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8. 4. 24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지역이든, 비자치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안 된다.

인권의 사랑니, ‘차별’

‘차별’은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싫어하는 말이고 바꾸고 싶은 현실이다. 그런데 차별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권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권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기에 그 어떤 이유로든 어떤 사람을 제외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세상사를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지배자 쪽에서 보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게 싫고 두렵다. 이걸 어떻게 갈라놓을까 궁리해보니 서로를 싫어하고 깔보게 만드는 것만큼 손쉬운 방법이 없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라고 큰소리쳤지만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 또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꺼림직 하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차이’들 중에 특정한 것을 골라내서 어떤 것은 특별대우하고 어떤 것은 찬밥취급을 하는 것이 ‘차별’이다.

‘차별’은 움직이는 것

차별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인권기준 또는 인권규범이라 하는 건 죄다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앞머리에 달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선언 제2조에서 열거된 차별 금지 목록을 보면 오늘날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 중에 빠진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장애’가 빠져있다. 당시 장애를 인권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수많은 장애인들에 대한 후생사업과 원조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그 후에는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접근이 시도되다가 70년대에 가서야 인권의 접근(예를 들어, 75년 장애인권리선언)이 시작된다. ‘장애’처럼 선언 제정 당시에는 인권문제로 보지 않은 영역이 많았던 것이다.

잠시 한국의 국가인권위법을 들여다보자. 제정 시 진정대상이 되는 차별사유를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병력(病歷)’ 18가지로 명시했다. 이후 개정을 통해 ‘학력’을 추가하고 열거된 목록에 ‘등’을 부가했다. 여기에 열거되지 않았더라도 차별금지기준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국가인권위법은 국제인권기준과 국내인권운동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세계인권선언 이후 변화·발전된 차별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차별 조항이 필요한가

선언을 만들면서 차별 조항을 적극 제기하고 지켜낸 것은 당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미소냉전 속에서 소련은 미국의 인종주의와 서구열강의 식민주의를 비난했다. 반면 서구측은 수용소와 정치적 의견에 대한 탄압 등을 들며 소련을 공격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차별 조항에 대해 크게 두 개 입장이 대립했다. 하나는 포괄적인 차별을 다룬 일반조항이 필요하며, 차별금지사유를 상세히 담은 목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은 선언의 다른 조항에서 ‘법 앞에 평등’을 다루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며, 유엔헌장에 열거된 차별금지사유(인종, 성, 언어, 종교)말고 다른 것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차별 조항을 원하는 쪽에서는 ‘차별은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국제적 정치 행위로 간주돼야 한다.’, ‘유엔의 임무 중 하나는 차별철폐여야 한다.’,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미국에서의 흑인 린치 등의 관행이 계속될 것이다.’, ‘차별행위는 범죄를 구성하며 국가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이 규정해야 한다.’ 등 강도 높은 의견들을 이어갔다. 그 결과 ‘법 앞의 평등’(선언 제7조) 조항과 별도로 차별을 금지하는 일반원칙인 제2조가 만들어지게 됐다.

구별 또는 차별? 자의적 차별?

‘구별’이냐 ‘차별’이냐는 단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구별’과 ‘차별’을 같은 내용의 단어로 본 입장에서는 모든 구별이나 차별이 해롭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며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도 있으니, 그중에서 ‘자의적’인 것만을 금지하자고 했다.

반면 ‘구별’과 ‘차별’은 그 내용이 다른 단어이기에 ‘차별’이란 단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입장은 이런 논리였다. ‘차별’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인간을 해롭게 하는 차별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구별과는 아주 다르다. ‘차별’을 ‘구별’로 대체하는 것은 내용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자의적’이란 단어를 쓰게 되면 소위 ‘비자의적’인 차별, 예를 들어 법에 근거한 차별(미국의 흑인법처럼)을 용서하고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다. 차별이란 단어가 해로운 구별을 의미하고 있기에 ‘자의적’이란 수식이 없어도 된다.

토론의 결과 ‘차별’이란 단어를 쓰고 ‘자의적’은 빼기로 했다.

식민지 인민의 문제

원래는 식민지 인민의 문제를 별도의 차별조항으로 다루자는 제안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나 제안자인 유고와 그를 지지하던 사회주의권이 티토와 스탈린의 관계 청산으로 인해 삐걱거리자 막판까지 이 제안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소련은 식민지 모국이 관할 하의 비자치지역에 대해 가지는 책임을 언급한 유엔 헌장을 인용하며, 비자치지역과 식민지에서의 선거를 압박했다. 식민 권력들은 당연히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길 원치 않았고, 양 진영 간에 설전이 이어졌다.

소련도 식민열강 쪽도 아닌 대표들이 식민지 인민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인류의 양심은 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억압이 관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진보했다.”라며, 일반적인 차별을 반대하는 표현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에 대해서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식민지 영토에 적용됐던 건 아니었다.”라고 대응했다. 또한 “전문에 담긴 막연한 한 두 줄로는 충분치 않다. 이 조항에 반대하는 대표들은 식민지체제 아래 사는 사람들의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식민지를 특화한 별도의 조항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너무 센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좀 막연하고 일반적인 용어가 좋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식민지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문구가 제2조 두 번째 문단에 첨부된다.

인종·피부색·민족적 출신·언어

선언에 언급된 ‘인종, 피부색, 민족적 출신, 언어’는 일종의 세트이다. 즉 인종적·문화적·언어적 소수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 금지는 이미 결론이 내려진 문제였다. 인종은 유엔헌장의 몇 개 안되는 차별목록 중에 맨 앞에 있다. 선언의 대부분 조항이 히틀러의 인종주의 정책에 대한 직접대응이었고 연합국이 전후에 한 첫 번째 일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법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천명된 네 번째 정치원칙은 “모든 나치의 법률-히틀러 체제에 기초하거나 인종, 신념 또는 정치적 의견에 기반을 둔 차별은 철폐돼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추축국 간의 평화 조약 또한 모든 인종주의적 법률과 차별관행의 철폐에 대한 규정을 포함했다. 따라서 선언이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금지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인종만이 아니라 ‘피부색’이 들어간 이유는 인종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정의도 없기에 인종이란 단어를 더욱 자세히 하기 위함이었다. 피부색은 가장 명백하고 가장 흔히 사용되는 신체적 특성의 하나로 인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언어’, ‘민족적 출신’도 그런 이유에서 포함됐다.

제2조의 ‘민족적 출신’은 한 정부 아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가들이 있다는 이해 속에서 인종적·민족적·문화적 소수집단을 보호하려는 취지로 포함됐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여기서 말하는 ‘민족적 출신’이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특질’이라는 의미로 해석돼야 한다는 주석을 붙였다.

소수집단의 ‘언어에 대한 권리’와 긴밀한 문제는 교육권(소수자 집단이 자신들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로 교육받을 권리)과 종교와 법정에서의 언어권 등이다.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정치적 의견’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당시 대부분의 헌법은 ‘정치적 신념’을 헌법 조항의 비차별 조항에 열거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을 넣자는 의견은 이렇다. 정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 중 하나이다. 차별과 처형의 위험 없이 정치적 신념을 자유롭게 보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어떤 해도 없다. 또한 정치적 소수자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왕이나 귀족집단에 의한 억압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강력한 국가들은 사상의 반대 집단을 억누르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조항에서 보장되는 보호가 정치적 의견으로 확대돼야 한다.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 종교적 소수자보다 정치적 소수자가 더욱 미래에 보호를 필요로 할 것이다. ‘정치적’을 빼고 그냥 ‘의견’으로 하자는 입장에 대한 반론은 ‘명백하게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언제나 부정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권의 반대의견이 셌다. ‘인종적 또는 민족적 증오를 옹호하거나 그로부터 추동된 행위를 옹호하는 정치적 의견은 관용될 수 없다. 나치와 파시스트 집단도 정치적 의견의 자유 같은 목록에 기대서 공공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항목을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이유였다.

결론은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로 내려졌고, 이는 정치적 의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타의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재산 지위’에 대해서는 논평이 없었다. ‘기타의 지위’에 다 포함되니 재산을 빼자는 의견(미국, 영국 대표) 정도가 있었다. ‘빈민이나 부자나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게 중요하니까 넣자’고 결론이 났다.

‘출생’을 넣은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봉건적 특권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부 잔여물이 있어서 언급하자는 것이었다. 물려받은 법적, 사회적, 경제적 차이에 기초한 차별금지를 말한다. 즉 상속받은 특권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다.

여성의 권리

원래 선언의 대부분의 기초문서는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여성소위는 역사적으로 “모든”이란 말이 여성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많은 대표자들도 “모든 사람(all men)”에서의 ‘사람(men)’이 남성을 지칭해왔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워했다. 이 표현은 역사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희망했다.

여성소위는 남성의 뜻이 다분한 ‘men’이 아니라 성차별적 요소를 배제한 ‘human beings’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 대한 영어 표현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든가 이미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된 단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선언 제1조 이외의 모든 조항에서는 “모든 사람(everyone)”으로 표현되고 제1조에서만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이 사용됐다. 선언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적 단어와 권리 규정에 대해서는 해당조항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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