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0. 20

작성자 : 엄기호

 

돼지가 있던 교실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이다. 졸업을 앞둔 6학년의 한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돼지를 같이 키워볼 것을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학교측과 불편해하는 학부모들을 앞에 두고 아이들은 일단 시작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돼지에게 P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P짱은 곧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학급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다. 지나치게 아이들이 P짱에게 밀착되어 버리자 학부모들의 항의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오면 온통 P짱 이야기밖에는 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장선생은 담임과 자신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며 담임에게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가 보라고 격려한다.

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의 졸업이 다가오자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졸업을 해야하니 더 이상 P짱을 보살펴줄 수 없기 때문이다. P짱에게 정이 든 아이들은 이미 P짱은 돼지고기가 아니라며 절대 먹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반대하는 아이들은 애초에 데리고 온 이유가 먹기 위해서였고 우리가 먹는 것도 P짱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니 죽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다른 저학년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학년들이 P짱을 다루는 것이 신통찮아서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동물원이나 농장에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학급회의가 소집되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동수가 된다. 결국 학급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담임교사는 P짱을 식육센터로 보내는 것을 결론을 내린다. 영화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함께 막을 내린다.

 

거침없이 토론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이 대다수가 이야기한 것은 한국 교육 현실의 한심함과 이런 체험형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다. 가장 먼저 돼지를 키우자고 제안하는 담임교사의 실험정신이나 열린 자세를 꼽을 수 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서 한국의 교실에서는 교사의 의견과 결정이 ‘수업시간뿐 아니라,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로 여겨졌고,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준’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과 어떤 문제를 같이 상의하고 해결해나가는‘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 영화의 교사는 돼지를 키우자는 것도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P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요하지 않고, 돼지를 키운 주체인 학생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학생을 의견의 당사자로 존중해주는 교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처음 이 젊은 담임의 결정에 우려를 표하지만 막상 학부모들의 걱정이 시작되고 항의가 이어지자 담임에게 끝까지 한번 프로젝트를 수행해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교장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다. 한국의 교장들이 교사들이 저지르는 일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교사들의 그 어떤 창의적인 제안도 말썽이 일어나면 책임을 지겠냐고 도로 윽박지르른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학부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학생들을 위해, 부모들을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교장선생님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지난번 일제교사에 대한 반대에 대해 교사의 자율권을 존중해주다가 장수중학교의 교장이 징계를 당하는 것을 보면 이 충격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아이들의 토론 역시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다른 동료들과 교사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한 학생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신이 여전히 무엇에 대해 발표할 때 엄청나게 긴장한다고 고객한다. 누가 자신의 발표에 대해서 토를 달지는 않을까, 자기가 발표하는 내용이 ‘교수가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등을 걱정한다. 자신의 현재 전공의 특성상 ‘보다 실험적이고 획기적’이어야하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때 까지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단지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하는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영화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육을 실천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라는 것이 상당수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장,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세계의 붕괴와 해방

 

영화 내부적인 것에서 아이들이 P짱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당연하게도’ 김춘수의 ‘꽃’이다. 몇 번이나 이 연재에서 이야기를 한 것처럼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이리도 크다. 자신들이 무슨 주장을 해야할 때면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참고문헌’은 교과서인 것이다. 참고문헌의 힘은 단지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장의 내용과 방향까지 결정한다는 것에 있다. 김춘수의 ‘꽃’이 등장하는 순간 학생들이 어떤 내용을 주장하게 되고 그것의 결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P짱과 아이들 사이에 친밀성이 형성됨으로써 P짱은 더 이상 돼지고기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관계의 형성은 P짱을 식육동물에서 애완동물로 격상시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인격적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꽃을 패러디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돼지는 그저 고기용 돼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자 돼지는 귀여운 ‘P짱’이 되었고 의미가 되었다. 돼지가 ‘P짱’이 되자,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돼지고기 만드는 돼지란 점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이 된다. 요컨대 ‘나 없이는 ’P짱'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하는 경험 또한 ’P짱'이 있음으로서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결속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와 같은 공동체는 환상이다. 한 학생은 ‘애완동물에서부터 혈연․지연․학연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런 환상 속에 살면서 환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암묵적으로 아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환상을 깨뜨려 현실을 바라보기’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환상이 깨어지는 것, 즉 P짱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창조한 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이 세계의 붕괴이며, 이 세계의 붕괴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성장을 해 나간다. 실패와 종말을 감당하며 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라고 부르는 이별과 분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젖을 떼고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이 세계의 질서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P짱과의 분리는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하면 모든 것이 충만한 상상계에서 모든 것이 매개되는 질서로서의 상징계로의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성장,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아마 이 영화는 등장한 아이들에게 ‘먹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별과 분리의 잔혹한 과정을 통하여 아이들을 상징적으로 거세하는 훌륭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이렇게 상상적으로 하나 혹은 공동체라고 느꼈던 생명과의 단절을 통하여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던 과정을 드러냈다.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병아리와의 이별에서부터 시골 출신인 한 학생이 자신과 같이 성장한 ‘뽀삐’라고 불렀던 한 송아지의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 이별과 헤어짐이 다가오는 의미와 강도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병아리가 아버지에게 잡아먹혔다는 충격 때문에 평생 닭고기를 못 먹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키운 닭이 농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녁 식탁에 올라온 닭은 자기가 키운 닭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맛있게 먹기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자신의 닭이 사라졌을 때 사실 그 닭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사실상 자신은 피곤하였기에 솔직히 잘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의 다른 말이 곧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관계의 단절은 세계의 붕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해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P짱은 애완동물이었을까?

 

아이들이 P짱을 P짱으로 부르는 순간 생명은 위계화된다. 학생들이 간파해낸 것은 이런 ‘특별한’ 인격적 관계의 형성은 반드시 생명의 위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토론과정에서도 아이들은 P짱은 다른 돼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학생은 ‘똑같은 생명이라도 자신과의 추억이 있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같은 종은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환기시켰다. 이 학생은 ‘그다면 인간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덜 소중하단 말’이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돼지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이 대사에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의 대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관계의 특별함을 통하여 생명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위계화하는 것에서는 이 학생의 말처럼 나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이니 당연히 그것은 특별한 대접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의 인종주의는 나치처럼 자신들의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화되어야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특수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 학생의 통찰은 더욱 의미가 있다. 국민과 비국민이 갈리고 이주노동자도 등록이주노동자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갈린다. 그리고 이 분류는 인간들이 누구에게 더 공감하고 누구에게는 덜 공감해야하는지를 갈라 놓으며 그 공감의 차이를 정당화한다. 즉 공감의 정도가 강한 부류에 대한 차별은 격심한 비판을 받지만 그 반대 급부로 공감의 정도가 덜한 인간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더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이미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서 위계화되어 있다. 같은 돼지라고 하더라도 이 돼지가 농장에 있으면 식용동물이며,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있으면 야생동물이고, 집에 있으면 야생동물이며 실험실에 있으면 실험용 동물이다. 한 생명이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그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익숙한 구분법의 정당성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내가 특별하고 특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더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더욱이 이 위계화는 위계화되는 동물의 특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한 학생은 자신이 식당에서 시킨 삼계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먹기 불편할 정도로 엽기적으로 생긴 것은 오히려 찢겨져서 이미 형체가 없어진 상태로 나오는 개고기가 아니라 목만 잘린 채 뱃속에 온갖 가지 이물질을 담고 나오는 삼계탕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은 자기가 시킨 ‘탕’이 개고기라는 것을 알자마자 미련없이 삼계탕으로 바꾼 후에 아무런 느낌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가를 되묻는다. 요컨대 이 위계화는 대단히 정밀하게 동물의 속성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만든 분류표에 따라 배치된 것 뿐이다. 여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려, 혹은 생명을 나누는 분류/배치표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다는 교육이 오히려 생명을 위계화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한 학생의 말처럼 ‘아이들이 토론에서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토론의 전제는 'P짱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것이 된다. ‘동료’라고 부르지만 한쪽만 말을 가진 관계가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겠는가? 생명은 고귀하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돼지는 처량하다. 이 때문에 한 학생은 ‘돼지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P짱과의 결속 자체가 아이들 쪽의 일방적인 환상인 셈이다. 그래서 이 환상의 단절은 ‘토론’이라는 이상한 이성적 과정을 밟게 된다.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던 셈이다.

 

교육의 잔혹함, 교사의 무책임

 

이런 점을 간파한 몇몇 학생들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 학생은 만일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돼지를 키우자고 했다고 가정하고 말을 하자면, 애초에 잘못 접근’이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고 ‘생명을 가둬두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며 이것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다른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애초부터 생명의 의미와 음식의 소중함은 전혀 다른 주제이다. 그런데 이 교사는 이 두 가지를 섞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음식은 죽음 생명이 되는 것이고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상야릇한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열린 교육에는 음식의 소중함도 생명의 소중함도 없다. 다만 아이들의 추억만이 달랑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P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결국 식용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닌 교육용 실험동물이었던 셈이다. 아니, 애완동물의 다른 이름이 실험동물이다. 아이들에게 음식의 소중함, 혹은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는 이름으로 어찌 보면 호사를 누렸지만 어찌 보면 가장 잔혹하게 다루어진 실험용 동물인 것이다. 이미 이것은 담임선생이 P짱을 교실에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운명 지어져 있었다. 한 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담임교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에게 모든 결정권한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을 두 편으로 나누고 ‘한 쪽에 동그라미’를 이미 그려놓은 그런 토론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이런 정황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감정적 정황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혹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린 교육’이 만들 수 있는 P짱과 같은 실험체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덫인 것은 아닌가? 한 학생의 신랄한 평가에 따르면 ‘교실 속 아이들은 곧 어른이고, 교실속 어른이 마치 그 어른들의 논쟁을 불구경하듯 앉아있는 우유부단한 아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교육에서 가장 무책임했던, 혹은 가장 무책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담임선생이었다. 그래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이 ‘자유분방’하고 ‘아이들을 믿으며’, ‘민주주의적’이며,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에게 아래와 같이 묻는다.

 

당신이 행한 수업방식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난 참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졸업 3일 전에 아이들에게 ‘잔인한’ 투표를 시킬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맨 처음 반 아이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돼지를 달랑 들고 온 그대가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며 식육센터로 보낼지, 3학년 아이들에게 보낼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그냥 넘기다니, 교육자로서 당신의 책임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더라 이겁니다!

그래요, 교과서에 ‘글자’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오감(五感)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 그것만큼 제대로 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적인 선생 또한 없죠. 처음에 당신이 돼지를 가져 온 이유는 돼지를 길러서 나중에 같이 잡어 먹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P짱’이라는 돼지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나뒀어요. 아이들이 ‘P짱’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도록 놔뒀어요. 아이들이 ‘P짱’을 먹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가져온 것을 놔뒀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아이들의 그림을 교실 뒤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돼지를 새로운 친구로 만들게 놔뒀어요. 왜 그랬어요?

 

교사는 ‘이것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무책임해질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은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 아이들의 주체성을 믿고 체험을 통한 교육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은 참 복잡한 것이다.

작성일 : 2009. 9. 20

작성자 : 엄기호

 

누구에게 이 영화를 금해야하는가?

 

한국의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2040년의 영국에 한 ‘영웅’이 나타난다. 사회는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정부에 의해 감시당한다. 언론은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계속해서 왜곡된 뉴스만을 쏟아내고 있고 시민들은 거짓을 진실로 믿으면서 완전히 세뇌되었으며, 정부에 반대하거나 피부색, 성적 취향 등이 다른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정신집중캠프’로 끌려간다. 이 캠프에서 행하여진 생체 실험의 결과인지 뭔지는 알 수 없는 초인적인 힘과 의지를 가진 한 인물이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500년전 가톨릭을 탄압하는 영국정부에 맞서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려다 체포되어 처형된 ‘가이 포크스’의 사면을 쓰고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권력자들을 처단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비는 브이에 의해서 구출되지만 브이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점차 진실을 알아가며 브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 영화의 백미는 정부에 의해 완전히 세뇌가 되어 아무런 정치적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시민들이 브이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 후 ‘모두가 브이의 가면을 쓰고 복장을 한 후’ 거리를 점령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는 장면이다. 이비의 말처럼 브이는 자신들의 아버지이며 친구이며, 아니 우리 모두가 브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에 찬성한다

 

브이 포 벤데타는 상당히 과격한 영화이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면서 환호하겠지만 어찌되었건 폭력에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와 ‘간디’의 후예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언론법 개악이나 인터넷 여론에 대한 탄압 등 이 영화의 내용과 맞물린 한국의 현실 때문에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보다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오버랩이 되어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읽고 토론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학생들 대다수 역시 이 영화를 한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였다. 이 영화는 작년 광우병 사태와 촛불을 즉각적으로 떠올리며 몇 개의 단어로 집약되었다. 민주주의, 독재, 참여, 비판, 언론 등이 그것이다. 먼저 학생들은 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감시와 탄압을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중의 하나인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정부가 국민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현 정부는 억압과 통제를 하며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학생들은 이 영화를 통해 참여하지 않으면서 쟁취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을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브이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국민들 방송을 통하여 거울을 보여주며 ‘그 속에 비친 자신들이 지금의 우울한 오늘을 만들었다’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독재자의 달콤한 약속 뒤에는 자신의 영혼과 같은 자유를 팔아먹은 대중’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 통해 다수의 학생들은 ‘왜곡된 사실을 앎에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무지는 독재자의 행위만큼이나 비판당해 마땅’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보고서도 그것을 묵인한 대중의 수동적 태도는 반성의 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모름지기 민주주의 시민의 가장 큰 의무중의 하나는 그 민주주의를 참여와 비판을 통해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들의 현실과 처지를 돌아보고 비판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도 많이 눈에 뜨인다. 대표적인 것이 투표하지 않는 20대에 대한 비판이다. ‘10명중의 2명도 제대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며 스스로들에게 ‘언제나 자지 말고 깨어야’한다고 촉구한다.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위해 스스로가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민주시민의 자세’인 것이다. 따라서 ‘선거 날을 휴가로 알며,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보다는 스포츠나 연예에 더 관심’을 가지는 현실을 비판하며 ‘방송매체에서 하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그 순간이 우리 사회가 죽어버리는 날’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2012년에 일어나서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작년 광우병 파동 때 촛불시위가 한국의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떠드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다. 인터넷의 댓글에서도 보면 ‘데모만 많이 하면 어떻게 하나. 투표소로 가야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 발언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투표밖에 없다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는 힘이 세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촉구는 교과서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학생들의 글을 읽으면서 학교와 교과서가 만들어내는 ‘규범의 힘’을 절감할 때가 많다. 즉 정치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가장 손쉬운 답은 교과서에 나와 있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시민의 의무를 강조한 학생들이 하나같이 다들 지적한 것이 브이의 복수가 가진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다. 브이의 행동은 ‘단지 살인이라는 비윤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한 학생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찝찝하고, 불쾌’했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내내 ‘결과보다는 과정’이라고 배웠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학생은 ‘그 사회에 대항하는 행동의 동기가 좀 더 순수성’을 가지고 있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독재는 반대하고 민주주의는 쟁취되어야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비폭력과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런 규범적인 언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한 학생은 이것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자신은 ‘사회적 이슈에 생각을 많이 해보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의 정치적 견해를 정립하려고 해본 적’이 없어 ‘현재 사회의 문제점과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다’면서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중/고등학교 때 배운 얕은 지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말한다. 이 학생의 말에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우리는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를 어디에서 배웠는가하는 점이다. 바로 교과서와 학교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해야 할 때 무엇에 의지해서 말을 풀어내는가이다. 역시 학교와 교과서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교과서와 학교가 힘을 발휘하는 장소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의 언어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정말로 그 교과서의 정치를 믿는가, 아닌가하는 점이 아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우리가 의존하고 동원할 수 있는 언어가 ‘학교와 교과서’의 언어라는 것이 보다 더 결정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믿는 것’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에서 작동한다. 즉 교과서의 언어를 실제로 믿건 안 믿건, 그 언어에 기대서 공적인 공간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한 교과서의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교과서의 규범이 우리들의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은 대중들의 말과 주장을 받아들일 때 평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2PM의 재범이 한국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토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쫓겨난 것을 한국 사회의 못 말리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광풍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내면을 들여다보자. 정말로 그에게 애국주의/민족주의적 언어로 철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믿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그들이 ‘분노’를 풀어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정당한 언어’가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인가? 만약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한다면 그들은 ‘애국주의’의 언어로 그들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지 결코 애국주의‘자’이거나 민족주의‘자’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비판은 좀 더 복잡해져야한다. 그들을 광신적인 애국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녁을 빗나간 비판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믿건 믿지 않건 간에’ 그들의 언어는 어디서 만들어져서 어떻게 그들의 언어 목록에 들어갔는가이다. 또한 그들 역시 그 언어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전략적으로 힘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파악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의 언어가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정당한 언어로 먹히며, 그것을 지지하는 제도와 장치는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이 학교와 교과서이고 언론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가 틀렸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노를 다르게 표현하는 다른 정치적 언어가 그들의 언어목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영웅인가?

 

폭력에 대한 규범적 비판을 넘어서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는가를 본 학생들이 있다. 이 학생들은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독재-거짓, 민주주의-진실’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비판하며 그 신화 자체의 효과를 의문에 삼는다. 이 영화에서 브이는 자신이 거짓에 맞서고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거짓’만 세뇌이고 ‘진실’은 세뇌가 아닌 것인가? 거짓도 정치적 주장이며, 진실도 정치적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독재 및 파시즘은 나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책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이 거짓을 폭로한다고 하여 그 자체로 힘을 가지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려면 거짓을 능가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브이가 ‘영웅’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이처럼 독재에 대한 반대도 민주주의도, 그리고 위기에 처한 개개인을 구원하는 것도 죄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영웅이 하는 것이라면 영웅이 사라지고 난 다음 그 구원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학생은 이에 대해서 냉소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영화의 결말 이후를 그려서 구원에 대한 영웅주의 서사가 가진 맹점을 예리하게 짚어내었다. 이 학생에 따르면 이 엔딩 자막이 올라간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다소 긴 글이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자.

 

1. 11월 5일 오전, 혁명의 완성으로 시민들은 환호한다. 뒤 이어 정부의 항복, 대법관의 죽음등이 알려진다. 세상은 축제.

2. 그러나 에비라는 여자가 TV방송국에 출연해 V와 자신의 로멘스, V의 정체 V의 계획, 그리고 V의 죽음등을 알리며 정말 그리운 V 잊지못할 거예요~ 하며 눈물을 쏟는다.

3. 세상은 슬픔에 휩싸이고 V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의사당 수색이 시작된다. V의 시신을 찾 든 말 든, V의 장례위원회가 설치되고 ‘국장’이나 ‘세계장’이 치러진다.

4. 한 편, 혁명 후 몇 일, 몇 주가 지나면서 독재정부 이후의 세상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세상은 어느때보다 시끄럽다. 하지만 독재정부를 대체할 정부조직이나 권력을 준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독재정부가 지녔던 행정조직과 경찰력, 군대는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근간이 보존되어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물론, 과도정부는 ‘민정이양’을 약속.

5. 이제 장난감 상점에가도 V가면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TV에서는 V를 소재로 한 영화, 만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뉴스가 연일 계속된다. 한 급진주의자는 V를 신성화하며 ‘V교’를 만들어 신도모집에 나서고, V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정당, 시민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 에비 영입에 공을 들인다. 에비라는 여자는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정치계에 데뷔한다.

6. 국민들의 극심한 시위와 요구로 정국은 계속 혼란스럽고, 과도정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이전 시대의 분노를 경찰과, 군대, 정부를 향해 폭발시킨다. 정부관료, 경찰, 군인들에 대한 린치와 감금, 폭행, 구타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7. 에비를 위시한 V파는 시민들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개헌과 선거를 즉각 실시하라고 과도정부에 요구한다. 아무 힘 없는 과도정부는 이를 수용하고, 직접민주적 요소를 강화한 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되고, 새롭게 실시된 총선에서 V파가 전체의석의 90%이상을 차지해 정부를 구성한다. 신임총리로는 에비가 선출된다.

8. 신정부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출발하지만 아마추어적인 정국운영으로 국내혼란을 잠식시키지 못한다. 신정부는 출범 몇 달만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혁명 이후 숨죽여 있던 ‘구 독재파’ 출신 사람들은 V와 에비, 신정부가 나라를 망쳐놓았다며 이전 ‘절대적인 질서’ 아래의 시대가 그립다고 세력을 규합해 신정부를 규탄한다.

 

이야기를 더 쓸 수 있지만 ‘머리가 아파서’ 그만둔다면서 이 학생은 4.19 이후에 박정희가 나오고 6.29 이후에 노태우가 나온 것을 제작자가 안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이렇게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는 그 전개방식에서 재미조차도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영웅적 서사에서 경찰은 늘 나사가 빠진 것처럼 ‘뒷북이나 치고’ 있으며 V는 천하무적이다. 다른 한 학생은 브이가 영화에서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어마어마한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브이는 ‘그 엄청난 자본을 어디서 끌어왔을까?’라며 영웅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하게 빠져든 사람들을 현실로 확 끌어낸다. 위의 시나리오를 쓴 학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천하무적 브이가 생체실험을 통해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면 ‘이런 젠장, 나도 그런 생체실험’을 당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 힘에 의한 통치를 비판하지만 그 반대도 역시 ‘힘에 대한 예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힘은 언제나 ‘일반인 이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빰빰빠~’하고 ‘영웅이 우리를 구원해주기만’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이 영웅서사는 언제나 늘 식상하고 엔딩 이후를 가리면서 서둘러 끝날 수밖에 없다. 사실은 그 엔딩 이후야말로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영웅주의 서사가 가진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은 대중은 무지몽매한 존재, 따라하고 세뇌되기만 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시민들이 나중에 각성을 해서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를 하지만 까놓고 알아보면 브이가 전부이다. 시나리오를 쓴 학생은 ‘대법관도 V가 죽였고 모든 계획도 V가 꾸미고 실행’했으며 ‘국민들이 일어서게 만든 것도 V’라면서 일이 이 지경이 되면 ‘V는 이미 오남용 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V가 죽든 죽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고 지적한다. 브이가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흐름에서 보통사람들의 각성은 각성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만일 현실의 대중들도 이처럼 우매한 존재라면 사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학생에 이에 대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작년 광우병 파동 때 일군의 젊은이들이 브이 포 벤데타를 패러디하여 가면을 쓰고 물총을 쏘면서 시위를 벌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전염력이 상당히 강한 정치적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 선동에 가장 손쉽게 놀아나고 있는 ‘대중’은 누구인가? 그것은 18세 이상 성인들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가의 판정을 받았는데 그것은 정부 당국이 대단히 잘못 판단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원칙에 의해서 레벨을 정할 것 같으면 당연히 ‘18세 이상 관람불가’ 영화가 되어야한다고 이 학생은 주장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비틀어보자. 혹 대중이 우매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이런 영화적 재현이 대중은 우매하다는 신화를 확정짓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한 영화이고 독재에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는 그 순간 사실 우리는 더 심원한 지배 이데올로기, 즉 대중은 우매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하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고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우매한 사람이 되어 ‘지배자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해방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브이, 민중들이 만든 낭만적 서사

 

그렇다면 이 영화를 대중을 우매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영웅서사로도 그 영웅서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는 냉소주의로도 빠지지 않고 읽는 방법은 없는가? 하나의 탈출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를 대중들의 자기 해방에 대한 낭만적 서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정감록이나 미륵신앙과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것을 대중들의 낭만적 서사로 바라보게 되면 무엇보다 이 영화의 화자가 바뀐다. 그 화자는 브이를 꿈꾸는 사람들 즉 대중들 자신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약하고 힘없는 대중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여기서 입증되는 것은 대중들의 ‘꿈꾸는 능력’이다.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낭만적 서사가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그 낭만적 서사의 가장 강한 힘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그래서 아무리 억압이 거세고 통제가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꿈꿀 수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그 능력을 우매함으로 감출 줄 아는 지적 능력도 있다. 이 꿈꾸는 능력은 낭만적 서사를 거짓으로 폭로하며 현실이라는 냉소주의에 무력하게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대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본다면 브이의 출현은 대중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낭만적 서사의 반복을 통하여 구세주를 준비한 셈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성서에 예수가 ‘늘 깨어 준비하라’고 한 말의 뜻도 예수가 도둑처럼 갑자기 재림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아니라 재림은 대중들에 의해서 준비되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되는 셈이다. 대중들의 영웅서사, 그 자체의 주어가 대중이 되면서 영웅이 대중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대중이 영웅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정확하게 역전된다. 브이가 대중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브이를 선동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어디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영웅을 준비하는가? 한 학생은 이것을 브이가 왜 가면을 쓰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는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왜 하필이면 11월 5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이다. 한 무모한 사람의 억압에 대한 도전이 역사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으나 그것이 기억되고 그것에 사람들이 감응하면서 이것이 기억의 정치를 통하여 역사를 가로질러 너와 내가 같은 공동의 운명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든다. 기억하는 한, 그것은 누군가에게 감응되고, 감응이 되는 한 그것은 공감이 되면서 역사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동의 운명에 대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를 통해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걸작으로는 인도의 소설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아롱다티 로이가 ‘9월이여 오라’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는 것을 애도하면서 그 날에 죽은 다른 이들을 불러낸다. 9월 11일은 미국에 의해서 칠레의 아얀테 정권이 붕괴한 날이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22년에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신탁통치를 발표하여 현재 중동의 비극의 씨앗을 뿌린 날이다. 또한 1990년 9월 11일에는 부시의 아버지 부시 1세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양원 합동회의에서 천명하기도 하였다.

아롱다티 로이의 이런 작업이야말로 영화에서 브이가 말하는 ‘아이디어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대사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브이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을 통해 이것은 ‘브이’라는 한 개인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500년 전의 ‘브이’를 찾아내서 불러일으키고 2040년의 ‘브이’를 준비하고 만들어낸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수많은 ‘브이’의 가면을 쓴 대중들의 이야기로 역전되는 것이다. 이것을 한 학생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두려움과 방관 등이 겉모습일지라도 우리에겐 V가 잠재되어있고 또 잠재된 것 안에 잠재된 것을 또 불러일으키면 V보다 더 멋진 V가 될 것이다. V가 증오를 넘었던 것처럼 또다시 새로운 우리를 만날 것이 기대된다. 우리 모두다 잠재되어 있는 V이다. 브이 포 빅토리”

 

중요한 것은 냉소주의에 따른 낭만적 서사의 파괴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꿈꾸며 새로운 이야기를 할 힘이 있는가이다. 이야기를 할 힘이 있는 한 이야기가 우리를 밀어간다. 역사의 주체는 영웅도, 대중도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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