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조난 신호 읽기

A: 덥다 더워.
B: 그러게. 이런 날씨에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해. 마음까지 펄펄 끓는 것 같아.
A: 날씨만 더운 게 아니라 요즘 나라 안팎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 끔찍해.
B: 가까운 사람을 잃는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큰 고통일 텐데, 그것도 증오에 찬 폭력 속에서 일어난 상실이라면 그 심정이 오죽할까.

A: 자기를 망치고 타인을 해치는 폭력이 모두 늘어나고 있어. 그런 인권침해를 법 제정이나 규범 준수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B: 사람들 마음 밭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면 권리 목록을 읊어대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어느 때보다 인권규범과 제도가 넘치는 시대인데, 사람들 마음은 팍팍하기만 한 것 같아.
A: 그 팍팍함을 오히려 조난신호로 읽으면 어떨까?
B: 조난신호?
A: 사람은 누구나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워. 게다가 지금처럼 좌절과 실패가 강요되는 사회 환경 속에서 버텨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조난신호를 보내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고대하는 게 아닐까?

B: 그런데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가마솥더위라는 날씨 예보 보다 무반응의 결과가 더 무섭다. 더위에 반응하는 감각처럼 우리에겐 고통의 신호에 반응하는 감각이 있지 않을까?
A: 그러게. 타인의 고통과 비참에 영향 받고 상처받는 감각. 뭔가 남 일 같지 않고 나도 연루돼 있다고 느끼는 감각.
B: 원하는 만큼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조난신호를 주고받고 거기에 서로 반응하는 역량도 있고.
A: 타인의 고통에 초연할 수 없고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심란한 것. 그게 우리가 가진 인간성의 징표일지 몰라.

안으로 굽는 팔

B: 하지만 그런 고통에 대한 반응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변덕스럽기 그지없어. 가만 앉아서 그런 반응을 기다릴 게 아니라 뭔가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A: 맞아. 인권에서의 관계는 인권을 옹호하는 쪽과 반인권 세력과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 같아.
B: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적대만큼 심각한 것이 내 쪽을 편애하는 차별이지.
A: 내편, 우리 편으로 동일시하기 쉬운 쪽으로 기울기 쉽지.
B: 누구에겐 펄쩍 뛰며 반응할 일을 누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원래 그런 거야’라고 체념시키거나 쉽게 수용해버려. 내 편에 관련된 일이면 책임을 묻지 않고 ‘유감이다’란 표명에 그치거나 최악의 경우엔 피해자를 비난해. 네 탓인데 누굴 원망 하냐고 말이야.
A: 부끄러워 할 쪽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수치심을 뒤집어씌우기도 하지.

B: 자원의 불평등만이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 관계 맺는 방식 자체의 불평등에도 주목해야 해. 누구에겐 쉽게 공감하고 역지사지를 하고 그 처지를 헤아리려 들어. 반면 누구에겐 야멸차게 굴거나 멸시하고 문제를 경시하고 빨리 잊으려 하고 불행마저도 경쟁의 목록으로 놓고 싸우려 들어.
A: 그러다 보면, 우리 편 또는 끼리끼리 사이에선 불평등하고 불의하다고 느끼는 일을 공적으로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게 돼. 고통의 선별작업과 취사선택이 이뤄지게 돼.

B: 공분을 느낄 수 있어야 사회적으로 영향 받는 고통, 보이는 고통이 될 수 있는 데……. 그런 공분을 형성하는 과정은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안 보이고 안 들리던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고 평소 별 불편을 모르던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조용히 점잖게 하자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
A: 다급해서 당장 무엇이든 가능한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관망할 여유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 정의란 어느 한쪽이 독점할 수 없으니까 이 과정을 시끌벅적 통과하면서 공분을 만들어내야 해.
B: 그 시끌벅적함을 기꺼이 같이 경험하려 하는 게 인권 감수성 아닐까? 공분이 무르익기 전에 단순히 눈에 띄는 제도 변화만을 선호하거나 단순한 취사선택으로 결정짓는 건 뜸을 덜 들이고 설익는 밥을 급하게 먹는 건 아닐까 싶어.

A: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동일시할 때도 있지만, 자기의 인권에 해로운 질서의 보존을 자기 안전과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야.
B: 권력은 국가권력이든 가부장제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 우리의 감정도 통제하려 들어. 권력에 좋은 것이 자신에게도 좋은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지. 누군가의 인권을 반대하고 실천을 방해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비극은 없을 거야.

A: 또 착각 중에는 고통을 평준화시키는 것도 있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 받는다는 게 고통의 맥락 없음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누구나 저마다의 문제로 아파한다고 해서 ‘고통은 다 똑같다’인 건 아니지. 부당한 고통을 강요하는 불의한 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그런 식의 생각 또한 공분을 훼방하는 것 같아.
B: 내 편하고의 동일시만이 아니라 은근히 강요된 동일시로부터의 냉정한 거리유지의 균형감각, 그게 인권의 감수성인 것 같아. 단순한 동일시에 쉽게 빠지는 게 아니라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인식하는 만남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공분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권이 자극하는 감수성

A: 우리에게 뭔가 느끼게 하고 뭔가를 지향하게 만드는 것들, 즉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은 많아. 인권이 특별히 자극하는 감수성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B: 난, 무엇보다도 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말하고 싶어. 같은 사람인데 차별적 취급을 받으면 그냥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주눅 들고 내 인간성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 같아.
A: 그럴 때 ‘법으론 평등하다’란 말을 들으면 약 올리는 것 같고 더 화가 나더라.
B: 차별적 취급이란 게 형식적인 법의 문제만이 아닌 데, ‘법으로 보장돼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하면, ‘더 이상 기대하지 마라’,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

A: 반대로 실질적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차별적인 법이나 제도를 일부러 더 만드는 경우도 있어.
B: 사람간의 위계와 등급을 나눈 대우를 능력에 대한 대우인 것처럼 위장하는 기술만 늘어가지.

A: 그런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뒷받침하는 게 자유에 대한 감수성인 것 같아. 남의 눈의 기준에 따라 남의 눈에 들려고 하다보면, 나의 자율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없고 타인의 잣대에 좌지우지되거든. 그렇게 좌지우지되다보면, 차별적 취급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는 눈에 들지 못했으니까’, ‘내가 못나서’, 이런 식의 자격지심에 빠지게 돼.
B: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과 타인을 존중하는 건 다르잖아. 대칭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 속에서 느끼는 친밀감, 나를 깎아내리거나 주눅 들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소망과 감정을 인정하고 반영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어.
A: 자유를 침해당한다는 건 ‘나에겐 힘이 없다’에 지배당하는 상태인 것 같아. 무력한 인간은 책임감이 아니라 ‘강자의 결정을 따라야 할 의무’만 강요받아. 책임감은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할 것과 좋은 정치공동체를 일구기 위한 참여를 요구해. 무력한 개인들의 사회에서의 ‘쿨(cool)함’을 유지하는 게 과연 책임 있는 자세일까?
B: 인권감수성은 내가 져야 할 책임의 속성을 숙고하고 판단하게 하는 지침인 것 같아.

인권이란 무엇인지, 우리의 감수성으로 돌아보는 인권교육인 '나를 둘러싼 인권꽃잎'. 각자 꽃잎에 소중한 것을 적고 누군가 그것을 함부로 대할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나눈다. 사진은 2007년 동자동에서 주민들과 함께 했던 교육장면

 

상상력의 힘

A: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존중할 수 없다. 날 한번 이해시켜 봐라’ 타인의 인권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인 것 같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데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야.
B: 그럴수록 인정과 겸손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타인 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불가능성,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겸손 말이야.

A: 불가능한 게 뻔해도 추구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있지.
B: 그게 뭔데?
A: 상상력의 발휘지. 내 관점이나 내가 속한 집단의 관점을 넘어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말이야.
B: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깨비감투 같은 것처럼 말하네.
A: 상상력은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면서 다양한 감정의 배치와 영향력을 바꿀 수 있어. 혐오의 모래톱을 쌓기도 하고 편견의 희생양으로 몰아붙이기도 해. 편애와 선호로 암묵적 윗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고정관념으로 상시적 아랫자리를 만들기도 해.
B: 하긴, 원래부터 부정적이기만 하고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은 없는 거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야. 우리가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변형되고 변화하는 거니까.
A: 좋은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자기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공감의 표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불리함에 대한 공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불의에 대한 억울함을 그것의 원인을 겨냥해 표출하고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 변화를 도모할 수 있어. 그런데 나쁜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시나리오 속에서 누구는 있지도 않은 소득으로 과소비를 하고, 있지도 않은 사회적 지원에 기생하고, 있지도 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힘을 남용하는 존재가 돼버려. 상황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란 걸 거부하니까 그들에 대한 감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어.
B: 상상력을 잣대로 ‘판 깨기’를 해보잔 말이네. 하긴 인권의 역사란 건 기존의 ‘판’을 그대로 두고 누구를 끼워주거나 끼어드는 게 아니라 새 판을 짜는 일이었지. 이 일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힘이 주효했어. 상상력은 타인에게 다가가고 접촉하여 연합할 수 있는 힘이 되니까.
A: 또 상상력은 ‘아직 현재가 아닌 것’의 상태를 그려보게 만들잖아. 인권은 단지 좋은 원칙과 규범의 준수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움직여서 아직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다양한 느낌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해.
B: 끊임없이 판단하고 그걸 통해 무언가를 지향하고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 인권감수성은 그런 움직임, 행동을 내포하고 있는 걸 거야.

 

 인권오름 제 495 호 [기사입력] 2016년 07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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