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39 호 [기사입력] 2009년 02월 1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내가 처음 철거민을 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바람고개라 불리는 언덕 주변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 아는 언니, 오빠,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터 집들은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돌무더기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비닐 천막이 한두 개씩 늘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단지 궁금했던 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비닐집에서 옷은 어떻게 갈아입으며 용변은 어떻게 해결할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의 눈물을 봤다. 비닐집에 사는 친구였다. 혼자서 비닐집에 앉아(너무 추웠다) 빨래를 개며 그 친구는 연신 중얼거렸다. “울 엄마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울 엄마가 뭘 잘못했다고….” 어린 나는 영문을 몰랐다. 나중에서야 그 눈물에 담긴 서러움을 짐작하게 됐다.
내게도 비슷한 일이 닥쳤기 때문이다. 철거는 아니지만 단칸방까지 빚쟁이에게 넘어가는 일이 흔했다. 몇 차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된 건 집달리는 꼭 새벽 4시경에 온다는 거였다. 잠에 취한 식구들이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그들은 살림을 밖으로 집어던진다. 차가운 새벽바람에 정신을 차린 식구들이 체념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들의 우악스럽던 손길이 좀 얌전해졌다. 엄마가 밥풀로 벽에 붙어뒀던 상장들이 찢기고 밥상이 깨진 후 길바닥에 나동거리는 초라한 살림을 주워 모았다.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 임시거처를 구하러 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동생들은 창피하다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나 홀로 알량한 살림을 지키느라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 있으면, 나와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대학교 때 철거지역에서 잠깐 공부방을 했다. 거의 다 부서진 동네에서 역시 반쯤 부서진 집 이층을 청소하고 마련한 거처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고 같이 노는 활동이었다. 학년도 성별도 다른 아이들은 공부에는 집중하려 하지 않았고, 어쩌다 같이 간 남학생들은 아이들이 하도 말을 태워달라고 해서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학교 축제로 한 주를 건너뛰고 찾은 공부방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이미 부서진 집이었음에도 공부방이 눈꼴셨는지 철거반원들이 공부방에 오르는 계단조차 아예 무너뜨렸다. 아이들과 작별인사도 못했고 다시 보지도 못했다.
인권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후 이런 문건을 접했다. ‘세계주거권회의’라는 게 있는 데 거기서 한국을 남아공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으로 철거를 하는 국가로 지목했다는 거였다. ‘참 안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심각성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거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국제법적 해석은 1991년에 발표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적절한 주거의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 4"이다. 이에 따르면 주거권은 물리적인 주거만이 아니라 안전하고, 평화롭고, 존엄하게 살 권리를 말한다. '적절한 주거'의 개념에는 여러 요소가 포함되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안정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반드시 자기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집을 소유할 수도 있고, 임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유하든 임대하든, 어떤 방식으로 그 공간에서 살든 간에 안정적으로 살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임대했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거나 집이 철거되거나, 또는 그 집에 살 수 없도록 강한 협박․폭력에 시달리는 경우,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갑작스럽게 거주 공간을 빼앗기거나 위협을 받는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보호하거나 안정된 주거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유엔에서는 또한 이런 주거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대표적인 현상을 지목하였다. 그건 바로 땅 투기와 부동산 투기이고, 토지 몰수와 수용, 토지 소유의 불평등, 토지 파벌의 성장을 통제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이다. 또한 저소득자가 생계를 위해 필수적인 토지 및 부동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정부의 시장개입의 소극성을 문제로 지적했다.
용산 참사가 벌어지고 참 속상한 일들이 많이 이어졌다. 철거민을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측의 대립도 적지 않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벌일 일이 아닌 일들이 많다. 그중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슬렸다. ‘사인과 사인간의 분쟁에 왜 경찰력이 끼어들었느냐’는 식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이 일은 국가가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주거권에 소홀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원인은 거기에 있다.
애초에 주거권이란 인권이 사인과 사인간의 분쟁거리에 치우치지 못하도록 사회경제적 강자의 탐욕을 통제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국가가 나서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적 폭력인 용역이 와서 괴롭히면 공권력이 나서서 퇴거 대상인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손잡고 춤을 췄다. 사인과 사인간의 분쟁에 괜히 끼어든 게 아니라, 공권력은 고의적으로 늦게 왔고, 작정하고 저들의 편에 섰다.
법은 강자에게 엄하고 약자의 설움을 껴안아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강자도 약자도 법을 외면할 것이다. 강자는 굳이 법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고, 약자는 ‘법에 호소해 봤자’라고 체념할 테니 말이다. 아니, 체념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법이 있고 공권력이 있고 생계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당국이 있었다면 망루가 세워졌겠는가. 당신들의 세상과 당신들의 법과 당신들의 공권력에 대한 체념이 무엇으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들이 감당 못할 그 무엇이 될 것은 확실하다.
<철거민이 본 철거>,1998 철거반만 오면 아이들은 놀다가도 “엄마, 철거반 아저씨들이 곡괭이, 몽둥이 들고 와. 빨리 나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허겁지겁 맨발로 뛰어나와 살림을 챙기고 판자조각이라도 부서질까봐 주섬주섬 뜯을 때는 정말 숨이 꽉 막히고 심장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나마 판자조각이라도 없어지면 당장 한데서 자야 하는 저희들의 신세고 보니 사정도 해봅니다. “아저씨, 제발 우리가 뜯을 테니 부수지 말아요”하고 두 손 모아 애타게 애원하지만, “높은 사람이 위에서 보고 있으니 곤란하다”면서 사정없이 부숴버리는가 하면 방 구들까지 곡괭이로 마구 파버리고 갑니다.…(1975년, 중랑천변 철거민 ‘어머니의 호소’) |
인권오름 제 139 호 [기사입력] 2009년 02월 1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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