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63 호  [기사입력] 2009년 07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중학교 시절 국사 시간이었다. 교과서에서 기아, 민란, 삼정문란 등의 얘기가 계속 나왔다. 당시 국사 선생님은 그런 문제가 왜 계속되었는지 이유를 아냐고 질문하셨다. 부정부패, 신분제도, 불평등 같은 대답에 대해서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셨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 내놓은 답은 “가난은 나라님도 못 고치는 거야”였다. 난 가난한 사춘기 소녀였고 내 친구들도 대부분 가난했다. 선생님의 그런 설명은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난은 나라님도 못 고친다”의 다양한 표현을 접하게 됐다. 자원부족, 시기상조, 가치 있는 빈민과 인간 말종의 구분, 복지병 환자, 자유가 주어 졌는데도 지가 못나서 못사는 걸 어떻게 하라구 등등.

1993년 비엔나에서 ‘세계인권대회’라는 게 열렸다. 유엔 차원에서 인권을 화두로 연 대규모 국제행사였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준비하면서 ‘인권 보장’을 중심으로 한 세계를 꿈꾸자는 대회였다. 인권을 주제로 성찬이 차려졌다. 한국의 인권운동도 그 세례를 듬뿍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야 한다는 귀동냥,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핵심적인 국제인권기준과의 대면, 불처벌과 과거청산 운동․성소수자 운동 등과의 만남 등 한국 사회가 알지 못했던 인권의 의제가 봇물처럼 밀려든 기회였다.

특히 오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소위 정치범, ‘양심수’가 없는 나라를 인권보장 국가로 알고 꿈꾸었던 우리에게 큰 충격은 ‘인간답게 먹고 살 권리’가 ‘인권’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라 부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이었나 보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는 시민․정치적 권리만을 인권인양 떠받들고 수많은 사람을 비인간적인 삶으로 몰아넣는 경제사회적 침해에 대해 인권침해로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비판하고 인권의 불가분성과 총체적 접근에 대한 외침이 있었다.

그중 잘 알려진 것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대표적 연구자인 필립 알스턴(Philip Alston, 현재 비사법적 처형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교수의 연설이었다.

“사회권의 침해에 대한 우리의 관용 수준은 너무 높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권의 침해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거나 유감의 표현으로 침묵했다. … 사회권의 침해가 일정 정도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는 듯 사회권의 대규모적 침해를 다루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세계인권대회에 내놓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성명도 마찬가지 내용이다. 이 성명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회권의 침해에 대한 대응은 소위 자유권의 침해에 대한 대응과는 대조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았다면 자연스럽게 인권침해라 하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도시빈민이나 농촌 주민이 살던 곳에서 내쫓기거나 노동자가 무턱대고 해고되는 일 등을 대할 때는 ‘경제’위기나 ‘개발’의 불가피성 또는 ‘가난’의 불가피성을 탓한다. 더 나쁜 경우는 책임자들이 아니라 피해자들을 탓한다. 오죽 못났으면, 보상 받았으면서 더 받으려고 딴소리라는 둥.

먹을 것이 없고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고 일할 직장이 없고 살던 곳과 장사하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기는 것이 인권침해가 아니라면 무엇이 인권침해이고, 경쟁에서 뒤처진 못난이들이 아니라 명백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무엇을 증명해야 할까?

유엔의 용어에서 ‘인권피해자’란 용어의 의미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 정서적 고통, 경제적 상실 또는 기본적 권리의 상당한 손상을 포함하는 위해로 고통받아온 사람들”로서 여기에는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자의 가까운 가족이나 부양가족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를 지원하거나 피해자가 되는 걸 방지할 목적의 개입에서 위해를 겪은 사람들이 포함된다.”(UN.Doc.A/Res/40/34/Annex 1985)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사회권 침해에 대해 ‘인권침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주저하거나 반대한다. 이에 대해 국제인권사회는 사회권 침해의 성격과 의미를 다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중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고의적으로 역행하는 조치는 안 된다. 가령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위원회는 “국가의 정책 및 입법적 결정에 의해 직접적으로 기인하며, 그에 동반되는 보상조치가 없는 가운데 생활 및 주거 조건의 일반적인 후퇴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의 의무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최소한의 핵심 의무’라는 게 있다. ‘인간 존엄성의 문턱’을 지키는 절대적인 최소한의 권리보장이 없다는 것은 국가의 의무위반이라 한다. 이 최소한의 권리보장에 대해서는 자원의 부족 따위는 전혀 변명거리가 못된다. 이에 대해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위원회는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려는 모든 노력을 강구했는지를 먼저 국가가 증명해야 한다”고 했고 “구조조정이나 경제후퇴의 과정에 의해서건 다른 어떤 이유에서건 심각하게 자원이 제약된 시기에도 목적이 분명하며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계획을 채택함으로써 사회의 취약한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고 사실 보호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2009년 한국 사회에 몰아닥친 태풍은 인권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와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을 불순세력척결로 닦달하고, 인간의 기본적 생존의 요구에 코웃음치고 있다. 피해자들의 고통에는 매정하면서 가해자들의 책임에는 관용이 넘치고 있다. 인권침해를 침해라 부르고, 인권피해자가 마땅한 구제조치를 찾고,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일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기 까지는 우리는 영원히 2009년에 살게 될 것이다.

세계인권대회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위원회 성명(UN Doc.E/1993/22, Annex III.)

2.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이 두 범주의 권리가 평등하다는 원칙은] 지켜지기 보다는 위반하는 쪽으로 훨씬 더 존중되어왔다. …

5. 놀라운 현실은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전체적으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침해를 아주 흔히 계속해서 관용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침해가 시민․정치적 권리와 관련해 발생했다면 공포와 격분의 표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즉각적으로 구제 조치를 취하라는 한 목소리의 요구를 낳았을 것이다. 요컨대, 듣기 좋은 수식에도 불구하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대규모의 직접적 침해보다는 시민․정치적 권리 침해가 훨씬 더 중대하고 훨씬 더 확실하게 참을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취급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7.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박탈 또는 위반의 정도를 보여주는 통계적 지표들은 아주 흔히 인용되어서 그 충격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박탈의 규모, 심각성, 불변성은 체념하는 태도, 무력감, 연민의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입 다문 반응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대규모 침해로서 존재하는 문제들을 보지 않으려 주저하는 것으로 더 심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그 상황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8. 세계 인구의 1/5이 빈곤, 굶주림, 질병, 문맹, 불안으로 고통 받는다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대규모로 부인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자신들의 관심사에서 완벽히 배제하는 것이 인권 옹호자들(개인, 집단, 정부들)에게 견고한 태도인 것은 계속된다. 인권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은 비인간적이며 국제인권기준을 왜곡하고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자멸적인 것이다.

9. 민주주의와 안정과 평화는 만성적인 빈곤, 강탈, 방임의 조건에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최근 수년간 계속 늘어나는 숫자의 민족들이 정치적 자유, 자유 시장, 다원주의를 열성적으로 받아 들여왔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이것들을 기본적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성취하기 위한 최상의 전망으로 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탐색이 효과 없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많은 사회에서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회귀하라는 압력이 엄청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실패는 새로운 대규모의 민족들의 이동을 양산할 것이다. 즉 난민, 이주자, 소위 ‘경제적 난민’이 그에 동반된 비극과 문제들을 안고 범람할 것이다. …

인권오름 제 163 호  [기사입력] 2009년 07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간답게 살 권리라 하는 ‘사회권’은 흔히들 정의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기도 어렵고 권리로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은 사회권을 쉼 없이 괴롭히고 조롱한다. 이에 맞서는 주장들은 국내법의 근거를 들기보다는 국제인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권리라는 것을 먼저 내세운다. 자유권과 비교할 때 사회권은 국제인권에서 먼저 확립되어 국내적 실천을 도모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기본으로 다루는 문서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사회권규약)’이다. 전반적인 생활의 위기 속에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하나씩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먼저 사회권규약 11조에 규정된 식량권의 의미를 살펴본다.

식량권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농촌활동이란 것이 매년 있던 시절, 밥을 먹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었다. 숟가락,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라 노래한 후에 농민께 감사한다는 복창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과연 밥은 ‘나누어 먹는 것’일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먹을 것을 돈 주고 산다. 가게와 시장에 진열된 상품인 ‘먹을 것’은 가격이 오르고 내릴 뿐 항상 넘쳐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들 대부분이 과연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인지 여기서는 알기 어렵다. “배가 부르면 우린 소화불량이 두렵다. 배가 텅 비면 우린 두렵다. 다시는 먹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듯이 극단적 다이어트와 굶주림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아우르는 식량권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양으로나 질로나 적절하고 충분한 식량, 식량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문화 전통에 부응하는 방식의 식량, 신체적·정신적으로나 개인적·집단적으로나 존엄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식량, 지금까지 말한 의미의 식량에 대해 정기적이고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를 말한다.

이들 요소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가 내놓은 일반논평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이다. 이 논평에는 식량의 ‘적절성’과 ‘지속가능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간단히 말해 식량의 ‘적절성’은 “개인의 먹을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이다.

‘지속가능성’은 식량이 현재 및 미래 세대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 다른 기본적 필수품을 줄이거나 얻을 수 없다면 경제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고, 자연재해나 무력 분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장애인, 노인, 유아 등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식량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지속가능성’에서 세계의 농민과 민간단체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의 개념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데 식량주권 개념의 문제의식이 있다.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

사회권 규약에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라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은 양대 국제규약에서 “기본적인(fundamental)”이란 수식이 붙은 유일한 권리이다. 식량권을 기초하던 토론이 진행되던 1963년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 센(Sen)은 세계기아문제의 엄청난 규모와 그것이 어떤 구체적 조치들로 인해 줄어들 수 있느냐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5억의 인구가 기아상태이며 10억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20세기 말까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30억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식량권을 미적지근하게 다뤄서는 안되며 긴급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에 식량권의 긴급성을 강조하여 식량권에 대해서는 ‘점진적 조치’라는 표현이 빠지게 됐다.
하지만 20세기 말인 1999년에 채택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에서의 상황 제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8억 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 상태이며, 자연재해,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수백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식량권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적절성’의 양적인 의미의 개념은 기아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최소한의 칼로리가 아니라 정상적이고 능동적인 생존을 촉진하기에 충분한 식량이다. 나아가 질적인 의미에서의 ‘적절성’은 하위규범인 기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것으로 식량의 문화적 적절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식량권은 인권이 아니다?

일부 경제 선진국에서도 목격되는 영양실조 문제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 아니라 빈곤으로 인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 결여라는 지적 앞에서도 식량권을 인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여전하다. 이런 견해에서는 도덕적 또는 인도주의적 고려만으로는 정부들이나 기타 관련된 행위자들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식량권의 주장이 시간 낭비라고 한다. 식량이란 연간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상품이며 따라서 식량이 인권으로서 갖는 지위는 부차적일 뿐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도덕적 고려가 정책 결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식량권이 이행되지 못하는 원인이나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식량권 이행을 위한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식량권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행가능하지 않고 개별국가 차원에서 매우 제한적인 계약의 한계 내에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셋째로 사회권 일반에 대한 반대의견이다. 시민·정치적 권리가 우선적이며 일단 세계 민족들에게 자유가 확보된 이후에야 식량권 같은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현 인권이사회)에서는 이런 발언이 있었다. “세계의 상당수는 정말로 굶주리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는 문제가 있다. 세계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거의 1/3만이 자유롭다. 그 나머지 2/3 이상이 노예이다.…기아 또는 빈곤이란 인류에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빈곤은 현세대나 현재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니다. 기아와 빈곤을 종식시키고 싶다면 먼저 부자유한 국가들의 속박을 깨뜨려야 한다.”

과연 그럴까? 유엔인권위원회 같은 데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편히 쉴 수 없게 만든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나이지리아에서 구전되는 말) [류은숙] <2007년 01월 31일 인권오름 제39호>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12: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

…국제사회가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완전한 존중의 중요성을 수차례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약 11조에 제시된 기준과 세계 여러 지역의 실제상황 간에는 여전히 심각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국민인 전 세계 8억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를 겪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재해, 일부 지역에서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의 발생, 그리고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본 위원회는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가 대개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심각하지만, 영양실조, 영양결핍 및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 관련된 기타 문제가 일부 경제선진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의 근원은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특히 빈곤으로 인하여 잉여가능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위원회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핵심 내용이 다음을 내포한다고 간주한다.

개인의 식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

이러한 식량이 지속가능하고 기타 인권이 향유를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

식이적 필요란 식사가 전체적으로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발전 및 유지, 그리고 생애 전 단계에서 성별과 직업에 따른 생리적 필요를 포함하여 신체적 활동을 위한 영양분의 혼합을 포함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이적 다양성, 그리고 모유 수유 등 적절한 섭식 및 급식 방식을 유지, 적응 또는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이때 가해지는 식량가용성 및 접근성에 대한 최소한의 변화가 식이적 구성 및 섭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장한다.

해로운 물질이 없을 것은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 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 안보 및 공적‧사적 수단을 통한 일련의 보호조치에 대한 요건을 정한다. 또한 자연발생적 독소를 검출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박멸하기 위한 주의도 기울여야 한다.

문화적 수용성 또는 소비자 수용성은 음식 및 음식 소비에 부여되는 인지된 비영양적 가치, 그리고 접근가능한 식량의 성질에 대한 정보력 있는 소비자의 우려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고려하여야 할 필요를 내포한다.

가용성은 생산지나 기타 자연자원으로부터 직접 먹을 것을 구할 가능성 또는 수요에 따라 식량을 생산지로부터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운반할 수 있는 원활한 유통, 가공 및 시장 시스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접근성은 경제적 접근성과 물리적 접근성을 모두 포함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사를 위한 음식물의 획득과 관련된 개인 또는 가정의 재정적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사람들이 음식을 조달하는 획득 유형이나 조달할 자격에 적용되며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위해 충분한가에 대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 및 기타, 특히 빈곤한 계층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은 특수 프로그램을 통한 관심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물리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량이 유아, 아동 등 신체적으로 취약한 사람, 노인, 신체장애인, 불치병 환자 및 정신질환자 등 지속적인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재해 피해자, 재해 빈발지역 거주자 및 기타 특히 혜택받지 못한 집단들은 식량 접근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 그리고 때로는 우선적 고려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조상 전래의 땅에 대한 접근권이 위협받고 있는 많은 선주민 집단도 특별히 취약한 경우에 해당한다.

각국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 관할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양이 충분하고, 영양이 알맞으며 안전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식량에 대한 접근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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