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75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요즘 뉴스를 접하다보면 한국에 9.11이 터졌나 하는 착각이 든다. 미국의 역사에서 이전 시대에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음모적 탄압의 사례가 많지만 9.11이후 그것은 정말 노골적이라 국제인권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9.11 이후 미국사회에서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하에 전통적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의 핵심이 도전받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반대자들을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결사에 대한 죄를 부과함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무력화시킨다. 정부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비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언론과 대중, 심지어 의회조차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걸 방해받는다. 단지 불순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비밀 정보만을 이유로 시민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된다. 비밀사찰, 이메일 등에 대한 도감청, 연설 방해, 집회방해, 시민단체의 후원자 캐기, 비시민권자(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단속과 구금․추방을 강화하기, 시민불복종 행동에 국내 테러라는 딱지 붙여 처벌하기, 인터넷 시대 정치 활동가들에 대한 전자 개인 기록 구축하기, 노벨평화상 수상경력까지 있는 시민단체에까지 “범죄를 일삼는 극단주의자”라는 딱지 붙이기, 툭하면 언론보도를 제한해 달라고 요구하며 언론 길들이기, 이에 굴하지 않는 비판적 언론인들의 밥줄 자르기, 정부가 허위정보 발표를 남발하고 의회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 등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낸시 챙 지음, 유강은 옮김, 『정치적 반대세력을 침묵시키기』, 도서출판 모색, 2006 참조)
들여다볼수록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최근 소위 ‘밥줄공안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뭔가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 권력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교단에서 쫓겨나고 마이크를 뺏기고 무식하거나 극단론자라는 식의 인물평에 오르고 검찰과 경찰의 수첩에 오르게 된다고들 느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이런 일들이 목표하는 바는 소위 ‘알아서 기게 만들기’라고. ‘알아서 기기’를 좀 더 공식적인 언어로 하면 ‘자기 검열의 강화’이다. 평생을 검열과 씨름한 체코의 한 작가는 ‘자기 검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말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검열과의 싸움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말하면 절대로 출판도 공연도 가능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에 우회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다. 자기 사회에 대한 진짜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우화나 터무니없는 얘기나 환상 같은 얘기로 위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알아들으려 하는 사람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그리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검열과의 싸움에 장점이 하나 있다면 검열을 피할 수 있다는 것과 감춰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선상에서 요즘 한국의 네티즌들은 ‘반대한다’고 쓸 말을 ‘찬성한다’는 식으로 씀으로써 검열과 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생존 또는 출세를 위한 검열이다. 이것은 다소 복잡하고 슬픈 형태의 자기검열이다.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뭔가에 반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죽거나 감옥에 가라, 또는 너의 지위를 영원히 잃어라”라고 도대체 누가 타인에게 명백하게 말하겠는가? 명백한 금지는 없었지만 용기가 부족하거나 두렵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거나 단지 불편하게 느껴지기만 할지라도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자기검열의 대가로 살아남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결성을 잃게 된다. 이런 게 슬픈 종류의 자기 검열이다.
세 번째는 표현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단계의 자기 검열이다. 표현한 사람을 내치는 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검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금지하고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심오한 해방이 될 수 있다. 금지당하고 추방당함으로써 더 이상 자기 검열을 생존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데가 없는 바닥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바닥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지점이 해방감을 경험하게 되는 이상한 지점이다. 표현하길 원하는 모든 것, 진짜로 느끼는 모든 것을 갑자기 쓰기 시작한다. 돈을 못 받더라도 어떤 지위를 얻지 못해도 출판조차 하지 못할지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는 지금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을 겪고 있는 것일까? 입만 열면 ‘좌빨’이 되고 제거돼야할 ‘불순인물’ 또는 ‘불순세력’이 돼버리는 현실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위험한 것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 인간다운 생존을 추구할 노력을 억누르는데 있다. 올 초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때 철거민을 향해 ‘도심 테러리스트’ 운운했던 게 그 생생한 증거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진짜 위험원인이 뭐고,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고 ‘헛된’ 적을 지목해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그 희생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표면에선 몇 몇 지식인과 유명인들이 유탄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희생양은 사회경제적 소외에 대해 표현하고 고칠 길이 가로막힌 사람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의 글이다. 그녀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을 7년간 지냈는데,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집단학살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은 르완다와 소말리아를 방문한 인물이다. 9.11이후 그녀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인권을 후퇴시키는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강연과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는데 오늘 읽어볼 글은 그 중 하나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벌이고 있는 ‘인권과의 전쟁’ 상황에서 곱씹어봐야 할 지적이라 여겨진다.
인권, 인간 발전, 인간안보를 연결하기 …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재판장 아더 차스칼손이 표현한 대로 “우리는 맨 처음부터 파수꾼이 돼야만 한다. 첫 단계에서 용인한다면 다음에 올 모든 단계는 훨씬 더 법의 지배를 침식하고 인간 존엄성을 무시할 것이다.” |
인권오름 제 175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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