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0. 20

작성자 : 엄기호

 

돼지가 있던 교실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이다. 졸업을 앞둔 6학년의 한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돼지를 같이 키워볼 것을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학교측과 불편해하는 학부모들을 앞에 두고 아이들은 일단 시작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돼지에게 P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P짱은 곧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학급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다. 지나치게 아이들이 P짱에게 밀착되어 버리자 학부모들의 항의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오면 온통 P짱 이야기밖에는 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장선생은 담임과 자신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며 담임에게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가 보라고 격려한다.

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의 졸업이 다가오자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졸업을 해야하니 더 이상 P짱을 보살펴줄 수 없기 때문이다. P짱에게 정이 든 아이들은 이미 P짱은 돼지고기가 아니라며 절대 먹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반대하는 아이들은 애초에 데리고 온 이유가 먹기 위해서였고 우리가 먹는 것도 P짱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니 죽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다른 저학년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학년들이 P짱을 다루는 것이 신통찮아서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동물원이나 농장에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학급회의가 소집되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동수가 된다. 결국 학급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담임교사는 P짱을 식육센터로 보내는 것을 결론을 내린다. 영화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함께 막을 내린다.

 

거침없이 토론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이 대다수가 이야기한 것은 한국 교육 현실의 한심함과 이런 체험형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다. 가장 먼저 돼지를 키우자고 제안하는 담임교사의 실험정신이나 열린 자세를 꼽을 수 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서 한국의 교실에서는 교사의 의견과 결정이 ‘수업시간뿐 아니라,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로 여겨졌고,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준’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과 어떤 문제를 같이 상의하고 해결해나가는‘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 영화의 교사는 돼지를 키우자는 것도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P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요하지 않고, 돼지를 키운 주체인 학생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학생을 의견의 당사자로 존중해주는 교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처음 이 젊은 담임의 결정에 우려를 표하지만 막상 학부모들의 걱정이 시작되고 항의가 이어지자 담임에게 끝까지 한번 프로젝트를 수행해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교장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다. 한국의 교장들이 교사들이 저지르는 일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교사들의 그 어떤 창의적인 제안도 말썽이 일어나면 책임을 지겠냐고 도로 윽박지르른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학부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학생들을 위해, 부모들을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교장선생님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지난번 일제교사에 대한 반대에 대해 교사의 자율권을 존중해주다가 장수중학교의 교장이 징계를 당하는 것을 보면 이 충격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아이들의 토론 역시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다른 동료들과 교사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한 학생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신이 여전히 무엇에 대해 발표할 때 엄청나게 긴장한다고 고객한다. 누가 자신의 발표에 대해서 토를 달지는 않을까, 자기가 발표하는 내용이 ‘교수가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등을 걱정한다. 자신의 현재 전공의 특성상 ‘보다 실험적이고 획기적’이어야하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때 까지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단지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하는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영화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육을 실천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라는 것이 상당수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장,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세계의 붕괴와 해방

 

영화 내부적인 것에서 아이들이 P짱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당연하게도’ 김춘수의 ‘꽃’이다. 몇 번이나 이 연재에서 이야기를 한 것처럼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이리도 크다. 자신들이 무슨 주장을 해야할 때면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참고문헌’은 교과서인 것이다. 참고문헌의 힘은 단지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장의 내용과 방향까지 결정한다는 것에 있다. 김춘수의 ‘꽃’이 등장하는 순간 학생들이 어떤 내용을 주장하게 되고 그것의 결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P짱과 아이들 사이에 친밀성이 형성됨으로써 P짱은 더 이상 돼지고기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관계의 형성은 P짱을 식육동물에서 애완동물로 격상시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인격적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꽃을 패러디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돼지는 그저 고기용 돼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자 돼지는 귀여운 ‘P짱’이 되었고 의미가 되었다. 돼지가 ‘P짱’이 되자,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돼지고기 만드는 돼지란 점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이 된다. 요컨대 ‘나 없이는 ’P짱'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하는 경험 또한 ’P짱'이 있음으로서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결속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와 같은 공동체는 환상이다. 한 학생은 ‘애완동물에서부터 혈연․지연․학연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런 환상 속에 살면서 환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암묵적으로 아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환상을 깨뜨려 현실을 바라보기’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환상이 깨어지는 것, 즉 P짱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창조한 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이 세계의 붕괴이며, 이 세계의 붕괴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성장을 해 나간다. 실패와 종말을 감당하며 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라고 부르는 이별과 분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젖을 떼고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이 세계의 질서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P짱과의 분리는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하면 모든 것이 충만한 상상계에서 모든 것이 매개되는 질서로서의 상징계로의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성장,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아마 이 영화는 등장한 아이들에게 ‘먹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별과 분리의 잔혹한 과정을 통하여 아이들을 상징적으로 거세하는 훌륭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이렇게 상상적으로 하나 혹은 공동체라고 느꼈던 생명과의 단절을 통하여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던 과정을 드러냈다.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병아리와의 이별에서부터 시골 출신인 한 학생이 자신과 같이 성장한 ‘뽀삐’라고 불렀던 한 송아지의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 이별과 헤어짐이 다가오는 의미와 강도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병아리가 아버지에게 잡아먹혔다는 충격 때문에 평생 닭고기를 못 먹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키운 닭이 농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녁 식탁에 올라온 닭은 자기가 키운 닭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맛있게 먹기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자신의 닭이 사라졌을 때 사실 그 닭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사실상 자신은 피곤하였기에 솔직히 잘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의 다른 말이 곧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관계의 단절은 세계의 붕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해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P짱은 애완동물이었을까?

 

아이들이 P짱을 P짱으로 부르는 순간 생명은 위계화된다. 학생들이 간파해낸 것은 이런 ‘특별한’ 인격적 관계의 형성은 반드시 생명의 위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토론과정에서도 아이들은 P짱은 다른 돼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학생은 ‘똑같은 생명이라도 자신과의 추억이 있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같은 종은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환기시켰다. 이 학생은 ‘그다면 인간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덜 소중하단 말’이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돼지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이 대사에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의 대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관계의 특별함을 통하여 생명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위계화하는 것에서는 이 학생의 말처럼 나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이니 당연히 그것은 특별한 대접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의 인종주의는 나치처럼 자신들의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화되어야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특수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 학생의 통찰은 더욱 의미가 있다. 국민과 비국민이 갈리고 이주노동자도 등록이주노동자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갈린다. 그리고 이 분류는 인간들이 누구에게 더 공감하고 누구에게는 덜 공감해야하는지를 갈라 놓으며 그 공감의 차이를 정당화한다. 즉 공감의 정도가 강한 부류에 대한 차별은 격심한 비판을 받지만 그 반대 급부로 공감의 정도가 덜한 인간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더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이미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서 위계화되어 있다. 같은 돼지라고 하더라도 이 돼지가 농장에 있으면 식용동물이며,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있으면 야생동물이고, 집에 있으면 야생동물이며 실험실에 있으면 실험용 동물이다. 한 생명이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그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익숙한 구분법의 정당성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내가 특별하고 특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더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더욱이 이 위계화는 위계화되는 동물의 특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한 학생은 자신이 식당에서 시킨 삼계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먹기 불편할 정도로 엽기적으로 생긴 것은 오히려 찢겨져서 이미 형체가 없어진 상태로 나오는 개고기가 아니라 목만 잘린 채 뱃속에 온갖 가지 이물질을 담고 나오는 삼계탕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은 자기가 시킨 ‘탕’이 개고기라는 것을 알자마자 미련없이 삼계탕으로 바꾼 후에 아무런 느낌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가를 되묻는다. 요컨대 이 위계화는 대단히 정밀하게 동물의 속성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만든 분류표에 따라 배치된 것 뿐이다. 여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려, 혹은 생명을 나누는 분류/배치표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다는 교육이 오히려 생명을 위계화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한 학생의 말처럼 ‘아이들이 토론에서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토론의 전제는 'P짱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것이 된다. ‘동료’라고 부르지만 한쪽만 말을 가진 관계가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겠는가? 생명은 고귀하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돼지는 처량하다. 이 때문에 한 학생은 ‘돼지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P짱과의 결속 자체가 아이들 쪽의 일방적인 환상인 셈이다. 그래서 이 환상의 단절은 ‘토론’이라는 이상한 이성적 과정을 밟게 된다.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던 셈이다.

 

교육의 잔혹함, 교사의 무책임

 

이런 점을 간파한 몇몇 학생들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 학생은 만일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돼지를 키우자고 했다고 가정하고 말을 하자면, 애초에 잘못 접근’이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고 ‘생명을 가둬두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며 이것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다른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애초부터 생명의 의미와 음식의 소중함은 전혀 다른 주제이다. 그런데 이 교사는 이 두 가지를 섞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음식은 죽음 생명이 되는 것이고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상야릇한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열린 교육에는 음식의 소중함도 생명의 소중함도 없다. 다만 아이들의 추억만이 달랑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P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결국 식용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닌 교육용 실험동물이었던 셈이다. 아니, 애완동물의 다른 이름이 실험동물이다. 아이들에게 음식의 소중함, 혹은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는 이름으로 어찌 보면 호사를 누렸지만 어찌 보면 가장 잔혹하게 다루어진 실험용 동물인 것이다. 이미 이것은 담임선생이 P짱을 교실에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운명 지어져 있었다. 한 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담임교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에게 모든 결정권한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을 두 편으로 나누고 ‘한 쪽에 동그라미’를 이미 그려놓은 그런 토론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이런 정황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감정적 정황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혹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린 교육’이 만들 수 있는 P짱과 같은 실험체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덫인 것은 아닌가? 한 학생의 신랄한 평가에 따르면 ‘교실 속 아이들은 곧 어른이고, 교실속 어른이 마치 그 어른들의 논쟁을 불구경하듯 앉아있는 우유부단한 아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교육에서 가장 무책임했던, 혹은 가장 무책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담임선생이었다. 그래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이 ‘자유분방’하고 ‘아이들을 믿으며’, ‘민주주의적’이며,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에게 아래와 같이 묻는다.

 

당신이 행한 수업방식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난 참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졸업 3일 전에 아이들에게 ‘잔인한’ 투표를 시킬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맨 처음 반 아이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돼지를 달랑 들고 온 그대가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며 식육센터로 보낼지, 3학년 아이들에게 보낼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그냥 넘기다니, 교육자로서 당신의 책임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더라 이겁니다!

그래요, 교과서에 ‘글자’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오감(五感)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 그것만큼 제대로 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적인 선생 또한 없죠. 처음에 당신이 돼지를 가져 온 이유는 돼지를 길러서 나중에 같이 잡어 먹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P짱’이라는 돼지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나뒀어요. 아이들이 ‘P짱’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도록 놔뒀어요. 아이들이 ‘P짱’을 먹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가져온 것을 놔뒀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아이들의 그림을 교실 뒤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돼지를 새로운 친구로 만들게 놔뒀어요. 왜 그랬어요?

 

교사는 ‘이것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무책임해질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은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 아이들의 주체성을 믿고 체험을 통한 교육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은 참 복잡한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