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감옥에 있다. 그는 무슨 무슨 위원장 등 직함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노들 장애인 야학을 열어 지금껏 책임져왔기에 ‘교장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노들’에서 그는 학령기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장애인들과 더불어 배우고 장애차별과 맞서 싸워왔다. 그가 나에게 ‘교장 선생님’인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집회나 행사에서 얼굴을 볼라치면 그는 늘 무섭게 따져 물었다. “인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인권 갖고 이것 좀 어떻게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권 갖고 우릴 좀 어떻게 해봐요.”로 이어지는 그의 고함은 학창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노역 투쟁’이란 이름으로 감옥에 있다. 척수장애를 갖고 있는 중증 장애인인 그가 감옥에 스스로 들어 간 것은 쌓이고 쌓인 벌금 때문이다. 왜 벌금을 때려 맞았냐 하면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24시간 보장과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한 활동 때문이다. 그 죄목 중 하나에는 동료 활동가의 장례식도 포함되어 있다.
2012년 10월 26일 새벽, 서울의 어느 집에서 작은 불이 났다. 단 10분 만에 진압될 작은 불이었지만 사람이 죽었다. 현관까지 단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동보조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거기 있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12시간만 제공됐기 때문에 홀로 있던 고 김주영 씨는 입으로 펜을 물어 전화기를 눌러 소방차를 불렀다. 하지만, 소방차가 도착하는 그 몇 분 간 홀로 숨이 막혀 죽었다.
장례식이 열린 광화문 광장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쌀쌀했다. 추모글을 써온 동료들은 울먹거림으로 계속 멈춰야 했다. 동료를 잃은 슬픔과 비슷한 일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뒤범벅된 장례식은 처연했다. 단상위의 영정을 보는 것도 그 옆의 장애활동가들을 보는 것도 괴로운 날이었다. 우린 차가운 바닥에 앉아 슬픔을 나누고 있는데, 유족을 위해 마련했다는 몇 안 되는 의자에는 국회의원들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장애인은 죽어서야 정치인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복잡하고 심난한 맘으로 헌화를 한 후 나는 광장을 떠났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기가 찼다. 그 장례식과 보건복지부까지 벌인 추모와 항의 행진이 불법이라며 벌금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고,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경고하고 지키는 것이 인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존중의 요구에 돈의 폭력으로 응대하겠다는 사회나 정치는 어디 내다 팔래야 사려고 나서는 데가 없을 것이다. 노동, 평화, 생태, 차별철폐 등 우리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놓고 벌이는 활동들이 ‘돈 없으면 인간존엄성을 포기하라’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협박을 받은 지 오래다. 그런 윽박질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은 계속 싸우고, 벌금은 쌓이고, 벌금 마련 후원주점에서 가난한 주머니를 털고, 또 싸우기를 계속해왔다. 그런 끝에 우리의 교장 선생님은 자기 몸을 털기로 결심했다. 순순히 벌금 납부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따위 윽박질에 포기할 나의 존엄성이 아니고, 협박에 멈출 나의 인권 투쟁이 아니란 걸 온 몸으로 가르쳐주겠단다. 손해배상 청구, 벌금 탄압,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온 몸으로 종을 치겠단다. 이제 그 종소리를 들을 때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 문헌은 마사 너스봄의 “핵심적 인간 역량”이다. 너스봄은 삶의 질을 측정하는 기초이자 정치적 계획의 목표로서 ‘역량’(capabilities)을 인권에 도입한 학자이다. 그녀의 목록을 통해 교장 선생님의 종소리를 번역해보려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백번 맞는 말이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흔히 추상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그럼 어떻게 인간다운 삶의 질이란 걸 잴 수 있을까? 너스봄은 기존의 척도들을 비판하면서 ‘역량’을 새로운 척도로 내놓았다.
‘총량이 얼마나 늘었는가?’, ‘평균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투입한 자원이 A라는 사람을 얼마나 만족시켰나?’가 기존의 척도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반면 너스봄이 던지는 질문은 ‘A가 실제로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너스봄의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다. GNP의 증가는 실제 그 돈을 누가 가졌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평균은 개개인의 단독성과 고유성을 무시한다. ‘만족’이란 왜곡될 수 있다. 불평등한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자신의 선호를 낮추거나 감춘다. 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됐느냐가 실제로 충분히 인간다운 삶이 작동하는지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에 너스봄은 양으로 따질 수 없는 삶의 질,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역량’이란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 또는 어떤 목표가 있다. 그걸 역량이론에서는 ‘기능’이라 부른다. 가령 잘 먹고 쉬는 것에서부터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자존감을 가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목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런 기능들이 실행 가능한 것은 아니다. ‘쉼’이란 기능은 야근과 야간 노동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데서는 실행이 어렵다. 단순히 ‘쉬고 싶다’가 아니라 실제로 야근과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역량) 속에서야 ‘쉼’을 택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을 보장하는 사회 속에서야 각 사람은 쉬는 것과 일중독 중 어느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원했을 소중한 기능을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체적 등 여러 제한 요소로 인한 역량의 박탈 때문이다.
박경석 교장이 이동권 투쟁에서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사람도 만나고,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학교에도 가고 연애도 하고 직장도 가질 것 아닙니까?”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를 무한대로 붙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람과의 만남, 친밀감, 관계 맺기’란 기능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장애인 개개인의 신체적 제한 요소뿐만 아니라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과 방치, 장애인의 표현에 대한 무시, 정치적 억압 등의 역량 박탈로 인한 것이다. 대중교통에 투입된 자원의 총량이나 평균이 아니라 ‘장애인이 실제로 이동할 수 있고 이동을 통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충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묻자는 것이 역량 접근이다.
너스봄은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이고 공공정책의 계획과 선택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량의 목록을 만들었다. ‘권리’가 이미 있는데 굳이 ‘역량’이란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너스봄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권리를 종이에 써두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가령 한국의 헌법은 기본권 보장으로 차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국가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기에 장애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종이 위의 권리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역량을 뒷받침 받지 못한 것이지, 장애인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주변 세상이 뭘 했든 안했든 간에,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의 힘이다. 반면 역량의 용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구체적인 척도를 주고자 함이다. 특히 경제적 및 물질적 권리 분석에 역량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불평등한 양의 자원을 썼다는 근거, 또 사회경제적 약자를 완전한 역량으로 이전하기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근거를 삼기 위함이다. 왜 12시간이 아니라 24시간 활동지원이 필요한지, 장애인이 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기능과 역량을 보장하기 위해 왜 그것이 필수적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너스봄은 초문화적인 연구들의 인간 공통의 경험에 대한 발견을 요약해서 이 목록을 추렸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기쁨과 고통을 겪고, 다른 사람들과 잘 관계하고 싶고, 의존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인간의 구체적 경험들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원적 필요를 찾았다. 인간 삶과 사회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기초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봤다.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구체화의 자리를 마련해둬야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느슨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논쟁될 수 있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열려 있는 목록이다.
너스봄은 어떤 역량 이하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기능할 수 없는 역량의 하한선을 설정할 수 있다고 봤기에 이런 목록을 만들었다.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가 돼야 하고 국가는 그것을 보장할 적극적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시민에게는 자기 정부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 주장의 핵심이다.
역량의 하한선을 낮출 대로 낮추고 쥐어짜자는 것이 목표가 되고, 국가는 그것을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돕고, 역량의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의 권리행사에 벌금을 때린다. 여기서 교장 선생님이 온 몸으로 울리는 종소리는 “자기 존중과 모욕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를 같이 갖자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의 “핵심적 인간 역량”(The Central Human Capabilities) 1. 생명: 조기 사망 또는 소진되기 전에 죽지 않고 인간의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
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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