처하는 경찰들과 근로자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섬유노조 본조 그리고 회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자행된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저희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1972년에 어용노조를 우리의 손으로 선거를 통해 정상을 회복한 후 탄압, 감시, 징계 그리고 채찍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 때부터 관의 노동조합 말살계획은 표면화되었으나 우리는 위협, 매수, 모략에도 굴하지 않고 이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30도가 넘는 땡볕아래서 물조차 마시지 못하며 밤낮없이 만 3일을 단식농성을 했고 경찰과 회사 측 깡패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에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저항을 했고 노조를 지키기 위해 수치심도 버렸으며 회사 밖에서 농성하던 우리의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72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50여명은 기절하고 1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한 동료는 난폭한 경찰의 만행에 쇼크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6개월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저희들은 인권을 위해 구둣발에 짓밟혔고 경찰차 바퀴 밑에 드러누웠으며 휘두르는 몽둥이에 쓰러졌습니다. 경찰은 회사와 결탁하여 지부장을 공금횡령으로 뒤집어씌우는 공작을 하다가 실패를 하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우리들을 취조하고 빨갱이 년들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21일 아침 투표장인 조합사무실은 몇몇 술 먹은 회사 측 남자조합원들이 몽둥이로 다 때려 부숴놨고 투표하러 온 우리들을 구타하고 탈의장에 벗어놓은 옷도 모두 똥을 부어 놓았으며 회사 측 지부장 입후부자 박복례는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저년에게 똥을 먹이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도 못 뜨고 귀와 입으로 온통 똥을 먹은 우리는 영하의 새벽공기를 잊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을 먹을 수는 없다.”라고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치안유지를 위해 동원된 경찰들은 도와달라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야! 이 썅년들아 입 닥쳐 있다가 말릴 꺼야”하며 욕설만 퍼붓고 구경만 하였습니다. 이래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일까요?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100억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똥을 먹어야 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설움이며 고통입니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민주주의도 배웠으며
적어도 우리의 지도자는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회사 측의 꼭두각시에게 우리 노동조합을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정의는 쓰러지지 않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힘찬 격려와 협조를 바랍니다.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1978.3.

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23 호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역자주
국제노동권포럼(Intrernational Labor Rights Forum: ILRF)이 2009년 어머니날 이후부터 전 세계 일하는 엄마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수집한 사연들이다. 이중에서 몇 사례를 소개한다. 취약하고 유연한 노동법은 세계적으로 무시되고 있고 그 결과는 불안정고용, 성폭력, 차별, 결사의 자유 등 권리의 부정이다. 특히 지구적 경제 위기 속에서 늘어난 불안정고용은 여성들의 처지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원문은 www.labourrights.org/rights-for-working-women/working-mothers-stories 에서 볼 수 있다.

아만다 카마초: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조를 조직하다

내 이름은 아만다 카마초, 혼자서 사춘기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랍니다. 나는 17년 동안 콜롬비아에서 꽃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어요. 내 나이 17살에 그 일을 시작했어요. 온실에서 카네이션을 자르는 일을 하고 있지요.

우리는 노조를 결성하기로 결심했어요. 고용주에게 무시 받고 착취당하는데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죠. 2008년 2월 14일에 노조(Asopapagayo)가 시작됐어요. 이 날은 발렌타인데이고, 전 세계 꽃 노동자의 날이기도 한데, 회사가 정규직 계약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해고하려고 혹독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죠. 회사는 10년 이상 일 해온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협력회사나 파견업체에서 온 임시 노동자들로 교체했어요. 남아있는 노동자들에게는 해고된 사람들의 몫까지 더 많은 일을 부과했고요. 임시노동자들은 더 착취됐어요. 그들에겐 서명한 계약이 없기 때문에 초과 시간이나 휴가에 대해 지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료보험의 권리도 없어요. 임시 노동자들은 조직을 해서 노조원이 되는 것도 금지당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직업을 잃을 것이라 여겼기에 노조결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어요. 첫 번째 노조는 씬뜨라빠빠가요(Sintrapapagayo)라 불렸어요. 우리는 노조를 공식으로 등록하려고 청원서에 서명해서 사회보호부에 제출했지만 거부당했어요. 회사가 부패했고 사회보호부에 우리의 등록요건이 안된다고 했기 때문이죠. 회사는 또 노조의 주요 지도자 네 명을 해고했어요.

5월 17일, 우리는 노조(Asopapagayo)를 결성하기로 하고 회사에 항의운동을 시작했어요. 사회보호부는 6월 27일에 드디어 우리 노조를 승인했어요. 12월에 우리는 청원서를 제출했어요. 그 시점에 회사는 노조원들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수당을 빼앗았어요. 콜롬비아 정부는 우리에게 노조를 결성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진짜로 그렇지가 않아요. 2009년 1월 우리는 회사와 협상을 시작했고 4개월의 격렬한 대화 끝에 협상은 4월 13일에 끝났어요. 우리는 드디어 노조에 대한 인정을 받아냈고, 교육과 영양수당 등 노조원들이 잃었던 모든 것에 대해 배상을 받았어요. 봉급도 약간 올랐어요. 우리 노조에는 23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이 있는데 우리는 착취당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요.

꽃 노동자로서 내 삶은 이래요. 다른 많은 콜롬비아의 엄마들처럼, 나는 새벽 3시 반이나 4시에 일어나요. 아침과 아이들이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요. 5시에는 일하러갈 채비가 돼야 해요. 집에 돌아와서 밥하고 아이들 숙제를 돕지요. 9시쯤 잠자리에 들어요. 쉴 틈이 별로 없는 긴긴 하루예요. 나는 통상적인 콜롬비아의 노동일로 따지는 일주일에 6일, 주당 48시간을 일하는데 어머니날 같은 대목이 있는 시기에는 더 오래 일해요.

나는 보통 한 시간에 350개 정도의 꽃줄기를 자르는데, 발렌타이데이나 어머니날 같은 대목기에는 더 많이 400개 정도를 잘라야 해요. 내 일 중의 하나는 식물에서 불필요한 봉오리를 잘라내는 거예요. 관리자는 온갖 일로 우리에게 고함을 질러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다거나 잘못 잘라서 꽃이 상하거나 하는 일로요. 대부분의 꽃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데 하루에 약 8달러예요.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건강을 돌보려면 한 달에 215달러는 드는데, 임금으로는 살아가기가 팍팍해요. 식품비가 최근에 또 올랐어요. 봉급에서 건강관리비, 식대 등을 떼어가요.

꽃 노동자들은 흔히 병에 걸려있고, 손목관절증후군 같은 상해 속에 일해요. 꽃의 일부분을 자를 때마다 우리는 가위를 소독해야 하고, 반복된 움직임으로 허리가 나빠지고 척추손상이 생겨요. 감독관들은 우리가 가위를 소독하는지 지켜봐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꽃 색깔이 변하기 때문이죠. 살충제 때문에도 사람들이 아파요. 살충제는 진저리쳐지고 구역질이 나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 친구들이 일하는 다른 농장들에서는, 고용주들이 흔히 노동자에게 사회보장에 가입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의사에게 가면 고용주가 전혀 사회보장비를 내지 않았다는 게 드러나요. 아이들이 아파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자들의 일은 항상 남자들보다 고돼요. 고용주들이 우리 여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꽃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기 때문이고 꽃을 유지하는데 관계된 온갖 일을 견디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들은 더 자주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들이예요. 남자들은 쓰레기를 치우는 등 꽃 수확후의 일을 하거나 기계작업을 많이 해요. 그런 일이 여자들의 일보다 더 쉬워요. 많은 회사들이 임신한 여성에게 의사가 지시한대로의 수월한 일을 주지 않아요. 그래서 여성들이 아이를 잃었어요. 일부 회사들은 장시간 노동을 원치 않거나 일의 부담을 줄이길 원하는 임신여성을 해고해요.

감독관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우리에게 언어폭력을 가하고 착취를 해요. 실제로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만약 그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으면 자기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자기 상관들에게 자기들도 당했으니까 우리한테 훨씬 더 많이 그러는 거니까요.

모니, 방글라데시의 엄마: 빈약한 임금과 작업장에서의 괴롭힘

내 이름은 모니, 35살입니다. 결혼해서 15살 난 아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는 학교를 관두고 자이언트 옷 공장에서 일하게 됐어요. 겨우 열네 살이었죠. 나는 여전히 여기에서 재봉틀을 밟고 있어요. 나는 평균 월 59달러 정도를 받는데, 임금은 내 생산력에 따라 결정돼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월 24달러밖에 못 벌었어요. 나는 이제 중견 재봉사예요. 한가한 달에는 하루 8시간을 일하지만 주문이 많을 때는 12시간에서 18시간을 일해요. 주말과 휴일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나는 일 년에 11달을 일해요. 나는 항상적인 노동자지만 회사는 아직도 나에게 임명장을 발부해요. 내 임금 전부는 가족을 먹이고 부양하는데 들어가요. 하지만 내가 버는 돈으로는 가족의 월 생계비 전부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보통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요. 식구들을 위해 밥하고, 물 기르고, 씻고 빨래를 해야 하니까요. 7시에 일하러 가요. 1시에서 2시 사이에 집에서 싸간 점심을 먹어요. 귀가 길에는 저녁식사거리를 사요. 집에 오면 밥하고 치우고 잠들기 전에 아들이 숙제를 했는지를 확인해야 해요.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는 육아휴직의 권리가 있지만 정작 내 자신은 그걸 쓸 수가 없었어요. 노동자들에게는 병가의 권리가 있지만 이 권리 또한 대부분 존중받지 못해요. 대부분 노동자들은 존중받지 못하고 작업부하는 부당해요. 나는 동료들과 노조를 만들려다가 차별을 받았어요. 관리인은 내가 다루지 못할 만큼 많은 작업량을 줘서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혔어요. 나는 임신기에 언어폭력을 당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당하는 걸 봤어요. 임신 4개월 째였을 때 관리인은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들은 외설적인 언어를 썼고 해고하겠다고 위협했어요.

우리 공장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승진 기회를 갖지 못해요. 내가 16년 동안 일하면서 제안 받은 유일한 승진은 노조결성을 관두면 주겠다는 거였고, 난 거절했어요. 나는 동료들과 성공적으로 등록된 노조를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시에 해고됐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공장을 찾아야만 했어요. 매일 매일 나는 작업장에서의 노조의 권리와 법적 권리를 위해 싸워요. 하지만 회사가 공장 문을 닫아버릴지 모른다는 항상적인 공포가 여전히 날 사로잡아요.

세계경제위기 이후로, 우리 공장에 주문이 줄었고 일하는 시간이 줄었어요. 임금이 연체됐고, 매달 말 난 임금 때문에 싸워야 해요. 나처럼, 공장의 많은 여성들은 존중받지 못해요. 내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노동자 개인의 협상권과 노조의 집단적 협상권이 확립될 것이고, 난 바이어들과 국제노동자단체들에게 촉구할 거예요. 우리가 공장폐쇄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계속 공장에 주문을 해달라고요.

마리카, 파키스탄의 엄마: 권리를 주장하다 해고되다

내 이름은 마리카, 36살입니다. 축구공을 만드는 공장에서 광택제 칠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5년간 일했고 힘든 일을 정직하게 하는데 보람을 느꼈죠. 하지만 난 공장주가 여성들의 고용조건을 바꾼 줄 몰랐어요. 월급제에서 계약제로요. 나와 다른 세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계약제로는 일할 수 없다고 주장했어요. 당시에 내 월급은 한 달에 50달러였어요. 계약제를 거부했다고 해서 공장주는 나랑 그 3명을 해고했고 줄 돈도 주지 않았어요. 노동법원을 통해 우리는 받을 건 받아냈지만, 여전히 실업상태였어요.

내 가족들한테는 시련이 시작됐어요. 남편만이 고용돼있었기에 가족의 수입이 줄어들었죠. 전에는 사회보장으로 의료서비스와 약을 무상으로 받았는데, 이제는 시장에서 비싼 약을 사야만 해요. 내가 병이 든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사설병원에 진찰받으러 갔는데 자궁이 감염돼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저축 전부와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서 수술비를 마련해야 했어요. 친척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지요. 사설 병원은 내게 강도 같아서 돈 전부를 치료에 써버렸어요. 수술 후에 의사는 내게 1년간은 어떤 힘든 일도 삼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의사의 조언을 들으려했죠. 하지만 남편의 봉급만으론 식비밖에 충당 못하고, 우리 가족은 미래를 위해 동전 한 푼도 저축할 수가 없어요.

내 상황은 더 악화됐어요. 고등학교를 마친 딸이 공부를 더하고 싶다고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겠다고 했어요. 남편과 나는 학비를 감당할 처지가 못 된다고 말해야만 했죠. 딸아이는 대학에 못가면 죽어버리겠다고 했어요. 남편과 나는 놀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을 보내주겠다고 했죠. 나는 또 다른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 입학금을 마련했어요. 지금 딸아이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더 형편이 나빠진 건, 남편이 숨 쉬는데 문제가 생겨서 일을 나갈 수 없다는 거고, 우리 둘 다 집에 한 푼도 벌어오지 못하다는 거예요. 요즘 살림형편은 더 나빠지고 있고 난 뭘 해야 할지 어찌 빚을 갚을지 모르겠어요.

가끔 나는 생각해요. 공장주가 날 해고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거라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더라면 치료비가 무료였을 테고 가산을 모두 팔아치울 형편에 놓이지 않았을 텐데. 매달 월급을 받았으면 살림이 나아졌을 거고 그러면 빚도 지지 않았을 텐데.

 

 

<인권오름 제 223 호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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