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7. 5. 23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국제인권무대에서 널리 활약한 프랑스 법학자 카렐 바삭은 1977년 세계인권선언 30주년 기념연설에서 국제인권의 발전을 요약하며 3세대 인권을 언급했다. 즉, 1세대 인권은 자유의 가치를, 2세대 인권은 평등을 강조한다면 3세대 인권은 우애에 초점을 두며, ‘연대에 대한 권리’라는 특유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카렐 바삭은 3세대 인권으로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 인류의 공동유산에 대한 소유권,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언급했다. 혹자는 여기에 인도주의적 원조와 재난 구조를 받을 권리, 민족 자결권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연대권은 구체적 의미가 없고 구체적 의무도 없다’, ‘따라서 평화권 같은 건 없다’, ‘1·2세대 인권과 달리 3세대 인권은 어떤 법적 조약으로도 공식화된 바 없다’, ‘평화권은 오직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인권실현의 수단이나 과정을 권리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반론이 거세다.

오늘 살펴볼 『평화에 대한 인권』(출처: Douglas Roche, The Human Right to Peace, 2003, Novalis)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으로 평화권을 “인류의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수세기 동안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주요 목적으로 일컬어진 것이 평화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제무력분쟁과 그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사망, 파괴, 고통은 현세기에 발생한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화를 성취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목표와 현실간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 격차 때문에 국제사회는 평화에 대한 인권이 존재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해왔다. 평화권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건설적인 평화 관련 노력의 구현이 이론적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권을 위한 국제적 노력

필자는 평화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기본 규정: 유엔헌장 전문 및 1조, 55조, 세계인권선언 28조
‧ 1978년 유엔총회: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 준비에 관한 선언 - 국내 및 국제 정책이 평화로운 삶의 성취를 지향할 것. 특히 젊은 세대에 관하여 그리할 것을 강조.
‧ 1981년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헌장 - 모든 인류는 국가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 1984년 유엔총회: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 -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평화권의 행사는 전쟁위협의 제거를 요구한다. 평화권은 여타 인권의 전제조건이다. 인권‧발전‧평화는 서로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다. 평화 없는 인권은 환상이다.
‧ 1997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평화에 대한 인권 선언 - 갈등의 근본원인, 즉 구조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조기단계에서 진화에 나설 때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문화로부터 평화의 문화로의 변화가 우선 필요하다. 국제사회는 전쟁비용과 평화 비용 두 개에 동시적으로 몰두할 수는 없다. 이 선언과 기존 선언의 차이점은 평화권을 인권의 전제조건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성취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선언이 요구하는 두 개의 전략은 1) 빈곤, 환경파괴, 국제정의 등과 같은 긴급한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2)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육 운동이다.
‧ 1997년 오슬로 기초 선언 - 평화권을 세 개의 연관된 요소로 나누었다.
1) 인권으로서의 평화: 모든 인간은 인간성에 내재된 평화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전쟁과 폭력도 평화에 대한 인권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2) 의무로서의 평화: 모든 지구의 행위자들은 평화의 유지와 건설에 기여할 의무, 무력분쟁 방지와 폭력 예방의 의무를 갖는다.
3) 평화의 문화: 평화권이 성취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평화의 문화, 교육, 대화, 윤리적 및 민주적 이상을 통해 인류의 마음에 평화의 뿌리를 추구하는 전략
‧ 2003년 유엔총회: 무력분쟁 방지에 대한 결의안 채택

실천의 장애물

위에서 열거된 국제사회의 노력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 필자는 주요 강대국들의 지지 부족과 저지를 지적한다. 그런 사례는 아주 많다.

1984년 유엔의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은 핵전쟁의 위협 제거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서구 국가들이 다수 기권(34표 기권)하여 빛을 잃었다. 1997년의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평화권 제안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월권을 했다고 비난하며 평화권에 대한 공격과 기권표시로 대응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들은 무기 산업을 보호하길 원하는 북반구 국가들을 비판했다. 결국 합의 도달에 실패했고 평화권에 대한 회의주의는 계속됐다. 1999년 ‘평화의 문화를 위한 행동 프로그램’에 관한 비공식 유엔 토론에서 미국 대표는 “평화는 인권의 범주로 고양돼선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발언했다. 2002년 평화권의 증진을 요구하는 결의안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과 나토(NATO)의 동유럽 신규 가입국들의 압도적인 반대표(50표)로 작동할 수 없었다. 평화권을 인권 무대가 아닌 국제관계의 다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인도의 전 대법관(P.N.Bhagwati)은 평화권의 주요기능을 “평화적 분쟁해결을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폭력 사용 또는 위협의 금지를 통해, 핵무기의 제조·사용·배치의 금지를 통해, 그리고 전면적 군축을 통해 생명권을 증진하고 보장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에 담긴 하나하나의 요소, 즉 군축, 핵무기의 금지 등이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문화

오늘날 98개국의 1천여 기업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6억3천9백만여 소형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불법 무기 교역은 이 숫자를 넘는다. 최대 무기 거래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필자는 군산복합체의 탐욕 등 여러 배경 요인들 중에서 ‘전쟁의 문화’의 지배를 우선으로 꼽는다.

필자는 군국주의의 동의어로 ‘전쟁의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갈등 해결에서 군사적 가치가 고양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공격적인 군비태세와 군부의 지배적인 정치적 지위가 초래된다. 전쟁과 대량 폭력은 고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결과이며,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전쟁은 군비와 군인, 정보의 통제를 요구한다. 이것은 환경파괴, 빈곤,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괴를 야기한다.

전쟁의 문화의 심연에 자리한 생각은 폭력의 뿌리가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전쟁을 해야 하고, 기껏 잘해봤자 최악의 폭력 발산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논리를 부정하며 인간은 유전적으로 전쟁을 위해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도 않고, 인간의 본성에 폭력을 양산하는 타고난 생물학적 요소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결국 전쟁을 만들어낸 종(인류)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평화의 문화

평화의 문화란 “생명,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그리고 남녀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에 기반한 문화”를 말한다. 이 목록을 더 풀어서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생명, 존엄성, 인권에 대한 존중
· 폭력의 거부
·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
· 민주주의, 자유, 정의, 연대, 관용의 원칙을 지지하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 인종·종교·문화·사회 집단과 국가들 간의 상호소통과 이해

전쟁의 문화와 평화의 문화는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전쟁의 문화 ;
· 적의 이미지
· 군비증강과 군대
· 권위주의적 지배
· 비밀주의와 선전
· (구조적·물리적) 폭력
· 남성의 지배
· 전쟁을 위한 교육
· 약자착취, 환경착취

평화의 문화 ;
· 이해, 관용, 연대
· 군축
· 보편적이고 완전한 민주적 참여
·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흐름
·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
·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
·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교육
· 지속가능한 경제·사회적 발전

평화의 문화는 전쟁과 폭력을 향한 문화적 경향을 대화, 존중,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평화의 문화는 이러한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육의 내용을 이루는 대표적인 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2000년에 기초한 평화의 문화 건설을 위한 실천행동에 관한 선언이다.

‧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차별이나 편견 없이 각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
‧ 폭력의 거부: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가장 착취당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 아동과 청소년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신체적·성적·심리적·경제적·사회적 폭력 및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 타인과의 공유: 배제, 불의, 정치·경제적 억압을 끝내기 위하여 아낌없는 정신으로 내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공유하기
‧ 이해하기 위해 귀 기울이기: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의 사수, 언제나 대화를 우선시하고 광신, 비방, 타인에 대한 배제에 빠지지 않고 귀 기울이기
‧ 지구의 보존: 책임성 있는 소비자의 태도 증진, 모든 형태의 생명을 존중하고 지구상의 자연 균형을 보존하는 발전의 실천
‧ 연대를 재발견하기: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함께 창조하기 위하여 여성의 완전한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기

이러한 평화의 문화 실현은 매일 매일의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런 책임성을 움켜쥘 때, 평화에 대한 인권은 보장될 것이다. [류은숙] <2007년 5월 23일 인권오름 제55호>

작성일자 : 2007. 4.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소위 3세대 인권 또는 연대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환경권’이 속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커가는 지금, ‘환경권’은 당연한 인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환경권’에 대한 선호와 열망은 당연할지 모르나 ‘환경권’에 대한 정의나 기준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을 다룬 시각들을 살펴본다.(출처 Alan Boyle 외, Human Rights Approaches to Environmental Protection, 1997, Oxford)

인권과 환경간의 긴장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에는 긴장이 있다. 환경운동은 다른 종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인권에 대한 불신을 가질 수 있다. 만약에 기존에 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 가령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이 ‘절제’된 수준이 아닌 ‘부’를 추구하는 속에서 세계인구의 다수에게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자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일 것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인권을 실현하는 것과 한정된 환경자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 간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권운동은 생태계, 유한한 자연자원, 미래 세대의 기본적 필요를 보호하려는 환경운동의 추구가 때로는 긴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 흔히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 불가분성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이런 원칙의 주장은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문제를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도덕적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환경문제를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성과 장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환경권을 운운하는 것인가?

환경에 대한 인권은 필요한가?

먼저 검토돼야 할 전제가 있다. 첫째, 뭔가를 선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즉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권리로 말하는 것을 도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권리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떤 행동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깨끗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추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즉 깨끗한 환경, 건강한 환경 내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권’의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대립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권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 균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호 선호하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도 힘으로 바라는 바를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서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선호가 권리와 대립할 때, 그 권리의 소유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카드를 쥐게 된다.

권리와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도덕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다.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 환경정책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우리의 그 권리는 고려돼야만 한다. 이 권리는 기타의 선호되는 것들이나 비도덕적 고려들보다 먼저 고려돼야 한다. 도덕적 권리로 유력한 것은 법적 권리가 되기에도 아주 유력하다. 따라서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환경권을 갖는다는 것이 이 권리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권리소유자가 승리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그 권리가 고려될 뿐 아니라 그 권리를 부인하기 위해서 상당한 이유가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권리는 도덕적 및 법적 주장에서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를 갖는다.

기존의 인권을 동원

인권개념이 환경보호에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확립된 인권을 동원하는 접근이다. 기존의 국제인권법이나 국가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인권규범이 실현된다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새로운 환경권을 만드는 것은 잘해봤자 과잉이고, 잘못하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데 힘을 들이기보다는 기존 인권기준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인권에는 우선 시민·정치적 권리가 있다.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이 권리의 중요성이 있다. 생명권, 결사권, 표현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권리, 평등,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등의 실현은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심각한 환경 파괴에는 인권 및 환경 옹호자들에 대한 억압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거부가 동반된다. 억압과 공포에 의한 재갈 물리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정치적 권리는 참여의 보장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간 복지의 기준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건강권,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관한 조건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강권은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된 정책은 또한 그 결과로서 여타의 식물군, 동물군 및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방사성물질에 대한 노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비인간 종을 더불어 보호하는 것이 그 예다. 또 다른 예로 교육권은 환경인식의 향상이나 취약집단이 생태적 파괴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정치 투쟁에 필요한 기술무장에 기여한다. 또한 문화권의 침해가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문화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그런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환경도 보호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권리체계는 다소 협소하게 환경권을 구성하며, 환경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존 인권을 재해석

기존권리를 단순 동원하는 것으로는 환경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기존의 인권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권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등권은 환경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보호의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환경파괴에 대한 노출의 불평등성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부와 빈곤은 상이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때로 ‘부’의 문제만이 국가정책에서 다뤄진다. 평등권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는 환경피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명권은 건강한 환경, 오염 없는 환경, 생태적 균형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권이 필요

그러나 기존의 인권기준은 긴급한 환경적 과제에는 모호하고 불편한 도구이기 때문에 환경과 직접 연관되는 포괄적인 규범이 요구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런 접근에는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새로운 환경권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주로 절차적 성격에 초점을 두느냐, 실체적 권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느냐이다.

절차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절차가 수천개의 비현실적인 원칙의 선언보다 가치가 있다고 본다. 환경권과 관련 있는 절차적 권리의 범주에는 환경 위험에 대해 사전에 알 권리를 포함하는 정보에 대한 권리,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권리,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공익소송을 용이하게 하는 제소권의 확대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또는 참여적 접근은 환경보호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보에 입각한 논쟁을 통해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 근거는 환경에 대한 의사결정자와 그 결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일치한다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환경의 질은 법률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에 실체적 권리 규정보다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철저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절차적 권리에 대해 회의적이다. 절차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에 부응하는 정치조직은 장기간의 환경보호보다는 단기간의 부를 추구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환경파괴를 할 수도 있고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쉽다. 북반구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반한 체제는 환경파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절차만으로는 환경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지지를 정의하고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환경권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련된 기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조사에서는 ‘깨끗한’, “건강한”, “존엄한”, “생존가능한”, “만족할만한”,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오염이 없는”, “인간의 발전에 적합한” 등 다양한 형용사가 환경에 덧붙여 있다. 환경보호가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의 모든 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지속가능성을 보호하는가, 좋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등 쉽사리 법적 용어로 옮겨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정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혼란에서 벗어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특정 맥락 속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권리의 침해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법상의 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정확한 의무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는 상세한 문맥상의 정의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오염자 지불 원칙, 예방 원칙, 환경영향평가, 토지개발의 용도와 명백히 관련된 환경권 등이 포함된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문제

어떤 인권이든 본질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여타의 종을 배제하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아무리 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크게 품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본은 ‘인’권이며, 인간이 아닌 종 또는 자연자원에 부여된 권리와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복지를 보존하고 배양하는데 필수적인 환경보호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생명권을 확대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의 구성요소들은 분명히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적 수단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환경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에 초점을 둘 수는 있지만 또한 비인간 종에 대한 관심과 더 깊은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타 생물종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비도구적 방식으로 환경권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적인 권리의 성격을 없앨 수는 없다 할지라도 줄일 수는 있다. 인권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복지에 기초한 권리 제안보다는 ‘생태적 균형’(ecological balance)을 위한 권리 제안이 덜 인간중심적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체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수밖에 없다. 동물권, 나아가 식물의 권리, 생태과정에까지 권리를 부여한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이 권리를 동물이나 산에게 부여한다고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권리 인정의 행위는 여전히 인간이 인식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구조적인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로 이론의 영역에서만 작동한다. 정책적 고려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든 종을 위해 지구적 환경보호를 강화해야할 실제적 문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권리를 자연세계에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모든 생물체의 본질적 가치를 실제적으로 보호하는 데 적절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생태계의 본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할 때 인권적 접근은 인간중심주의적 접근법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권적 접근의 손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유용성을 앞서 살펴봤다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다양하다. 몇가지 주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리 용어와 체계는 환경문제의 바탕이 되는 정치경제적 문제와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 선택, 생산양식,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양식 등이 포함되는데 현재의 권리라는 것은 단지 이것들의 증상을 겨냥하는 권리일 뿐으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실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처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경권의 주창이 단지 상징적인 몸짓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단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완화제 수준이라면 환경파괴는 크게 줄지 않으면서 사실상 환경파괴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힘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서 환경피해에 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단순한 권리 용어로서 복잡하고 기술적인 환경운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다. 환경보호에는 의사결정과정에서나 그 이행에서나 고도로 기술적인 설명과 평가가 요구되는데 이런 문제를 단순한 권리의 언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보다는 환경법들이 더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리의 오용 가능성도 크다. 권리, 특히 절차적 권리는 부유한 집단이나 겉치레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적인 생활의 질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기 쉽다. 이로 인해 미래의 환경비용을 현재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에 떠넘길 수 있고, 이런 취약한 집단과 공동체가 오히려 빈곤이나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절차적 권리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소위원회에서는 1994년 인권과 환경간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의 채택을 제안했다. 그 제일 원칙은 인권,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화는 상호의존하며 불가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의 관계는 여타의 고려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으뜸이라고 주장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어떻게 정의하며 실천해 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4월 25일 인권오름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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