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51 호 [기사입력] 2015년 08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연대

A: 뭐해? 또 드라마 보고 있어? 맨날 똑같은 얘기인데 지겹지도 않니? 로맨틱이 아니라 완전 사기잖아 사기!
B: 환상이란 게 있는 거잖아. 사는 게 지질한데 드라마라도 환상이어야지.
A: 넌 아직도 백마 탄 왕자, 신데렐라 얘기가 그렇게 좋니?
B: 그건 아냐.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환상은 주인공 옆 친구들이야. 늘 하소연 들어주고 내 일처럼 같이 화내고 슬퍼하고 어려울 때마다 곁을 지키는 친구, 사실 그게 젤 비현실적 캐릭터지.
A: 넌 드라마에서 무슨 연대를 찾고 있니?
B: 갑자기 무슨 연대? 드라마 얘기하다 말고?
A: 돌봄, 관심, 감정적 결속, 인간적 유대, 넘치는 정…. 네가 찾는 환상이 이런 거잖아? 이런 걸 주제로 하는 담론이 연대니까 해본 말이야.
B: 경쟁, 공격성, 경멸, 모욕, 무시…. 뭐 이런 것들보다야 훨 듣기 좋네. 근데 왜 우린 그 좋은 걸 느낄 수 없는 걸까?

연대의 요청

A: 연대는 우리가 느끼는 사회상에 대한 대응이래. 우리가 맨날 불평하는 게 ‘사는 게 불안하다’, ‘다들 저밖에 모른다’, ‘사회가 왜 이 모양이냐’는 거잖아. 이런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잘 안보이니까 연대에 대한 느낌이 오지 않는 것 같아.
B: 근데 뒤집어보면, 아쉬우니까 연대를 더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대라는 개념이 원래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사회의 실패 때문에 등장한 거라잖아. 나는 지금 믿음 가는 안정적이고 친밀한 관계, 사회안전망이라 기댈 수 있는 지원 같은 게 정말 아쉽거든.
A: 아쉽고말고. 옛사람들이 끈끈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관계, 소속, 소속감, 이런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 가정, 직장, 노조, 국가? 이런 소속이 누구한테나 열려있지도 않거니와 간신히 속해 있다 하더라도 예전 같은 소속감을 느끼긴 어려워. 때론 그런 소속이 날 지원해준다긴 보다 오히려 부담주고 괴롭히는 것 같기도 해.
B: 우린 사회안전망이란 걸 제대로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그게 앞선 복지국가에서조차 쇠퇴하고 있다고 하지. 끈끈한 관계를 만들 만한 관계망에 들어가긴 너무 힘들어. 취직하긴 어렵지 잘리긴 쉽지, 노조는커녕 오늘 만난 사람이 내일도 같이 일할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어. 임시 일자리 가면 이름도 안 물어. 내가 내일 또 볼 사람이란 생각이 있어야 이름을 묻지.
A: ‘인간은 원래 상호의존하며 상부상조하며 사는 거야’란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던 시대에는 연대를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로 해체된 사회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연대 개념의 본격적 시작이었어. 보편적 인류애로 인간 사이 위계와 구분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연대, 연대를 제도화해서 사회적 시민권을 만들고 지탱한 연대, 공유하는 가치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 다양한 연대가 출현해왔지.
B: 그런 연대들의 맥락이란 게 있을 거 아냐. 그런 개념정의를 익히고 따르는 것으로 우리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사회적 조건에서 어떻게 연대할까를 궁리해야 하는데….
A: 그 시절이 좋았다면서 옛날식으로 재결합하자거나 ‘묻지마 결합’ 같은 건 있을 수 없지. 연대는 자칫하면 적당한 조화와 통합에 호소하는 김빠진 얘기가 되기 쉬워. 불의에 맞선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게 문제인식을 제쳐둔 통합의 설교야.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여는 연대가 아니라 괜한 향수어린 공동체 이상주의로 빠져들 수도 있어.
B: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으로서의 연대?
A: 나와 주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숙성된 관심과 감정이 낯선 이들과 공유할 가치와 제도에 대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 아닐까? 우린 모여서 놀고 즐기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사안에 대해 뭉칠 필요도 있고,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어. 연대의 얼굴은 다양한 것 같아.

연대를 억압하는 배제적 연대

A: 우린 먼저 연대에 대한 불신부터 벗어야 할 것 같아.
B: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 신뢰의 결여를 젤 드러내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인할 수가 없어서 서글퍼.
A: 사실 그 말은 ‘넌 의지할 데라곤 없는 존재’라는 걸 재확인해 주는 말 같아.
B: 근데 믿을 건 개인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 연대 따윈 시대착오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오히려 자기들끼리 딴딴하게 뭉쳐 있더라구.
A: 그렇지. 어느 시인은 “이미 배불리 먹은 자들이나 먹는 것을 혐오한다”고 했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결속이 센 사람들일수록 약자들이 뭉치는 걸 혐오하고 핍박하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무임승차를 조장하고 성실한 개인의 몫을 빼앗아간다고 난리 난리를 쳐.
B: 소위 빽과 연줄을 동원해서 할 것 못할 것 다할 수 있는 힘,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사회적 자본이란 걸 독식하면서, 너희는 연대를 꿈꾸지 말라니. 기댈만한 인적 관계도 사회적 제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족벌, 패거리, 파벌, 은밀한 담합 등 그들끼리의 배제적 연대에 맞서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문제를 공동으로 개선할 수 있고 불리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포함하는 그런 연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런 연대를 친밀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공적인 제도로서 만들고 싶은 거거든. 그런 힘을 모아보자고 부르짖으면 개인의 권리가 침투당한다고 호들갑 떠는 건 오히려 단단히 뭉쳐 있는 사람들의 위장이 아닐까?

인권과 연대

A: 그런 면에서 보면 연대도 일종의 권리고 연대의 결여 또는 부족은 인권침해인 것 같아.
B: 인권선언 같은 거 읽어보면, 권리가 엄청 많잖아. 국제적으로 인정된 권리가 60여 개는 된다더라. 그런데 왜 내 삶속에선 권리를 구경하기 힘들지?
A: 권리가 어떤 틀에서 구현되는지에 달린 문제 같아. 형식상으론 각 사람이 똑같이 그 권리들을 개인적으로 가졌잖아?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하는 틀에서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권리의 칼을 뽑아들 거야. 그럼 서로 베고 찌르기만 하다 쓰러질 것 같아.
B: 개인의 권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권리로 끝나기만 하는 틀에서는 그렇겠지. 문자론 똑같은 ‘개인’이지만 결코 권력이 똑같지 않은 ‘개인’들의 세계에서 그런 식의 권리 다툼의 승패는 뻔해. 불의한 강자에 의한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제거하는 힘이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힘이 연대 아닐까? 그런 연대의 힘을 업지 않고 나 같은 개인 각자가 권리를 자급자족하는 게 가능하겠어?
나는 연대가 권리란 동전을 유통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해. 권리라는 동전을 개별적으로 아무리 쌓아놓아도 그걸로 타인과 교섭하고 합의하고 뭔가를 구축하는 과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잖아.
A: 권리가 끝없는 대결이 아니라 상호보장 되기 위한 조건이자 환경이 연대라고 할 수 있겠네.
B: 근데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연대’란 말은 안 나오던데.
A: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문에서 암시돼 있고, 제28조에 있는 권리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 및 국제체제’란 말에 담겨 있어. 그리고 본문에 있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등이 연대를 사회적 시민권으로 다룬 권리들이야. 또 연대는 ‘권리’와 ‘의무’를 함께 담은 말로도 생각할 수 있어.
B: 권리와 의무가 동전의 양면 같단 말이야?
A: 응. 법에서 다루는 채권·채무 관계를 집단적 차원에서 책임관계로 고려하게 만든 것이 연대야. 법적 개념을 넘어 정치적 개념이 되면서 연대는 새로운 유형의 제도 구성원리가 되었어.
B: 난 이왕이면 채권이 좋은데, 채무는 끔찍해.
A: 사회로부터 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느냐 개인이 사회에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느냐, 권리냐 의무냐의 차이인데, 사실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공공서비스나 사회적 인프라의 혜택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어. 그럴 경우 사회로부터 많은 몫을 받은 것이고 그만큼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 아닐까? 또 사회적 권리의 경우를 생각해봐. 사회보장과 관련된 세금을 납부해서 연대에 기여할 의무가 있고, 내가 노동능력의 상실로 소위 기여가 없다 할지라도 사회의 성원으로서 사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어떤 경우건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개인의 업적을 따지거나 가족관계 등 기댈만한 인적관계에 내맡기지 않고 사회가 집합적으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만드는 거야.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필요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거지.
B: 내가 채권자로도 채무자로도 등장할 수 있는 관계네. 나에겐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고.
A: 가령 돈에 쪼들릴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백 원씩만 줬으면 좋겠다.’ 집합적으로 곤궁을 해결하는 연대의 제도는 대대적인 상부상조를 가능하게 해. 게다가 내가 직접 백 원을 구걸 또는 호소하는 수치를 느끼지 않고, 익명의 상대들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좋아. 반대로 개인들이 자기가 받는 혜택은 많아지고 튼튼해질 것을 요구하지만, 지는 부담은 줄이기를 요구하는 이중성이 있어. 차가운 관료제가 대면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끈끈함을 주기는 좀 어렵지.
B: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에는 늘 긴장감이 있는 거지. 개인의 자유와 집합적 책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 간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 둘 간의 적절한 긴장과 조합이 필요할 것 같아.

연대의 지구적 틀짜기

A: 최근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 사람들은 연대의 틀을 지구적인 것으로 상승시켜야 한다고들 해.
B: 가까운 공간에서도 내 자리가 불안하고 관계 맺기가 어려운데 국제적 차원의 연대라…. 그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맨날 비행기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나 국제기구 종사자가 아닌 바에야….
A: 틀을 단지 키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틀의 성격을 바꾼다는 거야. 한 국가 차원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려면 틀을 바꿔야지, 헌 틀에서 작업을 하면 당면한 문제에 적용이 안 될 거야. 가령 아까 말한 사회적 시민권 같은 건 한 국가틀 내에서만 가능하잖아. 국경을 넘어서면 권리의 문제가 아닌 빈곤구제로 바뀌어버려. 이걸 조정하는 틀을 만들자는 거야.
B: 나는 여기 묶여 있고, 중요한 결정의 힘은 국경을 맘대로 넘나드는데 내가 무슨 틀을 바꿀 수 있는 거지?
A: 넘나드는 것들, 사람이건 상품이건 기본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틀을 맞추자는 거야.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책임회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틀을 만들자는 거지. 가령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구 어디에서나 경제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자라면 누구든 그 활동의 결과로 환경과 인간에게 미친 손해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야. 그들이 예로 드는 유럽의 기준 중에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 상품을 하자있는 상품으로 정의하고, 이 하자로 인하여 사람이나 재산에 가해진 손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계약관계가 있건 없건 생산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어.
B: 그런 식으로 초국적 기업 등에 책임을 묻는 일 중요하지. 근데 듣고 보니 내가 지구적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따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아.
A: 프랑스 혁명의 대표 구호가 자유, 평등, 우애인 건 잘 알려져 있지?
B: 그렇지. 그 ‘우애’가 오늘날 ‘연대’로 전개돼온 거고.
A: ‘우애’를 강조하면서 “프랑스에서 유일한 타인은 나쁜 시민 뿐”이란 선언이 있었대.
B: ‘나쁜 시민’이라고? 어떤 이가 나쁜 시민인데?
A: 공적인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시민을 가리켜 나쁜 시민이라 했대.
B: 나는 나쁜 친구도 나쁜 시민도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삶은 너무 피곤해. 아, 연대의 고민은 끝날 일이 없겠네.

 

인권오름 제 451 호 [기사입력] 2015년 08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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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7. 8. 1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앞에서 유럽 정치에서의 몇 가지 연대 사상을 살펴봤다. 연대 사상은 맑스주의, 수정 사회주의,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 및 국가와 인종에 대한 국수주의 사상(파시즘) 등 다양한 역사적·이데올로기적 전통에서 나왔다. 이들 중 수정 사회주의와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이 유럽 정치에 특히 영향을 미쳤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연대개념을 당의 핵심가치와 정치 언어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정치에서 연대 개념이 성공적으로 구사됐다는 점은 그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는데 연대는 그 분명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연대 개념의 핵심을 규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정당의 다른 핵심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연대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에서 사용된 연대 개념의 유동성과 느슨함은 지적 불만을 야기했다. 이에 현대 사회학은 연대의 개념을 다시 파고들었다. 개념의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연대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의 수용에 기반하며, 정치적 이타주의와 공감에 기초한 개념으로 확장돼왔다. 이런 종류의 연대 개념이 직면한 현재의 도전들은 무엇인가?

연대의 계급적 기초

노동운동의 연대사상은 노동계급의 파편화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재산이 없는 남성 임금 노동자를 모델로 한 연대개념은 적어도 1970년대부터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계급구조는 변해왔다. 산업 노동자의 수는 감소하고 있고 사적 및 공적 서비스 종사자가 늘어나고 있다. 서유럽 사회에 사는 사람들 중 아주 소수만이 자신이 노동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은 더욱 파편화되고 다원화됐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었고 저임금 노동과 공적 부문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주자는 노동시장에서 다른 부문을 차지하며, 이들은 노동시장과 사회를 더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질성과 다양성의 증대는 계급 구조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노동자가 부문과 집단으로 분화되면서 각자의 경제적 이익을 다른 노동자들과 상관없이 추구하게 됐다. 정치의식으로서의 연대는 소비자 사회의 개인주의와 사적이고 개인적인 만족의 추구에 굴복하게 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급 연대의 소멸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계급은 여전히 사회 정체성의 가장 공통적인 원천이며 복지국가에 대한 태도 유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라는 주장이 있다.

사회구조와 관련된 또 다른 핵심 문제는 중산층의 중요성의 증대이다. 연대사상이 노동운동에서 발전할 때 노동계급이 이질적이었듯이 중산층도 아주 이질적이다. 어떤 중산층은 노동계급에 가깝고 어떤 중산층은 고도의 자율성과 고용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또한 계급은 생산과 경제, 착취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교육), 사회적 자본(사회관계), 상징 자본(위신)과도 관련된다. 이런 고도의 차별성이 섞여서 오늘날 연대 현상의 사회적 기초를 구성할 수 있을까? 계급의 개념을 아무리 확장한다 할지라도 연대사상의 발전에 복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개인주의

개인주의의 증대도 연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19세기의 어떤 학자는 ‘개인이 일종의 종교가 됐다’며 개인주의의 증대가 사회통합과 연대에 끼치는 악영향을 우려했다. 현대의 개인주의 분석자들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시장은 개인의 권리와 책임성을 강조했다는 의미에서 그 출발부터 개인주의를 증진시켰다. 근대성은 자아 설계를 열어젖혔지만 상품 자본주의의 획일화 효과에 더 강력한 영향을 받는 조건하에서 그랬다. 자아설계는 욕망하는 재화의 소유와 인위적으로 구성된 삶의 추구로 변환돼간다. 자아실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보편적인 도덕 기준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되고 타인에 대한 관계는 단지 친밀한 관계영역에서만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주의의 증대는 개인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해 집단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싶어 하지 아니하게 하고, 현대사회의 집단적 연대의 기초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연대는 더 이상 전통이나 물려받은 충성심 또는 계급 정체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강조돼야 할 점은 개인주의가 반드시 이기주의의 증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내가 유일한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면, 다른 개인들도 마찬가지로 유일하며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보편성의 수용은 개인주의와 근대성과 강력하게 결합돼있다.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사민주의와 기독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강조를 연대와 결합시켰다. 증대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연대를 부식시킨다는 생각은 개인주의와 보편적 인간 존엄성에 대한 사상이 한데 얽혀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로 대체돼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연대와 개인의 자율성 및 자아실현이 새롭게 혼합돼 있다. 이들 가치간의 균형과 목적은 사회계급 속에서, 개인들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맥락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 현대의 개인들은 연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가질 수도 있고 안가질 수도 있고, 자신의 개인적 삶의 설계에 연대를 통합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소비주의

개인주의의 발전의 뿌리는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근 수십 년간 증대된 개인주의는 중산층의 성장과 분명 결합돼있다. 중산층과 개인주의의 성장에 부가된 것은 소비주의의 증대이고, 이 셋의 결합이 이 시대 연대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계급 연대는 빈곤과 불안에 대한 공통된 경험에서 성장했다. 상호성실과 서비스의 교환, 협력으로 빈곤과 불안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엄청난 경제 성장은 대량 빈곤을 퇴치했고 복지국가의 확장과 사적 소비의 엄청난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삶의 위험성은 매우 축소됐고, 물질적 재화의 소비와 생활양식의 선택에서의 개인적 선택의 기회가 크게 성장했다. 개인의 자율성 증대의 기반이 마련됐고 집단적 연대의 필요성은 대다수에게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정체성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크게 결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시간을 덜 보내고 비용이 드는 여가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생산의 역할과 소비의 역할간의 균형이 무너져왔다. 소득과 구매력의 증가는 시장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할 가능성을 증대시켰고 개인은 더 강력한 자기 충족감을 발전시킨다. 모든 개인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인식은 줄어들고 집단적 조정에 대한 지지는 부식될 수 있다.

소비자로서의 태도는 공공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또한 발전됐다. 집단적인 공공복지는 소비자의 개인적 선호에 맞춰야 하는 소비자 서비스로 보이지 않는다. 개인들은 공공 서비스가 자신의 요구와 선호를 충족시키지 않을 때마다 사적 시장에서 사회적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권리로서 요구하는 경향성을 더 갖게 됐다. 이런 식으로 소비주의는 새로운 의미의 개인적 자유를 자극했다. 이런 자유는 사적 서비스에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해나 사회의 집단적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를 선택할 자유를 주장하게 됐다. 집단적 연대와 개인의 자유간의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현저해지고 있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공공 서비스의 지도자들이 선전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돼왔다. 이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하고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의 생산을 지향한다. 이런 경향성의 문제는 보건과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 시장 원칙과 경쟁의 수용이다. 그로 인해 이전에 연대에 기반을 두었던 공적 제도가 개인의 구매력에 기반을 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연대를 해치는가?

연대와 복지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오늘날 복지국가는 제도화된 연대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많은 이론가들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연대를 부식시킬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현재 상당한 증거들을 볼 때 후퇴와 축소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는 살아남았고, 복지국가의 위기는 더 이상 유행하는 연구 주제가 아닌 것 같다. 사회조사 결과들은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여전히 확고하며 많은 국가의 시민들의 태도가 복지국가의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증대가 제도화된 연대를 부식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치는 못하다.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일반적 경향성은 보편성과 평등, 시민권이라는 점에서 약화되고 있다. 선별성, 사적 전달, 개인의 책임성과 노동 참여가 강화돼왔다. 게다가 복지에 대한 여론은 흔히 모순적이며 평등은 지배적인 가치가 아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복지국가가 어느 정도로 연대를 배양하느냐 아니면 연대를 해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답변이 있다. 한 가지 답변은 잘 발전된 보편적인 복지국가가 공동체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답변은 공동체와 연대의 전제조건인 공통의 책임성을 복지국가가 저해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재분배와 사회적 서비스의 제공에 대한 공적 책임성이 공동체의 궁핍한 구성원을 돌볼 도덕적 책임성을 시민사회로부터 제거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는 연대에 기반을 두어야 할 제도가 오히려 그런 제도의 기반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해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덕적인 타인과의 관계맺기와 연대에 기초해야할 행위가 제도화된 유사 연대가 돼버리면서, 타인의 상황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그 도덕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세금을 지불하는 관료적인 행위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연대와 복지국가의 관계가 복잡한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위험과 자원을 공유하려는 시민의 준비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민들은 복지국가를 대규모 보험회사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증대되고 개인 저축의 가능성이 강화된다고 해서 반드시 복지국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견해가 우세할수록, 복지에서의 보편주의, 재분배, 연대가 손상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동맹이 복지국가의 연대를 방어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방어가 3세계와 이주자, 억압받고 차별받는 집단에 대한 연대를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모호한 현상의 지구화

오늘날 연대에 대한 주요 도전에서 지구화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대전의 발발은 국제적 노동자 연대의 사상의 패배를 보여줬다. 1차 대전 후에 ‘민족’은 연대를 말하는 틀이 됐고, 2차 대전 후에는 민족적 복지 국가가 수립되고 연대의 언어로 정당화됐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연대 담론은 민족국가가 국가 장치와 의사결정을 통해 자기 영토를 통제하고 일종의 재분배와 고용정책을 가진 경제정책을 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했다. 오늘날 중심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로 이런 생각들이 지구화시대에도 유효할 수 있느냐이다.

연대 사상은 언제나 시장의 확장과 동반된 사회적 유대의 해체에 대한 대응으로서 시장의 팽창에 대한 우려를 표시해왔다. 지구화는 국경의 제거 내지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국제적인 자본과 투자,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유통을 허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는 시장의 더 큰 확장을 의미하며 연대 사상에 대한 위협이 된다. 초국적 기업은 일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핵심 행위자가 됐다. 노동조합과 피고용인의 전략적 입지는 약화됐고, 자본소유자와 투자가들의 입지는 강화됐다. 각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자들은 이런 새로운 경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은 임금을 받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국가들의 노동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되고 국경을 초월한 연대는 더욱 어렵게 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구화가 연대의 전통적 형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화는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다. 또한 사회문제가 지구화된다. 기구온난화와 대기 오염은 국경을 존중하지 않는다. 전쟁과 자연재해는 타국의 안전, 노동시장, 문화와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테러는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유전자 조작된 식품은 세계 어느 곳에나 쉽게 확산될 수 있다. 여행의 증가는 전염병과 질병을 쉽게 확산시킨다. 민족국가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지구화의 영향은 민족국가가 자국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자기 힘만으로는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지구화는 국제적 및 초국적 조직과 네트워크의 성장이다. 1976년부터 1995년까지 1천 6백여 개의 국제 조약이 비준됐고, 이중 백여 개가 새로운 국제기구를 탄생시켰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4천개가 넘는 국제회의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러한 국제조직과 회의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대다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국제조직은 부유한 국가들이 지배한다. 이들 기구가 국제 연대를 대표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국제기구들은 정치투쟁과 공적담론의 장이며 새로운 동맹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창조한다.

넷째, 지구화는 국제법과 규제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제법과 조약은 무역, 운송, 통신을 규제하고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민족국가는 더 이상 입법의 주역이 아니다. 국제조직의 수립, 협상, 조약, 지역 및 국제 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법이 발전된다. 이런 국제법의 주요 특성은 새롭고 긍정적인 국제 질서를 대표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헤게모니의 표현에 복무한다는 시각이 있다.

다섯째, 지구화의 또 다른 측면은 국제적 자원조직, 네트워크, 협력의 강화이다. 이들의 연대 개념은 시장과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동반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이들 운동은 기존의 정당이 충족시키지 못했던 도전들에 대한 대응을 발전시켰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핵무장 해제, 환경에 대한 위협에 맞서기, 성적 차별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여기서 던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느 정도로 사회운동에서 연대가 정착할 수 있느냐이다. 사회운동의 제1의 물결(노동운동과 교회운동), 제2의 물결(60년대와 70년대의 다양한 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지구화에 대한 우려와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에서 연대는 무엇인가?

노동운동은 지구화가 매우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운동은 국제적 및 지역적 차원에서 공동의 대응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사회대중운동의 성격을 갖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 운동은 노동운동보다는 다소 일관된 공통의 이데올로기가 부족하다. 전체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지구화 시대의 지구적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운동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국제연대와는 다른 형태의 국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연대는 가능한가? 기존 정당과 조직에 대한 활동가들의 회의적 태도가 일관성 있고 광범위한 정치 동맹 수립을 어렵게 하지는 않는가?

지구적 시민자격 - 지구적 윤리?

복잡다기한 현 세계에서 연대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연대가 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권리와 의무로 제도화돼야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논쟁하고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공적인 장의 형성이 동반돼야 국제법의 성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공적인 장의 형성은 지구적 연대의 필수적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공적인 논쟁과 의사결정권한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 국제영역이다.

연대의 지구화는 지구적 시민자격이라는 맥락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의 완전한 발전을 포함해야 한다. 지구적 시민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선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지구적 윤리의 핵심은 지구적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것이고, 그런 책임성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 지구적 시민은 자신의 국민국가에 대한 애착과 지구적 공동체에 대한 애착 사이에 의식적이고 세심한 균형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연대는 민주적 참여와 법의 지배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포함해야 한다. 이런 체계를 혹자는 세계적 민주주의의 수립이라 했다. 세계적 민주주의란 국제적 차원에서의 공평한 법의 집행, 더 큰 투명성과 책임성, 지구적 거버넌스의 민주성, 지방·일국적·지역적 및 국제적 차원 모두에서의 보다 강력하고 유능한 거버넌스를 의미한다. 이런 체계는 세계적인 가치나 윤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지구적 사회정의, 민주주의, 보편적 인권, 법의 지배, 인간안보 및 초국적 연대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지구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윤리만으로 될까, 모든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런 원칙과 가치에 기반을 둔 국제관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될까?

물론 문제는 있다. 윤리만으로는 지구적 연대의 굳건한 기초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법 체계는 서구의 경제력과 협상력의 결과이다. 의사소통의 수단은 불균등하게 분배돼있고 세계의 다수가 배제돼 있다. 경제, 법률, 정치의 지구화는 서유럽 정부들이 자국의 목적을 추구할 의지나 능력을 상실할 지점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개인주의와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이 책에서 연구된 유럽 국가들의 성격이다. 이런 점들은 연대가 당장 발전할 것이라는 낙관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와있지 않고,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에 근거한 미래 예측은 거의 언제나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는 점을 기억하자. [류은숙] <2007년 8월 15일 인권오름 제67호>

작성일자 : 2007. 7. 18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필자는 북·서유럽의 8개 사민주의 계열 정당의 강령을 중심으로 연대 사상의 변화를 분석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및 영국의 정당들이다. 필자는 영국 노동당을 ‘연대’에 관한 한 유럽 사민주의의 예외로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 전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연대 개념이 자리할 구석이 없었다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7개 정당들은 초기에는 노동자 계급 중심의 연대 사상을 취했다. 이것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 타 계급을 포괄할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인민, 미래세대, 이주자와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대로 확장‧전환되었다. 그리고 ‘연대’는 연설문에서나 가끔 수사어구로 쓰이던 수준에서 당 강령의 핵심적인 사상과 기본 원칙으로 고양되게 된다. 이 과정은 국가에 따라 20년에서 5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연대 사상을 가장 먼저 반영하고 발전시킨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사민당이었고 가장 늦은 곳은 남유럽이었다.

전개 과정

1차 세계대전이 있기까지, 대부분의 사민당들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연대 개념을 고수했다. 즉, 연대는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다른 노동자와의 동일시와 일체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전쟁의 그림자는 국제적 노동계급의 단결을 불확실하게 했다. 한 국가의 노동자들이 타국의 노동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질수록 연대의 호소도 늘어갔다. 사민당들은 군비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과 ‘타국의 노동자와 연대할 의무’를 외쳤지만 노동자가 자국 정부 편에 서서 전쟁에 나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내부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어느 정도 이전의 정치적 및 사회적 갈등을 누그러뜨렸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기독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저항(레지스탕스)운동에 함께 결합했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과 경제 성장의 필요성 앞에서 계급투쟁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쟁 전에 작동했던 탈급진화 과정을 강화했다. 빠른 재건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협력이 긴요했다. 계급투쟁과 계급연대 같은 개념은 이전보다 어색하고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이 점이 당 강령에 반영되면서 ‘연대’는 이제 획득돼야 할 의미가 됐다.

이와 동시에 사민주의 정당은 선거에서의 지지를 확대했다. 정권을 잡은 사민주의 정당이 당면한 도전은 국가경제 성장과 국가의 재건이었다. 반면 야당에 머무른 사민당들에게 도전은 정치적 고립을 뚫고 선거에서의 지지를 늘리는 것이었다.

사민당들이 1951년 독일에서의 신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만나서 채택한 최종 결의안은 이 두 과제를 아우른 것이었다. 모든 임금 노동자의 연대에 호소했고 파시스트 독재하의 모든 민족들의 연대를 선언했다. 연대는 불명료하기는 하지만 뭔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결의안은 경제성장을 자극하기에 중요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생길 수 있는 공동체 정서와 연대, 노동 노력에 대한 개인의 만족을 언급했다. 그러나 제3세계의 피억압 민족들과의 연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거대한 식민 권력이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 인터내셔널 강령은 당시 사민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러한 전개는 이 시기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실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구의 대다수에게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리라는 전망을 안겨주었다. 케인즈주의 경제 이론은 사민주의 정당에 경제적 변동을 조정할 도구를 제공했다. 많은 국가들에서 고용주와 노동조직 간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합의는 임금 요구가 이윤과 투자를 잠식하지 않는 한도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수의 증대는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권에 관심을 가진 사민주의 정당들은 뛰어난 경제적 전망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의회의 다수를 모으기 위해 새로운 선거 동맹을 취해야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구조개혁을 포기했고 그 대신 생활수준의 향상과 생활의 위협에 대한 더 많은 예측가능성과 보장을 만드는 사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여당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전과 합의의 분위기에는 계급투쟁과 결합되고 노동계급에만 집중한 연대사상의 여지가 없었다. 정권에 대한 야망을 가진 당들은 산업 노동계급보다 더 큰 부문의 인구를 포용해야 했다. 이전에는 농민이 중요한 잠재적 동맹이었다면, 이제 정치적 이해는 공사 부문의 새로운 화이트칼라 집단으로 전환돼야 했다. 노동계급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와 무관하게,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점차 다급해진 것은 노동계급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회적 범주에 대한 당의 호소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사민주의의 목적은 선거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므로, 연대의 정의는 ‘계급’이 아닌 ‘인민’을 다뤄야 한다”, “노동자 연대는 사회적 연대로 확대돼야 한다”는 발언들이 대표적인 지도자들에게서 나왔다.

1945년부터 1968년의 학생봉기까지 사민주의 강령에서 연대의 개념은 더욱 포괄적이 됐다. 연대는 이제 억압받고 권리가 없거나 차별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의미하게 됐다. 제제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제3세계 민족들이 연대 개념에 포함됐다. 여성, 장애인, 인종적 및 성적 소수자가 대안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포함돼야 했다. 다른 한편 학생봉기는 ‘일치성’에 저항하는 투쟁과 부모세대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권리 투쟁을 표현했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가치는 한편으론 집단적 연대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론 개인의 자유, 자아실현, 개인의 정체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일면 모순돼 보이는 요소를 조합했다. 많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1968년의 문화적 변화에다가 석유파동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부가됐다. 2차 대전 이후 오랜 호황은 끝났다. 실업이 늘어나고 복지삭감이 논의되고 실행됐다. 1980년대에는 위기가 심화됐다. 시장 이데올로기와 개인주의가 지배적이었고 사민당은 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불확실성을 심화시켰다.

이 속에서 새롭고 급진적인 언어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복지의 보존과 개혁 둘 다에 이용될 수 있는 언어, 사민당의 정치력 확대를 위한 구호로서 ‘연대’가 재발견된다. 예전처럼 연설문에나 가끔 쓰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 강령의 기본원칙으로 ‘연대’가 천명된다.

제3세계와의 연대

필자에 따르면, 사민주의 정당에서 연대의 채택과 확대는 상당 부분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선거 전략에 별로 유효할 것 같지 않은 내용도 있다. 제3세계와의 연대가 그런 부분이다.

고전 맑스주의 연대 개념은 국제적이었고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 연대를 언급했다. 초기국면부터 사회주의 정당은 국제 문제에 몰두했고 국제협력, 국제적 계급의식, 지도원칙으로서 외국 문제에서의 반군사주의에 대한 신념을 일찍이 채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사민당은 1905년 서남아프리카에서의 봉기를 상대로 한 독일의 전쟁을 지지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까지 제2 인터내셔널은 식민지 착취를 염려하지 않았고,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식민 정책을 비난하지 않았고 심지어 1914년까지 그것을 지지했다.

식민지도 또한 민족 자결권을 누려야 한다는 레닌의 견해는 식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열었다. 공산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식민주의에 맞선 투쟁에 일찍이 참여했고 제3세계 국가들의 자치를 지지했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었는가 아니면 연대의 표현인가가 논쟁 지점이다. 사민주의 진영이 된 사회주의 정당들은 식민 체제를 지지했고 제3세계 민족들의 독립에 저항했다. 비록 그들이 자주 식민지 인민의 생활 조건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당 강령은 그 문제를 연대 사상과 결부지어 언급하지 않았다. 제3세계와의 연대 사상은 그 개념이 사민주의 개념으로 변형된 때인 20세기 후반부까지 사민주의 정당들의 강령에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때가 돼서야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만이 아닌 계급과 집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고 연대의 기초는 이해(interest)로부터 보편적 연민으로 재표현됐다. 이런 상황에서 제제3세계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을 포함하려는 조치는 당연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사회연대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이 이런 점에서 동떨어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민주의 정당들은 식민지에 국가 자치가 부여돼야 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수용했다. 영국 노동당은 2차 대전 이전에는 반식민지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전후 정권을 잡게 됐을 때는 덜 급진적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독립을 부여했지만 아프리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주저했다. 프랑스 사회당(SFIO)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일정한 책임이 있고, 알제리 독립에 맞서 싸웠고 1956년 이집트 침공을 지지했다. 다른 사민주의 정당들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고 또한 베트남 전쟁의 처음 몇 년간 미국을 지원했다. 반면 제3세계 인민들을 연민의 눈으로 흔히 바라봤고 생활조건 향상의 필요성이 당 강령에서 강조됐다.

노르웨이 노동당(DNA)은 빈국과의 관계에 대해 연대의 언어를 사용한 선두주자였다. 1951년, 인도 남부에서 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을 때, 이것은 세계의 결핍과 빈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당 지도부는 이것을 재무장에 대한 지출의 증가로부터 ‘인민에게 긍정적인 것을 주는’ 것으로 관심을 돌릴 기회라고 봤다. 1953년 강령은 국가간 경제적 격차를 메울 필요성을 선언했고 유엔이 ‘진정한 국제연대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독일에서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강령은 독일과 ‘미발전’ 국가간의 관계에서 연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진 기간 동안, 스웨덴과 덴마크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강령에 유사한 표현들을 도입했다. 하지만 남유럽의 사회당과 공산당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까지 이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1960년 무렵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제3세계와의 연대 개념은 당 강령에서 현대 사민주의 연대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됐다.

선거의 고려가 이런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거의 없다. 이 측면의 연대의 포함은 자기 이해에 관한 생각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빈곤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이타적 연민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점은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 간의 간극이다. 부국으로부터 제3세계 국가로의 지원은 GDP의 1%에도 미치지 않았고, 교역 조건은 제3세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라도 바뀌지 않았다.

다음 세대, 자연 및 인종적 소수자

1970년대 초, MIT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가 산업과 경제 성장이 생태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다. 1980년대, 녹색당이 일부 국가에서 설립되거나 녹색 사상이 기존 정당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1986년 유엔 환경발전위원회(the Brundtland Commission)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핵심 구호로 해서 경제성장과 그것이 환경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려를 결합시킨 발전의 필요성을 규명하기에 착수했다. 환경문제는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서 점차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지구 온난화와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이용이 미래 세대와의 연대를 요구한다는 사상이 점차 당 강령에 반영됐다.

같은 기간, 실업이 또다시 중요한 문제가 됐다. 1973년 석유 위기 이후, 실업은 치솟았다. 1970년대, 스칸디나비아 사민당들은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란 안정된 고용의 고용자들이 임금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실업자와 연대를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업, 늘어가는 난민, 조금 후에는 발칸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가 뜨거운 이슈가 됐다. 이런 변화들이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 점차 반영됐고 어느 정도는 연대의 개념에서도 그랬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이런 집단과 양상(미래 세대, 자연, 이주자, 난민 등)을 연대 개념에 포함하기 시작하자 제대로 갖춰진 포괄적인 연대 개념이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당 강령의 연대 개념이 이들 집단 또는 양상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된 것은 20세기 막바지 수십년 동안이었다.

덴마크의 사민당이 최초로 환경 문제가 연대의 문제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1977년 강령에서 강조됐다. 다른 정당들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이를 따랐다. 하지만, 사민주의 정당들은 일반적으로는 주저하거나 신중했다. 일반적으로 생태에 관한 것과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할 필요성을 강령에 포함하는 반면, 이것을 경제성장의 필요성과 늘어나는 실업과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려 했고, 아주 가끔씩 환경 문제를 연대의 문제로 강조했다.

당 강령에서 연대에 포함된 마지막 집단은 인종적 소수자, 난민, 이주자로 보인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주자와 난민의 상황을 강령의 이슈로 삼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이것이 연대의 문제로 표현되지 않았다. 덴마크와 스페인의 사민주의자들이 처음으로 1990년대 초 강령에서 그렇게 했고 대부분의 다른 사민당들은 몇 년 내에 선례를 따랐다.

선거의 고려가 아마도 계급으로부터 인민 또는 국가로의 확장을 설명할 수 있다. 연대와 복지국가 개념간의 연결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제3세계와 이주자와의 연대 주장을 선거의 이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 문제는 당 유권자간에 매우 논쟁적이어서 유권자간에 잠재적 득실을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과 이슈를 포함한 것은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고 또는 결핍된 집단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휴머니즘과 이타적인 연대개념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타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으론, 좌파의 비판가들을 좀더 만족시키면서 당 강령에서 연대를 선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런 연대를 실제로는 아주 제한된 정도로 하는 정책을 이행하는 것이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민을 제한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런 방식은 우파의 비판을 야기하지 않는다.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

사민주의 정당들이 자신들의 연대 개념을 지속적으로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는 것을 살펴봤다. 고전적 연대 개념과 구별되는 현대 사민주의 연대개념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연대 개념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여타 집단, 그리고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돼왔다. 연대의 기초는 ‘(자신 또는 자기 집단의)이해’가 아닌 ‘윤리, 휴머니즘, 공감과 연민’으로 보인다. 연대의 목적은 사회주의의 실현에서 공동체 정서의 창조, 사회통합, 위험의 공유로 변했다.

둘째, 연대는 ‘동질성’에 기반한 것으로부터 ‘차이’의 수용에 기반한 것으로 변했다. 연대는 상이한 계급, 상이한 성, 다양한 연령 집단과 세대와 인종을 포함해야 한다. 사민주의 연대가 노동계급과 중산층만이 아니라 상위 계급을 포함해야 하는가의 정도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상위 계급이 특권을 덜 가진 사람들과 연대를 행사할 것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민주의 개념은 계급 이해보다는 윤리와 도덕에 기반해 있다.

셋째, 현대의 연대 개념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생산과 경제에서의 협력의 필요성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상호의존성을 창조한다는 주장이다. 양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경제 성장의 축소와 봉급의 더 적은 증가와 복지 국가를 유지 또는 발전시킬 자원이 더 적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전 사회학자 뒤르케임의 유산이 분명하며 일부 사민주의 이론가들은 분명히 뒤르케임과 유사하다.

넷째, ‘이해’의 개념이 재정의됐다. 연대는 ‘자기이해’와 ‘통찰'에 기반한다. 이기적인 자기 이해가 아니라 계몽된 자기 이해를 말한다. 이러한 이해와 통찰은 아프고, 실업이고, 장애이거나 노령일 때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준비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상이라는 것을 알고 지지한다. 또한 자기 이해는 사회적 약자와 빈곤한 이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의 추구를 제한하려는 의지와 자기 구속 등을 만들어낸다. 전체로서의 사회와의 동일시와 자기 구속은 개인들이 사회통합을 해치는 방식으로 자기 이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최종적으로, 공동체와 집단적 합의가 사민주의 연대의 핵심 요소이다. 연대는 공통의 프로젝트를 통해 힘을 갖는 ‘함께함’과 ‘협력’을 의미한다. 개인의 행위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집단적 프로젝트는 필수적이다.

다섯째, 연대의 목적이 재정의됐다. 고전적 개념의 연대의 목적은 투쟁을 강화하고 개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투쟁의 무기로서의 전통적 연대 사상은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부에 사민주의 강령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당의 강령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오늘날 이것은 현대적 개념의 성격으로 희미해졌다. 대신해서 보편적인 공동체 정서를 발전시킬 필요성과 사회통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여섯째, 일부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은 고전 개념보다 포괄적이다. 일반적으로 연대의 한계는 표현되지 않는다. 오늘날 연대 개념은 인구의 대다수, 사회적 약자, 주변부화되거나 가난한 사람들(자국에서나 제3세계 빈국에서나)을 포함한다. 강령 작성자들이 남성이 여성과의 연대를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를 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성(gender) 문제는 이제 연대라는 용어로 흔히 표현된다. 연대는 또한 세대간 관계와 환경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최근에 일부 강령에서는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를 또한 연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전적 및 현대적 연대 개념에서 집단 지향성은 둘 다 약화됐다. 20세기 후반부에, 집단과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당 강령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에서의 집단적 연대 간의 딜레마를 수용한다.

따라서 사민주의 연대의 개념은 더 이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투쟁, 부의 급진적 재분배 또는 사회 상위 부문의 특권에 대한 위협과 결합되지 않는다.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꼽아본다면, ‘사회문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 ‘사회복지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주는 것’, ‘가장 결핍되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정치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지 않다. 다음에는 사민주의 연대 개념과 경쟁하는 또다른 연대 개념과 현대 사회에서의 연대의 ‘위기’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류은숙] <2007년 7월 18일 인권오름 제63호>

<편집인 주>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작성일자 : 2007. 6.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연대’를 연구하는 이유

19세기 초의 사회학자들은 ‘일체감’과 ‘사회적 유대’라는 전통적 감정이 근대사회를 낳는 과정에서 찢어졌다는 점을 목격하고 사회적 결집과 통합의 수단으로 연대를 생각했다. 국제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사회적·정치적 적들에 대한 슬로건이자 무기로 만들었다. 복지국가 지지자들은 연대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자 연대의 제도적 표현으로 복지를 바라봤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과 프로테스탄트 사회윤리에서는 자선보다 점차 연대가 더 중요하게 됐다. 이처럼 연대는 사회이론과 근대정치 담론의 핵심개념이며 사회정책연구에서도 중요하다.

문제는 연대의 개념이 사회이론과 정책 둘 다에서 상이한 의미를 갖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연대란 투쟁하거나 결핍상태에 있는 이들에 대한 기여로서, 또는 국가가 조직하는 세금과 재분배를 통해 타인과 자원을 공유하려는 각오로서, 또는 권리의 수립을 통해 집단적 행동을 제도화하려는 의지와 행위에 동참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많은 가능한 정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연대는 때때로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불명료한 개념으로서 사용된다. ‘연대’의 사용은 현실 세계에서 연대의 현상이 사라지거나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위장될 수 있다. 사회이론과 정치 담론에서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다양한 견해, 정의, 함의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의 시대에, 연대의 사상은 위협받고 있고 방어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시장, 시장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집단적 조정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들을 보다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서유럽의 점증하는 윤리적 다원성, 외국인 혐오의 증가, 빈부의 극심한 격차는 연대를 뜨거운 지구적 이슈로 만든다. 특히 세상에서 자신 만의 방식을 선택하고 주조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연대의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 경제의 지구화는 일종의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및 법적 제도의 결여로 우리의 관심을 쏠리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연대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은 그 자체가 연대의 개념을 더 면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이유이다.

‘연대’의 세가지 전통

사람들이 서로 우호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은 일상의 관행이었고, ‘내가 너를 도우면, 도움이 필요할 때 네가 나를 도울 것’이란 생각의 실천이었다. 이처럼 상호적으로 서로를 지원할 의무는 산업화이전 사회에 존재했고, 이것은 공통된 정체성과 일부사람들과의 동질감, 타인에 대한 이질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연대의 현상은 그 사상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고 사상은 용어가 퍼지기 전에 존재했다. ‘연대’라는 용어는 그것의 근대적 의미가 발전되기 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기독교의 우애(또는 형제애, fraternity) 사상은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발전됐고, 기독교도들의 공동체의 발전을 가족의 밀접한 관계와 동일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애 또는 형제애(fraternity or brotherhood)라는 정치사상은 프랑스 혁명 동안 발전했다. 형제애의 감정은 혁명가들 간에 평등을 깨닫는 수단이었고, 정치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연대라는 용어의 탄생지였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혁명의 요동 속에서 사회정치적 불안에 대해 반추했다. 동시에 그들은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과 증가하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목격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프랑스 사회 철학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사회적 융합과 결합할 방법을 찾게 됐다. 여기서, 연대의 개념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보였다.

연대의 개념은 넓고 포용적인 것이었고, 상실한 사회적 통합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했다. 맑시즘이 노동운동에 일찍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독일에서는, 연대의 개념이 나중에 발전했고,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서의 결집과 단결의 필요성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뒀다. 여기서의 연대 사상은 오직 노동자를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보다 제한적인 것이었고, 국경을 넘어선 만국의 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었다. 이 연대사상은 통합이 목적이 아니라 갈등을 내포한 것이었고 단결뿐만 아니라 불화(계급 갈등)를 내포한 것이었다. 19세기 하반기에,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연대의 제3의 전통을 불러일으켰다.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는 연대의 사상 발전이 2차 대전 후에야 발생했다. 이처럼 고전 사회학, 사회주의 이론, 기독교 사회윤리에서 유럽의 연대 사상의 세 가지 전통이 엿보인다.

고전 사회학 이론에서의 ‘연대’

푸리에, 르루, 꽁트, 뒤르케임, 베버 등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이 소개된다. 이 글에서 각각의 이론을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기에, ‘연대’ 사상에 대한 필자의 분석만을 간략히 소개한다.

다양한 사상가들간에 나타나는 연대 개념의 차이의 핵심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기여하는 규범으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 아니면 특수한 집단 구성원간의 관계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한데 묶는 규범과 가치가 존재하는 결과가 연대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한데 묶는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경우에 연대는 한편으론 포함하고 한편으론 배제하는 힘이다. 따라서 연대는 ‘우리’를 통합하기도 하지만 ‘우리’에 속하는 사람과 ‘그들’에 속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을 한데 묶는 접착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개념이 구분될 수도 있다. 이런 접착제는 자기 이익의 합리적인 추구, ‘하나’라는 정서적 감정, 윤리적 의무의 감정 또는 이들 요소의 일부 또는 전부의 혼합일 수 있다.

고전 사회이론에서의 연대 사상은 사회에서의 조화와 사회통합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대 사상을 이해한 측면이 강했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그와 결합된 문제점들에 맞닥뜨린 이들 사상가들은 또다른 사회 폭동이나 대격변을 야기함이 없는 개량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이들의 연대 개념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요소들을 갖고 있었던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가 짙은 반면,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개념을 특화시키려는 강력한 미래 지향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우려한 점은 집단, 조직, 공동체와 사회가 부과하는 집단적 연대의 요구가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일으키는 딜레마이다. 개인을 집단에 통합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가 개인주의와 충돌하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개인의 자유가 포기돼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 “도덕적 개인주의”나 “인류애의 종교”라는 식으로 개인을 사회와 결속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이기주의를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정치이론에서의 ‘연대’

필자는 사회주의 이론에서 3가지로 갈라진 연대개념이 있다고 보고, 이를 고전 맑스주의, 레닌주의, 고전 사회민주주의 연대개념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사회주의 연대사상은 고전 사회학과는 달리 강력한 유대의 지역 공동체가 있었던 전근대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연대 개념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자와 투사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연대의 중요성은 당면한 긴급성이다. 적에 의한 패배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결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바람직한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연대는 중요한 도구이다. 이들 개념은 연대의 기초가 무엇이냐, 연대에서의 윤리의 역할, 개인의 자유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다. 따라서 사회주의 연대개념을 고려할 때는 이들 개념이 출현하는 분명한 담론에 한정해서 고려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전 맑스주의의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유대와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를 서로에게 더 밀접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조건을 창조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과정 그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된다. 노동자들은 미래에 대한 똑같은 전망에 직면하고, 이 전망은 개인적 탈출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근대의 통신수단은 노동자간의 더 많은 접촉과 국경을 넘는 노동자 조직의 설립과 선동을 쉽게 만든다. 이런 모든 것들이 노동계급 연대의 전제조건을 창조했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그들의 바람은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이해를 더욱더 평등하게 만든다. 상이한 유형의 노동간의 차이는 제거되고 임금은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줄어든다. 연대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가진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한다.

맑스는 갈등하는 계급 이해를 벗어난 정서적 순화라는 이유로 형제애의 개념을 조롱한다. 그는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동체, 결사, 단결’ 등을 주로 사용한다. 1848년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형제애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그 유명하고 간결한 구호가 등장한다.

맑스는 두 개의 상이한 연대사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계급의 연대로 알려진 것이다. 이를 주로 ‘단결’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동체는 진짜일 수가 없으며, 노동계급의 일상의 투쟁 그 자체로는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집단의 타 집단에 의한 착취가 특징인 사회에선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대는 구체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 구조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연대인데, 이것은 ‘이상적 연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개인들의 진정한 공동체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개인들로서 자유롭게 한 데 결합할 때에만 진정한 개인들의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레닌주의 연대 개념의 기초는 고전 맑스주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집단에 대한 강조는 매우 강력하며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아주 경멸적인 이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사유재산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립된 개인주의자가 가지는 자유이고, 타인에게 적대적인 자유이기에, 자본주의에서 연대사상과 상호의존성은 쓸데없는 ‘규범적 사상’이 된다. 진정한 연대와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고전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대표적인 것은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연대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경제위기와 후퇴를 견뎌냈고 자본주의의 일촉즉발의 붕괴 전망은 전혀 없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사망을 더 기다릴 수 없으며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개발해야 하고, 의회에서 새로운 다수를 수립하기 위해 여타 계급 및 집단과 동맹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장기간의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레닌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일시적으로 희생될 수는 없다.

사민주의 윤리는 평등의 사상, 공동체의 사상 또는 연대, 자유 또는 자율성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며 이들은 서로에 대해 균형을 이뤄야만 한다. 동료노동자와 단결함으로써 노동조합에 노동자의 힘을 모음으로써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대한 의존성을 자발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때, 연대는 발전된다. 이런 자발적 행동이 윤리적 헌신의 표현이다. 한 데 속한다는 감정은 강화되고 잘 발전된 연대에 대한 이해로 성장한다. 이런 연대는 노동운동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적 요인이 된다. 연대의 감정은 다른 어떤 집단에서보다 노동운동에서 더 강력하며,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실천을 필요로 하는 식견보다 더 응집력 있는 원칙이나 사상이란 없다. 사회법의 어떤 규범이나 원칙도 연대 사상의 구속력에 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연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달리 노동계급만이 아닌 여타 계급과 집단의 이해를 포함한다. 이들 계급과 집단간의 차이를 수용하며 포함된 사람들 간에 공동체의 감정을 창조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종교에서의 '연대‘

종교는 국민이나 계급이 존재하기 훨씬 전에 사람들간의 유대였다. 계급 연대의 사상이 발전되자, 이 발전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과 갈등하게 됐다. 가톨릭의 연대 개념은 두 개의 상이한 관심에서 나왔다. 산업사회에서의 사회통합에 대한 염려, 그리고 1950년대에 시작하여 1961년에 교황 회칙에 개념이 도입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다. 루터주의와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연대의 사상을 3세계의 상황에 대한 우려와 연관시켰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사회윤리에서의 연대 사상은 다른 곳에서의 발전보다 뒤쳐졌다. 그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연대의 개념이 노동운동과 밀접하고 계급투쟁 사상과 결합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온정주의적인 종교의 태도는 계급 갈등이나 계급투쟁이 아닌 사회적 자선이나 협력,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론 3세계에서의 교회의 급진화에 제동을 걸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종교가 연대 개념을 최종적으로 채택할 때는 서유럽의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 대부분에서 그 개념이 더 광의의 보다 이타적인 개념으로 변형됐을 때라고 본다.

오늘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연대 사상의 차이는 여전히 몇 가지 구분되기는 하지만 별반 크지 않다. 연대 사상의 기초는 같다.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창조됐고, 모든 인간은 신의 눈으로 볼 때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에 대한 요구와 타인에 대한 기독교인의 섬김의 의무는 연대를 표현하는 공통된 기초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다른 인간에 대한 섬김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자주 언급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더 중요성을 부과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계급의 경계, 부자와 빈민, 부국과 빈국간을 초월한 연대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통합의 강조로부터 가톨릭의 연대 사상은 논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종류의 것이 된다. 계급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 모든 사회적 및 경제적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는 모든 계급의 인민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노동자와 중산층, 여성과 남성을 협력과 상호이해가 지배하는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톨릭의 연대는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집단적 지향성은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보다 약하다. 집단적 성격은 개인에 대한 강조와 세심하게 균형을 이룬다. 가톨릭의 인격주의(personalism)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람이 된다는 생각으로, 개인과 사회간의 관계를 논점으로 만들며, 연대의 집단적 성격을 줄인다. 또한 국가에는 필수적이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요구하며 자원조직의 활동을 강조한다. 국가가 직접 나서지 말고 자원조직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대에 관한 모든 개념은 두가지 필수적인 가치를 지적하고 있다. 개인은 어느 정도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하고, 개인과 (적어도 일부의) 타인 간에는 공동체의 감정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시의 힘과 포괄성의 정도는 매우 다르며, 사상의 기초, 추구하는 목적, 집단적 지향성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제 서유럽의 다양한 정치 정당에서의 연대 개념의 발전을 연구하기 위해 정치의 세계로 들어갈 차례다. 어떻게, 언제, 왜 이들 연대 사상이 사민당과 기독교 민주당의 제도화된 이데올로기에 반영되었나? [류은숙] <2007년 6월 20일 인권오름 제59호>

이어질 내용: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연대’의 현재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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