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싶다. 음악애호가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외한이다.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손길 같은 그의 연주에서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앉은키가 첼로 크기와 같은 작달막한 그 연주가의 말을 새삼 크게 떠올리고 싶어서이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훌륭한 예술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류의 양심의 문제”라는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자기 조국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저항의 표시로 10년간이나 연주를 하지 않았다. 또 독재정권을 돕는 어떤 나라에서도 연주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후 무대에 올리기까지 12년간을 매일 밤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가 그런 각고의 인내와 노력에서 나왔듯 인간 존엄성에 대한 헌신도 말이 아닌 삶으로 표현됐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주의 새롭고 진귀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은 전에도 없었고 다시 오지도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나? 2+2는 4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라고 가르친다. 우린 언제야 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 한 명 한명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의 존재가 무엇인 줄 아니? 너의 존재는 놀라운 거야. 너는 유일한 존재야.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너와 똑같은 아이는 없었단다. 그렇다. 너는 경이로움이다. 그러니 네가 자라서 다른 사람, 너처럼 경이로움인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겠니? 너도,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값진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한다.”
요즘 감정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우울, 슬픔, 분노, 무력감, 공포 등이 범벅이 돼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는 상태인 것 같다. 거리에서 굶을 뿐 아니라 모욕당하는 사람들, 그 고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눈시울을 자극한다. 그 고행을 모욕하고 해꼬지하려 달겨드는 사람들이 피를 거꾸로 돌게 한다. 군대에서 기업에서 학교에서 국경 너머에서 꼬리를 무는 인권침해의 사건들이 마냥 손을 비비게만 한다. 대통령부터 일선 경찰까지 무시와 통제에는 일사분란한데 거기에는 따져볼만한 목적도 가치도 없다. 그들의 영혼 없는 말과 표정에 지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괴물’로 지목하고 한껏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으론 헛헛할 뿐이다. 이 비극을 이용해 선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평가와 선동가엔 물린지 오래고 우리에겐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가라’가 가장 무지막지한 선동이 아닌가 싶다. 우린 사람이고 싶다.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삶의 근본을 확인하고 싶다. 막말과 괴물이 넘치는 혼돈 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이다.
지금 ‘아무개들’이 우리에게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나눠야 할 말과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다. 거리에 나와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말도 듣지 않고 문서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 하고 있다. ‘존엄성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련다. 차별하고 싶다. 고문하고 싶다. 배척하고 싶다. 정치가 아니라 폭압을 하고 싶다.’ 이제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에 맞서 아무개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무개들 앞에서 누구의 말마따나 “초조해하는 것은 죄”이다.
“(씨랜드 사건)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대형 참사 가운데 재발가능성이 가장 높은 참사 유형으로 ‘씨랜드 화재’를 꼽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가를 참담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99년 씨랜드 참사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온 10여 년 전 인권단체의 논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러한 참사로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세월호 유족 대책위 대변인의 말이다. ‘예언’을 바꾸자고 희생자들이 이렇게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외면한다면, 예언을 실현하려는 고사 지내기가 될 것이다.
‘국가개조’니 ‘이순신이 되라’는 식의 주문 말고 구체적인 이들의 구체적인 호소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개들이 외치는 호소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원칙의 틀을 보여주는 기준이 있다. 인권에서의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역사와 같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군대가 연륜이 같은 세계인권선언과 발맞춰 가고 있느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6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세계의 인권전문가들이 위촉받아 <존엄성 지키기: 인권을 위한 의제>를 만들었다. 의장은 제1대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들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라 알려지게 됐다. 이 존엄성 지키기 의제 만들기는 스위스 정부가 발의하고 노르웨이, 브라질, 카타르 등 여러 나라가 후원했다. 위원단이 만든 ‘인권 지키기 의제’에 기초하여 8개의 핵심 연구 프로젝트가 착수됐고 각 주제마다 두툼한 연구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구였다(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다른 기회에 소개할 계획이다).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 시대 인권 과제에 대한 큰 줄기를 담은 것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란 지적에서 한국 사회가 지금 겪는 고통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핵심문제”라는 진단은 우리가 일찌감치 내린 진단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대신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라며 “조기 행동 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견실한 진단과 대책이 늘 선동과 모략보다 외면 받는 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은 지금 우리 눈앞에 아무개들로 꾸려져 있다.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을 나누는 속에서 우린 공동의 책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의 보고서(Report of the Panel on Human Dignity, 2008) 1. 위기의 인권 |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문헌읽기 96]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 -유엔인권최고대표실, 2006 (0) | 2019.06.03 |
---|---|
[인권문헌읽기 95] ‘빈민의 운동’의 ‘빈민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for the Poor, Poor People's Campaign (0) | 2019.06.03 |
[인권문헌읽기 93] 노동의 조직(루이 블랑, 1840) (0) | 2019.06.03 |
[인권문헌읽기 92] "이곳에 저항할 다른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저항할 겁니다." - 마더 존스(Mother Jones)의 연설(1912) (0) | 2019.05.31 |
[인권문헌읽기 91] 밀양을 살다 -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2014년 4월) (0) | 2019.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