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6. 22

작성자 : 엄기호

 

이슬람 여성들은 차도르를 벗어야 할 것인가?

영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한 중산층 엘리트 여성이 이슬람 혁명의 와중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의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마르잔은 테레란에서 열렬하게 혁명을 지지하던 중산층 엘리트 부모를 둔 펑크락에 심취된 소녀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들 가족은 왕정타파를 위해서 자신들이 지지했던 혁명과 실제 그 혁명의 보수적 결과에 당혹하게 된다. 마르잔이 테헤란에서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한 부모는 그녀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보낸다. 서구에 온 마르잔은 곧 자신이 이 사회에서도 이방인임을 깨닫게 된다. 섹스와 마약, 그리고 방황을 거듭하던 끝에 그녀는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오지만 이란은 이미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국가가 된다. 이슬람의 젊은이들에게 허용된 자유란 밤에 몰래 불법적인 ‘클럽’에 모여 서구의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항상 감시의 눈빛 속에서 언제 도망을 다니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차도르만큼이나 끔찍한 학교를 떠올리다

 

이 영화를 통해 학생들과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머리 수건인 차도르를 여성에 대한 인권 억압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내건 대의중의 하나도 탈레반에 의해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많은 고발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는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화적 장치로서 존중되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윤리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제국주의라는 거센 비판과 반발이 이어졌다.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다수의 학생들은 ‘당연히’ 보편과 인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벗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차도르는 강제적”이며, 그것은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은 역사로만 남되 전통으로 남아서는 안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자유를 (지나치리만큼) 제한하는, 남성과 여성을 분명하게 차별하는 그릇된 문화”라고 단언하며 여성은 “차도르를 벗음으로써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다수의 학생들은 ‘전통’과 ‘인습’을 구분하며 ‘전통’은 계승되어야하는 것이지만 ‘인습’은 타파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학교에서 배운 언어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친 말은 이처럼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남아 사회와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반면 학생들 중에서 일부는 <페르세폴리스>를 보고 이슬람의 억압적 문화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억압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아본다. 학생들의 이런 경험은 대부분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것에서부터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중고등학교에서의 ‘교복과 두발, 애국가와 아침조례, 그리고 특정 종교의 강요’이다. 이들에게 한국은 차도르를 강요하는 이란만큼이나 끔찍하게 자유가 박탈된 사회이다. 다른 사회의 억압을 보면서도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며 거의 자동적으로 바로 떠올릴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는 곳이 학교이다. 누구의 말처럼 한국인에게 학교와 군대는 억압의 원형적 체험으로 남아있다.

한 학생은 아침조회와 애국가를 떠올렸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매주 월요일마다 아침조례가 열리고 아이들은 “차렷과 열중쉬어를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부른다. 모두가 차도를 다 걸치는 것처럼 모두가 다 하는 것이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 학생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었다면 한 마디 정도는 기억날 만도 한데,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회상한다. “귀찮고 싫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이것이 차도르랑 무엇이 다른지를 되묻는다. 다른 한 학생은 강요되는 종교로서의 채플을 떠올리며 우리의 일상생활도 “이처럼 전적인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우리가 질문해야하는 것은 왜 우리의 경우는 마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이슬람의 차도르만 문제를 삼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동일선상의 어떤 문제는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선상에서 교복과 두발의 문제가 가장 많이 학생들이 떠올리는 주제였다. 한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치마를 강요하던 일을 떠올렸다. 자기의 동급생 중에서 한 학생이 자신은 치마를 입는 것이 불편하다며 학교에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 학생에 따르면 문제를 제기한 그 친구는 '치마를 입으면 자전거를 타기 힘들다.' '겨울에는 종아리가 얼어붙을 것 같이 춥다.' '몇몇 아이들은 다리가 굵기 때문에 함부로 치마를 입지 않으려 하는데 학교 측에서 하반신 노출을 강요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그 의견에 동조하였고,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막상 이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지자 그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그 학생뿐이고 다른 여학생들은 ‘민망하다’는 이유에서 그다지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행사하기에는 사회의 시선이라고 하는 또 다른 장애가 존재한 것이다. “스스로 투쟁해서 얻어낸 교복바지”를 주변 시선 때문에 활용할 수 없게 되면서 자유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유는 보이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무심해지는 것이다.

차도르가 감추는 우리사회의 진실

 

이런 점 때문에 한 학생은 오히려 차도르가 이슬람 여성들에게 역설적으로 자유를 줬다고 말을 한다. 차도로를 쓰지 않는 ‘자유’가 있는 우리세상이야말로 여성들에게 전혀 자유롭지 않은 사회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꾸며야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부자연스럽고 우리가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훨씬 더 부산스럽고 부자유스럽다.

오히려 이 학생은 차도르를 쓴, 한 이슬람 여성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무한가지의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누가 알겠는가. 차도르로 머리와 몸을 가리고 레이스로 얼굴을 가리고서 조숙하게 걷고 있는 그녀가, 빨간 레게 헤어스타일에 핫팬츠를 입고 배꼽에 3-4개의 바나나바벨 피어싱을 하고 있을지.”라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 학생은 이슬람 여성이 “차도르를 씀으로써 ‘자신에 대한 타인의 의식’과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라는 구속에서 해방 되는 실로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온 몸을 돌돌 감아버림으로써 “그녀가 얼굴이 예쁜지 못생겼는지, 부유한지 가난한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혹은 황인인지, 어느 누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지어 그녀는 ‘그’일 수도 있다고 유쾌한 상상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예리하게 우리 사회의 패러디로 차도르의 문제를 포착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무엇을 가리며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질문한다. 다른 학생들이 차도르를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가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이 학생은 가린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은 가린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 질문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차도르는 ‘얼굴을 가리고’ ‘몸뚱이를 드러낸다’는 진실이다. 이를 통해 이슬람 여성들은 “이슬람문화권 여성들은 몸뚱이만 존재할 뿐,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며,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여성의 인권도 자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몸을 가리는 것은 남성들의 성욕이라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남성의 순수한 성욕의 대상인 몸뚱이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가리는 것에 우리 모두가 집중하는 사실의 문제라면 드러내는 것은 진실의 문제이다. 학생들은 이 점을 잘 간파해내었다. 결국 차도르의 진실은 한편에서는 이슬람의 남성들에게 여성이 성욕의 대상이자 도구인 몸뚱이로만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는 학생들과 사실과 진실 사이의 차이의 문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차도르를 쓰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억압을 강요당하고 차별을 당한다는 것 역시 아마 사실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감추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서구의 논리에서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진실의 문제도 잘 포착하였다. 먼저 우리 사회가 감추는 진실은 바지 교복을 이야기한 학생이 말하는 것처럼 서구화/근대화된 우리 사회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억압되고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쟁을 통해 교복바지를 입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바지를 다수의 여학생들이 입기를 꺼려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주어진 자유’가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진실의 문제이다. 사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진실은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감추어지는 것이 무엇이며 그 양자를 가르는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한 한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의 히잡 논쟁에서 감추어진 서구의 진실을 예리하게 폭로하였다. 히잡 논쟁이 드러내는 것은 이슬람이 후진적이라는 사실이고 감추는 진실은 서구사회가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평등과 자유의 정신에 입각해 받아들인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의 큰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민자들에게 불평등한 조치를 취한다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으로 들고나온 것이 히잡이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불평등을 가리고”, 그들의 불평등을 드러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히잡 논쟁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여성, 문화전쟁의 상징에 갇히다

 

아이들의 쪽글과 토론에 힘입어 우리는 왜 하필이면 여성과 차도르가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토론에서 우리는 차도르(히잡)에 대한 논쟁 자체가 여성을 행위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만 바라보며 그 상징을 쟁취하며 자신들의 억압적 진실을 감추려는 서구와 이슬람 남성간의 추악한 문화전쟁이라는 점을 발견하였다. 서구 사람들은 이슬람의 상징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차도르를 떠올린다. 사실 이슬람을 상징할 만한 것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차도를 제외한다면 대다수는 남성들의 것이다. 터번이라던가 이슬람 남성들이 매일 기도하기 위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양탄자라고 하던가, 남성들이 길게 누워 빨고 있는 물담배 등 이슬람의 상징으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차도르가 그 상징이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도르가 이슬람의 후진성과 억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의 문화가 이슬람을 오염시키고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타깃이 여성이고 그 상징이 차도르이다.

여기에서 우선 살펴보아야하는 것이 바로 이슬람 남성들의 위치이다. 서구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 이슬람 남성들은 중심으로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충분히 누려왔다. 그러다 이들은 서구의 침입으로 졸지에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던 것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들의 통제권에 대한 상징, 그것이 바로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이며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통하여 이들은 상처받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보편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권과 특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문화적 차이 사이의 갈등에는 이처럼 그 이전에 보편의 위치를 차지하던 기득권들이 특수의 위치로 내쫓기면서 다시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서구의 입장은 차도르를 문제삼음으로써 위의 학생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위선을 교묘히 감출 수 있으며, 동시에 이슬람 남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지게 된다. 이들 모두에서 여성은 단지 그들 주장의 정당성을 비호하기 위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오로지 차도르를 씀으로써 전통을 수호하는 상징이건, 혹은 차도를 벗음으로써 해방을 실천하는 상징이거나, 결국 둘 모두에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히잡이 논쟁 자체가 되는 것이 여성을 행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의 상징으로 삼아 그 상징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서구와 이슬람 남성들 간의 다툼이며, 이 다툼에서 이슬람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배교자인 여성, 소비자로 구원받다

 

그렇다면 상징이 아닌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우리가 발견한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서구에서도 이슬람에서도 영원한 배교자 혹은 난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페리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서구에서도, 이란에서도 영원한 난민이다. 이들에게 조국은 없다. 이들은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서구로부터도, 전통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으로부터도 영원한 ‘배교자-이방인’들이다. 서구는 이들이 외부로부터 와서 서구의 이념인 인권과 보편을 위협한다고 이들을 배교자 취급을 하며, 이슬람은 이들이 이슬람의 순수한 신앙을 위협한다고 하여 배교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행위자로서는 배교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이처럼 양쪽 모두에서 위협적이며 불온한 존재이다. 아무 쪽에도 소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위협적인 존재를 가장 불온하지 않게 해방시켜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우리는 한 학생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학생은 이 논쟁을 보며 꿈꾸었다고 한다. “차도르도 하나의 좋은 패션 아이템이 된 미래의 아침, 오늘은 무슨 차도르를 쓰고 나갈지 곰곰이 고민하는” 자신을. 여성은 히잡이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문화적 소비의 대상이 될 때 비로소 해방될 것이다. 서구와 이슬람, 모두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이들 모두를 만족시키며 이런 논쟁 자체를 우스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임을 이 학생은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참고로 입생로랑이나 기타 프랑스의 유명 속옷 브랜드가 가장 날개 돋친 듯이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중동이다. 이 학생의 불온한 상상은 이미 미래가 아니라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와 함께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속옷에서 타협을 본 서구의 인권과 이슬람 남성의 성욕은 곧 여성이 아닌 차도르를 해방하리라. 자본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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