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11 호 [기사입력] 2014년 10월 15일 21:26:2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옛 가요 중에 “알고 싶어요”가 있다. 사랑하는 이가 누굴 생각하고 무슨 꿈을 꾸고 뭘 하는지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란 가사였다. ‘평상시에도 그대 생각만으로 저런 애틋한 궁금함이 넘칠 수 있구나!’, 그 간절한 물음표에 가슴이 긁히던 노래였다. 요즘은 가요가 아닌 현실로 “알고 싶어요”를 하염없이 듣는다. ‘그대’가 납득 못할 불의한 일을 당했는데, 그에 대한 충분한 해명도 책임지는 모습도 없는데, 벌어진 일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 하지 말라니 그 애절한 물음표를 놓을 수가 없다. ‘그대’의 가까운 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삶터를 공유하는 전체 구성원은 물음표를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솔직히 다른 말이 별로 필요 없다. 심각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있을 때, 관련된 사람들이 벌어진 일에 대해 알고 싶은 건 당연하다. 국제인권에서는 그 당연함을 “진실에 대한 권리”로 표현했다. 이 권리에는 “양도불가능한”, “훼손이 불가능한” 권리라는 수식이 붙었다.
<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 이 연구 보고서는 유엔인권최고대표가 유엔인권위원회(현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전문가 토론을 거치고 여러 정부, 관련 국제기구, 민간단체의 견해를 종합했다. 이 보고서의 정의에 따르면, ‘진실에 대한 권리’는 피해자를 낳은 특정 사건에 관한 정보를 구할 권리를 포괄한다. 벌어진 사건, 인권 침해가 발생한 구체적 상황, 누가 그 사건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완전한 진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뿌리는 국제인도주의법이다. 교전 중인 적대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원칙이 있기에 분쟁 시에 적용되는 게 국제인도주의법이라면 평시에 적용되는 게 국제인권법이다. 비사법적 처형, 강제 실종 등 인도주의법에 대한 위반과 인권에 대한 극악한 침해와 관련해서 발동되는 것이 진실에 대한 권리이다. 아무리 적대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피해자의 운명에 대해 가족은 알 권리가 있다고 했다.
무력분쟁 상황에서도 ‘진실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는데, 하물며 평시에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일에 대해서, 법의 지배를 내건 민주사회의 정부가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당연하고 효과적인 조사를 수행할 국가의 의무와 짝을 이룬다. 진실 규명 없이 효과적인 구제를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인권 침해는 그 당연한 의무에 대한 부정으로 악화된다. ‘인권 침해’라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일’, ‘불가피한 일’로 치부되는 한, ‘알려고 들면 다쳐’라는 위협과 협박이 지배적인 한, 정치에 대한 신뢰나 같이 살아갈 사회에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없다. 그런 신뢰와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각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보이지 않는 비상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진실을 구하는 건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체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국제사회는 지적한다. 진실 규명은 ‘불처벌’(impunity)을 끝내기 위해 밟아야 할 필수 단계이다. ‘불처벌’이란 법률상 또는 사실상, 인권 침해 가해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진실에 대한 권리가 국가 기구의 작동에 대한 신뢰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주목했다. 또한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은 회복을 방해하는 “침묵의 장벽과 비밀의 망토”라고 비판했다. 이 장벽을 부수고 망토를 벗기지 않고서야 신뢰의 정치공동체란 걸 어떻게 꿈꿀 수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
알고 싶어서 분노한 사람들의 줄이 길다. 숱한 이들이 염려하듯 세월호 참사는 벌어졌고 또 벌어질 참사의 이름 중 하나이다. 세월호의 질문에 대한 무시는 다른 문제들에 대한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 형제복지원 등 과거에 저질러진 인권 침해의 피해자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해고노동자들, 삶의 터전에 송전탑이나 군사기지가 덜컥 내리꽂힌 주민들, 일터에서 허구한 날 목숨을 잃는 산재 피해자들, 성폭력에 내몰린 아동과 여성들, 군대에 가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청년들, 공권력 감시와 사찰의 피해자들……. “진실은 인간 존엄성에 근본적인 것”이라는 보고서의 문구처럼, 이들이 외치는 ‘알고 싶어요’는 피해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출발점이다.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는 방패요, 전체 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나침반이 ‘알고 싶어요’에 담겨 있다.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유엔인권최고대표실, E/CN.4/2006/91, 2006) 1. 이 연구는 유엔인권위원회 결의안 2005/66에 따른 것으로,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은 진실에 대한 권리에 대한 연구를 요청받았다. 여기에는 국제법에 따른 이 권리의 기초, 범위, 내용에 대한 정보와 효과적 이행을 위한 최상의 실천과 권고들이 포함된다. 특히 이를 위해 채택될 수 있는 법적, 행정적, 기타의 조치들이 포함된다. 이 보고서는 여러 국가, 관련 정부 간 조직과 민간단체의 견해를 고려한 것이다. |
인권오름 제 411 호 [기사입력] 2014년 10월 15일 21:26:2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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