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1. 23

작성자 : 엄기호

 

아직 한국에 개봉되지 않은 ‘천수원의 낮과 밤’은 홍콩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년여성과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의 우정을 잔잔하게 다루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대화도 없다. 그렇다고 이 둘의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다. 아들은 신기할 정도로 어머니 심부름도 군말없이 하고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맛없어 보이는 음식도 불평없이 잘 먹는다.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던 아들은 어느날 친구를 따라 학교에서 하는 가족에 대한 심리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여기서 같은 또래의 상담가는 부모와 말을 많이 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그리고 부모의 요구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를 묻는다. 아들은 자신이 엄마에게 하는 대답이 ‘응’이라는 것 하나 뿐임을 알게 된다. 상담을 하는 친구는 마치 그것이 뭔가가 잘못된 것이양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한편 같은 수퍼마켓에서 일을 하게 된 엄마와 독거노인은 음식을 같이 사 나누어 먹으면서 정을 쌓아간다. 독거노인은 없는 살림에 모은 돈으로 반지를 사서 죽은 딸의 남편, 이제는 다른 이와 결혼하여 새로운 살림을 꾸린 과거의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엄마의 병원에는 자주 찾아가보지 않으면서도 엄마는 이 자리에 독거노인을 따라간다. 그러나 과거의 사위는 무뚝뚝하기만 하다. 급히 밥을 먹은 다음 반지도 거부하고 사위는 자리를 뜬다. 돌아오는 길에 독거노인은 그 반지를 엄마에게 주고 엄마는 독거노인을 위로한다. 추석을 맞이하여 엄마와 독거노인, 그리고 아들은 같이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대단히 지루하다. 다수의 학생들은 너무 졸려서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고, 어떤 학생들은 며칠에 걸쳐서 봤다고 고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기승전결도 없이 전개되고, 특별한 갈등조차 없는 이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심지어 한 학생은 이 영화보다 차라리 자기네 집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하루 종일 찍어놓더라도 이보다는 재미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한글 자막도 없는 이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라고 한 것은 추석을 맞아 각자 자신의 가족과 친족들을 돌아보며 문화기술지를 한번 써보자는 의도였다. 한국의 가족과 친척 공동체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급속도로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설날이나 추석이면 우리는 기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고 입석표까지 다 팔려 콩나물시루가 된 기차를 타고서라도 악착같이 고향으로 내려간다. 평소에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살다가 왜 우리는 이렇게 명절이 되면 악착같이 서로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정작 만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하면서 어떤 관계를 확인하려는 것일까? 혹 설날과 추석은 이미 해체되어버린 가족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공동체는 출현하지 않은 ‘위기의 상태’에서 도착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멸한 친밀성에 대한 알리바이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례행위를 지금의 대학생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외로운 가족, 든든한 가족

 

다수의 학생들은 이 대화없는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의 가족을 만났다. 천수원의 가족들이 가진 외로움을 자신들의 가족들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한 학생은 자신들의 가족에서 소통이 얼마나 단절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기독교 집안인 이 학생의 집에서 명절에 추도 예배가 끝나고 나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족들이 나눌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이나 설날에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는 친교와 그리움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어색함’의 공간이다. 할아버지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주도하시지면 이 학생에 보기에 이것은 가부장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할아버지는 ‘권위 있는 허수아비’로 비쳐진다. 할아버지가 있기에 그나마 친척들이 모이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것 같지만 그분의 말과 나눔은 가족들 사이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그냥 의례적인 것이고 헛돈다. 다른 한 학생 역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할머니 덕분에 온 가족이 명절이면 무조건 다 모이지만 정작 모이고 난 다음 하는 이야기는 핸드폰 이야기에서 새로 나온 차에 대한 이야기 등 피상적인 이야기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학생이 보기에 자신들의 가족은 외롭다. 친척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할아버지도 당신의 방에서 ‘혼자’ 바둑을 두시고, 아버지도 그저 당신의 친구들과 함께 골프치고 바깥일을 하실뿐 할아버지나 다른 가족들과 말을 많이 나누지 않는다. 엄마도 집안일에 지쳐 있다. 동생이나 자기 자신도 바깥으로 떠돌지 결코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소통을 하고 정을 나누는 일은 드물다. 아버지는 당신은 못하면서 이 학생에서 할아버지에게 자주자주 전화하라고 부탁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다니고 싶지만 차마 말로는 못하고 몰래 골프를 배운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들은 소통은 단절되어 있고 외롭다. 이 학생은 인간은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오히려 외부의 사람, 이웃에게 더 친절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들의 삶은 서로 겉돌고 헛돈다. 그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말은 의례적이고 판에 박힌 말 뿐이다. 한 학생은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학을 하고 의무교육을 다 받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에게 맞는 직무는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고찰 없이 소위 "그래도 대학교는 나와야지" 말을 수 없이 되뇌어 주시는 부모님, 주변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돼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삶이라고 일갈한다. 그 가운데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친구들이지 결코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아니다.

그래서 가족, 혹은 친척들과의 만남은 불편하다. 친척들에게 전화하여 안부를 묻는 것은 낯선 일이다. 이렇게도 ‘재미없는 명절을 보내느니 차라리 안 오시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왜 만나는가? 이 학생은 명절 때의 만남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쾌하게 이야기한다. 평소에 만나지 않아도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명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명절 때만 만나면 되는 것이니 평소에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명백한 도착이다. 다른 한 학생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들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냉소’ 그 자체이다.

반면 몇몇 학생들의 글에서는 한국의 가족 관계에 의미심장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아직 친척관계로까지 확장되지는 않았지만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과거와는 다른 친밀성이 태동되고 있었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친구같은 부보-자식관계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사이는 친구이자 스승이자 가장 활발한 수다상대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 학생은 남학생이다. 그는 어머니는 ‘존경’한다고 말을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해결이 방법이 안 떠오르는 문제가 있거나 마음이 뒤숭숭할 때 주저 없이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하고 나면 ‘열에 아홉은 가슴이 뻥~~ 뚫린’다고 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연애상담까지 많은 것을 엄마와 흉허물 없이 터놓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마보이도 아니다. 언제나 자신은 자기의 일을 줏대있게 처리하고 어머니는 그것을 존중한다고 한다.

여전히 많은 가족들은 가부장제 때문에 명절이면 남자들은 방에 모여 고스톱치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겉도는 이야기를 하지만 여성들은 부엌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한다. 하지만 한 학생은 자신의 집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어머니는 재료를 준비하고, 동생과 자신은 음식을 만들고 기름에 부친’다고 한다. 온 식구가 서로 같이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친척들이 모이게 되었을 때 최근 동향이나 앞으로 나가갈 미래들’을 같이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생에게 가족과의 약속이나 만남은 그 어떤 다른 친구들과의 그것보다 더 우선적이다.

 

새로운 공동체인가, 가족의 민주화인가?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가족은 지금 새로운 친밀성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소수의 가족들과 이전의 가부장적 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헛돌고 겉도는 관계로 완전히 양극화되어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이런 형식적인 모임을 계속 가지는 것보다 차라리 이 도착된 알리바이, 허구만 남은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농사짓던 때는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다 따로 살다보니 같이 토론할 주제도 별로 없다. 게다가 다 따로 살면서 경제적 격차도 커지다보니 ‘며느리’들끼리의 신경전도 커지고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이 학생의 가족만 하더라도 첫째 큰아버지는 부도나셨고, 둘째는 큰 회사 사장님이고, 자기네 집은 중산층이라고 한다. 게다가 정치적 견해까지 달라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피하고 나면 실제로 할 만한 이야기가 거의 없는 셈이다.

사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특히 IMF이후에 겪고 있는 문제이다. 집안에 망한 형제자매가 없는 가족은 거의 없다. 망한 가족이 자연스럽게 다른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면서 관계가 급속도로 소원해지고 심지어 원망하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이런 학생들은 혈연에 기초한 이런 허구적인 공동체를 깨고 새로운 공동체를 결성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현대 사회에서는 ‘혈연’에 얽매이기 보다는 도시 사회에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하는 것이 더 현대인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매스컴에서는 시골로 돌아가 가족들끼리 모이는 귀가 행사를 우리나라 전통의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적 풍습으로 묘사를 하고는 하지만, 실상은 정체되는 교통과 텔레비전을 매개로 하는 일방적 대화이며, 며느리들의 끊임없는 식사준비 및 설거지의 반복이다. 지나치게 전통과 혈연을 강조하고 이에 집착하면 그것이 도착이 되어 형식만 남게 된다. 영화 ‘낮과 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셋, 즉 온, 크와이, 그레니(이름이 다 맞는지 모르겠다) 가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마음을 나눔으로써 한 가족이 되었던 것처럼, 멀리에서 찾기보다는 아파트 문화를 새롭게 살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가족에서 배제된 이웃에게 새롭게 가족을 선사해주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이 학생은 영화에서도 ‘웃음과 대화가 없던 모자의 집, 혼자 묵묵히 밥을 해드시는 딸 잃은 나이든 어머니의 집’이 서로에게 인연이 되면서 ‘하나의 끈’을 형성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아파트처럼 밀집되게 서로 붙어살 수 있는 것이 ‘비인간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가족이 형식이 아니라 친밀성의 공간이 된 친구들은 여전히 ‘가화만사성’을 부르짖는다. 가족이 행복하면 ‘내 삶의 모든 것이 행복한 것’같은 느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 당장 불행이 닥쳐와도 걱정과 불안’이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힘을 얻어 그 일들에 다시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공통된 점이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친구처럼 자식과 논다는 것이다. 격의가 없으며, 같이 음식을 만들어먹는 것을 좋아하고 자식이 하는 일을 끝까지 신뢰하고 무엇인가 잘못되면 같이 책임을 진다. 즉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로서의 가족인 셈이다. 다른 가족들이 ‘중요하지만 시급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우선순위에서 늘 뒤로 미루다가 친밀성 그 자체까지 놓쳐버린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많은 대화가 필요한가?

 

반면 몇몇 학생들은 정말로 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자지간이 거의 대화가 없는 것을 단절이라고 이해한 것에 반하여 이들은 오히려 가장 친한 사이는 사실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를 되묻는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중간에 나오는 ‘소통이 활발한 것이 좋은 가족’이라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정면으로 승부를 건다. 오히려 그것이 착각이고 환상이며, 우리로 하여금 혹시 계속해서 지금의 가족을 불행한 것이라고 강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가족은 정말로 대화가 없으며 아들은 무슨 말을 하던지 수긍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인가?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는 것 같은 아들이 은둔형외톨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썽쟁이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가 무엇을 부탁할 때마다 군소리없이 다해주는 효자이다. 엄마 역시 아들에게 인생 하소연을 지겹게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면서 사람을 넉다운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아들에게 엄마로서 해야하는 것은 묵묵히 다 처리하는 사람이다.

 

혹 서로간의 냉대나 갈등의 조짐이라도 보인다면 또 그러한 ’명분‘이 설진 몰라도, 애석하게도 두 모자간의 관계는 평범을 넘어 지극히 평온하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귀찮고 궂은 부탁에도 한치의 투덜거림없이 척척 도와가며 살아가는 이시대의 진정 ’행동하는 효자‘인데다가, 이것이 정녕 ’어머니의 밥상‘인가 할 정도로의, 눈물나는 영양식단에 단 한번의 투정이나 투쟁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주인공(아들)의 그 넓은 아량와 인내는,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의 감동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한 학생은 오히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이 지루하기짝이 없는 가족이 ‘부럽다’고 말한다. 이 가족의 삶은 감동적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담담하다. 이 학생은 반대로 되묻는다. 혹시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렇게 덤덤하고 무의미하고 건조한, 그러면서 의례처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현재 가족의 모습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학생은 그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딱 잘라서 말을 한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이 무덤덤하고 무의미한 가족 그것에서 친밀성을 발견하고 가꾸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어떤 정답에 기대어 우리의 현실은 평가되고 단죄되어야만하는 그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이 '가족의 정석'과 다른 우리의 현실 속 가족의 모습에 실망한다. 물론 대부분 나이를 들어가면서 현대 사회 속 일상의 가족은 도덕 시간에 배운 '가족 환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수긍한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와 수긍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가족에 대한 판단에서 오히려 다른 분야에 대한 판단보다 옳다/그르다라는 이성적 판단하에 엄격한 기준을 두어 정확한 답을 요구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과제라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영화를 보는 관점이 감성에서 이성으로 바뀐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첫 시간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정규 교육에서 주입해 준 지식에 사로잡혀 가족을 마치 내게 주어진 하나의 점수화해야'만' 하는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학생의 시선에 따르면 우리의 가족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그 또래 학생이 모범적으로 늘어놓는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 우리의 가족은 그런 중산층의 핵가족 모델에 한참이나 못 미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마와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가족은 정상적인 척하면서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문제가 ‘곪아터질대로 터진’ 가족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건강하다. 너무 건강해서 오히려 이 가족이 잔잔한 일상이 아니라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일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이상적인,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이 학생의 놀라운 발견이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주 만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는 가족에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뭔가 정상적이고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정답을 강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한다. 이들의 관계가 이상하고 문제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시선이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애초부터 ‘아무런 문제도 없기 때문에 답도 있을 리 없는 이 가족’에 대해 비평의 칼날을 들이대는 사람들의 사랑은 누구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어떤 사랑인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라는 강박에 늘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작성일 : 2009. 10. 20

작성자 : 엄기호

 

돼지가 있던 교실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이다. 졸업을 앞둔 6학년의 한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돼지를 같이 키워볼 것을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학교측과 불편해하는 학부모들을 앞에 두고 아이들은 일단 시작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돼지에게 P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P짱은 곧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학급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다. 지나치게 아이들이 P짱에게 밀착되어 버리자 학부모들의 항의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오면 온통 P짱 이야기밖에는 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장선생은 담임과 자신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며 담임에게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가 보라고 격려한다.

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의 졸업이 다가오자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졸업을 해야하니 더 이상 P짱을 보살펴줄 수 없기 때문이다. P짱에게 정이 든 아이들은 이미 P짱은 돼지고기가 아니라며 절대 먹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반대하는 아이들은 애초에 데리고 온 이유가 먹기 위해서였고 우리가 먹는 것도 P짱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니 죽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다른 저학년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학년들이 P짱을 다루는 것이 신통찮아서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동물원이나 농장에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학급회의가 소집되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동수가 된다. 결국 학급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담임교사는 P짱을 식육센터로 보내는 것을 결론을 내린다. 영화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함께 막을 내린다.

 

거침없이 토론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이 대다수가 이야기한 것은 한국 교육 현실의 한심함과 이런 체험형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다. 가장 먼저 돼지를 키우자고 제안하는 담임교사의 실험정신이나 열린 자세를 꼽을 수 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서 한국의 교실에서는 교사의 의견과 결정이 ‘수업시간뿐 아니라,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로 여겨졌고,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준’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과 어떤 문제를 같이 상의하고 해결해나가는‘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 영화의 교사는 돼지를 키우자는 것도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P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요하지 않고, 돼지를 키운 주체인 학생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학생을 의견의 당사자로 존중해주는 교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처음 이 젊은 담임의 결정에 우려를 표하지만 막상 학부모들의 걱정이 시작되고 항의가 이어지자 담임에게 끝까지 한번 프로젝트를 수행해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교장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다. 한국의 교장들이 교사들이 저지르는 일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교사들의 그 어떤 창의적인 제안도 말썽이 일어나면 책임을 지겠냐고 도로 윽박지르른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학부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학생들을 위해, 부모들을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교장선생님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지난번 일제교사에 대한 반대에 대해 교사의 자율권을 존중해주다가 장수중학교의 교장이 징계를 당하는 것을 보면 이 충격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아이들의 토론 역시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다른 동료들과 교사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한 학생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신이 여전히 무엇에 대해 발표할 때 엄청나게 긴장한다고 고객한다. 누가 자신의 발표에 대해서 토를 달지는 않을까, 자기가 발표하는 내용이 ‘교수가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등을 걱정한다. 자신의 현재 전공의 특성상 ‘보다 실험적이고 획기적’이어야하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때 까지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단지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하는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영화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육을 실천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라는 것이 상당수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장,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세계의 붕괴와 해방

 

영화 내부적인 것에서 아이들이 P짱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당연하게도’ 김춘수의 ‘꽃’이다. 몇 번이나 이 연재에서 이야기를 한 것처럼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이리도 크다. 자신들이 무슨 주장을 해야할 때면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참고문헌’은 교과서인 것이다. 참고문헌의 힘은 단지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장의 내용과 방향까지 결정한다는 것에 있다. 김춘수의 ‘꽃’이 등장하는 순간 학생들이 어떤 내용을 주장하게 되고 그것의 결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P짱과 아이들 사이에 친밀성이 형성됨으로써 P짱은 더 이상 돼지고기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관계의 형성은 P짱을 식육동물에서 애완동물로 격상시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인격적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꽃을 패러디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돼지는 그저 고기용 돼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자 돼지는 귀여운 ‘P짱’이 되었고 의미가 되었다. 돼지가 ‘P짱’이 되자,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돼지고기 만드는 돼지란 점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이 된다. 요컨대 ‘나 없이는 ’P짱'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하는 경험 또한 ’P짱'이 있음으로서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결속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와 같은 공동체는 환상이다. 한 학생은 ‘애완동물에서부터 혈연․지연․학연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런 환상 속에 살면서 환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암묵적으로 아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환상을 깨뜨려 현실을 바라보기’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환상이 깨어지는 것, 즉 P짱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창조한 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이 세계의 붕괴이며, 이 세계의 붕괴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성장을 해 나간다. 실패와 종말을 감당하며 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라고 부르는 이별과 분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젖을 떼고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이 세계의 질서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P짱과의 분리는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하면 모든 것이 충만한 상상계에서 모든 것이 매개되는 질서로서의 상징계로의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성장,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아마 이 영화는 등장한 아이들에게 ‘먹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별과 분리의 잔혹한 과정을 통하여 아이들을 상징적으로 거세하는 훌륭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이렇게 상상적으로 하나 혹은 공동체라고 느꼈던 생명과의 단절을 통하여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던 과정을 드러냈다.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병아리와의 이별에서부터 시골 출신인 한 학생이 자신과 같이 성장한 ‘뽀삐’라고 불렀던 한 송아지의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 이별과 헤어짐이 다가오는 의미와 강도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병아리가 아버지에게 잡아먹혔다는 충격 때문에 평생 닭고기를 못 먹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키운 닭이 농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녁 식탁에 올라온 닭은 자기가 키운 닭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맛있게 먹기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자신의 닭이 사라졌을 때 사실 그 닭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사실상 자신은 피곤하였기에 솔직히 잘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의 다른 말이 곧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관계의 단절은 세계의 붕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해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P짱은 애완동물이었을까?

 

아이들이 P짱을 P짱으로 부르는 순간 생명은 위계화된다. 학생들이 간파해낸 것은 이런 ‘특별한’ 인격적 관계의 형성은 반드시 생명의 위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토론과정에서도 아이들은 P짱은 다른 돼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학생은 ‘똑같은 생명이라도 자신과의 추억이 있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같은 종은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환기시켰다. 이 학생은 ‘그다면 인간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덜 소중하단 말’이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돼지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이 대사에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의 대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관계의 특별함을 통하여 생명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위계화하는 것에서는 이 학생의 말처럼 나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이니 당연히 그것은 특별한 대접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의 인종주의는 나치처럼 자신들의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화되어야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특수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 학생의 통찰은 더욱 의미가 있다. 국민과 비국민이 갈리고 이주노동자도 등록이주노동자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갈린다. 그리고 이 분류는 인간들이 누구에게 더 공감하고 누구에게는 덜 공감해야하는지를 갈라 놓으며 그 공감의 차이를 정당화한다. 즉 공감의 정도가 강한 부류에 대한 차별은 격심한 비판을 받지만 그 반대 급부로 공감의 정도가 덜한 인간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더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이미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서 위계화되어 있다. 같은 돼지라고 하더라도 이 돼지가 농장에 있으면 식용동물이며,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있으면 야생동물이고, 집에 있으면 야생동물이며 실험실에 있으면 실험용 동물이다. 한 생명이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그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익숙한 구분법의 정당성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내가 특별하고 특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더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더욱이 이 위계화는 위계화되는 동물의 특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한 학생은 자신이 식당에서 시킨 삼계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먹기 불편할 정도로 엽기적으로 생긴 것은 오히려 찢겨져서 이미 형체가 없어진 상태로 나오는 개고기가 아니라 목만 잘린 채 뱃속에 온갖 가지 이물질을 담고 나오는 삼계탕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은 자기가 시킨 ‘탕’이 개고기라는 것을 알자마자 미련없이 삼계탕으로 바꾼 후에 아무런 느낌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가를 되묻는다. 요컨대 이 위계화는 대단히 정밀하게 동물의 속성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만든 분류표에 따라 배치된 것 뿐이다. 여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려, 혹은 생명을 나누는 분류/배치표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다는 교육이 오히려 생명을 위계화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한 학생의 말처럼 ‘아이들이 토론에서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토론의 전제는 'P짱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것이 된다. ‘동료’라고 부르지만 한쪽만 말을 가진 관계가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겠는가? 생명은 고귀하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돼지는 처량하다. 이 때문에 한 학생은 ‘돼지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P짱과의 결속 자체가 아이들 쪽의 일방적인 환상인 셈이다. 그래서 이 환상의 단절은 ‘토론’이라는 이상한 이성적 과정을 밟게 된다.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던 셈이다.

 

교육의 잔혹함, 교사의 무책임

 

이런 점을 간파한 몇몇 학생들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 학생은 만일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돼지를 키우자고 했다고 가정하고 말을 하자면, 애초에 잘못 접근’이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고 ‘생명을 가둬두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며 이것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다른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애초부터 생명의 의미와 음식의 소중함은 전혀 다른 주제이다. 그런데 이 교사는 이 두 가지를 섞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음식은 죽음 생명이 되는 것이고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상야릇한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열린 교육에는 음식의 소중함도 생명의 소중함도 없다. 다만 아이들의 추억만이 달랑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P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결국 식용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닌 교육용 실험동물이었던 셈이다. 아니, 애완동물의 다른 이름이 실험동물이다. 아이들에게 음식의 소중함, 혹은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는 이름으로 어찌 보면 호사를 누렸지만 어찌 보면 가장 잔혹하게 다루어진 실험용 동물인 것이다. 이미 이것은 담임선생이 P짱을 교실에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운명 지어져 있었다. 한 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담임교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에게 모든 결정권한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을 두 편으로 나누고 ‘한 쪽에 동그라미’를 이미 그려놓은 그런 토론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이런 정황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감정적 정황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혹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린 교육’이 만들 수 있는 P짱과 같은 실험체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덫인 것은 아닌가? 한 학생의 신랄한 평가에 따르면 ‘교실 속 아이들은 곧 어른이고, 교실속 어른이 마치 그 어른들의 논쟁을 불구경하듯 앉아있는 우유부단한 아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교육에서 가장 무책임했던, 혹은 가장 무책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담임선생이었다. 그래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이 ‘자유분방’하고 ‘아이들을 믿으며’, ‘민주주의적’이며,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에게 아래와 같이 묻는다.

 

당신이 행한 수업방식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난 참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졸업 3일 전에 아이들에게 ‘잔인한’ 투표를 시킬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맨 처음 반 아이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돼지를 달랑 들고 온 그대가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며 식육센터로 보낼지, 3학년 아이들에게 보낼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그냥 넘기다니, 교육자로서 당신의 책임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더라 이겁니다!

그래요, 교과서에 ‘글자’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오감(五感)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 그것만큼 제대로 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적인 선생 또한 없죠. 처음에 당신이 돼지를 가져 온 이유는 돼지를 길러서 나중에 같이 잡어 먹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P짱’이라는 돼지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나뒀어요. 아이들이 ‘P짱’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도록 놔뒀어요. 아이들이 ‘P짱’을 먹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가져온 것을 놔뒀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아이들의 그림을 교실 뒤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돼지를 새로운 친구로 만들게 놔뒀어요. 왜 그랬어요?

 

교사는 ‘이것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무책임해질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은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 아이들의 주체성을 믿고 체험을 통한 교육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은 참 복잡한 것이다.

작성일 : 2009. 8. 16

작성자 : 엄기호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는다

 

지난달 교육관련 세미나에 참석차 홍콩을 다녀올 때의 일이다. 금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명품 쇼핑 관광을 떠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띠었다. 내 뒤에서 체크인을 기다리던 두 명의 아가씨들도 이번에 홍콩에 가서 무엇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을 어떻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자신들의 진정한 경쟁자는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고 갈 비행기보다 30분 먼저 도착하는 일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짐을 찾자마자 쇼핑몰로 날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홍콩을 서른 번도 넘게 갔다 왔지만 한 번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세미나가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말하는 루트를 한 번 따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홍콩에 도착한 다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였더니 놀랍게도 명품 쇼핑을 위한 카페가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세일에 대한 정보와 물건 고르는 법, 그리고 그렇게 고른 물건을 디카로 찍어 올리는 등 대단히 활발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추천하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하루 정도 명품 쇼핑 순례를 해 보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쇼핑센터이고 일 년 내내 세일이 끊이지 않는 곳이 홍콩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쇼핑에는 대단한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쉴 때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쇼핑센터에서는 쉴 때도 어디 주저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들어가 뭔가를 마시면서 쉬어야했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번에 산 물건으로 자신이 얼마를 절약하였고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전략을 짠다고 바빴다. 보통 에너지와 체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생들과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에서의 자신들의 스타일 만들기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대체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학생들은 어떻게 소비의 덫에 빠져있고, 또 어떻게 빠져나오고 있는지, 또한 스타일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드러내는 정치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학생들에게 ‘섹스 앤 더 시티’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스타일 전략을 살펴보게 하였다.

 

삶에서 겉도는 도덕적 언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이 명품에 얽힌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명품과 관련된 잡지사에서 일하며 명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치열한 과정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권력과 암투를 목격한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자유와 스타일의 도시라고 하는 뉴욕에서 살고 있는 4명의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로 섹스와 쇼핑 등 뉴욕의 화려하고 일회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숨김없이 욕망하고 즐기며 그 안에서 각자의 사랑을 펼쳐나간다. 두 영화 모두에서 ‘헐리우드 영화’식의 순박하고 인간적인 것을 찬양하는 듯 하는 결론만 제외하면 이 영화는 소비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힘이 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30대 주부가 시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나서 화가 나 있을 때 남편이 명품 백을 사주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명품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으며 이 영화들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업이라는 공간에서는 ‘당연하게도’ 다수의 학생들은 명품 소비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나는 대학이건 대안학교이건 어디에서나 수업을 할 때마다 대단히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도덕적 비판’의 문제였다. 학생들은 무엇에 대해서나 일단 ‘도덕적 비판’을 먼저 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이 되어 있는 듯하였다. 늘 사고보다는 정답을 강요받은 결과인지 습관적으로 상투적인 ‘도덕적 비판’에 머물러 버리곤 하였다.

명품소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등한시하고 껍데기만 중요시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자기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명품을 걸치건 보세 상품을 거치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소비에서도 자기 주체성을 가져할 것이고 소비자본주의의 상술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수의 학생들은 이런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 자신은 지금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하였다. 자신들이 비판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에 이미 자신들이 살면서 끊임없이 타협하고 협상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한 학생의 표현대로 하면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성찰해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학생은 매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고통을 서술하였다.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 속삭이면서도 거울 앞에서는 ‘이 옷은 이미 유행이 지난 옷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거리를 지나다닐 때 ‘진열대에 걸린 스키니 진이 "어이 이봐, 나를 사야만 친구들과 이야기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거 같다’고 고백한다. 군대에서는 양말 7개, 속옷 7개, 전투복 3벌로 2년을 버텼는데 ‘학교를 복학하고 나서는 내일은 뭘 입어야 할지가 걱정이고,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싶은 욕구에 늘 시달’리면서 계절이 바뀌면 옷장이 넘쳐나게 옷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은 명품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은 갖추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비싼 옷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같은 감각을 소유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유행은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기 때문에 대세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도태이다. 스타일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곧 같은 무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얼핏 보면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내야하는 것이 소비이다. 이 양자 사이에서 갇혀 오고가도 못하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이 학생은 고백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생이 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였다는 고백이다. 몇 번이고 이 이야기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언어 속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있었는데 수업이 반복이 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 무모하고 아픈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차라리 몰랐다면 속 편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속물됨이라던가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것을 부정하는 얕은 지식의 조합으로 쓰는 글들’보다는 더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학생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이 소비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상투적인 언어이다. 이런 도덕적 언어들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데 한참을 못 미치는 언어들이다. 삶에서 겉돌고 성찰에서 헛도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언어들이 학생들의 사고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학생들에게 사유를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투적 언어들의 가진 힘을 떨치고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학생의 말처럼 아픈 고백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가리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힘이 된다.

 

버리기 위해 소비한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비판을 좀 더 밀고 나가보기로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적 수준이기는 하지만 명품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이미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끊임없는 소비의 순환 고리에 빠져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과 스타일이 자신을 먹어버린다는 점이다. 또한 누구나 다 명품을 따라하게 되면서 ‘구별짓기’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또다른 명품을 찾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명품의 역설’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꼼꼼하게 살펴본 한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붙여보았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랜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학생은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명품’이 어떻게 ‘남들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대중’으로 회귀해 버리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 학생의 말에 따르면 ‘명품의 획일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진짜이건, 짝퉁이건’ 길거리에 다니면 거의 모두가 ‘프라다’,‘구찌’를 들고 다닌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갖고 있음으로 “명품 아닌 명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명품이 자신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어울리기 위해, 소외되지 않기 위해 ‘MUST HAVE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모두가 똑같은 ‘버섯머리에, 뿔테안경에, 스키니 진’을 입고 있다. 게다가 브랜드가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지는 것이며, 이 때문에 명품이 똑같아지는 순간 자본주의는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며 사람들을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다른 한 학생은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언니의 사례를 이야기하였다. 자신의 언니는 지독한 쇼퍼홀릭인데 한정판 가방을 사기 위해 자신을 깨워서 새벽 6시에 매장 앞에 줄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언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즉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를 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버리기 위해서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이 학생은 명품은 일회용품이라고 단언하였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티슈나 한 번 쓰고 옷장으로 직행하는 명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 년을 입어도 십 년 같고, 십 년을 입어도 일 년 같은’ 그럼 오래도록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품은 사기라는 것이 이 학생의 놀라운 결론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가 소비 자본주의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패턴을 유지하는 한 이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 게다가 자신을 남과 다르게 드러내기 위해서 소비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명품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과 내가 같은 경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 학생은 이것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품이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볼때조차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친구들 간의 대화에 끼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공감대가 전혀 쌓이지 않고 그 어떠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에 ‘웃어야 할 때 함께 웃지도 못하면서’ 사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따라서 ‘그 방송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호인정이라는 이 ‘소리 없는 전쟁’에서 피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소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켜주었다. 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을 소비한다는 것에는 쉽게 수긍하였지만 우리가 소비를 위해 시간과 공간에도 대단히 많은 품을 들이고 소비해야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소비는 빙산의 일각이며 그 밑에는 거대한 삶에 대한 소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나 자신

 

우리가 물건 하나를 소비하기 위해서 어떻게 삶을 소비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스타벅스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방살이를 하고 깁밥 한 줄을 먹어가면서도 반드시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마신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가지고 토론하였다. 스타벅스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다른 커피와는 다른 향을 가진 질 좋은 커피. 그 곳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 이 공감대에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세련되었다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공간을 소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편하기는 푹신한 소파가 있는 옛날식 다방이 편하지만 이런 곳을 이용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즉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 스타벅스를 이용한다. 결국 종착점은 이미지이다. 소비자본주의가 팔아먹고 있는 것은 이미지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이미지의 소비자들인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왜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가?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만족을 얻는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누구의 이미지인가? 한국의 보통 주부들이 가진 낭만 중의 하나가 주말에 남편이 모는 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서 아이들을 카트에 태우고 쇼핑하는 것이다. 이들 주부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바로 단란한 가족의 운영자로서의 주부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스타벅스건 대현마트건 소비의 현장에서 두 가지의 자아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물건을 소비하며 흡족해하는 자기 자신과 그 흡족해 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 자신. 이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가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합리성이다. 정체성은 내가 같은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정체성이다.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소비가 낭비나 궁상맞은 것은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위라는 스스로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며 소비하는 ‘나’가 두 명이라는 점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경험적으로 자신들이 나르시시즘적 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타인의 시선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특히 우리가 소비의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점과 그 합리성이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였다. 예를 들어 태국과 같은 곳에 여행을 가서 수천 바트(십여만원에 해당하는 돈)를 하는 5성급 호텔에 머물면서도 길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는 10바트를 깍기 위해 악착같이 구는 모습이 바로 소비가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품 쇼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말한 홍콩 명품 쇼핑 카페에 가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합리적 전략’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구매 상품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칭찬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것이다. 어떻게 이 가격에 이런 상품을 살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즉 구매한 사람의 합리성에 대한 경탄이다.

한 학생은 이런 합리성을 여성들이 싣는 힐에서 찾아내었다. 그녀는 ‘힐을 신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고개도 당당해지고 허리도 꼿꼿하게 세워지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통해 묘한 희열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이런 화려함과 황홀함이란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 발의 통증정도는 고사할 수 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나 이외에 그 통증을 고사할 정도로 스타일을 고수하고 즐기는 ‘나’가 있으며, 그 ‘또 다른 나’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자여. 7,8,9 센티의 아찔한 기둥을 달고 달아오른 거리를 걸어라.” 이 학생이 좋아하는 블로거가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된 화려한 힐 사진과 함께 적어둔 멘트라고 한다.

 

그러나 명품만 있고 스타일은 없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소비는 도덕적 비판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소비자본주의 안에서 그만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합리적 주체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비판이 소비자본주의의 주체성에 대한 비판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비판하지만 행위의 당사자는 이미 자신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초점이 어긋나게 된다. 이야기의 말미쯤 한 학생이 말을 한다. “근데요 선생님.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습니다.” 정답이다.

기실 이 합리성의 정체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이다. 뉴욕에 다녀온 한 학생은 섹스 앤 더 시티의 현실을 이렇게 말한다. 다음 요구사항이 충족되어야만 영화처럼 살수 있다. 무엇보다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 샬롯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중상류계층이다. 그리고 슬림한 몸매. 뉴욕인간들이 미친 듯이 사수하는 것이 ‘슬림한 몸매’란다. 그리고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 주소. 그렇지 않다면 뉴욕은 ‘열심히 눈으로만 봐야하는 도시’라고 한다.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비자본주의는 ‘그 비싼 관세 내가며 5번가에서 쇼핑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날 저녁 먹을 베이글 값도 달랑달랑’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지친 날 위로해줄 스타벅스의 2달러짜리 아메리카노와 역시 2달러 짜리 베이글’이었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궁핍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생은 그래도 뉴욕은 자유로왔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가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소비자본주의의 미덕도 제대로 못 갖췄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장 문을 열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었다. 뉴욕에서는 미니 청치마를 입고 물찬제비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닐 수 있었다. 비록 명품은 아니더라도 두루두루 벼룩시장, 싼 중저가 브랜드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었고, 또 추수감사절이후의 폭격세일기간(Thanksgiving day sale)엔 관광객마냥 비싼 명품 숍도 들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후 그녀의 옷장은 두 개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뉴욕에서 입던 옷들. 그리고 다른 옷장에는 한국에서 입는 옷들. 당연히 미니 청치마는 뉴욕 옷장에서 썩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청치마를 입으면 10m 멀리서부터 남자며 여자며 아래를 쳐다보며, ‘우아.. 용감하다..’는 무언의 말이 ‘응원의 눈길과 함께’ 날아온다고 한다. 엄청난 간섭이 한국에는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스타일이, 스타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오로지 학교 유니폼처럼 판에 박힌 듯이 맞춰 입고 나온 명품만이 허용될 뿐이다. 이게 대학만 들어가면 아이들이 모두 다 맞춰 입는다고 하는 학교 점퍼와 뭐가 다른가? 명품만 허용되고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 이것이 한국이다.

작성일 : 2009. 6. 22

작성자 : 엄기호

 

이슬람 여성들은 차도르를 벗어야 할 것인가?

영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한 중산층 엘리트 여성이 이슬람 혁명의 와중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의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마르잔은 테레란에서 열렬하게 혁명을 지지하던 중산층 엘리트 부모를 둔 펑크락에 심취된 소녀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들 가족은 왕정타파를 위해서 자신들이 지지했던 혁명과 실제 그 혁명의 보수적 결과에 당혹하게 된다. 마르잔이 테헤란에서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한 부모는 그녀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보낸다. 서구에 온 마르잔은 곧 자신이 이 사회에서도 이방인임을 깨닫게 된다. 섹스와 마약, 그리고 방황을 거듭하던 끝에 그녀는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오지만 이란은 이미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국가가 된다. 이슬람의 젊은이들에게 허용된 자유란 밤에 몰래 불법적인 ‘클럽’에 모여 서구의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항상 감시의 눈빛 속에서 언제 도망을 다니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차도르만큼이나 끔찍한 학교를 떠올리다

 

이 영화를 통해 학생들과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머리 수건인 차도르를 여성에 대한 인권 억압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내건 대의중의 하나도 탈레반에 의해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많은 고발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는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화적 장치로서 존중되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윤리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제국주의라는 거센 비판과 반발이 이어졌다.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다수의 학생들은 ‘당연히’ 보편과 인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벗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차도르는 강제적”이며, 그것은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은 역사로만 남되 전통으로 남아서는 안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자유를 (지나치리만큼) 제한하는, 남성과 여성을 분명하게 차별하는 그릇된 문화”라고 단언하며 여성은 “차도르를 벗음으로써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다수의 학생들은 ‘전통’과 ‘인습’을 구분하며 ‘전통’은 계승되어야하는 것이지만 ‘인습’은 타파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학교에서 배운 언어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친 말은 이처럼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남아 사회와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반면 학생들 중에서 일부는 <페르세폴리스>를 보고 이슬람의 억압적 문화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억압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아본다. 학생들의 이런 경험은 대부분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것에서부터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중고등학교에서의 ‘교복과 두발, 애국가와 아침조례, 그리고 특정 종교의 강요’이다. 이들에게 한국은 차도르를 강요하는 이란만큼이나 끔찍하게 자유가 박탈된 사회이다. 다른 사회의 억압을 보면서도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며 거의 자동적으로 바로 떠올릴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는 곳이 학교이다. 누구의 말처럼 한국인에게 학교와 군대는 억압의 원형적 체험으로 남아있다.

한 학생은 아침조회와 애국가를 떠올렸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매주 월요일마다 아침조례가 열리고 아이들은 “차렷과 열중쉬어를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부른다. 모두가 차도를 다 걸치는 것처럼 모두가 다 하는 것이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 학생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었다면 한 마디 정도는 기억날 만도 한데,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회상한다. “귀찮고 싫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이것이 차도르랑 무엇이 다른지를 되묻는다. 다른 한 학생은 강요되는 종교로서의 채플을 떠올리며 우리의 일상생활도 “이처럼 전적인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우리가 질문해야하는 것은 왜 우리의 경우는 마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이슬람의 차도르만 문제를 삼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동일선상의 어떤 문제는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선상에서 교복과 두발의 문제가 가장 많이 학생들이 떠올리는 주제였다. 한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치마를 강요하던 일을 떠올렸다. 자기의 동급생 중에서 한 학생이 자신은 치마를 입는 것이 불편하다며 학교에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 학생에 따르면 문제를 제기한 그 친구는 '치마를 입으면 자전거를 타기 힘들다.' '겨울에는 종아리가 얼어붙을 것 같이 춥다.' '몇몇 아이들은 다리가 굵기 때문에 함부로 치마를 입지 않으려 하는데 학교 측에서 하반신 노출을 강요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그 의견에 동조하였고,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막상 이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지자 그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그 학생뿐이고 다른 여학생들은 ‘민망하다’는 이유에서 그다지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행사하기에는 사회의 시선이라고 하는 또 다른 장애가 존재한 것이다. “스스로 투쟁해서 얻어낸 교복바지”를 주변 시선 때문에 활용할 수 없게 되면서 자유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유는 보이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무심해지는 것이다.

차도르가 감추는 우리사회의 진실

 

이런 점 때문에 한 학생은 오히려 차도르가 이슬람 여성들에게 역설적으로 자유를 줬다고 말을 한다. 차도로를 쓰지 않는 ‘자유’가 있는 우리세상이야말로 여성들에게 전혀 자유롭지 않은 사회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꾸며야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부자연스럽고 우리가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훨씬 더 부산스럽고 부자유스럽다.

오히려 이 학생은 차도르를 쓴, 한 이슬람 여성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무한가지의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누가 알겠는가. 차도르로 머리와 몸을 가리고 레이스로 얼굴을 가리고서 조숙하게 걷고 있는 그녀가, 빨간 레게 헤어스타일에 핫팬츠를 입고 배꼽에 3-4개의 바나나바벨 피어싱을 하고 있을지.”라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 학생은 이슬람 여성이 “차도르를 씀으로써 ‘자신에 대한 타인의 의식’과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라는 구속에서 해방 되는 실로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온 몸을 돌돌 감아버림으로써 “그녀가 얼굴이 예쁜지 못생겼는지, 부유한지 가난한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혹은 황인인지, 어느 누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지어 그녀는 ‘그’일 수도 있다고 유쾌한 상상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예리하게 우리 사회의 패러디로 차도르의 문제를 포착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무엇을 가리며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질문한다. 다른 학생들이 차도르를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가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이 학생은 가린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은 가린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 질문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차도르는 ‘얼굴을 가리고’ ‘몸뚱이를 드러낸다’는 진실이다. 이를 통해 이슬람 여성들은 “이슬람문화권 여성들은 몸뚱이만 존재할 뿐,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며,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여성의 인권도 자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몸을 가리는 것은 남성들의 성욕이라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남성의 순수한 성욕의 대상인 몸뚱이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가리는 것에 우리 모두가 집중하는 사실의 문제라면 드러내는 것은 진실의 문제이다. 학생들은 이 점을 잘 간파해내었다. 결국 차도르의 진실은 한편에서는 이슬람의 남성들에게 여성이 성욕의 대상이자 도구인 몸뚱이로만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는 학생들과 사실과 진실 사이의 차이의 문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차도르를 쓰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억압을 강요당하고 차별을 당한다는 것 역시 아마 사실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감추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서구의 논리에서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진실의 문제도 잘 포착하였다. 먼저 우리 사회가 감추는 진실은 바지 교복을 이야기한 학생이 말하는 것처럼 서구화/근대화된 우리 사회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억압되고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쟁을 통해 교복바지를 입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바지를 다수의 여학생들이 입기를 꺼려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주어진 자유’가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진실의 문제이다. 사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진실은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감추어지는 것이 무엇이며 그 양자를 가르는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한 한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의 히잡 논쟁에서 감추어진 서구의 진실을 예리하게 폭로하였다. 히잡 논쟁이 드러내는 것은 이슬람이 후진적이라는 사실이고 감추는 진실은 서구사회가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평등과 자유의 정신에 입각해 받아들인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의 큰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민자들에게 불평등한 조치를 취한다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으로 들고나온 것이 히잡이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불평등을 가리고”, 그들의 불평등을 드러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히잡 논쟁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여성, 문화전쟁의 상징에 갇히다

 

아이들의 쪽글과 토론에 힘입어 우리는 왜 하필이면 여성과 차도르가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토론에서 우리는 차도르(히잡)에 대한 논쟁 자체가 여성을 행위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만 바라보며 그 상징을 쟁취하며 자신들의 억압적 진실을 감추려는 서구와 이슬람 남성간의 추악한 문화전쟁이라는 점을 발견하였다. 서구 사람들은 이슬람의 상징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차도르를 떠올린다. 사실 이슬람을 상징할 만한 것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차도를 제외한다면 대다수는 남성들의 것이다. 터번이라던가 이슬람 남성들이 매일 기도하기 위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양탄자라고 하던가, 남성들이 길게 누워 빨고 있는 물담배 등 이슬람의 상징으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차도르가 그 상징이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도르가 이슬람의 후진성과 억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의 문화가 이슬람을 오염시키고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타깃이 여성이고 그 상징이 차도르이다.

여기에서 우선 살펴보아야하는 것이 바로 이슬람 남성들의 위치이다. 서구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 이슬람 남성들은 중심으로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충분히 누려왔다. 그러다 이들은 서구의 침입으로 졸지에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던 것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들의 통제권에 대한 상징, 그것이 바로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이며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통하여 이들은 상처받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보편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권과 특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문화적 차이 사이의 갈등에는 이처럼 그 이전에 보편의 위치를 차지하던 기득권들이 특수의 위치로 내쫓기면서 다시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서구의 입장은 차도르를 문제삼음으로써 위의 학생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위선을 교묘히 감출 수 있으며, 동시에 이슬람 남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지게 된다. 이들 모두에서 여성은 단지 그들 주장의 정당성을 비호하기 위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오로지 차도르를 씀으로써 전통을 수호하는 상징이건, 혹은 차도를 벗음으로써 해방을 실천하는 상징이거나, 결국 둘 모두에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히잡이 논쟁 자체가 되는 것이 여성을 행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의 상징으로 삼아 그 상징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서구와 이슬람 남성들 간의 다툼이며, 이 다툼에서 이슬람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배교자인 여성, 소비자로 구원받다

 

그렇다면 상징이 아닌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우리가 발견한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서구에서도 이슬람에서도 영원한 배교자 혹은 난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페리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서구에서도, 이란에서도 영원한 난민이다. 이들에게 조국은 없다. 이들은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서구로부터도, 전통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으로부터도 영원한 ‘배교자-이방인’들이다. 서구는 이들이 외부로부터 와서 서구의 이념인 인권과 보편을 위협한다고 이들을 배교자 취급을 하며, 이슬람은 이들이 이슬람의 순수한 신앙을 위협한다고 하여 배교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행위자로서는 배교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이처럼 양쪽 모두에서 위협적이며 불온한 존재이다. 아무 쪽에도 소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위협적인 존재를 가장 불온하지 않게 해방시켜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우리는 한 학생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학생은 이 논쟁을 보며 꿈꾸었다고 한다. “차도르도 하나의 좋은 패션 아이템이 된 미래의 아침, 오늘은 무슨 차도르를 쓰고 나갈지 곰곰이 고민하는” 자신을. 여성은 히잡이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문화적 소비의 대상이 될 때 비로소 해방될 것이다. 서구와 이슬람, 모두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이들 모두를 만족시키며 이런 논쟁 자체를 우스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임을 이 학생은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참고로 입생로랑이나 기타 프랑스의 유명 속옷 브랜드가 가장 날개 돋친 듯이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중동이다. 이 학생의 불온한 상상은 이미 미래가 아니라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와 함께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속옷에서 타협을 본 서구의 인권과 이슬람 남성의 성욕은 곧 여성이 아닌 차도르를 해방하리라. 자본주의 만세!

작성일 : 2009. 4. 21

작성자 : 엄기호

 

데카르트로부터 탈출하기: 흔적으로서의 나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묵시록이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녀도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는 근미래"에 인간의 뇌는 전자화되고 몸은 기계화된다. 전자화된 인간의 뇌는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기억은 네트워크에 의해 스캔하여 보관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 탐색되고 지우거나 조작 가능한 것이 된다. 반대로 인간의 몸은 언제나 대치가능한 것이 된다. 성인의 몸을 가질 수도 있고 아이의 몸을 가질 수도 있으며 반대로 몸을 가지지 않고 네트워크상에 ‘자료’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1995년에 만들어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매트릭스’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처럼 이 영화는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기억이 몸을 완전히 떠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조작가능하다면 ‘나라고 하는 것-자아’의 고유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더구나 그 기억이 네트워크에 존재함으로써 언제든 누구라도 자아의 영역을 침범하여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더 이상 개별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개별성을 상실한 인간도 인간일 수 있는가?

 

데카르트라는 진리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고유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한 페이지 정도의 글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이 질문 자체는 사실 대단히 진부하다. 하지만 언제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는가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학생들은 곧 자신의 과거에 대한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어렸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며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져서 얼굴을 만져 보는 짓을 누구나 한번쯤은 하게 된다. 한 학생은 ‘현재까지 이어 온 나의 기억의 끈은 7살의 어느 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지?”라고 물은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며 ‘그 후로 어린 나는 ‘나’의 존재와 ‘우주’ 등에 대해 생각하며 왠지 모를 공허함에 혼자 울곤 했다’고 회상한다.

아무리 철학적으로 중요한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질문일 경우에는 따분하고 귀찮기만 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내가 이미 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분과 토론의 분위기는 상승할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즐거워하게 된다. 이미 내가 한번 던져본 적이 있는 짊문은 나와 무관한 질문이 아니게 된다.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겉도는 질문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이미 그 질문을 살면서 던져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던졌을 때의 분위기와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학생들의 대답은 대충 비슷하다. 몇몇 학생들은 영화가 기억이 조작가능하고 침범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하였지만 역시 나라고 하는 것은 ‘기억’과 그 기억의 총합으로서의 ‘추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억과 추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나의 기억은 사회적인 관계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처럼 다수의 학생들은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보다 ‘기억’과 ‘사회적 관계’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좀 더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을 펼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들은 인간의 기억은 영화에서처럼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유성이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토대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 그 기억이 조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인식하는 한’ 그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생들은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계속 의심하며 자신에 대한 탐구를 벌이는 것은 인간’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관계는 나의 기억이 축적되는 것이 된다. 사람은 인식하는 힘을 가지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게 된다. 이처럼 ‘서로를 의식하게 되면서 인간 사이에 상호 교류’가 일어난다. 이것이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다. 인간의 의식은 나에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축적되는 것이고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가지게’ 된다. 자신을 규정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물리적인 ‘나 자신’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나의 의식은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자아의 토대를 ‘의식’에서 찾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가르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근대교육 자체가 이 토대위에서 구성되어 있다. 고등학교까지의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적 과정은 근대적인 이성적 주체를 키우는 과정이다. 학생들이 당연히 ‘데카르트의 후손’으로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수의 학생들이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지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공식교육과정에서 습득하게 되는 언어와 담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아이들의 삶에서 겉돈다고 생각한다. 현상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배운 언어와 지식이 자신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절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 ‘의미 없다고 하는 고등학교 교육’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아이들은 공교육에서 배운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진리’라고 믿는다. 수업시간에 졸았거나 땡땡이를 쳤거나와 상관없이 공식과정에서 가르쳐진 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진리’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정말로 아이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믿지는 않고 그것이 살아가는데 중요하지도 않지만 그 ‘진리’ 말고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자와 같은 진리에 대한 내용적 승인이건 후자와 같이 진리의 형식에 대한 승인이건 이 진리가 가진 강력한 힘이다.

‘진리’가 가진 힘은 강력하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하거나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인간의 사유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이 ‘진리’가 세상만사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공식적’ 언어가 된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정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아이들의 삶과 겉돈다. 그러나 그 겉도는 지식이 가르쳐지는 순간에 선포되는 ‘진리’는 아이들의 세계관을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교가 이처럼 강력한 ‘진리의 공간’이라는 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간과하게 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학교는 여전히 ‘심각하게’ 중요하다.

 

진리에 맞서는 사유

데카르트가 맞는지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면서 학생들의 사유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유는 진리에 맞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리를 상대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것이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거 시장잡배들도 하는 거잖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게 정말 진짜 맞는 말이야?’라고 물을 수 있는 껄렁껄렁함에서부터 진리의 권위는 무너진다.

이번 토론에서는 다행스럽게도 한 학생이 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일단 이 학생은 영화가 재밌는 것은 사실이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하던 고민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고 한다. 이 영화에 대해 ‘하품하며 비평할 생각’은 없지만 더한 허망함에 ‘생각할 기회를 빼앗은 것 같은 불쾌함’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학생은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적 진리를 무의식중에 ‘해체’하였다.

자신이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 때 벌어진 일이다. 작업을 나갔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자신이 탄창을 잡고 선임병이 해머로 그 탄창을 부수는 작업을 하던 중에 선임이 그만 해머로 자신의 손을 내려쳤다. 손가락이 완전히 으깨져서 뼈가 훤히 다 드러나는 중대한 사고였다. 놀란 선임이 ‘괜찮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괜찮습니다’하면서 다음 탄창을 집어 들었다고 한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아픔은 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나서야 아픔을 느끼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는 딱 그 반대의 경험을 했다. 마취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아프더란다. 그때는 그 아픔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제대를 하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도 가물가물하다고 한다. 대신 그에게 확실히 남은 것은 손에 남은 상처이다. 그 상처를 보며 이 학생은 나라는 고유함은 아픔에 대해 자신도 헷갈려하는 의식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흐리멍덩해지는 그 기억도 아니고 몸에 남은 이 상처, 그 ‘몸뚱아리’ 자체라고 결론지었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던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제공해주는 아주 좋은 사례이다. 무엇보다 이 사례를 가지고 학생들과 ‘누가 몸을 가지지 않고서도 사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것을 위해 누가 자신의 몸을 떠나서는 사유를 할 수 없는 존재들인지, 늘 몸을 의식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 존재들인지를 질문해보았다. 학생들과 나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흑인,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들은 ‘사유’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몸에 대한 규정이 곧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다.

대표적인 흑인의 예를 학생들과 토론하였다. 왜 운동선수들 중에 흑인들의 비율이 월등하게 많은가? 한편에서는 흑인들이 운동능력이 다른 인종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 말고는 달리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흑인이 등장하는 광고는 대부분 그들의 색깔과 몸을 강조한다. 한국의 지하철역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캘빈클라인 속옷의 모델도 흑인이다. 흑백 필름에 그는 자신의 까만 몸색깔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하얀 속옷을 입고 그 위로 두드러져 보이는 거대한 성기와 미끈한 근육으로 재현된다. 이 모델은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색깔과 근육, 그리고 거대한 성기라는 몸으로만 존재한다. 여성도, 성소수자도,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토론을 통해 우리가 놀랄 정도로 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 나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흔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사유는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몸 없는 사유의 주체’가 되어 온 우주를 떠돌아다니며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유는 우리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흔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몸과 몸에 남은 상처가 학교에서 절대화된 데카르트적인 진리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이다.

이 토론의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일단 ‘인간은 몸뚱아리다’라고 말을 했던 학생은 자신의 이야기가 그렇게 심오한 이야기로 풀어지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자신의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으며 인문학의 언어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이 힘에 한 번 압도되고 나면 수업과 공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다른 학생들과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에 대한 질문에서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하늘에서 붕붕 뜨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한 학생에 따르면 자신들이 그렇게 배운게 별로 없다고 폄하하고 한편으로 치워놓은 학교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탄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내가 던지는 질문의 방식 자체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질문 방식 자체가 학생들의 사유를 ‘학교의 진리’에 의존하여 증명하는 방식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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