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11월 13일은 이 땅의 영원한 '노동자'가 태어난 날이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두 살의 젊은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 속에서 그의 몸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뤄졌다. 속칭 '빼빼로 데이'는 알아도 11월 13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우울함에 세 번째로 『전태일 평전』을 샀다. 우리 사회의 독보적인 인권 교과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손에 가졌을 때의 제목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런 우회적인 제목을 가졌고, 저자(고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책이었다. 나는 특정 종교재단에 속한 학교라는 이유로 강제 수강해야 했던 종교개론 시간에 맨 뒤에 앉아 시간을 때우려고 이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수업시간인지라 코와 입을 막고 울먹임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가졌을 때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책은 경찰의 압수수색에서 불온서적을 소지한 것으로 걸릴 것을 두려워한 친구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을 강제로 떠났다.

세 번째로 가지게 된 책의 표지는 깔끔하고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치 전태일이 고발했던 모든 것이 옛일인 듯 시치미 떼고 있는 사회의 뻔뻔함을 반영하듯이 말이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갖은 돈벌이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열여섯 살이 돼서야 야간학교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1년도 채 다닐 수 없었다. 윗글은 그가 짧은 학창시절에서 경험한 체육대회를 마치고 쓴 글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을 여기서 대면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엄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노예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인권의 교과서적인 선언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권 논의는 이런 선언문 아래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머물고 있다. 하지만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압제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대목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대등한 인간이다. '형식'으로는 대등한 인간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은 현실의 인간이 처한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 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권의 현실을 무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주인도 노동자도 자유롭고 평등한 대등한 시민일 뿐이다.

윗글은 전태일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처음으로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인권의 변화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변화는 인권주체의 구체화와 집단화로 나타났다. 구체적 인간은 누구인가. 자기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재단사인 노동자이고 시다인 노동자이다. 이들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들이 사회적 조건을 얘기하려면 이들의 존재를 통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구체적 인권이 '노동권'이다. 노동권의 등장으로 인해 전통적 인권이 옹호했던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깨졌다. 재산을 똑같은 재산으로 바라보지 않고 누가 어떤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보게 된 것이다. 자본가의 소유권은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소유권을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이 새로운 소유권은 '노동권'이라는 인권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자본가의 재산권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됐고,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제한 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휴일과 적절한 휴식 없이 일 시켜선 안되고, 공정한 임금을 주어야 하고, 노동자의 자기 보호를 위해 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하고 활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라는 인간집단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백 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 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빵과 자유'로 뭉쳐있지 않은 인권은 무용지물이다. 빵, 즉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인권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인권이 아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신체의 자유, 사상·언론의 자유같은 자유는 의미가 없다. 사실상 누릴 수 없는 권리를 사람들에게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식권을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이다. 한편 '빵'은 '자유'의 배척물이 아니라 자유를 기본 내용으로 한다. 전태일의 말대로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뭉칠 자유가 필요하고 뭉쳐서 행동할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빵은 자유 없이 실현불가능하다. 그래서 '빵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는 '사회권'이란 인권은 '자유'의 고양이지 자유의 무시가 결코 아니다. 대표적인 사회권인 노동의 자유가 결사의 자유, 단결의 자유, 단체행동의 자유를 외쳤고 많은 정부가 탄압하는데서 보여지듯 자유없이 사회권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권을 흔히 국가가 위로부터 베푸는 혜택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사회권은 노동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를 통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사회적 책임을 추구한 것이다. 사회권은 노동자를 비롯한 당사자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일차적으로 도모되는 것이고 국가의 역할은 그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에는 '노동자'라는 이름도 아까워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붙여서 노동자를 반토막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고 또 읽어야 되는 이유이다.

[인용글의 출처] 전태일 평전, 도서출판 돌베개, 조영래 지음

 

 

[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인권오름 제 351 호  [기사입력] 2013년 06월 2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국정원의 선거 유린과 국정조사, NLL(북방한계선) 논란이 얽히고설켜 돌아가고 있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직원들에게 아이디를 돌려가며 댓글을 달게 했단 것도 놀라운데 제 기관의 명예를 위한답시고 할 말, 안할 말 죄다 뱉어내고 있으니 민주 국가의 기본에 분탕질이 아닐 수 없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쇼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국정조사 해야 하는 것 당연하다. 그런데 그보다 오래됐고 절박성에 모자람 없는 쌍용차 국정조사와 24시간 인권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고 있는 대한문의 상황은 어찌하겠단 말이 없다.

‘노동자’란 단어조차 껄끄럽게 여겨지는 까칠한 사회라서, 노동자의 요구는 ‘투박’하고 ‘과격’한 것으로 외면된다. 그런데 ‘세련’되고 ‘온건’한 것들이 지배적인데 왜 그 속엔 곪디 곪은 문제들의 처방전이 들어있지 않은 것일까? 부당하고 조작가능성이 짙은 ‘정리해고’에 ‘노동유연화’니 ‘구조조정’이니 ‘경영효율성’같은 말을 쓰면 ‘해고는 살인’이란 고통이 완화되는가? 자본가와 노동자란 관계는 껄끄럽지만 이 사회에서 대부분이 맺어야 하는 기본관계다. 이 관계조차 인정하길 거부하면서 ‘너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다’, ‘내가 널 고용한 게 아니고 단순 사용자일 뿐’이라 손사래 치는 댁들을 그럼 ‘가짜 자본가’라고 불러야 할까?

민주주의는 평등한 관계의 시민을 전제로 하고, 그 시민들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먹고사는 노동자이다. 이들 노동자가 시민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건 시민의 평등성에 대단한 문제가 생겼다는 적신호이고, 노동자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노동자란 천대받는 신분의 따로 존재를 용인한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를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 지붕만 바라보는 곳에 놓고 관망하며 내가 일하며 사람과 직접 부딪치는 삶의 무대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가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설 수도 있겠지만 광장을 벗어나는 순간 삶의 무대엔 불빛이 없고 캄캄하다.

그 어둠 속에서 최근 서울구치소 수인번호 111번으로 불리게 된 노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정우, 쌍용자동차 노조의 지부장이다.

구속 전 마지막으로 본 그의 표정은 소풍 나온 아이 같았다. 시청광장에서 쌍용차 해고자들이 만든 자동차를 선보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하이파이브를 청해왔고 나도 말없이 힘껏 손바닥을 마주쳐주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차를 배경으로 무릎을 꼬고 머리를 돌려 젖히는 등 노동자들이 한껏 자세를 취했다. ‘우와! 정말 자동차 모델 같다. 광고 많이 봤나봐?’ 터지는 웃음 속에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가 노래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

그와 동료들이 모처럼 웃어본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노동자 잡으려고 부러 날 잡았는지, 6.10민주항쟁 26주년을 맞는 날 아침이었다.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도 그 건너편 재능 농성장도 박살이 났다. 이미 여러 차례 철거를 겪어 천막도 없고 길바닥에 몸뚱어리로 버티고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밀어버렸다. “쓰레기 치우라”는 폭언과 함께 사람의 몸으로 만든 분향소가 짓이겨졌고 저항하는 이들은 사지 들려 끌려갔다.

숱한 탄원과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김정우에게는 덜컥 구속영장이, 원세훈에게는 딸랑 불구속이 떨어졌다. 김정우는 부당한 정리해고의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비명에 간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는 노동자이고, 원세훈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해괴한 일들을 벌인 전직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이다. 이 사건이나 그 책임자는 안개에 싸인 국정조사 전망 속에서 ‘아직까지는’ 무사 항해 중이고, 배에 구멍 났다 소리치며 제 몸으로 물 퍼내던 이들은 패대기쳐졌다.

김정우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졌다는 그 밤은 참 무더웠다. 겉은 끈적거리고 속도 답답하여 창문을 열고 자리라 맘먹었다. 그런데 웬걸, 발자국 소리·말다툼 소리·경적 소리…. 새벽이 되도록 도시의 소음은 잠들지 몰랐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걸어 잠그다 멈칫했다. “악취와 소음 속 비닐움막생활 참 처참하지. 그래도 포기 못해 우리가 이길 거니까”라던 김정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이기려고 하는 구호는 “함께 살자”이고 그것을 위해 그는 41일을 굶었고, 그의 동료들은 171일을 송전탑 위에서 보냈다. 쌍용차 해고자들뿐 아니라 재능, 현대차 비정규직 등 길바닥 잠을 자온 사람들이 숱하다. 지금도 경찰의 괴롭힘 속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거리에서 밤을 보낼 사람들, 도시의 소음과 경찰 폭력은 잠도 꿈도 앗아갔을 터, 낮에 본 그들의 퉁퉁 부은 얼굴이 떠올랐다. 신이 될 수 있다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과 잠의 신을 꿈꿀 것이다. 잠까지 빼앗는 지금의 정치는 참 무능하고 썩었다.

그렇게 한밤중에 서성이는 데 한 글귀가 눈에 꽂혔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인권변호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영래 변호사의 유고집 제목이었다. 그가 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아주 나중에야 『전태일 평전』으로 알려진)이 워낙 강렬한 것이어서, 다른 글을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박해를 각오하고 발언할 수 있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하기에 필요·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며 “요사이 얼마 동안의 우울한 일들에만 사로잡혀 지나치게 낙담할 것은 없다. 원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 아닌가.”라고 토닥여준다. 하나 같이 요즘 우리 심정을 정말 잘 알고 쓴 글 같았다. 뒤적이다 보니 변론문과 칼럼만 있는 게 아니라 시도 있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바로 이 시, “노동자의 불꽃”이다. ‘노동자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마저 잡혀가고, 노동자들의 처지가 몰릴 대로 몰린 지경에서 쓴 시라고 한다. 제목이나 문투나 오늘의 세련되고 온건한 기준으로 보면 참 투박하고 과격하다. 하지만 수 십 년의 시차가 난다는 게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 이 시의 구절마다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대입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청년들은 시급 5천원도 못 되는 시간제 일자리는 나쁜 일자리라 외치다 끌려가고, 소상인들은 포식의 끝을 모르는 재벌 때문에 골목귀퉁이에서 신음하고,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을 보도조차 안하는 언론에 맞서 쫓겨난 언론인들이 동분서주하고, 강정부터 밀양까지 소위 국책사업에 절규하는데, 4대강 사업이나 부정축재와 세금도피자들의 뒤치다꺼리까지 우리가 떠안아야 하고 책임져야 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침묵도 그렇거니와 불난집을 앞에 놓고 장판 밑에 숨겨놓은 제 돈 걱정만 하는듯한 야당의 태도 또한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시에서 느낀 현재성은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이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그 현실을 묵인하지도 침묵하지도 않고 계속 맞서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노동자의 ‘절망’이 아니라 노동자의 ‘불꽃’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도 실천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 식으로 노동자 전태일과 지식인 조영래의 구분 없이, 그리고 또 다른 구분을 앞세우지 않고도 “악에 대한 공통인식”으로 우린 만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투박한 구호가 불편하더라도 그들이 내미는 하이파이브에 손 마주쳐 줄 박수의 내용은 다양할 수 있다.

숱한 시민들의 후원 속에 쌍용차 해고자들이 차를 만든 과정을 돌이켜본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를 그 과정에 비춰 상상해본다. 우리는 그냥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료와 관계가 필요한 사람들이란 것, 삶의 무대에 불을 밝히기 위해 서로 대화해야하는 존재라는 것, 그런 관계에 대한 인정이 우리가 할 정치의 시작이란 걸 말이다. 일을 위해 가지런히 도구들을 정리해놓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작업을 했다. 그렇게 차를 만드는 과정처럼 지금 수많은 현장에서 곳곳의 거리에서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멈춘 시동을 걸려고 맨손으로 힘 모아 미는 사람들이 있다. 국회도 언론도 법원도 대통령도 다 뛰어나와 같이 밀던가, 아니면 열쇠를 내줘야 한다. 우리의 삶에 시동을 걸게.

그러니 국정원 국정조사에 합의한 여야 정치인들은 노동자 시민들의 질문의 범위를 왜곡․축소하거나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왜곡과 축소는 질문에 아니, 대답한 것보다 못하며 진실의 공개를 가로막는다는 것, 침묵은 문제해결의 의지가 없는 오만임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특히 오래전에 약속한 쌍용차 국정조사를 빼먹고 갈 생각 마시라.

이 시의 출처는 다음과 같고, 부분 발췌했다.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비평사, 1991, 286-301쪽

노동자의 불꽃노동자의 불꽃
- 아아, 전태일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설임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
하늘 땅 열리실 제 삼라만상 생겨나니
모든 생명 귀한 중에 사람이 으뜸이라
한덩어리 지구 위에 한핏줄 타고나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네
사람이 사람을 학대할 권리 없고
사람이 사람을 억누를 수 절대 없어
이를 두고 예로부터 자유‧평등 일컬었네
땀흘려 일하는 자 일한 몫을 거두고
뜻밖에 불행한 자 모두 도와 함께 사니
인류의 오랜 꿈인 정의‧사랑 참뜻일세

어둡다, 이 땅 위의 오늘 현실 바라보라
민주주의 파괴되니 약자 인권 짓밟히고
자유‧평등‧정의‧사랑 공염불로 타락하네
천하는 천하의 것 1인의 것 아니건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제멋대로 결정하니
법률도 제멋대로 재판도 제멋대로
언론자유 탄압하고 학원 교회 억누르며
약한 자를 대변하면 반공법에 묶어가고
강자 횡포 비판하면 긴급조치 묶어가니
진리는 철창 속에 거짓은 옥좌 위에
거짓이 진리보고 “뉘우치라” 조롱하고
총칼이 양심에게 침묵을 강요하니
온세상이 캄캄한 어둠 속에 휩싸이고
어용야당 어용노조 어용신문 어용방송
어용종교 어용예술 어용학자 어용교수
제세상 만난 듯이 온갖 잡귀 판을 치며
이 속에서 약육강식 온갖 비극 일어난다

권력은 돈을 낳고 돈은 다시 권력 낳아
힘센 자와 살찐 자가 부패 속에 총화단결
역대정권 경제정책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민대중 고혈 빠는 특권경제정책이라
……
특혜받는 대재벌들 반사회적 거동 보소
신문에 이름 내는 성금낼 땐 후하면서
노동자 임금에는 어찌 그리 박하던가
……
수단방법 안 가리고 부당폭리 추구하니
아이스크림 화장품에 호텔까지 손을 뻗쳐
중소기업 목조르고 자원낭비 조장하기
은행이란 은행돈은 모조리 제 차지라
싼 이자로 융자받아 비싼 이자 사채놀이
국내시장 독점하여 초과이윤 거저 먹기
중소기업 해외시장 덤핑으로 가로채기
부동산에 투자하여 집값 땅값 올려놓기
하청기업 농락하여 도산시켜 잡아먹기
수입하며 외화도피 수출하며 외화도피
밤낮으로 생각느니 탈세와 외화도피
……
형제자매 노동자여 억울하다 우리 실정
멸시와 핍박 아래 기계취급 당해가며
노예처럼 혹사받고 병들어가면서도
경제정책 모든 실패 우리에게만 전가되니
수출상품 경쟁력도 저임금 바탕 위에
물가인상 억제책도 저임금 바탕 위에
불경기 땐 대량해고 실업자 신세 되고
호경기 땐 철야작업 삭신이 병이 드네
……
민중의 몽둥이 경찰권력 거동 보소
노동자들 몇이 모여 수군수군했다 하면
사냥개 냄새맡듯 정보형사 떠다니고
임금인상 요구하며 농성 한번 했다 하면
개밥에 보리알 튀듯 기동경찰 끼여드네
어느샌가 나타나는 사복 입은 형사님네
밥 먹고 사람 패는 연습만 하였던지
유도 당수 태권도로 노동자를 후려치니
가뜩이나 중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
골수에 병이 들어 폐인이 되어가네
……
노동자를 위한 법률 그 얼마나 된다기에
그나마 단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자 잡는 법은 수도 없이 만들고서
꼬투리만 있다 하면 제까닥 묶어가니
이 나라의 법질서는 누굴 위해 있는 건가
돈 없고 배경 없는 우리네 노동자들
기업주 하나만도 상대하기 힘겨운데
국민의 혈세로 유지되는 국가권력
기업주들 편들어서 노동운동 억누르니
이 정권은 과연 누굴 위한 정권인가
……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기 마련이고
참새가 죽을 때도 짹소리는 하고 가니
하물며 만물영장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토록 짓밟히고 어찌 조용할까보냐
70년도 11월에 평화시장 앞길에서
노동자의 불꽃 하나 폭탄처럼 튀어나와
“노동자도 사람이다. 기계취급 하지 말라”
땅속에 울부짓는 전태일의 핏소리가
억눌린 억만 가슴 뒤흔들고 울려퍼져
노동자의 생존투쟁 곳곳에서 일어나니
이 위대한 역사흐름 그 무엇이 막을소냐
……
우리를 거부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자!
우리 생존 거부하는 저임금을 거부하자!
젊디젊은 우리 목숨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시간 중노동과 살인환경 거부하자!
가진 자의 오만과 횡포를 거부하고
노예사상 강요하는 저들 손길 뿌리치자!
노동자의 인간다운 존엄성을 파괴하는
욕설들과 폭행들과 인권유린 거부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업주횡포 경찰폭력
해고와 체포 앞에 굴복하길 거부하자!
노동자를 짓밟는 특권경제 거부하고
외국자본, 대재벌의 횡포를 거부하자!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법률 모든 조치
모든 거짓 모든 위선 모든 구호 모든 선전
그 앞에서 무릎꿇는 노예 되길 거부하자!
……

인권오름 제 351 호  [기사입력] 2013년 06월 2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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